산과 강이 하나 된 맑고 평정한 절, 청평사
청평사(淸平寺)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위치한다. 소양호를 지나면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는 오봉산 품에 안겨 있는 청평사를 만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고려정원(高麗庭園)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청평사는 973년(광종 24) 승현(承賢) 스님이 백암선원(白岩禪院)으로 창건하였고, 1068년(문종 2) 이의(李顗)가 중건,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이자현(李資玄)이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없어졌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사찰은 문수원(文殊院)으로 이름지어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550년(명종 5) 허응 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청평사로 바꾸었다.
회전문(廻轉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단층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중앙의 1칸을 넓게 잡아 통로로 하고, 좌우에 따린 좁은 칸에는 벽을 쳐서 내부에 사천왕 등의 입상을 안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처마에는 부연(附椽)도 달지 않았다. 내부의 중앙 좌우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고, 그 상부에는 홍살문[紅箭門]처럼 살대를 가로로 배열하여 금문(禁門)임을 나타내고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이다. 하나는 일명 공주탑이라고 부르는 삼층석탑이 세워진 배경에 대한 전설처럼, 공주와 상삿뱀에 얽힌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곧 공주를 괴롭혔던 상삿뱀이 이 문으로 들어서려 했다가 하늘의 노여움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 돌아섰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고통과 생사의 세계를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유전(流轉)하는 중생들의 삶을 되돌려서(廻)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청평사의 설화 공주와 상사뱀 중국 원나라 순제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궁중을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어 감히 마음을 표하지는 못하였다. 공주에게 사랑의 고백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청년은 죽는 그 순간 맹세를 했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내 죽어서라도 그녀와 함께 하리라.” 난데없이 뱀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뱀은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사실을 안 왕과 왕후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뱀을 쫒으려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공주의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명산대찰이나 유람하겠다며 중국 천지를 다 돌아 다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려로 와서 금강산 구경 길에 올랐다가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참배하고자 하였다. 10여 년 동안을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므로 공주는 이상히 여기며 타일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못하게 하느냐? 만일 들어가기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으라.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너와 함께 가리라.” 10년 만에 홀몸이 된 공주는 구성폭포를 맞으며 몸을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과 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공주는 가사(袈裟)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비단과 바늘이 널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구성폭포)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뱀이 다시 공주의 몸을 감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새까맣게 태워 죽여 버렸다. 순제는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절에 공주탑을 세웠다고 한다.
(공주탑/삼층석탑) 일명 공주탑(公主塔)으로도 부르는 이 석탑은 청평사 못 미쳐 있는 구성폭포를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개울을 건너면 보이는, 경사가 심한 작은 고개 중턱의 바위에 오르면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환희령(歡喜嶺)이라 불렀고 이 곳을 넘어 청평사에 오갔다고 한다. 이중의 가단 위에 4층의 탑신을 올려놓았으며,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이 탑에는 원나라 공주의 애달픈 사연과 함께, 원나라 순제(順帝)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사연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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