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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十勝地 山行記

십승지란?

by 범여(梵如) 2012. 9. 7.

O 십승지란?

전란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즉, 평소에 생활하는 터전과 달리

난세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열 곳을 말하며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 보길지지, 서산대사 비결,

등등 여러 편의 예언서가 수록되어 있는 책을 보면 60곳이 넘는다고 한다,

 

O 정감록에 수록된 대표적인 십승지 열 곳

1)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堪)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의상(義相) ․ 도선(道詵) ․·무학(無學) 박자초(朴自超) ․·낭선자(浪仙子) 어무적(魚無跡) ․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 두사총(杜師聰) ․ 정북창(鄭北窓) ․

서산대사(西山大師)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등의 예언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정권에서 물러난 소론(少論) 및 남인(南人)들이 이용하였다. 아마 허균옥사(許均獄事)(서기 1618년)가

아니면 선조 6년(1573년) 정여립(鄭汝立) 사건(事件) 때 만들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朝廷)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黨爭)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 ·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 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

신흥종교의 원전(原典)으로 되기도 하였다.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 두려워하였기에 조선 왕조의  집권자(執權者)들은 

『정감록』의 소지(所持)나 유포(流布)를 범법(犯法) 행위로 간주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17년(1417) 11월과 세조(世祖) 3월과 5월에 왕이 팔도(八道) 관찰사(觀察使)에게

 명(命)하여 ?『古朝鮮秘詞(고조선비사)』, 『大辯說(대변설)』, 『朝代記(조대기)』, 『通天錄(통천록)』,

『壺中錄(호중록)』,『道詵漢都讖記(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를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진상(進上)하도록 하라.?하였다.

 

성종(成宗)은 즉위(卽位)년(1469) 12월에 왕이 여러 도(道)의 관찰사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周南逸士記(주남일사기)』『志公記(지공기)』『表訓天詞(표훈천사)』『三聖密記(삼성밀기)』

『道證記(도증기)』『地異聖母河沙良訓(지리성모하사량훈)』,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壺中錄(호중록)』『地華錄(지화록)』『明鏡數(명경수)』와 천문 ․지리․

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하유(下諭)했으니, 위에 언급한 『명경수』는

아마 술수(術數)에 관한 책이고, 『太一金鏡式(태일금경식)』은 太乙神數(태을신수)』에 관한 책(冊)이다.

『道詵讖記(도선참기)』라는 비결서가 성종대에도 실존(實存)했던 것을 확인됩니다.

 그러한 금압(禁壓) 조치에도 불구하고 『鄭鑑錄(정감록)』은, 그가 지닌 도참서(圖讖書)로서의 매력으로 인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1618년 교산(蛟山) 허균(許均)의 옥사(獄事), 1628년 류효립(柳孝立, 1579~1628) 사건, 『仁祖實錄(인조실록)』 1628년(인조 6년) 2월 7일(음력 1월 3일, 乙丑을축)에 ?초포(草浦)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계룡[산]에 도읍한다(草浦潮入, 鷄龍建都)?라는 구절(句節)이 있다.

 

『시디롬 조선왕조실록』에는 『정감록』은 1739년(영조 15) 9월 11일(음력 8월 6일, 庚辰)에 함경도(咸鏡道)에서 출현하였다.

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에 영조(英祖) 15년(1739) 5월 15일 평안도 삼등현(삼등현)에서 국경(國境)을 넘은 죄인(罪人)에 대한 기록에서 『鄭鑑錄』과 『歷年(역년)』이 등장(登場)하여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조(正祖) 6년(1782) 음력 12월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보다 43년이 앞선 것이다.

 

17세기 말(末) 숙종 17년(1691) 때 발행된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의 기록 [104책 신미(辛未) 음력 11월,

갑술(甲戌, 1694년)2월 28일]에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 1733년(영조9년) 3월 초(初)에 남원시장(南原市場)

비롯하여 4월 보름경에는 백복사(百福寺)에 있는 돌부처에  붙였고 『南師古秘訣(남사고비결)』『要覽(요람)』,

1739년 이재형(李載亨)의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1748년 이지서(李之曙) 등(等)이 청주(淸州)와

문의(文義)에서 괘서(掛書) 사건(事件), 영조(英祖) 31년(1755년) 나주(羅州)괘서사건, 정조(正祖) 6년(1782년)의

문인방(文仁邦) 역모(逆謀) 사건(事件), 1783년 해주(海州) 안치복(安致復)․안필복(安必復)도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정조 9년(1785년) 문양해(文洋海) 역모(逆謀) 사건(事件),

 이율(李瑮)과 양형(梁衡) 사건(事件) 등 사건이 관련이 있다.

 

조선 철종(哲宗) 9년(1858)년12월 9일에 쓰인 『徵秘寶藏(징비보장)』일명(一名) 『徵秘錄(징비록)』과 고종황제(高宗皇帝) 23년(1886년)음(陰) 4월에 등초(謄抄)한 『聽流堂陰晴錄(청류당음청록)』과 고종황제(高宗皇帝) 때(?) 쓰인 『鏡古(경고)』와 『其末錄(기말록)』과 병자(丙子)(1936년?) 겨울 동현정사(銅峴精舍)에서 춘봉(春峰)이 쓴 『讖書類聚(참서유취)』와 임진(壬辰)(?) 괴하(槐夏)(음력 4월)가 목고(牧皐)가 옹필(弄筆)한 『要覽(요람)』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대정(大正) 2년(1913)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에 걸쳐 아유까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한성(漢城)(지금의 서울)에서 『海左龜策(해좌구책)』과 『東國地理略論(동국지리약론)』와

 제가비결(諸家秘訣)을 모아『鄭鑑錄』102쪽을 복사(複寫)하였고,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동경(東京)의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鄭鑑錄秘訣集錄』을 서기 1923년 2월 15일에 초판(初版), 2월 22일에 재판(再版),

3월 2일에 제3판, 대정 15(1926)년 10월 5일에 4판 발행하였다. 그 뒤 김용주(金用柱)가 경성(京城)(지금의 서울)

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3월 19일에 『鄭鑑錄』을 펴냈고, 금강어부(錦江漁父) 현병주(玄丙周)가

편(編)하여 『批難鄭鑑錄』을 경성(京城)에서 서기 1923년 4월 18일에 友文館(우문관)에서 초판, 永昌書舘(영창서관)에서

 6월 10일 재판(再版) 발행하였고,  근화사(槿花社) 및  세창사관(世昌書舘)에서는 1945년 12월에 운정도인(雲汀道人)

저(著)로 발행되었다. 서기 1923년 3월 19일 초판 및 그해 3월 3일 재판(再版) 발행을 야나기타 분지로(柳田文治郞)가

 『眞本 鄭堪錄』편집(編輯) 겸(兼) 발행(發行)을 이문당(以文堂)에서 하였다.

 

 최초로 『鄭鑑錄』을 간행한 호소이 하지메는 앞서 『朝鮮文化史論(조선문화사론)』 과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朋黨․士禍의 檢討』을 목포신보(木浦新報)  주간(主幹)이었던 나가로 고지로(長野虎次郞)의 자료 지원을 받아 썻기 때문에 같이 지은 것[共著]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호소이 하지메 혼자 썼다고 한다.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서기 1921년에 발행, 자유토구사에서 기획한 『通俗朝鮮文庫(통속조선문고)』의 주무(主務)를 맡아 보면서 『정쟁(政爭)과 당쟁(黨爭)』(1914)․『閥族罪惡史(벌족죄악사)』(1919)․『국태공의 비(國太公の妣)』(1932) 등 조선의 당쟁과 정쟁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대부분 참서(讖書)는 내용상 풍수설(風水說), 음양설(陰陽說), 방위설(方位說), 상서설(祥瑞說), 운수설(運數說)의상당한 영향을 받았다.음양택학(陰陽宅學)의 양대(兩大) 조류(潮流)를 형성하는 명당(明堂)이 위치한 방향(方向)을 중시(重視)하는 좌향론(坐向論)과 산수(山水)의 형상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형국론(形局論)이다. 

 

 

십승지(十勝地) 이야기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종이 있다. 이 예언서들은 파자(破字)등으로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 또한 직설법이 아닌 우회적으로 하여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책을 쓴 저자와 시기가 불분명한데 당시에는 이러한 책들이 나라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것을 금한 금서(禁書)였기 때문이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에 따라 실수든 의도적이든 내용을 누락 삭제하거나 첨가하여보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책이라도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또 산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피난과 자손 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는 좋은 곳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이러한 십승지가 있다고 하는 곳은 다음 열 곳이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

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

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다.

 

십승지를 가다 - 전북 남원 운봉

 아직도 우리에겐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땅이 남아 있다. 이른바 '정감록' 에서 말하는 십승지 (十勝地) 이다

.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가난과 질병이 미치지 않는 땅' 으로 알려진 십승지는 '새로운 시대' 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가슴에 '꿈에도 그리는 고향' 으로 전승돼 오고 있다. IMF시대를 맞아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미래의 땅,

십승지의 지리적 특성과 주변의 볼거리 등을 소개한다.

지리산 주변에는 구례나 남원, 경남의 함양.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다.

 모두가 한폭의 그림같은 마을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감록' 에 따르면 이 도시들보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인 운봉 (雲峰) 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운봉은 오늘날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그 주변을 가리킨다. 이곳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며

 가히 오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 이라고 했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북에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경계를 이룬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한다.

가령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려면 이 두 재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

해발 평균 450m, 서울 남산의 두배 높이에 자리한 운봉은 그런 점에서 '하늘의 요새' 라고 하겠다.

고려말 남해안을 날뛰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했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후

빨치산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문병태 (51.운봉읍진흥계장) 씨는 자랑한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경우 대개는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인월로 빠져나와 곧장 뱀사골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운봉은 등반객에게도 낯선 곳이다. 인월에서 운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황산과 덕두산 자락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큼 광대한 평야가 전개된다.

 

황산대첩비각.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을 복원했다.80년대 들어 목축업과 고랭지 작물이 일부 시작됐지만 여전히 이곳의

주산물은 쌀이다. 지리산 자락의 풍부한 물과 맑은 공기가 가을이면 들녘을 황금벌판으로 물들인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식량이 풍족하면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 여기에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살기 (殺氣) 를 벗고 있어 인물 역시 보장한다.

발복의 시기는 북으로 흐르는 하천 (광천) 이 운을 받는 지금부터다.

그래서 십승지는 제때에 들어가야 복을 누린다고 했다.

 

십승지를 가다 - 경북 봉화군 춘양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떠나려니 생각나네/햇밥 고기 생각나네/울고 왔던 억지 춘양/떠나려니 생각나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전래하는 '억지 춘양' 이라는 속요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서민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 줄 모르고 산간오지라고 하여 오기를

두려워 한다면 그건 순전히 주는 복을 차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조선조가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아래 이곳 각화사에 사고 (史庫) 를 지은 것만 보아도 춘양이
지닌 지리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 춘양은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건너가는 과협처 (기를 모으는 곳)에
도래기재를 만들면서 남향받이로 생긴 마을이다.


지금은 영동선 기차가 면소재지를 지나고 한 여름 피서객이 몰려드는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끼고 있어 벽지라는 인상은 많이 가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춘양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숨기고 있다.

특히 마을 어구이자 면을 관통하는 운곡천의 수구 (물 빠져나가는 곳)에 삼척봉이란 둥근 산이

마을을 가리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돼 있다.

'정감록' 은 물론 여타 비결서도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춘양을 반드시 꼽고 있다.

춘양을 두고 '소라고기 (召羅古基)' 라 했고 이는 옛 부족국가시절에 이미 이곳에 소라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춘양면 일대가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할 수 있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또 전란을 피하기 좋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들과 서애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춘양면은 3개 지구로 나눌 수 있다. 도래기재 밑의 서벽리 일대와 중간 마을격인 도심리 그리고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가 그것이다. 이들 3개 지역은 모두 외부와 차단된 듯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쌀과 밭작물이 주업이었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사과나무를 심어 '경북 능금' 의 주산지로 바뀌었다.



춘양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로 불리는 춘양목 (春陽木) 의 집산지로,
또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에서
캐내는 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간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흔히 봄 춘 (春) 자를 파자 (破字) 하면 삼인일 (三人日) 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보면 춘양은 적어도
세번은 좋은
시절을 맞게 돼 있다. 단순히 피난처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또 한번의 영화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볼거리·숙박시설

▶각화사와 사고터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와 중창한 각화사.
   절 주변에는 옛 춘양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두내약수 : 봉화군내에서는 물야면의 오전약수와 함께 위장병 등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다.
▶와선정 : 학산리 소재. 서울 선비 5명이 병자호란때 피란와 지내던 곳

 십승지를 가다 - 충남 공주시 유구·마곡

충남 공주시 유구읍과 사곡면 경계에 상원계곡이 있다. 공주 일대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다.

이곳에서 50년을 살아온 閔씨 할머니 (67.푸른상회 주인) 의 말. "6.25가 나기 전 강원도 삼척군 가곡면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다.정감록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가솔을 이끌고 오셨다.

그런데 정작 이곳에 와서 6.25를 겪었다. 공비들 등쌀에 죽을 고생을 했다."

한국전쟁 후 할머니는 서울에서 피난온 집안과 결혼, 이곳에 정착했고 그의 부모들은 고향인

강원도로 돌아가 지금은 모두 타계했다고 한다.


閔 할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라 현재 공주시유구읍 인구의 70%가 외지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대한제국 말에서
일제하 그리고 한국동란 전후에 십승지로 소문난 이 지역에 정착한 비결파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의 후손들이다.

당시 외지인으로 이곳에 정착한 비결파들은 집집마다 직조기를 들여놓고 명주와 비단을 생산, 생계를 유지했다.
60, 70년대 공주군 일대의 유일한 제조업이었던 직조공장도 80년대 이후 중국산 직물에 밀려 이제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세태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업이나 고랭지 채소.약초재배로 전업했다.

유구.마곡은 공주에서 천안으로 올라가는 대로변에서 비껴나 있다.

이 지역은 금강 이북의 이른바 차령산맥 (금북정맥) 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충남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산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진산 (鎭山) 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성산은 일찍이 홍길동이 웅거하던 산이다.


또 마곡은 마 (麻) 씨라는 큰 도적의 산채가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이름을 얻었고 이곳 마곡사는 김구선생이
인천감옥을 탈옥해 숨어있던 곳이다. 이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지만 칠갑산에서 북으로 흐르는 대
룡천과 유구천이 만나 평야를 이루니 곧 유구읍에서 신풍면에 이르는 벌판이다.
이 평야는 최소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특히 유구천의 수구가 꽉 막혀 있어 풍수적으로도 길지에 해당한다.

유구천이 금강에 이르기 전에 다시 마곡사에서 흘러오는 마곡천과 합하는 곳이 사곡면 입구의 호계리다.
이곳은 유구에 비해 평야가 넓지 않지만 배후에 철승산과 무성산을 두고 있어 유사시에 피란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호계리를 벗어난 유구천은 우성면과 경계인 통천포에 이르러 또 한번 수구를 자물쇠로 채우듯 닫았다.
그런 탓인지 주위에는 이른바 명당이라고 하는 동네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대표적으로 화월리의 명당골을 들 수 있다.

금강변 곰나루의 취미산과 채죽산에 가려져 피란처로 알려진 유구와 마곡은 아산시와 예산.서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피란지라는 명성은 잃었지만 전원도시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그 꿈을
키워주기에 적합한 곳으로 남아있다.

* 볼거리·숙박시설

▶마곡사 : 사곡면운암리.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함. 대광보전은 보물 802호.
▶충효사 : 단종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 정분과 그의 아들 정지산을 제사하는 사당.
   정분은 단종복위 사건에 관련돼 전남 광양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공주시 : 무령왕릉이나 공주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고 계룡산도 둘러볼 수 있다

십승지를 가다 - 경북 예천 용문면 금당실

'정감록' 자체에서 내린 십승지의 정의는 "세상에서 피신하기 가장 좋은 땅" 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신' 이란 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내우외환 (內憂外患) , 즉 외적의 침입은 물론 국내의 쿠데타 등 정변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십승지라고 하여 모두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단서조항이 붙기도 한다. 예컨대 예천 (醴泉) 금당실 (金塘室) 의 경우,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고 했다.

예천 금당실은 오늘날 경북 예천군 용문면 (龍門面) 상금곡리 (上金谷里) 를 가리킨다.
먼저 예천군을 살펴보면 이곳은 소백산 줄기가 북쪽을 막고 낙동강이 남쪽을 경계하는 천연의 요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낙동강 주변의 구릉을 따라 점촌에서 안동을 잇는 4차선의 34번 국도가 예천군을
동서로 횡단하고 영주와 군위를 잇는 28번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게 됐다.


여기에다 공항이 생기고 충북 단양을 잇는 저수령이 개통되면서 군청

소재지인 예천은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 비결서가 말하는 '임금의 수레' 란

이같은 교통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예천읍의 배후에 자리한 용문면 금당실은 결코 피란지가 아니다.

예천읍에서 용문면은 승용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지형을 보면 분명 옛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먼저 금당실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예천읍에서 두어 고개 넘자마자

눈앞에 전개되는 광활한 대지에 깜작 놀라게 마련이다.

 
"예천군은 물론 경북 전체에서도 면 단위로 우리 동네만큼 넓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상수원 보호구역이 되다 보니 공기도 맑아 사람살기는 최적의 상태 "라고 이곳 토박이인 이승희 (39) 씨는 자랑한다.
이곳 금당과 이웃한 맛질 (대저.하학.능천리) 이란 동네를 합하면 서울의 반은 된다는 것이 이 지방에 전해오는 말.
다만 서울과 비교해 부족한 것이 한강 같은 큰 물이 가까이 없다는 점이다.


용문면 인구는 2천여명. 이 중 반 가까운 인구 (5백戶)가 금당실에 모여산다.

소백산이 저수령을 넘어 월악산으로 가는 중에 한가지가 남으로 내려와 매봉이

되고 여기서 다시 네개의 봉우리를 만들고 다섯번째 봉이 금당실의 주산이 됐다.
오미봉 (五美峰) 이 그것이다. 오미봉은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 금당 (金塘) 은

바로 이 연꽃이 피는 연못 자리다. 그래서 이곳 지형을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 물 위에 뜬 연꽃) 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때 이여송장군이 이곳 지세를 보고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오미봉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인물이 별로 안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판.검사는 다른 면에 비해 많이 배출한다" 고 장봉규 (73) 씨는 귀띔한다.

용문은 쌀이 남아 돈다. 또 '예천마늘' 의 주산지다. 이처럼 '가난' 을 모르는데다

인물까지 배출하는 곳이다. 뜻있는 사람은 후손을 위해 아직도 둥지를 틀 만한 곳이다.




* 볼 거 리

▶용문사 : 용문면 내지동. 신라 경문왕때 (810년) 두운선사가 개창. 용문면은 1914년 이 절 이름을 따서 붙였다.
보물 제145호인 대장전과 윤장대 (보물 제684호. 대장경판을 걸어놓고 읽는 일종의 독서대) 는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예천권씨 종가 및 별당 : 용문면 죽림리. 국가 지정문화재. 초간 (草澗) 권문해의 '대동군부운옥' 책판과 '초간일기' 등이 전한다.
▶초간정 : 용문면 죽림리. 송림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룸

 

십승지를 가다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비결서의 내용은 본래 '비결' 이란 말이 상징하듯 그 해석을 둘러싸고 상당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정감록' 에서 이심은 십승지의 다섯번째로 '단춘 (丹春)' 을 꼽았다.

이어 같은 책에서 이연은 '단춘' 이란 말 대신 '영월 정동쪽 상류가 난을 피할 만하다' 고 했다.



앞의 '단춘' 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개 충북 단양 (丹陽) 읍과 영춘 (永春) 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연이 말한 '영월 정동쪽' 이 어디냐를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혹자는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인 상동읍 직동리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혹자는 충북 영춘면 의풍리 (儀豊里)가 그곳이라고 한다.

상동읍 직동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영춘면 의풍리를 살펴보자.


영춘면 의풍리는 충북 단양군 소속이다. 단양이란 말은 선가 (仙家)에서 말하는

연단조양 (煉丹調陽)에서 비롯됐다. 백두대간이 낳은 오대산 줄기와

소백산 줄기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곳이 단양이다.

기암괴석이 주종을 이루는 단양팔경이 말해주듯 이곳은 태고의 신비가 그대로 숨쉬고 있다.

오늘날 보아도 그러한데 옛 사람은 이곳에서 영생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양군에서 영춘면은 '육지 속의 섬' 과 같은 곳이었다.

삼면이 남한강에 둘러싸였고 남동쪽은 소백산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에 각각 다리가 건설돼 단양읍과 영월로 곧바로 통한다.

영춘면 소재지에서 남한강의 북벽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대리가 나온다.

이곳 역시 북벽이란 절벽을 앞에 두고 있어 비결파들이 일찍부터 십승지로 알고 삶의 둥지를 튼 곳이다.

동대리에서 이른바 99굽이의 대관령보다 더 험하다는 157굽이의 베틀재를 넘으면 의풍리가 나온다.

경북·강원·충북의 3도 경계지대다. 면적은 지리산 운봉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넘어가면서 만든 평지라는 점에서는 지리적 성격이 같다.


금년에 일흔이라고 나이를 밝힌 박문찬씨는 깜짝 놀랄 만큼 젊어 보였다.

해맑은 얼굴이 누가 보아도 50대 후반이라고 할 만하다.

"해방 전 형님을 따라 이곳에 왔다" 는 그의 고향은 평북 창성군 청산면이다.
1남 5녀를 둔 박씨는 서슴없이 "물좋고 산 좋아 제 한몸 살기는 매우 좋은 곳" 이라고 자랑한다.

다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 걱정이었다고. 한때 200호가 넘던 마을이 지금은 90호 정도만 남았다.

주산물은 고추와 대추다.쌀농사도 자급이 될 만큼 하고 있다.

오리 밖에 김삿갓묘소가 있어 영월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자, 의풍도 그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여느 동리와는 달리 이곳 주민들은 그들의 고장이 십승지임을 드러내 놓고 자랑한다.

96년 10월 마을 한가운데 '마을자랑비' 를 세웠다. '깨끗한 물, 맑은 공기를 보존하자' 는 결의가 대단하다.


*  볼거 리 :

▶온달성과 온달동굴 : 하리 구인사 입구. 고구려 온달장군의 유적.
▶구인사 : 천태종 본산
▶북벽 : 남한강이 감고 도는 절벽으로 절경을 이룸.
▶구봉팔문 : 소백산 연화봉 줄기
▶영춘향교 : 상리. 정조15년 (1659)에 건립

 

십승지를 가다 - 경북 상주 우복동

<"허어, 요즘 우복동 찾는 사람 없는데 보통 사람 아니구먼. 예전엔 우리 집이 우복동 찾는 사람으로 가득했지."


경북 상주(尙州)시 화북 (化北) 면 상오리,

속칭 '높은다리' 라는 동네에 사는 김중만 (65) 씨의 말이다.

그는 이어 뒷산을 가리키며 "저게 장각 (長角) 이고

동네 이름도 장각동이니 쇠뿔인 셈이지. 그러니 우리 동네가 당연히

소의 배에 해당하고 화북시장 터는 소의 엉덩이" 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옆에 있던 김태진 (65) 씨는 "화북면 7개 동리가

저마다 우복동이라고 한다" 며 말을 거들었다.


우복동 (牛腹洞) 이란 예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해오는 피란지의 이름으로

상주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는 곳이다.

그 우복동이 상주에서도 속리산에 둘러싸여 있는 화북면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화북면은 대부분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가자면 괴산에서 선유동 계곡을 지나 늘티를 넘거나,

아니면 충북 청천면에서 용화동을 거쳐 밤재를 넘는 방법이 있다.

남쪽 상주시에서 들어가는 길은 갈령재를 넘어야 한다.

동편 문경쪽에서는 가은을 지나 농암의 쌍룡계곡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전부 도로가 포장돼 있어 접근이 매우 쉽지만 예전엔 깊고 깊은 산골이 분명하다.

화북면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용유리와 장암 (壯岩) 지구. 이곳은 후백제의 견훤이 쌓은 견훤산성에서

현재 '우복동 유적비' 가 있는 병천의 입구까지가 해당한다. 청화산 (靑華山) 이

진산 (鎭山) 이고 서쪽에 속리산, 동편에는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도장산 (道藏山) ,

또 청화산이 남쪽으로 뻗어와 이곳의 앞산이 된 승무산 (僧舞山) 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 모양은 마치 속세를 떠난 유 (儒).불 (佛).선 (仙) 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세다.



화산 (華山) 마을 지구. 이곳은 청화산과 시루봉 사이에 펼쳐진 협곡이다.

지세가 매우 핍착하지만 역시 복지 (福地) 로 불린다.지금도 비결파의 후손들이 서너집 남아 있다.


용화 (龍華) 지구. 지도상에 문장대온천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4대째 이곳에 산다는 장병균 (57) 씨는 "용유동보다는 용화가 우복동" 이라고

침이 마르게 자랑한다. "용유동은 골이 좁아 사람 살 곳이 못된다" 고 했다.

이곳은 온천개발을 두고 경북과 충북이 법정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미륵불의 도량인 법주사 뒤편에 자리한 용화는 어쩌면 미륵불이 불법을 설하는

용화세계, 그곳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찍이 전국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팔고 땅팔아 우복동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큰 난리' 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가산만 탕진했다.

그래서 이곳 '장바우 (壯岩里)' 를 두고 '망 (亡) 바우' 라는 말까지 생겼다.

 땅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들고 까불고 있으니 어디가 '무릉도원' 일까.

속리산 = 최영주 편집위원

* 볼 거 리

▶견훤산성 : 장암리. 후백제의 견훤이 쌓은 산성
▶속리산 문장대 : 국립공원 속리산 화북지구 관리소에서 등산 가능
▶동천 (洞天) 암 휘호 : 용유리. 조선조의 명필 양사언이 썼다고 전함
▶원적사 : 원효대사가 창건. 지금은 선원이다
▶7층석탑 : 일명 장각사지 석탑.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
▶의병장 이강년선생 묘소 : 늘재
▶청화산과 백악산 등산도 일품

십승지를 가다 - 경북 영주시 풍기 금계동

백산 천문대 남쪽, 경북 영주 (榮州)시  풍기 (豊基)읍 삼가리 한 언덕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는 金유홍 (47) 씨 -

.그는 서슴없이 집안 내력을 털어놨다.

"원래 선대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셨다. 1백30년전에 비결을 보고 이곳으로 오셨다.
현재 4대째 이곳에 산다.

아버님께서 이사 나가면 굶어 죽는다고 하셨다.

金씨는 비결의 진의는 잘 모르지만 "굳이 아버님의 말씀을 어기기 싫어 지금껏 이곳에서 산다" 고 했다.
또 금계동의 황영욱 (61) 씨는 조부의 고향이 평양이라고 했다. 달밭골에 사는 김만정 (50) 씨 역시 해방되던 해에
조부가 황해도 곡산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풍기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 '작은 서울' 이라고 한다. 이곳 토박이보다 전국 각처에서

비결의 가르침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풍기의 토산품인 인삼과 직조물은 이렇게 모여든 외지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명성을 얻고 있다.


과연 비결서는 풍기를 두고 뭐라 했는가.

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다.

남사고의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서는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다.

이후 여러 비결서들은 이 두 이론을 확대.재생산해 내는데 불과했다.

풍기에 모여든 비결파들은 금계동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의 원칙에는 수긍한다.


첫째는 돌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가지는 모두 죽령과 관계있는 조건들이다.

서울과 통하는 영남대로의 높은 죽령을 옆에 끼고 있는 풍기는 자연히 바람이 세고

개천 (남원천)에는 돌이 많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령이 보인다면 곧 큰길과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재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 (任實)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 는 금계포란형에서 비롯됐다.


임실은 임신 (妊娠) 과 통한다. 그런 점에서 더욱 임실이 유력한 십승지로 꼽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지역에는 닭의 벼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2개 있다.

암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다. 이 봉우리는 욱금동과 금계동의 경계가 되고 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동네가 금계촌이라고 다툰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면 전란과 질병,가뭄이나 홍수,

굶주림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비로사의 성공스님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로사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고 했다.


비로사는 임실이나 욱금동보다 산속에 위치한다. 그런데도 전란의 참화를 겪었다.

앞서 김유홍씨도 "부친이 6.25때 고생했다" 고 말했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 (현재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읍면이었다.

인삼과 직조업의 번성으로 군의 재정을 풍기가 맡았다. 그러나 이젠 영주시가 더 커졌다.

풍기는 영주시의 배후에 있는 전원도시로 변했다. 중앙고속국도가

개통되는 2000년대 초에는 죽령마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풍

기는 세상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아야 한다. 아마 십승지 제1의 영예는

이때쯤 전설 속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볼거리

▶희방사 : 신라 선덕여왕 12년 두운대사 창건. 월인석보 판본 등 문화재보유
▶비로사 : 진공대사비와 석조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
▶풍기향교 : 조선조 세종14년 창건
▶소수서원 :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조선 중종37년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 등산

 

십승지를 가다 - 전북 무주군 무풍면

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 (茂朱) 구천동은 오지 (奧地) 의 대명사다.

세상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 라고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무주다.

97년 동계유니버사드 대회가 열려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보다 앞서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바뀌었다.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 (茂豊面) 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예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풍면으로 가려면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나제통문 (羅濟通門) 을 통과해야 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대에 설치된 관문을 뜻한다.

 

무주읍에서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뚫렸다.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고대에 개설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지만,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10리 계곡을 만나고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대덕산 (大德山) 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오는 무풍천이 만나는 사이가 들판이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고 너른 들판은 한눈에 이곳의 인심을 대변해 준다. "살기 좋으니 인심이

온후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다 예부터 학문을 숭상해 예절 또한 군내에서는 으뜸이지요. " 유한철 (58)

부면장의 자랑이다.

그러나 한때 만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지금은 3천명이 채 안된다고 하니, 이곳 역시 이농현상의 바람을 피하지는 못한 셈이다.
들이 넓어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주로 담배와 고랭지 채소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무풍면의 중심은 옛 무풍현의 관청이 있던 현리다.
이곳은 삼도봉에서 뻗어온 삿갓봉이 마을의 주산이다. 티없이 맑은 산이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앞산인 무봉산 (舞鳳山) 은 무풍 (茂豊 혹은 舞豊) 이란 현 이름을 만들어준 산이다.
현리 새터에서 무봉산을 바라보면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한 마리 큰 새가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를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무봉산을 낳은 산이 대덕산이다. 대덕산의 청룡 줄기가 무봉산을 낳고 백호 줄기가 시루봉을 만들었다.
그 사이가 증산리 석항동네다.

이곳에서 황인성 전총리와 김광수 자민련부총재가 태어났다.
한 마을에서 비슷한 때에 두 인물을 배출하니 동넷사람들은 지기 (地氣) 의 덕이라고 돌린다.
무풍은 단순한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다.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 고 했듯이 인물의 고장이다.
또 이곳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서부 경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 까닭에 여느 곳과 달리 비결파들이 즐겨 찾아 들지는 않았다.
무주 = 최영주 편집위원  

*볼거리


▶백산제 : 현리.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 부부의 초상화 (영정) 를 봉안.
▶삼도봉 등산 : 충청.경상.전라 삼도의 경계에 위치. 인근의 민주지산과 함께 등산객이 즐겨 찾는 산.
▶무주 구천동 : 덕유산 국립공원 내. 무주리조트 등 휴양시설 다수.

* 숙박시설

: 무풍면내에는 여관시설이 없음. 인근 무주 구천동에서 숙박 가능.

 

십승지를 가다 - 전북 부안 변산 호암(병바위)

변산 (邊山) 으로 가는 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악의 나라 한반도에 이렇게 넒은 평야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그 첫째다.

이어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 의 첫 무대가 이곳 백산에서 펼쳐지는 이유를 반추하게 된다.

곡창지대와 혁명의 요람 - .우리 역사는 이 역설의 현장을 이곳에 펼쳐놓고 있다.

김제.만경평야의 서쪽 끝이 변산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를 읽어보자.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 쑥 들어갔다.

서쪽.남쪽.북쪽은 모두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수많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 자칫 배수진을 처야 할 외통수의 땅이지만 비결은 이런 "변산의 호암 (壺岩 = 병바위) 아래" 가 십승지라 했다.
 '남사고비결' 은 여기에다 단서조항을 넣고 있다. "탐라 (제주)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그렇지 않다.
" 변산에서 호암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발음만 듣고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은 보안 (保安) 면 호암 (虎岩) 리다.
호랑이와 호리병은 거리가 너무 멀다.

그래서 우선 바위부터 찾는다. 우금산성에 우금바위가 있다. 우금바위 동남편이 개암사 계곡이다.
이곳은 너무 좁고 동쪽 김제평야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군부대의 초소로 제격이다. 우금산성 북쪽,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으면 쇠뿔바위을 만나게 된다.

변산에서 가장 높다는 의상봉을 왼쪽에 끼고 있는 쇠뿔바위, 청림리의 주산 (主山) 이다. 심상치 않다.
당연히 우공 (牛公) 이 먹을 식량 (잡초더미) 이 있어야 한다. 남쪽에 자그마한 노적봉이 있고 동리 이름도 노적이다.

고광충 (57) 씨는 "부안 고을에서 첫 손꼽는 마을이 노적" 이라고 한다. 진사 급제자가 가장 많았고
유명 부자는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뒷말은 이곳이 십승지가 아님을 전한다. "6.25때 수복이 가장 늦었고 궁궐같은 기와집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굴바위' 를 끼고 있는 보안면 우동 (牛洞) 리다.

이곳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성계골과 실학의 문을 연 반계 유형원이 경국 (經國) 의
꿈을 펼치던 곳. 이 마을 북쪽에 옥녀봉이 있고 그 줄기 끝이 굴바위다. 우동제방에서 바라보면 굴바위 입구의 모양이 영낙없는 호리병 모양이다. 우동리는 전형적인 삼태기형 지형이다. 앞이 터진 것 같으나 천마산이 막고 있다. 가히 욕심없이 살 수 있는 전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서조항, 변산과 탐라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제주도가 '남의 땅이 된다' 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땅을 두고 시간과 역사의 골짜기를 더듬는 것은 그래서 늘 흥분을 안겨준다.

변산 = 최영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