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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十勝地 山行記

풍기 십승지 제1구간 - 죽령에서 길목재까지

by 범여(梵如) 2015. 9. 14.

☞ 산행일시: 2015년 9월13일

산행날씨: 맑고 청명한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16 km + 어프로치 3.5km / 8시간1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죽령-묘지-폐헬기장-약수터-폐헬기장-1,291봉(흰봉산 갈림길)-삼형제봉-조망바위

              안부-전망바위-도솔봉-헬기장-1,185봉-안부-묘적봉-절골갈림길-묘적령(자구지맥 분기점)

              무명봉-안부-폐헬기장-이동통신 중계탑-고항치-옥녀봉-886봉-임도-수용골 갈림길

              장군봉-길목재-수용골-솔향기마을-와룡골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 예천군 상리면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세월 참 빠르다... 오늘이 벌써 음력 8월 초하루... 가야할 산은 많은데 세월은 저만치 도망가고

이젠 내 머리도 백발로 변해가고 눈은 침침하니 아~~~ 제행

무상(諸行無常)이련가

한 동안 산행을 하면서 혼자서 꿈꿔왔던 十勝支地산행을 한번 해보려고 자료를 준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봉착한다.

 

첫째는 자료가 그리 많지 않고, 둘째는 대다수 선답자들이 산행 지도와는 다르게 자의적

해석으로 산행을 많이한 바람에 자료가 큰 도움이 안되었고, 셋째는 산에 오르질 않고

마을과 유적지 탐방을 하면서 둘레길 개념으로 접근하면서 문화유적 탐방기 쓰듯이 한

자료가 대부분이라 정통 산꾼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아 참으로 고민이 많다

그래서 혼자하기는 좀 무리일듯 싶어서 올해는 아직 걷지 않았던 문수지맥이나 비슬지맥을

혼자 끝내고 내년 봄쯤 자료를 완벽히 정리한 다음에 걸을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남은

응어리가 늘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 무작정 떠나보기로 하고 그 첫번째 구간을 풍기로

잡고 토욜 저녁 늦은 시간에 동서울 터미널에서 영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정감록에 기록된 10곳의 은신처 십승지(十勝地)

  • 십승지(十勝地)란,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이라는 뜻이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쟁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란?

전란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즉, 평소에 생활하는 터전과 달리

난세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열 곳을 말하며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 보길지지, 서산대사 비결,

등등 여러 편의 예언서가 수록되어 있는 책을 보면 60곳이 넘는다고 한다,

 

O 정감록에 수록된 대표적인 십승지 열 곳

1)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堪)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의상(義相) ․ 도선(道詵) ․·무학(無學) 박자초(朴自超) ․·낭선자(浪仙子) 어무적(魚無跡) ․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 두사총(杜師聰) ․ 정북창(鄭北窓) ․

서산대사(西山大師)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등의 예언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정권에서 물러난 소론(少論) 및 남인(南人)들이 이용하였다. 아마 허균옥사(許均獄事)(서기 1618년)가

아니면 선조 6년(1573년) 정여립(鄭汝立) 사건(事件) 때 만들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풍기 십승지 구간지도 

20시 05분발 동서울→영주행 버스표

토요일 사무실에서 조금 일찍 들어와서 서둘러 베낭을 챙겨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영주행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영주 버스 터미널이다 (22:40)

영주라는 도시는 도농 복합도시라 그런지 촌티가 많이나는 逆으로 말하면 고향에 온 느낌이다

촌티가 줄줄 흐르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기사에게 찜질방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 이런 젠장맞을 자기 동네에서 택시 영업하는 놈이

찜질방 위치도 모르다니... 조금을 더 걸어가다가 가계문을 닫으려는 빵집 주인에게

찜질방 위치를 물으니 참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버스 터미널에서 풍기방향으로 7~8분정도 걸어가면 오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10시방향으로 가면 영주 재래식 시장이 나오고 시장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조금가면

스카이타운이라는 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 저층부는 상가이고 고층부는 아파트인데

이 아파트에 스카이 찜질방이 있다... 터미널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15분정도 걸렸다

영주 스카이 찜질방(23:00~05:00)

생각보다 찜질방의 규모는 크고 시설은 좋으나 요금은 비싼 편이다 (10,000원)

사람이 많지 않아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으나 찜질방이 너무 추워서 몇번이나

깬 다음에 05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찜질방을 나선다

찜질방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 어림지라는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해결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죽령으로 향하는데 구불구불한 죽령 옛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의 공기는 참으로 상쾌하다

도로 아래에 깔려있는 구름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할 만큼 환상적이다

죽령 정상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니 엄청난 寒氣가 몰려와 서둘러 바람막이 옷을 입는다

죽령(竹嶺:689m:06:10)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로

도솔봉(兜率峰:1,314m)·연화봉(蓮花峰:1,394m)·국망봉(國望峰: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교통로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되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에 이 고개를 사람이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비교적 높고 험한 고개이므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걸어다녀야 했던 시절에는 이 고개에

도둑떼가 들끓었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도둑떼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도둑소굴로 숨어

들어 망을 보다가 사람들에게 신호로 "다자구야"라고 외쳐서 도둑떼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은 매년 대강면 용부원리의 산신당에 모여 다자구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중앙선이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경상북도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희방사·죽죽사가 있으며, 중앙선을 따라 중앙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죽령 영남제일문

죽령은 추풍령과 문경새재(조령)와 더불어 영남의 3대관문이다.

죽령은 하늘재보다 2년여 늦게 신라 아달왕 5년(158년)에 개통하여 1900년이나 된 오래된

길로서 죽령터널이 개통돼기전에는 5번국도로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추풍령과 더불어

대동맥 구실을 했으나 지금은 관광도로로 그기능이 축소돼었다.

이 고개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개통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의 시원지 영남지방의

양반과 생원, 진사대감의 행차길이었고 영남에서 서울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조령을 넘으면 관직의 명이 길지않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이화령과 죽령을 많이 넘었다하며 죽령도 대나무같이 미끄러져 과거급제가

어렵다는 설이있으나 대쪽같이 곧은 절개와 신의를 생각하며 많이 넘었다는 설도있다.

지금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이 원래는 안동도호부 남문루에 있었는데 상원사로 옮겨갈때

이곳에서 멈춰섰다는 전설이 있고 죽령에는 대나무가 없는데 신라 마지막태자 마의가 죽장을 꽂아

죽령이라고 한다는 전설도 있다.

죽령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대나무가 없기는 옛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 조목 선생은 대강면 장림리에서 죽령을 넘으면서

"장림 무장림 죽령 무죽령"이라 둘다 숲과 대나무가 없음을 읊은 시이다.

옛날에 김유신 장군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한다.

또 삼국유사는 효소왕 대 죽지랑 이란 대목에 진덕여왕대(647-653)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춘천)가 되어 춘천으로 가는데 나라에 병란이 있어 기마병 3천으로 호송하게 됐다.
도둑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니 한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는데 술종공이 보고서 잘생긴 모습과 하는 일을

칭찬했고 거사 또한 공의 늠름한 모습과 위세 당당함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된다.

술종공이 춘천에 부임한지 한 달후 꿈에 방안에 거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꿈이 깨어서 부인에게 물으니

똑같은 꿈을 꾸어서 괴상히 여기고 이틑날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니 죽령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지 몇일 된다 하여 날짜를 따져 보니 꿈을 꾸던날 죽은 것이다.
술종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다" 라 하고 군사를 보내어 죽령 북쪽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불을 만들어 세우고 사당에 미륵불을 봉안했다.

(죽죽사의 불상을 태소백권 문화연구회에서 찾아 학계에 큰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대한

기본 기초 조사가 나왔으나 학계고증은 되지 않았다)

그 후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이 죽지였다. 김유신 장군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한다

나를 태우고 온 택시는 다시 영주로 되돌아 간다

영남 제일문 옆 쪽에 죽령 옛길 안내판과 八峰救國祭壇記念碑가 있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죽령의 유래

소백산 허리, 구름도 쉬어 간다는 아흔아홉굽이 죽령은 영남과 기호를 넘나드는 길목 가운데서도

가장 유서깊고 이름난 중요한 관문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왕 5년 (서기158년)에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개설하였다 ,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으며, 한 때는 고구려 국경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 길이었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죽령 옛길 안내 에서-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日出은 시작되고...

우측의 무명묘지를 빙 돌아서 도솔봉으로 향한다

급경사의 오르막은 시작되고...

백두대간. 북.남진을 포함해 이 구간을 3번째 걷는 탓인지 참으로 정겹게 느껴진다

이정 구조목도 다시 찾는 산꾼 범여를 반긴다

날씨 탓인가... 이곳은 산수국이 아직도 필 생각을 않는다

폐헬기장(06:35)

산괴불주머니

안부(06:50)

이정표 (죽령1.3km → 도솔봉4.7km ←)가 있고 조그만 돌탑 하나가 있는데

그 아래는 대리석으로 만든 추모비가 누워 있으면 좌측 아래는 약수터가 보인다

안부에 있는 추모비

추모비 아래에 있는 약수터로 내려가니 9월 5일에 검사를 했는데

식수로 적합하다고 표기가 되어 있지만 왠지 찜찜하여 그냥 지나친다

폐헬기장(07:00)

투구꽃

천남성

폐헬기장 등로 입구 바닥에는 37사단에서 헬기장을 건설한 명단을 적어놨다

폐헬기장(07:10)

3번째 걷는 길이라 눈에 많이 익어 있어 그런지 상당히 정겹다

호젓한 산죽길도 다시 밟아보고...

똑같은 위치에 서 있는 이정표와 구조목의 거리 표시가 0.5km가 차이나는데

대한민국 民草들의 祿을 먹고사는 국공파가 하는 짓거리... 참으로 한심하다

조망바위(07:25)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가야할 삼형제봉의 모습

흰봉산 갈림길(07:35)

이곳에서 직진으로 오르면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 뒷산인 흰봉산으로 오르는

길이고 도솔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과 십승지길은 좌측으로 꺽어져서 진행을 한다

흰봉산 오르는 길은 출입금지 구역이란다

1291m봉(07:47)

동자꽃도 이곳은 이제사 피기 시작한다

1291m봉에서 급경사로 내려서는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나뭇가지 사이로 흰봉산의 모습이 보인다

안부(07:50)

다시 삼형제봉을 향한 오르막은 시작되고...

성질급한 단풍나무 한 그루는 벌써 가을을 준비한다

삼형제봉(三兄弟峰:1,261m:08:00)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 3개가

나란히 있어 삼형제봉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지명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길이 없다

정상에 삼형제봉에 대한 아무것도 확인할 길이 없다...2013년 대충산사 팀들이 십승지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 표지판을 붙여놨더만 그걸 찾을길이 없고 선답자들의 시그널 서너개만 걸려있을 뿐이다

오늘은 날씨가 참으로 좋다... 온 사방이 一望無際이다

삼형제봉 정상에서 바라본 소백산 연화봉의 모습

마치 연화장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다

뚜꺼비 바위(범여의 생각中에서)

잠시 후 왜솜다리 보호구역이 나온다

한국의 에델바이스 왜솜다리(학명:Leontopodium japonicum)

솜다리의 속명 레온토포디움(Leontopodium)은 그리스어 ‘leon(사자)’ 과

‘podion(발)’의 합성어로 꽃의 형태가 사자의 발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30여종이 있으며 유럽,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고산지대에  분포한다

 

왜솜다리는 소백산 이북의 높은 산 바위틈이나 풀밭에서 자라고, 솜다리와 산솜다리는

설악산과 북부지역의 높은 산에서 자라며, 한라솜다리는 백록담 주변에서 자생한다

들떡쑥 솜다리는 황학산과 부산 해운대의 건조한 풀밭에서 자생한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크기는 25~55cm 정도로 자라며 하연 솜털이 나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왜솜다리는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휘귀식물이다

 일명 에델바이스라 부르며 꽃말은 소중한 추억, 기품, 인내, 용기라고 한다

조망바위(08:1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도솔봉의 모습

미륵부처님을 만나러 서둘러 도솔봉으로 향한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단양군 대강면의 산그리메

조망바위를 좌측으로 우회하여 급경사의 계단으로 내려선다

안부(08:15)

데크목 계단을 내려와 평평한 안부에 도착하니 소북 11-9 이정목이 있다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은 시작되고...

쑥부쟁이(꽃말:그리움)

조망바위(08:30)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흰봉산이 뚜렸하게 보이고...

등로 우측 아래로는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가 보이고...

바위꽃 사이로 피어있는 구절초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섰다가 오르막길을 올라 암릉을 우회하여 좌측  옆사면길로

올라서니 고무판이 깔린 나무 계단이 나오고 이윽고 도솔봉이 나타난다.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쪽은  주목이 많으나 이곳은 주목이 보이질 않는데 등로에서 주목 한그루를 만난다

다시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도솔봉 정상 오르는데 2014년 7월 20일 백두대간 남진때 혼자 왔으니

꼭 14개월만이다...변함없이 범여를 맞아주는 도솔봉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도솔봉((兜率峰:1314.2m:08:45)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경리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도솔봉은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육산으로 꼽히고 있다.
도솔봉은 소백산의 축소판이라 불릴만큼 한 키나 되는 철쭉과 진달래가 화원을 이루며

각종 고산식물이 많으며 숲길 가득 수목이 울창하고 계곡마다 꽃피는 초본류가 무성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풍치가 그만이다.
정상 도솔봉을 주축으로 삼형제봉과 묘적봉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으며,

능선에는 바위지대와 억새등이 있고 정상 암봉에 서면 중령에서 장엄하게 뻗어 오른

소백산의 장릉을 끝까지 바라 볼 수 있어 황홀하고, 남쪽으로는 활같이 구부러지면서

황정산으로 이어내린 백두대간이 아련하기만 하고, 단양팔경으로 유명한 산야가 펼쳐 보인다.

 

도솔봉에서 바라본 소백산은 전체와 부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지만 오늘은 아니다
묘적봉을 포함하여 도솔봉 일대 전체를 소백산의 봉우리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름만 봐도 소백산과 연관성이 짙다. 촛대봉, 묘적봉, 도솔봉 등 이름부터가 불교적인데,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 즉, 비로자나부처의 품 속임을 일러준다.

도솔봉 정상석을 세운 부산산사람들 산악회에서 國泰安民이라 표시석 뒷면에 새겨놨다

도솔산 정상 삼각점(△단양 22 / 2003 복구)

도솔봉은 불가(佛家)에서 이야기하는 도솔천을 의미하는데

산스크리트어 tuṣita의 음역이며 의역하여 지족천(知足天)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11~15㎞라는 설이 있음)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원에서는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욕계의 제4천에 불과한 도솔천이 이렇듯 이상적인 정토로 등장하게 된 것은 미륵보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7보(七寶)와 광명(光明) 등으로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십선(十善)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설하는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천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연히 보리심(菩提心)이 우러난다고 한다.

 

도솔천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끊임없이 정진하여 덕을 많이 쌓은 사람,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사람,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보살을 염불하는 사람, 계율을 지키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은 사람,

널리 복업(福業)을 쌓은 사람, 죄를 범하고서 미륵보살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

미륵보살의 형상을 만들어 꽃이나 향 등으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사람 등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상적인 불국세계에서 도솔천은 크게 부각되었다

도솔봉 정상에서 바라본 단양 대강면의 모습

대강면이 속하는 단양지역은 고구려시대 적산현(일명 적성현)으로 불렸고

이후 신라때 내제군(제천)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초에는 단산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현종 9년(1018년)원주에 속했다가 후에 충주로 이속되었다.

충렬왕대에 현의 사람들이 합단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감무가 설치되었고

충숙왕 5년에는 군으로 승격시켜 지단양군사를 두었다

여지도서(1760년 경)의 방리에 단양군 동면에 금곡리·노동리·용부원·장림리,

남면에 괴리평리·운암리·갈천리·올산리가 소개되고 있다.

 

대강면은 단양군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으로 산을 경계로 해서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봉현면에 접하고,

동남으로 산을 경계로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 접하며, 남으로 하천 경계로 경북 문경시 동로면과 접하며,

서로 산을 경계로 단성면과 접하고, 북으로 산을 경계로 단양읍과 접하고 있다.

어상천면과 함께 한강에 접하지 않는 고장이나, 동으로 소백산맥을 기대고 있어 하천이 발달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해서 대강면에는 저수지가 없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천수답 경작이 가능하다.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죽령도 보이고...

저 곳이 정녕 兜率天인가?

당겨본 흰봉산의 모습

흰봉산(1,240m)은 백두대간 죽령에서 남쪽으로 도솔봉과 묘적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도솔봉과 비슷한 높이로 솟아있는 육산으로 남조천에 풍부한 계곡수를

보태고 있는 성금계곡이 있고, 남쪽으로는 도솔봉 사이의 계곡으로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사동계곡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솔봉과 마주보고 있는 봉우리로 각종식물과 울창한

숲은 원시림의 자태를 간직하고 있어 자연의 寶庫로서 알려지고 있는 산이라고 한다.

연화봉 천문대도 보이고...

당겨본 사동리(寺谷)의 모습

오늘 내가 걸어야 할 옥녀봉과 장군봉도 보이고...

도솔봉에서의 인증샷

잠시후 저 능선을 걸어야 한다

다시 도솔봉 정상을 내려서 우측으로 들어선 다음 내려서니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절골 갈림길까지 출입금지 구간이라는데 단속요원은 없다

도솔봉 헬기장(09:00)

도솔봉 헬기장 이정표

이정표 옆에 단양군에서 세운 표시석의 윗부분은 없어졌다

하긴 이곳은 도솔봉 정상이 아니니... 누군가 치운 모양이다

잘 정리된 등로를 따라 묘적령으로 향한다

조망바위를 우회하며 걷는다

내가 오늘 걸어야 할 능선의 모습

조망바위를 우회하야 내려서니 계단이 나오고...

1,185m봉(09:10)

1,185m봉 정상에서 나무 계단을 따라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나무 계단에서 바라본 풍기읍의 모습

풍기는 소백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영주시 인근에는 특히 정감록에 나오는 길지가 많은 편이다.

풍기의 금계리를 비롯하여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소령고기(召嶺古基), 예천군 용궁면의 금당실,

영월군의 정동상류(正東上流)지역인 상동읍 연하리 지역을 들 수 있다.

그만큼 태백산과 소백산이 재앙을 막아주고, 낙동강의 상류지역이지만 수량도 풍부하고 터가

넓은 곳이기에 가능한 지역으로 특히 풍기는 주세붕 선생의 지도하에 인삼을 국내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이며, 정감록을 보고 북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인견직조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웰빙 옷감으로 풍기인견이, 건강과 장수를 위한 농산물로 풍기인삼은 각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정감록을 보고 풍기에 온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풍기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농업과 장사, 가내수공업 등으로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풍기지역은 영주시 전역 가운데에서도 인삼과 사과 재배는 물론 인견 직조 등을 통하여 소득이 높은 편이며,

일찍이 외지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교육열도 높아 풍기초등학교의 경우 100년이 넘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물론 외지인에 대한 배타성도 적은 편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당히 열려있는 지식인들이 많으며, 지역발전을 위해 손발을 걷어 부치고

일하는 일꾼들이 지역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편이다.

설립 100년이 넘는 풍기인삼농협이나 영주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자리를 잡은 풍기인삼과

영주사과 등을 주도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풍기농협, 산삼 및 홍삼, 인삼 등을 가공하는

비트로시스 등의 기업과 공장도 많은 편이며 아울러 풍기온천, 소백산, 죽령옛길, 희방사 옛길,

희방계곡, 희방폭포, 비로사, 희방사, 삼가 저수지, 금선정 등 관광과 휴식을 겸한 볼거리가 많고,

풍기인삼, 영주사과, 생강 도너츠, 냉면, 영주한우, 인삼갈비 등 먹을거리도 많은 곳이다.

안부(09:15)

안부에는 구조목 이정목(119현위치 소복11-06)과 이정표

(도솔봉0.7km← 묘적봉1.9km 사동리5.6km→) 출입금지 표시판이 있다

무명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가는 길엔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 다른 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오른다

통나무로 된 계단으로 오르는데 ‘역사적 문화자원 모니터링 지점’이라는 표시되어 있는 갈래골이 나온다

도솔봉과 묘적봉 사이로 뻗어 내린 갈래골과 안성금 마을鄭鑑錄에서

전쟁과 역병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터인 십승지후보 중에

나로도 알려져 한때 정감록 비결을 믿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기도

했으며, 남천 계곡 상류에는 온천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솔봉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연애골은 아직

인근마을의 민들한테까지도 거의 안 알려진 비경이다.

 

등산객은 커녕 나물꾼이나 약초꾼도 거의 다니지 않아 산길도 제대로 나 있지않고,

가끔 이 골짜기에서 처녀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에 마을 주민들도 들어가기를 꺼린

다시 데크목 계단을 만나 급경사로 오르니 묘적봉이 나타난다

묘적봉(妙積峰:1,148m:09:30)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 국립공원 최남단에

위치한 봉우리로 소백산국립공원과 별개의 봉우리로 생각하는 산꾼들이 많다

 

도솔봉을 포함한 묘적봉 일대에는 취나물 군락과 철쭉군락이 주능선에 형성되어 있다

묘적봉은 옛날 사동리에 묘적사란 절이 있어서 붙혀진 이름이며 묘적사는 여지도서와

호서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오랜 사찰로  부처가 삼매의 경지를 맞이하는 세계를 묘적(妙積)이라 했으니 고통은 따를 것이다.

단양 사람이 가마타고 오고가던 경상도와 통하는 길목이었고1965년까지 이곳까지 부도가 있었으며 임도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스님의 무사안일과 살생에 대한 참극을 그냥 방치했던 묘적사의 폐사 전설이 전한다. 

묘적사는 큰 사찰이었고 옛날 이곳에 경상도와 충청도,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여 스님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최후로 2~3명이 남아 기거하였는데

어느날 스님들이 인근 마을에 공양을 하러 갔다오니 빈대가 갑자기 성하여 법당 요사채에 우글거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지자 바랑과 장삼을 벗어 마루에 놓고 나뭇단에 불을 붙여 방에 던져서 불을 지르고

스님들도 도망갔다고 하며 건물은 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묘적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도솔봉의 모습

묘적봉을 내려오자말자 전망바위를 만난다

오늘 내가 가야할 옥녀봉과 장군봉이 보이고...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편안한 옆사면길을 따라 절골 갈림길로 내려간다

사동리(寺洞里) 갈림길(09:55)

본래 단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예전에 묘적사가 있었어 절골이라 한다

화전민이 많았던 1940년 무렵에 100여호가 살아 소위 마을의 전성기를 누렸다.

구한말 때 관군에 쫓기던 동학군이 들어와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지는 곳이다

묘적령 가는 길 부근이 화전민촌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1936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로 화전민촌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현재 곳곳에 남아있는 낙엽송 군락은  후에 조림된 것으로 당사 화전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로 되어 있다

도솔봉에서 이곳까지 출입금지구간이란다... 그런데 갈 사람은 다 갑디다

절골 갈림길을 가로질러 묘적령으로 올라선 다음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묘적령 표시석으로 향하는데 오늘 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서울에서 왔다는 4명의 심마니인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나에게 사과와 마른 오징어를 먹어라고 권한다

재미 좀 보셨냐고 물으니 씨익 웃기만 한다... 나 역시 이곳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묘적령에서 만난 심마니들

이 지역은 약초와 산삼이 많은 지역이라고 귀뜸을 해준다

묘적령(妙積嶺:1020m:10:00)

경북 영주시 봉현면과 예천군 상리면,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묘적봉

아래에 있어서 묘적령으로 불리우게 된 것으로 보이며 능선 우측으로는 솔봉으로 가는 길이다

오늘은 백두대간이 아닌 십승지 길을 걷기에 좌측의 고항치 방향으로 걷는다 

 

이곳은 단양군의 남조천과 영주시의 서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빗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남조천을 발원하여 흐르다가 대강면에서 죽령에서 내려오는 죽령천에 물을 보태

충주호를 이루고 남한강이라는 큰물줄기로 긴 여정을 거쳐 팔당댐에서 북한강과 합류되고

북으로 흐르면 서천지류를 따라 흐르다가 영주시 문수면에서 봉화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과 합류를

이루고 회룡포에서 한굽이 회오리를 만들자마자 예천군 용궁면에서 낙동강과 합류되어 긴 여정을 이어간다.

묘적령 갈림길(10:02)

오늘 걷는 십승지 구간은 죽령에서 이곳까지는 백두대간 길과 겹쳐지고

이곳부터는 생소한 한천(자구)지맥과 겹처져 옥녀봉 너머까지 같이간다

한천(자구)지맥이란?

백두대간 황장산 지나 묘적 못 미쳐 남쪽으로 분기한 한천(자구)지맥은 갈라져

자구산, 부용봉과 냉정산을 지나 내성천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39.8km

영주지역의 지맥으로 좌측으로 서천을 우측으로 내성천 지류를 흐르게 한다.

심마니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고항치로 항하는데 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다

최근에 설치한듯한 마루금치유숲길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산림청에서 국비 1,466억원으로 옥녀봉 일원 2천9백여 ha에 조성되는
국립 산림치유원이라는데152ha의 중심지구에는 건강증진센터와 수치유센터,

산림치유연구센터, 치유마을 등이 들어서며, 치유원 순환 숲길도 조성된다고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의 모습

고항리는 조선시대 초부터 6·25 때까지 ‘고리목 담범솥’이라는 무쇠솥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영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난 2008년 확·포장되고, 폐교된 은풍초등학교 고항분교가

 ‘곤충생태체험관’으로 탈바꿈한 이후로 외지인들의 발길도 차츰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예천곤충연구소에서 열렸던 지난 ‘2007년 예천 곤충바이오엑스포’는 당시 많은

관람객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으므로 한번 들러 볼 만한 곳이라고 한다

무명봉(10:20)

자주 보이는 이정표

무명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도솔봉과 흰봉산의 모습

이곳은 송이와 능이가 많이 나는 곳인가보다

두산리 갈림길(10:40)

이곳에서 좌측 봉현면 두산리로 내려가는 등로는 굉장히 뚜렸하고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다

우측 십승지와 한천(자구)지맥길은 등로의 흔적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독도주의 구간)

직진으로 진행하는 길에 십승지 산꾼들의 시그널이 있는데 무척이나 반갑다

이곳부터는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희미한 우회길을 버리고 암봉으로 오른다

암봉(10:55)

암봉에 오르니 잡목으로 인해 길은 없어져 버리고 바로 앞은 암릉 절개지라 아찔하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좌측의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선답자의 시그널이 하나 걸려있다

급경사의 미끄러운 능선을 내려오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고항치가 1km밖에 남지 않았다

등로 사이로 지나온 좌측의 도솔봉과 우측의 상리봉이 보이는 무명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서 안부에서 능선을 치고 오르니 이곳도 경고문이 붙어있다

이런 길을 걸은때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저 분들도 1년 농사인데 오해받지 않게 조심스럽게 길을 걷는다

송이 채취꾼들의 움막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등로 옆에는 潭陽田公과 商山金氏 부부묘지가 있고...

잠시후 폐헬기장이 나오고...

고항치 가는길에서 만난 이동통신 중계탑

고항치로 내려가는 넓은 임도 옆 좌우로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고항치(峙:11:20)

영주시 봉현면 두산리와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새로 포장한 임도가 보이고 이정표와 휴게용 의자가 있는 쉼터가 있다

고개 서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묘적령에 닿고, 동남쪽으로는 옥녀봉·지구산으로 이어지며

북동사면의 토골에 옥녀봉자연휴양림이 있다. 조선시대에 상리면이 풍기군에 속해 있을 때

예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던 곳으로 다른 이름으로 '고리목재'라고도 하고, 한자로

표기해서 고항치()라고도 한다. 지명은 상리면 고항리에서 유래하였다.

고항리는 구한말에 고항동()으로도 불렀다.

고항치에서 의자에 앉아 물한모금 마시며 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옥녀봉 이정표를  따라서 포장 임도를 따라간다

포장 임도를 따라가는데 버섯채취꾼들의 차량들이 간간이 보인다

이곳은 금빛치유숲길이라는 표시판이 있고 좌측으로는 데크목으로 길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 최오지중에 하나인 이곳도 인간들의 발길이 닿으면 자연은 또 망가지기 시작하겠지...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는데 아무래도 느낌상 이상하여 우측 능선을 치고 오른다

잡목과 잡풀의 저항이 심하다... 얼굴이 가시에 굵히고 안경에 기스가 나고...

능선위로 오르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조금전 고항치에서 임도로 가지말고

우측 능선으로 곧바로 올라와야 정상적인 등로이다... 이정표가 사람 죽이네

고항치에서 옥녀봉 오르는 2~300m 구간은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라 무척 힘이든

옥녀봉(玉女峰:890m:12:00)

경북 영주시 봉현면과 예천군 상리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돌탑 하나와 예천군과 영주시 봉현면에서 세운 정상석 2개가 서 있다

옥녀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점심상을 펼친다

옥녀봉 정상에서 밥상을 펼치는데 세찬 바람으로 인해 생각보다 날씨는 상당히 춥다

서둘러 베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입고 간단하게 밥을 먹은 후 다시 길을 떠난다

봉현면의 옥녀봉 정상석은 뭔 심사가 뒤틀렸는지 뒤돌아 앉았다.

예천군과 봉현면은 옥녀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모양이다

참으로 뱅뎅이속 같으니라고... 玉女는 萬人의 연인인데...

옥녀봉 정상에서 다시 행장을 꾸리고 길을 나선다

이른 아침에 먹었던 해장국이 조금 짰던지 계속 물을 마셔됐더니만

그리 덥지 않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통의 식수가 달랑달랑하다

편안한 등로가 계속되고 잠시후 이정표를 만난다.

886m봉(12:40)

이정표(→고항치휴게소 1.7km, ←문필봉 0.6km, 대촌리 2.3km)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확 꺽어져 대촌리로 향하는데 무심코 가다가 놓치기 쉬우니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등로는 방화선 임도만큼이나 넓다

등로 가운데는 孺人密陽朴公之墓를 비롯함 묘지 몇기가 보이고...

또다시 만나는 표지판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임도(12:55)

임도에서 내려선 다음 고항치휴게소 방향의 좌측으로 갔다가 우측으로 내려서 장군봉으로 향한다

등로 옆 숲속에서 달걀버섯 유생(幼生)도 만나고...

목은 마른데 식수는 떨어지고... 등로 우측으로 넓은 임도가

있고 민가가 보이기에 식수를 보충하러 우측 민가로 내려간다

내려와서 보니 민가가 아니고 숲 속에서 장사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 들려 쥔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통을 물을 보충하고 나니

더운데 고생을 한다고 하면서 사과를 하나 깍아주면서 먹으라고 권한다

근데 미안해서 사과만 먹을 수 있나... 맥주 한병(3,000원)을 시켜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간판도 없이 장사하는 이 산속의 식당의 주 메뉴는 놀랍게도 짜장면이다

조금전 옥녀봉에서 점심만 먹지 않았다면 짜장면 한 그릇 먹었으면 좋으련만...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와서 장군봉으로 향하는 등로로 복귀한다

등로는 잘보이질 않고 인적이 드문곳에 이정표 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특용작물재배지역 경고판을 지나 우측 묘지를 향하는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장군봉으로 향한다

특이한 형태의 묘비가 있는 관리가 안된 묘지를 지나 장군봉 가는길은 좋다

안부(13:40)

묘지 너머로 풍기읍이 시원스레 보인다

넓은 공터가 있는 임도를 지나 조금을 더 가니 묘지가 있는 장군봉 정상에 도착한다

장군봉(將軍峰:730m:13:50)

경북 영주시 봉현면에 위치한 봉우리로 정상에는 묘지 한기가 있다

이곳에서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 할 구간이다

묘지를 지나 이정표에 약수터로 되어 있는 넓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지

않고 묘지 우측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잡목으로

가려져 있어 길이 참으로 難解하나 조금을 내려서면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반가운 문필봉님의 시그널

십승지 산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 산행을 하는 산꾼들도 드물지만 길도 없고

흔히 산꾼들이 말하는 띠지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만나기가 힘이들어 바짝 신경쓰야 한다

낙엽이 수북한 급경사를 내려오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잡목들이 태클을 걸고 관리가 안되어 방치되어 있는 묘지 몇기를 지난다

싸리버섯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베낭을 내려놓고 주의를 다니면서 싸리버섯을 채취하는데 먹을만큼 땄다

또다른 묵묘를 지나니 좌측으로 커다란 사과밭이 나온다

사과밭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가는데 옷은 찢겨지고 잡목의 태클은 계속된다

잠시후 무명묘지 한 기를 지나면서 등로는 끊기고 넓은 사과밭이 펼쳐진다

대충산사님들께서 이곳에다가 길목재라고 부쳐놨는데 이곳이 아니고 조금아래 사과밭 가운데이다

십승지의 등로는 사라지고 사과밭 아래 농로를 따라 길목재로 향한다

사과밭 우측에 處士曲卓孔氏 묘지도 보이고...

장군봉 아래에 위치한 봉현면 대촌리와 한천리 일대에는 영주사과의

주산지로서 가는 곳마다 빨간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주성골의 모습(봉현면 대촌2리 소재)

주성골의 유래는 신라의 기목진, 고려 때는 기주라 불리었고 조선 태종13년(1413) 기천현에

속했다가 문종 1년(1451) 기천과 은풍 두 고을의 글자를 따 풍기군으로 승격해 풍기군 와룡면에 속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 봉현면 대촌2리가 되었고 지금은 영주시 봉현면 대촌2리이다.

 

주성골(珠星谷)은 약 350년 전 조선시대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광산김씨 진현(振鉉)이란

선비가 다래 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이름을 ‘주성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성이란 마을이 높은 산 아래에 있어 밤이면 구슬 같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하여

구슬 주(珠)자에 별 성(星)자를 써 주성골이라 했다하니 참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탱크를 지나 길목재로 향한다

길목재가는 길에서 바라본 풍기읍의 모습

길목재(14:20)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주성골과 솔향기마을을 잇는 고개로

주위는 온통 사과밭이라 고개라는 개념이 전혀 들지않는 곳이다

지도상에는 길목재라고 되어 있으나 이 지역 사람들은 길목재라면

알지 못하고 갈목재라고 부르는데 아마 예전에 칡이 많아서 ‘칡 葛, 나무 木’

이라 갈목재라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범여의 생각中에서)

 

원래 산행 계획은 서제골 다리까지 계획을 잡았는데 아무래도 무리일듯 싶다

그리고 이곳 영주로 귀촌하여 포도농사를 짓는 운산친구와 약속도 있고하여

이곳에서 산행을 접고 주성골로 내려간다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다 주성골로 가면 빙빙돌아가는 길이라 좌측 사과밭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길이 훨씬 단축되는 느낌이다... 호두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주성골로 가는 도로

솔향기 마을(14:40)

봉현면 대촌2리는 오랜 세월동안 ‘주성골’이란 이름으로 살아왔다

 ‘주성골’을 ‘솔향기마을’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이 2007년 녹색농촌체험마을

조성사업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부터인데 마을 사람들이 여러 날 논의 끝에 ‘솔향기마을’이라

정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사업비 2억원을 지원받아 펜션 3동(큰방 1개, 작은방 4개)과

정자를 짓고 하천정비, 물레방아, 디딜방아, 체험시설, 식당 등을 완공하여 2008년 7월 31일 개소했다

대촌1교 다리를 건너니 도로 좌우에 사과밭의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도로 좌우의 사과밭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커다란 회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곳부터 다음 구간에 걸어야할 길이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도로 좌측에 소공원이 하나있고 잠시 후 봉현초등학교가 나온다

와룡골(대촌리 소재)

와룡골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풍기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는 오질않고

버스 시간도 모르겠고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하는데

20분동안 아무 넘도 태워주질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경주에서 왔다는 부부가 풍기인삼시장이 어디냐고 묻지를 않는가?

 

‘사실 낸들 풍기땅에 처음 왔으니 알 수 있나’... 시치미 뚝떼고 내가 가르쳐 주겠노라

하면서 차를 태워 달라고 하니 태워준다... 조금 지나니 풍기 인삼시장이란 팻말이 보인다

‘저 쪽으로 가면 되요’ 하고 인삼시장 입구까지 와서 내리니 부부는 고맙다고 나에게

몇번이나 인사를 하는데... 허허 고맙기야 내가 더 고마운데 시치미 뚝떼고 ‘잘 가시요’ 하고 내린다

이곳은 중앙고속도로 풍기 I.C를 빠져나와 풍기읍내로 가는 길목이다

와룡골(대촌1리)의 지명 유래는 와룡골-용감동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골이라 하였고, 와룡골이라 하고 면 이름도 와룡면이라

칭하였는데 마을이 크므로 큰 마을 또는 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로 내려왔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동으로 희나무 고개와 영등 바위가 있고 희나무 고개에는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버스 정류장(15:10)

풍기에서 단산으로 가니 친구가 나를 태워러 와서 같이 포도 농장으로 간다

그런데 도로가 아주 눈에 익어 있는 곳인데 다름아닌 백두 대간 고치령으로

가는 좌석리 입구 단산 저수지 앞에 꽤나 규모가 큰 포도농장이다

백두대간 남진.북진을 좌석리에서 시작했으니 들.날머리로 4번이나 온 곳이다

내 친구 雲山

서울에서 30여년간 나와 같은 업종(인테리어)에 종사하다가 귀촌하여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원래 친구의 땅에 형님이 농사를 짓다가 형님이 아픈 바람에 과감히 서울 생활을 접고

귀촌을 했는데 참으로 쉽지않은 결정을 한 친구에게 박수를 보낸다

원래 이 친구는 인테리어업을 하면서 나와 비슷한 역마살로 온 山河를 헤매면서

약초와 산삼을 캐러 다녔으며 산삼을 꽤나 많이캐서 수입도 짭잘했고 산삼동우회

총무 역할을 한 친구이다... 농장에 도착하여 커피 한잔 마시고 친구가 첫 수확한 포도

10박스를 주문하고 버스 시간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여 단산에 와서 영주가는 버스에 오른다 

영주발 서울행 18시 55분 버스표

터미널에 오니 요즘 벌초시즌이라 그런지 버스표가 없다... 영주역으로 갈까하고 망설이는데

매표원이 한장 캔슬된게 있다고 하여 표를 간신히 구했는데 1시간이상이나 기다려야 한다

하는 수 없이 터미널옆 마트에서 막걸리 한통을 사서 인근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

한그릇에 막걸리 한 통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버스에 오른다

영주버스 정류장

경북 북부의 교통요충지인 영주의 터미널은 지저분하고 초라하나

그러기에 정감이 가는 버스정류장인지 모르겠다... 民草들의 哀歡이 서린듯한...

버스에 오르자마자 늘 일상의 버릇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만큼 차들로 꽉차있다

버스 기사는 하는 수 없이 제천쪽의 국도를 향하더니만 휴게소에 세우고

차가 많이 밀리니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오란다

다시 버스에서 올라 예상시간(2시간 20분 소요)보다 배나 더 걸린 4시간 35분에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중에 채취한 싸리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