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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十勝地 山行記

풍기 십승지 제3구간 - 931지방도에서 희방사 주차장까지

by 범여(梵如) 2015. 11. 2.

 

☞ 산행일시: 2015년 11월 01일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17.5 km +어프로치 2.5km / 9시간 1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931지방도(안맥기실마을)-과수원-유화농장-도간재-765.4m봉-농장임도-원적봉-밀목재-달밭골

              양반바위-샘터-전망대-조난 추모비-비로봉-주목감시초소-천동갈림길-전망대-1,405m봉

            제1연화봉-헬기장-죽령갈림길-연화봉-쉼터-희방깔닥재-희방사-희방폭포-희방사 주차장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풍기읍 / 충북 단양군 단양읍

 지난주에는 발가락에 뭐가 나서 꽤나 고생을 하여 한참을 고생했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조신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할까 생각을 했는데 토요일이 되니

그 넘의 역마살이 범여를 당체 가만두지 않으니 어쩌랴

조금 일찍 업무를 마감 지은 다음에 퇴근... 서둘러 베낭을 챙겨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풍기 십승지 지도

풍기 십승지 구글어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19시 35분발 동서울 → 영주행 버스표

집에서 조금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어서 영주로 향한다

사실 오늘 구간은 풍기로 가야하는데 풍기에는 찜질방이 없고 이른 아침에 식사 장소가 마땅찮아

어쩔 수 없이 영주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을 해결한 다음에 풍기로 와야 하는데 오늘은

지난번과는 달리 28인승 버스에 15명 내외가 타고 가는데 버스에서 전화 통화하는

사람들이 왜그리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시끄러운지 마치 싸우는듯 하다

영주시외버스 정류장(21:45)

버스에서 내려 지난번에 하룻밤 잤던 스카이 찜잘방으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가 오거리에서 소백시장을 가로질러 스카이 찜질방으로 향한다

찜질방에 가서 잠을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시장안에 있는 국밥집에 들려서

술국에다가 소주 한병을  마시고 찜질방으로 향한다... 지난주에 발이 아파서

1주일내내 굶었더니만 너무 먹고 싶었기도 했고...

스카이타운 찜질방(23:00~05:00)

오늘은 생각보다 잠을 자는데 지잔번보다 사람이 적은데다가 지난번과는 달리

바닥이 따끈하여 편하게 잠을 자고 05시에 기상하여 샤워를 한 다음에 욕탕에

들어가 몸을 푼 다음에 찜질방에서 5분거리에 있는 어림지라는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어림지 해장국집(05:40~06:10)

해장국집에 들려서 내장탕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다음에 택시를 타고 들머리로 향한다

931번 지방도로(06:40)

영주에서 택시를 타고 풍기에 있는 동양대학교 정문을 지나  영주 경륜장 가기 직전에

있는 풍기읍 미곡리 안맥기실 마을 입구에 내리니 이곳은 지금 도로 확장공사 중이다

택시비는 17,000원인데 풍기읍에 찜질방이 있었더라면 몇천원이면 올 수 있는 거리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 입구(06:45)

영주에서 택시를 타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들머리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날씨는 생각보다 상당히 춥고 손이 꽤나 시리다

서둘러 산행 준비를 마친 다음에 길을 떠난다 (06:50)

931 지방도로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로 올라서니 사과밭이 나오고...

하얗게 내린 서리

포장도로를  버리고 과수원을 가로 지른다

과수원을 가로질러 잡풀이 무성한 임도로 오르는데 노루 한마리가 줄행랑을 친다.. 이른 아침에 미안하이 

등로에서 바라본 풍기읍 미곡리(味谷里) 의 모습

이 마을은 옛 부터 미곡리(味谷里)로 되어 있으며 위치는 풍기에서 순흥으로

들어가는 도로 서쪽에 들어가 있어 도로(道路)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며,

 

풍기읍 산법리와 순흥면 태장리, 안정면 단촌리와 대평리를 접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안마, 웃마을, 안맥기실, 바깥 맥기실, 목기실(木器室), 모계실 (牧鷄室), 미곡리라 한다.

고려말(高麗末)에 나라에 고관대작(高官大爵) 으로 있던 신하들이 이 마을에 와서

피난을 하던 중 산적(山賊)들의 습격을 많이 받아 폐동(廢洞)이 되었다가

약 250년 전부터 다시 이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조그만 능선을 오르니 무명묘지들이 보이고 잡풀이 무성하여 등로가 보이질 않는다

5분정도 잡목지대를 지나니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명묘지를 지나는데 돼지똥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우측으로 엄청나게 큰 돈사가 보이고...

좁은 능선을 따라 내려서니 꽤나 큰 규모의 유화농장이라는 곳이 나온다

유화농장(07:02)

유화농장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경고판이 산꾼을 급박하는데 그런다고 안 가나...

능선 좌측으로 인삼밭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태양열 단지가 조성중이다

약간의 흐린 날씨이지만 해는 벌써 저만치 올라와 버렸다(07:07)

한참 조성중인 태양광 단지

태양광 단지를 조성하는라 능선이 깡그리 뭉개지고 있다

태양광 단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지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멀리 소백산의 주능선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큰 봉우리가 아마도 국망봉인듯 싶다

우측으로는 사과밭 휀스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사이를 걷는데 아카시아 나무가 초반부터 얼굴을 할킨다

處士 江陵劉公 묘지(07:13)

곧이어 晋州姜公의 묘지도 지나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가는데 우측으로는 검은 차양막이 보이고...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선답자의 시그널

능선을 걸어다 뚜렸한 직진길의 오르막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진다

반가운 신경수 선생님의 시그널

우리나라 맥 산행에 있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제1인자이시다

지난주 화요일(10월 27일)에 구로동에서 처음 뵙는데 정말

내공이 대단하신 분이다...그러나 이곳의 산행 목적은 범여와

달랐던 모양이다... 난 십승지를 하는데 선생님은 풍기단맥을

하셨던 모양이다... 늘 健安하시길...

길이없는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좌측으로 꽤나 큰 규모의 사과밭이 나오고...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았나요?

도간재(07:30)

풍기읍 욱금리에서 순흥면 배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좌측으로 커다란 사과밭이 있고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는데 예전에 옹기굽는 집들이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도로로 내려와서 좌측으로 갔다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대충산사님들의 띠지가 많이 보인다... 저도 산에 그리움 때문에 이렇게 헤매고 다닙니다

등로에 오르자마자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나고...

능선에 오르니 비교적 등로는 뚜렸하게 보이는 편이다

능선 삼거리가 나오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우측 2시방향으로 꺽어진다

이곳부터는 좌측으로 욱금리 약초 재배지가 보인다 

약초 키우는 넘이 저렇게 고약해서야 藥性이나 제대로 있겠어... 산꾼들도 당신네 고객일 수도 있는데...

이게 조금 부드럽네...

등로 사이로 소백산 천문대가 보이고 담 구간에 걸어야 할 능선도 보인다

갈림길(08:00)

낙엽이 양탄자를 깔아논 듯 푹신하다

농장입구(08:00)

농장에서 설치한 차양막을 넘어 고도를 높인다

떠날 채비를 하시는군요?

등로에서 바라본 순흥면 배점리의 산그리메

배점리는 조선 선조때 무쇠쟁이 배순(裵純)이 국상을 당하자 상복을 입고 소백산 위에

올라가서 삼년동안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통곡망배하여 충신 정문이 1615년에 내려져서

배충신이라 하고 망배하던 산봉을 국망봉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무쇠점을 주었다.

그 연유로 배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백능선의 秋色

농장을 빠져 나오며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이곳도 산꾼을 급박하는 코팅지가 보인다

무명묘지(08:15)

송이 채취꾼의 텐트는 망가지고 집기는 어지럽게 버려져 있다

낙엽이 푹신한 길을 걷는데 다시 오르막이 나오고 낙엽이 미끄러워 시간이 자꾸만 지체된다

765.4m봉(08:40)

765.4m봉 정상의 모습

숨어있는 삼각점

숨어있는 삼각점을 찿았지만 표식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되어 있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등로가 잘 보이질 않는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산꾼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고 그 바람에 자꾸만 산행 시간이 지체되는 느낌이다

가뭄으로 인해 말라버린 단풍

내리막길에는 낙엽이 푹신하고 다리가 푹빠질 정도인데 아무도 걷지 않은 이 길

나홀로 걸어가는 쾌감!... 정말 굿이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베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한다 

나홀로 산행길의 유일한 친구

다시 편한 길을 걷는다

갈림길(09:30)

내리막길에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낙동정맥길에서 만났던 십지송(十指松)만큼이나 멋진 소나무도 만나고...

조금전과는 달리 온전한 송이 채취장 막사를 만나고...

바로 옆에는 멋진(?) 화장실도 있고... 잠시 후 오르막을 오르니 원적봉이 나온다

원적봉(圓寂峰:963m:10:00)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와 순흥면 배점리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의 한 봉우리로

봉우리 좌측 아래에는 유명한 비로사가 있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원적봉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불교에서는 큰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걸

 ‘원적(圓寂)’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 뜻이 아닐까? (범여의 생각 中에서)

원적봉 정상 삼각점(△ 401 재설 / 78,6 건설부)

원적봉에서 직진하여 내려서니 조금 험한 길이 나오다가 금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는데 이곳은 간간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등로 좌측 아래에 있는 비로사에서 사시예불이 시작했는지 염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무명묘지(10:13)

무명봉(10:20)

무명봉 오르기 전 좌측 사면길이 있지만 힘들게 무명봉 정상에 오르니 예전에

무덤이 있었는지 돌담에 조그만 봉분이 보이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보인다

무명봉 정상에서 만난 선답자들의 시그널

도도하게 홀로 소백산을 지키고 있는 단풍

급한 내림길을 내려서니 사람들 소리가 보이면 넓은 등로가 보이는데 밀목재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밀목재의 모습

이곳이 소백산 자락길이란다

밀목재(密木峙:10:38)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비로사 위에 있는 고개로 순흥면 배점리로 이어지며

소백산 자락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좌측 아래에는 비로사가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죽계구곡으로 이어지는 곳에 초암사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예전에 수목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곳부터는 소백산 국립공원 안에 들어가는 소위 말해서 제도권 안의 산이라

그런지 이정표와 각종 안내판이 많이 보이고 비로사에서 사시 예불중인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부전스님의 염불소리가 참으로 정겹게 들린다

소백산 비로사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봉 중턱 삼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680년(문무왕20)

의상조사가 영전사에 거주하면서 문도들과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승 진공이 이 절에 있을 때 고려 태조가 이 곳에 와서 진공의 법문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됐다고 하며 태조 20년 진공이 입적하자 태조가 직접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비로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의 거점으로 활용되다 전소되어 새로 지었고, 1909년에도

법당 외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남아있는 건물을 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사찰 경내에는 보물 제996호인 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이 적

광전에 모셔져 있고 경북 유형문화재 제4호 진공대사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

제7호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 영주비로사아미타불탱화(제436호)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좌측 아래쪽이 비로사인데  잣나무숲이 빽빽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물한 모금을 마신 후에 다시 오르막으로 오르며 비로봉으로 향한다

이곳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지 한적하다

달밭골 삼거리(月田峴:10:50)

밀목재에서 좀 힘들게 오르니 달밭골이 나오는데 풍기읍 삼가리에서 순흥면 배점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날 풍수지리설에 이곳의 지형이 옥야망월이라하여 초생달 같은 산이

있으므로 달발골이라 부리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밀목재와 비로사에서 오르는 삼거리에 있다 

 

달밭골은 비로사 우측에 있는 마을로 달풀이 많다하여 ‘달밭골’이라 불렀다 한다.

이 골 동남쪽에 있는 넓은 계곡은 삼국시대 때 신라군의 연병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 때는 월전(月田)에 사고(史庫)가 있어 ‘사고터’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곳에서 코발트라고 하는 광물을 대동아전쟁 끝무렵까지 채굴했다고 한다.

돌계단을 지나니...

편안한 철계단이 나온다

이정 구조목(10:55)

이곳부터는 삼가리 주차장에서 소백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꽤나 보인다

혼자서 오르는 나를 보고 청주에서 왔다는 등산객 3명이 막걸리를 한잔하고 가란다

듣던중에 반가운 소리... 같이 앉아서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3명이

한잔씩 주는 바람에 누가 술을 가지고 주인이고, 누가 얻어먹는 사람이 모를 정도로

내가 훨씬 많이 먹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먼저 길을 나선다

고사목 너머로 소백산의 주능선이 보이고...

비로사 등산로 갈림길(1,000m:11:15)

저렇게 죽고 못사는 사이일까?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길은 무지하게 좋고, 편한길로 비로봉을 오른다 

양반바위(1,150m:11:30)

데크목 계단을 지나고...

전망암(11:38)

잠시후에 오를 비로봉의 모습

연화봉과 그 너머로 삼형제봉, 도솔봉이 보이고...

이정표(11:40)

샘터(11:55)

이곳은 쉼터에 베낭걸이를 만들어 놨다

샘터를 지나자마자 쉼터가 나오고...

비로봉으로 향하는 힘든 여정이 시작되고...

장쾌한 소백산의 영봉들이 보이고...

이 바위의 이름이 뭔지?

추모비(12:05)

춥기는 추운가보다...

원적봉을 비롯한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보며 비로봉 정상으로 오른다

비로봉(毘盧峰:1439m:12:10)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의 최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 세상에 몸을 입어(身) 드러난 법신불(法身佛)로

'공(空)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이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다.

주로 큰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의 비로봉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부처의 법을 드러내어 사방팔방으로 온 누리에 퍼지게 하는 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이 '비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의 빛이 막힘없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산이니 말이다.

산봉우리를 영험하게 여겨 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소백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정상석 뒤면 정상석 후면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인 서거정의 시 "소백산"이 음각되어 있다.

小白山連太白山 (소백산연태백산)
逶迤百里揷雲間 (위이백리삽운간)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地設天成鬼破慳 (지설천성귀파간)

소백산 태백산에 이어져
구불구불 백리길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소백산 정상에는 눈이 보인다

소백산 비로봉에 도착하니 정상에는 눈이 내렸는지 눈이 보이기는 하나

악명(?)높은 소백산 칼바람은 잠잠하다... 10여번을 이곳에 올랐지만

바람을 맞아보지 않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오늘은 백두대간이 아닌

십승지 구간으로 걷다보니 또한 묘한 생각이다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잿빛 하늘에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다

 

우측으로 국망봉과 그 너머 아래로 고치령

마의태자와 금성대군의 恨이 맺혀있는 저 곳...

오늘은 왠지 매주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범여도 가슴이 횡하다

비로봉에서 조금 머물다가 배가 고파 점심을 먹기위해 주목감시초소로 향한다

전통지리에서 이 땅의 등뼈가 되는 대간 길을 정할 때 마루금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느냐(지금의 태백시 북쪽 피재 부근에서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선) 아니면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금의 대간 즉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한 데에는 속리산과 더불어

소백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땅의 대간이 '山太極(산태극) 水太極(수태극)', '음양이론',

'대간과 10대강의 발원지' 그리고 '산자분수령' 등의 철학과 원칙을 견지하며

아름답게 자리잡는 데에는 소백산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그 이름이 小白山이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소백산이란 이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上白山 혹은 主白山으로 불려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작을 小(소)를 앞세운 소백산이라 불려지는 것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군자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소백산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을 가르치고 있다.

“달은 수줍음을 타는 듯 자주 구름 속에 숨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달처럼 수줍어하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고, 뽐내려 하지 말고,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라’는 뜻으로서

불교경전「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이지만 바로 오늘 소백산의 모습이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주시 순흥면의 산그리메

비로봉에서 내려서면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순흥면이다.

안향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흥 안씨 문중은 1454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몰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단종은 인근 영월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유배돼 있었는데,

순흥 안씨의 사대부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소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하루 수십 명씩 사대부들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피비린내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오랜 세월 안씨 성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다.

핏물은 죽계천 물을 따라 흘러 20리 밖에서야 멈췄으니 그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피끝마을 사람들은 논바닥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형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금성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순흥 안씨 문중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그때 그 자리에 모여 제를 올린다.

소백산 비로폭포 계곡의 모습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로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이르는 소백산은 총 면적이 320.5km에 달하는

큰 산맥을 이루며 1000m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은 봄에는 철쭉꽃이 만개하는 5월말에서 6월초까지 온 산이

천상의 화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겨울철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은 지역이라 은백의 능선에 정신줄을 놓을 정도다.

소백산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볼거리도 많은 지역이다.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인 영주시 방면에는 부석사를 비롯하여 소수서원,비로사,희방사 등이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고수동굴,노동굴,천동굴과 구인사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온달산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서북쪽 기슭에는 살아 천년,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 “방사 남사고(南師古,조선 명종때 학자, 호;격암)가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말하기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고 말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소백산을 오른 기록이

상세하게 산행 일정을 전하고 있다.

퇴계의 전임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도 소백산을 올랐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은 순흥의 백운동서원(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원으로 뒤에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이란 액자를 받았다)을 출발하여

지금의 배점리를 거쳐 죽계계곡을 따라 석륜사,중백운암을 경유하여 국망봉에 올랐다.

국망봉 위에서 술 석잔을 마시고 시 일곱장을 쓰고 나서 해가 기울어 중백운암에서

묵고 다음날 하산하였다고 한다.

 

소백산 북릉인 신선봉(1272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아홉개의 능선에 여덟 골짜기를 만들어 낸 곳을 구봉팔문이라 부른다.

제 3관문봉과 제4관문봉 사이 골짜기인 여생이문 안 아래쪽에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일곱군데로 단양 방면에는 구인사코스,어의곡리코스,천동리코스가

있으며,영주시 방면에는 죽령코스와 희방사코스,비로사코스,배점리코스가 있다.

소백산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산의 세석평전과 덕유산의 덕유평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가 지형에 따라

한반도의 산지체계를 분류한 산맥 개념이 나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 전통의 산지 체계인 백두대간은 산의 흐름, 즉 능선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줄기로 나눠 이름 붙였지만 산맥은 지형지질에 따라 체계를 달리했다.

지질이 유사한 지형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산맥은 산줄기가 사라진 강으로도 연결돼 산의 맥이 가끔 끊어지기도 한다.

소백산맥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중부권의 대표적인 육산인 소백산은 지형적으로는 온화한 평원을 이루고 있지만

바람과 눈(雪)에 있어선 어느 산보다 세차고 적설량이 많다.

이는 소백산이 위치한 지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때 내륙 깊숙이 진입한 대기는 소백산맥의 높은 장벽에 부딪혀 강제 상승한다.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는 산사면을 타고 오르면서 단열팽창으로 냉각돼 눈으로 변해 내린다.

바로 동서로 길게 소백산 줄기가 바람을 가로 막으며 커다란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세찬 바람에 휘몰아치는 눈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일종의 ‘푄(Föhn)현상’이다.

소백산이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제일 설경(雪景) 명산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로 인해 소백산의 북쪽인 단양·제천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부는 데 반해 남쪽의 영주 지방은 기온이 더 높게 나타난다.

반면 여름철의 경우 기온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백산이 날씨와 기온조절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로봉 정상 삼각점(△단양 425 / 2003 재설)

비로봉 정상 이정표

비로봉에 서니 조망도 조망이지만 피할 수 없는 불청객 ‘바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백산에서의 바람은 일종의 붙박이다. 사시사철 불어댄다.

그러다가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면 바람이 자는 날 소백산을 찾을 수 있다.

오늘은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라 그런지 수없이 오른 소백산 비로봉

오늘 처음으로 바람이 없는 비로봉에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로봉에서의 바람은 절대 쉬어가는 법이 없다.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은 한여름에라도 비로봉에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바람과 스킨십을 하고 있는 비로봉을 보면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이라는 성어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스스로를 대할 때에는 가을 서리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논어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은 엄하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가볍게 하면(躬自厚而薄責於人)

원망은 멀어진다(則遠怨矣)라고 하고...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君子求諸己)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小人求諸人)라고도 했다.

비로봉에게 칼바람은 가을 서리와 같은 존재라면,

비로봉은 군자 같은 모습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평하면서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전후사정을 사정을 내세워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타인의 사정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경향은 시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최소한의 형평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비로봉을 비롯한 소백산은 겸손을 가르치고 있지만

비로봉이 몸소 보여주는 ‘待人春風 持己秋霜’이 더욱 당면한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비로봉에서 국망봉 가는 길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소백산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



’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으며,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

 

” 조선 중종 때의 천문지리학자인 남사고가 이렇게 말한 소백산(小白山)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1568미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국망봉(1421미터)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평탄면을 이루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발원한다.

소백산 일대는 예로부터 산삼을 비롯하여 많은 약초가 자라 지금도 약초 채취가 활발하며,

풍기는 이들 약초의 집산지이자 풍기 인삼으로 이름난 곳이다.

 

소백산 일대는 웅장한 산악 경관과 천연의 삼림, 사찰, 폭포가 많으며 주변에

부석사나 온달산성 등의 명승고적이 많아 1987년 12월에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 면적이 320.5제곱킬로미터로 경상북도 영주시ㆍ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다.

공원 내에는 희방사ㆍ부석사ㆍ보국사ㆍ초암사ㆍ구인사ㆍ비로사ㆍ성혈사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특히 나라 안에 제일가는 절로 평가받는 부석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정봉인 비로봉으로 등정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높이 28미터로 내륙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희방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에는 숲과 그늘과

괴암이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폭포 바로 위에는 선덕여왕 12년에 두운대사이

창건한 희방사가 자리한다. 다음은 『택리지』의 기록이다.

소백산 주목 군락지

비로봉 바로 아래는 천념기념물 제244호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옛날 통제하지 않던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망봉과 비로봉~연화봉 능선을 따라

3만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내판에 적어 놓았다.

주목뿐만 아니라 왜솜다리, 모데미풀 등 희귀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목은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주목(朱木)'이란 이름은 나무의 껍질이 붉은 색을 띠고 목재도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이가 오래가고,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제1연화봉 사이에

주목 3,798그루(2007년 기준)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비로봉 아래쪽 주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을 울타리를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소백산의 주목은 고지대의 입지 특성 때문에 강한 바람과 겨울철 강설(强雪)로 인해서

대부분의 줄기가 비틀리고, 가지가 휘어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무의 높이는

7m 정도이고, 둘레는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에서 밑으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다.

주목 군락지 안내판

주목감시초소

비로봉 정상을 비롯한 소백산 일대가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은 탓인지 이곳에는

등산객들이 아무도 보이질 않고 주목을 감시하는 국공파 직원도 보이질 않는다

그 바람에 나홀로 이 명당(?) 자리를 전세내어 라면을 끓여 김밥 한줄에 팩소주 한병

정말 꿀맛이다...건강한 두 다리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만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곳에서 느긋하게 라면에다 소주한병 마시고 나니.... 이 세상 다 가진 기분이다

주위를 깨끗이 정리하고 연화봉으로 향한다

이곳은 해발1300m이상인 소백산의 아고산 지대로 바람이 세고 비와 눈이 자주 내린 곳 으로

습기가많고 키가 큰나무가 잘 자랄수가 없는지대이다 아고산 지대는 아한대 기후지대로

신갈나무 철쭉 등,바람과 추위을 잘,이겨내는 야생식물이 자연과 균형을이루며 살고있다

아고산 초지지대 안내판

연화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단양의 산그리메

천동 갈림길(13:08)

남진, 북진 2번을 했던 백두대간... 언젠가 여건이 허락되면 나홀로 꼭 한번 더 걸어보고 싶다

전망대(13:10)

뒤돌아 본 비로봉의 모습

소백산 철쭉의 사열을 받으며 연화봉으로 향한다

연리목

연리목 안내판

1,405m봉(13:15)

벌써 冬眠으로 접어 들었군요

잔뜩 지푸린 날씨가 금방이라도 눈,비가 내릴듯하니 맘이 급해진다

전망암(13:20)

忍苦의 세월이 흘러...

암릉 아래에 풍기 십승지핵심 마을인 금계촌(金鷄村)이 아련히 보인다

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고

남사고의 격암유록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서는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다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고 하여 불러진 지명이고
또다른 이름 임실이다. 돌과 바람이 없는곳, 죽령이 보이지 않는 곳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임실이 유력한 십승지로 꼽힌다고 했다.

전망대(13:25)

지나온 비로봉과 1,405m봉의 모습

가야할 연화봉과 그 너머로 십승지 1구간에 걸었던 도솔봉도 보이고...

등로에서 바라본 풍기 십승지의 핵심인 금계촌(임실마을)의 모습

전망암(13:35)

지석묘인가?

호젓한 산죽길을 만나고...

이름모를 멋진 암릉도 만나고...

사는게 참으로 힘이 드네요

제1연화봉(1,384m:13:48)

제1연화봉 전망대(13:50)

가야할 연화봉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헬기장(13:55)

뒤돌아 본 제1연화봉

구조 이정목(14:10)

돌이 깔린 등로를 따라 연화봉으로 오르는데 늦은 시간대라 그런지 등산객은 한명도 보이질 않는다

연화봉 오름길에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차갑다

갈림길(14:20)

연화봉 아래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

연화봉 해맞이 전망대의 모습

연화봉(蓮花峰:1,394m:14:25)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단양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단양군이 1987년 5월 31일 제5회 소백산 철쭉제를 기념하며 세운 표시석

있고, 그 옆에서 영주시에서 세운 옛 연화봉 표시석 있고 데크목에다가

해맞이 광장을 만들어 논 넓은 공터가 정상이고 소백산 천문대가 한 눈에 보인다

 

연화(蓮花)란 불교의 연화장 세계에서 가져온 용어로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

『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 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

이곳을 연화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소백산 철쭉을 유명한 곳인데 철쭉이 피었을 때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하여 연화봉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영주시 산악회에서 설치한 연화봉 정상석

연화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천문대의 모습

연화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연화봉 정상에서 내 또래 정도된 부부가 다정스럽게 뭘 참으로 맛있게 먹고 있다

풍기 십승지 1구간에 걸었던 옥녀봉과 장군봉이 보이고...

연화봉 정상에 잠깐 머물렀는데 금새 추워지는 바람에 서둘러 희방사쪽으로 내려선다

내려서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급경사의 옆사면길을 내려서니...

철계단이 나오고...

돌탑을 지나 계속 내리막길로 향한다

암봉(14:45)

칼날같은 멋진 능선은 오르지 못하고 계속 옆사면길로 걸어간다

철난간 길을 따라 간다

이정표가 상당히 헷갈린다... 주차장은 뭐며, 제1주차장은 뭐여!

돌탑이 있는 안부(14:50)

희방사로 향하는 길은 무지하게 좋다

이정표(14:55)

편한 길을 가다가 내려서니...

쉼터(15:00)

희방깔딱재(1,050m:15:05)

연화봉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 2명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과일을 먹고 있다가 나에게 감을 주면서 같이 먹자고 한다

이곳의 지명이 희방깔닥재인데 아마도 희방사에서 오르는 길이 급경사인 모양이다

담 구간에도 연화봉에서 이곳까지 겹쳐지는 구간이다

이곳에서 저 출입금지라고 해 논 저곳을 넘어야 할 것 같다

희방깔닥고개에 있는 버스 시간표

희방사로 향하는 급경사의 내리막 길...깔닥고개라 할만하다

우아한 자태로 누굴 기다리시나?

산행을 끝내고 산문을 빠져 나온다

희방사 갈림길(15:25)

좌측으로 내려서면 희방폭포로 내려서고 우측은 희방사로 가는 길인데

희방사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화산 대종사 사리탑과 사리탑 비문이 서 있다

화산대종사 사리탑(우)과 사리탑비문 

범종각

지장전앞에 서 있는 7층석탑

지장전

희방사 지장전 현판 편액은 동곡당(東谷黨) 일타(日陀) 큰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이 속가인 일타스님은 불심이 깊었던 외증조 할머니의 감화로

 친, 외가를 포함하여 41명의 가족이 출가한 이야기로 유명하신 스님이다

지장전 내부의 모습

주불인 지장보살 뒷쪽의 시왕은 목각이 아닌 탱화로 조성되어 있다

범종각과 지장전을 들러보고 극락교를 지나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희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서

신라 선덕 여왕 12년(643)에 두운대사(杜雲大師)가창건했다고 한다

희방사는 누구에게 쉽게 모습을 나타나지 않는 외진 곳에 숨어 있다.
병풍처럼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연과의 균형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짓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햇빛만 잠깐 받아들일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희방사 창건 설화

“ 두운 대사는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소백산 연화봉 아래로 와서 동굴을 집 삼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어느 겨울밤 갑자기 호랑이가 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대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꽂혀 있었다. 불쌍히 여겨 비녀를 뽑아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뒤, 굴 앞에 인기척이 있어 나가보니,

웬 여인이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성껏 보살피니 곧 정신이 들었다. 사연을 들으니

여인은 호장(戶長) 유석(留石)이라는 사람의 무남독녀로서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었는데 별안간 눈앞에 불이번쩍한 뒤로 의식을 잃었다고 하였다.

 

영물인 호랑이가 지난번 자기를 살려준 데 대한 은혜를 이렇게 갚고자 했던 것이다.

때는 한겨울이라 깊은 산중이 눈에 덮여 길조차 막혀 있었다.

여인을 귀가시키려면 겨울이 지나야만 했다.

 

대사는 동굴 안에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함께 겨울을 지낸 뒤 여인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인의 아버지는 실종된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기뻐하면서 대사의 은혜를 갚고자 동굴 앞에 전각을 짓고 농토를 희사하였다.

또한 계곡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대사의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늘날 절이 위치한 행정구역인 수철리(水鐵里)는 곧 이 다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희방사라는 절 이름은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와 두운 대사의 참선방이라는

의미의 ‘방(方)’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안에서 동종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사찰측에서 극구 제지하는 바람에 촬영을 못했다

희방사(喜方寺) 대웅보전(15:25)

희방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두운조사가 소백산 남쪽 기슭 해발고도 850m에 창건한 사찰이다.

1568년(선조 1)에 새긴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1953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 희방사 동종 (경북유형문화재 226)과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으며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 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절 입구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림이 우거져 있으며, 사찰 아래쪽 계곡에는

내륙지방 최대 폭포인 높이 28m의 희방폭포가 있다.

서울로 가는 시간이 촉박하여 희방사를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가람을 빠져 나온다

희방폭포 가는 길

구름다리(15:35)

아랫쪽 희방폭포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희방폭포(喜方瀑布:15:37)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소백산 희방사 아래에 있는 소백산 중턱 해발고도

700m 지점에 있는 폭포로, 소백산 절경 중 한 곳이며 영남지방 제1의 폭포로 꼽힌다.

높이는 28m이며 소백산의 영봉 중 하나인 연화봉(1383m)에서 발원하여 희방계곡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요란한 굉음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직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 1420~1488)은‘천혜몽유처()’

즉 하늘이 내려준‘꿈에서 노니는 듯한 풍경’이라 평했다 한다.

연화봉에 이르는 최단 등산코스를 따라 가면 만나는 희방폭포는

희방매표소로부터 걸어서 약 15~20분 거리에 있으며 폭포 옆의 암벽에 설치되어

있는 철계단을 올라가면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과 폭포 위의 소()를 볼 수 있다.

폭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인 희방사가 있다.

희방폭포에서 바라본 구름다리의 모습

폭포를 지나 희방사 매표소로 향한다

희방사 탑비

희방사 매표소(15:45)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내려가는 차량을 히치하려 했으나

마땅치 않아 택시가 있기에 물어보니 12,000원이란다... 너무 비싸다고 하니 구간

요금제라 어쩔 수 없다며 배짱을 팅기는데 방법이 없다.

잠시후 얼마전 깔닥고개에서 감을 얻어먹은 젊은 친구들이 내오는데 합승을

하자고 제안을 하니 쾌히 승락을 하는 바람에 1인당 3,000원씩에 희방사역으로 향한다

희방사역(16:00)

희방사 주차장에서 10분 조금 지나 희방사역에 택시가 도착하는데 아무리

합승을 했다손 치더라도 10분 조금 넘는 거리에 12,000원이라 바가지 쓴 기분이다

역에 도착하여 좌석이 아닌 입석을 예매하고 화장실에 들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는다

희방사역에서 서울가는 열차에 오른다.(16:35)

안동에서 오는 열차는예정시간보다 20여분 늦게 도착한다

좌석이 아닌 입석 열차표를 끊어서 4호 열차인 식당칸에 들어서니

빈 자리가 그대로 있어서 횡재한 느낌이지만 아쉽게도 매점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어 베낭에 남은 소주 한병과 과일로 베낭털이를 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청량리역이다

희방사역발 청량리역행 열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