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5년 11월 15일
☞ 산행날씨: 짙은 박무에 흐린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21km +어프로치 2.5km / 8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죽령-초소-쉼터-바람 전망대-화장실-제2연화봉-고리전망대-소백산천문대-연화봉-희박깔닥재-966m봉
곰너기재-976.8m봉-금계바위-암릉-금강사 갈림길-전망대-사과밭-금계리-금계중학교-무릉리 입구
임실마을 버스 정류장-교촌2리-풍기향교-장호교-동양대학교 후문쪽-두등들마을-무명묘지- 삼각점봉
도간재-금계2리-금선정-풍기역
☞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 충북 단양군 대강면, 단양읍
세상사 모든게 동전의 양면과 같은게 신의 섭리인 모양이다
지난 그렇게 심하던 가뭄 때문에 온 나라가 고생을 하더니만 요즘은 주말만 되면
비가 주적주적 내리니 가뭄 해갈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독립군으로 산행을 하는
범여로서는 비가오면 이만저만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거기다가 이제는 청승맞게 홀로 비맞으며 하는 산행이 싫어서 가까운 도봉산을
갔다 왔지만 2주연속 맥 산행을 미룰수가 없어서 늦은 저녁 시간에 베낭을 챙겨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데 매스컴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자행된 이슬람극단주의(IS)들이
자행한 테러로 인해 100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는 보도를 접한다
요즘 자꾸만 팍팍해지는 삶에 인간들이 왜 이리 잔인해지는지...?
풍기 십승지 구글어스
풍기 십승지 지도
19시 35분발 버스표
동서울발 → 영주행 버스
버스에 오르는데 다행히 비는 그치고 기상청의 예보로는 내일을 비가 오질 않는다고 하니
일단 믿어 보기로하고 영주로 향하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떠니 영주 터미널이다
영주시외버스 정류장(21:45)
5주 사이에 3번이나 온 영주... 오늘이 마지막이긴해도 이젠 이곳의 이동반경은 도사급이다
어디로 가서 잠을 자고 먹고 어디에서 차량을 이용하면 어디까지 간다는 걸
오늘도 전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터미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인 찜질방으로 향한다
스카이타운 찜질방(22:30~05:30)
어림지 해장국집(05:40~06:20)
찜질방에서 05시 3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온탕에 15분정도 몸을 담근 다음에
찜질방에서 7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해장국집에 와서 든든하게 이른 아침을
먹고 식당문을 나오니 어제밤에 예약한 택시가 식당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
죽령(竹嶺:696m:06:55)
죽령의 단양쪽으로 휴게소쪽에서 택시에 내리니 짙은 안개로 인하여 10여m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이고 안개 탓인지 아직도 주위는 짙은 어둠속이다
높은 지대라 그런지 날씨는 생각보다 상당히 차갑다
베낭에서 서둘러 자켙을 꺼내 입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07:05)
산행을 시작한 지 30여분이 다 되어 가건만 아직도 어둠이 걷히질 않는다
쉼터 정자(07:25)
죽령에서 소백산 천문대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7.2km를 걸어야 하니
산을 타는 산꾼들은 정말 멋대가리 없는 코스이지만 그래도 가야하니 어쩌랴
천문대 때문인지 쉼터나 공터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행성에 대한 모형과 설명이 있다
백두대간 남.북진 할 때 2번이나 똑같은 코스를 걸었지만 어둠속에 지난 탓이라 그런지
밝은 날인 오늘에는 왠지 모르게 모든것이 낮설기만 하다
첫 구간이라 그런지 태양에서 가장 먼 행성인 명왕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바람맞이 전망대(07:35)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풍기읍내가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련만 안개 때문에 모든게 하얀 여백이다
잠시 안개가 걷히면서 연화봉가는 길은 뚜렸하게 보인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가 싶더니... 금새 또 하늘은 짙은 안개에 갇혀 버린다
구조 이정목을 지나니...간이화장실이 나오고...
간이화장실(07:50)
낙석주의 구간을 지나니...
묘지를 만나는데 亡者는 외롭지 않겠다
소백산강우레이더 관측소(08:05)
우측으로 오르면 제2연화봉 정상인데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가 있다.
이 관측소는 남한강 및 낙동강 상류 유역의 분수령에 위치하고 있어 관측반경
100km이내의 강우현상을 매 2.5분주기로 입체적으로 관측하여 면적단위의
지표면 강우량을 제공하며 조망용 전망대까지 있으나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포기하고 좌측 등로로 5m정도 향하니 제2연화봉 표시석이 있다
제2연화봉(第2蓮花峰: 1,357m:08:05))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와 충북 단양군 단양읍 사이에 위치한 봉으로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순흥읍지』에서 희방용추를 설명하는 내용에 연화봉(蓮花峰)이 나온다.
또 『조선지형도』에는 현재의 제1연화봉이 해당하는 곳에만 연화봉이 적혀 있고,
일본어로 한글 발음이 병기되어 있는데 이런 식의 이름은 전국의 곳곳에 산재한다.
이들 지명은 거의 모두가 연꽃처럼 생긴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하고 있다.
제2연화봉에서 비로봉에서 이르는 일대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로서 키작은 나무와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육산(陸山)이기 때문에 산세가 완만하고 산의 모양은 둥그스름하다.
그 모습은 못 위에 솟아 있는 연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지명은 풍수지리의 형국론이나 불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2연화봉 정상은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에 내어주고 자기 자리도 아닌
엉뚱한 곳에 표시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단양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로 인해 다시 등로는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광장(08:20)
이곳 광장은 토성을 주제로 꾸며논 탓인지‘고리전망대’라 부른다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안보인다
전망대(08:40)
화성별동산
소백산 천문대(08:50)
우리나라 천문대 1호인 소백산천문대는 1978년 준공과 함께 관측활동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직경 60㎝가 넘는 반사 망원경을 최초로 설치해 우리나라
천문학의 신기원을 연 곳이기도 하며 소백산 천문대는 대전의 대덕전파 천문대와
영천에 있는 보현산 천문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천문대이다
200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이고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지
40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천문은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통로이자 문명을 이끄는 첨병이었다.
우리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신라와 고구려에 이미 첨성대가 있었고
일본에서 7세기까지 활약한 천문가의 상당수는 백제인이었다.
이런 전통은 고려의 서운관과 조선의 관상감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오늘날 1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혼천의와 천체망원경은 천문인들의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지금 이곳은 한참 공사중이다... 천문대를 가로질러 연화봉으로 향한다
마지막 화장실을 지나 연화봉으로 향하는데 소백산의 아침바람은 상당히 강하다
별빛탐방로(08:55)
연화봉으로 향하는 이정표
야생화밭이라는 전망대를 지나 연화봉으로 오른다
연화봉(蓮花峰:1,394m:09:00)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단양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단양군이 1987년 5월 31일 제5회 소백산 철쭉제를 기념하며 세운 표시석이
어둠속에서 산꾼을 반긴다. 저 아래의 풍기읍내의 불빛은 아직도 밤을 알리고
세차게 불어오는 北風寒雪은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연화(蓮花)란 불교의 연화장 세계에서 가져온 용어로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
『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 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
이곳을 연화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소백산 철쭉을 유명한 곳인데 철쭉이 피었을 때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하여 연화봉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영주시 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
이곳 정상에 서니 얼마나 바람이 드센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연화봉에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희방사쪽에서 부부인듯한
남.녀 등산객 4명이 올라오는데 부탁하여 인증샷 하나를 남긴다
이 등산객이 오늘 산에서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등산객이었다
연화봉에서 바라본 풍기방면...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안보인다
연화봉 정상 이정표
연화봉 정상에서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등산객들과 작별을 하고
희방사 방향으로 향하는데 이곳부터 희방깔닥재까지 1.6km구간은 지난번
구간과 중첩되는 구간이다... 세찬 바람에 추위가 엄습해와서 서둘러 길을 떠난다
쉼터(09:05)
산국화
죽령에서
소백산 연화봉
끝 먼 하늘
돌부리 차며
촉촉한 가슴
안기어...
변덕바람
구슬 땀도
솔잎향
널부러져
스러질 듯
산국(山菊)
급경사의 내리막을 향한다
짙은 안개속의 돌무더기도 지나고...
희방사 골짜기는 안개가 걷히면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풍기 십승지의 핵심구간인 금계촌도 등로사이로 조금씩 보이고...
사물이 조금씩 뚜렸이 보이고...
희방깔닥재(1,050m:09:40)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어제 비가온 탓인지 사람들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이곳에서 국공파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을 직진하여 禁線을 넘어 십승지를 이어간다
1,060m봉(09:45)
희방깔닥재에서 5분정도 빡세게 치고 오르니 1,060봉이 나오고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대충산사 팀들의 시그널이 많이 걸려있다
돌무더기의 흔적을 지나는데 낙엽이 수북하여 산꾼들의 흔적은 없으나 등로는 뚜렸하다
지나온 연화봉은 아직도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멋진 금강송들도 가끔씩 보이고...
아무도 걷지않은 낙엽이 푹신한 등로... 나홀로 호젓하게 걷은 이 기분...진정한 힐링이 아닐까
안부(10:00)
등로 아래에는 펜션인듯한 주택들이 가끔씩 보이고...
능선을 걷는데 세찬 바람이 꽤나 차갑다
뚜렸한 직진길을 가니 낭떠러지가 나와서 되돌아서 좌측 사면길로 내려선다
철쭉 군락지의 사면길을 내려서니 엄청난 급경사가 나오고...
얼빠진 넘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진달래 한그루가 착각을 한지는 몰라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하기야 얼바진 넘이야 어찌 니 넘뿐이겠냐... 마치 민초들의 안위나 민생은 해결할
생각은 피래미 ㅈ(?)만큼도 자기 밥그릇 챙기는데만 열중하는 열심인 여의도의
300명의 패밀리들도 니만큼이나 얼빠진 자들이겠지... 제발 정신 좀 차리시게...
곰너기재(10:40)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와 창락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소백산관리사무소 매표소의 달밭골과
당골 방향의 갈림길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약 400m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계곡 왼편 높은 곳에
큰 골짜기가 있고, 이 골짜기 고개 너머에 창락리의 곰수골이 있다.
곰너기재는 삼가리의 당골에서 창락리의 곰수골을 넘는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며 곰수골은 한자로 표기해서 웅수동(熊水洞)이라고 하는데, 이 지명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곰수골은 산이 깊어 곰이 살았다고도 전해지며, 그래서 현지에서는 그 고개를 곰넘이재라고 부른다.
오늘 산행후 처음으로 베낭을 내려놓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이곳에는 넓은 평상과 이정표(←유석사 1.3km, 당골→ 1.9km)가 있다
다시 빡세게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드는 구간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지나온 소백산 연화봉의 모습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을 접경으로 한 소백산은 연간 100만명의 등산객이 찾아오는 ‘사람을 살리는 산’으로 불린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격암유록의 저자인 남사고 선생이 소백산을 바라보며 말에서 내려 절을 하면서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다는 구절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영주시는 영주의 위도가
북위 36.5도인 점에 착안해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도시, 36.5도 소백힐링 영주’라고 홍보중이다.
소백산은 주봉인 비로봉(1,439m)과 국망봉(1,421m), 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이
병풍처럼 영주시를 감싸안고 있는 전체 면적 약 323㎢의 아름다운 산이다. 관속식물 1천67종,
포유류 23종, 조류 82종, 양서류 8종, 파충류 6종, 담수어류 29종, 곤충 1천569종이 살고 있어
그야말로 자연의 보고로 꼽힌다. 소백산 정상에는 수많은 철쭉이 피기 때문에 매년 6월에는
소백산철쭉제가 열리기도 한다. 또 수백년 된 주목군락지가 연화봉 정상에서 단양쪽으로 펼쳐져
있어 사시사철 등산애호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백산 등산기중 신재 주세붕 선생이 남긴 유산록(遊山錄)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풍기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이황 선생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 가장 앞선 소백산 유람록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 선생은 “나는 젊었을 때부터 영주(榮州)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했다.
그때 소백산은 머리만 들어도 바라볼 수 있고, 발만 내디디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허둥지둥 살아오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워하고 마음만 달려간 것이 40년이다”라고 적었다.
49세의 나이에 소백산을 유람하고 이렇게 밝혔으니, 아주 어려서부터 소백산을 동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백산의 역사는 신라 초기 158년(아달라왕 5)에 열린 죽령(689m)과 함께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경계를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이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가 신라 방면에 세력을 떨칠 때도 광개토왕은 죽령을 넘지 못했다. 또한 통일신라 때 9주5소경중
금관소경을 제외한 4소경이 모두 소백산맥의 외곽지대에 설치되었으며, 죽령은 신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였다.
송이 채취기간이 지났으니 고발은 당하지 않겠지
무명봉(11:10)
무명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976.8m봉으로 향한다
푹신한 낙엽길을 5분정도 걸어니 삼각점이 있는 976.8m봉이 나온다
976.8m봉(11:15)
976.8m봉 오르는 등로 우측 사면으로 편한 길이 나있지만 편한 사면길을 버리고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니 바람에 날리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개와 3등 삼각점만
있을 뿐 산꾼들이 찾지 않은 외로운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서니
등로는 전혀 보이질 않아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고 한참을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사면길 등로를 만나 십승지의 길을 이어간다
967.8m봉 삼각점(△ 단양 307 / 2008 재설)
우측으로 송이밭인지 하얀 노끈이 등로 옆으로 계속 처져있다
移場한 듯한 묘지의 흔적을 지나고...
處士迎日鄭公 묘지(11:30)
묘지 옆에는 참소주(예전의 금복주)병과 경주법주 병이 많은데 生前에 경주법주를 즐기셨던 모양이다
등로가 갑자기 사라졌다... 희미한 길을 헤매다 곧 좋은 등로가 나온다
멧돼지의 횡포
잡목이 무성하고 가시나무들이 범여의 얼굴을 할킨다
공터(11:50)
십승지 등로는 우측의 반원형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아래에 풍기 십승지 상징인
금계바위가 이곳에서 좌측 100m 아래에 있는데 무심코 지나기 딱 좋은 곳이다
소백산의 가을은 저물어만 가고...
넓은 공터에서 100여m 정도 내려가니 풍기 십승지의 메인인 금계바위가 보이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거기다가 뒷쪽으론 소백산 비로봉과 국망봉이 안개에 휩싸여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이나, 워낙 급경사에다 엄청난 낭떠러지라서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바로 앞 전망암에서 멋진 仙景을 감상할 뿐이다
금계바위(金鷄巖)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금이 박힌 닭 모습)바위가 있는 금계리는 십승지 중에서도 제일 첫번째 승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한 소백산의 줄기에 위치한
이 금계마을에 정감록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서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에정감록 책 하나만 믿고 이북에서 피란온 이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금계 바위는 정감록 감결에서 풍기 차암(車岩)이라고 기록된 바위다.
본디 수리 바위였던 것이 한자음으로 바꾸면서 차암이 됐다.
‘수리’는 옛날 경북 봉화 지방에 존재했다는 소라국과 같은 말이며
솟대란 뜻이 되는데 솟대는 신이 깃든 바위(神岩)을 말한다.
여러 비결서에는 이 금계바위 주변이 능히 1만평 명이 피할 수 있는 성지로 기록되어 있다.
풍기에는 정감록 비결을 믿는 사람이 많이 이사와서 살던 곳이다.
일제 말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말세가 문턱에 다가왔다고 믿었다. 그
들은 정감록 비결에 적힌 ‘말세에 재앙을 피하여 십승지로 들어가라’고
한 대로 십승지의 으뜸인 풍기땅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풍기에 정착한 비결파들은 풍기읍에 직물 공장을 세워 크게 번성했다.
일제 말기 중앙선 철도가 뚫리면서 직조 산업은 크게 번성하여 한때는
풍기 읍내에 직물 공장이 80여군 데에 이르고 이 공장들에서 일하는 직공들이 2천명을 넘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농촌이 피폐해지면서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비결파의 자손들도 선조들이 애써 찾은 복지를 버리고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정감록 감결에는 이런 예언이 있다. ‘십승지에 먼저 들어간 이들은 모두 되돌아 나올 것이며,
중간에 들어간 사람은 거기서 번성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시대 말기에 십승지로 찾아 들어간 사람은 먼저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풍기 금계 마을도 십승지로 완벽한 곳은 아니다.
감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왕의 수레가 풍기 남쪽으로 가면 약간 화가 미칠 것이다’
왕의 수레는 임금의 행차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외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한 일이 두 번 있다. 고려 때 홍건적이 침입하여 공민왕이 대구로 피난한 적이 있고
6.26전쟁때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다.
금계바위는 소백산 제1연화봉에서 풍기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갈 지(之)’자로
내려오는 중간에 불쑥 솟아오른 멋진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금계바위이다
금계바위는 바위가 몇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닭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금계바위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마치 하늘의 닭인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을 일제 강점기에 광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곳이다
금계바위 주변에 금계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금계1리에 임실 쇠바리 마을의
논에는 바위들이 오밀조밀 박혀있어 마치 부화된 병아리가 노는것 같아
병아리 매미라고 부른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로서 격암유록(格菴遺錄)이란 비결서를 남긴 남사고(南師古)는
풍기에 와서 소백산을 바라보고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하며 그의 저서에 병란을 피하는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의미인 ‘양백(兩白)’은
선천세계의 환란속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피란하는 십승지의 대명사로도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후에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은 소백산에 욱금동이 있다고
했으며 천석(泉石)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할 십승지 능선
넓은 공터로 되돌아와서 3분정도 걸으니 멋진 암릉이 나온다
암릉(12:00)
멋진 암릉에 도착하여 금계바위를 원경(遠景)으로 바라본다.
어느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이곳을 금계바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기(誤記)인듯 싶다
능선에서 바라본 금계바위의 모습
소백산 주능선이 시원하게 보이건만 비로봉과 국망봉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저 아래 금계촌이 보인다
금계촌은 지금의 영풍군 풍기읍 삼가리와 금계리, 욱금리 일대이다.
이곳은 소백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과 죽령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치는 곳으로 흙빛은 맑고 깨끗하며,
소백산에서 뻗어 내린 얕으막한 산들이 사방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서쪽과 북쪽은 도솔봉에서 국망봉에
이르는 소백산 줄기가 병풍처럼 솟아 있고, 동쪽과 남쪽은 낮은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펼쳐져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막혔으되 동쪽과 남쪽은 별로 높지 않은 구릉이어서 시야가 훤하게 트인 작은 분지다.
대개 이런 곳을 풍수 지리학에서는 살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꼽고 있는데 실제로 어떤 사람이든지
이곳에 오면 평온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금계촌 일대는 정감록을 믿고 십승지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인 적이 없던 곳이다.
일제시대 말기인 1930년대에는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떼를 지어 살았고,
그 뒤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남쪽으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봇짐을 싸 들고 와서 골짜기마다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풍기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에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이 특히 많았는데
그 이유는 정감록 비결 중에 ‘황해도와 평안도는 다시 오랑캐 땅이 되어 사람의 그
림자도 없어질 것’ 이라는 예언이 있기 때문인데 그 지역이 북한 땅인 것을 보면
그 예언이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금계 마을의 상징은 금계바위(金鷄岩)인데 풍기에서 삼가동(三街洞)을 거쳐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을 오르는 길목 오른쪽 산꼭대기에 있다. 금계바위는 십승지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금계촌에서도 능히 1만 여명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성지로 숭배하는 곳이다.
금계바위 주변에 실제로 금이 많이 묻혀 있고, 금계 바위 자체에도 금이 많이 들어 있으며, 또 닭의
눈알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영롱한 보석이 두 개 박혀 있었는데 어느 욕심 많은 사람이 그 보석을 뽑으려고
정과 망치를 들고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금과 보석을
캐내려고 금계 바위 주변을 마구 파헤치고 바위를 깨부수어 원래의 모양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나무가 많지 않아 장마철에 산사태가 여러 번 나서 산 모양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남서쪽 능선을 바라보니 1구간에 걸었던 장군봉과 길목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걷는데 우측으로는 송이밭인 모양이다... 하얀 노끈이 계속 보인다
무명봉(12:30)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송이채취꾼들의 움막이었던 곳은 철거되고 이곳에서 우측의 급경사로 내려선다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
좌우로는 송이버섯밭인가보다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후라이판과 버너
우측으로 내려서니...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길
갈림길(12:45)
우측으로 낙엽이 수북한 임도가 있고 좌측으론 십승지길인데 우회하란다
그렇게는 못하지... 송이철도 아니고... 원칙을 지키면서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무명묘지(12:47)
갈림길(12:50)
이곳에서 좌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우측은 길이 보이질 않는다
좌측으로 내려서면 금계호(삼가저수지)로 향하는 등로이고 우측으로
십승지를 이어가는 곳인데 독도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가느다란 소나무가 어지럽게 넘어져 있다
무명묘지 한 기를 지나...
호젓한 등로
원주변씨 할머니 묘소
또다른 무명묘지를 지나니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금강사 갈림길(13:00)
희방사 깔닥재를 지나 2번째 만나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풍기인삼개삼터길이란다
다시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고도를 조금 높이니... 커다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13:05)
데크목으로 만든 전망대에 오르니 풍기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기읍내의 전경
풍기는 신라시대에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때는 기주(基州)라고 불렀다.
현종 9년(1018년)에 길주(지금의 안동)에 예속되었다가 명종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안동부에 소속된 현(縣)이 되었고 공양왕(1390년) 때에
은풍(銀豊)과 합쳐졌고,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됐고,
문종(조선조 5대 임금)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간직하고 은풍의 풍(豊)과 기천의
기(基)를 따서 풍기(豊基)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되면서 풍기라는 지명이 사실상
이 때 처음 생겼다.
그 후 세조3년(1458년)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순흥부가 폐부(廢府)되면서
대부분 풍기에 예속되었다가 숙종 9년(1683년)순흥부가 회복되면서 다시 순흥부에 귀속된다
고종 32년(1895년) 조선8도를 23관찰부로 개편함에 따라 풍기군은 안동관찰부에 예속되고
이듬해 13도를 개편함에 따라 비로소 경상북도 풍기군이 되었다
소박한 범여의 점심밥상
조금 늦은 시간에 라면에다가 떡국과 오뎅을 넣어 영주에서 산 선비촌 막걸리 한병으로
40여분간의 여유로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행장을 꾸린 다음에 금계중학교로 향한다
전망대에 세워져 있는 풍기개삼터길 안내판
가삼재배(家蔘栽培)의 시원지 풍기
인삼을 재배하는 것을 ‘가삼재배’라고 하며 그 시원지(始原地)를 풍기지역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조공 등을 통해 중국에 알려진 인삼은 고려조와 조선시대에는 의무에 가까운
조공무역의 물품이 돼 버렸는데 이 때문에 산삼이 많이 나는 주산지의 백성들은
산삼공납으로 인한 고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고려말 순흥 출신의 근재 안축 선생은
삼탄시(蔘歎詩)를 써 백성들의 고통을 표현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런 현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중종조 신재 주세붕이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하도록 해 그 수요를 충족하고자 했다.
1541년 주세붕 선생은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한 결과 본래부터
산삼이 많이자생할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삼을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했다.
이때 산삼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 ‘개삼터’에 시험 재배한 것이 인삼재배
즉, 가삼재배(家蔘栽培)의 효시가 됐으며, 풍기군수로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1551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해 개성지역에도 새로운 인삼재배법을 보급했다.
우리나라 인삼 가운데서도 풍기 인삼의 인지도가 높은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배 인삼의
효시인 역사성이 한 몫을 하며 자연조건 또한 우수해 북위 36.5도에 위치한 인삼재배 적지로
평균 7시간이 넘는 일조량과(전국 평균 6.3시간)11.9도의 높은 일교차(전국 10.2도)로
조직이 치밀하고 저장성 또한 우수해가공에도 적합한 최고의 상품이라고 한다
데크목 전망대를 내려서니 무명묘지 한 기가 나오고...
갈림길(13:50)
이곳에서 좌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길이 없는 곳으로 향한다
가시와 칡넝쿨을 비롯한 잡목을 헤치고 5분정도 지나니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뚜렸한 좌측길로 내려선다
칡넝쿨 사이로 바라본 풍기읍 금계리와 교촌리의 모습
칡넝쿨을 헤치고 내려서니 전기선이 설치된 사과밭이 나오는데 스틱으로 대보니
전기가 통하지 않아 전기선 철조망을 넘어서 사과밭길로 십승지 등로를 이어간다
사과밭으로 들어서니 사과밭은 수확이 끝난 느낌인데 나무에 사과 한 두개씩 달려있고
바닥에도 사과가 널려 있는데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하지
않았던가...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냥 길을 걷는다
두릅나무와 농막이 있는 곳을 지나고...
반대편의 사과밭은 지금 사과 수확이 한창이다
트랙터에 사과를 싣는 분에게 인사를 했더니만 사과를 한번 먹어보라고 하면서
사과 3개를 주면서 산도 아닌곳에 베낭을 메고 다니는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이곳 풍기읍 금계리는 풍기인삼의 첫 시배지로 유명한 곳인데 인삼밭은 보이지
않고 주위에는 온통 사과밭이다
계속 이어지는 사과밭 등로
사과밭에서 바라본 풍기읍 금계리
소백산 아래 자리 잡은 동네인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 중 제1승지로 꼽힌다.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격인
정감록에 따르면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십승지’로 전국에서 10곳을 선정했다. 그 첫째가 영주시 풍기읍
금계마을이며, 그 뒤로 봉화군 춘양, 충남 보은 속리산, 전북 남원 운봉,
예천 금당실, 충남 공주 유구읍,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전북 무주군 무풍,
전북 부안군 변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째는 경남 합천군 가야산이다.
영주시 풍기읍은 십승지 중 으뜸으로 금계바위(금이 박힌 닭 모습 바위)가 있는
금계리는 그동안 나쁜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금계마을은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정감록 책 하나만 믿고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과 그 후손이 아직도 많이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평북 출신이 많다고 한다. 평북 사람이 풍기로 온 것은 다른 이북 출신처럼
역시 풍기지역이 정감록에서 밝힌 비십처(比十處) 흉년불입(凶年不入)
병화불입(兵火不入)과 부합되는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사과밭 끄트머리에서 전기 철조망을 넘어 우측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묘지 아래의 마을 도로로 내려선다
묘지 좌측에는 천안전씨의 숭모제단이 있고...
마을 도로를 따라서 금계중학교 쪽으로 향한다
소백산 둘레길 이정표가 있는 곳을 지나고...
마을 한복판을 기로질러 나가니 금계중학교가 보인다
금계중학교 후문 방향으로 향한다
금계중학교 후문
금계중학교 교정
금계중학교 교훈
운동장을 지나 정문으로 향한다
금계중학교 정문(14:15)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니...
임실마을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풍기읍 금계1리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로 풍기향교(豊基鄕校)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創建) 되었다가 1735년에 교촌리 현 위치로 이건(移建)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구교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영주군
풍기면 금계1구로 개칭되었고 이 마을은 산재해 있는 마을로 임실 안마, 부계발 밭마 쇠바리,
잿밭, 용천동, 공원밑이 행정구역 으로는 모두 금계1리로 되어 있어 풍기읍에서 큰 마을로 평을 받고 있다.
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인삼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향교앞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잠시 후 풍기향교를 만난다
풍기향교(豐基鄕校: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14:20)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에 있는 향교로서 조선시대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본래는 금계동 임실마을 서편에 있었으나, 1541년(중종 36년)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문묘에 참배한 뒤 그 위치가 읍에서 너무 멀고 식수(食水)가
불편하다 하여 이듬해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1692년(숙종 18년)에 군수 정증(鄭䎖)이 구지(舊址)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년)
군수 임집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양심루(養心樓)와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소실되었다.
1971년에 헌관실(獻官室)을 보수하고 1977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1980년에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에 서무(西廡)를 보수하고 1985년에 동무(東廡)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7칸의 명륜당, 각 4칸의 동무와 서무, 4칸의 헌관실,
내삼문(內三門)·관리사(管理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음력 2월과 8월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으며, 소장전적 가운데
《풍기향교향안 豐基鄕校鄕案》·《향교액안 鄕校額案》·《교안 校案》·《강학소계안 講學所契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풍기향교의 안내판
풍기향교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둘러 보려고 했으나 자물쇠가 잠겨있어서
다시 버스 정류장 앞으로 되돌아 와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장호교 쪽으로 향한다
장호교 가는길
도로에서 바라본 풍기향교
풍기 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5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는 금계동 임실마을 서편에 있었으나, 1541년(중종 36)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문묘에 참배한 뒤 그 위치가 읍에서 너무 멀고 식수가 불편하다 하여 이듬해(154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풍기읍 교촌1리의 모습
조선 후기 1849년 경 작성된 풍기군지에 보면 교촌리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에 속했다.
당시 서부면에는 서문리(西門里), 북문리(北門里), 고로촌리(古老村里), 신교리(新校里)[교촌],
구교리(舊敎里)[금계1리], 등구리(登邱里)[등드들], 백야동리(白也洞里), 욱금리(郁錦里)가
있었으며 순흥과 접경을 이루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풍기군 서부면의
신교리와 등구리를 합하여 ‘교촌리’라 칭하고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이곳을 교촌이라 한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이 마을에 정림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 이름을 따서 정림촌(井林村, 亭林村)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풍기향교는 원래 금계1리 임실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주세봉 군수가 부임하여 이 마을
정림사 절터로 옮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동명도 신교리(新校里)가 됐고, 사람들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마을, 향교마, 향교말, 신교리 등으로 불러왔다.
교촌리 지나면서 만난 감나무
장호교(14:30)
장호교에서 바라본 금계천
옛 지명은 뒷창락이라고 했는데 가뭄탓인지 물은 별로없고 잡풀만 무성하다
장호교를 지나 삼거리에서 교촌2리 등두들 표시석 있는 곳으로 들어선다
동양대학교 교정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도로에서 조금 들어서니 동양대학교 건물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교촌2리 등두를 마을로 향한다
도로에서 바라본 1구간에 걸었던 삼형제봉과 도솔봉, 묘적봉의 모습
우측으로 꺽어져 등두들 마을로 들어선다
등두들마을(풍기읍 교촌2리 소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등구리이다. 속칭(俗稱) 둥두들, 등드들, 등고, 등구리라 불리어왔다.
그 유래는 마을을 들어가려면 언덕을 올라 들어 감으로 등구라 하였을 것이다.
마을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동양대학교 신사임당 기숙사를 바라보며 산으로 접어든다
수로를 지나고 묘지 한기가 있는 곳을 치고 오르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만난 무명묘지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한 능선 우측 아랫쪽엔 비닐하우스가 있고...무명묘지 몇기를 지나니...
부부합장묘(14:55)
등로는 비교적 뚜렸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금계2리의 모습
이 마을은 속칭 장생이, 장시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리어 왔다.
그 유래는 마을 지형이 긴 배(船) 모양 같다 하여 장선이라고 이름하였다.하고,
또 일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음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長善)으로 불렀다 한다. 이 마을에는 금선정과 욱양서원이 소재하고 있다.
편한 길에다가 고도 편차가 거의 없기에 빠른 속도롤 걷는다
파평윤공 묘지(15:00)
가선대부겸 호조판서를 지낸 파평 윤공의 묘지를 지난다
호조(戶曹)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행정기관인 육조(六曹)중 하나로
호구, 공납, 부사, 조세 및 국가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였다.
오늘날의 기회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해당하는 부서이다
좌측의 금계리 방향의 산림에는 경북대학교 농림사관학교 약초 재배지가 있다
y자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또다른 y자 갈림길(15:05)
등로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있는 무명묘지
나뭇가지 사이로 금계호(삼가저수지)가 보인다
무명봉(15:10)
등로 우측으로는 미곡리(味谷里)가 보인다
풍기에서 순흥 으로 들어가는 도로 서쪽에 들어가 있어 도로(道路)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며, 풍기읍 산법리와 순흥면 태장리, 안정면 단촌리와 대평리를 접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안마, 웃마을, 안맥기실, 바깥 맥기실, 목기실(木器室), 모계실 (牧鷄室), 미곡리라 한다.
고려말(高麗末)에 나라에 고관대작(高官大爵) 으로 있던 신하들이 이 마을에 와서 피난을 하던 중
산적(山賊)들의 습격을 많이 받아 폐동(廢洞)이 되었다가 약 250년 전부터 다시
이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경북대 약초재배지 철조망을 따라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삼각점봉(15:20)
삼각점(△영주451 / 2004복구)
신 경수 선생님의 반가운 시그널을 만나고...
계속해서 원형 철조망을 끼고 등로를 이어간다
마구 파헤쳐진 묘지... 묘지를 넘으니 여인의 乳頭처럼 생긴 이자산이 보인다
이자산(二子山:621m)
선조때 정승 유영경(柳永慶)의 둘째 아들(二子)이 서거하여 이 산에 입산 하였다 하여
이자산(二子山)이라 불렀으며 유영경(柳永慶)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소북(小北)의
영수. 북인이 대북(大北) ·소북(小北)으로 분당될 때 소북파의 영수가 되었고 같은
소북인 남이공(南以恭)과의 불화로 자기추종자들을 이끌고 탁소북으로 분파하였다.
선조 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 일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慶興)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는데,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었다
저 멀리 태백산구간이 아련히 보이는데 금성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꽤하다가
형인 세조에게 무참히 생을 마감한 한스러움인지... 오늘따라 산그리메가 애절해 보인다
갈림길(15:30)
2주전 3구간을 걸었을 때 만났던 길이니 이곳을 방점으로 풍기 십승지
구간을 완벽하게 마감을 짓고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서 도간재로 향한다
2주전에 만났던 사과밭
도간재(15:35)
풍기읍 욱금리에서 순흥면 배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좌측으로 커다란 사과밭이 있고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는데 예전에 옹기굽는 집들이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이곳에서 4구간에 거친 풍기 십승지 산행을 마무리하고 시멘트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 가는데 10여분을 걸어오니 우측으로 금계호 둑방이 보인다
장생이 녹색체험관(15:50)
이 지역이 풍기읍 금계2리인데 이 마을은 속칭 장생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러왔다.
그 유래는 장승(長生)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장생이, 지형이 긴 배 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이, 착한 사람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동(長善洞) 등으로 불렀다 한다.
마을 가운데 있는 금선교를 기준으로 위는 웃장시이 아래는 아랫장시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생이는 십승지의 관문으로 이 마을을 통과해야 욱금동, 삼가리로 갈 수 있었다
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금선정교 다리가 나온다
금선정교(15:55)
다리를 건너니 우측으로 금선정 이정표가 보이길래 그쪽으로 향한다
금선정(錦仙亭:16:00)
정자가 들어선 금선계곡은 조선 중기 문신 금계 황준량(1517~1563)이 생전에 즐겨 찾던 곳이다
어릴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렸던 그는 1537년 생원이 된 후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던 인물이다. 이후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재임하다 1563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예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계곡 바위절벽을 찾았던 금계는 “소백 운하는 어디가 제일인가.
금선대 풍월은 스스로 무엇과도 비할 길 없구나”라며 금선계곡과 금선대의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정자를 이고 있는 바위절벽 ‘금선대(錦仙臺)’
역시 금계가 지어준 이름. 이후 1756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송징계가 바위벽에 ‘錦仙臺(금선대)’란
글자를 새겼고, 1781년 이한일 군수가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이라 이름 붙였다.
1785년 이대영 군수는 ‘금선정’ 현판을 당시 목사였던 조윤형의 글씨를 받아 새겨 걸었다.
금선계곡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금선정의 유래 안내판
관리가 잘 안된탓이지 많이 망가져 있다
금선정 바로 위에도 멋진 정자와 화장실 주차장이 있지만 관리는 엉망이다
다시 금선정교(16:05)
다리에 도착하니 RV차량이 한 대 지나가는데 손을 드니 풍기역까지 태워다... 고마워요
도간재에서 금계2리를 거쳐 내려와 금선정을 주마간산으로 구경하고
나오는데 자가용 한대가 지나가기에 풍기역까지 태워 달라고 하니
타라고하여 풍기역 입구까지 편하게 도착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역으로 향한다
풍기역 입구에 있는 풍기인삼시장
고마운 분이 이곳까지 태워 주셨다
풍기역(16:15)
풍기역에 도착하여 표를 예매하는데 17:40분 새마을 열차와 18:11분 무궁화 열차이다
무궁화 열차를 예매하고나니 2시간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뭐~~~하지! 하는 수 없이 역에서 가까운 목욕탕에 가니 요금이 5,000원이란다
넘 비싸다... 목욕탕 카운터를 보는 젊은 친구와 20분내로 나오는 조건에 3,000원에
목욕탕으로 들어가니 손님이라곤 온 몸에 용의 문신을 그린 깍두기 한 넘과 나와
단둘이... 하도 깍두기 넘이 겁이(?)나서 눈길도 안 부딪히고 15분만에 목욕탕을 나온다
풍기역전앞
이곳은 풍기인삼과 함께 풍기 인견의 간판을 자주 만난다.
풍기는 우리나라 인견 생산량의 80%를 공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풍기 인견이 풍기
인삼과 함께 ‘풍기’라는 지역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대표적인 특산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풍기 인견은 1930년대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몇몇 직물 기술자들이
『정감록』에 난세의 피난처라고 기재한 ‘양백’이라는 뜻을 소백과 태백 두 산맥으로 해석하여
남하하면서 족답기(인견을 짜는 수동기계)를 가져와서 인견 직물을 짜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특히 1942년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중앙선 개통으로 인하여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소비시장에
접근이 용이해져 인견 직물공업은 성황을 이루며 발전하게 된다. 6.25 동란 이후에는 이북에서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피난민들이 대거 풍기로 이주함으로써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한다.
이후 인견은 영주를 대표하는 전통 산업으로 자리 잡았고, 영주는 현재 우리나라 인견직
최대 생산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인견이란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식물성 자연섬유로, 유럽에서는 ‘비스코스’라고도 불리며
여름용 옷감으로 사랑받는 원단으로 보통 여름옷을 만드는 원단을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가장 보편적인 원단인 면은 저렴하며 누빔 처리가 되어 달라붙지는 않지만 시원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면을 마처럼 짠 원단인 면마는 비교적 면보다 시원하여 많이 사용된다.
셋째, 모시풀 껍질의 실로 짠 원단인 모시는 시원하여 여름이불에 많이 쓰이는
전통 원단이지만, 가격이 비싼 단점이 있다.
넷째, 천연섬유로 짠 인견은 부드럽고 시원한 촉감이 특징으로,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얼음 옷’, ‘냉장고 섬유’란 이름으로 각광받고 있다.
목욕탕을 나오니 지난구간에 들렸던 짜장면집은 개인사정으로 문을 닫았고
하는 수 없이 역전쪽으로 나오니 장모님 시골밥상집에 들려서 백반으로 허기를
때우고 베낭에서 먹다남은 막걸리를 마신 다음에 음식점을 나와도 30분의 여유가 있다.
다시 풍기역(17:45)
25분정도 풍기역 대합실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청량리행 열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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