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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十勝地 山行記

풍기 십승지 제2구간 - 길목재에서 931번 지방도까지

by 범여(梵如) 2015. 9. 21.

☞ 산행일시: 2015년 9월 20일

산행날씨: 약간 흐린 날씨에 한 여름같은 무더위

산행거리: 도상거리15.2 km / 7시간 05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길목재-과수원-무명봉-426m봉-과수원-와룡골-정자-봉현초교-사거리-도로-만승농장

              회나무고개-중앙고속도로 지하차도-생현 배수지-무명묘지-영주 영농조합-5번국도 지하차도

              신전2리 마을회관-(구)5번국도-안심교-서제골고개-안부-임도-오계리고개-대평리고개-갈림길

              노인봉-갈림길-안부-약초재배지-안부-931지방도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 순흥면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도 십승지 풍기 2구간을 나서는데 오늘은 길목재에서 931번 지방도까지

갈 계획이라서 전날 영주에서 찜질방이 아닌 당일 아침 일찍 풍기가는 첫 차에 오른다

벌초 시즌이라 그런지 풍기를 거쳐서 영주로 가는 버스는 오늘도 만차이다

그러나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차량은 그리 밀지지 않고 2시간이 조금 지난

아침 8시 조금 넘어서 풍기 I.C를 빠져나와 봉현초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풍기 십승지 구간지도

 

동서울발→풍기I.C행 버스표

 

동서울에서 06시 45분 버스를 타고 풍기I.C를 거쳐 영주가는 버스에 오른다

벌초 시즌이라 그런지 버스는 만차로 출발하는데 버스에 올라 잠을 청하려는데

옆에 타신 분들이 풍기까지 가는동안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잠을 청할수가 없다

 

풍기I.C 버스정류장(08:05)

 

고속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건너 봉현초등학교를 지나서 와룡골(대촌리 1리 소재)에서 도로를

따라서 지난주 걸어 내려왔던 길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생각보다 먼 길이다.

솔향기 마을을 지나 수용골 마을이 아닌 지난주에 내려왔던 과수원을 가로질러 길목재로 향한다

 

길목재(09:30)

길목재에 도착하여 장비를 점검하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사과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십승지 등로를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봉현면 오현리 독지골의 모습

 

사과밭 끄트머리에서 사과밭과 작별을 하고 등로로 접어든다

 

지난주에 걸었던 장군봉을 한번 뒤돌아보고...

 

장군봉 1시간이라는 띠지를 누가 붙혀놨다

 

무명봉에 오른 다음에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무명묘지 한 기가 나오고...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잡목의 저항이 심하고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봉분이 없는 묘지를 지나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봉우리로 오르는데 이곳이 426m봉이다

 

426m봉(09:50)

우거진 잡목을 간벌하여 아무렇게나 내평개져 그냥 지나치기 일쑤일 것 같은데

대충산사 출신인 문필봉님과 휘앙새님의 시그널이 있어서 426m봉인줄 알았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대충산사 산꾼’들이 걸어둔 빨간 팻말은 벌목을 하면서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고 삼각점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 찾기를 포기한다

 

벌목지대를 지나면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커다란 과수원이 나타난다

 

과수원으로 내려서서 중앙고속도로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회나무고개를 포스트로 잡아 걷는다

이곳부터는 등로가 사과재배 단지로 변해버려 십승지의 길이 없어져 버렸고 선답자의 기록도 없다

 

이곳은 온통 사과밭뿐이다... 사과밭 좌측으로는 풍기읍과 풍기인견으로 유명한 봉현농공단지가 보인다.

우리나라 최고의 인견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990년대 이전까지는 풍기읍내 골목마다

인견공장이 철커덕거리는 기계소리를 냈지만 농공단지 조성으로 대부분 이곳으로 옮겼다.

 

풍기인견의 유래는 1934년경부터 평안남도 덕천지역에서 명주공장을 설립 운영하던 일부

월남주민들이 풍기읍 동부동에 40평 규모의 직조를 시작한 것이 풍기인견의 유래라고 한다

6.25동란이후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대거 월남하여 풍기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때부터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잡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인견생산지역으로 이어오고 있다.

특히 풍기는 원단에 염색을 하는 나염기술이 탁월하여 모시, 삼베와 같이 밋밋한 단일제품에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입혀 인견의 발전과 활용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인견이란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순수한 천연 섬유로 유럽에서는 비스코스(viscose)라고 한다

인견의 특성은 가볍고 땀 흡수가 빨라 시원하며 촉감이 부드러워 여름옷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에서부터 알르레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사람이나 몸에 열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다고 한다

 

영주 사과의 유래

능금(apple)이란 말은 그리스 시대까지만 해도 먹을 수 있는 모든 맛있는 과일의 통칭이었다고 한다.

사과나무의 원산지는 발칸반도로 알려져 있으며 이 원종은 두 방향에서 진화되었다.

동쪽은 중국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우리나라까지 분포된 M.Asiatica계와 서쪽은 유럽 남동부 코커서스,

터키에서 2차 중심지를 형성한 M.Sieversi계가 그것이다.

이 계통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유럽 자생종인 M.pumila계로 분화되었고, 이것이 육종된 것이

오늘날 서양사과인 M.domestic로 발전되게 되었다. BC20세기경 스위스토굴주거지에서 탄화된

사과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서양사과는 약 4000년의 재배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토종 능금은 本草拾遺(739), 授時通考(1737)에 의하면 발해(만주와 한반도)에서 생긴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발해를 원산지로 삼았던 능금(林檎)M.asiatica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전 자료로는 처용가(879)에서 능금의 일종인 멋(柰)을 지칭하는 “머자”에서 그효시를 찾을 수

있으며, 문헌기록으로는 계림유사(鷄林類事.1096)의 능금, “멋부(悶子訃)”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능금의 어원은 임금(林檎-수풀속의 새떼)으로서 숲에서 과일이 붉게

익을때 새가 날아와 쪼아 먹게 된 데서 유래되었으며 내금(來檎)으로도 불렸다

 

영주 사과재배는 풍기읍 금계동 이풍환(李豊煥 1866~1933)씨로 개성에서 출생하여 30대

중반에 풍기읍 금계동 298번지에 정착하여 번지내에 사과묘목과 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때에 과수원 조성은 매우 획기적인 일인데 식재년도 기준으로 대구사과보다 더 빨리 시작했을 법도 하다.

후손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과는 실패했다고 들었다.(1911~14년 사과면충이 격심하였음).

1914년(대정3년) 과수원설치 유공자로 영천(현 영주)지방금융조합장으로부터 표창받은 자료와

1919. 10. 4. 일본농회 총재로부터 받은 녹백수유공장(錄白綏有功章)에도 타 농업종과 함께

 과수재배도 장려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을 근거로 볼때 과수재배에도 심려한 흔적을 여실히 살펴 볼 수 있다.

(영주문화사랑 80~84쪽) (자료 - 펌)

 

조금전  내가 지나온 과수원길

 

과수원길에서 도로를 따라서 주택가로 내려선다

 

느티나무(10:20)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오는데 내가 아침에 지나간 길이다

느티나무를 지나서 봉현초등학교 방향으로 향한다

 

와룡골의 모습(영주시 봉현면 대촌1리 소재)

와룡골-용감동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골이라 하였다

와룡골이라 하고 면 이름도 와룡면이라 칭하였는데 마을이 크므로 큰 마을 또는 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로 내려왔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동으로 희나무 고개와 영등 바위가 있고 희나무 고개에는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봉현초등학교(10:30)

특이한 점은 학교 정문이 없고 敎木인 소나무가 학교 정문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에 고속버스에서 내렸던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면서 직진하여 서제골로 향항한다

이곳부터는 산행이 아닌 둘레길 개념으로 걸어야 하는데 이곳부터는 선답자들의

산행기는 전혀없고 대체적으로 풍기 십승지 구간은 이곳부터 931번 지방도까지는

산행구간을 빼버리는 모양인데 범여는 고집스럽게 이 길을 이어가고 싶어 개고생하며 걷는다

 

도로를 따라서 중앙고속도로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뒤돌아보니 지난주 걸었던 옥녀봉과 한천(자구)지맥길의 문필봉이 보인다

 

백분교(10:45)

중앙고속도로 입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백분교를 건넌다

 

백분교의 모습

 

중앙고속도를 좌측으로 끼고 걷는데 만승농원이 보인다

 

날씨 참 좋다

 

회나무고개(10:55)

영주시 안정면 생현리에 있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수령 120년이 넘은

커다란 회화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나무 옆에는 민가 한채가 있다

 

회나무 고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중앙고속도로 지하차도(11:00)

 

중앙고속도로 지하차도를 건너서...

 

우측으로 꺽어져 비포장농로를 따라서 걷는다

 

중앙고속도로의 모습

 

생현배수지 갈림길(11:10)

생현 배수지 갈림길에서 좌측 포장도로를 따르는데 벌초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생현배수지 정문(11:20)

오늘은 생각보다 날씨가 더워 이곳에서 물 한모금과 과일을 먹으며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배수지 우측으로 접어드니...

 

깔끔하게 이발(벌초)을 한 무명묘지를 만나 내리막길로 이어간다

 

희미한 길로 내려서니...

 

또다른 무명묘지를 만나고...

 

등로 좌측으로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영지버섯도 기끔 보이고...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밭 가장자리를 지나 무명봉을 넘는다

 

고사리를 재배하는 밭을 내려서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영주 영농조합법인 건물이 보이고...

 

영농조합법인 좌측으로는 풍기에서 영주로 향하는 5번 국도가 지나간다

 

영주영농조법 정문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지하차도를 지난다

 

5번국도 지하차도(11:50)

 

지하차도를 지나 좌측으로 꺽어져 영주시 안정면 신전리 마을길로 접어든다

 

신전리 2리 경로당(12:00)

신전리(新田里)는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으로서 새로개척된 마을이므로 새기실 · 샛기실 또는

 신전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영주가 시로 승격하자

영주군 안정면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는 九老人이 마을앞 언덕위에 서있는 큰 香나무

그늘에 모여서 바둑을 즐기며 詩文을 읊었다고 한다. 이들은 또 마을앞의 들을 개척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바 구노인이 농사를 지어서 九億石을 얻었다고 하여 구억들이라고도 칭한다

 

노인회관 앞에 있는 신전리 샛기실 마을 유래를 적은 표시석

 

노인회관 정자에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에다 길목재 내려오는 과수원 쥔장한테 

얻은 썩은 사과와 포도로 여유로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정자에 누웠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1시간 이상을 자버렸다... 그러나 오늘 산행거리가 길지 않기에 부담은 없다

 

내가 잠이 들었던 정자

다시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샛기실 마을을 가로질러 구5번 국도를 지나간다

 

구5번국도(13:30)

 

구5번 국도를 무단횡단하여 건너니 신전리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곧이어 안심교가 나온다

 

안심교(安心橋:13:35)

이 다리는 풍기 십승지의 지도상에는 세제골교로 표기되어 있고 풍기 십승지 환종주의

들.날머리 역할을 하는 곳이지만 실질적으로 풍기 십승지 환종주하는 산꾼들은 와룡골에서

931번 지방도까지는 별의미가 없는 산이 아닌 둘레길처럼 여기는지 이곳을 지나는 산꾼들은

전혀 없는 탓에 산행기록도 없고 길도 없는 탓에 이 길을 걷는데 애를 먹는다

 

이곳은 영주시 안정면 안심리라 해서 세제골교가 아닌

안정교라 표기가 되어 있고 다리 아래로 서천이 흐른다

영주시 안정면 안심리(安心里)는 본래 풍기군 동촌면 지역이었다. 안시미 또는 안심 · 안심리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제동 · 일원동 일부를 병합하여 안심동이라 해서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기름지고 넓은 토지가 있어서 주민이 안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심교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기읍의 모습

동쪽은 순흥면(順興面), 서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大崗面),
남쪽은 안정면(安定面)·봉현면(鳳峴面), 북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과 접한다.
북쪽은 비로봉(毘盧峰:1,440m) 국망봉(國望峰:1,420m), 북서쪽은 연화봉(蓮花峰:1,394m)·
도솔봉(兜率峰:1,314m) 등 소백산맥의 고산 준령으로 둘러싸이고
기호지방(畿湖地方)과의 교통은 죽령(竹嶺)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죽령의 영하취락(嶺下聚落)으로 발전하여 197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동쪽과 남쪽에 300∼4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가 발달했고 읍 전체가 분지내(盆地內)에 있다.

기후는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이며, 겨울에는 북서풍이 탁월하고 바람이 많이 분다.
소백산맥의 바람그늘에 해당되기 때문에 연평균강수량은 900mm 내외의 과우지대를 이룬다.
산지와 구릉지가 많아 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나 계단상태의 경지와 범람원(氾濫原)상에는
과수의 재배가 성하다. 평지에서는 예로부터 인삼 재배가 유명한데, 특히 논 인삼은 타지역에 비해 특이하다.

 

사과의 생산이 많고 인견사(人絹絲)의 직조 공업도 발달하여 지역 경제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중앙선 철도와 국도가 통과하고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관광명소로는 희방사(喜方寺) 희방폭포·비로사·영전사·금선정 등이 있으며
근래에 풍기온천이 문을 열었어 많은 관광객이 찿고 있다

문화재로는 영풍 비로사 석아미타 및 석비로자나불좌상(榮豊毘盧寺石阿彌陀-石毘盧舍那佛坐像:보물 996),
풍기 삼가동 석조당간지주(三街洞石造幢竿支柱:경북유형문화재 7), 풍기향교(경북유형문화재 211),
희방사 동종(喜方寺銅鐘:경북유형문화재 226), 풍기 영전사 석조여래입상(靈田寺石造如來立像:경북유형문화재 324), 영풍장도장(榮豊粧刀匠:경북무형문화재 15),
백룡사 석조여래좌상(白龍寺石造如來坐像:경북문화재자료 282)이 있다.

지역축제로는 인삼축제,소백산 철쭉제,풍기직물 훼스티벌 등으로 더욱 유명하다  

 

안심교를 지나자마자 중앙선 철로가 나오고...

 

중앙선 철로의 모습

 

영주시 안정면 안심리 서제골의 모습

서제골은 바깥서제골에서 북쪽골짜기로 400미터 쯤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본래 풍기군 동촌면 안심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영주군 안정면 안심리로 개편된 마을이다.

서제골의 유래는 이 마을의 입향조인 안경상(순흥 안씨)이 서당을 짓고 아동을 가르쳤다고 해서

서제골이라고 일컬어 진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서제골을 바라보면서 마을 입구 직전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능선 위로 오르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곧바로 숲길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길이 사라진다

 

강력한 잡목의 저항을 받으며 등로를 걷는데 초반부터 고생길이 시작된다

 

서재골고개(13:50)

세제골에서 안청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아카시아를 비롯한 각종

잡목의 저항을 이겨내며 포장도로를 내려섰다가 이내 등로로 올라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서제골의 모습

 

희미하나마 등로는 좀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무명 묘지를 지나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봉분뒤로 지나간다

 

지난해의 영지버섯도 보이고...

 

빨간 띠지는 뭔 뜻인지... 산꾼들의 것은 아닌듯 하고...

 

안부(14:10)

 

제법 뚜렸한 길을 걷다가 내려서니 포장도로가 보인다

 

임도(14:30)

도로로 내려선 다음 좌측으로 살짝 갔다가 희미한 등로로 올라선다

 

또다시 잡목과의 전쟁은 시작되고...

 

벌초한 묘지를 만난 다음에 무명봉에 오르니 산불이 난 지역을 만나는데

소나무들이 타버린 지역에 아카시아와 잡목이 숲을 이뤄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잡목지대를 지나 내리막을 내려서니 포장 농로가 나오고 이내 등로로 접어든다

 

또다시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의 저항에 오늘도 바짓가랑이 찢어지는 수모를 당한다

 

묘지가 보이고...

 

묘지를 지나 좌측 능선으로 접어드는데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y자 갈림길을 지나 조금을 더 진행하니 벌초꾼들이 칡넝쿨을 쳐내어 걷기 편한 등로를 만난다

 

칡넝쿨 사이를 지나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오계리(梧溪里) 고개(14:50)

영주시 안정면 오계리 마을 뒷쪽에 있는 고개로 오계리의 지명유래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에 개척된 마을이며 개척당시 오동나무가 뒷산에 많으므로 오산이라고 불렀다.

1909년 오산을 오미로, 오미를 다시 오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도로에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다시 도로를 버리고 능선위로 올라선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우측으로 묘지 한기가 보인다

 

淸州鄭公과 義城金氏 합장묘(15:00)

 

희미한 임도가 나오고 직진의 등로로 오르지 않고 좌측의 길을 따른다

 

무명묘지의 봉분 뒤로 올라선다

 

처사김녕김공복규지묘로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오고...

 

희미한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다시 묘지의 상단을 지나가는데 오늘 산행의 주요 포스트는 묘지이다

 

뚜렸한 등로를 이어가다가...

 

安東權公과 金海金氏 부부묘를 만나다

 

묘지를 지나 무명봉에 올랐다가 내려서니 도로를 만난다

 

대평리(大坪里) 고개(15:25)

영주시 안정면 대평리에서 순흥면 지동리로 연결되는 인적이 드문 고개이다

이곳부터는 우측으로는 안정면에서 소수서원과 선비촌으로 유명한 순흥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고 좌측은 풍기인견과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읍 지역이다

 

안정면 대평리의 지명유래는 본래 순흥부 대평면의 지역이며 큰들이 있으므로 한들

또는 대평이라 하였으며 조선조 세조3년 순흥부가 폐지되자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교동과 단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평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도로 우측의 모습

 

이곳부터는 일반 등산로가 있는지 등로는 무지하게 좋다

등로 좌측으로는 잘 관리된 묘지 서너군데를 지나 오름길로 올라선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 없어져 버리는데 조금은 당황스럽다 

잠시 후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다시 뚜렸한 등로를 다시 만난다

 

갈림길(15:45)

잠깐동안 잡목을 헤치며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다시

뚜렸한 도로가 보이는데 풍기읍 산법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풍기읍 산법리의 지명 유래는 옛 풍기군 동부면 산법리(山法里)로 속칭 산의실(山意室),

산내실(山內室), 산내곡(山內谷) 산법리라고 불려져 왔고 마을 북쪽으로 노인봉(老人峰)을

비롯하여 옥녀봉, 동자봉, 산맥과 서쪽 으로 점방(点方)재에서 토성(土城) 마을 앞까지 쭉

뻗어내린 진등(鎭登)이 동서 (東西)로 막혀 있어 내부구릉(丘陵)지대라는 뜻에서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맞는 말씀

 

노인봉(老人峰:376.7m:15:50)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와 안정면 단촌리, 대평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무명묘지 한 기가 정상을 지키고 있고 풍기 주민들이 이곳을 산보 코스로

이용하는지 풍기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상당히 뚜렸하다

 

노인봉을 내려오니 안동권공과 경주이씨 부부 합장묘를 만나고 다시 편한 오름길이 시작된다

 

갈림길(16:00)

노인봉에서 10여분을 편한 길을 걷다가 직진의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좁은 등로로 들어서자마자 뱀 한마리가 경계의 눈빛으로 째려본다

 

뚜렸한 등로는 계속 이어지고...

 

묘지 뒷쪽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안부(16:07)

 

안부에서 5분정도 오르막을 오르니 넓은 방화선 임도가

나오고 약초재배지인지 계속해서 경고판을 만나면서 걷는다

 

방화선 임도인지 불쏘시개 임도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이다

걷기가 심히 불편하고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된다

 

잠시후 편안 방화선 임도가 나오고...

 

좌측 능선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은행나무 조림지를 만나고...

 

등로에서 바라본 순흥면의 모습

순흥(順興)은 한때 영주보다 큰 곳이었으며,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이자유학의 본향이며

유학이 뿌린 내린 곳으로 국내에 주자 성리학을 처음 전한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민족

성인 회헌 안향(安珦`1243~1306. 9. 12)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안향은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로,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을 건립하고 장학금제도를

만든 그 시대의 교육 혁신사상가로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안향 선생의 인륜도의사상과

나라사랑, 인재를 중히 여기는 사상은 후손들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 도도히 흐르고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이 순흥이다

수서원은 회헌 안향을 제향할 목적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사묘를 세우고 그 이듬해

안향 선생을 봉안, 학사를 이건해 백운동서원이라 칭했으며 중종 39년에는 안축, 안보를

배향하고 명종 3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명종 5년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의 시초가 됐고 이후 인조 11년(1633년) 주세붕을 추향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서원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강당과 그 뒤로 직방재와 일신재, 동북쪽에는 학구재, 동쪽에는 지락재가 있다.

또 서쪽에는 서고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 영정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가 안치된 문성공묘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자이자 선비로 이름이 높은 퇴계 이황(1501~1570)은 회헌 안향을 사모했다.

두 사람은 동방 성리학의 성현이다. 고려의 안향이 최초로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왔다면,

그 학문은 퇴계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2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안향의 선학에 대한

퇴계의 외경심과 사랑은 소수서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수'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은 '학문의 중흥'이란 큰 임무를 띠고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갔다.

건물 배치의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에서 당시 학자들의 기품을 느끼게 한다.

서원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 있다.

유생의 터에 보존돼 있는 불교의 상징에서 당시 학자들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서원 옆으로 낙동강의 작은 젖줄인 죽계수가

흐르고 개울 건너편 아담한 바위에는 주세붕이 직접 쓴 '경'(敬)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첫 글자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의 교훈이자 학문의 목표이며

안향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들여오고 전파한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많은 서적과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들여와 유학의 진흥에 활기를 띠게 하고

이 나라 선비들에게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안향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주자학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큰 역할을 담당한 대학자였다.

 

계속해서 만나는 경고문

 

넓은 방화선 임도가 끝나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무명묘지를 만나고...

 

뚜렷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벌초한 무명묘지를 지나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6:20)

 

나도팽나무 버섯

늦은 여름에서 가을에 활엽수... 너도밤나무의 고사목, 그루터기에 주로 군생하며

특히 일본에서는 니고메라하는데  된장국인 미소시럽에 넣어 먹는 식용버섯이다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치열한 잡목과의 전투를 벌이며 931번 지방도로 향한다

 

절개지로 내려선다

 

이곳은 지금 한참 도로공사중이다

 

931번 지방도(16:35)

풍기에서 순흥, 단산으로 가는 931번 지방도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이곳에서 순흥방향으로 1km 정도를 가면 풍기 경륜장이 있다.

원래 오늘 산행 계획은 도간재까지 가기로 했으니 그곳까지 가면 서울가는

차량시간도 조금 문제가 될 것 같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하기에 오늘은 이곳 까지만...

스틱을 접고 지나가는 트럭을 히치하여 풍기역까지 편하게 온다... 태워 주신분께 감사드립니다 

 

풍기역(16:50)

풍기역에 도착하여 일단 청량리역까지 가는 표를 예매하고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역전앞에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풍기발→청량리행 18시 11분 열차표

 

역에서 열차표를 예매하고 역 앞 갈비탕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갈비탕에

인삼이 들어 갔다고 10,000원을 달라고 한다... 이보시요 산꾼이 뭔 돈이 있다고...

다시 나와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돌솥밥집이 나오는데 이곳은 1인분은 안 된다고 한다

내가 밥만 먹는 돼지냐?... 이 넘의 동네는 참으로 이상하고 인심이 지랄같구먼

다시 골목으로 돌아서 나오니 굴다리반점이라는 중국집이 나와 거기에서 짜장면

곱배기(5,000원)에 소주 한병을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에 풍기역으로 향한다

 

풍기역앞 풍기 인삼 홍보관

풍기하면 특산물이 참으로 많은 곳이다... 흔히들 영주사과로 유명한 사과는

풍기, 봉현면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며, 천연섬유인 풍기인견 또한 풍기의 효자

상품이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재배지로 알려진 풍기인삼이다

풍기역 앞에는 인삼을 파는 가계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을 재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풍기 지역은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여 인삼이 자생하는

최적의 자연여건을 형성돼  조선왕실에서는 풍기인삼만을 고집했을 정도로 최고의 품질과 명성을 자랑한다. 

1500년에 이르는 유구한 인삼재배역사를 바탕으로 풍기인삼은 오늘날까지 단연 최고로 꼽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734년(신라 성덕왕 33년) 당헌제에게 산삼 20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라시대에 이미 소백산에 산삼이 자생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풍기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541년 신재 주세붕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영주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한 결과 인삼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해 재배한 것을 시작으로 500여년의

가삼재배역사를 가지고 있다. 왕실에서 풍기인삼만을 고집하였기에 일부 지역민들의 공물인 산삼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풍기읍 금계리에 산삼을 최초로 재배하도록 했다.


 인삼은 재배가 까다로워 기후, 토질, 자연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는 생육 자체가

어려운 식물로 인삼의 재배방법은 보통 작물과 달리 특이하여 한 번 심으면 같은 곳에

연작할 수 없고 토양과 지형에 따라 생육이 크게 달라 인삼에 맞는 땅을 골라야 하며

재배방법이 까다로워 심기 전에 인삼재배에 알맞은 토양으로 만들어 기르게 된다.


 영주 풍기인삼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데는 인삼생육에 적합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주는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큰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영향으로 풍기인삼은 조직이

충실하고 인삼향이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면역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유효사포닌이 36종으로

미국산 19종, 중국산 15종에 비해 월등히 높다. 풍기인삼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인삼에 비해 육질이

단단하고 효능이 우수해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최고의

인삼제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시 풍기역(17:50)

 

오늘은 산이 아닌 풍기역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정시에 열차는 도착하고 열차에 올라 식당칸으로 가서 캔맥주

하나를 사서 마시고 깊은 잠에빠지는데 일어나 보니 청량리 역이다(20:40)

 

오늘 산행중 전리품... 생각보다 수확이 빈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