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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호미(형남)기맥(終)

호미기맥 제3구간 - 원고개에서 성황재까지

by 범여(梵如) 2012. 10. 8.

산행일자 : 2012. 10.07(무박산행)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시원바람, 전형적인 가을날씨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7명과 함께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6km 10시간 30분 소요
 산행코스 : 원고개-괘릉마을-감산사지 갈림길-317봉-364봉-삼태지맥 분기점-토함산 목장

                   토함정사-불국사 갈림길-동산령-석굴암 주차장-석굴암 석굴-성화채화봉-추령 갈림길

                   토함산-추령-363봉-494.2봉-507봉-459.2봉-549봉-함월산-591.4봉-482봉

                   헬기장-NO64 송전탑-임도-성황재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외동읍.대남면,양북면/ 포항시 오천읍

 

추석 연휴에  추석날 하루만 빼고 3일간 계속 산을 탔더니만 상당히 피곤하다.

아마 나도 이제 설설 산에 중독이 되어가는가 보다. 그래도 갔다만 오면

훨씬 몸이 가볍고 개운한 걸 보니 역시 산만큼 훌륭한 의사는 없는가보다.

오늘낮에 예식장 2곳을 들리고 내일 예식장은 지인에게 봉투를 부탁하고

이리저리 소득(?)도 없는 일에 다니다가 부지런히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난 후 베낭을 메고 경주땅을 거쳐 포항으로 넘어가는 호미기맥 3구간을

걷기 위해서 밤 10시에 버스를 타러 양재역으로 향한다.

  낮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탓에 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진다.

중간에 쉬는 휴게소에도 내리지 않고 잠에 취해 있다가 버스가 경주I.C를

빠져 나갈즈음 잠에서 깬다. 버스는 천년고도 경주시내를 거쳐서 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외동읍 괘릉리 입구 기사식당 주차장에 정차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원본클릭)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원고개(03:30)

토욜에 하는일도 없이 바쁘게 움직인 탓에 상당히 피곤한 모양이다.

수원에서부터  경주 톨게이트 들어서기 직전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02시 50분경에 경주I.C를 빠져나와 경주시내를 거친 다음에 원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마친 다음에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괘릉마을 입구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어서 괘릉(掛陵)마을이라 불리는

마을 표시석이 서있는 원고개인 7번국도변에 있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원래는 원고개에서 지장기도 도량인 원성사의 뒷산인 152봉을 올라가야

하는데 이곳은 마을이 있고 개들이 많다. 그리고 올라가자마자 다시

10분만에 도로를 내려와야 하기에 152봉을 생략하고 도로로 걸어간다.

청심사슴목장 이정표를 따라서 마을길을 걸어간다.

조금 지나니 이 동네의 개쉬끼들이 일제히 나서서

짖어대는 바람에 시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곳은

축사들도 많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소와 돼지고기

값이 폭락하여 民草들의 가슴이 타들어가는데 마을을 지나가며

개쉬끼들의 합창소리에 곤히 잠든 민초들이 깰까봐 조심스럽기만 하다.

괘릉동마을 회관(03:40)

마을회관이 나온다. 이곳은 천년고도인 역사의 고장답게 잘지은 한옥들이

즐비하다. 마을 골목길 사이에는 누렇게 벼가 익은 논과 배추밭이 보인다.

마을길을 걷는데 선두는 마치 귀신에 홀린듯 빠른속도로 걸어간다.

이 어둠속에 저라도 빨리 가고 싶을까... 나로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어둠속에서 봐도 규모가 상당히 큰 청심사슴목장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밭고랑과 배추밭을 지나 후에 다시 마을길로 접어든다.

‘괘릉 산푸른’이라는 간판을 지나서 좌측 마을 도로로 접어든다.

이곳에는 개쉬끼와 소 울음의 소리로 온 마을이  시끄럽다.

미안한 마음에 빠르게 마을을 벗어난다. 어둠속에 마을의 가로등의 불빛만이...

감산사 갈림길(03:55)

감산사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다.

감산사(甘山寺)의 “감산”은 우리말로  ‘달뫼’즉 ‘달산’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 감산사조(남월산조)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는 인물이

성덕여왕 때에 시중의 벼슬에 있으면서 감산장전(甘山莊田:농장)을

사찰로 바꾸면서 감산사로 명명햇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2구의 석불입상이 발견되었는데 두 불상 모두  광배의

뒷면 화광후기(火光後記: 광배의 뒷면에 새겨진 후기)에 불상의 조성

배경과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당시의 조성배경과 조성 연대

사상과 불상조각의 편년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제81호))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한 해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 하나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舟) 모양이며,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사진 및 해설 : 문화재청>

 

감산사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가다가 포장도로를 벗어나서 우측으로 본격적인 산으로 접어든다.

처음부터 고도를 높인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능선 안부에 불어대는 산들바람에 한기를 느낄

정도이지만 산행하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최적의 날씨이다.

어둠속에서도 멋진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안부 능선의 양쪽으로는

낭떠러지의 절개지가 가슴을 섬뜩하게 할 정도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ㅜ자의 길이

나오고 이곳에 좌측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니 봉분이 조그만 묘지가 나온다.

삼태지맥 분기점(04:50)

박성태 선생님의 신 산경표 별책 부록에서

호미지맥 토함산에서 남쪽으로 실거리6.2km 떨어져 있는 해발460m에서 남동쪽으로 시작하여

 동천강을 우측에 두고 남쪽으로 뻗어 가며 태화강과 합류하여 울산 방어진 화암추

등대 울산만으로 삼태지맥은 끝을 맺는다.

등산로는 양호하며 삼태봉에서 관문성을 거쳐 마우나오션 컨트리클럽까지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고 지맥은 임도로 이어지고 있다.
기현삼거리부터 임도는 약간 약간 정상을 좌우로 비켜가며 무룡산에 닿는다.

가운데 고개에서 다시 임도가 능선으로 되며 염포정을 지나면서 곳곳에 운동 하면서 쉴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염포산을 거쳐 봉화산 , 망계산까지 능선이 이어지고 꽃바위 길로

현대 중공업 제2공장 문현문과 별관문 그리고 화암문에 닿는다.화암문에서 공장 뒷편 우뚝 솟은

 화암추 등대를 바라보며 실거리 46km의 삼태지맥은 울산만의 바다로 스며든다

 

준.희님이 붙여논 분기점 이정표에서 어둠속에 좌측으로 꺽어지니

도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어둠속에 토함산 목장이 나오건만 너무 어두워

사물을 자세히 볼 수가 없고  대관령에서나 볼 수 있는 풍력발전기가 겨우 보인다.

토함산 솔밭가든(05:00)

이곳은 도로 공사가 진행중이고 토암산 솔밭가든이 식당

간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경주시내와 석굴암으로

연결되는 945번 지방도로가 나타난다.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여기서 부터 본격적인 경주국립공원으로 접어든다.

이곳 경주는 시 전체가 노천박물관으로 불릴만큼 문화재가 지천이다.

토함정사(05:13)

생활도자기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토함정사 표시석을 지나서 숲으로 접어든다.

도로와 나란히 가는 기맥 마루금으로 접어들어건만  간벌을 하여 쌓아논

나무들과 가시덤불이 가득하여 10분정도를 가다가 포기하고 편안한 도로로 내려선다.

불국사 갈림길(05:25)

도로를 계속 걸어내려가니 기림사를 가는 길과 불국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불국사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한번쯤 와 본곳이다.

불국사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신라시대의 절이다. 눌지왕(?~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바람으로 불국사가 창건되었다고도 전한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크게 확장하였으며, 임진왜란때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으나

임진왜란 직후부터 200여 년에 걸쳐 40여 차례의 공사를 통해 복원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2세부모> 편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대성은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대성 사후, 공사는 신라 왕실에 의해 계속되었고 착공부터 완공까지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창건 당시 불국사는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 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국사는 고난을 겪게 된다. 승군의 활약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왜군이

이에 대한 복수로 사찰에 대한 파괴와 방화를 자행했는데,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593년 5월, 천년을 지켜온 2000여칸에 이르는 대가람이 전소되고 만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의

지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기 시작했고, 순조 5년(1805)에 이르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의 모습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다보탑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보존 상태가 좋았을듯한

세 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된 후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지금은 이렇게 한 마리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影池)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 대웅전의 모습

대웅이라는 말의 뜻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데서 유래한 것이며 대웅을 모신 집이기 때문에 대웅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대웅전은 불국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석가모니를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으며

불국사의 세 영역중에서 석가여래의 불국토를 이루는 일곽의 중심 전각이다

 

불국사의 세 영역은

1. 법화경에 근거를 둔 사바세계 대웅전 영역

2. 무량수경에 근거를 둔 서방정토 극락전 영역

3. 화엄경에 근거를 둔 연화경세계 비로전 영역으로 세 영역이 모두 지면의 높낮이를

    달리 하고 있는데 비로전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대웅전, 극락전 순이다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불타버린 터 위에 효종 10년에 재건되었다가

 다시 100년뒤인 조선 영조41년(1785년) 천룡사의 채원(采遠)스님이 중창한 건물이며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단과 초석은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가 창건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창건 당시의 평면구성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대웅전은 중창을 할 때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완전하게 조립식으로 얽어 만든 목조 건물이다.

토축으로 단을 쌓고 둘레에 기단석을 세운 뒤 그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바깥3 안4출목의 공포를

배열한 다포형식으로 팔작지붕을 지닌 건물이며 동서남북 4면에 돌계단이 있고 대웅전의

동서쪽은 익랑을 두어 바깥 둘레의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대웅전의 기단은 지대석과 우주, 탱주,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탱주와 우주 및 면석을 별석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돌에 면석과 탱주 또는 면석과 우주를 새기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 건축의 특성이다

 

불국사는 사적 제50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ㅓ 갈림길에서 석굴암쪽으로 올라가다가 좌측 숲으로 접어든다.

조금을 가니 어둠속에 임도가 나타나고 묘지를 지나 올라간다.

임도길의에 월성김씨의 묘지에 벌통이 10여개가 보인다.

이곳 근처에 토종벌을 키우는 농가가 있는 모양인데

어느 누가 양봉 벌통을 갖다놓아 갈등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볼 때에는 양봉업자가 벌통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니 어둠속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묵혀논 밭에

감나무가 있고 감이 달려있어 단감인줄 알고 하나 따먹었더니

떨버서  먹을 수가 없다. 동료산꾼들과 능선으로 올라선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묘지 봉분위에 국가측량 기준점 안내판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길이없어서 다시 되돌아 우측으로

꺽어지니 어둠속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어둠속에 숲속을 거니니 헤드렌턴이 있어도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의  썩은 나무가지에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두 바퀴를 나딩군다.

다행히 다친데는 없어나 발목위에 상처가 생기는 바람에 상당히 쓰라리다.

528.6봉(05:50)

528.6봉을 찍고 다시 내림길을 내려가는데 이곳 역시 길이없다.

어둠속에 이리저리 헤맨끝에 겨우 급경사를 내려오니 우측에

석굴암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산령(東山嶺:460m:06:00)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와 양북면 범곡리를 잇는 고개이다.

토함산(吐含山)의 남쪽에 있으며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지구에 포함된다.

옛날부터 경주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어 신라 때 화랑들이

문무대왕릉을 참배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전한다.

북쪽에 석굴암, 서쪽에 불국사와 감산사지(甘山寺址) 등의 유적이 있다.

동산령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서 549봉  능선으로 올랐다가

석굴암 주차장으로 내려오는게 정상적인 기맥 마루금이기는 하나

올라가자마자 10분만에 다시 도로로 내려와야 하기에 별의미도 없는

곳을 포기하고 그냥 석굴암주차장을 향해서 편안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이제 서서히 여명은 밝아오고 구름사이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빨갛게  보인다.

석굴암 주차장(06:15)

석굴암 주차장 입구에서 우측 주차장으로 접어든다.

이곳에는 이른 아침에 일출을 보기위서인지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서 5분정도를 기다리다가 일출시간이 멀어서

그냥 석굴암쪽으로 계속 걸어서 산행을 진행한다.

동쪽으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구름사이로 빨갛게 물이든다.

불국대종각(佛國大鐘閣)

석굴암 주차장에서 석굴암 올라가는 길 계단 좌측에 여태껏

수많은 사찰을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큰 종각은 처음이다.

특이한 것은 이 종을 한번치면 1,000원을 기부받아 불우이웃돕기를

한다고 써있는데 참 좋은 생각이다. 부처님의 보살사상을 실천하는데는...

석굴암 입구(06:10)

석굴암 입구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원래는 석굴암을 참배할 사람은 참배하라고 대장이

허락을 하였는데 관람시간이 06시 30분부터란다.

 가야할 길이 먼 산꾼이라 20분을 기다리기는 무리라고

생각이 되어 포기하고  좌측 등로로 접어들어 토함산으로 향한다.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경주)은 길거리 돌맹이도 함부로 발로 차면 안된다는

경주는 굴러다니는 돌맹이도 문화재 귀퉁이에서 떨어져나온 돌맹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게 소중하게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많은 문화재 중에서 신라예술의 극치.. 불교문화의 백미라고 감히 말할수있는

석굴암 석굴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하게 등록이 될정도로 뛰어나다.

국보 제24호로 지정된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는데 건립당시에는

석굴암이 아닌 석불사라고 불리웠다고한다. 김 대성은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석굴암은 자연굴이 아니라 화강암을 쌓아 굴을 만들고 그위에 흙을 덮어 만든 인공굴이다.

 

이곳은 동해로부터 품어내는 물기와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습기와 안개속에서 어떻게 석굴암은 천년동안 원래의 모습대로 있을수 있을까.. 하고

아직도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석굴암 주변을 살펴보면 땅위에 세워진것이 아니라

샘물위에 지은것으로 서늘한 샘물이 석굴암 밑으로 흘러 바닥에만 이슬이 맺히게 한것이라 한다

벽과 천장의 돌도 얇게 만들어 끼워 맞춤으로써 통풍이 잘되게 했는데 일제침략기 이후에

석굴암을 고치면서 물길을 석굴밖으로 빼내고 석굴함 둘레를 시멘트로 막어버렸다한다

그후로 바람도 잘 통하지 않고 빗물도 새어 굴안에 습기가 차고 이끼도 끼게 되었다고하는데

지금은 물길대신 유리벽과 온도조절기를 설치해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등 총40구의 불상을 조각하였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고,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驅)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 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이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심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없다.

 

 

석굴암 본존불상

 

석굴암 본존불상은 그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의 종교예술사상 탁월한 유산이다.

특히 간다라식의 어깨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를 한 두 다리와 무릎 등이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부드럽게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손은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印相)을 나타내며,

이것은 도가 이루어져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존불의 석련대(石蓮臺)는 교묘한 형태와 뛰어난 조각솜씨로

본존불의 위용을 돋보이게 한다.

 

신라 석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석굴암 본존불상(石窟庵 本尊佛像 국보 제24호 경주 토함산)

아름다운 균형감각,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는 눈과 웃음 머금은 입술,

두툼한 얼굴과 풍만한 몸체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움이 풍겨

동양 조각 최고의 걸작품이고, 그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 종교예술사상 탁월한 유산이다.

 

맨 밑에는 평면의 원형으로 된 2단 기대가 있고 이어 복련대가 새겨져 있는데,

복련의 연판은 32개로 웅대하고 화려하다.

전체높이는 약 1.6m, 최하부의 지름은 3.63m, 윗좌대의 지름은 2.72m이다.

석굴의 본존불상 바로 뒤, 전면을 향한 중앙에 지름 2.24m의 크고

둥근 돌을 새겨넣어 두광을 만들었다.

그 주위에 3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를 오목한 거울면처럼 만들어 전실에 서서

본존을 예배할 때 바로 본존불의 두광을 향하도록 구상되어 있다.

 

신라시대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조각하였는데, 실제로 이것은 불상이 아니라고 한다.

조각해 놓은 석굴암 본존 불상은 불상 즉 부처님이 아니고

항마촉지인이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얻었지만 부처가 되지 못하고 대마왕에게

 유혹당해 마로 들어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석굴암을 지어 부처님께 나라를 수호해 달라는 바램이다.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소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이란?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이라 한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 지지인(指地印)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성도(成道)할 때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였다는 내용에서 유래되었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늘어뜨리면서 다섯 손가락을 편 모양이다.

이 수인은 반드시 결가부좌한 좌상만이 취하는 것으로

입상이나 의상(倚像)에서는 볼 수 없다.

신라 석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석굴암 본존불상(石窟庵 本尊佛像·국보 제24호·경주 토함산)’은 석굴암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예술품이다.

대좌까지 합쳐 약 500cm나 되는 큰 상이며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세련된 솜씨로 조각돼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자세로 약간 뒤쪽으로 치우쳐 있다.
앞에서 볼 때 매우 아름다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는 눈과 웃음 머금은 입술, 두툼한 얼굴과 풍만한

몸체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움이 풍겨 가히 동양 조각 최고의 걸작품이라 부를만하다.
본존불상은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드러낸 채 법의를 걸쳤으며

두 다리는 책상 다리하고 앉아 있다. 오른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댔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있는데,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간략한 옷 주름 표현은 상 전체의 단순한 조형성을 강조해주며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긴장감과 신비한 종교성이

어우러져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종교예술의 알짜를 보여준다.
본존불상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듯해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시간이 맞질않아서 석굴암을 참배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석굴암을 향해서 예를 표하고 토함산으로 향한다.

토함산 올라가는 길에서 日出을 맞이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해는 벌써 구름을 뚫고 한참이나 올라왔다.

성화채화지

←50m의 이정표를 따라서 올라간다.

우측으로 올라가도 토함산가는 길을 만날 수 있는 도로이다.

이곳 경주에서는 돌맹이 하나라도 문화재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채화지 바로 앞에있는 바위에 음각되어있는 석불상이 멋있게 보인다.

성화채화지(06:30)

이곳은 경상북도 도민체전을 할 때 성화 채화를 하는 곳이란다.

추령 갈림길(06:40)

추령 갈림길 이정표(← 토함산↑추령 →석굴암주차장)가 나오고 우리는

토함산으로 향해서 올라간다. 정상직전에는 헬기장이 나타난다.

토함산 정상 오르기 전 300m지점에 설치되어있는 이 이정목에서 토함산을 올라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300m를 내려와서 토함산 우측 사면으로 진행하여 추령으로 향하여야 한다.

토함산 정상에는 오래된 조그만 정상석이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정상석이 있다.

토함산 정상의 氣를 받으며 인증샷을 남기고...

토함산 정상 2등 삼각점(△ 불국사 24 1989 복구)

토함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

오늘 내가 가야할 경주지역의 산그리메

토함산(土含山:745m:06:45)

경상북도 경주시 덕황동·불국동과 양북면의 사이에 있는 산으로

동해의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구름과 안개를 토해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래서 인지 이곳은 동해로부터 품어내는 물기와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토암산 일대의 총 면적138.2km2 지역이 1968년 12월에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고도 745m의 토함산은 산 자체로 조명되기 보다는 오히려 산기슭의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인해 도 알려진 산이다.

석굴암 일대는 옛부터 해맞이 명소로 각광을 받아 해마다 연초가 되면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인파로

혼잡을 이루는 곳이지만 정작 평상시에 산행을 목적으로 이곳 토함산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않은 편이다.

송창식의 노랫말에도 있듯이 신라천년 모진 풍파를 지켜보며 세월의 영광과 아픔을 가슴속에 품고있는 산이다.

옛 서라벌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악(東嶽)이라했고 호국불교의 진산으로 신성시되어왔다.

토함산 주변에는 신라 천년 역사를 담은 유물, 유적들이 풍부하여 문화유적 답사를 겸한 산행에 적격이다.

산경표에는 낙동정맥이 남진하여 영남알프스를 일구기 직전 백운산에서 동북쪽으로 곁가지를 틀어서

치술령, 토함산, 추령, 만리성재를 지나 호랑이 꼬리로 알려진 호미곶에 이르기까지 형산강의 남쪽 수계를 관장하고있다.

약간의 억새밭이 펼쳐지는 산정에 서면 사방팔방으로 거칠것이 없는 조망을 선사하고 가까이로 감포 앞 바다를 볼수있는 곳이다.

토함(吐含)이란 이름은 신라 탈해왕의 이름에 연유됐다는 설도 있지만 해(太陽)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함산 북동쪽 건너편의 함월산(含月山)에 상대되는 산으로 함월산이 달을 머금은 음산(陰山)인 반면

토함산은 모든 양기의 근원인 해를 토해내며 온 세상을 밝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것이 아닐런지...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옛 부터 이곳 토함산 일대에서의 해맞이가 대한팔경중 하나로 꼽혔으리라 생각된다.

이곳 토함산 지구는 면적이 가장 넓으며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 있다.

불국사는 서기 540년(법흥왕 27년)에 창건하였으며, 다시 서기 751년(경덕왕 10년)에 김대성이 중건하였다.

한국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미와 문화재가 많은 최고의 사찰로 경내에는 대웅전과 목탑의 기법으로 세운

화려하고 정교한 석탑인 높이10.4m의 국보 20호인 다보탑(多寶塔)과 높이 3.2m의 국보21호의 3층석탑이있다.

토함산 동쪽에 위치한 국보24호인 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은 한국불교 조각의 정수로서 이곳에서의 일출 모습은 장관이다.

토함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주 남산의 모습

정상에는 아주 멋진 소나무 한그루도 있고...

내가 가야 할  함월산도 아련히 보이고...

2주에 한번씩 3년을 같이 산행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토함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경주의 仙景을 감상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헬기장을 지나 추령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다시 좌측의 추령길로 접어들어 내려가다가 넓은 공터에서

아침밥상을 차린다. 오늘은 중간과 후미조들이 오랜만에 같이한다.

여러 동료산꾼이 가지고 송이버섯, 오리훈제 복분자, 소주, 등등

 동료산꾼들이 가지고 온 음식들로 고급 즉석부페가 차려서 밥을 먹는데...

정상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먼저간 대장이 우왕좌왕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먼저간 선두팀들이 길을 잘못들어 알바를 한 모양이다.

대장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선두로 가는게 마냥 존건 아니여.

오랫간만에 여유로운 식사에다가 후식으로 커피까지 느긋하게 마시고

부드러운 능선길을 걷는다. 이곳은 경주국립공원 지역이라 그런지

길은 마치 서울근교의 일반산행을 하는 느낌이다. 여태껏 힘들게

호미기맥길 걸은것을 보상이라도 해준는 느낌이다.

그래서 山은 참으로 많은것을 가르쳐 준다. 苦가 있으면 樂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곳은 산지의 지질이 마사토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내려가지만 무릎에

상당히 무리가 오는 느낌이다. 산이나 인간사든 아뭏든 내려올 때

조심해야만 하는 모양이다.  발목이 아프다. 등산화끈을 바짝 조인다.

추령가는 길에서 바라본 함월산과 절골

오늘 산행은 직선거리로는 원고개에서 성황재까지 14.5km 밖에

안되지만 산행이 山自分水嶺의 원칙 때문에 경주지역 산그리메를

뱅뱅돈다.  마침 뱀또아리 틀듯이 능선을 돌다가 보니 도상거리가 26km

정도이고 실제 거리는 30km 가까이 되는 느낌이다.

저기 보이는 함월산이 가까워 보이는데 계속해서 산을 돌아서 간다.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펌)

 저 능선 너머로 감포 앞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감은포로 불리다 이쪽 지형이 달 감 (甘)를 닮았다 해서 감포항이란다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혼이 담긴 감포 앞바다 대왕릉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 당나라와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문무왕(文武王)...

외숙(外叔)인 김유신과 더불어 당나라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광활한 고구려의 영토가 당나라가 차지하면서 대조영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流民)들이 나라를 세웠으니 발해다. 그는 죽어서도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노라고 하여 화장(火葬)한 뒤 유골(遺骨)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安葬)되어 있다

추령까지는 이정목과 재난구조 표시목이 많이 보인다

내리막길은 너무 미끄럽다. 조심해서 내려가다가 또한번 꽈당...

오늘 2번이나 넘어진다. 다행히 베낭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바지가 엉망이다. 에공 이제 범여도 슬슬 맛이가는 모양이다. ㅋㅋㅋ

등로에 있는 경주 최씨의 묘지도 지나고...

밑둥치가 희한하게 생긴 나무도 지나고...

478봉(08:15)

이정표(← 추령 1.5km → 토함산 1.5km, 석굴암주차장 2.3km→)나오고

계속해서 내리막을 내려간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너무좋다.

덕분에 같이가는 동료산꾼의 닉이 가을바람님이 오늘 엄청 칭찬을 받는다.

계속해서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걸어서 추령으로 향한다

추령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간간히 차량소리가 들린다.

추령 전파기지국

전파기지국을 지나니 편안한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조금 내려가니 좌측으로 百年茶院이 나오고 추령 도로가 나타난다. 

추령(秋嶺:310m:08:40)

경북 경주시 황룡동과 양북면 장항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속칭 가내동재라고 한다.

 토함산(吐含山)의 북쪽에 있으며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지구에 포함된다.

 4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1998년 추령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이곳 舊 4번국도는

 교통량이 거의 없고 가뭄에 콩나듯이 차 한대가 지나간다.

서쪽에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남쪽에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

(명승 및 사적 제1호), 북쪽에 기림사. 골굴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 등의 유적이 있다.

百年茶院의 모습

경주에서 감포항을 너머가는 4번국도가 지나는 추령에 꽤나

규모가 큰 전통찻집이 하나 보인다. 이곳 옆 산 아래로 추령터널이

새로 뚫리는 바람에 이 고개는 옛 영화를 잊어버린 것 같지만

이곳 茶院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정갈하고 깔끔한 외모가

마치 신라의 옛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문이 열렸으면  차 한잔

마시고픈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른 아침이라 영업은 하질않고

쥔장인듯한 분이 정원에 풀을 뽑고있다.

도로를 따라서 청사초롱 형태의 가로등이 이채롭고 운치가 있어 보인다.

특히 정문 옆 등에 쓰인 문구가 가슴에 와닿는다.

“오늘도 그대 소식 기다려 봅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추령 도로변에서 동료 산꾼들과 막걸리 한잔을 나눠 마시고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등로를 치고 오른다. 

등로 절개지에서 바라본 추령

내가 서 있는 이 능선 아래로 시원스럽게 새로 뚫린 추령터널이 지나간다.

오늘 내가 지나온 토함산의 모습

393봉(09:15)

등로에 커다란 암릉이 가로막고 있는 393봉이 나타난다.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바위는 마이산에서 볼 수 있는 시멘트로

자갈을 버물려 놓은듯한  역암 덩어리이다.

바로 아래에는 삼각점이 있고 삼각점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고+ 표시되어 있다.

대부분 산꾼들은 이곳을 올라오지 않고 암릉 아래의 우회길로 가버린다.

393봉에서 바라본 토함산을 이어가는 능선들

추령터널로 연결되는 새로생긴 도로의 모습

추령에서 성황재까지는 고도차가 심하고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안부 능선을 걷지만 여태껏 지나온 길과 전혀 딴판이다.

같은 경주국립공원이지만 토함산 구간은 곳곳에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길도 잘되어 있지만 추령부터는 길이 뚜렸한지만 나무와 잡풀들이 많고

전혀 관리가 안되어 있어 마치 庶子 취급을 하는 느낌이다.

계속해서 안부 능선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한다.

파평 윤씨 묘지를 지나서 늘상 같이 다니는 젠틀맨님과 함께

오늘은 가을바람님 셋이서 걷는다. 이러저런 세상사를 얘기하면서

가다가 쉬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막걸리 한통을 꺼내서 마신다.

시원한 바람에 따스한 한줄기 햋빛이 나무사이로 비친다.

이상기온으로 인해 철없는(?) 철쭉도 피어있고...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이게 낙엽 밟는 소리가 아닐까.

 아에 배낭을 내려놓고 낙엽에 앉아 본다.

 이젠 낙엽 밟는 소리보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더 뚜렷이 들린다.

그래, 이게 가을이 가는 소리겠지.

언제 이렇게 낙엽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지는 소리를...

멋진 나무 한그루를 만나고 다시 오르막을 올라간다.

다시 치고 오르니 칡넝쿨이 가득한 폐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다시 내리막을 내려가며 S 자형태로 계속 기맥 등로를 이어간다.

오늘따라 그리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젠틀맨님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급한 내리막길을 휭하니 가버린다. 다시 베낭을 둘러맨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이젠 바람이 한기를 느낄만큼 차갑다.

494.2봉 갈림길(10:15)

이곳에서 좌측으로 10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정상으로 간다.

494.2봉(10:20)

봉우리 정상에는 준희님이 걸어논 아크릴 표시판이 있고 꽤나 넓은

안부에는 星州 都氏의 묘지 1기가 있다. 봉분은 없으나 벌초를 한 걸로

보아서는 후손들이 묘지를 관리하는 모양이다.

다시 능선 삼거리로 되돌아와서 직진으로 간다.

수렛재(10:40)

경주시 황룡동에서 양북면 안동리를 넘어가는 가파른 고개로서

이정표와 산행지도와 함께 지명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수렛재의 유래를 보면 급한 경사길에서 수레를 끌던 말들이

꼬꾸라져서 수렛길이라 불렀다고 한다.

수렛골 정상에는 지도와 안내판이 있다.

토함산 지구에는 몇백미터 단위로 있던 이정표가 추령이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에 이곳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이 지역은

같은 경주국립공원이지만 첩의 아들만큼이나 홀대가 심하다.

추령이후에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만난다.

모차골에서 올라온 여인들로 울산에서 왔다고 하면 친정이 경주란다.

다시 고개를 건너서 고도를 높이며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샛길 출입금지 현수막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져 미끄러운 길을 올라간다.

조금을 더 치고 올라가니 좌측으로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이윽고

549봉이 나타난다. 이곳의 산그리메는 그야말로 예술이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절골의 모습

약간의 내리막을 내려갔다가 다시 함월산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소나무 한 그루가 오늘 산행구간을 설명하려는지 뱀따리를 튼것처럼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르지만  여인의 방뎅이처럼 보이기도 한다.ㅋㅋㅋ

무장산과 함월산 우회길이라고 표시한 ㅜ자형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함월산을 향한다. 떨어진 낙엽이 가을을 재촉하는 느낌이다.

낙엽을 밟으며 함월산 바로 아래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20여m를

오르니 함월산 정상에 오르니 실망 그 자체이다.

명성에 비해 표시석 하나없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봉우리다.

함월산(含月山:584m:11:20)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의 능선에 있는 산으로 명성에 비해

형편없는 그저 그런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품을 함(含)자에 달 월(月)자이니 달을 머금은 산이라고 하겠다.

토함산을 태양에 비유하며 그와 마주보고 있는 함월산을 달에 비유한다.

산이 자리한 곳은 경주의 동쪽 지대로 감포 앞바다가 시린 쪽빛으로 보이는 곳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남쪽으로는 토함산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포항 운제산과 같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아마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세 산은 굉장히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천년 고찰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토함산이 불국사를,

운제산이 오어사를 품고 있듯이 함월산 역시 기림사와 선무도로 유명한 골굴사라는

고색창연한 명찰을 산자락에 안고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기림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90도 꺽어지면 성황재로 가는 길이다.

 이곳 정상에 도착하니 먼저 와있던 한회장님과 운림,보라님이

먼저 판을 벌리고 잇다. 이곳에서 마지막 남은 맥주와 소주를

마시고 과일과 떡을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 휴식을 취한다.

한회장님, 젠틀맨님과 인증샷을 남기고...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봉분이 거의 없다시피한 묘지가 나온다.

무장봉 갈림길(11:45)

또다시 급한 내림길에 내려오니 숲이 우거져 등로가 헷갈린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무장봉과 운제산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성황재가는 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오르막 능선으로 오른다.

관리되지 않은 등로를 따라 마사토의 미끄러운 능선을 따라서

급한 오르막길을 올랐다가 다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한다.

아주 오래된 금복주 소주병도 보인다... 무척이나 반갑다.

등로 사이로 포항시내와 포스코... 그리고 포항 앞바다가 보인다.

591.4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무장봉과 억새 군락지

가야,고려,조선은 대략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신라 1000년의

창대한 역사와 문화는 지금도 옛 서라벌과 그 인근 땅에 남아있다.

경주 황룡동 절골 입구 사시목에서 동대봉산 정상과 억새군락(옛 오리온농장)

있는 무장봉이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이 삼국을 통일한 7세기중엽 투구와 병기를, 낮에도 음달인 암곡(暗谷)

저 깊고 가파른 골짜기속에 갈무리하고 무장사를 지었다고 13세기말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 3권 탑상(塔像)편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편찬당시 미타전(彌陀殿)은 파괴되어

있었지만 무장사는 존재했다고 한다. 현재는 미타전 기단부 편석,3층석탑과 절터만 있을뿐이다.

근대(1915년)에 와서 미타전 건립사적비가 발견되어 그 비문 내용에 무장사임이 밝혀져,이곳이

 삼국유사에서 기술된 무장사 터임이 1200여년 후에 비로소 후세에 알려지게 된것이라고 한다.

다시 낙엽길을 밟으면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한다.

무장봉 옆의 습지(옛 오리온 농장)과 운제산 그리고 내연산이 아련히 보인다.

591.4봉 삼각점(△불국사435 1995 재설)

591.4봉(12:40)

이곳에 서니 저멀리 포항 앞바다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운제산과

무장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이곳에서 우쪽으로 급히 꺽어져서 성황재로 향한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좌측으로는 엄청나게 크게 산사태가 일어나서

산의 일부가 다 날아간 느낌이다. 아래로 쳐다보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곳은 지질이 마사토 지역이다 .마사토는 화강암이 풍화되어 생성된 흙으로, ‘화강토’로도 불린다.

경주시에서는 이곳에 안전망을 좀 설치해 주었었으면 한다.

저 멀리 운제산이 보인다.

591.4봉에서 급하게 내려온 다음에 편안한 안부를 걸어간다.

주위에 간간히 멋진 소나무도 보이고...

지나온 함월산 구간의 능선의 모습

482봉(13:20)

그리 고도차가 크지 않은 능선을 걷다가 오늘 마지막 봉우리인 482봉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 너머로 지나온 함월산이 보인다.

지나온 함월산의 구간

헬기장에서 조금 내려와 휴식을 취한다.

가을 바람님이 가져온 단감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있는데

산악회의 꽃인 보라님이 오라버니들의 원기를 보충한다고 하면서

요즘 전세계를 떠들석하게 하는 강남스타일을 추면서 박장대소를 한다.

강남스타일로 오라버니들의 원기를 보충해주는 귀염둥이 보라님

휴식을 취하고 편안한 길을 내려오니 206이란 숫자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90도 꺽어서 좌측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이곳부터는 등로가 완전히

함몰되어 마치 水路로 가는 느낌이다. 수로를 타고 고글스키 경기하듯이 울퉁불퉁한

길을 한동안 계속해서 걸어야만 한다. 

포항쪽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산 능선에는 송전탑이 계속 이어지고...

 

NO: 64 송전탑(13:45)

송전탑이 지나니 Y자형 임도가 나오고 마치 고속도로를 걸어가는 기분으로...

임도를 걸어서 계속 진행하는데 우측으로 NO 48번 송전탑이 나오고 차량소리가 들린다.

아~ 진정 가을입니다

 

임도 끝까지 내려오니 도로 앞에는  언 놈이 철대문을 세워놓고 열쇠까지 채워놨다.

누구 맘대로 기맥길을 이렇게 한거야... 약간 비켜서 도로에 내려온다.

성황재(14:00)

경북 경주시 양북면에서 포항시 오천읍을 잇는 14번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랫만에 그것도 아주 오랫만에 편안길을

호강하면서 10시간 30분간의 일정을 끝내고 산행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는다.

도로가 우측 공터에는 울산에서 오셨다는 분들이 오리로스에다가 울산 앞바다에서

잡았다는 고기를 주며 먹어보라고 한다. 거기다가 소주 한잔까지 곁들여 준다.

맛있게 얻어먹고 물이 없다고 하니까. 시원한 생수까지 준다. 역시 山 인심이 최고여!

성황재에서 100m 정도 포항쪽으로 내려가니 넓은 휴게소에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기다린다. 휴게소 옆 개울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버스를 타고 기림사 정문앞에 있는 무량식당에서 닭백숙으로 식사를 마친 다음에

16시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무량식당 앞에 있는 기림교

기림사(祈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기림사는 신라초기 인도 범마라숙사문 광유성인이 창건했다고하는데 임정사라고도 불리웠다한다

광유화상이 부처님의 도량을 마련하여 오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있어서

우리나라의 설화문학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하는데 원효에 의해 기림사라고 했다한다..

 

기림사는 신라 천년의고도 경주에서 추풍재를 넘어 감포쪽으로 토함산과 함월산계곡에

위치해 있는데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과 풍수학적으로는 서로 달을 토해내고 머금은 관계라 했다..

또한 기림사는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추듯 뭇봉우리가 둘러싼 가운데 물길이 열려

이루어진 광할한 명당으로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영구음수형이라고 했는데

이곳 기림사는 풍수학적뿐만 아니라 많은 전설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

1997년 해체공사 때 종도리에서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던 대적광전으로 기림사의 본전이다.
대적광전은 신라 선덕여왕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8차례나 다시 지어질 정도로

수난을 많은 건물이기도 한데 보물 833호 이다.

대적광전 삼존불(보물 958호)

대적광전 내부에 있는 보물 958호인 삼존불상으로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이며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다.

기림사 오정약수

기림사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다섯가지 빛깔의 상서로운

우담바라꽃이 피는 곳으로 에로부터 오정수가 유명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