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2년 11월 04일(무박산행)
☞산행날씨: 흐린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20.1km / 8시간 소요
☞참석인원: 백두사랑 산악회 회원 27명과 함께
☞산행코스: 흰날재-동산공원묘지-금오산-191봉-193봉-212봉-윳판재-공개산 갈림길
공개산-장기목장성 전망대-발산 봉수대-팔각정-명월산-우물재산-180.6봉
고금산-31번 국도-새천년 기념관-호미곶 광장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동해면, 구룡포읍, 호미곶면(舊 대보면)
바야흐로 대선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여,야, 무소속 후보들의 동정(動靜)이 매일매일
TV에 도배가 되다시피한다. 헌데 그들의 공약이라는 걸 보면
어떻게 하겠다는 일종의 공약들이 마치 뜬구름 잡는것 같은 느낌이다.
총론에서는 어떻게 하겠다는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두리뭉실하니
표를 의식한거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 것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이익대변에는 아주 적극적이지만
민초들의 안위에는 관심조차 없는듯 하고 정책대결보다는 남을 헐뜻는데
주안점을 주는듯 싶다... 우리나라 국민성은 참으로 남이 잘되는걸 못보는
성격인듯하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사면 배가 아프다’ 는 속담까지 있겠는가?
대선후보들에게 바란다. 남을 비방하고 헐띁는 정치가 아닌 민초들의 안위를
위한 생활정치를 좀 해줬으면 한다.
정치꾼들을 백두대간 종주를 한번 시키면 정신순화가 될려나?
산을 걸으면서 나를 비우고(空) 낮추고(下心) 배려하는 맘을 배웠으면...
그런면에서는 산만큼 훌륭한 스승도 없을듯 싶은데...
흰날재 옆 주택가 (04:05)
오늘이 9월초부터 시작한 호미기맥길 마지막 구간이다.
양재역에서 버스에 오르는데 28인승 리무진 버스가 만차이다.
지난구간 골프모임 때문에 빠진탓에 한달만에 동료 산꾼들을 만난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경부고속도로 천안 휴계소에서 20분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차에 올라 늘 하던대로 깊은 잠에 빠진다.
한참을 잔 다음에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벗어나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접어들어
영천 휴게소에서 10분을 쉰 다음 다시 포항으로 향하는데 가끔씩
차창에 비치는 빗방울이 보인다... 조금은 우려스럽다.
03시 45분에 포항I.C를 빠져나와 포항시내를 거친 다음에 04:05분에
지난 구간의 날머리인 흰날재에 도착하니 이곳은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다.
장비를 점검하고 04시 20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에서 대장이 오늘은 80%이상을 도로를 따라서 가기에 천천히
같이 가자고 해놓고 정작 본인은 산행 시작하자마자 마치 뭣이 그리도 급한지
정신없이 도망을 간다. 야간에 사진 몇컷트 찍는 사이에 선두그룹의 헤드랜턴
불빛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이후로 산행 끝날때까지 얼굴을 못봤다.
참으로 멋없는 산행을 한다... 산행을 하는건지 산악마라톤을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하긴 나야 오늘 산행을 끝으로 일정이 맞질않아 이 산악회 나올 수 없으니...
4년동안 1대간 9정맥 4기맥 3지맥을 마치고 나니 자꾸만 오른쪽 무릎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고 하여 이렇게 죽기살기 산행은 힘들것 같아 금남기맥부터 나홀로 산행을 하련다.
흰날재 육교(04:20)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석리와 상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포항과
구룡포를 잇는 31번 국도가 지는 곳으로 흰날재는 희날재라고 부른다.
백토광산이 있어서 예전부터 하얀가루가 많이 날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다른 전설은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상현(장기현의 옛 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놀란 왕이
일관(日官)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 거라고 했다.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 속으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 희날재, 히나리재 등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지금은 4차선 도로가 훤히 뚫려서 교통의 불편함이 없었지만,
옛날에는 눈만 조금와도 경사가 심해 자동차가 다니지 못했던 도로이다
무우 시래기 건조장
처음부터 꽤나 넓은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계속간다.
산행 시작 10분도 안되어서 선두는 구경을 할 수가 없다.
도로 좌측에 가건물로 지어진 무우 시래기 건조장이 보인다.
도로를 따라서 조금 더 지나가니 파평윤씨와 월성손씨 묘지 표지석이 보이고...(04:35)
동산공원묘지1km라는 표지판도 지난다(04:40)
어둠속에 동산공원묘지 초입에 산불조심 표지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하늘에는 비가 오려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오늘도 졸지에 기상청이 구라청으로 바뀌는 느낌이다... 베낭속의 우의가 괜스레 무거워진다.
구름속에 별들이 보이고 음력 구월 스무하룻날의 달빛이 산꾼 범여와 동행한다.
동산공원묘지(04:50)
어둠속에잘 보이지는 않지만 꽤나 큰 공원묘지이다.
이른 새벽에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금오산으로 향한다.
산꾼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망자들에 민폐에 되지는 않을런지...
상당히 조심스럽기만 하다. 진양 하씨의 묘지를 지나니
또다시 도로가 나오고 바리게이트를 앞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 숲속으로
처음으로 접어들어 금오산 오름길을 올라가는데 선두의 불빛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가 꽤나 오래된 모양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보면 이곳 금오산에 오르면 포항시내와 영일만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운제산과 무장산까지 보인다고 했는데...
금오산(金鰲山:230.4m:05:05)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와 입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同名異山)의 유명한 금오산이 여섯 군데나 있다.
구미의 금오산과 밀양 삼랑진의 금오산(730m),하동 진교의 금오산 (849m),전남 여수의
금오산(323m). 그리고 경주 남산의 금오산 (468m)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곳 포항 금오산은 그 어디에도 자료가 없다.
일반적으로 금오(金烏)란 해를 달리 이르는 말. 태양 속에 세 개의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금오산은 까마귀 오(烏)가 아닌 자라 오(鰲)자를 쓴다.
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어둠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4등 삼각점(△불국사 425 1995 재설)이 있다고 했는데 어둠속에 잡목이 가득하여
도저히 삼각점을 찾을 수가 없다. 할 수없이 포기하고 좌측으로 꺽어져 5분정도를
내려오니 동산공원묘지와 연결된 임도를 다시 만난다.
잠시후에 다시 좌측에 있는 191봉과 193봉을 올라선다.
선두들은 어둠속에 뭣이 그리도 급한지 이곳 마루금은 쳐다도
보지않고 임도로 내달린 모양이다. 젠틀맨님과 함께 어둠속에 191봉을
치고 오르니 햇볕에 바랜 낡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어 무척이나 반갑다.
길이 없어서 가시덤불 숲을 헤치며 193봉을 치고 오르니 임도로
편하게 오고있는 후미팀들을 이곳 갈림길에서 만나 다시 임도로 진행한다
이정표(05:35)
동해면 마산리와 상정리의 경계인 삼거리 임도에서 호미곶으로
향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는다. 흥환입구로 표시된 곳으로
조금만 가면 동해면 마산리가 나오는데 금오산(231m)과 공개산(241m)
사이에 있는 술미산을 비롯하여 작은 산들을 배경으로 하여 바닷가로
형성된 마을로서 마을 뒷쪽에 있는 산의 형상이 머리를 육지쪽으로 두고
꼬리를 바다쪽으로 하여 뛰어가는 말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말미(馬尾) 또는
마산(馬山)이라고 하였다고 하고, 산에다가 말을놓아 먹였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마을 뒷산에는 말을 먹였던 목장터가 있다고 한다.
어둠속에 아무것도 확인도 못한채 지나가는게 정말 아쉽기만 하다
뱀이 또아리를 틀듯이 뱅뱅돌아 한참을 간 다음에 고개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있고 그리
높지않은 능선을 타고 오르니 조그만 암릉지대도 나온다
이제 날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며 사물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212봉(06:20)
지도상에 212봉으로 표시되어 있는 정상에는 산꾼들이 걸어논 시그널
몇개만 덩그러니 보이고 아무것도 없다. 기맥 산꾼들도 임도를 다니는지
길은 아예없고 어둠속에 망개나무(청미래) 가시에 걸려서 무릎에 피가난다.
엄청나게 아프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좌측으로 접어드니 무명묘지 1기가
있고 이곳을 이리저리 헤맨끝에 내려서니 희미한 고개에 돌무덤이 하나 보인다.
어둠속에 헤맨 212봉에서 망개나무 가시에 걸려서 무릎에 피가나고
바지도 올이 빠지는 수난을 당한다. 아예 길이없다.
임진년 9월 스무하룻날 하현달은 산꾼과 서서히 이별을 준비한다.
윳판재(06:45)
포항시 구룡포읍 후동리와 동해면 중흥리를 잇는 고개로 희미한 길이 보이고
길옆에는 조그만 돌무더기가 하나 보인다. 이곳을 윳판재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옛날 흥환사람들이 구룡포를 넘나들다 지루하면 이 재에서 윷놀이 한 판 벌이고
간다고 해서 윳판재라고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이곳 우측 아래마을이 후동(厚洞)인데 옛날부터 이 마을은 다른곳에 비해서
농토가 많아서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인심이 후하였다고 한다.
구룡포와 포항을 잇는 31국도가 뚫리기 전까지만 하여도 이 마을의 서쪽에
있는 헛재를 넘어서 동해면 상정리를 거쳐서 포항으로 왕래하던구룡포 사람들이
날이 저물거나 굶주리면 이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여 후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뒷쪽의 죽전산(竹田山) 일대에는 수시수 또는 후동수라 하는 넓은 대나무 숲이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질좋은 신이대가 많이나서 조선시대에는 울산병영에서 관리하며
해마다 베어다가 활을 만들었다고 하며 대를 꺽는 사람은 볼기 열대를 많았다고 한다.
지나온 212봉의 모습
윳판재에서 우측에 올라서니 무명묘지 한기가 있다.
이곳에서 앞서가던 가을바람님을 만나고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막걸리 한병을 마신다... 3년동안 낙동,호남정맥과 진양,팔공, 호미기맥을
타면서 情이 들대로 든 젠틀맨님과 오늘이 마지막 산행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섭섭하다. 그러나 세상사 만나면 헤어지는게 이치이거늘...
늘 건안하시고 안산, 즐산하시길... 그나저나 이젠 소성막걸리 맛보기는 틀렸네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산으로님 내외가 온다. 같이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우측 길이없는 곳을 조금 지나니 임도가 나오고 다시 좌측 산소로 접어드니
조금전에 앞서가던 동료산꾼들이 아침상을 펼친다. 나도 젠틀맨, 가을바람님과
함께 같이 가져온 추어탕을 버너에 팔팔끓여 소주 한병과 막걸리 한병을
깔끔하게 비우고 젠틀맨님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공개산으로 향한다.
30분간의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무명묘지 1기가 나온다.
능선 안부로 올라서니 늙어빠진 우산나물이 이별을 준비한다
공개산 갈림길(07:55)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기맥길에서 좌측으로 200여m 떨어진 공개산으로 향한다.
공개산(孔開山:213.8m:08:00)
경북 포항시 동해면 중흥리에 있는 산으로 호미기맥 등로에서
200여m 정도 벗어나 있는 산으로 아무것도 볼 것도 없는 산이다.
준.희님이 걸어둔 표지판만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산이다.
낙엽속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 삼각점 하나만 달랑 외롭게 박혀있다.
이 산 아래에 있는 중흥리(中興里) 마을은 마을 뒷산이 마치 배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곳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일골 또는 배일곡(排日谷)이라 불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시 일본인들이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중흥리라 불렀다고 한다.
3년동안 있는정 없는 情이 다들은 젠틀맨과 함께 포즈를 취한다.
다음부터 같이 산행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이상하다.
다시 공개산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조금을 걷다가 뚜렸한
좌측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낙엽은 수북한데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공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기름나물꽃이 산꾼을 반긴다.
울님의 입술보다도 더 빨간 망개열매(청미래)도 만나고...
내리막길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젠틀맨님
등로에서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다시 도로가 나온다.
임도 삼거리(08:22)
이곳 임도 삼거리에서 구룡포 말봉재 방향 우측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산 능선 전체에 도로가
거미줄처럼 나있는 것을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우측으로 올라가다가 능선으로 들어서니 멋진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이 장기목장성 전망대라고 한다.
장기목장성 전망대(08:30)
장기목장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나온 호미기맥길의 모습
장기목장성의 모습
전망대에서 한껏 멋을 부려보고...
滿秋로 물든 능선 너머로 동해바다가 넘실거리고...
지나온 공개산도 보이고...
장기 목장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해안과 하천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덮여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등 역사문헌을 살펴 보면 장기 목장의 마성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대의 국영 목장으로 244명의 목자가 1000여필의 말을 사육하였던 곳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목장수의 감소 등 관리상의 어려움 등으로 마필수가 점차 축소됐다.
장기 목장의 마성은 구룡포읍 구룡포 3리(창주리)에서 작은 산 능선을 따라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 서쪽과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 진골 산 계곡을
지나 바다에 까지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흥환리 해안 약 2km부터는 마성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마을의 밭둑이나 담장 등에서 마성의 돌로 추정되는 것이 쉽사리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기 마성의 길이는 약 25여리이며 높이는 10척이다.
석성으로 되어 있으며 호미곶을 가로질러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는 장성(長城)이다.
목장의 둘레는 대략 120리(약45km)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구룡포에는 높이 10여m의 자연 돌문이 있었다.
이 돌문이 시외버스 터미널과 가깝고 돌문 사이가 약 5m정도여서 좁아 차량통행상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낙석 위험으로 1988년 하나를 해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해체한 돌문의 윗부분은 구룡포 읍사무소에 전시되고 있어 아쉬움을 들어주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당시 돌문의 용도는 말의 출입을 통제하며
그 수를 헤아리던 곳이었으며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마성이 지역개발로 훼손이 심각한 상황인데 반해 장기 마성은
해병대 군사 작전지역의 영향과 계곡안쪽에 위치해 마성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게 특징이다.
특히 섬을 제외한 내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드문 마성이라 점과 조선 초기에 건축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본다.
장기 목장에는 막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그 유적을 발견되지 않았다. 대보면 강사3리 절골 해봉사
맞은편에는 화재로 소실된 월명암(신라 선덕여왕때 건립 추정)이 있었으며,
이곳은 울산 방어진의 월봉사와 마찬가지로 목장의 마필의 번창을 위한 국마 축원당으로 쓰였다.
포항 장기지역에는 이밖에 군소목장으로는 흥해 곡강리 일대의 봉림목장지, 초곡리 일대의
마장목장지, 해병사단일대의 일월목장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장기 마성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해동지도 장기부>에는 ‘신라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이다’라는 해제(解題)가 있다. 또 <세종실록>의 세종 14년(1432년 12월 1일)의
기록에 ‘이제 경상도 동을배곶이(冬乙背串)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
청컨대 영일·장기의 두 고을 수령으로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뤄 장기목장에서 말을 방목한 시기는 최소 1432년 이후로 보이며,
인근 지역의 영일과 장기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였다. 즉 동배곶 목장은 영일현과 장기현의 수령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겸감목관제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목장의 규모와 보유한 마필 수에 있어서 훨씬 많은 장기 목장이 울산 목장으로 편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지리적 위치로 보아 장기 목장은 울산 방어진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지역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로,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곳에 유배됐었다.
<승정원일기> 숙종원년 6월 19일 기록에 송시열은 1675년 6월10일께 장기에 유배됐고,
정약용은 1801년 3월9일께 유배됐다. 그 외 수 많은 사람들이 장기에 유배됐다.
두 번째로는 장기 목장이 연일과 장기현의 사이에 있어서 관리 방식과 운영에 있어서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1625년)에 의하면 ‘장기 동배곶 목장은 말의 품종이 좋아서 경상도에서 제일로 불리고 있다.
현재 8명이 1066필을 방목, 관리하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래 목자의 인원은 280명이다. 목자의 수가 적은 까닭으로 성이 무너진 것이 한계를 넘었고,
성끝 변경으로 말들이 넘어가서 흩어지니 혹 지역사람들이 쏘아서 잡아먹기하한다.
목자를 충정(充定)하고 마성을 쌓는 일은 사복시로부터 행동으로 옮길 것이나
각도의 감사(監司)는 눈치를 보며 살피기만 할 뿐 시행하지를 않는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전망대에서 다시 되돌아와서 좌측으로 장기목장성의 돌담을 따라
등로를 내려오니 다시 도로가 나오고 발산 봉수대로 올라간다.
이 장기목장성 돌담은 조선시대에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 울타리로
동배곶(冬背串) 목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룡포읍 돌문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약 7.6km의 길이로
축조되었는데 지금은 5.6km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돌담의 길이가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임도가 나오기 직전에 솟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08:40)
이곳은 장기목장성 탐방로이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발산봉수대에서 내려오는 아마 이 지역 주민인듯한 등산객을 만난다.
베낭도 없고 수통하나도 없는 워킹족 2명이 말봉재로 지나간다.
우린 발산 봉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발산봉수대(鉢山烽燧臺:08:45)
조선 초 동해면 중흥리 공개산(214m)에 조성했던 발산봉수대(鉢山烽燧臺)는
순조때인 1819년에 지금의 구룡포리 산1번지로 옮긴다.
그 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연해봉수의 신호를 받아
서울 남산(木覓山)으로 왜적의 침입을 전달하던 간봉(間烽)이었다고 한다.
둘레 약 70여m가 되는 타원형의 봉수대 바로 옆에는 오장(伍長)의 지휘아래
봉수군이 거주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500여평의 평지가 있다.
중요한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봉수대터는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포항시의 역사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서 씁쓸하기만 하다.
봉수대터에서 바라본 영일만
팔각정(08:48)
발산 봉수대에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2층 팔각정이 나오고 구룡포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팔각정 현판에는 마봉루(馬烽樓)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다... 구름이 약간 가리긴 해도
시원스런 바다가 도심에 찌든 스트레스가 한번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구룡포 앞바다.
저 멀리 오늘 산행을 마감하는 호미곶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반도의 형상이 호랑이라면 호미곶(반도)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
호미곶은 행정구역상 구룡포읍, 호미곶면, 동해면 등 3개 읍·면에 걸쳐 있다.
산은 높지 않지만 엄마 품 같은 영일만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병풍을 펴놓은 듯한 호미곶 생김새이다.
'만(灣)'이란 바다의 일부가 육지로 휘어 들어가 있는 곳이며, '곶(串)'은 반대로 육지가 바다쪽으로 삐죽 튀어
나온 곳을 말한다.
옛 문헌에 '말(馬)의 목덜미(말갈기) 같이 생긴 곶'이라서 해서 붙여진 '장기곶'이 언제부터인가
'호랑이 꼬리 같다'고 해 '호미곶(虎尾串)'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장기갑 등대' '대보면'도 '호미 등대' '호미곶 면'으로 변경됐다. 요즘에는 '호미반도'라고도 명명하기도 한다.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판이 붙어있는 말 세마리가 있다.
인간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심리인가?
기어이 말등에 올라타고 포즈를 취해본다 ㅋㅋㅋ
봉수대와 팔각정을 들렸다가 되돌아와서 말 조형물이 있는 길이없는
숲을 헤치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초입에는 아직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으름나무가 있고 계절이 11월인지라 으름열매는 보이질 않는다.
칡넝쿨과 재피나무 가시가 얼굴을 할킨다. 간간히 선답자들의 낡은
시그널이 눈에 뛰긴 하지만 우회로인 임도로 다니는지 길은 전혀없다.
조금을 더 내려오는 전망이 좋은 바위가 나타나고 우측에는 파먹을만큼
파먹었는지 지금은 산이 완전히 망가질대로 망가진 채석장이 방치되어 있다.
숲속에 새집 하나가 덩그러니 보인다. 이곳을 헤치고 내려오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에서 바라본 마봉루 팔각정의 모습
비포장 임도를 계속 걸어간다. 좌,우측에는 조리대와 대밭이 나온다.
임도길에는 노란 산국이 참으로 이쁘게도 피어있다.
포장도로 끝머리에는 바리게이트가 있고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09:15)
이곳 임도에서 호미곶 방향으로 계속 임도로 걸어간다.
마지막 산행을 여유롭게 즐기는 젠틀맨님과 가을바람님
조금을 더가니 우측에 ‘사유지라고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경고판을 따라서 명월산으로 오른다. 이보시게 덕성학원 관계자 나리!
지뢰밭도 지나가는 간큰 산꾼들이 기맥, 지맥길을 가지 말라고 안 가는것 봤소.
맥길을 막은 당신들이 잘못이지 내 원참
임도를 버리고 우측 숲이 우거진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숲속에
퍼더덕하는 소리에 놀란다. 장끼 한마리와 까투리가 놀라서 날아간다.
이곳은 산부추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산부추는 간과 심장에 좋은 식물이라하였다.
위를 보호하고 위의 열을 없애주며, 신에 양기를 보하고 아울러 어혈을 없애고 담을 제거한다.(본초비요)
용담도 이쁘게 피어있고...
명월산에 도착한다. 넓은 공터에는 억새를 비롯한 잡풀들이 가득하고
전망대 위에 산불감시초만이 덩그러니 외롭게 서있다.
억새사이에는 등산객들이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했는지 인분냄새가 코를 찌른다.
명월산(明月山:189m:09:35)
포항시 구룡포읍 강사리(江沙里)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이 명월이라
명월산이라고 부른다. 명월마을은 절골, 寺里(사리) : 多木浦(다목포)서편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山村으로 달그림자가 없는 마을이라 '明月'(명월)이라고 한다.
해봉사(海蓬寺)가 있어 절골이라 한다.
이 마을은 달이 한 번 뜨면 새벽닭이 홰를 칠 때까지 동네를 환하게 비춘다 하여 붙은 지명이라고 했다.
주위로 달을 가릴만한 높은 산이 없는 탓이다.
해봉사(海逢寺)
명월산 자락에 자리잡은 해봉사는 대한불교 법화종의 전통 사찰이다
신라 善德女王(선덕여왕)5년(636)에 이 지역 收場(수장)의 軍馬飼育(군마사육)을
祈願(기원)하는 寺刹(사찰)로 創建(창건)되었다가 高麗(고려)때 廢寺(폐사) 된 것을
朝鮮 明宗代(조선 명종대)에 上宣禪師(상선선사)가 佛堂 13棟(불당 13동)의 巨刹(거찰)으로
重建(중건)하였다가 哲宗(철종)말기에 토호의 방화로 7棟(동)이 소실되었으며 高宗末年(고종말년)
장기郡守(군수)의 命(명)으로 明月庵(명월암)하나 남기고 철폐되었는데 1970년에 이것마저
불에 타고 1972년에 다시 건립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梅月堂 金時習(매월당 김시습)이
한 때 이 절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법화종은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묘법연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나누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은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의 길로 가야한다 는 것.)을 본체로 하여 일심삼관(一心三觀)과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익혀 중생을 교화하고 널리 불법을 펴서 호국함을 종지로 삼고 있으며 신라의 원효, 고려의 제관 스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근본 경전은 『법화경』이며 본존은 석가모니불과 십계만다라이다.
명월산에서 길이 뚜렷한 곳을 따라서 직진을 한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창녕이씨 묘지가 나오고 조금을 더 진행하니
해송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있는데 산꾼들이 다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빽하니 명월산을 지나서 임도로 되돌아와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창녕이씨 묘지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임도를 계속 따라 내려오니 임도 옆에는 철없는(?) 개나리가 滿開했다.
참으로 정신없는 넘이다... 어쩌면 저 넘도 기후변화의 희생물이 아닐까?
이정표(10:05)
사거리 임도에 이정표가 나온다. 지도를 보니 우측 능선이 지도상에
나오는 우물재산이다. 임도에서 절골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우측에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등로를 따라 올라가니 경주이공 묘지가 나온다
경주이공 묘지를 지나 20m 정도를 올라가니 나무만 빽빽한
밋밋한 봉우리가 나오고 아무런 표식도 없다.
우물재산(?) 가는 길
우물재산(?:10:10)
지도상의 등고선을 보면 분명 이곳이 우물재산이 맞은것 같다.
몇몇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달려있는 것도 확인을 하였다.
우물재산의 지명 유래나 그 이외의 자료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다.
동료산꾼 3명과 함께 확인만 하고 다시 임도 사거리로 되돌아와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다시 임도 사거리로 되돌아와서 호미곶으로 향한다
임도를 걸어가다가 우측으로 뚜렸한 길이 나있어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길을 계속 걸어가니 해군2224부대가 나타난다.
다시 빽하는 바람에 10분 정도의 시간을 허비한다.
다시 임도로 돌아와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좌측으로 시그널이 걸려있고
이곳에서 편안한 비포장 도로를 타고 기맥길을 이어간다.
다시 5분정도를 걷다가 빽빽히 들어선 우측의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180.6봉(10:40)
빽빽한 안부 능선에 180.6봉이란 준.희님의 표지판이 있고 3등 삼각점이 있다.
새로 설치한 삼각점 옆에는 옛날 삼각점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어서 보기가 않좋다.
이곳이 지도상에는 삼각점봉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준.희님의 표지판 옆에
어느 산꾼이 우물재산이라고 매직으로 표시 해놓은 바람에 상당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180.6봉 삼각점(△대보 301 2004 복구)
180.6봉을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졌다가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니
무명묘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젠틀맨, 가을바람님과 함께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하면서 깔끔하게 막걸리 2통과 과일로 원기를 보충한다.
다시 직진을 하여 내려오니 제법 큰 임도가 나오고 트럭 한대가 표고버섯을
재배하려는지 아카시아 나무를 진뜩 싣고 가면서 이곳에 멧돼지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고맙수
이곳은 호미곶면(구 대보면)에서 둘레길 표시의 시그널로 도배를 해놨다.
멧돼지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등로를 완전히 난도질을 해놨다.
한참을 지나니 Y자형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고금산으로 향하기 직전 내리막길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날머리가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우측으로는 호미기맥 끝자락 포토죤이란 이정표를 따라서 걷는다.
거기에 올라서니 호미곶이 한 눈에 들어오고 이곳은 몇해전에 난
산불로 인하여 산 주위 전부가 민둥산으로 바뀌버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호미기맥길에 마지막 산이자 아쉬운 산인 고금산이 보인다.
이곳은 군부대 방공포가 자리를 잡고있는 접근할 수 없는 산이다.
포토존에서 바라본 대보 저수지의 모습
호미기맥 마지막 능선에서 바라본 호미곶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호미곶은 해맞이 명소뿐만 아니라 등대박물관과 인근 항구
그리고 빼어난 풍경으로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한반도 전체를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백두산은 호랑이 머리이고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국토의 동쪽 끝을 측정하기 위해 영일만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 한 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동쪽임을 확인,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지리지 편에 자연 경관이 수려한 호미곶을 '대한 십경' 가운데 하나로 기록했다.
오늘날의 호미곶이 갖는 위상은 일제의 한반도 풍수침략과 밀접 한 관계가 있다.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돼 있는 바와 같이 조선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땅 생김새를
행주형(行舟形)에 비유하거나 아니면 해좌사 향(亥坐巳向)의 노인형(老人形) 지세로서
마치 중국에 읍(揖)하고 있는 듯 한 형상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과 친근하다고 하는,
국역풍수설이 팽배 해있었다.그러나 조선 중엽에 강태희가 '근역강산맹호도(槿域江山猛虎圖)' 라는
그림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크게 바뀐다.
풍수사를 위시한 많은 사람 들 사이에서 이 땅을 호랑이 형상으로 인식하려는 풍조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차에 때마침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한반도의 형상을 희생물의
상징인 토끼로 폄하하자 육당(六堂) 최남선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안출해 낸 것이 바로 맹호도이다.
이 두 그림은 한일합방 직 전인 1908년 11월에 발행된 '소년지(少年誌)' 창간호에 흥미로운 기사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
가지못할 아쉬움을 남기는 호미기맥의 마지막 산 고금산(古今山:122m)
경북 포항시 호미곶면(舊 대보면) 대보리에 위치한 산으로 나즈막한 산이지만
바닷가 위치하여 군사적 요충지라 그런지 산 전체가 공군 방공포 부대가 점령하고 있다.
고금산은 호미곶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정상에는 방공포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이곳 고금산 산능선에 혈(穴)을 끊기 쇠말뚝을 박은곳
(현재의 미사일 기지지역)이라고 한다
이곳 기지는 미군이 사용하던 기지였는데 1964년에 우리군이 인수하였다고 한다
억새 너머로 보이는 영일만의 모습
억새에 취해 호미기맥 마지막 산 능선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포토죤에서 다시 되돌아와서 좌측 능선을 따라 고금산으로 향한다
능선 안부에는 산불로 인해서 나무들이 타버려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조금을 더 가니 지뢰 경고판이 나오고 철조망으로 인하여
더 이상 고금산을 접근하지 못하고 좌측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가서 철조망을 따라서 걷는데 산 능선 아래에는
군부대에서 마시고 던져 버린듯한 4홉들이 금복주 소주병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보기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군부대에 이렇게 소주병이 많이 보이는 이유가 뭔지?
참으로 한심하다. 이러니 맨날 군들이 욕을 먹지 ㅉㅉㅉ
군 장성들은 북한의 도발보다는 자기의 진급에 더 관심이 있는듯하고,
사병들은 북한 군인이 철책선을 넘어서 노크를 할때까지 모르고 사니... 한심하다.
능선 아래로 내려서 너덜길을 지나는데 군부대에서 갑자기 싸이렌이
울리면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방송이 2번이나 연거푸 흘러 나온다.
갑자기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곳은 아직도 수거되지 않은
지뢰로 인한 사고가 빈발있다고 하니, 바짝 긴장이 된다.
이중으로 된 철조망으로 인하여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데 다행히 계곡아래에
개구멍(?)이 하나가 보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걸
이런걸 하는 말인가보다 ㅋㅋㅋ
베낭을 벗고 낮은 포복으로 계곡 아래의 철조망을 통과한다.
공군부대의 경고판을 따라서 철조망을 끼고 길을 걷는다.
계속해서 철조망을 따라 나가니...
또다른 지뢰 경고판이 나오고...
공군8530부대 정문을 통과하여 호미곶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태양사슴목장 가는 이정석도 보이고...
31번 국도 아래의 굴다리를 통과한 다음으로 Y자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호미기맥 가기전 우측 멋진 소나무가 있는곳에 가선대부를 지낸
진양하씨 묘지를 지나니...
드디어 호미곶 광장에 설치된 새천년기념관 앞을 지난다(12:20)
호미곶(虎尾串) 해맞이광장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200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매년 열리는 장소다.
포항시에서 새천년의 출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역사성과
새천년의 미래 지향과 상징성을 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124억원을 들여 조성하였다.
2000년 새천년 한민족 해맞이 축전, 2002년 전국 최대규모의 축구공 제작, 2004년 2만명분 떡국만들기 체험행사,
2006년 독일 월드컵 성공을 기원하는 초대형 태극기 제작등 다양한 해맞이 이벤트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곳은 13,920평의 부지에 상생의 손, 성화대, 천년의 눈동자, 연오랑세오녀상등이 조성되어있다.
상생의 손은 육지에 왼손이, 바다에 오른손이 설치되어 있는데,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 도무며 살자는 뜻에서 조성되었고 육지에 설치된 왼손 앞에는 태양과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있다.
천년의 눈동자는 햇빛 채화기로 햇빛의 적외선을 열로 변환시키고 천년의 눈동자 안의 불씨함에는
변산반도에서 채화한 20세기 마지막 불씨, 남태평양 피지에서 채화한 지구의 불씨,
독도에서 채화한 즈믄해의 불씨, 호미곶에서 채화한 새천년 시작의 불씨를 합한 영원한 불씨가 보관되어있다.
연오랑세오녀상은 이야기의 배경인 영일만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연오랑이 타고간 바위가 이곳에서 솟아 올랐다고 전해진다.
광장 진입로에는 유채꽃 단지가 있고 매년 4~5월경에 유채꽃이 활짝핀다.
광장주변에는 한국 최초의 국립등대박물관과 호미곶의 세찬 해풍을 이용하는 풍력발전기등의 볼 거리가 풍부하다.
호미곶 광장에 설치된 전국 최대의 가마솥
2004년 1월 1일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면저 뜨는 이곳 호미곶에서 개최된 한민족 해맞이 축전행사에
참여한 관광객들이 새해 아침에 직접 떡국을 꿇여먹는 체험행사용으로 특수 제작된
가마솥으로 20,000명이 먹을 수 있는 4톤 용량으로 내부는 스텐레스로 외부는 강관으로 제작된
지름3.3m, 깊이1.3m, 둘레10.3m의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가마솥으로 포항시에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연오랑세오녀상(延烏郞細烏女像)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이 엮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것으로,
지금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의 동해 바다에 살고있던 부부인데
157년(신라 아달왕4년) 미역을 따러나간 연오랑이 올라섰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여 일본의 한 섬에 닿아 임금이 되었는데
남편을 찾아나선 세오녀도 바위에 실려 일본에 닿아 연오랑을 만나고 왕비가 되었다.
그때 신라에서는 돌연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변괴에 놀란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해와 달의 정(精)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으나
세오녀가 짠 세초(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를 가지고 돌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다시 해와 달이 밝아졌다고 하는데 이 후로 제사 지낸곳을 영일현(지금의 영일만)이라고 하였다.
호미곶 광장에 있는 호랑이 형상을 한 한반도 지도
전남 해남이 국토의 남쪽 끝 마을이라면 한반도의 동쪽 끝에는 호미곶이 있다.
풍수지리학자 남사고는 그의 저서 <동해산수비록>에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을 들어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코, 호미곶은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록하였다
상생(相生)의 손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육지에 설치되어있는 좌측 손 앞에는 태양과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 있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이곳 호미곶은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일곱번이나 밟았던 곳이라 하는데 호랑이 꼬리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이곳을 호미곶(虎尾串)이라고 하는데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하여 호랑이 꼬리는 국운상승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곳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호미곶 해맞이광장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상생의 커다란 좌측손이 설치되어있고, 그 앞에는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 있다.
마친가지로 바다에는 육지를 향하고 있는 커다란 상행의 오른손이 세워져있다.
이 청동 조형물의 상생의 손은 2000년 1월 1일 한민족 해맞이 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포항시에서 설치하였다.
바다에 있는 높이 8.5m의 오른손은 새 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세워졌고
상생의 의미를 담은 커다란 왼손과 오른손 두 손이 서로 같이 잘 살자는 상생(相生)을 의미 한다고 한다.
지난 9월 첫주부터 시작한 호미기맥(虎尾岐脈)을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신발을 벗고 영일만 앞바다에 발을 담근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19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만인 그해12월에 완공됐다고 한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호미기맥을 마치고 영일만 앞바다의 상생의 손을 바라보며 이것의 의미에 맞지않은
요즘의 행태에 착잡함을 느낀다. 이곳은 이 명박 대통령의 고향 포항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이다.
이렇게 멋진 상생의 손의 의미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임기가 4개월도 안 남았지만 국민과 야당... 그리고 政敵과는 상생보다는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기를 강행하였고 이 지역의 인맥인 영.포 라인들은
막강한 지위를 이용하여 민간인 사찰을 비롯한 각종 불법을 자행하지 않았던가
그러다보니 말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영일대군이라 불리던 형님은
구치소로 갔고 지금은 아들과 영부인은 특검을 조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앞으로 남은 기간이라도 부디 모든 분들과 相生의 의미를 실천하며 聖君으로 기록되었으면...
호미기맥을 마치고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구룡포로 향하여 횟집에서 졸업식
축하를 겸한 만찬을 마치고 시간이 좀 남았기에 인근 구룡포 지역을 관광을 한다.
구룡포항(九龍浦港)의 모습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리 달리다가 응암산의 한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구룡포만을 이루는데 이를 끼고 길다랗게 놓여 있는 마을이다.
읍소재지로서 우체국, 파출소, 단위농협, 포항수산업협동조합, 농협중앙회 구룡포지점 등의 관공서와
금융기관, 구룡포 초등학교, 구룡포동부초등학교,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등의 각급 학교가 밀집돼 있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 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에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沼가)있었는데, 이 소(沼)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 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룡포 근대 역사의 거리
구룡포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일본식 건축물이 눈에 띈다.
특히, 구룡포 개발에 공헌한 일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공자 탑'이 구룡포 공원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해방 후 친일적 내용이 새겨져 있는 탑의 표면을 훼손하여 명문은 알아볼 수 없으나,
폭 1.5m, 높이 5m나 되는 자연석의 탑신은 그대로 서 있다. 후세의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구룡포항 맞은편에 있는 일본식 건물들
골목안으로 들어서니 깨끗하게 단장한 건물이 일본식이다
가옥 뒷산은 일본인들이 손수 만든 공원이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고
그 안에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도 보인다. 돌계단 양쪽으로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비석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임종락, 제일제당 구룡포통조림공장 하사룡, 이판길...단기4276년(1943)
7월에 세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계단과 비석에 세워진 것을 일본인에 의한 것으로 1920년대쯤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집단거주지를 만든 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공원을 꾸미고 비석에 이름을 새겨놓았었는데,
일본인들이 떠나자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어버린 뒤 비석을 거꾸로 돌려 그곳에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이곳은 100여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실제로 수년 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거리 촬영때
이곳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이 촬영 세트로 이용됐었다고 한다.
일본인 가옥앞에서
고향 향우인 한회장님과 충혼탑앞에서
구룡포읍내 거리의 모습
구룡포는 과메기가 아주 유명한 곳인데
겨울이 되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청어나 꽁치를 그늘에다 내다 걸어
냉동과 해동을 거듭하기를 열흘에서 보름을 지속하게 되면
껍질은 쭈글쭈글해지고 속살은 꾸덕꾸덕 하게 마르게 되는데
이것을 과메기라 부른다.
과메기는 껍질을 훑어내고 속살을 죽죽 찢어내어 그냥 먹기도 하고
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는데 찬바람을 맞으며 그늘에서 말린 과메기는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맛과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과메기를 말릴 때 햇볕이 닿거나 따뜻한 바람을 맞게 되면
기름기가 배어 나오고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이것은
한겨울인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만
제 맛을 낼 수 있는 계절 별미이다.
과메기의 영양소를 살펴보면 고단백질 식품으로
불포화 지방산의 함량이 높아 혈관 확장 작용 등 성인병 예방에
뛰어나며 맛 또한 일품이라고 한다.
과메기의 유래
과메기라는 말은 청어의 눈은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貫目)에서 유래한다. '
목'을 구룡포 방언으로 '메기'라고 발음하여 관목이 '관메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로 굳어진 것이다.
갓 잡은 청어나 꽁치를 겨울철 바깥에 내다 걸어 밤에는 얼렸다가, 낮에는 녹이는 횟수를 거듭하여 수분 함유량이
40% 정도 되게 말린것으로 구룡포의 특산물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算稿)》에 '청어는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게 되는데 이를 연관목(燃貫目)이라 한다'고 쓰여 있고,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비웃(청어)을 들어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하여 말갛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려 쓰는 그 맛이 기이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 이 바다에는 청어가 무척이나 흔하였다고 한다 .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뱃사람들이
그저 그물만 던지면 떼로 올라오는 청어를 배 안에서 먹을 밥 반찬이나 할 요량으로
배 지붕 위에다 대충 던져놓았던 것이 , 제 스스로 찬 새벽바람에 얼었다가 또 한낮의 햇살에
녹았다가를 반복해서 과메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얘기로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배가고파 바닷가 나뭇가지에
청어가 꿰어 있는 것을 보고 한 점 집어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았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그렇게 청어를 구해다 처마에 걸어 얼린 후에 말려 먹었다는 것이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건 예부터 청어 산지로 유명했던 포항 앞바다의 사람들은 대나무에
청어의 눈을 꿰어 부엌 창문이나 처마에 매달아 놓았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과 밥 지을 때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거듭 얼린 후에 마른 청어는 궁중 진상품으로도 그 이름을 높였다.
과메기는 등푸른 생선으로 불포화지방산인 DHA와 EPA가 풍부하고 고혈압, 심근경색,
동맥경화 예방에 어마어마하게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비타민E가 다량함유됨으로써
노화예방에도 효과가 크고 시력회복에 좋은 비타민A가 쇠고기보다 16배나 많은 우수한 상품이다.
과메기에는 뼈를 튼튼해질 수 있게 하게 되는 비타민D가 성인 1일 필요량의 3배정도 함유되어버려
있을 수도 있으며, 그 외 다른 상황에서도 칼슘, 인, 니아신 등의 여러가지 영양소가 많아 옛날부터
“꽁치가 나면 신경통이 들어간다”는 말이 있었다.
호미기맥 완주증
또 하나의 기맥을 마친다.
예전에는 산을 즐기면서 도봉산, 북한산만 죽어라 다녔는데
백두대간의 묘미를 알고서 산에 미친지도 정확이 4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4년간 1대간 9정맥 4기맥 3지맥을 마무리 했건만 여전히 가고픈 기.지맥은
너무도 많건만 지난달부터 오른쪽 무릎에 이상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젠 죽기살기 산행보다는 내 페이스대로 조절하면서 한번에 25km 넘는 코스는 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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