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2년 10월 28일
☞산행날씨: 맑음, 강한바람이 붐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거리: 도상거리 21.7km / 7시간 45분 소요
☞산행코스: 성황재-390봉-405봉-만리성재-만리성-314봉-260봉-묘봉산
336봉-273봉-뒤뜸재 안부-삼봉산-솔밭재-세계원재-제1기동사격장
통점마을-금강석산-170봉-채석장-조항산-동양산업-흰날재
☞소 재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 포항시 오천읍, 장기면, 동해면, 구룡포읍
지난주에 학교 행사 때문에 가지못한 호미기맥 4구간 땜방을 위해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요즘은 특별히 할일도 없고 신명나는 일도 없다.
있다면 토,일마다 오라는 결혼식 청첩장뿐이다. 10월달에만 13개다.
11월달 청첩장도 벌써 5개라... 요즘은 축의금과 세금내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금, 토 결혼식에는 웬만하면 참석을 하지만 일욜 결혼식은 산을 핑계로 100% 봉투로 대신한다.
내일 결혼식도 지인에게 봉투를 부탁하고 포항행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C.C
지난주에 원우들과 강원도에 있는 평창 알펜시아C.C에 이틀동안
운동을 하러 갔다. 13년전에 한양대 경영대학원(AMP)을 같이 졸업한
원우들과 골프모임인데 1박2일동안 운동을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였다.
올해는 내가 총무를 맡고 있어서 모든 행사 진행을 내가 해야하기에
꼼짝도 못하고 코가 꿰서 산에도 못가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오랫만에 만난 원우들과 밤새 먹고 마시고 하면서 운동을 하였다.
산에 미치고 나서부터는 골프에 흥미를 잃은탓에 채를 잡은지
오래되서 첫날 전반전에는 엄청나게 헤매는 바람에 스코어가 엉망이다.
첫날 93타, 다음날에 88타... 요즘은 내 지갑 먼저 보는놈이 임자다...
이틀동안 먹고 마시다가 볼일 다보는 바람에 몸무게가 2kg는 늘었다.
대관령 한우에다가 이것 저것 너무 잘 먹은탓일까... 덕분에 몸이 너무 호강을 하였다.
그렇지만 맘은 가지못한 호미기맥길에 가있다.
동서울 버스 터미널
토요일(27일) 늦가을의 비답지 않게 서울에는 꽤나많은 비가 내린다.
일치감치 사무실에서 잔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 베낭을 메고
호미기맥 구간 땜방을 하기 위해서 동서울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집을 나와서 선릉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는데 무거운 베낭에다
머리가 하얗게 보이니까... 경로석에 앉아있는 60대 중반쯤 나이든
아줌마가 얼른 일어나서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다.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나... 기분이 영 찜찜하다. 아직 경로석에 앉을 나이가 아니라고 해도
계속해서 권하는데 영 미치겠더라.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
아직도 마음은 30대인데 말이다... ㅋㅋㅋ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16시 30분발 포항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강변북로를 거쳐서 천호대교를 건너는데 도로가 주차장이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서 호법I.C를 지나서 영동과 중부내륙고속도로
갈림길인 여주 휴게소까지 오는데 2시간이 더 걸려 버렸다.
문경 휴게소에서 유부우동으로 저녁을 먹은 다음에 경주를 거쳐서
포항으로 가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천에서 경주까지도 상당히 지체된다.
종착지인 포항 터미널에 10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을 한다.
포항 터미널에 도착하여 터미널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간다.
오천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막차가 떠나 버린 다음이다.
포항시외버스 터미널 정류장(22:25)
오천가는 버스가 끊어지는 바람에 할 수없이 길건너 찜질방으로 향한다.
그랜드 찜질방(22:40)
찜질방의 요금이 꽤나 비싸다... 시설도 별로인데 8,000원이란다.
아쉬운 넘이 우물 파야지, 키를 받아서 락카에다 베낭을 넣고
근처의 호프집으로 간다. 찜질방은 코고는 자, 이빨가는 자들이 많기에
맥주한잔 하고 먼저 잠이 들어버려야 유리하기에... 치킨집에 들려서
치킨 반마리에 생맥주 1,000cc를 시키니 반마리는 안 판다고 한다.
내 원 참... 하는 수 없이 반마리는 먹고 반마리는 싸달라고 해놓고
술 한잔 마시고 찜질방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마친 다음에 잠자리에 든다.
다행히 손님이 10명도 안 되는것 같아서 편하게 잠을 청한다.
어림지 해장국집(04:20)
03시 4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싸서 찜질방을 나온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주인 아줌마가 엄청 피곤해 보인다.
수고 많으시네요. 떼돈도 못버시면서 힘드시죠 하고 인사를 하니까.
이 아줌마 曰 ‘힘은 들지만 떼돈은 법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게 아닌가?
손님도 없는데 그렇게 많이버나 하고 생각을 하는데 다시 돌아오는 대답이
‘목욕탕에서 때 밀어서 버니 때돈을 벌죠’ 하는 대답에 이른 아침에 배꼽을 잡는다.
목욕탕 건너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해장국 한그릇을 시켜서 먹는데
국물이 조미료에 목욕을 했는데 음식맛이 영 아니다.
오늘은 베낭에 먹을것이 사과 2개와 치킨 반마리, 베지밀 한통밖에 없기에
억지로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데 정말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른 아침 버스 정류장(05:20)
해장국집을 나와서 버스 정류장에 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질 않는다. 정류장 옆에는 택시가
20여대가 서서 손님을 기다린다. 성황재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나오냐고 하니까. 20,000원란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보면
오천에서 20,000원인데 여기서 오천읍까지 8,000원이나 나오는데
아저씨한테 정말 20,000원 갈 수 있냐고 하니까. 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하기 없기로 하자고 하고 선불로 20,000원을 주고 택시를 탄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기사분이 고향이 영천인데 과수원을
하다가 농약중독으로 큰 병을 앓아서 과수원을 정리하고 이곳 포항으로
와서 몇년전에 부인과 사별하고 택시영업을 하면서 혼자 사신다고 한다.
성황재에 도착하여 기사분이 내가 부럽다고 하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서 나에게 준다.
근데 택시비는 30,000원을 달라고 한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3,000원 더 준고 만다.
성황재(06:20)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동리와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의 경계로
14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성황재 휴게소는 진전리에 있다.
이곳 진전리는 포항시 오천읍중에서도 최오지의 마을로 상수도 보호구역이다.
진전리(陳田里)는
오천읍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마을로 남쪽으로는 경주군 양북면, 서쪽으로는 경주시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북쪽으로는 흘러 영일만으로 빠지는 냉천의 발원지가 되는 만리봉(428m),못재(538m),
갈미봉(331m)등 여러 준봉들에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산간오지 마을이다.
아직도 어둠이 덜가신 상태이다. 택시기사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계약은 계약이니... 산에 다니면서 그렇게 큰돈을 안 가지고 다니니 이해하소.
기사와 헤어지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06:30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6:30)
철책 휀스의 시그널을 보면서 등로로 올라서니 길은 정말 좋다.
일출이 시작되다(06:40)
편안한 등로로 올라서니 저너머 동해바다 위의 구름사이로
빨간 태양이 솟아 오르는 모양이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바람이 차갑다.
편안한 길을 치고 오르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등로 가운데
무명 묘지 1기가 나오고 계속해서 안부 능선을 따라간다.
날이 밝아지면서 지난구간을 지나온 능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함월산과 연결되는 무장산 그리고 오어사가 자리잡고 있는 운제산까지...
오어사(吾魚寺)
신라 진평왕(579-631)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19대 사찰중 하나로
원효대사, 자장율사, 혜공대사, 의상대사 등 신라 4대조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성지이다
창건당시 항사사(恒沙寺)라 불렸던 이 절이 오어사로 불리우는데는 두 수도승의 재미있는 일화에서 비롯된다
원효대사와 헤공대사가 수도할때 서로의 법력을 겨루고자 물고기를 잡아 한마리씩 삼키고 변을 보았다,
그런데 한마리가 살아서 힘차게 헤엄치는 것을 보고 서로 자기 고기 라고해서
"나"오(吾), 고기"어"(魚)자를 써서 오어사가 되었다고 하며
그 문제의 고기를 놓아준곳이 지금의 오어지(吾魚池) 라고 삼국유사에 나와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스님이 1246년에 오어사에 머문적이 있으므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안부 능선을 타고 내려가니 산허리가 무너져 내려간 절개지가 나오고
계속해서 편안한 길을 걸어가는데 마치 지리산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나홀로 산행의 묘미는 이런게 아닐까. 호젓하게 낙엽을 밟으면서
도시생활에서 찌든 삶을 이 산에 모두 버리고 싶다.
세차게 불어오는 이 바람에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 버리련다.
지나온 구간의 토함산도 아련히 보인다.
성황당(城隍堂:07:00)
경주시 양북면 권이리 세바시골에서 오천읍 진전리 음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성황당 돌무덤이 하나 나타난다.
民草들의 哀歡이 서려있는 고개... 우리 조상들이 한이 맺힌 고개다.
나 역시 성황당의 돌무덤에 돌맹이 하나를 올려놓고 지나간다.
절개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이 나무
인간이나 나무나 삶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405봉(07:15)
약간 힘들게 봉우리를 치고 오르니까. 다시 평평한 안부가 나타난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고 길은 편한데 가히 태풍에 가까울만큼 바람은
세지만 춥지는 않다. 약간 서늘함함만 느낄 정도이다.
낙엽길을 걸어간다. 이 지역도 어제 비가 꽤나 온 모양이다.
젖은 낙엽 때문에 약간 미끄럽기는 하지만 먼지가 안나서 좋다.
59번 송전탑(07:20)
354,000V의 초고압이 흐르는 송전탑을 끼고 우측으로 90도 꺽어져서 간다.
수봉학원 개교 70주년 기념산행 팻말도 보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진전리 계곡에도 단풍이 물이들기 시작한다
편안한 길을 걸어가니 권이리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능선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산사태로 인하여 무너진 절개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이 지역은 토질이 마사토라 그런지 아무런 충격이 없어도
스스로 산이 무너지는 지역이라 절개지가 많이 보인다.
다시 편안한 안부를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진전리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우측으로 길을 이어가는데 오래된듯한 낡은 연등하나가 나무에 걸려있다.
이 지역은 해병대 행군로이란다. 그래서 길이 좋은가?
나무 곳곳에 해병대 표식인 빨간 사각 비표가 많이 보이고
문무대왕로라는 나무 표지판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능선으로 올라가지 않고 우측으로 난
산 허리를 가로지르다가 능선으로 치고 올라간다.
이곳도 산사태로 인하여 모든게 함몰되어 있다.
안전을 위해 쳐놓은 스텐 파이프와 로프도 무녀져 버렸고
소나무도 뿌리채 내려 앉아 버렸다. 그것도 계속 진행형이다.
커다란 달팽이 한마리가 느리게 가을 마실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시계 갈림길(07:45)
이곳에서 부터는 우측으로 함월산에서부터 계속 같이해 온
경주시 양북면과 이별을 고하고 포항시 장기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포항시구간의 문무대왕로란다
이곳에서 기맥길은 좌측으로 올라서서 계속 이어간다.
이정표(←제1기동 사격장↓ 진전저수지 →월산마을 삼거리)를 처음 만난다.
이곳에서 사격장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만리성재(07:55)
오천읍 진전리 음지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만리성재란다.
다시 조금을 더 올라가니 이장(移葬)을 하였는지 묘지 봉분은 없고
묘지석만 덩그러니 서있는 묘지를 지나간다.
조금을 더 치고 올라가니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는 곳을 올라가니 돌담 안으로 묘지 2기가 나오고 그 위로 만리성이 있다.
만리성 정상에 있는 묘지
만리성 정상에 올라서니 가선대부(嘉善大夫)을 지낸 도은김씨 묘비석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묘비가 묘지 2기 가운데 바로 서 있는게 아니라
비스듬히 서 있는게 특히하다. 여태껏 본 적에 이런것은 첨봤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길이 없고...
만리성(萬里城:427m:08:10)
경북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와 갈평리 그리고 장기면 산서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높은 산이다.
흔히들 산은 독립된 봉우리는 ‘산(山)’이라 부르고 연결되어 있는곳은
‘봉(峰)’이라 부르는데 이곳 정상은 성(城)이라 부른것이 특이하다.
신라의 수도가 있던 서라벌(지금의 경주) 부근에는 성이 많이 있다.
왕궁을 방위하기 위한 성으로 서라벌 동쪽엔 명활산성, 남산엔 도당토성, 남산토성, 남산신성,
고위산성을 서쪽 선도산엔 서연산성을 그리고 멀리 건천 쪽엔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작성(작원성), 더 나가면 부산성, 왜구를 비롯한 외침을 막기위한
성들도 많이있다. 이곳 만리성은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관문성과 함께
외침을 막기위한 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산정상에 서니 포항시내가 시원스럽게 한 눈에 들어온다.
삼각대를 이용해서 인증샷을 남기는데 역광이라 영 그렇다.
만리성 정상에서 바라본 포항의 모습
'浦項'이란 지명 유래는 포항의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메기(갯미기: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로 이루어졌다.
갯목은 구 驛前橋(1980년대 초에 복개함)지역이며, 포항창진은 오늘날 포항시네마(구.포항극장) 지역이다.
포항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된 것은 1731년(영조 7년)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면서 창진이 설치된 마을 이름을 기존의 영일현 북면의 대흥리(大興里)를
포항리(浦項里)로 개칭하고, 창진의 이름을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등재한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형산강의 북하구의 중심지류 연변인 포항리가 조운과 물화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아 오다가 포항창진(흉년시 함경북도지방의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때로는
여타 지방의 백성진휼(賑恤)의 운송을 담당하는
전국 굴지의 제민창)이 설치되면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들에 의해 도내(島內)리를 비롯한 5도 등의 섬마을이 개척되어, 바야흐로
포항은 동해안 물화교역의 중심항구로서 잠재적 역할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포항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항 지명은 우리 고장의 특유한 자연환경(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중요 지점:갯목)과
역사환경(포항창진 설치)에 의해서 유래되었으며,
이로부터 포항의 지명은 중앙에서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만리성재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Y자길이 다시 나온다.
편안한 길을 계속 걸어간다. 오늘 산행은 완전히 날로 먹는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길의 연속이다. 오지의 힘든 길만 걸어오다 이런길을 걸으니 어색하기만 하다.
오늘도 빈 베낭으로 집에 갈것 같지는 않다.
조금전에 농익은 산초열매를 꽤나 수확을 했는데
이곳에는 산에서는 귀한 재피나무에 꽤나 많은 열매가 있다.
베낭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서 산행의 부산물을 챙긴다.
안부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안부 능선을 걷는다.
음지의 푹 파인곳에 묘지 1기가 있고 우측 아래는 상당히 깊은 절개지이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예전에 폐헬기장인듯한 공터가 있다.
좌측으로는 시원스럽게 포항시 오천읍의 산능선이 보인다.
오천읍(烏川邑)의 유래를 보면
오천의 "烏"자는 단순히 까마귀 烏자가 아니고 ,옛부터 신성히 해오던영물인 태양속에
살고 있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를 뜻한다.
(태평어람 卷3上 과 고금운회에는 "日中有三足烏"라는 글귀가있다.)
烏자는 태양을 뜻하는글자이므로, 영일권에는 다른지역보다 유별나게 ‘烏’자가 든 지명이 많으며,
연오, 세오, 오천 등이 이런 맥락에서 붙여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태양(해)을 金烏(금오), 靈烏(영오), 日烏(일오)라고도 칭하였으며, 이 지역을 영일 또는
연일이라고 혼용하여 부른데는 해와관계가 있는데, 해를 뜻하는 日과 烏를 동일시하여 보았기
때문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 나오는 延烏(연오)는 해를 오래 비치게 한다는 뜻이
되고, 細烏(세오)는 햇살(햇빛)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오천은 부족국가시대때 진한 12국중의 하나인 勤耆國이었는데,소재지가 오천읍 원리 였으며,
오늘날 오천, 연일, 대송, 동해 지역을 형성하는 소읍국 이었다.
신라 초기에는 斤烏支縣(근오지현) 또는 烏良友縣(오량우현)으로 부르다가, 신라 아달라왕 4년에는
迎日縣(영일현) 또는 都祈野顯(도기야현)으로,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臨汀縣(임정현) 또는
烏川縣(오천현)으로, 고려 초에는 延日縣으로, 조선시대에는 延日과 迎日을 혼용하여 불렀다.
이고장 을 칭하는 글자인 烏자에 임정현을 뜻하는 물가의 변형인 川이 합하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결론적으로, 烏川이란 지명은 임정현을 일명으로 부른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해를 뜻하는 烏자와
임정현이라는 물가에서 연유된 川가 합하여진 것이라고 볼수있으며, 오천이란 지명은 신라시대부터
유래된 역사가 오래된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절개지 안부를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좌측 아래는 천길 낭떨지의 엄청난 절개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등로 나무사이로 보이는 해병대 산서사격장의 모습
아마 훈련중인지 탱크를 비롯한 각종화기들이 연병장에 가득하다.
가야할 묘봉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한다.
덜컥 겁이난다. 무의식중에 몸을 숨기면서 동태를 살피니
해병대 대원들이 훈련중이다. 산속 행군로를 따라서 총기를
들고 적의 동태를 살피듯이 이리저리 총을 겨누면서 가다가
나를보자 모든 시선들이 내쪽으로 향한다.
나홀로 산행을 하는걸 보고는 소대장이 우로 밀착을 명령하니
등로를 열어준다. 이렇게 만난 대원들이 4개 소대병력이다.
산서 삼거리(09:10)
등로에서 바라본 오천읍 문충리의 모습
삼봉산 아래에 있는 문충리는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 정 몽주의 고향이며
태어난 곳은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안출신인 모친의 친정인 영천에서 출생하였고
7세까지 영천에서 기거하다가 문충리로 왔다는 설과 문충리에서 출생하여
영천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후에 포은의 고향인 문충리에서 문충곡(文忠谷) 팔경(八景)을 소개한 글을 남겼고
문충리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학문의 터전이요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선비촌으로
이곳 출신이 태사자(太師者)란 벼슬을 했다고 하여 사거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정몽주는
고려말의 충신 초명은 몽란,몽룡,자는 달가 호는 포은,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영일로 정습명의 후손이며 관의 아들, 공민왕 9년(1360) 삼장시험에
연달아 장원급제 1364년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의 삼선,삼개를 격퇴하였고
1372년 서상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귀양갔다.1
380년 일본사신으로 가서 해구를 금지토록 교섭하고 돌아와 1384년 두 번째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하고 돌아왔으며 1386년 또 명나라에 들어가 세공을 면제토록 청하고 돌아와 영원군에 봉해졌다.
1389년 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의호를 받으며,
1392년 대명률을 새로 찬정해 바쳤다. 당시 이성계의 힘이 날로 커져서 조준, 정도전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하매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했고 성리학에 매우 밝아 5부학당, 향교를 설치 유학을 진흥시켰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이며 이 지방 오천읍이 공의 고향이다.
편안한 길이지만 10여분 정도의 오르막길을 치고 오른다.
묘봉산 갈림길(09:25)
이곳 삼거리에서도 해병대 1개소대를 만난다.
오늘은 편안한 길에다가 해병대의 경호(?)까지 받으면서
정말 사치스런운 멋진 산행을 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120m정도
떨어진 묘봉산으로 향한다.
20m 정도를 가니 이정표가 망가진 채 땅바닥에 나딩굴고 있다.
그런데 표지판이 반대로 되어있다. 우측이 석남사 방향인데...
석남사터
장기면 방산리 괴정마을 서쪽 골짜기에 있는 옛 절터로 고석사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철종말기에 소실된 절터로 지금은 묵정밭으로 변한 절터 잡풀 속에
순조 18년(1818)에 세운 남파대사비(南坡大師碑)만 남아있어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덮어쓰고 있다.
묘봉산(妙峰山:361.5m:09:30)
경북 포항시 오천읍 갈평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나지막한 산봉으로 대부분이 야산지형을 이룬다.
낙동정맥이 영남알프스로 입성하기 직전 백운산(892m)에서 곁가지를 친 기맥 하나가
형산강 남쪽줄기를 아우르며 줄곧 북동진하여 호미곶에 이르는 호미기맥의 만리성재~삼봉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기맥에서는 약 120m 가량 벗어나 있지만 형남기맥에 속해있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남포항클럽"에서 세운 아담한 표석과 바윗돌이 자리하고 있고 포항항을 비롯하여
영일만 일대를 훤히 굽어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트이는 곳이다.
방산리를 기점으로 묘봉산 오르는 산길은 아직 산객이 그리 찾지 않는 편으로 대부분의 등산로가
희미할뿐더러 잡목이 제법 성가시게 하지만 덕분에 청정수림을 온전하고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망해산~삼봉산~묘봉산을 잇는 오붓한 오솔길은 어느 깊은 오지의 고산에 못지 않을 만큼
숲 속에 들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다. 산기슭으로는 신라 때 사찰이었던 석남사터의 "남파대사비"를
비롯하여 망해산 아래의 고석사가 있어 산행과 더불어 사찰, 향토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묘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포항의 모습
포항은 예로부터 이 나라의 거물급 인사들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국토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되는 국가적 인재의 유배지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이로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에서 5년 3개월간 유배생활을 했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220일간을 장기현(현재의 장기면)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유배기간 동안
자신들이 직접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물론 유배지의 문화와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지역 전체의 문화적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한동대 김윤규 교수의 포항 고전문학사 시론에서 발췌)
묘봉산에서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우측 도로를 따라간다.
조금을 내려가니 MTB를 타고 올라오는 30대 후반의 젊은 친구를 만난다.
가는길에 산초나무에 열매가 있어서 따서 봉지에 넣어니 신기한듯이
그것을 따서 뭐에 쓰느냐고 물어본다... 기름을 짤려고 한다고 하니 그냥간다.
등로옆의 묘지를 지나서 다시 치고올라간다. 이곳은 해병대의
행군로에다 탱크가 다니는 군사도로라 그런지 엄청넓다.
갈참나무와 소나무 한그루가 죽고 못살듯이 서로 부등켜 안고있다.
방산저수지 갈림길(10:15)
뒤뜸재 안부(10:40)
편안한 해병대 행군로를 계속 걸어가다가 우측에 시그널이 걸린
능선으로 올라선다. 이곳이 지도상에 나타나는 뒤뜸재 안부이다.
삼봉산으로 가는 능선에 올라서면 우측에 희미한 길이 보이고
거기에서 조금을 더 가면 해병대에서 돌탑을 쌓은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뒤뜸재라고 한다. 뒷동네라는 뜻의 뒤뜸으로 뒷동네 재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길등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포항시내에 있는 포스코의 전경
흔히들 포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포스코, 해병대, 과메기가 아닐까
1960년대 후반에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대일청구권으로 받은
자금으로 이곳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지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선 포스코
거기에는 박태준이라는 큰별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폭적으로
밀어준 박 정희 대통령. 그 분이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그래도 가난에 찌든
이 나라의 민초들의 배고픔을 면해준 훌륭한 분이 아닐까.
그 분은 개인적인 사욕은 없지 않았던가. 오직 국민들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고생한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하는게 범여의 私見이다.
이제 2달도 안남은 대선에 나선다는 자들을 보면 과연 저 자들이 자기들의 정권욕
때문인지, 국민을 위한 비젼제시는 전혀없어 보인다.
삼봉산(三峰山:291m:10:15)
경북 포항시 오천읍 용산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3개가 붙어 있어서 삼봉산이라고 부른단다.
산 정상에는 준.희님의 표지판과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삼각점이 있다.
정상에는 숲으로 둘러쌓여 조망권은 별로없으며 건너편 망해산만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 숲을 헤치고 5분정도를 내려오니 행군로를 만난다.
삼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망해산(望海山)
기암괴석이 동해를 바라보며 솟아있어 망해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산 아래에는 유명한 고석사가 자리를 잡고있다.
고석사 보광전 미륵불 좌상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 위치한 '고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 말사이며 전통사찰로 지정된 천년고찰이다.
고석사는 638년(선덕여왕7년)에 창건 되었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어느날 세줄기 서광이 3일동안 궁전을 비추는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즉시 서광이 발하는곳을 찾기위해 국사인 혜능에게 부탁하였다.
혜능스님이 그곳에 가보니 지금의 고석사 자리에 땅속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솟아 서기를 발하고 있어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를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여겨 왕명으로 보광전을 지어 고석사라고 칭하고,
석불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였으니 약사여래불이며,법당을 보광전이라 하였다.
또한 뒷산 기암괴석이 동해를 바라보며 솟아있어 망해산이라 불렀으며,절이름을 고석암이라
명명하여 전해오다가 1962년 고석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삼봉산 삼각점
준.희님이 걸어둔 표지판
해병대 행군로로 복귀하여 계속 내려오니 NO 10번 송전탑이 나오고
좌측에는 공단을 조성하고 도로를 개설하는 지 산을 완전히 까뭉개버렸다.
뭉개진 산 너머로는 포항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편안한 행군로를 따라서 세계원재로 향한다.
지역 경계표 표지판을 베어낸 소나무에다 박아놨다.
국가의 녹을 먹고 하는자의 짓거리하고는... ㅉㅉㅉ
도로옆에는 분홍색 구절초가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솔밭재(11:15)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도로를 따라 계속 기맥길을 이어간다.
길가에 핀 꽃향유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한다.
해병대 제1기동 사격장(11:25)
이곳은 숲속에 훈련용 폐탱크가 있고 숲이 우거진 훈련장이 있다.
사격장에는 새로 지은 건물도 보이고...
공단이 조성되는 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생기는 곳이다.
나중에 후답자들은 어떻게 이곳을 기록할까... 궁금하다.
훈련장 마지막 지점에 있는 구조물과 안내 표지판.
해병대 제1기동 사격 훈련장의 모습
훈련장을 S자 형태로 돌아내려오니 우측 숲속에 장기면 J.C에서
설치한 석장승 2개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이곳 장승백이는 포항시 오천읍과 장기면의 경계 지역으로 옛날 장승이 서 있던
곳이라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백이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바로 이 고개마루에 장기 청년회의소가 세워놓은 석장승 한쌍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옛 이름을 지키며 그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이렇게 숲속 보이지 않는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는 곳에 장승을 세워 놓아
어느 누가 장승백이의 유래나 바른 전통 문화를 이해 할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장승백이의 바른 표현은 장승박이라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음운변화에 의해 장승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천리(井泉里)의 모습
정족산의 북동쪽으로 펼쳐진 참샘이, 장승배기, 퉁점을 정천1리라 하고,
냉천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죽정에서 흐르는 하천과 만나는 곳에 정천2리에 속하는 하정이 있다.
서로는 오천읍과 북은 동해면과 경계를 이룬다.
정천리에는 운천 김윤찬(金潤瓚)의 효자비와 백운 김광화(金光華)의 충절유허비및
만취 이헌칠(李憲七)을 기리는 이요정(二樂亭)이 있다.
세계원재(11:35)
경북 포항시 오천읍 금광리와 장기면 정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92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고 정상에는 석장승 2기와 오일뱅크 주유소
그리고 정천(井川)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교통량이 꽤나 많은 곳이다
예전에 장성이 있어서 장승배기라고 부르는 세계원재는
현재 20가구 정도의 민가가 있으며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금은 장기면 정천 2리에 속해 있으며
지도상에는 세계원재로 표기되어 있다.
세계(世界) 세계원(世界阮) 혜제(惠濟) 혜제원(惠濟阮)은 신라 때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 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도로를 건너자마자 주택가 담벼락을 끼고서 좌측으로 돌아서니 고구마와 배추를 심은 밭이 나온다.
이 집안에는 개가 여러마리 있고 그 중에 2마리는 홀로가는 산꾼에게
시비를 걸면서 엄청나게 짖어댄다.
장기면의 지명유래
신라시대(新羅時代) 지답(只沓)이 고려 현종시 장기현(長鬐縣)이라 개칭할 때
북으로 현 대보면에서 남으로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까지 길게(長)뻗은 지역이며
촌명인 마산(馬山)과 장기읍성(長鬐邑城) 남쪽의 산이 용마산으로 마(馬)자와 관계
깊은 말목장(鬐)지역이라 하여 장기(長鬐)란 명칭이 만들어 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영남 읍지에 산을 등지고 바다와 임한 지역으로 좁고 길다. 배산임해지(背山 臨海 地) 而長)이라
하였고 송시열(宋時烈) 선생(先生)이 이곳에 유배올 때 마산촌(馬山村)이란 마을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고을 이름에 기(鬐)자가 들어 있고 마을 이름이 마(馬)자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장기(長鬐)의 지명은 지답(只沓) 기립(鬐立) 장기(長鬐) 봉산(峯山) 지행(只杏)으로 불리어 오다가
지역 주민들의 지역 명칭 회복운동으로 1991년 12월 1일 다시 장기(長鬐)로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감나무를 지나서 대밭으로 접어든다.
주택에 있던 강아지 3마리가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꼬리를 흔든다... 귀여운 넘들
주택가 뒤의 대밭을 지나서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포장도로를 따라간다.
마을을 빠져나가니 기독교인 묘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베지밀과 밀감 2개
양갱 하나로 허기를 때우고 10분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길을 걷는다.
조금 더 가니 포장도로가 끝나고 Y자의 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니 호젓한 소나무 숲이 나온다.
2분 정도의 호젓한 소나무 숲을 지나니 다시 도로가 나온다.
2번 군도(12:00)
동해면 세계리와 장기면 정천리를 잇는 2번 군도를 100m 정도 따라 가다가
우측의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간다. ‘나눔텃밭 300m’란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100여m를 따라가니 다시 Y자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니 이 대장의 시그널이 반갑게 걸려있다.
平山申氏 숭모전
이곳에서 반원형으로 꺽어져 우측으로 계속 걸어간다.
조릿대 군락지를 지나니 우측에 조그만 연못도 나오고...
나눔 텃밭이 나오고 그 옆의 건물안에는 솟대가 설치되어 있다.
통점(銅店)마을 입구
포항시 동해면과 장기면과의 경계지점에 위치하며 퉁지미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일부는
행정구역상 장기면 정천리(井泉里)에 속한다. 옛날에 구리를 녹이던 퉁점[銅店]이 있었다
하여 불려지게 된 이름이다. 갈탄과 백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으며, 광산업체인 금강광산이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나눔 텃밭의 모습
통점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까치밥
마을끝에서 직진을 한다.
다시 끝부분에서 송신탑 중계기지가 있는 우측길로 향한다
이 대장! 오늘 너무 고맙구먼... 담주 호미곶에서 쐬주한잔 합시다.
숲길을 잠깐 걷다가 다시 넓은 군사도로가 나타난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등산화에 흙이 자꾸만 붙어 귀찮기만 하다.
이곳은 지금 도로 공사를 하는지 캐피틸러 같은 커다란 중장비들이
많이있고 산꼭대기에는 불도저 한놈이 산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
조금을 올라가니 Y자형 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간다.
저 아래에는 포항과 구룡포를 잇는 31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도로를 새로 개설하는지 산을 마구 깔아뭉개고 있다.
공사를 하고 있는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 대장이 걸어둔
시그널이 나오고 이곳에서 편안한 오르막을 올라간다.
170봉(12:55)
정상에는 준.희님이 걸어둔 응원 메시지가 있고 이 봉우리 정상으로 길이 나는 모양이다.
아마 이 봉우리도 내년쯤이면 흔적조차 없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다시 내리막을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소나무가 빼빽한 숲을 지나니...
봉분에는 잔디가 하나도 없는 김해김씨의 묘지가 나타나고 조금을 더 올라가니
커다란 임도가 나타나고 “석곡선생 묘소 가는길”이란 팻말이 보인다
갈림길(13:05)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250m 떨어진 석곡선생 묘지로 향한다.
석곡 이 규준선생 묘소(13:12)
포항 출신의 유명한 한학자이면서 한의학자였던 석곡 이규준(1855~1923) 선생
선생은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 근대 한의학
의 서곡을 울린 한의학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만큼 그의 업적을 정리하고 유산을
보존, 관리해 포항의 문화유산으로 잘 가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석곡 선생은 고향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며 특히
의학 연구에 힘써온 실학자였다.
선생은 당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주자의 학설을 비판해서 유교경전 13경에
독자적인 주석을 달아 조선 유림을 들끓게 만들었다. 또한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에
주석을 달아 중국의학을 숭상하던 조선의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대표적인 의학서로는 '황제내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추려 편찬한 '황제내경 소
문대요'와 직접 저술한 '의감중마'가 있는데 이중 '의감중마'는 평소 선생이 주창하
던 부양론(扶陽論)과 기혈론(氣血論)에 상통하는 부분을 '동의보감' 중에서 발췌하여
간행한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의서로 중요시 되
고 있다.
또한 선생은 병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난치병을 치료했고 서병오(석재), 이원세
(무위당), 배을제, 조규철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석곡선생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료로 처방해주었으며 움막을 만들어 나병환자를 모아
두고 치료해 주었다.
이처럼 석곡 선생의 뛰어난 학문 성과와 사상은 오늘날 전국의 한의사들이 학회를
만들어 이어오고 있을 정도이다.
해마다 선생의 기일이 되면 한의사들이 그의 고향인 포항을 찾아와 한자리에 모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조항산으로 향한다
서서히 오늘 마지막 산인 조항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닷가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드세기만 하다.
몸을 가두기가 힘이들 정도로 바람이 심하다
등로 아래로는 금광석산의 모습이 보인다.
조항산 가기전에 만난 산불감시 카메라
소나무 숲의 터널을 지나면서 조항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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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포항 군사기지의 역사는 아주 길고, 해병부대 주둔의 역사는 짧은 것이다. 오늘날 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오천의 군사기지가 국방의 보루로 된 것은 조선시대 초이며, 뿐만 아니라 영일만권의 해방 요충지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수군기지가 설치되었다. 영일만은 삼국시대부터 북으로는 고구려와 접경지역이며 동해안은 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신라의 서울 금성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모든 문물이 미개하고 풍토가 척박했던 섬나라의 왜구의 잦은 침입과 노략질로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왜구의 침입은 신라 초 14년(남해왕 11)부터 시작하여 731년에 이르기까지 30차례나 되었으며, 특히 고려말 1350년부터 1380·1381년 31년간 겪게 되는 왜구의 병화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으로 영일만 고장은 초토화되었다. 또한 1381년에 더욱 화를 입어 고을이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은 학살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재물이 없어지고, 살아 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달아나 흩어졌다.
영일만권에서 가장 큰 고을인 흥해군은 텅비어 나무들만 무성하게 되었으며, 고을 원도 먼 마을로 피신해 살면서 흥해로 들어오지 못한지 수년씩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외적에 대한 방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신라시대부터 설치했던 개포(현 월포)의 수군진을 1387년(우왕 13)에 통양포 두모적포(현 두호동)로 옮겨 수군만호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곧 만호를 위시하여 병선 8척과 정규군 218명이 배치되면서 인근 고을로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포항은 광복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국방지역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 있다. 6.25 전쟁시 학도의용군의 전투와 포항해병부대의 설치가 그것이다. 포항은 6.25 전쟁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참전한 학도의용군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있는 요람이다. 당시 포항은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8월 11일 새벽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50∼60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아깝게도 김춘식 외 57명이 장렬한 전사를 하였으며, 이후 포항 학도병들이 대거 참여한 양덕동의 무당곡 삿갓봉 전투에서 100여명의 학도병들이 꽃다운 나이로 산화하였다.
포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였다. 김석원 장군은 《학도병회고》에서 “의로운 정신은 생사를 초월했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야 말로 천하무적의 장군이 아니었던가. 학도는 그 시대의 양심이며 미래를 위한 꽃봉우리인 것, 젊음이 아깝고 우국충정이 가상하다. 그날의 수많은 젊은 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나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의로운 사람은 죽어서 억조창생을 살게 하노니…”라 하였다.
이로써 포항은 6.25 전사에 빛나는 구국 희생정신의 사표로서 나라사랑의 귀감이 된 학도의용군의 본고장이 되고, 학도의용군 전투는 국방도시 포항의 정체성을 빛내고 한국 학도의 명예를 드높인 자유·민주수호의 횃불이 되었다.
1949년 4월 15일 창설된 한국 해병대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닦아놓은 포항 오천의 군사기지 터전에 처음으로 주둔하게 된 것은 1952년 8월 1일이었으며, 1956년 8월 이후 포항에서 국토방위의 투혼과 실전능력을 배양하는 해병의 일선교육기지로 발전하여, 이제 포항은 한국해병의 산실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959년 해병대1사단이 경기도 파주에서 포항으로 이전하였으며, 1965년 3월 비둘기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 전선에 파병되어 ‘신화를 남긴 해병’, ‘무적의 해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다. 이로부터 무적해병의 강한 호국의지는 다른 어느 지역민보다 포항인의 기상에 강하게 흐르고 있다. 따라서 영일만권의 군사기지 설치는 일찍이 신라의 수군진(浦鎭)에서 비롯되어 고려를 이어 조선조의 수군진과 영일진을 거쳐 학도의용군의 호국의지와 함께 오늘날 해병부대의 주둔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을 맥맥히 이어오고 있다. |
조항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도로옆으로는 멋진 유카가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장기면 죽정리(竹井里)의 산그리메
조항산 일지맥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투구산에 머무는데 그 산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 상정리이며,
투구산 남서로 기울어진 골짜기를 따라 중정리가 있고, 남동쪽으로 기울어진 봉왕산 기슭에
죽실(竹實·竹室)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발원한 죽실천은 동남으로 흘러 박곡으로 이어지고 투구산에서 남서로 흐르는
중정천은 대곡리를 거쳐 학곡 앞에서 만나게 되어 대진 앞 동해에 이른다.
조금을 더 지나가니 Y자 길이 나오고 계속해서 직진하여 조항산으로 향한다.
조항산은 송신소와 중계소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산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TBC(대구방송), MBC,KBS, kt, 국군정보부대,
한국공항공사 무선표시소가 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다.
많은 산을 무수히도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봤다.
산 정상가기전에 만난 이정표
포항문화방송 송신소와 국군정보부대의 송신기지도 지나고...
조항산(鳥項山:245m:13:25)
경북 포항시 동해면과 구룡포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KBS 송신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포항 동해 산악회에서 설치한
스텐레스 표지판이 도로가에 외롭게 자리를 잡고있다.
산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새의 목덜미처럼 생겼다고 ‘새 조(鳥)
목덜미 항(項)’을 써서 조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KBS 송신소 맞은편에서 늦은 점심상을 펼친다.
혼자서 먹는 점심이래봐야 먹다남은 두유와 어제 저녁에
먹다가 남은 치킨 몇조각과 미니어처 소주한병과 사과 하나이다.
점심상을 펼치는데 KBS 송신소에서 개새끼 2마리가 나와 자꾸 두리번 거린다.
그래 먹어라... 나눠먹자. 치킨 한조각씩을 던져주니 얼른 물고 송신소로 들어간다.
처량한 내모습을 촬영하기 위해서 베낭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셀카로 찍는데
카메라가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갑자기 작동이 되질 않는다.
지난번에 하이엔드 카메라도 고장이 나서 고치지 않았는데 난감하기만 하다.
요즘 가장(家長)이란 단어가 참으로 어깨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30년을 한 눈 팔지않고 앞만보고 달려온 내게 자꾸만 변화가 생긴다.
이제 장성한 아들과 딸은 보기가 힘이들어지고 마눌과의 대화는 줄어들고
대화를 하다보면 자꾸만 의견차로 부딪히니 자꾸만 입을 닺아 버린다.
자꾸만 외톨이가 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홀로 산행을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산은 너무좋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같이 보듬어주는 산이...
이렇게 멋진 앤이 어디있단 말인가... 망가진 카메라 때문에 이젠 어떻게 기록을 남길 것인가?
20분간의 휴식과 식사를 마친 다음에 도로 마지막에 있는 포항공항 무선표시소로 향한다
포항공항 무선표시소를 우회를 하여 등로를 이어간다
철조망을 계속 걸어가니 칡덩쿨이 너무 엉켜있어 길찾기가 애매하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오지산행의 맛을 본다.
칡넝쿨을 뚫고 나오니 오래된 묘지가 나오고 조금 지나니 항공 안전탑이 나온다.
험한 길을 내려오니 농작물을 손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있는
민가가 나오고 조금을 더 지나가니 동양산업이 나온다.
동양산업을 지나면서 차량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흰날재 육교가 나온다.
육교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흰날재가 나오면서 산행을 종료한다.
흰날재(白日嶺:14:15)
포항시 동해면 약전리와 상정리 사이에 희날재라는 작은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산현(장기현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놀란 왕이 일관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두었기에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거라고 했다.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속으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 희날재. 히나리재 등으로 불러졌다고 한다.
흰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白土) 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Bentonic)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산행을 마치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이곳 넓은 도로에서 무작정 히치를 감행한다.
10분만에 1톤 트럭이 세워준다. 포항까지 좀 태워달라고 하니 자기는 동해로 간다면서
약전리 사거리에 가면 포항시외버스 터미널 가는 200번 버스가 있다고 하면서
약전 사거리에 내려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차는 떠나 버린다.
약전(藥田) 사거리(14:40)
포항시 동해면 약전리는 조선시대 이 곳에 약초를 재배하던 밭이 많아 불리게 된 이름이다.
한약방도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약초도, 한약방도 사라져 버렸다.
면소재지에 가깝고, 포항시세가 확장함에 따라 최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등 크게 변모하고 있다.
요즘에는 한약방은 보이지 않고 코딱지만한 동네에 웬넘의 다방은 많은지...
다방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카메라의 밧데리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으니 어~랴 !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을 시작하네 나~원참...
이곳에서 10분정도를 기다리니 200번 버스가 온다.
버스를 올라타고 차비를 내려는데 버스비가 1,500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잔돈이 없다. 그래서 10,000원짜리 지폐를 내니까.
거스름돈이 없다고 하면서 잔돈을 다 내보라고 한다. 동전이 960원이 있다.
기사가 그것이라도 달라고 한다. 미안하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한다.
본이 아니게 차비를 깍은 셈이다. 버스는 포항공항과 포스코를 지난 다음에
25분만에 시외버스 터미널앞에 도착한다.
포항시외버스 터미널(15:30)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구입하는데 서울가는 버스는 오후 6시 이후에나
있고 성남가는 버스가 17:10분에 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성남가는 버스표를
구입하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맥주 한캔을 마시고
대합실에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경기를 관람하다가 버스에 오른다.
포항에서 성남가는 버스표
17시 10분에 포항에서 출발하여 경주를 경유하여 경주I.C까지 나오는데
차가 꽉 밀려서 1시간이 넘게 걸리고 다시 경부고속도로 대구 시내구간을
통과하는데 또다시 많은 시간이 지체된다. 배는 고프고 미치겠다.
선산 휴게소에 들려서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을 먹은 다음에 차에서 깊은잠에 떨어진다
성남 시외버스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늦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되어 간다
조항산에서 흰날재까지는 카메라의 고장으로 백두사랑 산악회
본듯한 대장의 사진을 인용하였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오늘 카메라를 점검했는데 센서에 이상이 있어서 수리비가 12만원
들어간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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