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2월 17일
☞산행날씨: 우충한 흐린날씨, 오후늦게 눈
☞산행거리: 도상거리18.5km+6.1km(어프로치) / 6시간 45분소요
☞참석인원: 좋은사람들 산악회 40여명과 함께
☞산행코스: 개금마을-목통령-석항령길림길-1,005봉(H)-1,120봉-불기령
두리봉 갈림길-두리봉-1,100봉-1,095봉-살푸지재-남산-깃대봉
장자동고개-918봉(H)-고불암 도로-장구재-944봉-1,017봉
백학동 안부-헬기장-마령-큰재-음사동- 어인마을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증산면 / 성주군 가천면 / 경남 거창군 가북면 / 합천군 가야면
내일이 대동강이 풀린다는 雨水이건만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지난 1월의 평균기온이 영하 2.2도로 예년(1980~2010년)의 평균기온보다 1.1도나 낮았다고 한다. 눈도 많이 내렸다
옛 기록에 “입춘이 지나면 동해동풍에 차가운 북풍이 걷히고 동풍이 불면서 얼었던
강물이 녹기 시작한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 말처럼 우수(雨水)는 ‘눈이 비로 바뀌면서
얼었던 땅이 녹고, 따뜻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절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쪽에서 불어오는 남풍에는 이 봄이 오는 모양이다. 계절의 변화란 참으로 무섭다.
전직 대통령중에 한사람이었던 분은 민주화를 외치면서 ‘ 닭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얘기가 있듯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게 마련인걸 보면 자연의 오묘함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한달만에 수도지맥 3구간에 나선다. 지난번 버스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한탓에
강력하게 항의탓에 버스가 바뀌고 베테랑 버스기사 덕분에 편하게 목적지로 향한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비빔밥으로 아침식사하고 다시 출발하여 함양J.C에서 88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대구방면으로 접어든 다음 가조I.C를 빠져나와 30여분을 지난 다음에
거창군의 최오지인 개금마을에 버스가 도착한다. 도착하여 숨도 돌리기 전에
벌써 동료 산꾼들은 오미자 밭사이를 지나서 목통령을 향한다. 왜 저리도 급한지...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개금마을 입구(10:45)
버스가 개금마을 입구에서 멈춘다. 거창군내 버스이외는
더이상 마을위로 진입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마을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목탁장인 김종성님이
있는 태자암 가기직전에 좌측 급경사의 도로를 올라서서
포장도로인 농로를 따라서 목통령으로 향한다.
목탁장인 김종성님댁
김종성(67, 성공)씨는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마을 목탁집
태자암에서 55년째 목탁을 깎고 있다. 아버지가 종일 목탁소리와 씨름하던 그 흙집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 목탁 만들 나무와 목탁 깎는 재주, 작업장인 흙집뿐이었다.
목탁을 들던 순간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아내와 자식에게 못내 미안하다고.
그 역시 절에 들어가 목탁 하나 만들어 주고 쌀이나 보리 한 두 되를 받아왔다.
목탁 하나가 세상에서 제 소리 내는데 3년 반이 걸린다.
그는 100년 이상 모진 비바람을 버틴 살구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로 목탁을 만든다.
쓸 만한 나무뿌리를 골라 진흙에 묻어둔다. 꼬박 3년이 지난 뒤 뿌리를 꺼내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가마솥에 굵은 소금을 넣고 푹 삶는다. 가마솥에서 건진 재목은 다시 그늘에서 석 달을 말린다.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인들 불심이 빚은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과 같다. 바다와 바람 손을 빌리는 것이다.
팔만대장경 재목은 2년 동안 개펄이 잘 형성된 남해에 담가둔 뒤 건져서 소금물에 삶았다.
그러면 나무 진액이 모두 빠진다. 또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소금기가 나무 표면에 발라진
상태가 돼 건조할 때 갈라짐, 비틀어짐을 막을 수 있다. 결 삭힘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부식도 막고
벌레 먹는 일도 없다.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했던 성철 스님이 가르쳐준 방법이라고 한다
목탁은 원래 목어(木魚)에서 유래했다. 소리를 듣고 목어 유래에 얽힌 전설이나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를 연상하며 수행자들이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한 불구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따르면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그 형체를 취해 나무에 조각하고 침으로써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미를 경책했다”고 했다. 그가 소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다.
목탁집 태자암에는 가난 아닌 불심이 대물림되고 있었다. 50년 넘게 목탁만 깎아온
그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부처님을 향한 소리공양은 3대에 걸쳐 흐르고 있었다.
(법보신문 인용)
포장 농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경운기에 나무를 싣고 내려오는 村老를 만난다.
이곳 개금 마을은 오지이기는 하지만 청정지역이라 장수촌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목통령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개금마을
경남 거창군 동북부 해발 800m 고지 비탈면에 자리잡은 가북면 개금 마을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거창에서도 손꼽히는 오지마을이다.
북으로는 경북 성주군과 맞닿아 있고 동으로 재를 넘으면 합천 해인사가 나온다.
개금(開金)은 옛날에 금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주변 산에는 지금도 금광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20여 가구 70명 남짓한 마을 주민들은 배추, 감자 등 고랭지채소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요즘엔 고부가가치 작물인 오미자를 주로 재배한다. 고지대에서 생산된 이 곳의
오미자는 딴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청정하다. 개금마을의 또 다른 특산물은 마(麻)다.
마을이 자리잡은 곳이 워낙 높은 곳이다보니 개금마을엔 여름에 모기가 없다고 한다.
청정마을로 잘 알려진 개금마을은 거창군에서도 손꼽히는 장수(長壽)마을이다.
"공기와 물이 좋고, 깨끗한 곳에서 자란 오미자와 마 등 건강식품을 많이 드시는 게
개금마을의 장수 비결"이라고 한다.
버들강아지가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오늘은 잔뜩 흐린 날씨이고 이곳이 해발 900고지의 고지이이긴
하지만 한달전과는 전혀 다른 봄의 미풍을 느낄만큼 바람은 따뜻하다.
얇게 입은 자켓에도 땀이나기 시작하여 자켓을 벗어 베낭에 집어넣는
사이에 동료산꾼들은 정신없이 나를 추월한다... 자꾸만 마음은 급해지고...
개금마을 갈림길(980m:11:08)
일반적으로 이곳을 목통령이라 하면서 수도지맥 산꾼들이 이곳에서
개금마을로 하산하는 경우가 많아 이곳을 목통령이라 하는 사람이
많으나 지도상 목통령인 진짜 목통령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야한다.
인증샷을 남기려는데 동료산꾼이 영역표시(?)를 하는 중이다. ㅋㅋㅋ
목통령(木通嶺)
지도상 목통령은 아직도 멀었는데 어느 산악회에서 여기가 목통령이라고
아크릴 표지판을 설치해놨다. 목통령이란 목마재라고도 부르며 북서쪽
경북 김천시 증산면으로 통하는 고개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군사적
통로가 되었던 고개라고도 한다.
김천의 알프스로 통하는 증산면인 이 지역은 맑은 공기와 신비의 약수 고로쇠가 유명하다고 한다
옛부터 '고로쇠'는 뼈에 이롭다는 뜻의 한자어 골리수(骨利水)에서 유래된 것으로 칼슘,
마그네슘 등 미네랄과 비타민이 풍부해 성인병 예방과 몸속의 각종 노폐물 배출,
위장병, 신경통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목통령에서 크게 심호흡 한번하고 다시 두리봉 방향으로 향한다.
능선에서 바라본 원황점(元黃店) 마을
원래 황(璜)을 구운 황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황점이라 한다.
김해김씨 중간시조가 유황을 구워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단초였다.
원래 마을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병자년 수해때 유실되어 아랫쪽으로 옮겨졌다.
원황점마을로 자락을 늘어뜨린 목통령은 마을에 몇 뙈기의 밭과 다랑논을 줬을 뿐 넉넉함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유황을 줌으로써 유황을 정제해 나라에 공납하고 식량따위를 받아 근근이 연명하게 했다.
취토(取土), 취회(取灰), 교합(交合), 사수(篩水), 오수(熬水), 재련(再煉), 삼련(三煉), 합제(合製)의
여덟 단계순으로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정제되는 유황은 당시의 주요 군수품으로, 유황을 만드는
이들에 대한 나라의 관리는 대단히 엄격했을 터이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유황을 생산해야 하는 국법에 묶여 있었다. 속박된데다,
구차하기가 그지없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게 자연 이들의 소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인가 마을 뒷산으로 산나물을 찾아 나선 아낙이 탈진해 쓰러진 낯선
남정네를 발견하곤 젖먹이에게 줄, 불어난 젖을 짜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이 남정네가 바로 거창을 향해 목통령을 넘으려던 암행어사 박문수다.
그는 아낙으로부터 마을의 딱한 처지를 듣고는 임금(영조)에게 청원해 이들이 황을 캐는 일에서 헤어나게 했다.
한 아낙의 젖보시로 천형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마을의 지명 원황점(元黃店)은 ‘원래 황을 캐던 곳’이라는 뜻이다.
목통령 사거리(985m:11:20)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책에는 이곳을 목통령으로 기재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영조때 암행어사 박 문수가 이곳을 넘어 거창으로 향하다
허기에 지쳐 탈진한 상태에서 쓰러졌다가 아낙의 젖을 먹고 살아난 곳이라고 한다.
목통령 안부에서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데 참으로 힘이들고 안부에 쌓인 많은
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올라선다.
지난구간의 용두암봉과 단지봉이 멋진 자태로 보인다.
지난구간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면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펜스가 나타난다.
1040봉(11:30)
이곳은 최근에 설치한듯한 펜스가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돌아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이곳 펜스 안쪽에는 1,040봉으로 불리는 폐헬기장이
있는데 이 펜스로 인해 수도지맥길은 우회로 해야만 한다.
이곳은 잡목과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심하다. 얼굴이 할키고
베낭이 걸리고 정말 미칠 지경이다. 저녁놀 대장님은 얼굴에 깊은 상처가 났다.
오지 산행의 힘듬을 몸소 체험하는데 이곳 우측으로 자작나무를 많이 심어놨다.
자작나무는 겨울숲의 귀부인으로 불릴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늦가을이
되면서부터 백색 裸身을 드러내며 북방지역에서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지붕
아래서 태어나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는 껍질로 불쏘시개로 삼고 그 껍질에
다시 몸을 싸 저승으로 갔으며 개마고원 북쪽에 살았던 여진족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자작나무 숲에 머문다고 믿었다 한다.
이 자작나무는 독성이 없어서 옛날 서당에서 훈육을 위한 회초리로 사용했다고 한다.
능선 안부를 걷는데 잡목 말고도 테클을 거는 놈이 있으니 안부 능선에
쌓인 눈이다. 이리저리 피해가는데 시간은 자꾸만 지체되고 선두들은
오늘 완전히 산악 마라톤을 하는지 아님 1968년 청와대를 침투한 김신조
부대도 아닌데 완전히 날라가는 느낌이다. 맨날 노트에 기록하고 사진을
많이 찍다가보니 이 산악회에서는 거의 늘 꼴찌로 가니... 미치겠다.
안부 능선(11:53)
안부 능선 좌측으로는 뚜렸한 내리막 길이 보이고 황점마을이 아련히 보인다.
원황점의 후예들에게는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환란이 연이어 찾아 온다.
김천에서 농업과 운수업으로 돈을 모은 나카가와 다이헤(中川太平)는 수도지맥 일대의
국유림 4천884만3천195㎡(4천925정보)를 사유화해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조림을 시작한다.
조림사업은 원황점마을과 그 아랫마을 장전, 산 너머 수도마을 사람까지 동원한 가운데 1918년부터 본격화됐다.
일제가 침략용 철도 침목과 전신주로 쓸 목재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인에게 사업권을 주고 추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의 조림사업은 전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 700만 그루를 심게 한 것도 모자라 가야산까지
원정을 다니며 조림을 하게 하는 등 무려 20년간이나 계속됐다. 주민들은 이 기간동안 1천m급
산을 헤집고 다니며 잡목을 베어 내고, 그 자리에 묘목을 심는 등 노동력을 수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는 임금을 보리쌀, 밀가루 등 식량 형태로 지불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력 유지 차원에서라도 연명거리는 당연히 줬을 것이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조림지를 관리하는 등 노동력을 제공했으나, 목재 수송을 위한 철도부설계획이
태평양전쟁으로 추진력을 잃는 바람에 철도공사장 부역을 면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한다.
원황점 마을의 슬픈 역사에 가슴아파 하면서 다시 길을 걷는다.
오늘 산행은 목통령에서 시작하여 두리봉, 남산 깃대봉에서 큰재까지 코스를
⊃의 형태로 능선을 타고 가북면 개금마을과 용암리 전체를 둘러싸고 도는 형국이다.
물개처럼 생긴 바위도 보이고...
희한하게 생긴 갈참나무 숲을 지나니... 철쭉과 싸리나무 숲을 헤쳐야 한다.
산죽나무 지대가 나타나고, 다시 오름길은 다시 계속되고...
석항령 분기봉 (石項嶺:1,115m:12:07)
이곳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성주군 가천면 그리고 경남 거창군 가북면이
면을 맞대고 있는 삼군 경계봉이다. 왼편 북쪽으로 내려앉은 산줄기가 김천에서
성주군으로 바뀌고 김천 시계(市界)이면서 이곳을 넘어 형제봉, 독용산으로 이어진다
이곳 석항령에서 두리봉까지는 성주군 가천면과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두리봉에서 장자봉까지는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의 경계가 이어진다.
이곳 그 어디에도 석항령이라는 표식은 없고 무심코 지나가기 좋은 곳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석항령이라 부르지 않고 돌곡래라 부른다고 한다.
능선 아래로는 성주군 가천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주군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참외가 아닐까싶을 정도로 참외가 유명한 지역이다.
국립공원 가야산 아래 위치한 성주군 가천면은 성주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교통`산물 교역의 요충지이다.
가천면은 가야산과 형제봉에서 내린 산 능선과 계곡이 대가천에 유입되는 평야지에 터를 잡아 산수가
수려하고 지세가 대가천에서 가장 좋은 명지로 일찍부터 이름이 나 있다.
특히 경상북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거창군과 경계를 이루며, 김천시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옛날부터 경상도를 대표하는 5일장의 하나였던 천창장이 크게 번성했다.
천장장이 서는 날이면 성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합천`거창`김천에서도 장꾼들이 몰려와 시장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가야산 기슭의 천창장을 보기 위해 합천`거창`김천 사람들은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을 넘나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산길이 가야산 옛길이다.
해발 800m에 이르는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 가운데 합천 사람들은 코배이재를 넘어오는 고갯길로,
거창 사람은 불기재를, 김천에서는 돌목재를 넘어 천창장으로 왔다 천창장이 열리던 가천면 소재지
창천리는 원래 ‘샘이 있는 너른 들판’이란 뜻의 샘바대(천평`泉坪)로 불렸으나, 조선 숙종 41년(1715)
목사 윤헌주가 이곳에 양곡 창고인 천야창(泉野倉)을 세우고 지명을 천창(泉倉)으로 바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창이 일본 발음으로 ‘센소’(戰爭)라 부르니 뜻이
좋지 않아 창천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 때문에 요즘도 ‘창천’을 ‘천창’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지명을 ‘천창리’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간혹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거창군 가북면과 오늘 내가 가야할 능선
가북면(加北面)은 |
거창군의 북동쪽 끝자리에서 가소현의 북쪽을 차지하므로 가북이라 한다, 가조면과 같은 연혁을 가졌으며, 가소현ㆍ함음현ㆍ거제현ㆍ제창현에 속하였다가 거창군에 포함되게 되었다. 북쪽은 소백산맥의 두리봉ㆍ단지봉ㆍ 수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경상북도의 김천시와 맞닿았고, 동쪽은 두리봉에서 의상봉으로 뻗는 가야산의 서쪽 가지에 의해 합천군 가야면과 맞닿는다. 웅양면ㆍ주상면과 경계를 지운다. 본면을 동쪽에 박암리ㆍ몽석리ㆍ용암리의3개 리로서 큰골이 되고, 서 쪽에 해평리ㆍ중촌리 2개 리로서 작은 골이 되며, 두 골짝이 어울리는 곳에 우혜리가 있고, 남쪽 끝에 용산리가 자리한다 |
1,157봉(12:18)
1,157봉에 올라서니 앞서가던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2분간의 휴식을 취하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가야산은 구름에 살짝 가린채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주위에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은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동료 산꾼들에 휩쓸리다가
보니 주위의 멋진 선경은 즐기지도 못하고 산악 마라톤하듯 내려간다.
참으로 재미없는 산행을 한다... 나 원 산행을 하는건지, 마라톤을 하는건지...
불기령 (분계령 997m:12:30)
거창군 가북면 개금마을에서 성주군 가천면 월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25,000 지형도에는 ‘분계령(불기령)’함께 표기되어
있는데, 고시지명(표기지명)은 ‘불기령’이다.
금부치가 나온다는 개금마을 뒷산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불기령라 부른다고 한다.
우측으로 상개금 마을로 통하는 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곳에 있는 세 고개의 이름도 재미가 있다. 코배이재는 고개를 오르려면
코를 땅에다 박을 정도로 가파르다고 해서 코배이재란 이름이 붙었다.
또 불기재는 아랫 마을인 불기마을에서 유래됐다.
이곳에는 철기시대의 꽃을 피운 풀뭇간이 있어 연장의 생산과 정비작업이 활발했다.
일부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가면 하루 만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불귀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목재 경우엔 굳이 한자를 써서 '석항령(石項嶺)'이라고 하나 돌목재에는 돌이 없으며,
길이 가파르고 급해서 ㄹ자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돌목재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준.희’님이 걸어둔 불기령이라는 아크릴 표지판이
보이더만 아무리 찾아봐도 표지판은 보이질 않고 출입금지 표지판만 보인다.
국공파들의 속좁은 벤댕이 소견으로 철거한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물증이
없으니 이야기할 수도 없고 벌금 50만원 매기겠다는 걸 안 걸린것만 해도 감지덕지...
늘 저들은 국민들이 주는 녹으로 사는자가 맨날 ‘하지마라 벌금 매기겠다’이런
얘기외는 못하는가? 군림하려 하지말고 下心으로 봉사할 의향은 없으신지?
오지산행을 하면서 국립공원 안가니 이꼴저꼴 안보니 좋더니만 오늘 또 만나네
1,157봉에서 내려온만큼 다시 빡세게 치고 오르는데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걷기도 힘이들고 미끄러워 지체가 된다.
두리봉(1,134.4m:12:47)
경남 거창군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 그리고 경북 성주군
가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수도지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곳이다.
펑퍼짐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두리봉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봉우리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고 해서 두리봉, 또 그 형상이 두루뭉술해서 두리봉이란 얘기가 있다.
두리봉 아래인 개금마을 주민들은 "사방을 두루 볼 수 있다고 해서 두루봉이라 한다."고 했다.
이곳은 진짜 두리봉이 아닌 수도지맥과 가야산 종주코스가 갈라지는 곳이다.
삼각점이 있는 두리봉(1133.4m △가야454)은 북서쪽으로 5~6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곳에 벗어나 있다. 가고싶은 마음은 꿀떡 같으나 포기를 하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이곳은 경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곳으로 좌측으로는 성주군과 이별을 하고
합천군 가야면으로 접어들며 이젠 경남땅으로 수도지맥의 발을 들여 놓는다.
두리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두리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 정상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이라고 불리는 높이 1,430m의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과 경상북도 성주군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1972년 10월 13일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해인사를
비롯하여 마애불 입상, 용문폭포, 홍류동 계곡 등의 뛰어난 명승고적과 자연경관이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가야산은 법보 종찰이 위치할 수 있는 산으로서, 천하에 뛰어난 지덕을 갖춘 산이다.
또한 호국 불심의 일념으로 팔만대장경을 각인하여 국난을 스스로 극복한 조상의 숨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야산은 소백산맥의 한 지맥이다. 해발 1,430m라면, 높은 산만을 친다면 중악이지만 그것이 만든 넓은 영역과
그 산 자체의 격조와 품위로 본다면 예로부터 자주 현판에 쓰이는 '해동제일의 명산'으로서 유감이 없다.
옛 기록에 '산형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에서 제일이다'라고 한데서도 증명된다.
가야산은 오대산(1,563m), 소백산(1,439m)과 더불어 왜적의 전화를 입지 않은 곳으로 삼재(화재, 수재, 풍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올림픽 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화합의 장소가 되었다.
해발 1,430m인 가야산은 경남과 경북 사이에 솟아 있다. 주봉인 상황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단지봉 등의
톱날 같은 암봉이 병풍처럼 펼쳐진 영산이다. 그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다.
해인사에 세계적인 보물로 손꼽히는 팔만대장경(국보32호)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밖에 팔만대장경 판전(국보52호), 석조여래입상(보물264호), 반야사 원경왕사비(보물128호) 등
국보급 문화재가 많다. 가야산은 철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데 특히 봄철에는 해인사 진입로
양쪽에 펼쳐진 벚꽃의 파노라마가 장관을 이룬다. 진달래와 철쭉, 울창한 노송이 어우러진 홍류동 10리
계곡의 봄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가야산은 지덕이 높다 해서 해동 영지로 칭송되는 명산으로 소백산맥의 본 맥인 태백산맥에서 출발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고 거창과 합천의 두 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주봉은 우두봉이라고도
불리는 해발 1,430m의 상왕봉이며 이밖에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대여섯이나 거느리고 있으며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계곡물은 해인사 앞에서 합쳐져 동남으로 돌아흘러 아름다운 가야천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의 홍류동 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10여 리에 걸쳐 선경을
이루고 가을의 단풍이 너무 붉어서 계곡의 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여름에는
콸콸 흐르는 맑은 물이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리운다.
신라 말엽 해동 문장의 시조였던 고운 최 치원이 은둔, 수도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종적을 감췄다는
은둔지가 바로 홍류동에 있으며 또한 길옆 석벽에는 고운의 시 한수가 지금도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치원대 또는 제시석이라 부르고 있으며 고운이 바둑을 두었다는 농산정이 제시석과 함께 있다.
1972년 우리나라에서 아홉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를 비롯하여 뛰어난 명승고적이 즐비하여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뒤지지 않는다.
홍류동의 가경은 최치원을 비롯하여 서산대사 청허(淸虛), 서산의 제자 사명(四溟),강희맹 등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주저 없이 절창을 토하게 만들었다.
단지봉 아래에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이래봐야 찹쌀모찌 2개에다가
막걸리 한병, 그리고 찐한 불랙 커피 한잔이 전부이다.
점심을 먹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안됐는데 그 사이 동료산꾼들은 가버린다.
어찌보면 참으로 야속하기도 하나 이 산악회의 문화가 그러니 어찌하랴...
나 역시 얼른 베낭을 추스리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두리봉 아래 헬기장(13:05)
잘못된 이정표(13:10)
참으로 개념없는 이정표다. 단지봉 지난지가 10분밖에 안된는데 8.7km라니...
0.7km라면 몰라도 그리고 목통령에서 두리봉까지 4.2km라고 했놓고 여기서는
두리봉을 지난지가 10분도 넘었는데 3.7km라니... 간판업자가 醉中에 제작했나?
그리고 확인도 하지않고 책상머리에서 일처리한 공무원 나리 정신 좀 차립시다.
이곳을 지나가는 지맥 산꾼들! 요즘 젊은이들 말로 ‘졸라 헷갈립니다’
안부 능선의 길을 걷는다. 양지쪽에는 눈이 많이 녹았으나
음지쪽에는 여전히 눈이 많아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가야산군(加倻山群)이 힘들게 가는 산꾼 범여를 유혹한다.
그래 몇년후에 가야산환종주 할 때 꼭 그대를 만나러 가주마.
우측 능선쪽으로 뚜렷한 하산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상개금마을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희한하게 생긴 소나무도 만나고...
능선 안부의 눈을 피해서 눈이 쌓이지 않는 곳을 걷는다마는 그곳은
잡목과 넘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갈길 바쁜 산꾼에게 자꾸만 태클을 건다.
마구 쓰러진 나무사이로 이리저리 헤치면서 걸어려니 죽을 맛이다.
지난해 진양기맥 구간중에 거창군 지역의 능선을 탈때도 애를 먹었는데...
거창 군수나리! 제발 등로 좀 신경써주소.
1,095봉(13:35)
쓰러진 나무들 사이로 곡예를 하듯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멋진 바위도 만나고...
다시 쓰러진 나무들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등로를 이어간다.
살푸지재 평전사거리 (947m:13:50)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 마을에서 해인사로 넘어가는 희미한 길이 있는
고개로 예전에 봇짐장수같은 민초들이 넘었던 고개였던 모양이다.
고개 아래에는 성황당터처럼 보이는 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돌무덤이 보인다.
우측에 성황당터 같은 곳을 보면서 다시 오르막을 올라서는데
그래도 오늘 다행인 것은 목통령 올라온 이후부터는 고도차가 커지않다.
남산으로 오르는 능선길은 땀을 꽤나 쏟은 다음에야 정상을 허락한다.
쌓인 눈이 많아서 힘도 들거니와 눈이 살짝 얼은 상태라 상당히 미끄럽다.
남산 깃대봉(1,112.9m:14:15)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경계계에 있는 산으로 남산과 깃대봉을 함께 표기하고 있지만
국립지리원 고시지명은 남산(南山)으로표기되어 있다. 개금마을 남쪽에 있는 큰산이라하여 남산이라 불렀고
깃대봉이라고 칭한 이유는 아마 일제 강점기에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았다하여 깃대봉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정상에는 3등 삼각점(△가야 313 1981.5 재설:지리적 위치.경도 120도 04분 14.2초.위도:35도 48분 28.1초)가
설치되어 있고 헬기장이 있다.
남산에서도 인증샷 하나를 남기고...
이곳 남산은 생각보다도 전망은 별로이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가야산군은 정말 멋지지만 나무에 많이 가려져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등로를 어어서 가는데 자꾸만 날씨가 흐려져서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가 올것만 같은 느낌이다.
능선 안부를 편안하게 걸어간다
내리막길에는 산죽길이 펼쳐지고 주위에는 키가 큰 전나무와 소나무가 즐비하다.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무사이를 술래잡기하듯이 걷는다.
이윽고 우측 가북면 쪽으로 포장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야산 국립공원 사무소장 명의의 출입금지 표지판이 보이고...
장자동 고개(890m:14:42)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에서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장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거창군쪽은 포장도로이지만 합천쪽은 해인사의 반대로
인하여 개발이 중단되어 절름발이 도로가 되어 버렸다.
물론 사찰의 수행공간도 중요하지만 우매한 중생이 보기에는 해인사측의
아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것은 사실이다.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여 사찰의 수행환경도 지키고 중생들의 편리함도 해결하였으면...
장자동 도로를 가로 질러서 능선으로 올라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918봉(헬기장:14:45)
헬기장을 올라서니 다시 잡목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고역을 치른다
고불암 도로(14:55)
해인사 고불암은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부지내에 있으며 해인사의 말사중에
가장 높은 해발 900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납골당이라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가야산은 명산 가운데서도 천하의 명당이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이곳은 산자의 수행처이자 사자(死者)의 안식처로 최고의 장소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예시적으로 지목된 가야산 마장동에 납골성전인 무량수전을 창건하여
삼계중생구제를 한다는데 그 의미를 둔 고불암은 10만평의 넓은 부지에 750평 7개동의
대웅전및 부속건물과 무량수전 1,200평의 건물 실내공간에 2만기의 위패를 모시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요즘 납골당 업자의 농간에 휘말려 각종 송사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종단에서도 감사가 나오고 하여 시끄러운 모양이라 안타깝다.
위패가 안치된 고불암 무량수전의 모습
고불암에 모셔져 있는 철불
6.25 당시 어느 스님이 이북에서 짊어지고 온 불상이라는데
고불(古佛)이란 본래의 부처를 뜻하는 말이다
고불암 내려가는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지나온 남산이 나무사이로 보이고...
이름모를 버섯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능선 좌측 아랫마을에는 파프리카 비닐 하우스가 보인다.
이 아래 마을이 가야면 치인리 마장동인데 파프리카를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몇년전부터 대구 사람들이 들어와 짓기 시작했다는 파프리카 농사는
지금 마장과 초막골의 주된 수입원이 됐다 한다. 사실 초막골에는 사람 사는 집보다 하우스가 더 많다.
마장동은 말찡이라고도 부르면 초막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신라 제40대 애장왕이 해인사를 세우려고 머물 때 마장이었다고 한다.
전나무가 즐비한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곳 역시 쓰러진 나무와의 전쟁을 하면서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자꾸만 날씨가 컴컴해지는게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곡산장길을 걷는 기분인데 너무 음산하여 기분이 꾸리꾸리하다.
정말 멋진 문구의 시그널도 만나고...
희미한 능선길을 따라 뛰다시피하면서 걷는다.
하늘에는 드디어 싸락눈같은 것이 쏟아진다.
괜스레 마음은 급해지는데 거리는 줄지않고 숏다리의 비애를 느낀다.
봄이오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능선에 있는 생강나무에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무명봉에 올라 왼쪽으로 꺾어 내려선다. 등산로 양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1,010봉(15:35)
1,010봉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안부를 따라 걷는다.
다시 조그만 오르막을 오르는데 좌측으로는 가야면 치인리 내초막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 역시 파프리카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초막동(草幕洞)은 삼정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내초막과 외초막 마을이 있다.
해인사 창건 당시 애장왕과 조신들이 타고 온 말을 위한 목초 를 저장하던 초막이 있었다.
마을 이름이 삼정, 마장, 초막골이다.
“옛날 삼 정승이 들른 마을이 삼정이 됐고, 마장에다 말을 매고
초막에서 풀을 뜯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합천군 가야면(伽倻面)이라고 호칭한 것은 이름난 영산이며, 이 고을의 진산인 가야산을 본따서
지었다고 보아지며, 가야는 범어(고대 인도어)로 ‘소(牛)’를 의미한다.
가야산이 본래 ‘소머리산(牛頭山)’으로 붙이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부터일 것으로 가야(伽倻)라는 글자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장구재(15:50)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내초막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지 뚜렸한 임도가 보인다
장구재- 용암리 방면의 모습
장구재 - 내초막 방면의 모습
장구재를 올라서니 전나무 아래로 미역줄기 넝쿨이 길을 막아 자꾸만 태클을 건다.
쓰러진 나무들과 합세를 하는데 같이가는 초롱님과 난 숏다리라 자꾸만 시간이 지체된다.
희미한 옛길도 보이고...
또다시 나무와의 전쟁을 치른다.
헬기장(16:05)
백학동 갈림길(16:15)
지맥길은 백학동 반대 방향인 좌측으로 꺽어져 마령으로 향한다.
아직 어두울 시간은 아닌데도 잔뜩 하늘은 흐려지며 금방이라도
눈,비라도 올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내리막길에
잡목은 왜그리도 산꾼을 괴롭히는지... 정말 미치겠다.
간벌과 쓰러진 잡목 말그대로 난장판이다.
마령(馬嶺:1006.5m:16:20)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에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어면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마장동(馬場洞)이 있으므로 마령(馬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령에서 5분정도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성황당이 나오고
돌무덤에 나무들이 있는 성황당재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이 큰재란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 마령 아래 큰재는 잘못 표기된 것이다.
실제 큰재는 죽전리에서 치인리로 넘어가는 임도가 있는 고개길이다.
큰재(16:25)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은사마을과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외초막으로
연결하는 고개로 해인사와 거창군 가조면을 연결하는 큰 고갯길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잊혀진 길이였는지 거창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아예없다.
국립 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에는 큰재라고 표기가 되어있지만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황재라는 이정표가 붙어있다.
이곳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은 가야천을 만들고 서로 흐르는 물은 우가천이다.
성황재(큰재)의 유래 안내판
이곳에서도 인증샷을 남기고...
이곳에서 우측의 거창군 가북면쪽으로 내려오는데 이곳은 아예 길이없다.
밀림같은 정글을 헤치고 길이없는 곳을 개척하다시피 내려오니 예전에
집터였는지 집에서 썼던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집터의 흔적도 보인다.
베낭이 나무에 걸리고 얼굴이 잡목에 할키면서 길이없는 곳을 내려온다
우가천의 발원지가 되는 계곡을 지나는데 얼음 아래로 흐르는 냇물소리가
봄이 오는걸 알려주는것 같다. 이곳은 벌써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건만
아직까지 내 마음은 春來不似春이니... 내 마음에 봄은 언제오려는가?
해인사가는 이정표(16:50)
정글림같은 숲을 헤치고 내려와 임도를 따라서 편한걸음을 한다.
다시 개울을 지나서 임도를 따라 오르막을 오르는데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눈이 얼음으로 변하여 상당히 미끄럽다.
임도를 넘어오니 드디어 포장도로가 나오고 은사마을이 보인다
은사마을의 모습(17:00)
마을이라봐야 사람사는 흔적이 보이는건 서너가구 뿐이고 나머지는 폐가이다.
은사마을의 유래 안내판
다시 도로를 따라서 편하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간다.
며칠전 친구가 메일로 보내준 詩가 생각난다.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걸어가는 쓸쓸한 길이라지만..
내가 걷는 삶의 길목에서
그래도 평생을 함께 걷고 싶은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보다는
연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그저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고단하고 힘든 날에
마음으로 다가가면 살포시
내 등을 도닥여주는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부족한 내가 위로해주기보다는..
그의 위로를 더 많이받아
가끔은 나보다 더나를 아껴주는
마음이 넓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기도로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약한 부분을
어느 한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만나서..
기쁜 날보다는 슬픈 날에
불현듯 마음이 찾아가면 보듬어주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평생을 마음으로 만나다가
어느날 홀연히 바람으로 사라지는 날..
아님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날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이별을 못하니..
그가 죽음에 이르는 날이 먼저라면..
미련없이 나도 그와 함께
하늘로 훨훨 날을 수 있는
마음이 아름다운 이를 만나고 싶다.
임도에서 바라보니 다음구간에 가야할 별유산과 비계산 그리고
수도지맥길에서 떨어진 지남산과 장군봉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드디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창군의 최오지인 가북면 어인마을이다.
이곳 거창도 내 고향 의령만큼이나 슬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흔히들 거창하면 다른 모든걸 제껴두고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떠올린다.
두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추억을 말이다.
내 고향 의령도 마찬가지다...좋은것이 참으로도 많은 고장인데
의령하면 1980년대에 궁유면에서 발생한 우순경 총기사건만 떠올리니...
죽산김씨 선영이라고 넓은 농로가 있는데도 출입을 못하게 하니
이것은 오만과 아집처럼 보인다... 길은 가라고 있는 것이고
필시 망자들인 조상들도 저런걸 바라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어인마을 가운데로 지나간다. 아직까지 버스는 보이질 않는다
이곳은 우혜리(牛惠里)는 우혜ㆍ 백학ㆍ 상감월ㆍ 중감월ㆍ 하감월ㆍ 은사동ㆍ 어인의 7개 마을이 있다.
우혜(牛惠)의 유래는 농부가 어린 것을 논두렁에 눞혀두고 일을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헤치려 하자
소가 호랑이와 싸워서 상하는 틈에 어린 것이 살았으므로 소의 은혜를 생각하여 우혜라고
이름 지었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화물차를 얻어타고 조금을 내려오니 동료산꾼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화물차를 태워준 어인마을의 젊은 친구여! 고마우이.
폐교가 된 가북초교 어인분교의 모습
산행을 마무리 하다(17:30)
이곳에서 산행을 마무리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20분 후에 버스가 도착하고 이곳에서 산악회 총무님이 준비해 온 제물로
이곳에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안전산행 기원제를 지내고 떡과 술로
음복을 한 다음에 18시 40분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지난번과는 달리 버스는 시원스럽게 달려서 양재동에 도착하니 22시 20분이다.
10분후에 집에 도착하여 션한 맥주 한잔 마시고 깊은 잠에 빠진다.
어인(於仁)마을(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소재)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고기가 놀았다 하여 고기어ㆍ 어질인 어인(魚仁)이라던 것을 에어(於)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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