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3월 17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간간히 부는 바람.오후에는 흐림
☞산행거리: 도상거리 20.2km+ 6.5km(어프로치:차량이동) / 7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싸리터재-406봉-564봉-575봉-523봉-헬기장-540봉-512.3봉
마령재-438봉-450봉-602봉-토곡산-매화재-녹대산갈림길
녹대산-헬기장-546봉-노태산-340봉-300봉(지릿재터널)-307.7봉
지릿재-276봉-큰재-쌍림면소재지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묘산면, 봉산면, 합천읍, 율곡면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요즘에 자꾸만 머리 아픈일이 많아진다. 사바세계에 사는 자체가 苦이기는 하지만...
지난구간에 모 산악회를 따라서 4구간을 마치기는 했지만 혼자 다니는게 익숙한 탓인지
산악회를 따라가니 불편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어서 오늘 수도지맥 5구간은 나홀로 나선다.
토욜날 아주 바쁜 현장을 처리하고나서 집으로 와서 주섬주섬 베낭을 챙긴 다음에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고는 저녁 6시 20분에 동서울터미널을 가기위해서 집을 나선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시간이 20분정도 여유가 있어서 커피한잔을 마시고 빵집에서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백두사랑 산악회 자료인용)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동서울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20분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거창읍내 땅을 밟아본다.
거창버스 터미널 버스 시간표 버스 터미널을 나와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찜질방으로 향하는데터미널 건너 택시 정류장에 희랑대사의 안내판이 있다.
그 유명하신 희랑대사 거창분이란걸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무학대사가 합천분이고... 아마 이곳은 불교가 뿌리깊은 모태신앙인 모양이다.
심야에 본 거창읍내터미널을 나와 다리를 건넌다. 거창읍내를 통과하는 위천천 주위에는
워킹코스와 각종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경남 서북부 중심지역이었던 거창(巨昌)은 한때 인구가 13만에 달하여
시 승격까지 꿈꾸었으나 오지에다 합천댐 상류지역으로 상수도 보호구역에
묶여 발전이 더디고 지금은 인구가 6만5천명 밖에 안된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우측으로 10분정도를 걸어가니사거리 직전에 찜질방이 2개가 나온다. 하나는 지하에 있고 하나는
2.3층에 있어 지하보다는 지상이 나을것 같아서 지상으로 간다.
찜질방 가기전에 호프집에 들려서 1,000cc짜리 생맥주 한잔을 하고
찜질방으로 향하는데 밤에 본 거창은 지방읍내 치고는 술집을 비롯한
유흥업소가 너무 많고 편의점이 너무 많은 느낌이다.
이곳 시골의 구멍가게들도 대기업들이 다 점령한 걸 보니 씁쓸함이 느껴진다.
흔히 거창하면 교육의 도시인줄 아는데 밤에본 거창. 교육적 환경은 아니올씨다.
거창 정하건강나라 찜질방(23:00~05:30)찜질방에 도착하여 7,000원을 주고 티켓을 끊어니 이불을 2장이나 준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데 다행히 사람은 그리많지 않아 2층에서
나홀로 잠을 청하여 1시간정도 잠을 잤나 싶은데 옆에 젊은 남.녀가 소곤대면서
청춘사업을 하는 모양인데 바시락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잠에서 깨니 이것들이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 아니다. 시끄럽다고 하니
얼른 이불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조금후에는 언 넘이 담배를
피는지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한다. 평생 담배를 안피운 범여는 이것에 상당히 민감하다.
30분이나 지났을까 40대 후반의 여자 3명이 술에 취해 들어와서 큰소리로
떠들면서 소란을 피기 시작한다... 썩을년들! 매너는 전당포에 잡혀 먹었나?
보다못한 사람들 서너명이 시끄럽다고 난리를 치니 조용하다가 또다시 떠든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을 맞는데 잠을 못자 산행이 제대로 될지 걱정이다.
아침식사(05:40~06:10)찜질방에서 샤워에다가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친 다음에 좌측 사거리
주유소 건너편에 있는 해장국집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닝커피까지
한 다음에 30분 정도를 걸어서 김천사거리에 있는 서흥여객 차고지까지 걸어간다.
거창읍내에 있는 김천사거리 싸리터재가는 버스(07:00)거창에서 합천을 가는 서흥여객 버스를 타고 싸리터재로 향한다.
거창읍내를 빙빙 돌아서 주유소를 들려 기름까지 넣고는 합천으로 향한다.
손님이라고는 달랑 나혼자다. 기사분이 무슨 재미로 혼자 산에 다니냐고 한다.
내가 기사에게 혼자 산에 댜녀 봤냐고 하니까. 안 다녀봤다고 한다...
주유를 마치고 버스는 합천댐을 빙빙돌아서 봉산면 소재를 거친 다음에
권빈리 지나서 싸리터재에 나를 내려두고 빈 차로 합천을 향한다.
싸리터재(310m:07:35)경남 합천군 봉산면과 묘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26변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1914년 부.군통폐합시 병합하여 봉산면이 되었다고 한다. 면 이름은 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봉두산의 ‘봉’자와 태산의 ‘산’자를 따서 봉산이라고 지었다 한다.
이 면은 합천군의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합천읍, 용주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은 대병면과, 서쪽은 거창군 신원면, 남상면, 남하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묘산면, 거창군 가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합천호에서 잡히는 빙어가 이 고장의 특산품이다
고개 정상에는 전국제일의 내륙호반으로 봉산면을 알리는 표시석 2개가 있다.
호반이란 합천호를 말함이다. 합천댐은 대병면에 있지만 합천호의 수면 대부분이 봉산면에 속한다.
오도산 자연휴양림 역시 봉산면이다. 마을에서는 ‘살태재’로 불리는 사리터재다.
장비를 점검하고 우측 임도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선답자들 일부는 우측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신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정통 산꾼이 편한 길을 갈 수야 없지 않은가?
우측 묘지를 치고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싸리터재에서 바라본 봉산면 권빈리의 모습권빈리의 유래는 서기1550년대 경에 함안조씨 수도(咸安趙氏 壽道)가 입촌
창동(入村創洞)하자 1580년대 경에 김해김씨 송강가음(金海金氏 松崗嘉音)이
來居하여 정착하였고 1780년대 旌善全氏永이 거창에서 하였고 그 후 각 성씨들이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大洞을 이루어 번창하게 살아왔다.
동명은 함안 조씨와 김해 김씨가 신기(新基)한 후 官職을 버리고 방랑하던 전주 이씨(全州李氏)한 분
(전설에 의하면 효령대군 후손 이라함)이 이곳을 지나치는 것을 보고 전착하여 같이 살자고 권하였다고
해서 勸賓이 되었는데 후에 빛날 빈(彬)자로 바꾸어 勸彬이 되었다. 동쪽은 『살태재』가 있어
묘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깨곡재 』와 도치골, 저어실곡 ,통시곡,굴바곡등 지명이 있다.
(합천군 봉산면 홈페이지 인용)
간벌을 한 다음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잡목이 있고 이른 아침이라그런지 손이 상당히 시럽다. 꽤나 뚜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말이다.
방치된 잡목사이로 이제 피기 시작한 생강나무꽃이 산꾼을 반긴다.
초반에 몸이 예열되지 않은 탓인지 상당히 힘이든다.어제밤에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부분이 초반부터 나타나는 느낌이다.
첫 봉우리르 치고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잡목을 뚫고 조금을
지나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지니 벌목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벌목지대를 지나간다. 지난구간 역산행하면서 어둠속에 지났던오도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오고 발밑에서 묘산면 팔심리가 보인다.
마을은 해발 400m이상되고 국도에서 꼬불꼬불한 길을 2km올라가면 널찍한 분지가
들을 이루고 서쪽산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어오는 문헌과 기록이 없고
구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수백년 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심산골 마을이라 해왔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중국명나라 원병 이여송 장군 휘하 병사중 지사 두사충 사병이라는
사람이 영남산세를 조사하면서 합천, 거창, 성주 일대를 돌다가 이곳에 명당이 있겠다고 보고
현재 팔심 주변 산골을 돌다가 여덟 번만에 팔심리 명당을 발견했다고 하여 팔심리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약 300년 전부터 남평문씨와 칠원윤씨가 살고 있으며 문호와 부를 유지하면서 조상을 숭배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충효의 마을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싸리터재에서 헤어진 포장도로를 만난다.포장도로를 내려섰다가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지난 오도산과 미녀봉이 보이고... 아무렇게나 넘어진 나무들 때문에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고 조그만 봉우리를우측으로 꺽어졌다가 다시 고도를 높혀가는데 잡목이 자꾸만 태클을 건다.
564봉(08:40)안부길을 걷다가 다시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 간다.
멋지게 생긴 소나무들이 보이고 이곳길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금북정맥의 빨래판 구간을 연상케 할만큼 조그만 오르막 내리막을 계속법보종찰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사의 화엄10찰중에 하나이며 성철 큰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사찰이며 불자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같은 곳이기도 한 가야산.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말년에 이곳 가야산에 은거하면 지냈던 그곳... 문득 저곳에 가고싶다.
요즘 범여는 자꾸만 出家라는 단어를 자꾸만 되내인다.
힘든 삶, 이제는 내려놓고 싶고 家長이라는 단어가 내 어깨를 짓눌러는 느낌이다.
현실 도피가 아닌 진정한 출가를 하고 싶건만 여건이 주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없는 來生에나 이루어질 꿈이련가?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래 출가는 내생으로 미루자.
다음 生엔 어영부영하는 衆이 아닌 똑바른 중노릇 함 해보기로 하고
가야산 해인사를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베낭을 멘다.
급하게 내려서니 빽빽한 소나무 숲이 나오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작은 마령재(09:55)다시 능선 안부를 걸어서 가는데 좌측으로 묘산면 성산리와 관기리가 보인다.
합천군 묘산면의 산그리메가야할 토곡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512.3봉(10:10) 512.3봉 3등삼각점(△합천 309 1981 재설) 내리막길에 낙엽이 발목까지 찰 정도로 많고 건기라서 그런지 먼지가 많이나니고개에서 다시 치고 오른다. 암릉사이로 생강나무꽃이 피기 시작한다.
합천군의 행정 구역은 1읍, 16면, 192법정리, 368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983.47㎢로 경남 전체의 9.4%이며 이것은 경남의 최고면적이자 서울의 1.6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인구는 2010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총 23,896세대 50,608명이다. 인구 최고점은 195,943명이었다.
읍·면 |
한자 |
세대 |
인구 |
면적 |
행정 지도 |
---|---|---|---|---|---|
합천읍 | 陜川邑 | 4,672 | 11,821 | 53.04 | |
봉산면 | 鳳山面 | 878 | 1,736 | 80.60 | |
묘산면 | 妙山面 | 979 | 1,984 | 50.02 | |
가야면 | 伽倻面 | 2,201 | 6,340 | 104.99 | |
야로면 | 冶爐面 | 1,352 | 2,974 | 47.91 | |
율곡면 | 栗谷面 | 1,329 | 3,228 | 72.30 | |
초계면 | 草溪面 | 1,474 | 3,160 | 23.03 | |
쌍책면 | 雙冊面 | 836 | 1,843 | 39.62 | |
덕곡면 | 德谷面 | 552 | 1,141 | 26.61 | |
청덕면 | 靑德面 | 1,066 | 2,015 | 57.50 | |
적중면 | 赤中面 | 940 | 2,023 | 23.91 | |
대양면 | 大陽面 | 954 | 2,232 | 57.12 | |
쌍백면 | 雙栢面 | 1,107 | 2,062 | 63.30 | |
삼가면 | 三嘉面 | 1,983 | 4,412 | 60.57 | |
가회면 | 佳會面 | 1,000 | 2,011 | 70.93 | |
대병면 | 大幷面 | 940 | 2,717 | 63.2 | |
용주면 | 龍洲面 | 2,800 | 89.29 | ||
합천군 | 陜川郡 | 23,812 | 53,381 | 983.47 |
합천군은 경상남도 서북부의 산간내륙 지대로, 경상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창녕군,의령군과 서쪽으로는 거창군, 산청군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경북 고령군, 성주군에 접하고 있다.
동부를 제외하고는 높고 험한 산지가 중첩하며, 동부는 낙동강이 스쳐 흐르고 있다.미숭산, 두무산 남쪽 군계의 자굴산, 미타산 등의 준봉이 중첩기립하여 제각기 정기를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크고 작은 수많은 지맥이 북부에서 동남으로 향하여 경사는 완만하나
높고 낮은 산맥이 첩첩으로 이어져 들판은 협소하다.
합천의 주요 수계 중 낙동강의 지류로서 본군 관내를 관류하는 직할하천 황강은 거창군 덕유산에서 발원, 여러 계수를강의 흐름에 따라 행정지역과 생활권이 분할되어 있는 곳이 많으며 강폭은 넓으나 수심은 얕은 편이다
합천군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남명 조식선생이 삼가출신이다.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명장이었던 죽죽장군과 고려 태조
왕건의 후궁이었던 후대량원부인이 있으며 전두환 전대통령도 이곳 출신이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등로에서 바라본 마령재의 모습마령재의 이곳저곳을 살핀 다음에 도로를 가로질러 절개지로 오른다.
이곳 역시 마사토 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절개지로 오르다가
군벙커가 있는 양지바른 곳에서 커피한잔과 빵 한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1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갑자기 잠이 밀려오는데 여기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면 오늘 목적지까지 가기도 힘이들고 거기다가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급한 마음이 앞서기에 서둘러 길을 나선다.
만개하기 시작하는 생강나무가 외로운 산꾼을 반긴다. 험한 길을 치고 오르니 우측 임도와 만나고 묘지로 통하는 편한 임도길이 나온다. 헬기장 능선 아래에 있는 묘지까지 편안한 임도길로 향한다. 미끄러운 길을 올라서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426.2봉(10:53)관기마을은 이조 중종때 양주목사를 지낸 남평문씨 문계창 공이 입촌하였고
문종때 밀양박씨 박영공이 이주하였다 하나 마을 형성 내럭은 알 수 없으며,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이라 하여 집관(館) 터기(基)자를 써 관기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양심정(養心亭) : 남평문씨 목사공 문계창(文繼昌)공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
모신재(慕愼齋) : 군위방씨 숭녕대부 방우선(方禹宣)공을 추모하기위한 재실
통천사(通天寺) : 1981년 관기 새마에 신축하여 대처승이 관리 운영하고 있다.
암릉사이에 끼여있는 힘든 나무를 바라보니 어쩌면느낌에 동병상련인가... 측은지심이 든다.
450봉(10:58)
정상에 바위가 있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나있는 뚜렷한 길을 버리고
좌측의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야만 한다. 까딱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 곳이다.
한참을 내려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길은 잘 보이지 않으나 희미한 능선에 나무들만 무성하다.
기맥, 지맥길을 걸으면서 터득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걸어간다.
희미한 옛길(11:10)
이곳은 묘산면 관기리와 합천읍 외곡리를 잇는 고개로 사람들의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고 낙엽만 수북히 쌓여있는 길을 가로 지른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다.
고개를 치고 오르니 오래전에 난 산불로 인해 불탄 나무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갑자기 부시럭하는 소리에 깜짝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는데
앞에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랫마을 관기리에 사시는 분인데
산에 올라왔다고 하면서 왜 혼자서 위험하게 산에 다니냐고 하면서
많은 걱정을 한다... 어디서 왔냐고 하기에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서울에 좋은 산 나두고 여기 뭐하러 왔냐고 하는데 이럴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잡목을 헤치고 나서니 다시 소나무숲이 나온다
본격적인 토곡산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오늘 처음으로 힘든 구간을 만난다.
힘든 능선을 치고 오르니 산에 왠 복분자 나무들이 자꾸만 베낭을 잡아 당긴다.
스틱으로 겨우 치고 나가니는데 자꾸만 시간이 지체만 되어가고...
능선 하나를 치고 오르니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가야할 토곡산이 왜이리 높아 보이는지?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니 우측에 멋진 암릉이 보이고...
다시 옛날 무덤을 만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인 합천읍 쪽은
벌목을 하고 새로운 수목으로 식목을 한탓에 조망은 시원하다.
내곡마을은 만대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합천읍 관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600여년전인 고려 말엽 합천이씨 10세손인 원경(李元慶)공이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까지 거의 합천이씨 단일 성씨로 살아왔다.
예전에는 상곡 또는 상상곡이라고 하였다. 마을에는 도지정문화재 자료 제 128호인 청금정(淸襟亭)과
충현사(忠賢祠)가 있으며 조선시대 팔정여(八旌閭)를 하사받아 소사 들목에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잠을 못 잔 탓인지 참으로 힘이든다.
꾸역꾸역 한참을 오른 다음에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분기점에 오른다.
토곡산 갈림봉(11:53)
좌측으로 가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02봉이 나오고 우측으로 토곡산
가는 길인데 너무 힘들어서 지맥길도 아닌 602봉은 포기하고 능선 바위에
걸터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분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토곡산으로 향한다.
갈림봉에서 10분정도를 걸으니 토곡산 정상이 나온다.
토곡산((吐谷山:644m:12:09)
경남 합천군 합천읍과 묘산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하고 큰 바위가 2개 있다.
토곡산이란 이름은 가야문화의 영향으로 산의 계곡등에서 그릇을 만들었던 곳으로 옹기터가 많다는 의미에서 유래됐단다
만대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묘산면과 고령군 쌍림면의 모습
이곳은 6가야중에서 대가야가 있었던 고령의 지역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가야란 명칭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고령지방에 존재한 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記〉에는 가라(加羅)라 나오기도 하며, 구체적으로 반파국(伴跛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시조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되었다는 것과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시조탄생설화가 나오는 정도이다. 대가야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은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력이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후반경이었다고 보고 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된 이후, 이들 세력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흔히 후기가야연맹이라 부른다. 이후 대가야는 6세기에 삼국 관계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으나 562년(진흥왕 23) 결국 신라에 완전 복속되고 말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인용
가야할 만대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합천시내와 황강이 어렴풋이 보인다.
토곡산을 내려와 계속해서 고도를 낮춰가면서 동쪽 능선을 타고 가는데
좌측의 고령군 쌍림면 너머로 가야산 능선이 계속 동행을 한다.
이곳은 철쭉 군락지인지 철쭉 나무에다가 낙엽이 수북한 길을
걷는데 능선 끝자락에 있는 녹대산이 오라고 손짓하는 느낌이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너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잠을 못잔 탓인지 지금 컨디션은 영 말이 아니고 지맥길도 아니면서
왕복 1km를 갔다오기는 무리일것 같다. 그래 미안하다.
녹대산 갈림길(12:35)
이곳은 녹대산 갈림길이면서 여태껏 오늘 산행 들머리인 싸리터재에서
이곳까지 쭈욱 같이해 온 합천군 묘산면과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좌측으로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을 새로맞이하는 경남.북 도계봉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면서 만대산으로 향한다.
녹대산 분기봉에서 잠깐 내려오니 지도상의 매화재인데 쌍묘인 묘지가
한쪽만 이장을 했는지 한쪽묘를 그것도 반만 파 냈다.
영진5만 지도는 매화재의 위치를 녹대산 갈림봉에 적고 있고 국토지리정보원 25000은
녹대산갈림봉 아래의 둔덕에 적고있고 조금 나간 안부가 실질적인 고개인데 이곳이 매화재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이 고개위에 있는 이정표엔 매화재를 녹대산분기봉쪽으로 하고있다.
마구 파헤쳐진 묘지를 지나니 넓은 안부가 나오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가득하다
안부를 지나니 납작한 봉분의 묘지가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잔디가 없다.
매화재(12:40)
경남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와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를 넘는 고개로
옛날에는 고령에서 합천으로 가는 중요한 고개였다고 하는데 매화재의 유래는
옛날에 어떤 풍수가 이 고개는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상이라 한데서 연유하여
매화재로 불리우다가, 어음 변화로 매징이재라고도 부르고 있다고 한다.
만대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녹대산
만대산 오르는 길은 보기보다는 상당히 완만하다.
방화선 임도만큼이나 넓은 임도 그리고 주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나온 토곡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보이고...
등로옆 나무에 겨우사리가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곳은 남쪽이라 강원도만큼이나 춥지도 않을 뿐더러 해발이
700도 안되는 이곳에 춥고 높은 고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겨우사리라...
그것도 손을 닿을만큼 낮은곳에 말이다. 얼마되지는 않지만 재빨리 전리품으로 챙긴다.
드디어 능선 안부로 올라선다.
능선에는 평소에 등산객이 있는지 긴 의자 2개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만대산에서 사람구경을 못했다.
보상사를 향하는 이정표도 보이고...
만대산(萬代山.688m)
정상에는 2등 삼각점(합천 24)과 .작은 태양열판 통신기와 이정표. 만대산 주등산로를 만나서 앞 봉을 넘어서면
장의자 2개가있고 잠깐 급경사지를 오르면 뒤로 토곡산,오도산과 두무산,비계산이 보이고 좌측으론 미숭산과
낙동강 넘어의 산들이 보이고 만대산 넘어 546봉과 만대산정상의 통신기기와 이정표가 바로앞에 보인다.
만대산 정상 2등 삼각점(△ 합천 24 1988 복구)
만대산(萬代山:668.7m:12:55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와 경남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 그리고
묘산면 거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서 고령신씨(高寧申氏) 시조이자
신숙주(申叔舟) 의 선조인 신성룡의 시조비와 묘가 있으며 고령신씨가
이 산에 시조 묘를 쓰면서 만대(萬代)의 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만대산 동쪽으로는 노태산과 시리봉이 있고 북쪽으로는 녹대산이 있다.
만대산 북쪽 사면은 묘산천과 합류되는 작은 개천들의 발원지들이다.
묘산천은 부레마을에서 가야천과 합류하여 안림천을 형성하는 하천이다.
만대산은 합천과 고령의 경계에 있는데 합천보다는 고령 만대산으로 더 잘알려져 있다.
만대산은 명당으로 유명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등잔설’로 등잔 바로
아래에는 어둡고 멀리 불을 비추므로 고령신씨들은 정작 시조묘가 있는 산주리에는
한사람도 없다고 한다. 모두가 외지에 산다는 것이다. 이곳부터는 남쪽은 합천읍이
끝나고 행정구역이 합천군 율곡면으로 바뀌는 지역이다
만대산 정상에 오르니 합천읍내와 황강이 한 눈에 보이고 그너머 지리 능선이 보이며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가야산과 고령읍내 뒤의 미숭산이 그리고 가야의 철기문화가
융성했던 야로면도 아련히 보이고 뒤로는 오도산과 두무산도 보이고...
만대산에서 오늘 산행후 처음으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간단한 점심식사
만대산에서 조금 더 지나다가 조금 넓은 곳으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이래야 나홀로 산행땐 베낭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우유 하나와
빵, 그리고 훈제 계란에 과일 2개이다. 더군더나 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에 레인코트와 하산 후 갈아입을 옷 때문에 결국
먹는걸 줄이는 방법이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5분간의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조금씩 고도를 낮춰가니 안부 능선에는 멋진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670봉(13:27)
670봉에는 뭔지 알 수가 없는 원형 파이프가 하나 꽂혀있다.조금을 더 내려오니 잘 관리된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13:30)
546봉(13:38)
벤치 2개가 있는 봉우리를 조금 지나면서 바짝 신경을 써야하는 구간이다.
546봉 벤치를 지나니 직진으로 넓은 고속도로 같은 쌍림면 산촌리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급경사를 내려서는데 어찌나 경사가 심하던지
발톱이 아플지경이다. 급하게 한참을 내려온 다음에 다시 내려온 만큼 힘들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저 멀리 남쪽의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 시작한다.
혹시 비구름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힘들게 치고 오르니 노태산 표지판이 걸려있다.
노태산 (魯泰山 498m:13:55)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와 경남 합천군 율곡면 노양리에 걸쳐있는
산으로서 산세가 웅장하지만, 오래되어 경사가 완만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하는 지도에는 노태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고령군지에는 어태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노태산 북쪽 사면은 안림천 소지류의 발원지이며 이 지류는 쌍림면 신촌리 신촌숲 부근에서 안림천과 합류를 한다.
안림천의 지류인 소하천의 분수계에 위치하는 쌍림면 합가리는 중선 중기에
영남학파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金 宗直)이 무오사화에 연류된 뒤 그의
자손들이 은거하면 살던 곳이기도 하다.
한옥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경상북도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노태산 정상에서 직진하는 내리막 능선을 무시하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도록 한다.
내려가면 능선 분기점이 나오고 여기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능선을 무시하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도록 한다.
계속해서 빽빽한 소나무 숲을 걸어내려 간다.조금을 더 내려가면서
등로는 뚜렸하고 묘지 1기를 지나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다시 넘어진 소나무와 잡목들이 자꾸만 갈길 바뿐 산꾼에게 태클을 건다.
다시 묘지 1기를 만나는데 누가 그랬는지 이 지역 막걸리통과
사이다를 먹고 난 후에 나뭇가지에 거꾸로 메달아 놓아 보기가 좋질않다
다시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주위에는 진달래 봉오리가 봉긋봉곳 나오기 시작하고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자꾸만 주위가 어두지기 시작하며 비가 오기직전에 부는 바람이 분다.
서서히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데 비야 1시간만 참아주면 좋으련만..
340봉(14:38)
340봉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우측 아래에는 새로 생긴듯한
33번 신국도가 시원스레 뚫려있는데 차량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33번국도 터널위(14:50)
뒤로는 만대산과 노태산이 높게 올려다 보이고 노태산아래의 송전탑도 보이고 노태산에서
동으로 가지친 산줄기들이 보이며 길은 계속 간벌한 소나무 잔해들이 널부러져있으나 갈 만하고
301봉에서 좌로 꺽어서 가면 좌측으로 33번국도가 시원하게 올라와서 터널속으로 들어간다.
한적한 도로라서 통행하는 차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다시 307봉을 올라서는데 멧돼지(?)의 소행인지 봉분을 작살을 내놨다.
힘들게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올라가는데 다리는 천근만근... 능선에 올라서니
잡목이 307봉을 완전히 점령해버려 갈 길이 없다... 겨우 헤치고 307봉으로 올라선다.
지나온 노태산의 모습
307.4봉(15:00)
영진 5만지도는 307.4m를 월미재로 표기하고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은 308m로만 돼있다.
우측 소나무숲길로 들어 내려오면 망주석이 쓰러져있는묘지에서 우측으로 지릿재로 올라오는 도로가 보이고
옛 예비군 참호와 묘지들을 지나면 지릿재인데좌측(고령쪽)묘지로 내려오면좌측에 임도가 있는 지릿재다.
307.4봉 삼각점(△합천 307 1981 재설)
307.4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잡목사이에 피어있는 진달래
이 지역에는 멧돼지가 많은 모양이다.
집터같은 흔적이 보이고 조금을 더 내려오니 뭣하려는지 산을 완전히
까뭉개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마구 베어져 있어 길이 없다.
겨우 피해서 길을 내려오니 또다른 묘지가 나오면서 도로가 나온다
지릿재(220m:15:10)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서 에서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합천과 고령으로 연결되는 33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지리하도록 길고 험하여 지릿재또는 장현이라고 부른다.
이동하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로 여겨졌다. 지릿재는 고령과 합천을
오고가는 길목 중 가장 주요한 길목에 해당되며, 고대부터 주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대가야는 미숭산(美崇山)[734.3m] 주변의 야철지, 다락국[합천]의 철기 제작
집단을 바탕으로 철 교역권을 장악하고 주변 세력을 규합한 집단으로 다락국과의
철기 교역을 위한 교역로로서 지릿재를 이용하였다.
가야분지와 합천분지는 큰 산지에 의해 가로 막혀 있는데 지릿재·장승재·큰재·매화재와
같은 고개들이 두 지역을 오가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이곳은 진주와 사천 등지에서 대구·구미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특히 합천군 율곡면 와리에는 원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촌은 예로부터
합천과 고령을 오가는 길목으로 관원의 행차 시 지릿재를 넘어가기 전에 머물다가 가는
원(院)이 있었고, 행인이 쉬어가는 주점도 있어 이 지역의 왕래가 많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길목은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보안 및 치안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지릿재에 내려오니 옛 영화는 새로 생긴 도로에 빼앗겨 버리고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우측으로 율곡면 청년회에서
세운 표시석으로 돌아가 큰재로 향한다.
도로에서 넓은 공터를 지나서 절개지를 치고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나타나고 안부가 나오더니 지맥길을 새로 이장한듯한 묘지가 가로막고 있다.
경주김공과 합천이씨 부부묘가 새로 이장한듯 하다.멋지게 후손들이 묘지를 잘 단장했다마는 하필이면 지맥 가운데이다
묘지를 지나 270봉 오르는 길에 다시 광산김공 부부묘를 만나면서오늘 산행구간중에 마지막 구간인 270봉으로 올라간다.
270봉(15:22) 270봉에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니 페헬기장이 나타나고이곳은 아카시아나무가 완벽하게 헬기장을 점령하고 있다.
바로 우측으로 떨어지니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선영가는 길우측 도로에 내려서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모님을 모신 선영으로 가본다.
이곳에는 두 사람이 묘지에 있다가 나를보고 깜짝 놀란다.
고령군에서 나온 공무원들로 이동산불감시요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버스타는데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하니까
한참을 가야한다고 한다... 퇴근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 기왕이면 대민봉사 좀 하시죠 하니까
버스타는데 까지 태워준다. 처음에는 지릿재 주유소까지
태워 주려다가 쌍림면까지 6.5km의 거리를 태워주니 확실한
대민봉사를 한 셈이다. 그러면서 퇴근시간이 아니라 근무지 이탈이란다 ㅋㅋㅋ
그날 정말 고마웠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선영.큰재 내려서기 직전 우측에 전두환 전 대통령 부친의 묘소가 있다.
비문을 보니 묘를 쓴 시기도 단기 4311년이니 서기로 1978년인데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이다.
큰재(15:30)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와 경남 합천군 율곡면 기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고개 우측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선영이 자리를 잡고있다
세멘트도로가 북쪽 33번도로에서 올라와서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고묘지쪽으로 들어가는 길앞엔 묘소가는길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있는 세멘트도로다. 큰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선영가는 길
큰재에서 고령군 공무원분들 덕분에 당초 지릿재 주유소 버스 정류장까지
가기로 했던 것을 쌍림면소재지 정류장까지 왔다. 그날 너무 고마웠습니다.
쌍림면 삼거리 버스 정류장(16:05)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삼거리이곳은 거창에서 오는 버스와 합천에서 버스가 지나는 곳으로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으로 버스표를 끊으면서 버스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8분후면 합천에서 대구가는 버스가 온다고 한다. 배가 너무고파 얼른 캔맥주
하나를 마신 다음에 화장실에서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베낭을 메고 나오니 버스가 도착하여 얼른 대구가는 버스에 오른다.
고령 쌍림에서 대구가는 버스표버스에 올라 고령읍내를 거쳐서 대가야 고분군을 지나 옥포를 거친다음에
구마고속도로를 거친 다음에 대구 서부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대구 서부 버스 정류장(07:08)
거의 40여년만에 이곳을 와본다.
예전에 내 고향 의령 신반에서 서울을 가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지만
그 이후론 고향을 가기 위해서 이곳을 들릴 이유가 없었던 곳이다.
대구에서 최고 변두리 지역이던 이곳이 상전벽해가 된 느낌으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어 방향감각이 없다.
대구 지하철 성당역(서부주차장:17:16)이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역으로 향하는데 20여분만에
동대구역에 내려서 서울가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동대구 서울가는 고속버스 터미널(17:42)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예매하는데 지금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고
하여 얼른 끊고는 버스기사에게 사정하여 화장실에 들려 소변을 보고
버스에 오른다
서울가는 고속버스표어제 저녁에 동서울에서 거창가는 버스와 대구에서 서울가는 버스의 거리와
시간이 거의 비슷한데 요금은 대구가 20%이상이 비싸다.
경제적 논리로만 따진다면 손님도 적고 교통이 불편한 거창이 비싸야 하는데
대구가 20%가 비싼 이유... 정말 납득이 안된다.
지난번 금북정맥과 기맥길에 보령과 부여과 거리와 시간이 거의 같은데
교통량과 승객이 훨씬 많은 보령이 30% 가까이 비싼 이유와 같이...
국토부에서는 이런걸 참조하여 버스회사에 휘둘리지 말고 정확하게 평가하시길 바란다.
서울가는 고속버스선산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버스는 상주~청원간 도로를 버리고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충주와 이천을 거친 다음에 서울로 향한다.
충주를 지나 감곡I.C를 빠질 즈음에 드디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서울에 도착하니 21시 25분... 봄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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