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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황강(수도)지맥(終)

황강(수도)지맥 제6구간 - 큰재에서 황강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13. 6. 2.

☞산행일자:  2013년 6월 2일

☞산행날씨: 맑고 찌는듯한 무더위 

산행거리: 도상거리 24.8km / 8시간 50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큰재-364.5봉-시리봉-장승재-255봉-좌랑봉갈림길-기미재-솜등산-176.8봉

                율원재-다남산 분기봉-산불감시초소(236봉)-담배밭-파산동-부수봉갈림길-절골봉- 318봉-327봉-

               방화선 임도-필봉-성산-140봉-청덕교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율곡면,쌍책면, 덕곡면, 청덕면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오늘은 원래 도솔기맥구간에 평소에 갈 수 없는 첫구간인 비무장지대 안에서 부터시작하는 강원도 양구의

돌산령에서 대암산, 용늪을 거쳐서 광치령까지 오는 구간을가기로 하였다. 

이곳은 1년에 한번만 개방하고 인원도 군부대에서 제한하는 바람에 지난 3월에 신원조회 관계로 주민등록번호까지

제출한 상태인데 산행 3일전인 목요일저녁에 갑자기 해당부대에서 군부대 훈련관계와 요즘 남.북 대치상태라

산행이 不可라는통보를 해주는 바람에 졸지에 갈 곳이 없는 멘붕상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기분도 그런데 도솔지맥을 같이 가기로 했던 낡은모자님과 통화가 되어 잠실 새마을 시장에서소주 한잔을 하다가
수헌아우님이 동참을 하여 신나게 마시고 있는데 대구에 있는 친구한테전화가 온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대구에
놀러한번 오란다.‘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그래 토요일에 내려갈께 하고 약속을 하고 토욜 오후 3시에 베낭을메고
수도지맥 마지막 구간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경부고속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경부고속터미널(15:30)

집에서 출발하여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대구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는데  버스가 16시 25분 버스란다... 신문 한장을 사서 보다가  버스에 오른다.

서울에서 동대구가는 고속버스 티켓

대구가는 버스에 올라 초반에 잠에 떨어져  한시간 반가량을 잠에 잠에 빠진다.

차는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선산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대구로 향하는데 차량이 그리 밀리지도 않는데 시간은 의외로

지체되는데 친구는 빨리 안오는냐고 전화질이다... 이 넘아 버스가 가지 내가 가냐?

대구고속버스터미널(20:05)

대구지하철 동대구역(20;05)

고속버스에서 내려 대구 지하철을 타고 반열당역에서 2호선을 갈아 탄 다음에 감산역에서 내린다.

감산역앞  대구 서남시장(21:00)

친구가 사는 집근처인 서남시장 앞에서 친구를 만난다.

1년만에 만난 초딩이 친구, 나이 60이 다 되어 가는데도

늘 만나면 반갑고 그리운 친구. 이 친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다.

대구에 살면서도 1주일에  한.두번씩은 꼭 통화를 한다

시장안 횟집에서 소주2병을 나눠 마시면서 밤 늦도록 이런얘기, 저런얘기를 하고

다시 자기 집으로 가서 한 참을 얘기하다가 보니 자정이 넘어서서 잠자리에 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친구가 손수 차려준 추어탕에다가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다음에

친구가 직접 운전하여 오늘의 들머리인 큰재까지 태워준다.

큰재(250m:06:40)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와 경남 합천군 율곡면 와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고개 우측에는 전두환 前 대통령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

전두환 前 대통령 선영

이곳에 처음온 친구와 전 대통령의 선영을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큰재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큰재에서 아쉬운 작별을 나눈다.

 

전 前대통령의 부친 묘소 아래에는 본인이 나중에 이곳에 묫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명당자리로 전 前대통령의 부친이 옛날 율곡에서

고령장으로 갔다가 넘어오는 길에 동생과(전 대통령 삼촌) 이곳에 쉬면서

나중에 내가 죽거던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던 곳인데 명당자리란다.

 

그러나 역사의 부침이 있었던 곳이이기도 하다. YS가 부정축제 했다면

연희동쪽에 압박을 가해오자 골목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곳 선영에 왔다가

이곳 선친묘소에서 체포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백담사로 유배를 갔다. 

범여을 태워줘고  친구는 다시 대구로 돌아가고 난 장비를 점검한 다음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7:00)

오름길에는 싸리꽃이 이쁘게 피어있다.

산불감시초소 오르는 길에서 합천군 율곡면 와리쪽의 모습

와리(瓦里, 와촌:瓦村)는 본래 합천군 와면 지역으로서 마을에 개와(蓋瓦)를 굽는 요지(窯地)가

있어서 고을 안 각처에 개와(蓋瓦)를 공급했으므로 와촌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와동(上瓦洞), 지현동(芝峴洞), 원촌동(院村洞)을 병합, 와리(瓦里)라 하여

율곡면에 편입되었다. 지릿재를 사이에 두고, 경북 쌍림면과 접경하므로 경남과 경북의 경계

마을 이며, 대구에서 합천으로 집입하는 관문이다. 교통이 편리할 뿐더러 옛부터 원촌에는

합천읍에서 노양리(魯楊里) 가재를 넘어 묘산면(妙山面)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안림역(安林驛)

으로 넘나드는 길목으로 관원의 행차시 머물다가 가는 원(院)이 있 었고, 행인이 쉬어가는

주점이 있어 왕래가 많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와리는 율곡초등학교와 율곡파출소가 있어서

북율곡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이며, 경북과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어 보안.치 안의 요충지이다. 

산불감시초소(364m:07:15)

불알친구와 헤어져 등로에 오른지 15분만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364봉에 오르니 지난 구간인 만대산과 토곡산이 보이고 그 뒤로

두무산과 미녀봉이 아련히 보인다. 초소 안에는 이불이 깔려있고

주위에는 불을 피워서 뭘 해먹은 자국이 보인다.

우측으로 합천군 율곡면 와리쪽의 산은 운무가 끼여 신비스럽게 보인다.

지난구간인 만대산과 노태산도 아련히 보인다.

편안한 능선길을 오르 내리다가 암릉구간을 치고 오른다

시리봉(408m:07:20)

경북 고령군 쌍리면 합가리와 경남 합천군 율곡면 와리에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오늘 산행중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정상에는 넓고 평평한 암릉으로 되어 있으며

준.희님의 아크릴로 만든 표지판이 달려있다. 봉우리 서쪽은 지릿재와 큰재가 있다.

 

산꼭대기가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라 부른것이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큰재에는 큰크리트로 포장된 농로가 있고 전두환 前 대통령의 선영이 있고 지릿재는

합천과 고령을 잇는 33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나 지금은 재 아래로 터널이 뚫려있는

이제는 가끔씩 차량 한대 정도만 다닐뿐 잊혀진 고개가 되어 가고 있다.

시리봉에서 직진으로 고도차가 없는 길을 걸어가지만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길이라 잡목과 잡풀이 많으나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등로에는 순백색의 가막살나무 꽃이 외로운 산꾼을 응원하고...

조금을 지나가니 빽빽히 들어서 소나무 단지가 나오고 길은 희미하나 찾아갈만하다.

그런데 이곳도 개옻나무들이 하도많아 옻에 약한 범여는 오늘 산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다.

묘지를 이장한 다음에 비석을 그대로 방치한 곳을 지나는데 보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다시 고도를 낮추어 안부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보이고...

다시 소나무 군락지가 나오는데 길은 잘보이질 않고 간벌한 나무땜에 시간이 지체된다.

이곳은 개옻나무가 참으로 많다. 지난해 진양기맥과 팔공기맥을 하면서

고생한 기억 때문에 조심을 한다마는 아무래도 옻나무는 부담스럽다.

청미래라 불리는 망개나무도 보이고...

천적이 없는 관계로 산에서 개망나니 짓을 하는 멧돼지 똥도 자주 보인다.

조금을 더 진행하면 뚜렸한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지맥길은 좌측으로...

삼면봉 갈림길(07:35)

이곳은 바짝 신경을 써야하는 구간이다. 안부에서 길이 뚜렸한 삼면봉이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길이 희미하지만 좌측으로 90도 꺽어지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이곳 봉우리는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율곡면과 쌍책면의 경계인데 이곳부터 우측은

합천군 율곡면과 이별을 하고 쌍책면을 새로이 맞이한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등로는 뚜렸이 보이고 조금을 지나니 간벌한

소나무가 어지럽게 널려지고 길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가야할 장승재와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장승재 내려가는 길은

간벌한 소나무를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칡넝쿨과 개옻나무가 가득하여

내려가는 길이 아주 불편하기 그지없다.

장승재(213m:07:42)

경북 고령군 합가리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를 이어지는 고개로

최근 설치한듯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새로 생겼다.

영진지도에서 발행한 1/25,000의 지도에는 장등재로 표기가 되어있고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서는 장승재로 표기가 되어있다.

 

재가 길어서 장등재인지 장승이 있어 장승재인지는 모르겠는데 국토지리원 지명설명엔
고개가 길게 뻗쳐 있음으로 진등재, 장등재라 칭한다고 설명하고있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합가리 하개실마을에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인 점필재(岾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그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使草)에

적은 넣은 일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자

1650년경 그의 5대손이 이곳으로 은거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점필재 종택과

함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촌으로 이곳은 한옥이 잘 정비되어 있어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관관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은 그의 외가인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追遠齋)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인 김숙자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255봉(07:50)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잡목만 우거졌고 소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이곳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 좌측 능선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길이없는 곳을 헤쳐나가니 잔디가 없는 묘지가 나오고... 

청순한 외대으아리꽃도 자주 만나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나온다.

가야할 300봉이 보인다.

269봉(08:05)

좌랑봉 갈림길(08:10)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1km 정도 거리에 있는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봉우리이며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300봉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경북대학병원

대간 종주대에서 걸어논 시그널의 문구가 참으로 맘에든다.

‘아직 만나지못한 내 그리움 찾으러’... 나도 그리움 찾으러 다니는데...ㅋㅋㅋ

300봉에서 편안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소나무길을 조금 더 진행하니 瑞興金公과 八溪鄭氏의 부부 합장묘가 나오고...

또다른 陜川李氏 부인묘를 지나는데 이곳은 유난히

묘지들이 한결같이 지맥길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있다.

합장묘이면 보통은 위에 아버지 쓰고 밑에 어머니를 쓰는데 자세히

이 비문을 보니 합장묘가 아니고 여자만 여기있는 것이고
남편은 다른곳에 있고 그 위치와 좌향과 그아들 이름이 적혀있고

그 6세손 아무개가 단기 4323(1990년)에 이비를 세웠단다.

다시 소나무 숲길을 지나는데 개옻나무들이 즐비하니 자꾸만 겁이난다.

풀독에 유난히 난 나는 개옻나무에도 옻이 오르니...

등로에는 백선꽃을 자주 만난다.

300봉(08:30)

이곳에 삼각점이 있다는 선답자의 산행기 땜에 주위를 수없이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꿀풀이라 불리는 보라색 하고초가 수줍게 피어있다.

무명 묘지에 피어있는 들떡쑥의 모습 

너릿골산(08:45)

영진지도에는 이곳을 너릿골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정확한 자료는 없다.

능선에 올라서니 예전에 산성터인지 집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돌담같은 곳이 보이는데 이 지역 자료에는 그런 자료가 없다.

255봉에서 내려오니 가선대부를 지내신 全公의 묘지가 나오고...

 

가선대부(嘉善大夫)란 조선시대에 '종이품'을 '가선대부'라고 하는 품계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반드시 벼슬을 하지 않았드라도 일정 연령이 된 노인들에겐

위계를 내렸는데, 80세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90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100세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의 위계를 내렸던 것이다.

물론 실제의 벼슬은 아니고 , 품계만 주는 일종의 명예직인데 이를 '공명첩(空名帖)'이라고 하였다.

10m 정도를 내려오니 위에 것과 똑같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똑같은 분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아래에는 통훈행현감을 지내신 합천이공의 비석이 서있는데

한결같이 후손들이 돌보질 않았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안부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우측의 조그만 웅덩이에는 비단개구리 수백마리가 우글거린다

능선에 올라서니 Y자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우측에 들어서니 이곳에 재선충이 심한지 소나무를 잘라서

비닐로 쒸어 훈증을 한곳을 여러번 만나다.

처사밀성박씨의 묘지가 나타나는데 오래된 묘지가 경상도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봉분으로 되어있다.

밀성박공의 묘지를 지나니 무명묘지가 나오고 이윽고

또다른 묘지군이 나오는데...

무명묘지를 지나니 또다시 묘지 6기가 나란히 나오는데 맨 위에는

쌍봉이 나오고 나머지 4기는 1기씩 나란히 있는데 김녕김씨 가족묘인듯 하다.

김녕김씨 가족묘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넓은 임도에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니 묘지를 지난다.

이곳은 유독 묘지들이 지맥길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최근에 이장한듯한 김녕김씨 묘지 역시 지맥길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다시 안부로 떨어졌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능선에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王陵만큼 큰 묘지가 나오고..

묘지를 따라서 능선으로 내려가니...

좌측으로는 경북 고령군 환경처리장이 보이고 차량소리가 들린다

기미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지맥길을 엄청나게 절개하여 우회를 해야한다.

기미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야할 길은 산딸기와 칡넝쿨로 인해 지맥길은 그리 녹록치는 않다.

드디어 기미재로 내려서고 간이휴게소가 있는데 휴게소 뒤의

아래에는 절골이 보이고 상신저수지가 시원스럽다

기미재(144m:09:30)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쌍책리의 경계에 위치하며,

연결하는 고개로 지방도 907호선의 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 도로는 고령군 고령읍에서

 떡곡재를 지나 쌍림면 안림리-신곡리-합천군 쌍책면 상신리를 이어준다.

고령읍에서 합천군 합천읍 방향으로는 지릿재를 이용하는 것이 더 가까우나,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쌍책면을 왕래하는 데는 기미재를 이용하는 것이 더 가까우므로 두 지역을 왕래하는 교통로로 이용된다.

기미재를 통과하는데 세 군데의 돌무덤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3개의 돌을 던져서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기미재를 기점으로 솜등산-노구산-듬말리-유산삼거리를 잇는 등산로가 발달되어 있어,

기미재의 고갯마루에는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간이 휴게소가 있다.

또한 기미재 부근에는 1995년에 설치된 고령군 환경위생사업소가 자리하고 있다.

기미재의 또다른 이름으로 박곡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미재 합천군 방면

이곳 매점에서 간식을 사먹으려고 베낭의 무게를 최소한 줄이며 먹거리 가져온 것은

건조한 빵 2개와 두유2개, 캔맥주 하나에 스포츠 음료 하나와 물 1.5L밖에 없는데

이곳의 매점은 문을 닫아 버렸다... 참으로 난감하다. 하는 수없이 가져온 건조한

빵 하나와  두유 하나를 먹으면서 10분정도를 휴식을 취하는데 하도 파리가 득실거려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기미재 휴게소옆 공터에 설치된 2등 수준점

기미재에서 합천쪽으로 100여m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인공수로를 건너니 山自分水嶺을 위배하는 건 아니겠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의 옆사면길이 나오고 직선으로 치고 오르니

좌측의 기미재 절개지가 아슬아슬하게 보이고 절개지 옆에는 강양이씨(江陽) 묘가 있고
바로 뒤엔 광주(光州)이씨 묘가 있는데 급경사로 치고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진다

작은꽃 외대으아리가 보이고...

여기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길은 거의 보이지 않고 칡넝쿨과 잡풀과 개옻나무 등이 즐비하여 걸을수가 없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솜등산(270.5m:10:20)

경북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와 경도 합천군 쌍책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주위에는

잡목과 잡풀로 우거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데 산꾼 대선배이신 준.희님이

걸어논 표지판이 이곳이 솜등산임을 알려준다. 솜등산에 대한 유래는 그 어디에도

찾을수가 없어서 준.희님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봤지만 그 분도 지도를 가지고

표지판을 달고 하기에 당신도 그 유래는 자세히 모른다고 하신다.

당신은 부산에 거주한다고 하시면서 부산에 오실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한다.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이긴 하지만 기맥, 지맥길을 다니면서 표지판으로만

만나지만 기.지맥 산꾼들에겐 정말 은인같으신 분이다.

 

솜등산은 동쪽으로 노구산[324.7m], 서쪽으로 시리봉[408m]·노태산(魯泰山)[498m]·만대산(萬代山)[688.7m]과

연결되며, 이들 산지를 연결하는 산등성이의 북쪽 사면은 안림천의 남쪽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솜등산의 북쪽에는 안산[247m]이 위치하며 만산[267m]-안산-솜등산-좌랑봉[306m]을 잇는 산등성이는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에 있는 천박실개울의 분수계를 이룬다. 이 천박실개울은 고령군 쌍림면 소재지에서

안림천과 합류하는 안림천의 한 지류이다. (모바일 향토문화대전 인용)

솜등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등로에는 사람들이 자주 않았는지 귀한 엄나물이 다 시어 버렸다.

뱀딸기를 따서 입에다 갖다넣고...

갈수록 길은 보이질 않고...

유천령 갈림봉(272m:10:45)

이곳에서 좌측으로 고령군과 경계에 있는 유천령, 노구산, 소학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으로 이곳은 경남.북 도계 능선으로 이곳부터는 경북과

이별을 하고 완전히 경남 합천군으로 접어든다.

합천군 덕곡면 율원리에 있는 재밀못 뒤로는 고령군 쌍림면과 덕곡면

율원리 경계에 있는 노구산이 재밀저수지를 굽어보고 있다.

으아리꽃

햇볕이 강렬하다. 목은 바짝 타오르는데 기미재 매점만 믿고

식수를 적게 가져온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물 먹는걸 최대한 줄인다.

묘지옆에 있는 으아리꽃만이 외로운 산꾼 범여를 위로한다.

유천봉 갈림길에서 조금을 더 지나니 묘지 3기가 나오는데

김해김씨 가족묘이다. 특이한 것은 제단을 스텐레스 스틸로 만들어 놨다.

스텐레스 제단으로 만든 묘지

221봉 갈림길(10:50)

다시 안부가 나오고 조금을 지나니 다시 묘지군 나온다.

묘지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저 멀리 다남산(多南山)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묘지를 내려서서 넓은 임도를 걸어서 내려간다

陜川李公의 부부 합장묘가 나오고 넓은 임도 좌측에 삼각점을 만난다.

176.8봉 삼각점(△창녕453 1981 재설:11:10)

이곳에서 직진으로 가는 4륜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서 능선을 타고 율원재로 향한다.

최근에 조성한듯한 묘지 아래의 도로를 따라서 넓은 임도를 내려가니 율원재가 나온다.

율원재 삼거리 내려서기 직전 좌측에는 仁同張氏의 崇祖堂이 있다.

율원재(栗院峙:11:30)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와 덕곡면 율원리를 잇는 고개로

1번군도가 있고 저멀리 다남산줄기가 높게 보인다.
좌측(동)은 덕곡면 우측은 쌍책면으로 1034번도로가 좌우로 넘고 있고 ‘내고향 덕곡’ 이라쓴 표지석이 있다. 

 

고개 이름은 합천군 덕곡면 율원리의 마을 이름을 따와서 지은 모양이다율원리를  밤무지라고도 부르는데, 율원리는 밤머리인 율지리와 함께 밤나무가 많고이곳에서 생산된 밤을 저장하는 큰 창고가 있어 밤무지라고 불렀다고 한다.율원리는 율원마을 1개의 행정리로 형성되어 있으며, 장(張),나(羅),안(安)씨가 많이 살고있고마을에는 수정 나씨의 재실인 덕원정(德源亭)이 있다고 한다.

 

합천군  덕곡면은 조선시대에 낙동강변의 포구마을로

수로 교통의 주축으로 합천 서부의 경제 중심지였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때는 덕곡지역까지 북한군의 남침을 받았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육로교통이 급격히 발달되어 빈포구로 변하자

각처와의 교류도 단절되어 내륙의 오지마을로 쇠락해졌다

 

덕곡면은 오광대의 발상지로

전설에 따르면 350여년전 대호수때 큰 나무궤짝 하나가 이 곳으로 떠내려 와서 마을 사람들이 건져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많은 가면과 ″영노전 초권″이라고 하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당시 마을에는 전염병과 재앙이 그치지 않으므로 좋다는 방법을 다 해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나 어떤 사람의 말대로 탈을 쓰고 그 책에 쓰여져 있는 놀음을 하여 보았더니 이상하게도 재앙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탈을 쓰고 연극을 해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오광대 가면극은 산대가면극이 점차 연극으로 발전되어 갔던 시기에 낙동강안에 있어서 물자의 집중지였던 요로인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밤마을)에 전국 각지에서 여러 가지 흥행단이 흘러 들어온 가운데초계(草溪/현 합천군 초계면)를 근거지로 한 일파가 형성되어 그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탈놀음으로서 특히 그 인근 지방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각지에 탈놀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며,그러므로 이 탈 놀음은 밤마리 발상지로 되었던 것이다. 이 탈놀음이 오광대라고 불리어지게 된 것은 이 놀음의 첫 과장(科場)이 다섯 광대로서 시작되므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위키백과 인용)

 

율원 삼거리에서 1번군도를 따라 청덕면 운봉리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서 약 1.5km를 따라서 걸어가야 하는데 오늘은 꽤나

더운 날씨라 아스팔트에서 내뿜는 열기에 얼굴이 익는 느낌이다. 

도로 좌측 율원리 뒤로는 소학산이 보인다.

경남 합천군 덕곡면 본곡리에 있는 소학산(489.1m)은 학이둥지를 짓고 앉아 있는 모양의 산이라 소학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덕곡면 표석과 장승,도로 이정표와 소공원이 있다.

합천과 쌍책면 쪽으로 가면 옛 가야시대 합천에 있었던 다라왕국의

유적지인 옥전리 고분군이 있다는 팻말이 보인다.

다라국의 위치도 : 출처 enjoyjap.egloos.com

옥전고분 과 다다리의 위치도 : 출처 enjoyjap.egloos.com

 

다라국(多羅國)의 성립(成立)은 서기 400년 전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남정(南征)이 불러일으킨 김해(金海)지역의 격심(激甚)한 정치ㆍ사회적인 충격(衝激)의

여파(餘波)로 이 지역 주민의 일부가 합천옥전(陜川玉田)으로 옮겨왔다.

고분의 규모뿐만 아니라 갑옷과 투구를 비롯한 무기, 말갖춤, 장신구 등 부장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이 시기에 <다라국(多羅國)>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다라국(多羅國)의 성장과 발전을 살펴보면 후기가야(後期伽倻)를 대표하는

대가야연맹체(大伽倻聯盟体)의 일원이었던 다라국(多羅國)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는 바와같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임나부흥회의(任那復興會議)에

참석하는 등 당당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제국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것은 옥전(玉田)고분군에서 나온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각종 철제품(鐵製品)과

옥(玉)ㆍ유리제품(琉璃製品)에서 증명(證明)되고 있다.

다라국(多羅國)의 대외교류를 살펴보면 다라국(多羅國)은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 출토(出土)유물이 다양한 지역과 연계(連繫)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웃한가야제국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또 바다 건너 중국 남조, 왜(倭)와도 활발한 교류(交流)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洛東江)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그들이 제작한 철제품(鐵製品)이나 각종 옥제품(玉製品)으로 타지역과교역하여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였다.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에서는 고리자루큰칼 등 각종 무기, 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말갖춤과 다양한 철제품들이 발견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망치와 집게 등의 단야구(鍛冶具)가

 출토되어 이러한 철기들을 직접 이곳에서 생산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옥을 다듬던 숫돌들도 발견되어 이곳에서 직접 구슬이 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적 326호로 지정된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은 황강(黃江)변 야산(野山)의 정상부(頂上部)에

위치하여 고총고분(古塚古墳) 27기를 비롯하여 고분의 총수는 약 1,000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 유적은 1985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5차에 걸쳐 경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發掘調査)된

고분은 모두 146기인데,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 갑옷과 투구, 각종 무가, 말갖춤,

귀걸이 등 무려 2,500여점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안동사범 11회 동기회 카페 :에브노말님 자료 인용

1번 군도를 따라 계속해서 길을 걸어간다. 이 도로가 수도지맥 마루금이란다.

우측 능선에는 소나무 2그루가 보이는데 선답자의 산행기에 236봉이란다.

도로를 따라 걷는데 열기는 가득하고 바람한 점이 없어 참으로 힘이든다.

다남산 분기봉(11:55)

이 도로가 다남산 줄기와 갈라지는 삼면봉이다.

합천군 덕곡면, 쌍책면, 청덕면의 경계의 봉우리라는데 이 봉우리를

1번 군도가 지나가는 도로가 되어 버렸으니 봉우리의 개념이 없어졌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다남산이 나오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면 235봉이다.

이곳이 수도지맥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곳이다.

황강과 낙동강 그리고 미곡천 합수점 모습

몇년전 이 지맥을 답사하시고 수도지맥이라 칭하신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님.

그 분은 일제때 지도,지형을 토대로 성산을 거쳐 청덕교 앞으로  내려서는

산줄기가 맞다고 생각했다가 후답자들이 이의를 제기해 다남산을 거쳐 구슬고개로

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셨다. 문제의 미곡천은 이제 인공 제방으로 황강으로 흘러 들고있다.

각자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의 지형으로는 구슬고개로 떨어져야 맞다고 본다.

여기서 수도지맥의 끝을 성산쪽인 청덕교앞 말정마을쪽으로 볼것이냐?
아니면 다남산에서 내려간 구슬고개앞으로 볼 것이냐?는 각자의 견해에 따라 쪼금은 다를수도 있겠다.
큰틀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보는 격인데 두지점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700여m이고
성산줄기와 다남산줄기는 삼면봉에서 거리가 각각 9735m와 9343m로 비슷하다.

문제는 두 산줄기 사이에 흐르는 대곡천의 물이 바로 낙동강으로 들아가느냐 아니면 황강으로 흘러드느냐인데
영진 5만지도는 구슬고개남쪽에 미곡제방앞의 대곡천물이 구슬고개 남쪽에서 동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를 하고있다.
그러면 대곡천물은 낙동강본류로 들어가니 지금의 성산줄기가 수도지맥의 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도엔 지금은 퇴적물로 갈대밭이 된 건너편에 뒷감나루터가 있는데 옛날엔 지금보다는 더 안쪽으로 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꾼들이 이곳에서 236봉으로 가서 성산 - 말정마을 앞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타고 있다.

나 역시 정확한 확신이 서질 않아서 선답자들이 많이 간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희미한 능선길로 접어드니 내 친구가 좋아하는 엉컹퀴가 산꾼을 반긴다.

늘 반가운 시그널

길이 보이지 않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힘들게 지맥길을 이어간다

힘들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도로에서 바라보이던 236봉이 나온다.

236봉(12:10)

산 정상에는 소나무 2그루가 있고 준희님의 표지기가 산꾼을 반갑게 맞이한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를 했는지 보이질

않고 주위에 쓰레기만 어지럽게 널려있고 파리떼만 우글거린다.

지난구간인 만대산과 노태산이 아련히 보이고...

236봉에서 바라본 부수봉과 절골봉의 모습

2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다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남산(多南山)은 합천군 덕곡면에 있는 산으로 옛전설에 의하면 이산에 와서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얻었다 하여 다남산이라 칭하였다고도 한고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있는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5시간을 산행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거기다가 어제 저녁에 마신 술과

12시경에 잠을 늦게 잔대다가 기미재 매점만 믿고 먹을것이 챙기지 않은탓에

제대로 먹지 않은탓에 상당히 피곤하다. 마지막 남은 빵하나와 두유를 마시고

땀에 젖은 옷과 모자를 벗어 바람에 말리면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길을 나선다.

236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황토길 임도가 나오고 다시 묘지가 나오면서

농장으로 연결되는 콘크리트 농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일부 산꾼들이 수도지맥길이라고 하는 다남산이 보이고 합천군 청덕면 운봉리도 보인다.

서낭당고개

묘지 아래로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는데 지도상에 표기된 서낭당고개이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쌍책면 덕봉리로 이어지는 길인데 길은 거의 보이지 않고

좌측 포장도로로 떨어지면 파산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다.

이곳에서 길이 뚜렷한 곳을 버리고 우측 숲속으로 접어들어 지맥길을 이어간다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서니 산딸기와 칡넝쿨, 돼지풀들이 뒤엉켜 있어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산딸기들이 많이있어 주린배를 채우느라

정신없이 딸기를 따서 입으로 집어넣는 모습이 내가봐도 우습기만 하다.

칡넝쿨과 산딸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잡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길을 만들어 간다.

지나온 능선과 다남산 분기봉이 보인다. 

잡목지대를 겨우 헤쳐나와 능선으로 빠져나오니  담배밭인듯 검은 비닐로 덮혀있고

이곳이 지도상으로 파산동이란 곳이다. 갑자기 노루 한마리가 도망을 간다

조금을 지나니 좌측으로 묵밭이 나오는데 농사를 짓지 않은지가

오래됐는지 밭에는 개망초가 완벽하게 점령하여 버렸다.

개망초가 점령한 밭너머로는 절골봉이 보이고...

쌍책면쪽의 산그리메가 보이는데 어디가 언딘지 구분이 안된다.

바로 아래가 합천군 쌍책면 백정동 마을이 뺴꼼히 보인다.

백정동 마을은180여년전에 큰 잣나무가 있었던 곳이라 백정동이라 하였는데

신백정동 마을이 생긴후 부터 구백정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넓은 공터가 있는 곳으로 오르니 소나무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고

이곳은 산불이 났는지 나무에 산불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능선을 타고 좌측으로 내려서니 잠시후에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난다.

절고개(12:50)

도로를 내려서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3~4분 정도를 걸어간다.

이곳이 지도상으로 절고개라고 부르는 곳이다.

절고개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농장이 있고 농가 한채가 있는데

개쉬끼 4마리가 홀로가는 산꾼을 보곤  잡아 먹을듯이 짖어댄다.

그리고 전기 철조망을 설치해놔서 살벌하기만 하다.

참으로 세상! 갈수록 팍팍해지니...

콘크리트 도로를 올라섰다가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등로는 뚜렸하다.

어제 저녁에 친구와 마신 술때문인지 자꾸만 다리는 무거워지고

힘이 들면서 오르막엔 走力이 떨어지면서 힘이들고 배는 고프고

주위에 산딸기를 따서 계속 입에 넣으면서 길을 걷는다.

오르막에 오르니 또 잡풀이 산꾼을 괴롭힌다.

긴 팔을 입었는데도 개옻 때문인지 풀독 때문인지 몰라도

피부가 빨개지면서 너무 가려워 베낭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꺼내서 뿌리고 나니 조금 시원한 느낌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호젓한 지맥길을 걸으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절골봉이 나타난다.

이곳은 온 천지가 잡목과 잡풀인데 아직 먹을만한 고사리가 지천이다.

절골봉(13:15)

햋볕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오다보니 너무 지친다.

산이 이렇게 더우니 서울은 얼마나 더울까.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한다.

오늘 마지막 남은 식량이다. 점심 대용으로 가져온 토마토와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 물은 최대한 절약을 한다. 물이라고 이젠 달랑 300ml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이곳은 중간 탈출로가 없어 죽으나 사나 가야한다.

우측으로는 지맥길에서 약간 떨어진 부수봉이 보인다.

좋은 컨디션이면 부수봉을 가련마는 최악의 컨디션에다가

버스 시간이 간당간당하여 모든걸 포기하고 다시 청덕교로 향한다.

 

부수봉(富樹峰.333m) 경남 합천군 쌍책면에 있는 봉우리로

330여년전에 수목이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 제일

큰 부자가 이 숲을 소유하고 관리하였다 하여 이 산을 부수봉이라 하였다

좌측으로는 다남산과 소학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多南山은 산 줄기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데서 유래됐다고도하고
이 산에 와서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얻었다 하여 다남산이라 칭하기도 한다하며
소학산(489.1m)은 학이둥지를 짓고 앉아 있는 모양의 산이라 소학산이라 부른단다.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합천군 초계면과 적중면의 산그리메가 시야에 들어오고...

능선 안부를 계속 걸어가는데 최근에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거의 보이질

않고  칡넝쿨같은 잡풀이 지맥길을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어서 엄청 힘든다.

318봉 삼각점(△창녕 329 2002 재설)

우측으로 저 멀리 황강이 어렴풋이 보이면서 본격적인 황강 수역으로 접어든다.

지맥 능선을 지나는 감천(甘川)유역 일부와 황강(黃江)의 북쪽 유역

그리고  회천(會川)의 남쪽 유역으로 가르면서 드디어 지맥길의

마지막 구간으로 향해 달려간다.

황강은 거창군 북상면 남덕유산 월성계곡에 있는  삿갓샘에서 발원하여

합천군 청덕면 미곡리 말정마을 앞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며

감천은 김천시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유서깊은 도시 김천을 관통하여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 서쪽으로 흘러든다.

 

회천은 가야산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대가천(大伽川)과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소가천(小伽川)이 고령읍 본관리에서 합류하여 금천(錦川)이

된 다음에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고령읍내를 관류하는 안림천(安林川)과

다시 합수하여 회천(모듬내)이 된다.

 

물줄기를 모아 큰 지류를 형성한다고 하여 회천(會川)이란 이름을 얻은

모듬내(會川)는 합천군 덕곡면 밤마리(栗旨)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든다.

이 3개의 낙동강 지류는 영남 지역을 관통하면서 영남문화를 꽃피웠고

가야국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안부 능선은 방화선 임도처럼 길은 넓으나  잡풀들이 자꾸만 태클을 걸면서 괴롭힌다.

방화선같은 넓은 임도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고...

큰까치수염

넓은 임도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뾰족솟은 봉우리가 나와서 필봉인 줄

알았는데 가서보니 필봉이 아니고 무명봉이었다. 섣불리 예단하면 착각하기 쉽다.

합천군 청덕면 운봉리의 전경

327봉(13:55)

영진 5만지도는 이곳을 필봉으로 적고 있으나 국토지리원 25000은 이곳은 327m만

표기됐고 조금 아래에 있는 함박산 갈림봉인 261m봉을 필봉(必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길찾기에  바짝 신경을 써야할 구간인 것 같다.

우측에 보이는 무명봉이 뾰족하여 필봉처럼 보이고 길이 아주 뚜렸하지만

지맥길은 숲으로 꽉차여 있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지맥길은 좌측 능선을 치고 나오면 그때서야 길이 보인다

거친 숲을 헤치며 내려가니 방화선 임도가 나오고...

넓은 방화선 임도를 걸어올라 가면서 내가 지나온 능선의 모습

필봉(必峰:261m:14:20)

경남 합천군 청덕면 소례리 정산마을 뒤편에 자리한 봉우리이다.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지명 유래에 의하면 봉우리가 붓처럼 생겼다 하여

필봉(筆峰)이라 붙여졌다고 하나, 합천군 행정지도에는 必峰으로 표기돼 있다.

 

필봉이란 산 이름은 대체적으로 산봉우리가 붓끝처럼 뾰족하다고 하여

筆峰으로 표기를 하는데 이곳 봉우리는 합천군 홈페이지에 보면 必峰으로

표기를 하였는데 조금 오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등로 옆에 조그만 몽돌에다가 누군가 ‘필봉 326’이라 메직으로 써놓았는데

이곳의 고도는 261m이다. 우측으로는 柳氏의 묘지들이 자리를 잡고있다.

 

이곳이 함박산가는 갈림봉이기도 하다

필봉에서 조금 지나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

좌측에 조금만 웅덩이가 나오면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자꾸만 다리가 무겁다.

다시 넓은 방화선 도로가 나오고...

무명묘지를 지나니 288봉이 나타난다.

288봉(15:00)

성산가는 길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더위에 지친 산꾼을 반긴다.

성산 정상의 삼각점(△ 창녕450 1983 재설)

성산(250.7m:15:15)

경남 합천군 청덕면 성태리와 삼학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수도지맥길에 산 이름이 기록되어 것에 마지막 산이다.

산 정상에는 4등 삼각점(△ 창녕450 1983 재설)이 있고 준.희님이

걸어둔 ‘수도지맥 성산 250.7m .준.희’ 표지판이 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그리고 참봉을 지낸 파평윤씨 묘지가 있다.

 

정상 아래에는 성터의 흔적같은 돌담들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야시대의

성터이며 이곳에서 가까운 옥전고분군과 함께 다라국(옛 대가야와 인접한 작은 나라) 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한 곳이란다.

힘든 일정이 거의가 마무리되어 가는  느낌이라 내 이제 또다시

이 능선을 올 일이 있겠는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인증샷을 남긴다.

파평윤씨 치우묘 좌측 아래에 있는 이 묘지에서 지맥의 마지막모습과 황강의 끝부분이 보인다.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너덜길 같은 곳이 나온다.

 

합천에 있었던 작은 가야왕국 다라.

수도지맥은 수도산 어름에 있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거창, 김천, 성주포함)와

황강 북쪽의 합천의 다라가야(다라가야는 대가야에 통합되었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함)

절골봉에서 오른쪽으로 살피면 다라리 지역을 볼 수 있으며 이 다라리가 다라가야의

중심지였으며 가야가 망한 뒤에는 현 합천읍으로 중심지가 바뀜)를 관통하는 산줄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산줄기가 흘러내리는 이곳에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흠뻑 배여있는 곳이다.

 

이 지맥에 흘러내리는 곳에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수도지맥에서 살짝 비켜 나있는 가야산에 법보종찰 해인사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교구본사중에 가장 크고 성철 큰스님을 비롯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수도지맥 마지막 능선에서 바라본 합천군 청덕면 중적포(中赤布) 마을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정도 떨어진 마을이며, 24번국도가 통과하고

마을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은 창녕군 이방면이다.

 

적포(赤布)는  마을 남쪽에 낙동강 베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남비 또는 난비라

불렀으며 옛날포구에 드나들던 배들이  돛의 색깔이 줅은 색이라 하여  적포라 하였다.

 

중적포마을은 지금 부터 약400년전 조선시대 현종때 달성서씨 병조참의 문서공이

이곳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옛날에 낙동강을 따라 운반되는 화물과 육로로

운반되는 화물의 집산지가 되었고 5일 시장이 개설되어 멀리 거창 등의 지방 에서 목화 등

육지의 생산물을 가져와서 소금을 사 가지고 돌아가는 포구였다.

수도지맥의 마지막 구간인 합천군 청덕면을 지나가는 황강(黃江) 이 보인다.

 

합천은 황강의 땅이다. 북쪽에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과 청량사를 안은 매화산 따위 기운찬

산악이 버티고 있지만 역사와 문화, 사람살이로 보자면 합천은 황강의 땅이라 하는 편이 조금은 더 옳다.
먼저 황강은 이웃 고을 거창군에서 발원하지만 합천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강다운 모습을 갖춘다.

 합천읍 남서쪽에 있는 합천댐도 1988년 들어서기는 했지만 합천을 합천이게 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게다가 가까운 대병면의 악견산·금성산·허굴산 같은 산들이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도 명산으로

대접받는 까닭이 다 황강에 이어져 있어 골짜기와 들판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합천을 일러 '황강의 땅'이라 할 수는 없다.

합천 사람의 삶들이 황강과 깊숙이 연관돼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황강은 알려진대로 강바닥이 둘레보다 높은 천정천(天井川)이었다.

그래서 강변 이쪽저쪽에 기름진 논이 생겨났고 이는 사람들이 부쳐 먹고 사는 바탕이 됐다.

또 정양늪이나 박실늪·연당지 따위 습지도 많다. 알려진대로 습지는 사람을 비롯한 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 풍성하게 머금는다.


더욱이 황강은 합천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룬다. 넓이가 983.47㎢로 서울(605.25㎢)의 1.6배에

이르는 합천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삼가군과 초계군 둘을 아우르면서 오늘날의 합천군이 됐다.
지금 합천읍 일대에 해당되는 옛날 합천에 이르려면, 북쪽은 산악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물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동쪽 또는 서쪽에서 황강을 따라 들어오는 경로 말고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합천은 신라와 가야 사이(500년대)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600년대)에서,

그리고 통일 신라 또는 고려와 후백제 사이(900년대)에서 군사 요충지 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합천읍 들머리 해발 100m도 안 되는 취적산 마루에 산성 자취가 있고 기슭에 642년 대야성

(합천의 옛 이름)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성주 김품석이 죽고 나서도 계속 싸우다 전사한

화랑 죽죽(竹竹)을 기리는 빗돌이 있는 까닭이다.

140봉(15:35)

청덕교를 내려서기 직전에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서니 황강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성태리가 보인다. 그리고 청덕교의 황강너머로는 소미산이 보인다.

도로로 내려서기 직전에 F.R.P 물탱크 2개가 나오고 이윽고 도로로 내려선다.

합천땅을 적시는 황강(黃江)

경상남도 거창군·합천군을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의 지류이며, 길이는 119㎞이다.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남덕유산(南德裕山 : 1,507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며,

합천호(陜川湖)를 이루었다가 심하게 곡류하여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주요지류로는 위천(渭川)·대천(大川)·가천(加川)·가야천(伽倻川) 등이 있으며, 유역에는 산간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하도의 경사가 급하고 토사의 퇴적이 많아서 하천 하류에서는 천정천(天井川)이 나타난다.

유역 내에서는 쌀·맥류·잡곡·사과·누에고치·완초(莞草) 등이 생산된다.

해인사·가야산국립공원·덕유산국립공원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강의 중상류유역을 가로질러 지난다.

마지막 구간을 정말 힘들게 끝낸다. 도로의 좌측에는 말정부락을

바라보면서 도로로 내려서면서 수도지맥의 대미를 장식한다.

꽤나 긴거리인 지맥길 하나를 접수를 이 희열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힘이들었나...

말정마을은 말이 쉬어가는 마정(馬亭)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덕교 삼거리(15:50)

이곳에서 수도지맥 105km를 마무리하는 의식을 진행하고 청덕교 아래에서

손에 물을 적신다. 물은 그리 깨끗하지 않아 수건을 물에 적셔 몸을 딲고

옷을 갈아 입고는 청덕교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이곳에서 범여의 고향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지만 고향에 들리지 않고

그냥 서울로 향해야겠다.

 

故鄕!

고향이란 부모님 계실때 고향이지... 부모님 돌아가시니 고향에 대한

애정이 반감되는 느낌이다.형제간도 자녀들 출가하기전에는 살갑게

지냈지만 자녀들 출가하면 자기아들, 자기손자가 우선이지 형제간은

한다리 건너 뛰니 자꾸만 멀어진다... 범여에겐 고향이 잊혀진 옛생각일 뿐이다

황강(수도)지맥의 마지막 인증샷

이곳 청덕교는 교통량이 시골 도로치고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서울에서 오면서 인터넷에서 조사한 내용으로는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창녕군 이방면에서 서울가는 마지막 차가 16시 20분이라 시간은 간당간당하다.

여차하면 완행버스를 타고 대구가서 서울가는 버스를 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믿져봐야 본전이라고 옷을 갈아입어 땀냄새를 나지 않겠다 싶어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히치를 시도하는데 지나가는 승합차가 단박에 세우면서 타라고 한다.

자기는 현풍으로 간다고 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는 이방에서 서울가는 차는 탈 수

없으니 현풍가면 서울가는 탈 수 있다고 하면서 현풍까지 태워 주겠다고 한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분인데 자기도 산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이곳은

산이 없는데 뭐하러 다니냐고 걱정을 한다... 기왕 태워주는 거 낙동강과 황강의

합수점에 좀 세워 달라고 하여 사진 한컷을 찍고 합천보를 지나서 이방과 구지를

거쳐서 현풍시외버스 터미널에 세워 준 후에 인사도 하기전에 가버리는 바람에

사진도 한 컷을 찍지도 못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 복받을깁니다.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히치에 맛을 들인 범여는 자꾸만 뻔돌이가 되어간다 ㅋㅋㅋ

낙동강과 황강의 합수점

청덕교에서 약 2km정도 떨어진 뒷강나루인데 山自分水嶺의 원칙을

따진다면 성산을 지나 청덕교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구슬고개를 거쳐

이곳 뒷강나루 앞 합수점이 맞을것 같은데...그건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고.

대구광역시 달서구 현풍시외버스 정류장(16:55)

현풍휴게소 도착하여 서울가는 17시 20분발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에 화장실가서

씻고 머리까지 감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나니 정말 개운하여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이곳 현풍은 할매곰탕으로 유명한 곳이라 곰탕  한그릇에다 소주 생각이 간절하지만

시간이 10분밖에 남질 않아 곰탕을 포기하고 빵하나에 우유 하나 마신 다음에 버스가

도착하여 버스에 몸을 싣는다.

현풍에서 서울가는 버스표

서울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 다음에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에서 잠을 깬다.

금강휴게소에 도착하니 엄청나게 배가 고파서 유부우동을 한그릇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 20시 40분에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수확한 전리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