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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황강(수도)지맥(終)

황강(수도)지맥 제4구간 - 싸리터재에서 큰재까지 (역산행)

by 범여(梵如) 2013. 3. 4.

 

☞산행일자:  2013년 3월 3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약22km + 6.2km(어프로치) / 16시간소요

☞참석인원: 백두사랑 산악회와 함께

☞산행코스: 싸리터재-547.8봉-550봉-684봉-693봉-956봉-996봉-1,068봉

                 미녀봉 갈림길-오도산-891봉-두산지음재-헬기장-통시바위-두무산

                 너덜길-아델코스트C.C(게스트하우스)-88고속도로(합천터널)-산제치

                 616.2봉-나무골 갈림길-너덜지대-비계산-구름다리

                 조망바위-1,095봉-뒤뜰재-헬기장-1,094봉-노르재-마장재-석문바위

                 의상봉-우두산-죽전 삼거리-작은 가야산-매화산 분기점-큰재-고불암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가북면, 가조면 / 합천군 가야면, 묘산면, 봉산면

 

요즘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어디가 꽉 막힌듯한 내 마음을 어디서 풀어야 할지?

다가오는 5일이 개구리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 날씨 풀린다는 날인 

경칩(驚蟄)이건만 뭐하나 제대로 풀리는게 없으니...마치 요즘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박 대통령의 심정과 같은 느낌일까

정치인들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혀없고 자기들을 뽑아준 民草들은 眼中에도 없는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사사건건 발목만 잡으니...

 

경기는 최악이고 물가는 줄줄이 오르는데 북쪽의 젊은 지도자란 자는핵무기란 장난감(?)을 가지고

장난치고 주변의 강대국들은  호시탐탐우리를 노리는데 여의도의 저 멍청이들은 국민의 녹으로 살면서 하는 일없이

맨날 저짓거리만 하니 나만큼이나 답답할것 같은 느낌에 측은지심이 든다.

 

오랫만에 무박 산행을 나서는데 오늘 거리가 만만찮아 조금은 부담이되지만 1년 산행계획중에 4.5월에

부득히 빠질일이 생겨서 무리하게오늘 산행을 나선다.

평소보다 서울에서 1시간 먼저 서울서 출발하는데오늘낮에 부평에 있는 동료산꾼 젠틀맨님의 사위를 보는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오후 2시에 강남에서 지인의 결혼식 참석후에 사무실에들려 잔무를 마무리 하느라고 휴식을 전혀 취하지

못하고 산행을나서는 탓에 저녁부터 눈꺼풀이 무겁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도시락을 준비한 다음에 시간이 촉박하여 아들이 양재역까지 차를 태워준 바람에

간신히 합천가는 버스에 오른다차에 올라서 1년만에 만난 동료산꾼들과 조우를 하고 잠에 빠진 사이에

새벽 2시 30분에 버스는 오늘 들머리인 합천군 봉산면에 도착한다. 

 

 

내가 산을 오른 것은 우연이었을지라

산이 나를 품은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 안았을 것이다.

어디 하찮은 나뿐이랴.

거센 눈보라를 거느리는 일이며,

                벼랑 끝 꽃 한송이를 피우는 일이 그러했으리.   / 박두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싸리터재(깨꼭재  303.8m:02:30)

경남 합천군 봉산면과 묘산면의 경계로 이 지역 사람들은 깨꼭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묘산면 반포리에서에서 고개를 넘으면 봉산면 권빈리이며 권빈리 사람들은 이 재를 권빈재로  부른다.

합천군 묘산면에서 봉산면 권빈리를 거쳐 거창으로 가는 24 26번 국도가 지난다.

전국제일의 내륙호반 봉산면이라 적힌 표석과 있다

난 컴컴할 땐 사진을 잘 안찍는데 동료산꾼 젠틀맨이 사진을 찍어준다.

오늘 낮에 딸래미 결혼식인데 저녁에 베낭을 메고 나서니...

참으로 못말리는 양반이다... 산에 맛이가도 완전히 간것 같다. ㅋㅋㅋ

난 젠틀맨님에 비하면 완전히 鳥足之血이라 명함도 못 내밀겠다

젠틀맨님! 사위보심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2주후에 나홀로 이곳을 와야하기에 주위를 유심히 살핀다.

이곳 저곳 지형지물을 확인을 하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헤드렌턴을 켜고 야심한 새벽3시에 산행을 시작하는데

난 장비 점검도 하지 않았는데 조급증 걸린 선두그룹은

벌써 저만큼 가버린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맑은 하늘위에

떠있는 계사년 정월 스무이틀날의 하현달만이 외로운 산꾼을 반긴다.

초반부터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게 빡세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아직까지 몸에 예열이 덜 된 탓인지 심장이 터질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데

이런 고통을 알면서도 매주 산행을 나서는 나를 내가봐도 우습기만 하다.

사리터재에서 오도산까지는 고도를 800까지 올려야만 하는 곳이다.

 

초반에 길이 없는 곳을 치고 오르니 임도가 나타나고 편안한 길로 고도를

높이는데 등로 한 가운데에 生前에도 금실이 좋았던지 묘지 2기가

나란히 있다. 깊이 잠든 망자가 깰까봐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또다른 安山金公의 묘지가 나온다.

힘든 오름길을 폭풍이 몰아치듯 빡세게 한번 몰아친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지는 안부길이 나타나 걷는데 약간의 숨을 몰아쉬고

다시 한번 치고 오르니 어둠속에 삼각점이 나타난다.

548봉(03:20)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싸리터재에서 20분을 치고 오르니 어둠속에

548봉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4등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선두를 따라가려고 무던히도 애를쓰며 가는데

조그만 돌무덤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 길을 어둠속에 맹목적으로

걸어 가는데 내가 이런 산행을 가장 싫어하면서 따라나서는게 아이러니이다.

996봉(04:40)

어둠속에 넓은 공터가 나오고 경주에 있는 왕릉만큼이나

큰 묘지가 하나가 나오는데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이곳이 지도상에 996봉으로 표시가 되어있는 곳이지만 어둠속에 확인을 못한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넓은 고개같은 곳이 나오다가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간다.

암릉(04:55)

힘들게 올라가니 암릉이 나오고 가느다란 로프하나에 온몸을 의지한 채

암릉위로 올라서니 이곳은 엄청나게 추운 모양이다.

카메라 셧터를 누르려고 장갑을 벗으니 손이 빠져나갈 정도 시리다.

암릉위로 올라서니 데크목이 나타나고 도로가 보이는데 이곳은 기온이영하 10도는 되는것 같다.

그런데 전망대에는 비박족의 텐트하나가 보인다.

오도산 전망대 데크목의 비박족너무나 부럽기만 하다.

나도 언제 텐트하나 메고 비박을 다니고 싶다.

오도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거창읍내 야경

오도산 도로(05:00)

오도산 정상에 있는 KT중계소로 오르는 길로 향하는데 오늘은 산행준족인

공수 특전사 출신인 산과스키님과 동행을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미녀봉 갈림길

포장도로 좌측으로는 미녀봉과 수포대로향하는 이정표가 나오고 일반 등산객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오도산 KT 중계소미끄러운 도로를 따라서 10분 정도를 올라가니 우측으로는 이동통신 중계탑들이 웅웅

기계음을 울리면서 산꾼을 겁박하고이윽고 KT 오도산 중계소 정문이 나타나는데 KT는 산 정상을 차지하여

쥐꼬리만큼 양심이라도 있다면 정문 옆에라도 오도산 정상표지판이라도 세워줘야 하는건 아닌지...

그것도 기업의 사회적 의무도 다할터인데.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이 석채 KT 회장님 기업의 이윤 정말 중요하죠

그러나 산꾼들이 당신네 고객인데도 이런 명산을 홀대할 것이요? 

오도산 정상은 기지국 안쪽에 있다.

삼각점은 5만 지형도에는 이 봉우리에(1,120m)표시되어 있는 반면 2만5천 지형도에는 아래쪽

봉우리(1,067.7m)에 표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야심한 새벽에 확인을 할 수가 있어야지...

 

오도산(悟道山:1,134m:05:10)

경남 거창군 가조면과 합천군 묘산면, 봉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말단봉으로 정상에는KT 오도산 중계소가 정상을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는 바람에 접근이 어렵다.

 

오도(悟道)란 佛家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로 이곳을 오도산으로 부르게 된연유는 풍수지리의 大家이신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오도산 서남쪽에 있는 숙성산에서이 산을 바라보면서 산의 기운과 모습에 푹 빠져서

7일동안 꼬박 움직이지 않고 道를 깨친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표범이 잡힌곳(1962년)으로

유명한 곳으로1962년 오도산에서 포획된 이후 우리나라 야생에서 표범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수십년전 정상에 군시시설이

들어서면서 묘산면소재지에서 정상까지4.2km 구간의 차도를 내는 바람에 산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상태이다.

현재는 군사시설 대신에 KT 송신소가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오도산의 원래 이름은 '하늘의 촛불' 이라는 뜻의 천촉산(天燭山) 또는 까마귀 머리처럼 산꼭대기가 검다고 해서오두산(烏頭山)이라 불렀다. 그러던 것을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선생과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오도산 산하 계곡을 소요하면서 우리나라 유도(儒道)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유도는 우리의 道라는 뜻에서 오도산(吾道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불가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선시(禪詩)를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를 이른다.

기록상 오도송을 가장 먼저 남긴 이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807∼869) 선사다.

‘조당집’ 제5권 ‘운암화상장(雲岩和尙章)’에 따르면, 양개선사가 개울을 건너다가 깨달음을 얻고

 ‘과수도영(過水睹影)’이라는 게송을 남겼다고 한다.

“절대 그이를 좇아가지 말아야지 / 나와는 소원하여 멀어만 가네 /

 나 이제 혼자서 스스로 갈 수 있으니 / 곳곳에서 도랑물 만날 수 있다네 /

도랑물이 이제 바로 나인데도 / 나는 이제 도랑물이 아니라네 /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아야 / 바야흐로 여여와 맺어질 수 있다네.”

물속의 그림자가 진실한 여여(如如)의 자기가 아니므로 깨달음의 세계에서 바라본다면

자기 자신의 몸도 물속의 그림자와 다를 바 없다는 내용이다.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 은 남원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문득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아 쓴 게송도 유명하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 옛사람 일찍이 말했던가 / 이제 닭 우는 소리 듣고 /

 장부의 큰 일 능히 마쳤네 / 홀연히 본 고향을 깨달아 얻으니 /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수많은 보배와 같은 대장경도 / 원래 하나의 빈 종이로다.

정문에서 좌측 능선의 좁은길로 들어선다.

잠깐사이에 얼마나 추운지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거기다가 북사면으로 내려서는 급경사에는 눈이 완전히 빙판으로 변해있다.

오도산 정상에서 두산지음재까지 다시 고도 500이상을 급경사로 낮추는데

이곳은 엄청나게 춥고 잠깐 서있는 사이에 젖은 땀이 식어버려 추위가 엄습해온다.

거기다가 아이젠을 차고 미끄러운 북사면으로 내려서는데 몇번이고 넘어진다.

급경사를 내려온 다음에 다시 안부 능선을 1시간 정도 내려오니 두산 지음재가 나온다.

두산 지음재(06:10)

거창군 가조면과 합천군 묘산면을 잇는 고개로 어둠속에 희미한 길이 보인다.

묘산면 산제리쪽으로 뻗은 골짜기가 두산 지음골이라 붙인 지명같다.

산행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어둠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찹쌀모찌 2개와 두유 한팩으로 허기를 면한 사이에 조급증 심한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가버리는 지 헤드렌턴 불빛이 자꾸만 멀어진다.

 

묘산면은 고려시대에 심묘면으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심묘와 거을산으로 나누어졌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묘산면이 되었다고 한다. 심묘와 거을산 및 현내면의 라천,

묵촌 일부와 산어면의 청현동 일부를 병합하여 심묘와 거을산의 ‘묘’자와 ‘산’자를 따서

묘산면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쪽에는 합천읍이, 서쪽에는 거창군 가조면과 봉산면이, 남쪽에는 합천읍과 봉산면이,

북쪽에는 야로면과 가야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면의 서북쪽에는 오도산과

두무산이, 동쪽에는 만대산과 노태산이, 남쪽에는 마령산이, 면 중심부에는 화성산과 샛등산이 자리잡고 있다.

두산지음재에서 두무산 오름길은 입에 단내가 날만큼 급경사의 오르막이다.

정말 힘이든다. 근데 어쩌지 자꾸만 이런 고통에 희열을 느끼니 말이다.

점차 어둠이 걷히면서 서서히 주위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

수포대 갈림길(06:20)

수포대(水泡臺)는조선 성종때 성리학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과 더불어 평촌(坪村) 최숙량(崔淑 梁) 선생이 자연을 노래하며 거닐던 유서 깊은 명소이다.
뾰족한 오도산에서 솟아난 물은 깊숙한 산골짜기 산자락을 적시면서 크고 넓은 화강암반 수포대와
소(沼)를

만들고 그 위를 도란 거리며 흘러 넘치고 있다.


수포대를 품은 오도산은 자라와 관련된 오대산(鰲戴山)으로 부르던 산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옛 사람들이 기러기 포구에 자라처럼 우뚝 솟은 산이라 하였을까.

돌과 골짜기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소를 빚은 대학동을 옛날엔 홍강포(鴻江浦)라 불렀던 마을이다.
홍강포는 동양의 고전인 대학의 이름을 빌려 대학동으로,
오대산은 유교의 도를 이르는 말인 오도산(吾道山)으로 이름 바꾼 것이다

날이 밝아지면서 계사년 음력 정월 스무 이튿날 달은 이별을 준비하고...

산제리 갈림길(06:52)

산제리는 본래 합천군 거을산면의 지역으로서 오도산 밑이 되므로 산지미 또는 산제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야 등 일부를 병합하여 산제리라 해서 묘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소재지로부터 1km서쪽 오도산과 두무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김굉필 정여창선생이 가야면에 있는 소학당 건립을 의논하고 기념으로 나무를 심어

 마을 이름을 병수동이라 하였다는데 느티나무만 있고 나무 주위에는 마을이 없다.

지금은 느티나무 윗쪽에 윗산제 아랫쪽에 크게 형성된 마을이 아랫산제라고 하는데 정확한 사료가 없다

산제리 갈림길을 올라서니 평평한 안부가 나타나면서 여태껏 힘들게

올라온 고통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느낌이다, 편안한 안부능선을 따라

두무산으로 향하는데 합천호쪽에서 뜨는 해가 장관을 이룬다.

늘상 무박 산행을 하면서 만나는 일출이지만 늘 신선함을 준다.

신선(神仙)통시(06:57)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로 이곳을 신선통시라고  한다. 

두무산 신선님이  이  통시에서 합천군 묘산을  바라보면서  큰  일을  보시니 

바라보는 쪽 묘산에서는 신선님을 닮아 인물이 많이나고,

뒤로하는 거창군 가조에는 농토가  비옥하여 부자가 많이난다는 유래가 있다.

두무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미녀봉

일출(산과 스키님 사진 인용)

산제리 갈림길에서 두무산까지 약800m를 편하게

두무산 정상 직전에 만난 너덜길

두무산 정상은 수도지맥 능선에서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두무산 (斗霧山:1,046m:07:05)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도리와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1천m가 넘은 산이 10여개나 되고 산세가 험한 산군(山群)들이 운집해 있는 

 두무산(1,046m)은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정상 언저리에 항상 구름이 자욱하다 하여

 붙여진 구름 왕관을 눌러쓴 당당한 산세의 두무산은 남쪽으로 오도산(1,134m)과

 미녀봉(美女峯933m),숙성산(899m)과 합천호가 한폭의 수를 놓는 산이다.

이 지방에서는  듬산이라고  부른다.

산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건너편 비계산이 멋진 모습을 보이고

그 아래녘인 가조지역이 한가롭게만 보인다. 날이 밝으면서 지나온 오도산과 미녀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바로 앞에는 묘산면과 합천호가 보이며 산 아래는 골프장이 있다.

두무산 삼각점( 합천 303 1981 재설)

우리나라 山河에는 ‘두무’가 든 땅이름은 많다. ‘두무실’, ‘두무골’과 같은

 마을 이름이 있고, ‘두무개’처럼 고개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

‘두무’의 말밑은 ‘둥근’이란 뜻의 ‘둠’이다. 한라산이 둥글다고 ‘두무산’이란

 이름을 가졌고 지리산이 ‘두류산’으로 불리는 것 또한 둥근 모습에서 따온 말이다.

한자로 표기된 斗霧는 음을 나타낼 뿐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어이다.

두무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두무산에서 바라본 합천군 묘산면의 산그리메

다음구간에 걸어야 할 합천군의 산그리메와 조금전 어둠속에

지나온 오도산과  그너머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거창군 가조면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백두대간 능선이

정말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왜 백두대간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당겨본 오도산의 모습

3시간 후에 걸어야 할 비계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고...

두무산에서 20여분간 머물면서 주위의 멋진 仙景을 감상한 다음에

20여m 정도 되돌아와서 산제치로 향하는데 응달이라 그런지 낙엽

아래에 얼어있는 눈으로 인해 엄청나게 힘이든다. 이런 곳에서는

아이젠이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낙엽 아래에 있는 얼음으로 급경사의 북사면 내리막길에 상당히 미끄럽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상당히 긴 너덜길이 지친 산꾼을 기다린다.

두무산 북사면에 위치한 너덜길

두무산 너덜길(07:30)

두무산 북사면 급경사의 너덜길을 지나서 15분 정도를 내려오니 두릅밭이 나오고

이곳에서 선두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아침상을 펼친다.

나 역시 이곳에서 밥과 콩나물국에다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 한사발에

디저트로 사과 한쪽과 커피 한잔 마시고 서둘러 베낭을 멘다.

10분정도의 식사시간에 땀이 식은 탓인지 추위가 엄습해 오기에...

어둠속에 지나온  미녀봉이 산꾼을 유혹하려는지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산은 신성한 곳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드물게 현실의 도피처로, 폐쇄된 사회에서 억압받는 성적 행위의 표출구로,

 또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복의 장소로도 이용되어 왔다.

 

특히 기원의 장소로 팔공산의 갓바위나 인왕산의 선바위가 그렇듯이 곳곳에 널려 있는

선바위와 음석, 양석 등 산 의 일부 바위에는 성신(性神)숭배사상이 깃들 어져 왔다.

그러나 경남 거창군 가조면의 미녀봉(美女峯933m)처럼 산 전체가 하나의

여체를 닮아 성적 호기심을 자아내는 곳은 달리 없는 것 같다.

미녀의 은밀한 곳에서 솟아나는 양물 샘, 유방 밑에서 솟는 유방 샘,

목뒤에서 솟아나는 눈물샘이 있는가 하면 계곡 입구의 큰 정자나무(굴참나무)가

여자의 성기 부분을 가려준다는 것 하며. 마을 이름도 양기와 음기 마을이 있다.

한마디로 미녀봉에서는 자연의 신비스러움까지 느끼는 것은 물론 조물주의

 짓궂은 장난에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르게 된다 (펌글)

식사를 마친 다음에 두릅밭이 있는 길을 지나니 아델코스트 골프장

힐코스 2번홀이 나타나고  골프장을 바라보면서 우회길로 걸어간다.

골프장을 우회하면서 걷는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소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는데 이곳 아래로 88고속도로 합천터널이

이 아래를 통과하고 있어서 그런지 차량소리가 들린다.

비계산이 보이는 아델코스트 골프장에는 2팀 정도가 라운딩을

하고 있다. 이 추운데 무슨 재미로... 조심하슈 뒷땅치면 엘보나가요

산제치(山際峙:538.3m:08:45)

거창군 가조면과 합천군 가야면을 잇는 59번국도와  108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산제라는 이름은 두무산 너머 묘산면 산제리에서 따온 듯한데,

산 너머 마을 이름을 이 곳 고개에다 갖다붙인 이유를 알 수 없다.  

 

예전에 합천군 숭산면 지역으로서 옛성터가 있으므로 성터, 또는 성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재동,상두동,하두동을 병합하여 성기리라 하였다. 현재 성기리는 성터,나부골,하두,상두동,

점터 등 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성터 뒤에는 비계산(飛鷄山. 1136m)과 남에는 오도산(吾道山)이

있고 거창군 가조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골프장 아래로 국도보다도 못한 88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산제치 - 합천군 가야면쪽의 모습

우측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아델코스트 골프장 입구이다.

도로를 가로 질러서 급경사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는데 이곳에서도

범여는 숏다리의 비애를 느껴야만 할 정도로 힘이든다.

올라가서 보니 좌측으로 올라가는 편안한 능선길이 있더라.

안부로 올라서니  흥해 최공과 광산김씨 부부 합장묘가 나오고 이곳에서

뒤돌아 보니 어둠속 지나온 오도산과 그 앞에 미녀봉이 보인다.

미녀봉(美女峰:931m)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보면 머리카락을 늘어 뜨리고

반드시 누워 있는 모양의 이 산이 가조 미인봉이란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 담그고 단아한 이마, 오똑한 콧날과 벌린 입, 또렷한 턱과

목을 거쳐서 볼록 솟은 젓가슴 아래로 아기를 잉태한듯한 볼록한 배, 이런 모습은

봉우리들이 어울려 조물주가 만든 멋진 조각품같다.

 

이곳 미녀봉에 대한 2가지 전설이 있는데... 

아득한 옛날 바다였던 이곳 가조땅에 장군이 탄 나룻배가 표류하고 있었는데

옥상상제가 불쌍히 여겨 도력이 뛰어난 딸을 지상으로 보내 구하고자 했다.

세상으로 내려온 미인낭자를 본 장군은 첫 눈에 반하여 둘은 사랑을 하게 됐다.

그런 딸을 보고 옥황상제가 노하여 너희 둘은 영원히 산으로 화해 누워 있으라는

형벌을 내려 미녀산과 장군봉이 되엇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은 산 아래에 사는 예쁜 처녀가 위독한 어머니의 병을 고치고자

미녀봉에만 있다는 약초를 구하고자 미녀봉에 올랐다고 뱀에 물려 죽게되자

이를 가련히 여긴 산신령이 죽은 처녀의 모습으로 산을 만든것이 미녀봉이란다.

예전엔 이 산은 주위의 오도, 두무, 비계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숙성산과 연계해서 등산객들이 많이 찿는 곳이라고 한다.

미녀봉의 모습

616.2봉(08:53)

612.2봉 삼각점(△ 합천 406 1981 재설)

두무산에서 쳐다보는 비계산은 급경사에 엄청 힘이 들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하더니만 등로로 접어드니 편안 능선길에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넓은 공터가 지나면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좌측 도리 내려가는 길에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면서

5개월만에 만난 동료산꾼 산과스키, 붕어잡이님과 오늘 처음 보신분 (닉을 모름)

5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새로 오신분이 영광 법성포에서 가져온

50도짜리 술 한잔을 주는데 담백하고 혀끝에 감기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조금을 더 진행을 하니 비계산 오름길에 엄청나게 큰 너덜이 나와

상당히 긴장을 하였는데 다행히 옆 사면을 완만하게 올라서 비계산을 향한다.

너덜길에서 바라본 합천군 가야면의 모습

88고속도로가 아련히 보인다.

너덜길 옆 사면으로 나있는 등로를 따라 지맥길을 이어간다.

옆 사면 능선을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거창군 가조면이 보인다.

거창군 가조면의 모습

이곳의 유래를 보니 마치 내 고향 신반을 보는 느낌이다.

거창읍이 읍내라 크긴 하지만 인재들은 거창보다도 가조가 더 많고

단합이 더 잘된다고 하니 말이다. 내 고향 의령도 읍내 사람들 보다도

단합도 잘되고 개성이 강한게 마치 이곳 가조와 비슷한 느낌같다.

 

흔히들 서울 등지에서 '거창'이란 지명을 댈라치면 많은 이들이

먼저 비극적인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떠올리는데 의령 역시

1980년대 발생한 우순경의 의령총기난동사건을 가장 먼저 떠올리니...

 

 가조면은 온통 산뿐인 거창군에서 면단위로선 보기 드물게 넓고 평평한 땅을 갖고 있고

이 평평한 땅을 '닭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비계산(飛鷄山)과 가야산의 의상봉, 장군봉,

미녀봉 등 크고 작은 산들이 빙 둘러싸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가조’는 예로부터 "터가 좋다"고 소문난 곳으로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고자

마음 먹었던 곳” 중에 한 곳이었다고도 한다.

 

거창 출신이라고 알려진 이른바 ‘인물’중 가조 출신이 많다고 한다.

MB 정권시절에 경남지사를 지내다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낙마한 김태호,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현재 대기업급으로 성장한 휴맥스의 창업자인 변대규 회장과

 LG그룹 부회장을 지낸 변규칠씨 등이 이곳 가조 출신이란다.

 

녹색과 사선무늬로 표시된부분이 가조면입니다. 

 

 

가조면은 가북면과 더불어 거창군의 동부를 이루며, 합천군의 서북부와

맞닿고, 높은 산줄기에 둘러쌓인 큰 분지다. 가소라는 성읍국(부족국가라고도 함)이

 었다고 생각되며, 신라 시대에는 가소현(또는 가조라고도 함) 함음현이라 불렸다.

고려 시대에는 가소현ㆍ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시대 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조선조말까지 본면은 4개 면으로 나뉘었는데, 하가남면이 가조면의 동남부에 있어서,

 기동리ㆍ대초리ㆍ도곡리ㆍ평지리ㆍ왕대리ㆍ탄동리의 6개 리를 두었고, 상가남면을

북동부에 두고, 부산리ㆍ장항리ㆍ명지리ㆍ도산 서원리의 4개리가 있었으며, 가서면을

 가조면의 서쪽에다 두었는데, 동예리ㆍ원천리ㆍ평지리ㆍ안금리ㆍ상현리의 5개 리로 나누었고,

가동면을 본면의 가운데에 두어, 병산리ㆍ창동리ㆍ당산리ㆍ적마리ㆍ수월동리의 5개 리로 나누었다.

1914년 3월 동쪽 부분인 상가남면과 가동면을 합하여 가동면으로 서쪽 부분인 하가남면과

가서면을 합하여 가서면으로, 1928년 4월에 다시 가동ㆍ가서 두면을 합쳐 가조면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석강리ㆍ기리ㆍ대초리ㆍ동예리ㆍ장기리ㆍ사병리ㆍ마상리ㆍ수월리ㆍ일부리ㆍ도리의 10개 리로 나뉜다.

 

가조면:남하면(서) 가북면(북)과 경계를 이룹니다.

멋진 가조벌을 좌측에 두고 힘들게 암릉을 치고 올라서니 남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과 미녀봉, 박유봉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영취산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가야산군이

일망무제로 보인다. 그리고 날씨또한 너무 좋다.

석문(石門:10:10)

암릉에서 로프에 의지한 채 아래로 내려오니 석문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우회하여 다시 힘들게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이 높고 물이 맑아 빼어난 산수 풍광을 자랑하는 경남 거창(巨昌)

경상 우도의 문향으로 곳곳에 문화유산이 즐비하고,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전통 문화의 고장이다.

 특히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 3대 국립공원의 중심에 위치해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다.

이곳 능선에 서니 3개 국립공원이 한 눈에 들어오니 이곳은 그야말로 축복받은 곳이다.

좌측 가조쪽 능선은 천길 낭떠리지의 절벽으로 오금이 저려온다.

다시 편안 안부 능선을 올라서니...

도리 갈림길(10:28)

비계산(飛鷄山:1,125,7m:10:35 )

경남 거창군 가조면과 합천군 가야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원래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세가 마치 닭이 날개를 벌리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여 비계(飛鷄)산이라고 부르는데 돌·굴·바람·너덜이 많은 산으로 유명하다.

정상 부근에 암봉과 암벽이 많고, 정상의 남서쪽 아래에 바람굴[風穴]이라고 부르는 큰 동굴이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찾을수가 없었다.

 

비계산에는 비계포란형의 지형이 있어서 길지라고 했다.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었는데, 산맥을 끊어 닭이 날아가는 형국으로 만들어

비계산이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가조가 도읍으로 변신하기 위해 飛鷄山이 말 그대로 ‘날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조는 사방이 산으로 막힌데서 한 곳이 훤히 트여지면서 도읍지로써 손색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모습을 본 한 여인이 방정맞게도 “어 산이 날아 가네”라고 큰소리를 질렀다는데

이 소리를 들은 산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곳 가조땅에는 재상이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숭산비운산악회에 세운 비계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정상석 뒷면의 모습

동쪽으로 바라보니 가야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뾰족하게 솟은

남산제일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죽전 저수지가 보인다.

 

합천은 몰라도 누구나 다 아는 해인사, 그 맞은편에 위치한 남산제일봉(南山第一峯)은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한 산이다. 국립공원 내에는 가야산을 비롯해 두리봉, 깃대봉,

별유산, 단지봉, 매화산, 오봉산, 가산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산봉우리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남산제일봉은 가야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를 가졌다.

특히 봄의 진달래와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 가을의 단풍에 겨울이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설경이 기가 막혀 계절에 관계없이 늘 매력적이다.

산골짜기를 헤집고 흐르는 홍류동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가야산이 우뚝 솟았고,

그 남쪽에 솟은 남산제일봉을 가리켜 일부에서는 가야남산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남산제일봉을 매화산(954.1m)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매화산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5km에 위치한 산을 일컫는 게 정확하다. 불가에서는 천불산(千佛山)이라 이른다.

‘천 개의 불상이 산을 뒤덮고 있는 형상과 같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천 개의 불상과 같은

기암괴석의 바위군이 산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흡사 수석의 야외 전시장으로 착각할 정도다.

 이 산에는 해마다 오월 단옷날이면 해인사 스님들이 산정에 소금단지를 묻는다.

풍수지리적으로 해인사 남쪽에 있는 남산제일봉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정면대립한 해인사로

그 화기(火氣)가 날아들어 불이 자주 났다는 것. 남산 제일봉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소금을 담은

다섯 개의 항아리를 오방(五方)에 걸쳐 파묻고 있으며, 그 이후로 해인사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火)을 묻는다(埋)’는 뜻의 매화산(埋火山)이란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산자락에는 신라 말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긴 자취가 곳곳에 전설로 남아 있다.

해인사가 자리한 치인리마을도 고운의 이름인 치원에서 유래했다. 치인리 서편에 치인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그 끝자락에 선생이 말년에 초막을 지어 가족과 함께 기거했다고 전해지는 고운암(孤雲庵)이 있다.

농산정(籠山亭)은 후대 사람들이 고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은거했다는 홍류동천 계류를 끼고 세운 정자다.

 

비계산에서10분정도를 지나오니 또다른 능선이 나오고 근데 왠 비계산!

이곳에는 거창군에서 또다른 비계산 정상석을 세워놨다.

합천군과 거창군에서 각각 다른 봉우리에 똑같은 이름의 정상석을 세워놨다.

거창 비계산(?:10:45)

옛이름이 우두산 또는 소떰산으로 불리웠는데, 거창에서 동쪽으로 15km 지점에 있으며,

88고속도로의 거창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비계산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물은 가야천의 지류인 산천으로 흘러들고,

서쪽에서 발원하는 물은 가천의 지류인 고견천으로 흘러든다.

인증샷

구름다리(10:50)

가야할 능선 뒷쪽으로 백두대간의 영취산과 남덕유산, 향적봉이 보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어만 보이고...

구조목(11:00)

1,095봉(11:10)

지나온 비계산의 모습

거창 휴게소 갈림길

이곳을 자인봉이라고도 부르고 비계산 서봉이라고도 한다.

다시 내리막길을 만나서 얼음으로 변한 빙벽길과의 전쟁을 치른다.

아랫쪽은 천길 낭떠러지라서  그대로 황천길 갈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조심스럽게 한발자국을 움직이는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뒤들재(11:40)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넓은 평지가 나오고 이정표(←우두산 상봉 3.5km, 마장재 1.5km →비계산 1.3km

↓상수월 3.7km)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뒤들재를 지나서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주위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나고 이곳 북사면에도 완전

빙판길이라서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가야할 마장재가 보이고...

가조면 수월리의 모습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는 비계산에서 달이 떠서 비치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는데

수월리에 소재한 고만리 들녁은 땅이 기름지고 넓은 평야이다. 앞날에 조씨가 왕도를 정할 곳이라고도 하고,

고만리 숫못 밑에는 대궐뱀이 살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남쪽에 문계산, 서쪽에 박유산,북쪽에 금귀봉, 동쪽에는 가야산의 줄기인 비계산이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중심지를 이룬 고만리들은 가히 도읍을 꿈꿀 만한 지세이다.

 

고만리들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전설도 아주 흥미있는 것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유명한 도사가 나와서 가야산 부도를 두루 살피게 되었다.
고만리들에 이르러 주위를 관측하니 차후 500년 도읍터가 분명하였다.
시기가 난 중국 도사는 혈맥을 끊어 도읍을 방해했다.
고만리들 동편에 있는 가야산 아래에는 숭산 고을이 있었고, 숭산은 당시의 문화 · 교육의 중심 터전으로

소학당이 있었다. 도사는 소학당 · 대학당의 혈을 끊고 광성 마을 앞의 용구시 소의 물길을 끊었다.
소의 물이 마르자, 용은 승천을 못하고 이무기가 되었고 거북은 남해 바다로 갔다.
도사는 그에 그치지 않고 비계산에도 손을 댔다.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와 죽전리의 모습

비게산 북사면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서 상당히 미끄럽다.

원래 비계산에는 비계포란형의 지형이 있어서 길지라고 했다.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었는데, 산맥을 끊어 닭이 날아가는 형국으로 만들어 비계산이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고민리들을 둘러싼 지형의 지력이 쇠하여 도읍이 형성되지 못했다.
가산천 냇물을 둘러싼 방천의 길이가 너무 길어 만리방천이라고 부른다.
옛고사에 의하면 "한양 궁궐에서 영남 가야산하고 만리, 서만리, 외만리, 삼만리 가운데 만리방천을

구경하고 그 고장 나락 나무 구경가자."라는 풍설이 있었다고 한다

노르재(12:25)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넘어가는 고개로 노르재 아래의 대전 마을은

합천군 숭산면(지금은 가야면)의 지역으로 큰 밭이 있으므로 한밭,대전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령동(황령;노른재),남교동, 그 이후 한밭 이름을 따라서 인지 몰라도

1975년에 앞산을 개간하여 수만평의 큰 밭을 이루어 현재 약초,초지(草地)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재배하고 있다.

이 마을은 한밭을 중심으로 위로는 황령(노른재),아래로는 남교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었으며,

앞에는 높은 비계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뒤로는 죽전 저수지가 있다.

가야할 우두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장재( 12:30)

가조면 수월리에서 가야면 죽전리 노른재로 이어지는 고개로 참나무 두 그루가 있고

주위는 온통 억새밭이다. 우측에는 아주 푸르게 보이는 죽전저수지가 있다.

마장재에서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이 지역은 마사토 지역이라 바닥이 상당히 미끄럽다.

조그만 암릉을 넘어서니

조그만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서 산과스키님과 닉을 모르시는 분과 5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암릉이 있는 안부의 사면을 통과하면서 가니 고견사 주차장 가는 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고견사 주차장 내려가는 길인데 일반 등산객들이 주로 고견사에서

올라 오는지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이곳에서부터는 등산객을 많이 만난다. 

등로에서 바라본 가조면 수월리의 모습

본격적인 우두산 암릉구간으로 접어드는데 기암괴석이 멋있다.

설악산 공룡능선과 비교하는것과는 좀 무리이지만 영남 알프스에

있는 간월.신불공룡과는 거의 대등한 수준일 정도로 빼어남을 자랑한다.

이곳부터 암릉구간 산행이 시작되는데 일반 등산객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으나

그래도 고견사 주차장이 있는 수월리에서 오르내리는 등산객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조금은 짜증스러운게 등산객들이 MP3에 음악을 크게 틀어서

다니는게 상당히 거슬린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 듣고 싶으면

레시버를 끼고 혼자서 들은면 될터인데 그것도 민폐가 아닌지?

철구조물을 이용하여 암릉을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 바위 이름은 뭣인지?

지나온 비계산과 1,095봉 아래로 마장재가 보이고 능선의 암릉을 곡예하듯 지나온 곳이다

흔들바위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선바위(禪岩)을 바라보면서 기묘한 바위들이 서로 어우러져

별유천지라 칭할정도로 멋진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우측으로는 물이 너무 푸르러 녹조현상처럼 보이는 죽전저수지가 뚜렸히 보이고

저수지 뒷편으로는 매화산이라 불리는 가야산 남산제일봉이 멋진 자태를 뽐낸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고견사 계곡과 가조들판, 의상봉에서 장군봉, 지남산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의상대사가 수도 했다는 선바위

우두산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고...

능선 좌우로 너무나 멋진 바위들이 많다. 암릉구간을 지나니

다시 편안 안부 능선이  나타나는데 일반 등산객들이 40여명이 모여앉아 왁자지껄

하면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게 부럽기만 하다. 에공 나도 이제 저렇게 여유있게 다녀볼까...

넓은 공터가 나오고 좌측 내리막길은 고견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측 우두산 상봉쪽으로 향하다가 의상봉을 가기위해

좌측 사면길을 간다. 이곳에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을 내려간다.

우두산 갈림길(13:37)

우두산 안부에서 의상봉까지는 0.6km에 불과하지만 암릉구간이라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산행대장이 의상봉을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곳을

일부러 오지 않는이상 이곳을 올 일이 없을것 같아서 세사람이 눈 딱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상봉으로 향한다.

의상봉 아래에 있는 고견사 갈림길(13:58)

이곳 이정목 아래에 베낭을 벗어놓고 의상봉을 향하는데 직벽에 가까울 정도로

계단을 치고 5분을 치고 오르니 의상봉 정상이 나타난다.

고견사(古見寺)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7년(667년)에 의상,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견사라는 이름을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이곳에 와보니 전생에 와 본 것임을 깨달았다는 데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견암(見庵), 견암사, 견암선사(見庵禪寺)라고도 불리어졌다.

고견사는 해인사의 창건주 순응, 이정스님과 중창주 화랑대사가 머물다 간 곳이며,

고운 최치원선생의 발자취가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왕실에서는 고려 왕씨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밭 100결을 하사하고

대궐의 향을 내려 해마다 2월과 10월에 수륙제를 지내게 한

원찰로도 유명하다. 대표적 문화유산으로는 고견사 석불(경남 유형문화재 제263호),

고견사 동종(경남 문화자료 제170호)과 조선숙종대왕이 내린 강성원의 운영당 현판이 있다.

고견사의 세가지 구경거리로 꼽는 것은 높이80m 되는 가정산폭포, 최지원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의상대사가 쌀을 얻었다는 쌀굴 등이 있다.

 

고견사 석불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677년(문무왕 7)에 창건된 고견사() 경내에 안치된 석조여래상이다.

화강암으로 된 큰 바위에 불상과 광배를 조각하여 만든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머리는 육계(살상투)가 뚜렷한 소발형()이며,

얼굴은 형태가 다소 마멸되었으나 윤곽은 뚜렷하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은 짧으며 삼도()가 없다.

천의는 통견의()이며 수인()은 통인()이다.

오른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려 가슴 앞으로 들어가 양다리로 흘러내렸다.

광배()는 신광()과 두광()으로 나뉘어 있는데

두광은 단판연화문()과 연주문()으로 처리되어 조형미가 엿보인다.

높이 220㎝, 광배 너비 120㎝, 어깨 너비는 75㎝이며 전체적으로 당당한 모습과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의상봉(義湘峰 1,046m:14:05)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 있는 우두산(牛頭山)의 아홉 봉우리 중의 하나이다.

우두산은 일본 개국 신화와 관련된 전설의 산이며 의상봉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과거세와 현세에서 참선(參禪)한 곳이라는 뜻에서 의상대사 이름을 빌려 산 이름으로 삼은 산이다.
속세를 떠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 난 돌부리 산이다.

옛날에는 우두산(牛頭山), 견암산(見岩山),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렀다(조선환여승람) .
의상봉을 오르는 길에는

수석이 즐비한 고견천(古見川), 견남정(見南亭)터, 고려 말 유형귀 장군이 신마(神馬)를 얻었다고 하는 가마소,

신라 애장왕이 탄 수레가 머물렀다 하는 가정곡(佳亭谷)이 있다.
그 곳에는 1백자 높이에서 떨어지는 가정산 폭포가 있으며 그 아래 담긴 물이
낙화담(落花潭)인데

미인 양씨(梁氏)가 순절한 곳으로 전한다.

울창한 솔숲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따라 길을 열고, 명소로 고견사가 자리한다.
고견사는 견암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절로 덕유산 지봉의 해인터에 이어 거창의 두 번째 해인터이다.
절을 지을 때 쌓아 올렸던 신라 때의 석축이 눈에 들고 고운 선생이 심었다 하는 은행나무와
만든 때가

새겨진 범종과 석불 의상대사가 수도할 때 쌀을 얻었다하는 쌀굴과 십이지신상석이 있다.
산행과 더불어 역사와 경관을 맛볼 수 있다. 우두봉 아래 우두샘은 가조천의 첫 물길이 된다.

산과스키님이 멋진 사진을 찍어 주시고...감사 감사

 

<의상대사>:성(姓)은 김씨(金氏)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義湘(의상)’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의상)’이나 ‘義想(의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元曉)와 함께 현장(玄?)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揚州)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화엄(華嚴) 사상을 배웠다.

668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화엄사상의 핵심을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

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진다.

676년(문무왕 16년)에는 왕명에 따라 과거 삼국(三國)의 요충지였던 죽령(竹嶺) 인근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해동(海東) 화엄(華嚴)의 초조(初祖)’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는 오진(悟眞)ㆍ지통(知通)ㆍ표훈(表訓)ㆍ진정(眞定)ㆍ진장(眞藏)ㆍ도융(道融)ㆍ양원(良圓)ㆍ상원(相源)ㆍ

능인(能仁)ㆍ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 불리는 고승(高僧)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지통(知通)은

노비 출신이었으며, 진정(眞定)도 품을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고, 신라 하대(下代)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부석사(浮石寺), 비마라사(毘摩羅寺), 해인사(海印寺), 옥천사(玉泉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국신사(國神寺), 청담사(靑潭寺)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大刹)로 이름이 높다.

또한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金大城)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중국과 일본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학승(學僧)이었지만, 매우 적은 저술만을 남겼다.

그나마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등의 저술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외에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투사례(投師禮)> 등의 짧은 글들만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꾸준히 연구되어, 신라 하대에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관한 주석서인 <법융기(法融記)>, <대기(大記)>, <진수기(眞秀記)> 등이 편찬되었고,

이들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었다. 이처럼 의상이 매우 적은 저술만 남겼지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을 두고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충분하다”고 평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傳記)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宋) 나라 때에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 우두산(牛頭山)의 의상봉(義湘峰)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의상대(義湘臺)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엄사상 의상은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라는 별칭처럼 화엄사상의

발전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중국에서 법장(法藏, 643~712)이

화엄종의 교리를 집대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신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특히 의상은

개인적 저술과 교화 활동을 중심으로 했던 원효와는 달리 부석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화엄교단을 세웠는데,

이는 통일 이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불교가 왕권의 안정적 운영과 사회적 통합의 이념적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출처]:두산백과

의상봉 정상에 서니 바로 뒷쪽으로 장군봉과 지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눈에 푹 파묻힌 덕유산 향정봉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군봉(將軍峰 950m)은 가조면 사병리에 있는 가조분지의 진산이다.
옛 이름은 바위 문채가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탕산이다.
산 아래에는 삼한시대 소도(蘇塗)였다.
아래는 당동마을에 당산후토신(棠山后土神)를 모신 당집과 당우물이 남아 있으며

 산속 깊은 골짜기에는 돌 틈에서 나오는 물 을 받고 있는 돌구유와 우각형문자(牛角形文字),

 신어(神魚)바위, 암수바위 같은 원시 신앙의 발자취가 있다.

과거 금부처가 나온 절터, 선돌, 제사 지낸 바위로 알려진 권심대같은 민학 연구에

 귀중한 소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또 용천정사를 비롯하여 원천정, 다천서당, 병암서원의

 문운의 진원지로서 문헌지구를 안고 있다. 양심대는 오병현 오병권 형제가 설치한 유적지이다.
당동마을 당집 북쪽 주벽에는 당산후토씨 신위(棠山后土氏 神位)와 철종 9년(1858) 2월 12일

오조영(吳祖英)이 쓴 보기 드문 중수상량문이 남아 있어 민속 연구에 좋은 사료가 되고 있다.

이 후토씨는 옛날 나라에서 지내는 기설제(祈雪祭)의 하나로, 지금은 해마다 음력 정월 열흘

새벽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 장군재에 장군샘이 있으며

바리봉으로 내린 능선에 성터가 남아 있다.

지난구간 날머리였던 가북면 우혜리가 보이고...

의상봉 정상에서 지나온 비계산을 배경으로...

<별유산 유래>: 별유산의 '별유'는 아래 이백의 산중문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백의 재능을 아끼는 당태종이 이백을 중책에 기용하려고 초야에 은거하는 그를 찾았다는데

이백은 아래 시<산중문답>를 지어 고사했다고 한다.

問爾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그저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아도 마음은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이 물길 따라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따로 세상이 있지만 인간 세상은 아니로세

 

<이백(李白, 701~762)>: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 차지하는 것은 여행·이별·음주·달빛·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는 미숙한 편이었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의상봉 가는 길에서 만난 구조목

일본 왕가의 本鄕인 거창군 가조들판

의상봉을 아래에 있는 가조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은 일본 왕실의 본향이다.

 

일본 왕가의 본향에 대해서는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일본 왕조

건국 이전조상들의 이야기를 신격화한 '신대기'편에 '韓(한)'의 고천원이란 천상계에

살던 조상신들이 후손인'스사노 오모미코토'가 포악해 추방하자 그 아들

'이타케루노 미코토'를 데리고 신라의'소시모리(쇠머리 牛頭)'에 살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동쪽 '이즈모'국 또는 근국으로 건너가 가시벌에

궁궐을 짓고 신유년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역사서 기록대로 일본은 고대사회의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신라인들이 건너가 나라를 세우고 일본인의 선조가 된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우두산 일대가 일본 왕가의 본향으로 주장되는 것은

일본 역사서에 이두문자식 한국지명 '소시모리'가 쇠머리, 즉 우두산으로

가조면 수월리 산1에 현존하고, 고천원으로 추정되는 우두산 자락의 상수월

일대 넓은 뜰은 옛날 궁궐이 있었다는 뜻으로 현재도 '궁베미'로 불려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두산 이정표

의상봉을 갔다오니 배가 너무 고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기분이다.

하는 수 없이 우두산 정상에서 동료산꾼 2명과 함께 빵 2개와 두유하나

그리고 사과한개와 술한잔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고불암까지 가려면 10km 이상 남았지만 현재까지

걸은 시간이 약 12시간정도 되어가는 싯점이다 보니 피로가 몰려온다.

우두산 정상 2등 삼각점(△합천 21. 1988복구)

우두산은 일본 개국 신화와 관련된 전설의 산이며 의상봉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참선(參禪)한 곳이라는 뜻에서

의상대사 이름을 빌려 산 이름으로 삼았으며, 속세를 떠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 난 돌부리 산이다.

정상에서 맨먼저 눈에 띄는 봉우리는 가야산이다. 그 맥에 닿아있는 의상봉은

 별유산의 한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점하며,

정면의 암릉과 암봉모양이 이 산의 마루턱이라 부를 만하니 이 산을 의상봉 아닌

 별유산(실제 별유산은 의상봉에서 동으로 4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솟아있다)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우두산상봉(牛頭山上峰:1046m:14:40)

 경남 거창군 가조면과 합천군 가야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9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주봉(主峰)은 상봉이다

예로부터 그 산세가 아름답고 우람하여 일명 별유산(別有山)이라고도 한다.

별유산은 중국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의 칠언절구「山中問答」에 나오는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즉 ‘따로 세상에 있지만 인간 세상이 아니다’에서

 따온 말로,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의 비경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별칭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근거가 있다. 일찍이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이곳을 찾아 전생과 이승을 아우르며 수도정진한 곳으로 알려진 의상봉(義湘峰 1,038m)이 그 절정을 이룬다.

의상봉은 바리봉, 장군봉, 비계산 등 우두산의 아홉 봉우리 중의 하나로 상봉인 우두산보다

 주변의 산세를 압도하는 그 우뚝한 암봉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산수가 수려하기로 덕유산 기백산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참선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의상봉,

처녀봉, 장군봉, 바리봉, 비계산 등의 빼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주봉(主峰)은 상봉이다.

산의 형세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천원과 우두산 그리고 일제의 날조>: 일본인 미즈노 씨가 쓴 책 [한국인의 일본 위사]의 내용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의 주장은 일본인들이 날조한 역사를 한국이 재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사기’ ‘일본서기’의 신화에는 ‘고천원(高天原)’이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신화의 세계는 천계(天界)인 ‘고천원’,

지상계(地上界)인 ‘위원중국(葦原中國·후시와라노 나카쓰구니)’, 지계(地界)인 ‘황천국’이라는 삼층 구조로 되어 있다.

‘고천원’은 왕권 지배의 정당성·신성성(神聖性)이 유래하는 천상의 신성한 세계였다.

그런데 최근 이 ‘고천원’ 유적이 한국에서 복원(?)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고천원’이 있는 곳은 한국의 동남부 경상북도 고령군이다.

여기에는 ‘고천원고지’라고 새겨진 비석(높이 6m, 폭 2m)과 ‘고천원의 시비(詩碑)’, ‘일본의 와카비(和歌碑)’ 등이 세워져 있다.

이 ‘고천원’은 고령군에 있는 ‘가야대학교’라는 지방대학의 캠퍼스 안에 있다.

 

왜 ‘고천원’이 대학 구내에 있는가 하면, ‘고천원=고령’이라는 주장을 전개하는 가야대학교 총장 이경희씨 때문이다.”

원래 고천원이 고령에 있었다는 학설은 고령군에 사는 향토사가 김도윤(金道允)씨가 그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시머리(曾尸茂梨)는 우두산(牛頭山)으로 우두산이 가야산의 ‘우수리(牛首里)’에 해당한다고 한 것이다.

 

다시 미즈노씨의 주장이다. “‘고천원’이 한국에 있다는 주장은 김(김도윤)씨의 학설 이전에 존재했다.

실은 ‘우두산’은 한국의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식민지 시대에는 강원도 춘천에 있는 우두산이 ‘고천원’에 비정되었고,

이기동(李沂東)의 ‘고천원은 조선인가’에서는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우두산을 근거로 거창군이 고천원이라고 되어 있다.

요약하면 ‘고천원’은 ‘우두산’의 위치에 따라 아무렇게나 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엉터리 근거에도 상관없이, 이 수상한

‘고천원’에서는 매년 ‘고천원제(高天原祭)’라는 행사가 벌어져, 일한 우호에 대대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북 고령군에 있는 고천원(高天原) 유적지도 이러한 잘못된 역사 재활용의 예로 지적했다.

고천원은 일본 신화에 나타나는 천상(天上) 세계이며 일본의 토속 신들이 노니는 공간이라고 한다.

런데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 일본의 태양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남동생이 고천원에서 신라에 강림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고령군은 그 내용을 가지고 고령군이야말로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천상 세계(고천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왕의 선조가 고령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해 매년 고사까지 올려 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일제 시대에 일본이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고 한국인들은 회유하기 위해 써먹은 수법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들이 강원도 춘천이 고천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신이 한국 땅에 강림했으니 한일합방 당연하고

내선일체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본 신이 신라의 어디에 강림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장소에 강림했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딘지 알 길이 없다.

어떤 자는 아직도 춘천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거창이라고 한다.

우두산 정상에서 동료 산꾼들과 점심을 겸해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이곳도 음지라서 능선은 완전히 얼음판이다.

또다시 아이젠을 착용을 한다. 오늘 10번도 넘게 아이젠을 신었다 벗었다

하는 바람에 산행시간이 상당히 지체가 된다.

우린 동료 산꾼들과 연락도 되질않고 하여 부지런히 가는 수 밖에...

급경사를 내려서니 안부가 나타나고 고도차가 그리 커지 않는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걸어가는데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졸면서 갈 수는 없다.

아직도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고 음지에는 낙엽 아래에 얼음이 있기에...

죽전 가는 길(15:05)

능선 안부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우측으로 죽전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길은 잘보이지 않는다.

오늘 날머리인 지도상에 큰재라고 표시한 성황재는 큰재가 아니고

죽전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이곳이 실제 큰재라고 한다.

 

죽전 마을은 합천군 숭산면의 지역으로 대나무 밭이 있으므로 대밭골,또는

죽전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계동,내동, 토점동

등을 병합하여 죽전리라 하였다. 이 마을은 샛터, 석계동, 대밭골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으며, 앞쪽으로는 비계산(飛鷄山. 1125.7m)과 죽전 저수지가 있고,

뒤쪽으로는 아흔아홉 골짜기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여름철의 휴양객을 불러모으는 데 손색이 없다.

폐헬기장인지 집터인지 구분이 안되는 넓은 공터를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이곳도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서  조심해서 걸어가는데 계속 눈거풀이 내려오며  잠이 몰려온다.

작은 가야산(1,065m:15:35)

거창군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가야산의 축소판이라

해서 작은 가야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해 보인다.

1,000고지 이상의 산을 10개나 넘게 가진  거창사람들이 가야산이 탐이나서

작은 가야산이라 붙이고 대리 만족을 느끼려고 한 것이 아닌지...

매화산 갈림봉(16:08)

 매화산(梅花山:1010m)은

가야산 국립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매화산은 기암괴석이 발달한 산이다.

가야산 남쪽에있는 산들중에서 최고라고 해서 일명 남산제일봉이라고 하며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천불산(千佛山)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멀리서 보며 열쇠를 닮아 열쇠바위, 곰바위, 남매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기묘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

가야산의 명성에 가려 있으되  산세의 뛰어남이나 산행의 묘미는 결코 가야산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봄에는 진달래꽃, 여름에는 홍류동에서 이어지는  계곡과

푸른 숲, 가을이면 암벽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이 볼만하고, 겨울이면 소나무숲과

기암괴석이 설경을 이뤄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들이  마치 매화꽃을 활짝

핀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매화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큰재:(16:15)

합천군 가야면  마장동에서 거창 가북으로 넘는 고개이고, 동으로 흐르는 물은 가야천을 만들고 서로 흐르는 물은 우가천이다.

나는 지난번 이 구간까지 왔기에우측 마장동쪽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동료산꾼인 산과 스키님이 고불암까지

같이 동행하자고 하는 바람에 5.2km 거리를 1시간 45분을 같이 걷는다.

고불암 위에 오니까 산행대장한테 전화가 온다. 지금 어디냐고...나중 알고보니

의상봉을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꼴찌다 

고불암(古佛庵:18:00)

고불암에 도착하니 먼저 온 사람들은 치인리 식당으로 내려가 버리고

후미 5명은 식당 주인의 승용차로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땀냄새 때문에

고불암 화장실에 들어가니 온수가 나온다. 이곳에서 깔끔하게 씻고 식당으로 향한다

해인사 주차장옆 식당(18:25)

식당에 도착하여 식사를 시작하여 밥을 먹기도 전에 대장은 서울로 가자고 성화이다

갑자기 밥맛이 싹 가신다. 기분도 좀 그렇고하여 소맥 5잔을 마시고 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