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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4 (2)

by 범여(梵如) 2013. 5. 1.

 

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4 (2)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라
무주자상     소이지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중생상수자상   즉시비상


何以故오 離一切諸相  則名諸佛이니이다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고, 마음 속에 잡히고 생각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나라는 자존심, 남이라는 차별 의식, 못났다는 열등 의식, 나이에 사로잡힌 한계 의식은
실상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현실에 발판을 딛고 살아가면서 우리 불자들이 수자상 하나만 떼어 버려도 우리들의
삶의 양이 훨신 많아지고 넓어집니다.
 
예를 들어 정년 퇴직을 했다 해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더 이상 할 게 없다'라고
하면 진짜로 할 것이 없어지고 보람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내 인생을 살겠다 하는 각오로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
열심히 뭔가를 배우고 가슴 속을 열의로 채워 보십시오.
 
몇 곱절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육체의 연령은 육십대이므로 육십대의 인생은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고, 정신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로 폭넓게 넘나들 수 있으니 몇 배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제한적인 생각을 하기 쉽지만,
참 생명은 나이를 먹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참생명인 마음자리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없앨래야 없앨 수도 없고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없음을 거듭 강조 하겠습니다.
나이가 없으므로 수자상이 날 리가 없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한량없는 존재인데 거기에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심을 가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참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가건물(假健物)일 뿐입니다.
알고보면 모두가 평등한 존재입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무불무중생(無佛無衆生)'인 그 자리에 또 '나다', '너다'하는 차별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실 '나다', 너다'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석해 들어가면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육신이나 물질은 말할 것도 벗고 감정이나
지식, 인격도 시시각각 변하여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집도 지붕이나 기둥으로, 문짝이나 마루로 떼어 정리해 버리면 집이랄 것도 없습니다.
또 떼어낸 나무 한 도막도 나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나무 한 도막은 무수하게 많은 미세한 나무 분자로 되어 있고 그 작은 분자 사이의 공간에는
다른 물질의 분자가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물질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확실한 실체로 자리잡은 물체도 하나하나
분해해보면 그 무엇도 고정 분변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어 있습니다.
텅 비어 있을 뿐인 것인데도 어디에 마음을 붙여 그것밖에 보지 못하고 상처받아 아파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고 마음에 잡히는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라는 것이 납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정말 그대로 진실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보았을 때 이렇게 밖에 나타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상에 매여 있거나 빠져 있으면 행동을 보면 아주 파격적인 데가 많습니다.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을 뵙고 싶어서 오대산에서 정성을 들여 일보 일배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 노인이 와서는 "자장이 있나. 자장이 있나."하고
산문 박에서 큰 소리로 불러 대었습니다.
시자가 아무리 말려도 "나는 꼭 자장을 한 번 보고 가겠다."하길래 자장 스님에게 가서
물어 보았더니 자장 스님도 "쫓;아 버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노인은 "자장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할 수 없지."하며 망태기에서 썩은 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지니 그 개가 사자로 변하고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 되어 사자를 타고날아갔습니다.
시자의 말을 전해 들은 자장 스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달려갔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수보살이라는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상을 떼어 버려야 제대로 된 보살행이 나옵니다.
상을 갖고 알고 있으면 당장은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여기까지 수보리가 부처님의 진실하신 말씀을 깊이 잘 알아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는 대목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불    고수보리           여시여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점잖은 장로 수보리가 감동을 참을 길 없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자 부처님께서도

"수보리 네말이 정말 내 말과 생각을 잘 드러내었다."
하시며 거듭하여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정말『금강경』은은 부처님과 수보리가 한마음이 되어 혼신을다해 진실만을 우리 눈 앞에 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과 온 우주 공간에 편재(遍在)된 진실을, 그리하여 우리들이 세세생생 먹고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넘치는 힘을 펼쳐 주시는 것입니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는니라."


우리들은 마음 속에 부처님은 상당한 위신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큰 신통력이 있고 대자비와 지혜가 우리들 중생과 다르게 구족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단지 허망하고 변화무상한 상을 떠나는 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이일체상 즉명제불(離一切相 卽名諸佛)'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관습이나 제도, 학식과 인간적인 체면 때문에 상이 형성되어 우리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지마는 본질적으로는 참으로 허망하고 겉치레일 뿐입니다.

이런 변화 무상한 상 너머에 내재되어있는 우리의 진실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부처이다
하는 소리를 듣고도 놀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희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생과는 구별되는 뭔가의 위신력을 구비한분이 부처님인 줄 알고 있는
가운데 간단 명료한 진실을 금방 납득한다면 그 사람은 희유함이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가 設第一波羅蜜이 卽 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여래   설제일바라밀   즉 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님일
새그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보통 제일바라밀을 보시바라밀로 보지만 『금강경』에서는 지혜바라밀로 생각합니다.
만상을 떠나 보내고 우리의 진실자리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금강석과 같이 견고하며
날카로운 반야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과 같이 빛나는 지혜라 하여 또 제일바라밀이라는 상을 낼까봐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