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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1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18구간 - 지기재-무지개산-윤지미산-화령재

by 범여(梵如) 2010. 3. 12.

산행일시: 2009년 4월 5일

산행코스: 지기재-쑥밭골재-신의터재-무지개산-437봉-윤지미산-화령재

거리:시간: 약17km/4시간 30분소요

 

청명, 한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날씨도 화창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으면서 산행하기에는 정말 최고였다.

오늘 산행코스는 지기재(260m)-쑥밭골재-신의터재(260m)-무지개산(420m)-437.7봉-윤지미산(538m)-

화령재(310m)까지 도상거리 15.2km 포함 약 17km를 4시간 30분에 산행을 마쳐야 하는 코스이다

 

이곳 역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백두대간 코스중 가장 고도가 낮으면서도 가장 지루하고 힘든 코스였다

거기다가 관리가 전혀 안되있는 코스로 악명이 높다. 도로가 있는 재는 그나마 표식이 있지만 산에 올라가면

아예 표지판과 이정표는 전혀 없다. 산악회에서 주는 지도와 고도표로 인지해서 가야한다

보다 못해 지나가는 산악회가 아크릴로 표시해논 것조차도 관리가 안돼깨져 있는 상태이다. 

대간을 타는 사람도 깜박하면 알바(注: 길을 잘못들어 가다가 되돌아 오는것)하기 일쑤이다.

 

어제도 두팀이 2km 가까이 알바하다가 돌아와 일행과 너무처져 화가나서 시불시불 하면서 투덜되고...

산이란 아무리 낮아도 힘든건 마찬가지이고 거기다가 난 팔의 뼈에 금이가 기브스를 하고 산엘 갔다.

우리 아들이 걱정이 태산이다. 저러다가 더 다치면 어떡할려고 하면서 아버지 산엘 좀 가지 마시라고

성화가 대단 그래도 가고 싶은데가 산인걸 어쩌나 아들아 미안하다  

 

지기재(260m) 마을 옆에서 산행은 시작되고

산행이 시작되는 지기재는 옛날 이 부근의 뒷동산에 도둑이 많아서 적기재라고 부르던 것이

세월이 흘러 와전이 되어 지기재가 되었다고 하며, 해발 260m의 고갯마루엔 상주시 내서면

대포리와 모서면 석산리를 잇는 901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이 901번 지방도는 상주시 내서면 대포리와 모서면 석산리를 잇는 도로이지만

크게는 경북 상주와 충북의 황간을 잇는 도로이기도 하다.

고갯마루엔 '낙동강과 금강 분수령' 안내표지판이 서 있고, 도로에서 남북으로 시멘트포장길이

 갈라져 나가고 있다.

 

북쪽 시멘트포장길은 금은골 마을로 들어가는 마을길이고,

큰재 쪽으로 산행을 하려면 남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지기재를 출발하여 신의터재, 윤지미산을 거쳐 화령까지 가는 노정이 오늘의 코스이다.

 

오늘 구간 역시 지난 구간 그리고 지지난 구간과 마찬가지로 나지막하고 완만게 이어지는 마루금 길이다.

문득 모든 대간길이 오늘처럼 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은 그것도 아주 적은 발품만 팔아도 마루금 봉우리에 쉽게 올라서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들지 않으니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마루금 좌우 민가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행복감 마저 든다.

마루금 좌우 마을은 마을대로 서로 쉽게 왕래하며, 이 마을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저 마을 사람들도

다 같이 기뻐하며, 저 마을에서 좋지 않은 발생하면 이 마을 사람들도 안타까워 할 것이다.

서로가 등을 기대어 평화스럽게 지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평화스러운 모습은 키가 낮은 대간 마루금만이 제공한다는 것은 이미

지난 구간 그리고 지지난 구간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

농촌들도 이제 서서히 바빠오기 시작하고

그런데 키가 낮은 마루금은 인근 주민들에게 평화만을 제공했을까?‥‥‥

대자연을 대표하는 대간 마루금으로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나누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마루금은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마루금을 경계로 습관, 문화 그리고 날씨 등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가는 구간(구체적으 말하면 국수봉에서부터)은 행정 구역을 나누지 않는다.

마루금 좌우 모두 경상도 상주 땅이다. 특히 국수봉(지지난 구간)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상주 공성면의 너른 평야는 한가롭고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대간 마루금이 관통하고 있는 상주는 평화스러운 경험만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은 아니다.

 

통일신라 전후의 삼국시대와 후삼국 시대에 상주 지역은 서로 간의 힘을 겨루는 戰場(전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년 전 제법 인기를 모았던 모 방송국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툭하면 고려와 후백제가 상주 지역을 두고

피를 튀기는 전투를 벌인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 것도 이를 반영한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들 모두가 마루금의 키가 낮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키가 높은 대간 마루금이 지역간

소통을 어렵게하여 평화를 유지한 반면 키가 낮은 마루금은 지역간 왕래를 쉽게하여 오히려 禍(화)를 불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오늘 구간을 걷다보면 대간이 얼마나 고심(?)했을까 싶다.

키의 높이, 주변과의 조화 등등이 마치 지난 구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대간도 분명 같은 구간을 빚어내기는 싫어하고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교수 출신들이 장관에 기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장관이 되기 위한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자주 불거지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기 논문 재사용’이다.

말하자면 이미 작성 ․ 발표한 논문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다는 뜻이다.

 

자기개발(발전)을 시도하지 않고 安住(안주)와 답보 상태에만 머물러 있으니

나랏일도 이처럼 처리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에 포함된 사상이나 관점이 전혀 다른 논문(급격한 변화)은 더더욱 작성하기 어렵다.

이러한 논문 작성은 자칫 다른 사람의 논문을 베끼는 결과(타인 복제)를 가져와 본래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별 희한한 광고도 다 보고

왼쪽 금은봉 정상을 뒤로한 채 오른쪽 능선길을 따라 평탄한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바깥

쑥밭골재에 내려서니 잠시 바람이 잦아들고, 이름 예쁜 쑥밭골로 향하는 논밭에는 제멋대로 자란

억새풀들이 길게 누워 하얀 햇살받이를 즐기고 있다.

안쑥밭골로 넘어가는 구릉을 올라서서 신의터재까지 천천히 트래킹을 즐기면서 내려간다

신의터재(280m)

 금은봉과 쑥밭골재를 한탕하고 신의터재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잔디가 벗겨진 무덤과 송전탑을 지나 지기재를 출발한지 1시간 여만에 빠른 걸음으로 신

의터재에 내려서니 팔음산 포도를 자랑하는 화동면 광고판과 10년전에 꾸민 김준신 유적비 공원

이 잘 단장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대간 길손들을 위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고 깨끗하다.

 

신의터재는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이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곳에 커다란 표석 전면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령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五拾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가 세워져 있고,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화령재까진 아직 멀기만 하고-신의터재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화령재로 나선다

 

대간도 오늘 구간(지기재-신의터재-윤지미산-화령)을 빚어내면서, 지난 구간과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서

 자기복제는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구간이 지난 구간과는 어디서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봄 날씨 답지 않게 강한 바람이 불고 이 가운데에서도 곧 움을 틔우려는 진달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타인 복제’ 및 ‘자기 복제’를 거부하려는 대간의 노력이었을까?

“‥‥‥‥‥‥‥‥‥‥‥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巧(교)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固(고)가 되어 답보하기 때문입니다.
교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는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아집에 불과한‥‥‥‥”

신영복의 ‘巧와 固’에 나오는 대목이다.

오늘 대간이 말하고 그리고 몸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물한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신의터재에서 화령재로 부지런히 가는 대간팀들

이 구간은 백두대간도 체통 없이 가라앉아 도로에 끊기고, 임도에 끊기고 하다가 논두렁길로 주저앉아버렸다.

 근근히 농로로 백두대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심한 현장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란 말이 있듯이 여기야말로

 비산비야의 대표적인 곳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들판이라 하기엔 백두대간 한가운데라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산이라 하기엔 농로이니 그럴 수도 없는 그런 곳이다.

서울 불교 산악회 지림님이 애타게 찾았던 신의터재 산장지기 어르신

산꾼들이 달아준 표식 그것마져도 관리가 안되고

산 중간 중간에 있는 산벚꽃도 봄을 알리고

장자봉 갈림길 부근 사거리 임도에 내려서니 작은 복숭아밭 곁을 지나 전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90도 동쪽으로의 진행이 360도 북쪽으로 바뀌는가 싶은 약한 오름에서 잠시동안 사라지곤 한다.

다행히 오늘 낮의 날맑음을 미리 알려주려는 듯하여 반가운 맘에 몇번이고 올려다 보며

걷다보니 오른쪽 무지개산 오름길 옆을 스친다

바람둥이꽃(?) 민들레도

이게 뭡니까 산꾼이 달아준 표식판도 제대로 관리도 못하고....

오랫만에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20여분 땀을 흘리니 437.7봉 안부에 올라서서 능선 오른쪽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어지는 오름이 반복되며 자켓을 벗어 넣고 셔츠 차림으로 땀을

식힌다. 다시 20여분 만에 올라선 정상에 초라한 표지석 하나 자연스레 세워 놓고 낙서처럼 새겨

놓은 이름하여 "윤지미산"이라...도저히 그 유래나 뜻을 짐작키 어렵다. 어느 낭만적인 산꾼이

있어 이 구간(신의터재-화령재) 유일한 혈용(穴龍)을 이루는 정상에 예쁜 이름 하나 붙여주고

싶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붙이지나 않았을까...하필 김 모 배우를 연상케하여 그

고운 뜻이 바랠 수도 있으련만... 

윤지미산 정상 표식판도 메직으로 표시되어 있고

꼬부랑 할머니꽃도...

끝이 났다 싶으면 아직도 재가 2개나 남아있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으로 허기를 때우고, 왼쪽 가파른 경사를 10여분 내려선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 산아래 잘 보살펴진 큰 무덤 자리까지 무사히 다다르니

작은 소로를 지나고, 이어지는 대간 길 묘터들이 그 보존 행태에 따라 뭔가를 일러주는 듯하다.

대간 길을 걸으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명당자리에 관한 엉터리 이론이다.

 

우선 대간길이 약간 동서로 향하는 곳의 남향자리가 명당이다. 비록 관룡자(觀龍子)로 그 용맥

(龍脈)을 다 짚어 나가지는 못해도 큰 산의 음택(陰宅)에 좌향(坐向) 이 대간길을 베고 누워야지

길방향으로 곧추세워져 산(生)사람들의 걷는 방향과 같은 향은 별로 좋질 못하다.

하산길 임도에서 바라본 윤지미산

그 진달래꽃 참 곱다 - 울님(?)처럼

몇 그루의 진달래 잎가지 끝에서 새 순이 움트는 것을 느끼며 올 봄 진달래가 만발하는 4월에는

진달래 노래를 부르며 북망으로 먼저간 벗의, 넋이되어 울어줄 두견새를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 산행 구간에서 유난히 눈에 많이 밟히는 무덤들은,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말해주는 영혼들의 상징이련가..

당진 - 상주간 고속도로 터널위로도 지나고

윤지미산에서 고갯길로의 하산길을 한번 가파른 내림으로 끝내고, 비록 잘 가꾸어 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조림 사업마저도 겪었을 만한 야산을 평탄한 걸음으로 걷다보니 어디선가 요란한

차량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해맑은  햇살아래 펼쳐지는 정경이 아직은 세속이다.

청주-상주간 고속도로가  시원스런 길을 보여주며 화령재 직전 고갯길을 터널로 차들이 시원스럽게 달린다.

화령재 고개에서의 범여

화령(化寧)재 -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6.25 사변때 치열했던 화령재 전투의 참상도 잊은채...

큰 내림길 없는 보은-상주간 도로(25번)에 내려서니 건너편 공터에 예쁜 정자 한채가 세워진 화

령재 공원이 화장실과 함께 쉬어갈 장소를 제공하며 날씨만큼이나 포근하다. 단지 지나다니는

교통량이 제법되고 너무 과속이라 행여 지친 대간꾼의 걸음과 부딪힐까 염려된다. 화령(化寧)의

이름처럼 평온한 이 고갯길에서 이제 우리는 속세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해 갈 것이다. 비록 영원

한 떠남은 아닐지라도 대간의 발걸음을 옮기는 날 만큼은 속세의 진토들을 털어버리고 싶은 것

일게다. 지난 추풍령 이후의 착한 영혼들 곁을 떠나 이젠 봉황산을 시작으로 큰 오름을 다시 시작

해야 한다.  

화령재 보리밭-화령재 유래

오늘의 하산 종점인 화령재의 나른한 봄날씨의 청량제가 되고...

화령재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이런 내력을 담고 있는 화령재는 현재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이다.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주차장 쪽에서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고, 등산로 초입에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 '윤지미산 60분, 윤지미산-무지개산 60분, 무지개산-신의터재 80분'이라 적혀 있고, '봉황산 4.6km,

신의터재 11.3km'라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