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09년 6월 6일~7일
산행코스: 늘재-밤티재-암릉구간-문장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
피앗재-형제봉-갈령삼거리-갈령
거리/시간: 도상거리 31km(마루금 19km) 시간: 11시간 20분
늘재에서 새벽 2시에 산행을 시작
늘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0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늘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50m 앞을 볼 수 없을정도로 안개가 많이 끼여
전혀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 아래 민가에서 개소리만 처량하게 들린다.
아마 헤드렌턴에 놀란 모양이다
오늘은 늘재-밤재-문장대-천황봉-형제봉-갈령삼거리로 이어지는 속리산 전 구간을 관통하게 된다.
안개가 끼어 10m의 앞을 볼 수없는 상황에서 리더의 판단 미스에 2km나
알바(?)를 하여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30분을 초과한 새벽 4시 30분에
아직 통제지역 감시요원이 출근하지 않은 밤티재 철조망을 월담하고..
베낭을 베고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개구멍이 수없이 많고
밤티재에서 문장대 오르는 길, 구름과 안개가 상당히 짙게 깔려 한치앞도 전혀 분갈할 수가 없다 .
한 시간 여 지났을까. 구름과안개를 벗 삼아 나아가던 길에 갑자기 붉을 별이 하늘에 걸린다.
통신 중계 탑이 발하는 빛이다. 이 별 바로 옆이 문장대이니 이 별을 길잡이 삼아 나아간다.
손에 잡힐 듯 한 이 별은 좀처럼 다가서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손끝과 발끝이 긴장해야 하는 암릉 코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문장대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발길을 허락한다.
문장대에서 일출을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동쪽 하늘에 걸린 구름이 너무나 무거워 해가 견뎌내지 못하는 듯하다.
암릉구간에 안개에다 습도가 너무 많아 이제 시작인데 범여는 자꾸만 지쳐가고...
이후 853봉 안부 까지 개구멍인지 게구멍인지 구별할 수없는 직벽 암릉 사이를 두세번 ,
로프잡이를 기다리며 한사람씩 조심스레 오르자니, 점점 지체시간이 늘어나고
고도가 높아지며 서서히 찬 기운을 느껴 윈드자켓을 다시 꺼내 걸친다.
어둠속에서 랜턴의 불빛만이 유일한 보조자로 긴 암벽들을 기어오르고 이어지는
암릉들을 오르내리다보니 어느새 새벽의 기운을 느끼며 이마의 불빛이 흐려져 간다.
어차피 이젠 감각이다. 비싼 랜턴 벗겨져 깨질라 얼른 벗어 주머니에 챙기고
문장대 통신탑 빨간 불빛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통제구역인 밤티재(해발500m)에서 문장대까진 시설이 열악하여 3km에 3시간 30분이란 시간이 소요되고
희미하게나마 기암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다행스럽지만 차라리 전체를 보지 못한채
좁은 로프 크랙에 매달려 정신없이 기어 오른 지금까지가 되려 맘이 편하다.
점점 뚜렷이 비춰지는 긴 거대 암군들에 점점 더 압도되어 기가 질릴 지경이다.
꽤 많은 인원들이 한명씩 조심스레 차례를 지키며 네번째 긴 로프잡이를
기다리는 바위 계곡엔 ,누가 톱질하여 쓰러뜨려 설치한 디딜 방아타입의
굵은 나무 다리 덕분에 한결 통과하기가 편하다.
7-8m의 긴 로프를 잡고 별로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안부에 올라서서 정신없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리본을 따라 크랙을 올라 큰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나온 암릉들의
희미한 자취들을 담아본다
우여곡절 끝에 문장대(해발 1015m)에 도착한 범여
文藏臺라 씌어진 표지석이
좀 헷갈린다. 차라리 그 옆에 크게 한글로 문장대 표지석을 만든게 다행이다.
본디 구름에 가려 있다하여 운장대(雲藏臺)라 불리우다가 세조가 글월을 읊어
문장대(文莊臺)로 바뀐 전설이 있고,운장대(雲莊臺)로 불리우다
세조가 책을 발견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옳든 여러가지로 상상해도 다 좋다.아무튼 세번 올라 극락가고
싶은데 아직 한 번 남았으니 가까운 봄날 물푸레와 우아하게 시어동 매표소에서 표를 끊을까,
겨울 날 상고암에서 하룻밤 지새며 月光太子라도 만나 문장대 알바위에서 예쁜 막내 딸 하나 점지 받을까...
또 마루금 左(상주방향), 右(보은방향)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속리산이 왜 속리산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산은 산골짜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산다. 그래서 俗(人+谷)이란 말이 나왔다.
즉 사람들은 산이 만든 골짜기에서 산에 의지하며 산다는 의미이다.
속리산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떠난 산이라는 뜻이다. 왜 사람들이 속리산을 떠났을까?
속리산이 무서워서 떠났을까? 속리산을 밖에서 보면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져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 찾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순하고 또 순하다. 속리산이 무섭다는 말은 가당치 않으며 속리산이
무서워 사람들이 떠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속리산이 너무 깊어 떠났을 것이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 골짜기 끝자락에만 옹기종기 모여 사니 사람들이 속리산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속리산은 참으로 ‘산이 깊은’ 말 그대로의 속리산이다.
안개로 인해 문장대 정상 주위에 조망은 전혀 되질않고
문장대에서 본격적인 속리산 마루금 산행을 진행한다. 정상(천황봉)을 비롯하여 문수봉,
비로봉 등 8개 봉우리와 입석대, 경업대, 신선대 등 8개의 臺로 유명한 속리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실제 그렇게 느껴졌다... 마루금을 걷노라면 어느 峰이
어느 峰인지 어느 臺가 어느 臺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모두다 하나같이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신라시대 崔致遠이나 조선시대 林悌와 같은 뛰어난 문장가들이
왜 속리산을 두고 다투어 노래를 했는지 이해가 간다.
문장대 아래서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천왕봉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또 하나의 거대한 흉물인 문장대 휴게소 너럭바위 앞에서, 그나마 풍취를 간직한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암송 한 그루를 담고, 후미조가 그리 길어지지 않은 탓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을 축인다.
막걸리라도 한사발 하고 싶으나 대열이 길고 어려운 사정으로, 천황봉-문장대 화려한 구간을 오전 나절에
밝은 햇살 속에서 얼큰하게 즐기려던 꿈은 꿈처럼 사라지고 새벽의 인적없는 주능선을 밟아
천황봉까지 08:00 통과해야 한다.(구름을 타고..)
속리산 대간코스의 특징은 30여개의 수많은 봉우리의 급경사에 오르고 내리고의
반복에 육신은 지쳐만 가고 멀리 구름인지 황사인지 분간되질 않는 시야 속에서
천황봉까지의 주능선을 조망하며 천천히 여유로운 트래킹을 즐긴다.
조금 옅어지는 구름 속에서 어느새 솟아오른 일출을 담으며, 기기묘묘한 자태로
능선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는 주능선과 서쪽으로 가지친 관음봉 능선을 번갈아
눈길을 돌리며 신선대로 향한다.
신선대 휴게소에 있는 표시석
청법대와 경업대를 지나는 동안 후두둑 거리는 봄비가 차라리 한바탕 쏟아진 후 시야를 맑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대간 길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이 경관들을 담아 벗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도무지 회색 뿐이니....
어느새 청법대 산수유릿지 끝을 지나 북쪽 경사면을 돌아 오르는 길에서 신선대 휴게소를 지나니
그 또한 국립공원에 어울리지않는, 산장도 아닌 제멋대로의 편의점이 눈쌀 찌푸리게 만든다.
수 많이 이런 바위 계곡을 지나 다니는데 흙이 마사토라 왜 이리 미끄러운지....
비로봉(毘盧峰)에 올라서니 장각마을로는 입산금지 표지가 크게 눈에 띄고 그 이름만큼이나
밝고 넓은 정상터에 모양좋은 헬기장을 구성해 놓았다.
발걸음을 서둘러 오른쪽 상고암사면을 비스듬히 걸어 내리며, 고사목과 백암에 어우러진
이끼 마저도 멋드러진 황홀경을 연출함에 연속 감탄스러워 하다보니 거암으로 이루어진 천황석문을 통과한다.
법주사로 향하는 상고암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을 내려다 보니, 옅은 안개 속에서도 멀리 비경
의 직벽암릉 위에 드문드문 세워진 암자들이 자연에 심어 놓은 영혼들의 안식처 마냥 정겹다.
아침 9시 서서히 안개가 거쳐 속리산의 보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 입석대(해발 1016m)에서
신선대를 지나 비교적 한가로운 국립공원의 잘 정비된 능선길을 밟으며 화려한 좌우 기암봉들을
디카에 담으려 애를 써지만 흐린 회색으로 감싸고 있는 아침의 사위가 못내 아쉽다.
입석대를 지나는 계단길에서 모처럼 약하지만 밝은 햇살을 잠시 느끼니 ,이처럼 고맙고 반가운 햇살을
평소에는 도회의 성냥갑 속에서 블라인드로 가리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멀리 안타깝게
타인처럼 비춰온다. 우린 얼마나 대자연의 우람하고 큰 힘을 모른채 속세의 늪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속리산 개구멍- 이런 크고 작은 구멍이 수도없이 지나야 한다
또다시 구름을 타야하는 천황봉-형제봉 구간의 여섯 봉우리를 내려다 보며 갈길이 아득하다.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스레 밟아 내리다 보니 오른쪽 천황봉 남사면이 눈길을 붙잡아 매고 내림길을 지체하게 만든다.
약간 흐린 날씨에도 직벽 백색암봉마다 암송(岩松)들이 자태를 뽐낸다.
뒤로 펼쳐지는 주능선의 석화성(石火星)을 바라보며 다시금 뒤돌아서서 내려 밟아야 하는 속세로의 인연이 참 질기다.
진작 이 곳을 맛 보았더라면 쌓지 말았을 인연들인가...
안개에 휩싸인 비로봉(해발 1032m)
천천히 비로봉(1,032m)을 향해 걸으며 상념에 잠겨본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
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드디어 속리산 정상 천왕봉(해발 1057,7m)을 정복하다
표시석이 천황봉이냐 천왕봉이냐 문제로 철거되었단다
천황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에 올라선다.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그러나 지리산에서부터 동행하던 낙동강 유역은 아직도 헤어지기가 섭섭한지 동행을 고집한다.
천왕봉에서 대간 길 그리고 주위의 산들이 만들어내는 산 그리메를 충분히 감상한 다음 길을 나선다.
피앗재를 거쳐 형제봉에 오른다. 형제봉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전혀 기대치 않았던 조망을 할 수 있다.
지나온 천왕봉-비로봉 등을 연결하는 능선이 마치 하나의 봉우리처럼 보인다. 속리산은 여타 산처럼
봉긋한 하나의 봉우리가 정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연결 능선이 집단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간 구간에서 바라본 상주쪽의 속리산 능선
같은 마루금內에서 같은 봉우리를 보아도 느낌이 이렇게 다르니 만약 마루금 바깥(外)에서 보면 어떨까.
다행히도 속리산 부근에는 이런 산이 있다. 천황봉 동쪽 우복동 건너에 자리 잡은 도장산이다.
도장산에 서면 형제봉-천황봉-입석대-문장대 능선이 거침없이 一字를 그리고 있다.
하늘에 걸린 병풍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 수 있다. 형제봉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이다.
속리산 옆에 이런 산(도장산)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안에서도 보고
바깥에서도 보고 해서 균형잡힌 객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미 알아버린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물이나 사람이
지닌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 대간의 가르침이다.
도장산 말이 난 김에 몇 마디 더 해야 겠다.
어느 잡지에 의하면 도장산 능선에 자리잡은 백만불 짜리 명품 소나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盜採되었다는 의미.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채꾼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옛말에 ‘물을 건너 나무를 하면 크게 害를 입는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산이 만든 골짜기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골짜기에는 물이 흐른다. 따라서 물을 건너 나무를 한다는 것은 자기 골짜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골짜기에서 나무를 해온다는 것으로서 도둑질을 한다는 뜻이다.
도둑질을 하니 큰 해(罪)를 입을 수밖에. 도장산에서 도채된 명품 소나무는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물을 건너 이송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줄기의 물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크고 작은 물을 건너 간 것이 분명하니 害도 아주 큰 害를 입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밤티재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길. 비지정 등산로인 이 코스를 단속원을
눈을 피해 야음을 틈타 도둑 고양이처럼 오르지 않았는가.
피앗재(해발 580m)에서 - 천왕봉에서 피앗재까지 오는동안 산꾼
한명을 볼수없고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지네 703봉을 지나 왼쪽의 대간 길
묘를 지나니 완만한 내림길을 만나고 고지에서 볼수 없었던
진달래가 만발하기 시작한다.
피앗에 가까워지면 봄을 피울것인가..
질긴 생명과 경이로운 꽃피움에서, 고도와 일조량을
따라 질서 있는 영혼들의 자리매김을 상상해 본다.
지난겨울 떠났던 진달래 친구는 지금 어느 산
중턱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을까 ..계절이 길어지는 속리산이다..
봄이라서 꽃이 피는가..꽃이 피니 봄인가..
새벽에 문장대 오름길에는 응달녘에 숨어있는
겨울에서 춘한(春寒)을 느꼈는데...
형제봉 정상(해발 803,3m) - 이정표가 없어 산꾼들이 페인트로 표시를 해놓고
피앗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발목에 파스를 듬뿍바르니 한결 시원하고,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산꾼의 가르침을 따라 신발끈을 거의 풀다시피하고 걸어오르니 훨씬 통증이 덜하다.
1시간 여 동안의 형제봉 오름길은 제법 급경사를 이루며 호흡을 힘들게 하나 차라리 발목 통증은 오름길이 훨씬 덜하니
계속 오르고 싶을 지경이다.마주 보이는 형제봉의 아름다운 형상을 조금씩 걷혀가는 시야 속에서 확인하니
이제 마지막 고비를 넘는 기분이다.
급경사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니 할매바위를 지나 형제봉 정상에서 선두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위 위로 올라가고 싶으나 엄두가 나질 않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겸 먼저
갈령을 향해 왼쪽 경사길을 90도 크게 돌아 내린다.
고도 표시나 지도상엔 803.3m로 마주보이는 828봉 보다 낮은 것으로 표기 되어
있는데 형제봉 바위 위에 나무표지말뚝엔 832m로 적혀 혼돈을 일으킨다
갈령 삼거리(해발 721m)에서 이제 다 왔다는 느낌에 지난번 대야산에서 겹질렸던 발목에 통증이 오기시작하고
다시금 828봉을 힘겹게 넘어 왼쪽 갈령마을을 내려다 보며 동쪽으로 크게 돌아 내리니 표지 리본이
어지럽게 삼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갈령삼거리 안부에 다다른다
알바포함 11시간20분에 속리산 구간을 종주했다는 성취감에 짜리한 쾌감 산꾼이 아님 모르지
구병산쪽 대간길 표지리본과 갈령쪽 탈출로 리본이 초행자들을 알바시키기에 알맞게 달려있다.
갈령쪽 리본을 몇개 제거하고 큰 가지로 대간 길 벗어남을 표시해 둔다
백두대간 속리산 종주를 하기위해 서울에서 11시 출발 늘재에서 도착하니
새벽 1시 50분경 서서히 워밍업을 하고 늘재에서 밤티재를 출발했다.
기상상황 좋치 않았다... 10m 앞을 볼수없는 안개에다 간간히 내리는
비 때문, 일행이 간격을 좁혀 가다보니 스틱도 걸거적 거리고
약 1시간 30분쯤 지나서 문제가 발생 선두대장이 밤티재로 가야하는데
엉뚱한 입석리로 2km이상 알바(?)를 한것이다
결국 1시간이상을 허비하고나니 다리가 풀리기 시작 목적지 밤티재에
도착하니 새벽 4시 20분 모두다 말없이 문장대로 향했다... 백두대간
코스중 가장 악명높은 암릉구간 중 한곳. 모두들 잔뜩 긴장
거기에 안개로 시야 확보가 안된다. 안전사고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고
거기다가 주위의 천하절경을 볼수 없다는것도 산꾼들에겐 아쉬움중
하나 겨우겨우 문장대에 도착하니 몸은 벌써 만신창이에 천근만근
다시 부지런히 천왕봉을 향했다. 이제부터 길은 좋앗다 좀 속력을 낼
수 있었고 근데 문제다
속리산이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천왕봉 1km지점 지나니 이정표도 없고
사람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3시간을 지나 형제봉에서 사람을 만나니
왜 그리 반가운지...
늘재-밤티재-암릉구간-문장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피앗재-
형제봉-갈령삼거리-갈령 충북 괴산, 보은을 거쳐 상주 하북면을 내려오는
마루금 약19km를 포함해 31여km를 11시간 20분에 마치고 나니 몸을
죽을 맛인데 성취감은 이루 말할수 없는 GOOD,
하산후 이슬이(?)를 사랑하는 이 맛에 산에 오는것 아님감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1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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