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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영산기맥(終)

영산 기맥 제8구간 - 평룡교차로에서 주자재까지

by 범여(梵如) 2014. 4. 21.

 

☞ 산행일자:  2014년 4월 20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29.6km / 10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평룡교차로(신1번 국도)-이동통신 기지국-무안실버타운(구 1번국도)-172봉-초당대학교 후문

                   남산갈림길-남산(왕복)-195봉-연징산갈림길-연징산(왕복)-전망의 숲-대치령

                   폐헬기장-200봉-청천리 임도-288봉-태봉작전도로-264봉-태봉재-구리재-구리봉-깃봉

                   사자바위산-하루재-노승봉-승달산-깃대봉-승달산-부성농원 갈림길-노간주봉-둔덕봉

                   월선동 갈림길- 월명동 갈림길-꽃장마을 갈림길-꽃장고개-126.8봉-감돈재-임도-헬기장

                   국사봉-대봉산-157봉-서해안 고속도로-백록식품-주자재  

소 재 지:  전남 무안군 무안읍, 청계면, 몽탄면, 일로읍, 삼향읍

 

 

오늘은 산행길에 오르면서도 마음이 한없이 우울하고 이 나라에 산다는게 창피하다.

‘우째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지 4일이 지났건만 아무런 진전도 없고...

선내 방송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믿고 있다가 침몰한 배속에서 수장되어 버린 저 어린

학생들... 누구의 책임인가? 원칙을 지키는 학생들은 죽어야 하고 300명이 넘는 승객을

내팽개치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가 살아남은 선장, 행해사, 기관사는 살아남는 세상...

거기다가 구조작업에 임하는 정부의 허술하기 짝이없는 위기대응 시스템 정말 기가 막힌다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엄청난 참사 얼굴을 못들겠고 TV보기가 겁이 난다

 

입만 열면 선진국 운운하는데 꼴값 떨지말라...3등국가도 안되겠다

경제적으로는 풍요하여 선진국인 줄 생각할 지 모르나 머리가 텅비어 있는데 무슨 선진국이냐

아직도 300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바닷속 배에

갖혀 있는데 부디 무사 기원을기원하며 어두운 마음으로 영산기맥 8구간의 산행을 하기위해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향한다
부디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행→무안행 버스티켓

영산기맥 8구간을 가기 위해서 16시 20분발 무안행 버스에 오른다.

무안은 대중교통이 상당히 불편한 곳이다... 서울에서 하루 2번밖에 없는

버스에다가 그것도 16시 20분에 출발을 하니 토욜이 바쁜 나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현장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중간 휴게소인 정안 휴게소에서 저녁으로 유부우동을 하나 먹고 버스에 올라

서울에서 출발한 지 3시간 40분만인 저녁 8시에 난생처음 무안 버스 터미널에 내린다 

무안 버스 터미널(20:00)

무안읍에 내려서 찜질방을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알아봤으나 무안에는 찜질방이 없단다.

그렇다고 목포까지 나가자니 내일아침 일찍 산행이 어렵고하여 여관에서 1박을 하기로 한다

무안읍내의 야경

무안 서울모텔

산꾼으로서는 30,000원이란 거금(?)을 주고 모텔에서 잠을 자기 위해서 터미널 옆에 있는

모텔에 투숙하여 근처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 2개를 마시고 초저녁인 9시에 잠이든다

한참을 잤는가 싶었는데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는데 복도에서 싸우는지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에 옆방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방음이 전혀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번 깬 잠은 쉽게 잠이 오질않아 새벽 3시에 겨우 잠이 들어 1시간을 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긴 다음에 어제 저녁에 봐두었던 김밥집으로 향한다

무안읍내에 있는 김밥집에서 순두부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에 점심에 먹을

김밥 2줄을 사서 베낭에 넣고 오늘의 들머리인 평룡 교차로로 향한다.

평룡교차로(05:10)

무안읍에서 택시를 타고 10분정도 지나니 오늘의 들머리인 평룡교차로에 도착한다(택시비 4,000원)

해가 많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서 장비를 점검하고 헤드렌턴에

의지한 채 도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산행을 시작한다

교차로에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로 들어서니 승달농원 표지판이 있고 표지판을

따라서 걸어가니 우측으로는 신 1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들머리에서 2분정도를 올라오니 포장도로가 끝나고 Y자의 비포장도로가 나오는 곳에서 우측으로 간다

이동통신 중계탑(05:13)

이동통신탑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동통신 중계탑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7분정도 걸어가니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사거리에서 약5분정도를 걸어오니 어둠속에 농가가 나오는데 새벽길에

이방인을 만난 개새끼가 눈에 불을 켜고 짖어대는 바람에 곤한 잠을 자는

쥔장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곳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직진하여 올라서니 초지가 나온다.

초지를 지나 능선에서 내려오니 다시 주택가가 나오고 구1번국도가 보인다

구1번 국도(05:35)

구1번 국도를 지나 무안실버요양원 표지판 쪽으로 향한다

도로입구에는 김해김씨 세장산비가 있고 가야할 172봉이 보인다

무안실버요양원

무안실버요양원에서 키우는 엄청나게 큰 개가 나를 잡아 먹을듯이 덤벼든다

요양원을 지나서 본격적인 등로로 접어든다

등로로 올라서니 기독교인의 묘지를 만나고...

172봉(05:50)

영산기맥 특유의 잡목이 가로막고 가시나무가 잡아 당기는 길을 172봉 정상은 어지럽기만 하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정상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선다... 어둠이 가시면서 헤드렌턴을 접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무안 남산과 초당대학교의 모습
거친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무명묘지 2군데를 지나고 나니 등로는 좋아진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공동묘지가 나타나면서 초당대학교 후문이 나타난다

초당대학교 후문(06:08)
휀스를 우회하여 초당대학교 내로 들어서서 기숙사 도로를 따라 20여m 정도를 걸어가니...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기맥길 등로가 나온다.
이동통신 중계탑(06:15)
이동통신탑 옆에는 초당대학교 기숙사로 내려가는 도로가 있고...
남산 갈림길(06:20)
영산기맥길에서 좌측으로 0.5km 떨어져 있는 무안 남산을 돌아보기 위해서 등로옆 숲에다가 베낭을 숨겨놓고 무안 남산으로 향한다
남산가는 길 중간에 전망대 암릉이 있다
초당대학교의모습
초당대학교는 서울 종로5가와 영등포에 있는 백제약국과 초당약품 국내 최대 인공 조림지인 초당림을 기반으로
1994년도에 무안이 고향인 김 기운님이 나무를키우는 마음으로 사람을 키운다’라는 건학이념으로 설립됐다고 한다
저 멀리 무안 앞바다가 보이고...
무안 남산(189m:06:30)
무안군  무안읍에 있는 산으로 영산기맥길에서 약 500m 떨어져 있으며 정상에는 팔각정과 팔각정 건립비,
그리고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무안읍내와 무안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남산정 건립비
무인산불감시 카메라

초당대학교와 무안 앞바다의 모습

무안군 지도(위키백과 인용)

무안군(務安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부 무안반도에 있는 이자, 전라남도청 소재지이다.

면적은 448.95㎢이며 인구는 약 8만명으로 전라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군이다.

서쪽은 신안군, 남서쪽에는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 동쪽으로 영산강을 건너 영암군, 나주시와 접한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무안(務安)은 톱니바퀴 같은 리아스식 해안 길이가 220km나 되며

세발낙지와 양파가 특히나 유명한 곳이다

 

무안의 지형은 좌우로 약간 퉁퉁한 직사각형으로 가운데에 ‘작지만 큰 산’ 승달산(333m)이 땅과 바다와 강을 품고 있다.

어미 개가 구물구물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스님 500명이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이다. 3000년 동안 천하인재가 나온다는 명당이다.

요즘도 전국의 내로라하는 풍수 대가들이 현장 실습하러 온다.

승달산 어딘가에 ‘호남의 제1혈처’가 있다는데 과연 그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승달산 자락엔 옛 절터가 수두룩하다. 기왓장 부스러기나 절집 축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엔 무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거의 하나같이 양지바른 곳에 밥사발 엎어 놓은 듯이 누워 있다.

저마다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뽐내는 듯하다 (동아일보 인용)

남산정에서 바라본 무안읍내
서울 연극무대에서 큰 인기를 모은 민중 1인극 품바. 동아일보DB
무안하면 가장 떠오르는 게 품바타령이다.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서울 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1인극 품바는민초들의 억눌린 가슴을 걸쭉한 입담과 통쾌한 정치풍자로 풀어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품바는 각설이의 다른 이름이다.
각설이타령이 곧 품바타령인 것이다.1981년 무안 출신 극작가 김시라 씨(1945∼2001)가 무안
일로읍 공회당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민중 1인극 ‘품바’를 무대에 올린 게 그 시초다.
연극 품바는 무안에 실제 있었던 걸인마을 ‘천사촌’이 배경이다.
전국을 떠돌던 100여 명의 거지가 이 고장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에 그대로 눌러앉아 ‘천사마을’을 이뤘던 것이다.
품바는 각설이타령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나오는 ‘입방귀’ 후렴이다.

 

“품∼바 품∼바 잘한다”가 그렇다. ‘입으로 뀌는 방귀’이다.

조선시대엔 ‘입으로 치는 장구’라 해서 ‘입 장고’라고 불렸다.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변강쇠 타령에 나온다.

흥을 돋우는 일종의 추임새 역할을 한다. 판소리에서 고수나 관객들이 “얼씨구!” “좋다!” 하는 것과 같다.

 ‘입 풀무질 장단’인 셈이다.

마을이나 장마당에서 “품바∼” 소리가 들리면 각설이패들이 나타난 것을 뜻한다.

품바는 걸인패들의 아이콘이다. 품바의 ‘품’은 ‘품앗이, 품삯’할 때의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과

한자의 ‘稟(품·주다, 받다)’을 뜻한다거나, 겸허함의 ‘빈 것(虛, 空)’을 말한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심오한 의미보다는 단순한 의성어로써 추임새로 쓰였으리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차라리 각설이가 한자 ‘覺說理(각설리)’ 즉, ‘깨달음의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게 그럴듯하다.

옛 성현들이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쉽게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노래라는 것이다.

민초들은 그 가르침의 대가로 걸인 바가지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남산 갈림길(06:47)
195봉 갈림길(06:50)
195봉(06:55)
195봉 오름길은 거친 잡목으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정상 아래에는 무명 묘지 1기가 있고 바로 앞에 무안읍 수원지가 한 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195봉에서 바라본 무안읍 수원지
195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오니 잡목이 우거져 있고 잠시 후 全州李公과 金海金氏
부부 합장묘가 나오고 조금을 더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와 만난다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를 만나서 편한길을 걸어가니 남산밑 오거리가 나온다
남산밑오거리(07:00)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두갈래 방향이 나오는데 우측 통나무 계단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남산밑 오거리 이정표
통나무 계단으로 올라서서 5분정도를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으로는 조릿대 군락지가 나오고...
조릿대 군락지를 지나서 다시 통나무 계단을 오르니 임도에
 의자가 있고 조금을 더 걸어가니 사색의 숲이 나온다 
사색의 숲(07:10)
사색의 숲에는 팔각정이 있고 그 옆에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다른곳은 진달래가 다 졌건만 이곳은 이제서야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다

사색의 숲 삼거리( 07:23)

영산기맥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지만 이곳에서 좌측으로 1.4km 떨어진 연징산으로 향한다

거리상으로 왕복 2.8km 만만찮은 거리이지만 오늘 산행중에 중요한 곳이기에 뒤도

안돌아 보고 연징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야햘 연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징산 삼거리(07:30)
등로에서 바라본 몽탄면 대치리의 모습
용샘 갈림길(07:35)
연징산 삼각점( 목포 305 1998 재설)

연징산(淵澄山:300.5m:07:38)

무안군 무안과 몽탄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못 연(淵) 맑은 징(澄)’을 쓰는

연징산은 주변에 용샘을 비롯한 맑은 연못과 샘이 많아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징산 정상에 서니 동쪽으로 영산강 도도히 흐르고 있다.

무안과 나주의 젖줄인 몽탄강(夢灘江)은 태조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후백제의 인해전술을 감당하지 못해 포위당한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백발의 노인의

도움을 받아 영산강을 건너 화공법으로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목숨만 겨유 유지한 채

도망간 이후부터는 현몽으로 여울을 건넜다는 의미로 몽탄강이라 부른다.

 

지금도 하류의 전승지를 파천군,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숭은 하몽탄,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는 상몽탄으로 부른다.

 

『여지도서』에 "연징산은 감방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다.

위에는 징연(澄淵)이 있고 아래에는 폭포가 있기 때문에 '연징산'이라 불린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용추(龍湫)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흙으로 매워졌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면성지』에 "읍의 남쪽 10리쯤 외읍과 석진의 경계에 있다.

공수산(控壽山)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와 울퉁불퉁하여 여러 산 중에서 뛰어 났다.

산 위에 원천이 있어 세상에 전하기를 옛적에 용추라 하고, 지금은 소백두(小白頭)라 한다."고 수록되어 있다

연징산 정상에서의 셀카로 인증샷
도도히 흐르는 몽탄강의 모습
무안과 나주의 젖줄인 몽탄강(夢灘江)은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몽탄강이라 이름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아직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후백제 견훤과 한판의 승부를 겨루게 되어 견훤이 마지막 나주성에 웅거하여
고려군과 싸우게 될 왕건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에 당도하여 진을 쳤다.

그 때에 견훤군이 사방을 애워싸고 공격하니 포위된 고려군은 당황하여

포위망에서 혈로를 뚫으려하였으나 마침 강물이 범람하여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고려군은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였으며 밤이 깊어서야 견훤군이 공격을 멈추어

서로가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싸움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어

고려군은 지친 나머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고려의 장수 왕건도 군막에서 잠이 들었는데 백발노인이 왕건 앞에 나타나

 "앞으로 대업을 이루려는 장군이 일기도 모르고 잠만 자면 되는가?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빨리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있으면 견훤군이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견훤군을 치면 장군은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한다.

 
왕건이 깜짝 놀라 일어나니 그것은 꿈이었고 이상한 꿈인지라 밖을 나가보니

과연 강에는 물이 완전히 빠져있어급히 군사를 깨어 강물이 빠진 여울을 건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군하였다.

 두대산은 마람으로 이어져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봉 같았고 파군천에 이르니

마치 강물이 하얀 쌀뜨물처럼 흐르고 있어 이상히 여기고 군사를 좌우에 매복시켜놓고 지형을 살피고 있을 때,

견훤군이 뒤를 쫓아오다가 큰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줄 알고 전진을 주저하고 있을 때

좌우에 매복되었던 왕건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협공하니 혼비백산한 견훤의 군대는

지리멸열하여 크게 부서지고 견훤은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도망쳤다 한다.

그 후 이 강을 "꿈에 여울을 건넜다" 하여 "몽탄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몽탄강 하류의 전승지를 파군천이라 하였으며 이 천을 이은 다리를 파군교라 하였다.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군 동강면을 연결하는 영산강 하류의 몽탄강은

지금 나주군 동강면 옥정리에 몽송부락을 하몽탄이라 하고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를 상몽탄이라 부르고 있다.

 

이 후 왕건은 나주 오씨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정화왕후는 아들이 바로 고려의 현종왕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안군의 등산 안내판

영산기맥길을 걸으면서 장성, 영광, 함평의 등로에서 잡목과 가시나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곳 무안까지 넘어오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등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도 잘되어 있어 한없이 고맙기만 한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정표에는

산 이름 표시를 그렇게 친절하게 잘 해놓고는 막상 정상에 오르면 아무런 표시도

없는 이유... 정말 알다가고도 모르겠다

이곳 연징산도 마찬가지이다... 연징산으로 오는 길의 이정표에는 미안할 정도로

연징산 표시를 잘해놓고는 정상에 도착하니 아무런 표시도 없다

 

산 정상에는 사각정자와 3등 삼각점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이 유명한 산에

그 흔한 표시석 하나도 없다... 얼마전에 지나간 공작산 아우님이 미안했는지 띠지에다가 표시를 해놨다

저 멀리 오늘 가야할 승달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돌아온 사색의 숲 삼거리(08:00)

길이 거의 트레킹 수준이라 왕복 2.8km를 30분만에 되돌아와 와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전망의 숲(08:10)
전망의 숲 정상의 모습
전망의 숲 정상 육각정에서 바라본 청계면과 무안반도의 모습
전망의 숲에서 급경사를 내려서니 로프시설과 데크목의 계단이 나오고...
대치령(大峙嶺:208m:08:15)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에서 무안읍 청천리를 넘는 고개로 이정표에는

사격장 계곡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초당대 후문쪽에는 사격장이 있어

길이 끊겨있고 대치리 방향으로만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지금과 같이 큰길이 나기전 무안을 가려면 마을 뒷산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한재」또는 「대치」라 부른다. 

대치리 마을은  咸平魯씨가 咸平에서 살다 1420년경 이곳에 이거한 것이 처음이라하나

자세하지 않고 다음으로 利川徐씨 徐崇老가 조선 世組代에 長城 北一面 龍甸에서 살았는데

丁亥(1467)년에 일어난 李施愛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뒤 그후 世居地 장성에서 南下하여

지금의 大峙에 入鄕하였다는 기록이 <務安世蹟誌> 徐崇老條에 전한다

대치령 이정표

폐헬기장(08:18)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면 시루봉으로 연결되는 등로이며 기맥길은 직진이다
등로 양쪽으로는 서어나무가 많이 보인다
양호한 등로를 편안하게 걸어간다

멋진 암릉도 가끔 만나고 좌측으로 몽탄면의 산그리메가 시원스레 보인다

두더지 한마리가 生을 마감했구나
오르막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우측에 비닐 움막이 보인다
청천리 임도(200m:08:45)
곱디 고운 철쭉이 산꾼을 반기고...
288봉(08:55)

봉우리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우측으로는 마협봉으로 가는 등로이나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별로 의미가 없는 곳이라해서 그냥 기맥로 이어간다

대구에 사시는 핵폭탄님도 지나가셨구나...
무명묘지 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암릉(09:05)
암릉에서 바라본 무안반도와 청계면의 모습
태봉C.C의 모습
가야할 264봉도 보이고...
태봉작전도로(09:20)

태봉작전도로에 들어서서 ...

좌측으로 30여m 정도를 가다가 우측으로 들어선다
편안한 등로로 접어드니 우측에는 태봉C.C 그린이 보이고...
편안한 길을 걸어가다가 약간의 허기가 지기에 휴식을 취할겸 쥬스 한잔을 마시고

등산로 옆 개울물에 신발을 벗고 5분정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근다.

요즘들어 밤에 잠을 자다가 쥐가나고 발바닥이 바늘을 찌르는 것처럼 아프기에

쌍계한의원 최원장에게 침을 맞으면서 왜런 증상이 나타나느냐 물으니 병명이

생전 듣도보도 못한 족적근막염이라고 하면서 이건 무조건 쉬어야만 낫는 병이라고 

하는데 나처럼 중독자에겐 통하지 않을것 같으니 산을 조그만 타라고 한다

5분정도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훨씬 나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신발을 신고 길을 떠난다

폐헬기장(09:50)
264.6봉(09:53)
264.6봉 삼각점(목포415 1986재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태봉재(182m:09:58)
무안군 청계면태봉리에서 몽탄면 대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로서 각어릿대재라고도 부르는데 유래는 알 수 없다
도로를 가로질러 등로로 올라선다
길은 참으로 유순하고 편안한게 이 지역 사람들의 고운 心性같다
참으로 정답게 보인다
구리재(206m:10:10)
안군 몽탄면 사천리에서 청계면 태봉리를 넘는 고개로  정상에는 당산목과 돌무더기가 있으며
이곳에서 남창천이 발원하여 몽탄과 일로를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옛 무안현 지도(1872년)에는 무안반도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고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하니 구한말까지

그만큼 교통의 요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 가마나 말을 타거나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무안반도 남쪽에서 
무안읍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교통의 요충이었으며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口傳에 의하면 구리재는 고개의 길이가 옛날 집에서 베틀로 명주를 짤 때 씨실이 되는 명주실의 꾸리를
풀어놓은 길이만큼이나 아주 긴 고개여서꾸릿재’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꾸릿재라 하지 구리재라 하는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무안의 고지도나  읍지 등 옛 문헌에는   한문의 음차를 빌려 구리치(九里峙)구리치(鳩里峙)로 적은데도 있고
‘구리’의 뜻을 가진 구리(銅)자 동치(銅峙)적은데도 있다고 한다.   
구리재 오름길에는 예쁜 윤판나물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相生
구리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ㅜ자의 등로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묘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니 지나온 능선이 다 보인다
구리봉 오르는 등로에서 바라본 조금전에 지나온 264.6봉
구리봉(309m:10:25)

구리봉 정상에는 후손들이 돌보지 않은 함평이공과 정부인 파평윤씨 묘지가 있다 

구리봉 정상 이정목
구리봉 정상에서 직진을 하여 내려선다

건너편으로는 잠시후에 가야할 사자바위산이 보인다

태봉능선(110:30)

구리봉에서 내려오니 태봉 능선 이정목을 만나는데 우측으로는

태봉재 임도를 만나는 곳이고 좌측은 목우암으로 가는 길이다

목우암 전경(불교카페 사진 인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인 목우암

553년(백제 성왕 30년) 덕이(德異) 또는 덕예(德隸)라고 하는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혹은 725년(성덕왕 24)에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고려 후기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의 승려 원명(圓明) 국사 징엄(澄嚴)이 중건하였다. 원명은 꿈에 백운산에 있는 총지사(摠持寺)에서

소가 한 마리 나와 이 암자에 이르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았더니 계곡 바위에 소 발자국 흔적이 있었으므로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든

뒤 목우암이라 하고, 그곳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깃봉(10:45)

깃봉에 올라서니 서해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능선 바로 아래에는

목포대학교 캠프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등산 안내도와 벤치가 있고

깃봉 정상은 이곳에서 우측 10m 지점에 있어 베낭을 벗어놓고 올라

가봤더니 아무것도 볼것이 없고 하여 다시 내려온다

이곳부터는 등산객이 상당히 많아서 마치 서울의 청계산에 온 느낌이다

깃봉에서 사자바위산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사자바위
등로에서 바라본 목포대학교 캠프스와 서해의 압해도 모습
사자바위산(317m:10:50)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와 몽탄면 귀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정상에는

노승정이라는 사각정자가 있고 독립 유공자인 풍천노씨 부부묘가 있다.

능선 바로 아래에는 목포대학교 캠프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저멀리

서해바다에 있는 압해도와 압해대교가 보이며 바로 맞은편에는 승달산이

그리고 지나온 연징산과 동남쪽으로는 여름에 걸어야 할 땅끝기맥 구간인

월출산 능선이 시원스레 보이지만 약간의 박무로 인해 똑딱이 카메라의 한계를 느낀다

정자인 노승정(老僧亭)에서 아침에 싸온 김밥 한줄에다 캔 맥주 하나를 마시면서

가야할 능선의 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으니 옆에 있는 등산객이 유심히

나를 보면서 이것저것을 자꾸 물어보는데 커다란 베낭을 메고 지도를

보는게 신기한 모양이다... 자기들이야 동네 뒷산에 왔으니 나를 알리가 없제

그러면서 자기는 목포에서 왔다고 하면서 자기가 싸가지고 온 음식을 풀어놓고

그리 먼 길을 다니면서 먹는게 부실해서야 되는냐고 하면서 유부초밥에다가

복분자 술까지 한참을 얻어 먹은 다음에야 그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길을 떠난다 

사자바위산 정상에 있는 풍천노씨부부묘지
똑같은 묘지가 나란히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본처와 후처의 자식들이 묘지를 각각 따로 썼다고 한다... 묘지 관리나 잘하시지
내리막길은 상당히 편안하다
하루재에 있는 매점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휴일에는 장사를 한다고 하여 이곳을 믿고 최대한

베낭무게를 줄였는데 조금전에 등산객에게 너무 많이 얻어 먹어서 이곳은 그냥 패스한다

하루재(231m:11:20)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에서 청계면 도림리를 넘는 고개로 목포대학교 뒤 천지골에서 목우암과 법천사
쪽을 넘는 고개로 고개 정상 가운데는 무명묘지 한기가 있고 매점이 있으 지금까지 영산기맥 산행중에
가장 등산객을 가장 많이 만난 곳이다 .
특이한 점은 봉우리나 재의 정상에는 꼭 묘지가 있는데 이곳 승달산 능선이 풍수지리상 노령산맥 4대명혈중의
하나라는 명당중에 명당이라 그런지 묘지가 유난히  많다
청계면 청년회가 만든 하루재의 철쭉 소공원
노승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법천사의 모습
법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의 말사로 725년(성덕왕 24년)에 서역 금지국(金地國)의 승려 정명(淨明)이 창건하였다..

1030년에 불에 탄 뒤 약 1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131년(인종9년)에서 1162년(의종16년) 사이에 원나라 임천사의

승려 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원명은 처음에는 초암을 짓고 수행하였으나, 500명의 제자가 몰려들자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도를 얻어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승달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불상 등을 산내 암자인 목우암(牧牛庵)으로 옮겼다.

1662년 중창하였으나, 1896년 다시 폐허가 된 것을 1913년 나주에 살던 효자 정병우(丁丙愚)가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1964년 활연(活然)이 법당을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노승봉 갈림길

 노승봉(老僧峰:11:35)

하루재에서 10분정도 오르막을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대부분 우회하여

가지만 직진을 하여 올라서니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정상에는 어김없이 묘지가 있다.

함평이공과 청주한씨 부부묘지가 있는데 이 지역 후손들의 명당에 대한 집착 참으로 대단하다

노승봉은 목포대학교의 뒷산으로 풍수상으로 보면 고승(노승)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공을 드리는 이른바 노승예불, 혹은 호승예불의 형국이라 한다

노승봉 정상의 이정표
이곳의 이정표에는 승달산 2km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0.5km밖에 안된다
노승봉에서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갈림길을 만난다

승달산(僧達山:317.7m:11:40)

전남 무안군 청계면과 몽탄면의 경계에 있는 승달산의 지세는

예로부터 고승(高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공을 드리는

노승예불(老僧禮佛)의 지세로 호남의 8대 명당중에 하나이다.

 

그 덕분에 승달산은 목동(牧童)과 황소가 터를 잡았다는 목우암(牧牛庵),

불법이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 옛날 건물이 90여동나 있었다는 총지사,

호남의 8대 명당중에 제1명당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이곳엔 유난히 무덤이 많으며

법천사, 목우암, 총지사지 등 불교사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

고려 인종때 원나라의 원명의  500명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를 가진

승달산은 목포 유달산과 쌍벽을 이루며 북쪽의 무안 남산~연징산~마협봉,

남쪽의 국사봉~유달산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끝자락중 산줄기가 가장 높고

계곡이 깊으며 숲이 울창하다.

토양이나 기후 조건이 야생난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어 ‘난(蘭)’ 자생지로 유명하다

승달산의 落照는 일품이라고 하며, 정상에서 바라보면 무안의 운암반도,

압해도 섬들이 둘러쌓인 서해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느껴진다.

 

 

『여지도서』에 "승달산은 연징산에서 뻗어 나오며 법천사(法泉寺)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관아의 남쪽 2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송나라 때 임천사의 승려 원명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을 택해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는데, 임천에 있던 제자 5백 명 정도가 그를 찾아 와서

함께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그대로 승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면성지』에 "읍치의 진산이다. (중략) 동으로 쳐다보면 노승과 방불(彷佛)함으로써

그 형상으로 인해 이름하였다 한다."고 수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승달산 남쪽에 법천사, 서쪽에 총지사(摠持寺)를 표기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법천사는 관아 남쪽 20리 승달산 아래에 있다. 당나라 개원 13년(775)에

서역 금지국의 승려 정명이 처음 세웠으며, 송고종 소흥 연간에 임천부의 승려 원명이 새로 지었다.

총지사는 관아의 남쪽 10리 승달산 오른쪽 기슭에 있다.

처음 세운 연대는 법천사와 같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무안)에는 총지사는 연징산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승달산 정상 삼각점(△목포11/1980재설)
유명세에 비해서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이 승달산이다

이곳은 등산객 하나도 없고 정상에는 1등삼각점과 헬기장만이

산을 지키고 있으며 그 어디에도 승달산이란 표시 하나가 없다 
승달산에서 0.7km 깃대봉을 가기 위해서 승달산을 떠난다
승달산 깃대봉(333m)
오늘 가야할 능선을 가늠해보고...
깃대봉 정상에도 어김없이 묘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다
깃대봉 정상에는 무안의 산중에서 처음으로 표시석과 산불감시초소와

묘지, 그리고 등산 안내도가 있으며 저 멀리 땅끝기맥 능선이 보인다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승달산(12:00)
승달산에서 감돈재로 향하는 길은 무지하게 좋다
부성농장 갈림길 이정표
부성농장 갈림길(12:05)
부성농장 갈림길에서 조금을 내려서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노간주봉(12:18)
다시 로프가 설치된 등로를 따라서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묵묘를 지나는데 이곳부터는 부드러운 고사리가 많이 보여서 고사리를 따면서 산행을 한다
월선동 갈림길(12:35)
무안군 청계면 월선동은 월선리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토끼산」「비친암골」 「월구정」「소잔등」
「토끼바위」「은락골」등으로도 불렀으며 도선국가(옥룡자)가 무안 4명당의 하나인 운중수월(雲中秀月)이 있다하여
「수월동(水月洞)」「수정동(水晶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그뒤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김해김(金海金)씨[김봉헌(金鳳獻)]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년]때 피난을 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도 김해김(金海金)씨가 대부분인 동족 (同族)을 이루고 있으면 타성(他姓)으로
전주이(全州李)씨, 이천서(李川徐)씨, 나주문(羅州文)씨등이 거주하고 있다
월선리의 범상골은 도선국사전설《도선이 명당운중수월 (雲中秀月)을 가르쳐주게 된 연유를

전하는 전설로, 도선이 승달산 노승 진념(眞念)을 만나 북재를 넘어 이 마을에서 밭가는 농부에게

밥을 한끼 얻어먹고 명당을 일러주었다 한다 (청계면 마을유래 인용)

월명동 갈림길(12:40)

무안군 청계면 달산리에 화정」마을 북쪽에 있는 곳으로 里의 서편에 자리한다.

밤에 달이 먼저 보이는 마을로 달맞이를 하는 정자나무가 있다해서

「月迎亭」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명묘지 2기를 가로질러 편한 길을 내려오니 꽃장고개가 나온다
시제/꽃장마을 갈림길(12:55)

갈림길에서 올라서니 고사리가 상당히 많다... 걸으면서 고사리를 채취하는데

순간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바로 앞에 40대 중반의 여인 2명이 고사리를 채취하는데

한 여인이 등로 옆에서 쉬~이를 하다가 말고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주저 앉아 버린다

그러면서 얼른 숨어면서 하는 얘기가 인기척이라도 하고 와야될 거 아니냐고 한다

 

내가 인기척을 하면 아줌씨 볼일 보다가 놀랠것이라 모른척 지나가려 했는데 뭐 잘못됐소

하니까... 자기들끼리 킥킥거린다. 그리고 아무데나 엉덩이까고 볼일보다 뱀한테

거시기라도 물리면 어쩔라고 그러요 하니까 둘이서 배꼽을 잡고 웃는다

갈길이 멀어 먼저가요 하면서 서둘러 길을 떠난다

밀양박씨 종친의 묘지를 가로 지른다
무안군은 등로 관리하나는 끝내준다
다시 로프를 잡고 아래로 내려오니 관리가 안 된 밀양박공 묘지를 만난다 
꽃장고개(13:05)
126.8봉(13:10)

등로 가운데에 삼각점이 있다 

126.8봉 삼각점(△목포 426 1986재설)
126.8봉을 내려서니 무명묘지 2기를 만나고...
다시 로프 시설을 만나고...
조금을 내려오니 남양홍씨의 종친 묘소가 나오면서 맞은편에 감돈저수지가 보인다
남양홍씨 묘지에서 내려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니 감돈재가 나온다

 감돈재(甘豚峙:60m:)  

무안군 일로읍 감돈리에서 청계면 월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815번 지방도가 지나며

고개아래에는 꽤나 큰 감돈저수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목포대학교가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감돈마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뒷산의 산세가 험하여 은신하여

살기가 좋아 “돈(豚)”자를 써 마을이름을 감돈이라  하였다고 하며 일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감돈리는 북동쪽으로는 몽탄면, 북서쪽 으로는 청계면 월선리와 서남쪽으로는

삼향읍에 접하고 있다

감돈재를 가로질러 급경사의 남양홍씨의 묘지로 올라선다
남양홍씨의 묘지로 올라서니...
남양홍씨 묘지를 치고올라 숲으로 들어서니 오늘 초당대학교에서 감돈재까지 편안 길에다가

이정표가 잘되어 있는 등로를 걸었는데 이곳부터는 잡목이 우거지고 이정표가 전혀없고

오직 가끔씩 나타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과 感으로만 의존해서 가야한다.

마치 庶子의 길을 걷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영광, 함평구간에 비해선 양반이다 

감돈재에서 10분정도를 올라오니 ㅜ자 능선이 나오는데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뚜렸한 등로가 보이긴 하나 잡목과 가시나무가 태클을 걸기 시작하는데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등로에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김밥 한줄로 허기를 때운다

임도(14:00)
일로읍 감돈리에서 청계면 월선리로 넘어가는 임도인듯 싶다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들어서니 무명묘지 1기가 들어서고 잠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기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조금전과는 달리 등로는 뚜렸하다

숲이 꽉막혀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주위에는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우측으로 나있는 뚜렸한 길을 버리고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조금전에 만났던 우회로 다시 합류하는데 이곳부터는 길이좋다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넓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좌측 사면을 치고 오른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으로는 무인감시 카메라가 있고 이정표가 서있다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조금을 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무인감시 카메라 능선에서 바라본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의 모습
헬기장(14:40)
헬기장에서 편한 길을 따라서 1분정도를 내려가니...
기맥길 가운데에 사유지라고 하면서 철조망을 쳐놨다

철조망 좌측으로 우회하여 국사봉으로 향한다

국사봉(國師峰:283m:14:45)
국사봉 정상 3등 삼각점(△목포306 1989 재설)
)국사봉에서 대봉산으로 향하는 등로에는 뱀들이 많이 보인다
뱀들이 햇볕을 쬐기위해 나왔다가 불청객인 산꾼의 방해를 받고 숲으로 도망을 치는데 괜스레 미안스럽기만 하다.
잠시후에 대봉산에 도착한다
대봉산(251m:15:00)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와 유교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대봉산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등산 안내도가 있지만 그 흔한 대봉산 표지판 하나없다

얼마전에 영산기맥을 마치신 송정님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표지판을 걸어놨다

송정님 고맙습니다...외지인들은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대봉산에서 가까운 삼향읍 왕산리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艸依禪師 1786~1866)의 속가이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폄으로써 전래 차 문화를 중흥시켰던 분이다

 

초의(艸衣)선사는 조선 정조 10년(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艸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 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때 나주시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金正喜)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艸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국사봉 등산 안내도가 대봉산 정상에 있다
대봉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나온다
늦은 시간인데 서너명의 등산객들이 대봉산으로 올라온다
안부 능선을 따라서 편안한 길을 걷는다 
기맥 갈림길(15:18)

대봉산에서 18분정도를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다가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잡목으로 인해서 등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157봉(15:25)
157봉에 오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잡목 때문에 전진할 수 없어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송전탑이 나온다
NO 131 송전탑
능선으로 내려서니 폐건물이 보이고...
안부(15:40)
안부에서 직진하여 무명봉에 올라서니 잡목으로 걷기가 상당히 힘이든다
능선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서해안 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장흥위씨와 경주김씨 부부묘를 지나 수로를 따라서 내려선다
수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시멘트 도로를 만나고...

서해안 고속도로(15:55)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니 백록식품이 보이고...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궤적 
주자재에서 바라본 서해안 고속도로
주자재 옆에는 청산향우공령산 비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주자재(16:00)
새벽 5시 10분에 출발하여 10시간 50분에 걸친 긴 산행을 마친 다음에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스틱을 접는다
오늘 산행구간의 기록
이곳 주자재는  자동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거리이다

가뭄에 콩나듯이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히치를 시도해 보지만 아무도 태워주질 않는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는 20분을 족히 걸어야하는 거리인데 도로를 걸어가면서

일부러 도로 가운데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하얀 승용차가 빵빵거린다

40대 중반쯤 되는 여인인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타라고 하여 차를 타고 5분만에

버스 정류장인 있는 죽림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죽림마을 버스 정류장(16:20)

히치한 자동차에 내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전에 차는 가버리고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옷을 갈아입고 베낭을 정리하는 사이에 버스가 지나간다

조금전에 지나간 버스는 좌석버스란다

옷을 갈아입고 베낭을 정리하고 있으니 일로읍에서 버스가 나온다(16:40)

일로읍에서 나오는 108번 버스를 타고 15분만에 목포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목포고속버스 터미널(16:55)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예매하고 터미널 내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그릇에 소주 한병을 마시고 버스를 기다린다
목포발 서울행 고속버스표
목포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오니 밤 10시 20분이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뜯은 고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