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영월지맥(終)

영월지맥 제1구간 - 중말마을에서 관음당(觀音堂)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4. 11. 24.

난고(蘭皐)선생의 추억을 더듬으며 영월지맥 첫발을 내디디다

 

 

☞ 산행일자: 2014년 11월 23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강한바람... 오후 늦게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km / 7시간 1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중말마을-각동봉-680봉-711봉-715봉-고씨동굴 갈림길-915봉

                 905봉-헬기장-전망대-1,025봉-태화산-달곳갈림길-1022봉-부부 복숭아 농장

                홍교마을 입구-당집-포장도로-흰깃재-570봉-임도-달돋이봉-조전고개-암봉-

                국지산-헬기장-484봉-450.8봉-444봉-이동통신중계기지-관음당고개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읍, 남면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지난주에 5년11개월간 맥산행의 대장정을 마치고나서 이젠 이짓거리 안하고 주변의

가까운 산만 사부작 사부작 다니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조그만 현장을 마무리하고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고 있는데 금욜에 인테리어 업계의

후배 장인이 별세하는 바람에 밤늦게 전남 영광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집에오니 새벽 4시다

집에 오자마자 잠을 청하려고 했는데 너무나 피곤한 탓인지 도대체 잠을 이룰수가 없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샤워를 끝내고 오늘이 음력 10월 초하루라 평소에 같이

모임을 하던 지인 스님께서 교구본사에 계시다가 사찰 주지로 임명 받아서 진산식(취임식)을

하는 날이라 부지런히 절에가서 취임식에 참석한 다음에 오후 늦은 시간에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완전히 파김치가 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또 저녁에 가족모임이라 강서구까지 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되고 너무 힘이 들어서 못가겠다고 핑계를 되면서 빠진다

어치피 가족들에게 왕따를 당하는거 확실하게 당하는 셈이다

 

너무 피곤하여 잠이오질 않을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소주 한병을 마시고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3시반쯤에 잠에서 깨니 할 일이 없어지는데 멍하니

앉아 있다 컴퓨터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다가 영월지맥이 눈에 들어오기에

지도를 한 장 출력을 하고 영월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6시에 집을 나선다

 

 

영월지맥이란

한강기맥 상에 있는 삼계봉(1,065m)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태기산(1,261m), 덕고산(705m), 봉화산(670 m), 풍취산(699m), 매화산(1,085m), 치악산 비로봉(1,288m),

로봉(1,043m), 남대봉(1,182m), 감악산(954m), 감악봉(886m),석기암(906m), 용두산(871m), 왕박산(598m),

가창산(820m), 삼태산(876m), 국지산(626m), 영월의 태화산(1,027m)을 거쳐 남한강에서 가라 앉는 산줄기를 말한다

 

신산경표(저자 박성태님)에는 영월지맥, 춘천지맥이 따로 이면서도 일반적으로는 ‘영춘지맥’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영춘지맥’은 십수년전 남한 100지맥의 원조(?)이신 박성태님이 한강기맥에서 남과 북으로

가지를 친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보태 ‘영춘지맥’으로 월간지에 소개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박성태님의 고견을 요약해 보면,

한강을 가두는 큰 울타리는 한북정맥-백두대간-한남정맥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하여 본류를 이루는 팔당댐 이후는 한강하류로 따로 두고,

그 윗부분을 한강기맥이 횡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고, 영춘지맥이 종으로 상류와 중류로 나눈다고 봤다.

 

즉, 횡으로 나누는 한강기맥은 북한강과 남한강을 구분짓고,

종으로 나누는 영춘지맥은 한강의 중, 상류를 구분 지으면서 위쪽(춘천)은 강원도와 경기도를,

아래쪽(영월)은 강원도와 충청도를 나누는 큰 줄기로 보았다.

 

(박성태의 두발로 읽은 산경표: http://user.chollian.net/~park56eh/index.htm)

박성태님이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종주한 후 지맥이 갈리는 한강기맥의청량봉~장곡현~구목령~삼계봉 구간

11km를 합하여 약 272여km를 "영춘지맥"이라고 불렀다는데 지난해 한강기맥을 걸으면서느낀 것은 엄연히

춘천지맥과 영월지맥이 확연히 구분이 되어 있는데영춘지맥으로 부르는 것에 대하여 난 그 부분에 조금은

동의하기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영월지맥으로 부르기로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영월행 버스표

동서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20분경 영월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에 화장실에 가는데 ‘이게 누구야’ 여기서 芳草님을 만난다.

지난 2월에 천마산 구간에서 만나고 또 만나니 딱 10개월 만이다

방초님은 화악산 실운현을 가기위해 사창리가는 버스를 타러가는 중이란다

너무나 아쉬워 캔커피 하나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영월가는 버스(07:00)

버스에 오르는데 마치 눈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음산한 날씨다

하기야 11월부터 베낭에 아이젠과 스패치가 들어 있기에 큰 걱정은 없다마는

그래도 은근히 걱정이 된다... 동서울에서 영월가는 버스는 모두 다

28인승 리무진 버스라 요금은 생각보다 상당히 비싼 느낌이다

28인승 버스에 손님이라고는 달랑 7명뿐... 편하게 가는데 따뜻한 히터

덕분에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I.C를 빠져 나오면서 잠에서 깬다

버스는 2시간 15분 정도 걸린 다음에 영월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영월시외버스 터미널(09:15)

20 몇년만에 영월읍에 와본다... 태백에 있는 친구한테 여름마다

휴가를 태백으로 갈 때 들리고 안 왔으니 참으로 오랫만에 온 셈이다

이곳에서 내려 각동리 중말마을가는 버스시간을 물으니 첫차는 08시 50분이라

조금전에 출발을 해버렸고 다음차는 11시 20분이라 부득히 택시를 탄다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각동리 중말마을로 향하는데 청령포와

고씨동굴을 지나서 20분정도 걸린 다음에 중말마을회관앞에 도착한다

택시비는 17,800원이 나오는데 17,000원만 받는다

각동리 중말마을(09:40)

영월군 김삿갓면(예전엔 하동면)에 속한 마을로서 예전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해서 뱃나드리라 불렀던 곳이라고 한다

단양군 영춘에서 오면 각동리의 마지막 마을로 각동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옥동으로해서 상동 황지로 이어지고 좌로는 진별리 정양으로 해서 영월과 정선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오사리를 거처 영춘 단양 충주를 거처 서울로 이어지는 각동의 나루터이다.

이곳은 1950년전만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계곡 사이로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옷감) 석유 등의 생필품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으며 1960∼70년 전만 해도 상선이 드나들며 어물 소금 등의

생활필수품과 곡식을 물물 교환하던 곳으로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던 곳이다

한강과 옥동천의 합수지점으로 수심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에 좋다.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마을회관 앞에서 내려 스틱을 펴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산행을

준비하는데 이곳은 말 그대로 강원도라 그런지 꽤나 손이 시리다

그래도 반 장갑을 낀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 셧터를 누르기

위해서는 긴 장갑은 벗었다 꼈다하는게 불편하여서...

하늘은 잔뜩 흐리기만 하다... 금방이라도 눈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른 포장도로를 따라서 산행을 시작한다

등로에 오르면서 뒤돌아 본 남한강의 모습

영월하면 가장 생각나는게 김삿갓, 고씨동굴, 단종 등등... 하나같이 슬픈기억이다

가장 청정한 강중에 하나인 저 남한강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흘러만 간다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묘지가 있는 곳에서 우측 도로를 따른다

순천박공과  영월신씨의 부부 합장 묘를 지나... 조금을 더 가다가...

포장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다시 밭 가운데를 가로 지른 다음에 묘지를 지나 포장임도를 만난다

안동막가님의 시그널

지나신지가 얼마되지 않았나봐요?

포장임도를 계속해서 따라간다

밤나무를 심어논 밭 끝부분에 도착하여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면서 본격적인 영월지맥 능선으로 접어든다

좌측으로 조금전에 지나온 밭을 끼고 올라서니...

자연석으로 묘지 담장을 친 무명묘지 몇기를 만나고...

솔잎으로 뒤덮인 묘지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아 큰 어려움은 없다

영월은 산은 지금 한 겨울이다

양지바른 곳에 있는 무명묘지를 지나면서 코에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로

오르는데 낙엽이 수북한 탓이진 길은 미끄럽고 엄청나게 힘이든다

계속해서 급경사의 오르막에 시간이 예상보다 상당히 지체가 된다

이곳 아래가 고씨동굴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등로에서 만나는  바위가

한결같이 판석인데 푸석푸석하고 힘이없어서 만지면 그냥 부스러진다

또다시 급경사를 치고오르는데 자꾸만 낙엽에 미끄러진다

힘들게 치고 오르니 이 높은곳에 또다른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난다

멧돼지 넘이 봉분을 자기 놀이터인줄 알고 난도질을 해놨다... 나쁜 넘의 쉬끼

시골의 우리 부모님 묘소도 잘 있는지 모르겠다

620.8봉(11:00)

지도상에 620.8봉이라 표기되어 정상에 오르니 서레아 박건석님께서

각동봉이라 표시한 코팅지가 붙어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정상에는 삼각점과 함께 오갈피 나무들이 보이지만 전망은 전혀없다

620.8봉 삼각점(△예미 441 / 2004 재설)

이곳까지 오르는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며칠전부터 오른쪽 무릎의 통증이 심해지더니 이젠 꽤나 아프다

그래서 귀찮기만 한 무릎보호대를 다시 착용하고 에어파스를

뿌려 보지만 통증 때문에 천천히 걸은 탓이라 속력은 나질 않는다

620.8봉 정상의 오갈피나무

이곳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급경사를 내려서는데 또다시 무릎 통증은 시작되고...

급경사로 내려선 다음에 안부에 도착하니 큰크리트 말뚝에 ‘山’이란 표시가 있다

680봉(11:20)

온 세상을 다 안아줄 것만 같은 울 님만큼이나 넉넉한 갈참나무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628.8봉에서 고씨동굴 갈림길까지는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무릎 통증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힘이 든다... 능선의 나뭇가지 사이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715봉(11:30)

괴목골 갈림길(11:35)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각동리 괴목마을 내려가는 길이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龜岩)가 있어 구암이라고도 한다

미끄러운 낙엽길을 따라 올라서니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정표가 보이는 T 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고씨굴 갈림길(11:50)

고씨동굴(高氏洞窟:천연기념물 제219호) - 사진 펌

고씨'는 조선시대의 선비 '고종원'으로1538년 5월에 태어났다.

1592년 일본이 한국으로 처들어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고종경을 도와

식량과 무기를 모으고 일반 사람들을 모아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왜군에 밀려 병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며 하여 동생은 사형을 당했다.

 

고종원은 일본군이 이 영월지역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지금 이 동굴속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적이 동굴에 불을 지펴

산채로 잡으려고 하자 부인은 남편을 도망갈 수 있도록 해주려고 동굴 속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그 후 또 다른 아우 고종길과 함께 적군에 잡혀 있다가

탈출하였지만 아우는 적군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부인과 두 아우를 잃은 고종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4월 20일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모두 기록하였다.

고종원의 가족이 동굴 속으로 피했다고 하여 이 굴을 고씨굴이라 부른다고 한다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 48만 762m2,

길이 약 6km의 동굴로 약4억년 전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굴 안에는

4개의 호수를 비롯하여 3개의 폭포, 10개의 광장 등이 있으며,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종유석, 석순, 석주들이 조화있게 배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동굴 안의 가온은 항상 16도씨를 유지하며, 박쥐, 흰새우, 흰지네 등 동굴동물이 서식하고

그 밖에 신속1, 신종7, 신아종7의 동물이 새로 판명되었다

고씨굴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조금가니 송전탑이 철거된 흔적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서 걷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오르막 오르면서 흘린 땀이

식으니 상당한 추위를 느낀다... 서둘러 윈드 자켙을 꺼내 입는다

용도 폐기된 전봇대도 만나고...

우회로 가라는 로프도 보이고...

915봉(11:55)

능선 아래 남한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상당히 매섭다

915봉을 우회에서 오니 우측으로 태화산성과 팔괴리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태화산성 0.3km라는 이정표에 가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무릎이 신경쓰이고 늦게 산행을 시작한 탓에 아쉬움을 접고 태화산으로 향한다

 

태화산성은 강원도 영월  태화산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영월에 있는 대야성, 정양산성, 영춘산성과 동일한 시기(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다른 산성들이 돌로 추조된 석성(石城)으로 실전에 사용된 반면, 4개 산성중에

가장 높은곳에 위치해 있었던 태화산성은 토성으로 적정을 감사히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전하는

사령탑 역할을 했던 산성으로 태화산 능선 해발 900m에 자리잡고 있으며 길이가 약 400m, 둘레가

1,200m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성 내무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축조한 산성)이다

915봉을 지나면서부터 이정표를 너무 자주 만난다

남한강 아래에서 불어대는 강한 바람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꽤나 춥다

능선 너머로 계족산이 살짝 보이고  아래로는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이 보인다

헬기장(12:00)

헬기장 주변으로는 새로 식재한듯한 느낌을 주는 갈참나무 군락지가 있다 

다시 호젓한 길을 따라서 태화산으로 향한다

남한강 위로 형성된 雲海는 말 그대로 환상적...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진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소같은 포토죤도 보이고...

암릉구간을 지나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전망대(12:15)

저 너머가 두위지맥이고 그 너머로 백두대간 능선의 태백산이다.

이곳 영월이 단종이 유배된 곳이고 태백산에는 단종비각이 있고,

소백산 고치령에는 금성대군을 모신 山靈閣이 있어서 흔히들 兩白之間이라 한다

삼촌인 세조에게 이곳 영월땅으로 유배당해 와 있을때 역시 삼촌이었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정축지변(순흥땅의 단종 복위사건)을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참형된 두 사람의 혼백의 아쉬움을 이 산꾼에게

말하려는지 태백산에 떠있는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 하기만하다

태화산으로 가는 이정표

죽어서도 고상함을 잊지않는 故死木

1,025봉(12:30)

조금전 지났던 전망대에서 15봉정도 걸으니 또다시 전망대가 나오는데 정상에는

나무 의자 2개가 놓여있고 앞이 확트인 조망이다.

능선 아래로 천길 낭떠러지이고 협곡을 이루며 도도히 흘러가는 남한강이 보인다

예전에 하동면으로 불리웠던 곳으로 지금은 김삿갓면으로 불리는 각동리 생곡마을이다

강폭이 좁은 남한강은 마치 뱀처럼 꼬부라져 흘러 가는게 정말 환상적이다

영월군은 예전의 지명과 바뀐곳이 참으로 많다

지금 이곳은 예전에 하동면으로 불리웠던 곳이고, 서면은 남한강이 흐르면서 생긴 지형이

마치 한반도의 지도처럼 보인다고해서 지금은 서면에서 한반도면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곳이 김삿갓면이니 김삿갓을 한번 알아보고 가봐야겠다

 김삿갓의 호는 난고(蘭皐)였고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으로 조부인 김익순(金益淳)은 당시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로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되고이듬해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때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중 김성수(金聖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으며 이후 조정의 벌은 멸족이 아닌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게

되어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게 되는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순조 32),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에서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시제(詩題)

김익순의 죄에 대하여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여 장원을

하게 되는데 난고가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모친이 그 동안 숨겨왔던 내력을 들려준다 

 

난고는 너무나 기막힌 사실과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문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멸시로 인해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을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난고 김병연은 죄인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에 죽장(竹杖)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김삿갓의 묘

금강산 유람으로 방랑의 생활을 시작하여 서울,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제주도를 돌았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 몇 해 동안 훈장생활을

였으며 전라도 동복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김삿갓면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블로그: 가고싶은 산하 천장도인님 자료인용

 

漂浪一生嘆 (표랑일생탄)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我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아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건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해보니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 먼데

난고(蘭皐)선생을 생각하며 걷다보니 로프가 설치된 암릉구간을 만난다

큰골 갈림길(12:35)

이곳은 영월읍 흥교리 큰골 갈림길이다

큰골은 흥월리 남동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차고 깨끗한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 한다 

큰골 갈림길에서 2분정도 지나니 또다시 암릉구간이 나오고 나무다리를 만난다

나무 다리를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사람소리가 많이 들린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등산객들을 만나는데 아마 큰골에서 태화산으로 가는 모양이다

왁자지껄하면서 즐거운 점심상을 펼치고 먹다가 혼자가는 나를 부르더니 뭘 좀 먹고 가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태화산으로 향한다

영월의 겨울산에는 겨우사리들이 많이 보인다

올해는 겨우사리  수확을 좀해야 할텐데

태화산1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면서 좌측으로 돌아서 올라선다

속이 텅빈 나무

좌측 능선에 올랐다가 묵묘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태화산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태화산에 온 등산객을 만나는데 오늘 마지막 산에서 만난 사람이다

태화산 정상에서

태화산(太華山:1,027m:12:45)

강원도 영월군 남면 ·김삿갓면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화산(大華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영월 사람들은 화산이라고도 부른다.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백두대간 줄기인 내지산맥(內地山脈)에 속한다.

산세는 대체로 완만한 편이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 끝에는 남한강이 U자형으로 곡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고 쓰고 있다.

 

『영월군읍지』에는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읍의 안산(案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월부읍지』와 『여지도서』에는 "부의 남서쪽 16리에 있다.

원주 사자산 동쪽으로부터 뻗어 나온 읍치의 안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화산에는 고려 시대의 돌과 흙의 혼합축성법으로 쌓은

태화산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집안에 남매 장수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성(城) 쌓는 내기를 시켜서

이기는 자식을 키우기로 하였다. 아들인 왕검에게는 정양리에 돌성을 쌓게 하고

딸은 태화산의 흙성을 쌓게 했는데 어머니가 보니 딸이 아들보다 먼저 완성할 것

 같으므로 흙성을 무너뜨리자 딸은 흙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왕검성은 지금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으나

태화산성은 무너졌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 온다.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지승』에 태화산이 표시되어 있다.

산의 기슭에는 문짝처럼 생겼다 하여 '문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뒤에는 둥글고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대여섯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잘바우'라 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안산(案山)으로 나오고, 군내면 상송리에 있는 것으로 쓰고 있다

태화산 정상 삼각점(△영월23 / 1995 복구)

태화산 정상을 지나니 이곳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바람이 불지않는 옴빡한 곳에서 점심으로 가져온 고구마와 감 하나로

점심을 먹고 보온통에 가져온 물로 따뜻한 커피를 타서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달곳 갈림길(13:05)

흥월리의 중심 마을로 산을 뜻하는 옛말인 '달'이 변하여 형성된 달곳,

다리,다릿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태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흥월리는 마을의 지형이 반달모양이므로 월곡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으며 고려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가 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이 두 마을을 합하여 흥월이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큰골, 아랫말, 작은골, 뒷뒤실, 점골, 달골, 다릿말, 흥교 등이 있다.

이곳 흥월리는후고구려( 태봉)을 창건한 궁예가 승려로 있었다는 세달사(世達寺)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정표(13:15)

능선에 오르니 좌측 이정표에 ‘태화산 등산로 정상까지 10분’이 비스듬히 서있고

우측의 이정표에 ‘←단양.영춘 ↑영월.흥교’가 서있는데 원 지맥길은 좌측 단양.영춘

쪽으로 올랐다가 능선을 타고 우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은 길이없고 잡목이 너무 심하여 우측 영월, 흥교쪽으로 향한다고 하여 나도 그 길을 따른다

우측으로 내려오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좌측 사면길을 걷는다

우측에는 벌목을 하고 새로이 나무를 심어논 조림지가 보이고...

옆사면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원 지맥길 능선으로 내려오는 길을 만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야할 국지산은 운해가 환상적이다

예전에 흥교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마을 지명이 되었다는 흥교마을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또다시 무릎통증은 시작되고...

엄청나게 급경사의 구간을 한참동안이나 내려와야 하고...

급경사를 내려오다가 이장한 묘자리의 흔적이 있는곳에 도착했어야 등로는 유순해진다

갈림길(13:40)

묵묘를 지나니 ‘→ 등산로’라는 표지판을 붙혀논 갈림길이 나온다

원래 지맥길은 직진이나 우측으로 등산로를 표시해놨고 대다수의

선답자들이 우측으로 향했는지 시그널이 그쪽으로 붙어 있지만

난 우측이 아닌 직진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선다

등로를 따라 2분정도 내려오니 시커먼 그물망을 진 비닐하우스가 나오고

개쉬끼 2마리가 난리부르스를 치며 산꾼을 향해 잡아 먹을듯이 짖어댄다

내려와서 뒤를 돌아보니 태화산 ‘복숭아 농장’이란 간판이 보인다 

나를 잡아 먹을듯이 짖어대던 저 넘이 도로 아래로 내려오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등로에서 내려와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간다 

원형 스텐레스 저수조가 보이고 우측으로 꺽어져 밭으로 내려선다

밭 가운데를 지나서 다시 등로로 접어들고...

밭 가운데를 통과하여 등로에 오르니 묘지 2기가 보이고 잡목이 성가시다

길이 거의 보이지 않은 곳에 선답자의 시그널... 존경스럽다

간벌한 나무가 마구 널부러져 있고 특히 아카시아 나무가 상당히 괴롭힌다

잠시후에 등로 가운데에 있는 당집을 만난다

당집(14:00)

당집이란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해 음력으로 정월에 제를 지내는 곳이다

당집을 지나니...

소나무 숲사이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 좌측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배추밭과 흥교마을이 보인다

등로가 없는 조그만 봉우리에서 원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져야 하나

이곳은 절개지에다 길이 전혀 없어서 좌측으로 내려서 도로를 따른다

흥교마을 입구(14:10)

흥교마을 입구에서 우측 포장도로를 따라간다

시골마을인데도 포장도로가 잘되어 있다

흥교재(14:15)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Y자형 삼거리로 고개에는 ‘흥교재 나그네 쉼터’라는 정자 하나가 산꾼을 반긴다

이곳 우측 아래에 있는 흥교리(행정지명 흥월리) 흰깃마을 있어서 흰깃재라고 부른다

 

영월의 흥교사(興敎寺)를 신라 때는 세달사(世達寺)라 했는데, 후고구려를 세운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가 이곳에서 중이 되었다고 「삼국사기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弓裔 便去世達寺 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

 

또한 흥교사가 세달사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卷三에 있다.

『昔新羅爲京帥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奈 李郡 按地理志

溟州無奈李郡唯有柰城郡 本奈生郡 今寧越,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莊舍(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그후, 궁예는 환속하여 892년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진(陳)을 치고 내성(奈城, 영월), 주천(酒泉), 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진부)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천에 있는 법흥산성, 도원산성 그리고

북면의 공기산성이 그 당시에 쌓았던 성(城)으로 추정된다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의 부패가 심해져, 돈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오면 돈과 물건을

빼앗은 뒤 마을 뒤에 있는 사굿구덩이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곳 흥교사는 빈대가 많이꼬여서 결국은 절에다가 불을 질렀는데 절집이

보름간을 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전 객토를 위해 땅을 팔 때 절터에

타다 남은 기둥과 숯이 나왔었고  그 절터인 흥교분교 운동장에서 1984년 높이가 6.5cm,

둘레가 2.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흥교사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음을 알 수 잇는 것은 이곳 절터에서 영월 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개와(蓋瓦)가 발견되었는데,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띠무늬(蓮侏文)가 그려진 암막새(암키와 끝에 드림새를 붙이는 개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부도나 고려 청자 파편, 석탑조각들이 그 흔적을 남긴 채 널려있다.

흥교재 나그네 쉼터

영월지맥길은 이곳 정자뒤로 올라선다

좌측 임도로 걸어가도 5분후에 다시 등로와 만난다

다시 임도(14:20)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이곳은 지금 한참 간벌중이다

오르막 우측으로는 버섯이나 약초의 재배단지 같은데 나무에 철조망을 쳐놨다

지나온 태화산의 모습

570봉(14:28)

임도에서 급경사로 올라서니 산불감시초소와 멋진 소나무가 있는

570봉이 나오고 이쪽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낙엽이 수북한 등로에는 길이 잘보이질 않는다

뉘신지?... 처음뵙는 시그널이네요

임도(14:33)

등로에서 임도로 내려서서 직진길로 등로를 이어간다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국지산으로 향한다

다시 편한 임도를 따라가니... 잠시후에 송전탑이 보인다

NO 16 송전탑(14:40)

송전탑을 지나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꽤나 깊어보이는 함몰지를 만나는데 겨울엔 상당히 조심해야 할듯 싶다

고도를 계속 높이며 올라가는데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면서 힘이든다

다람쥐 옹달샘(?)

달돋이봉(606.8:14:50)

힘들게 치고 오르니 잡목이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는 지도상의 606.8봉에

서레아 박건석님께서 달돋이봉이라는 코팅지를 달아놨고 너무 낡아버려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카스테라 하나와 커피 한잔으로 허기를 달랜다

606.8봉 삼각점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국지산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에 또다시 함몰지역을 만나고...

소나무숲 사이의 편한길을 따라서 빠른 걸음으로 조전고개로 향한다

재선충 방재지역을 지나고...

좌측으로 희미한 임도길이 나오나 지맥길은 뚜렸한 우측으로 꺽어진다

조전고개(473m:15:20)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서 남면 조전리를 넘어가는 고개이며

조전리에서 영월읍내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고개로

이곳에 문(門)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문고개라고 부르는 곳인데

지도상에서 이 고개 부락의 지명을 따서 조전고개라고 부른다

民草들이 걸어던 희미한 능선과 성황당의 흔적같은 돌무덤이 있으며

특이한 형태의 송전탑을 만난 다음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갈림길(15:25)

조전고개에서 5분정도 오르막을 오르니 흥월리에서 올라오는 ㅜ 자 능선을 만나

좌측으로 꺽어져 국지산으로 오르는데 바라보는 국지산이 왜 저리도 높아 보이는지...

지나온 태화산의 모습

국지산 오르기전에 낙타봉우리 같은 무명봉으로 오르락 내리락 한다

능선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영월읍이 보이는데 똑닥이로는 인식이 안된다

가야할 국지산의 모습

송전탑이 철거된 자리도 지나고...

국지산을 오르기 위해선 암릉구간을 올라야 한다

너무 힘들다

넓은 안부에 올랐는데 이곳이 국지산이 아니고 다시 봉우리 하나를 더 오른다

영월읍이 희미하게 보이며 그 너머로 황병지맥 능선이 보인다

국지산(菊芝山:625.6m:15:50)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과 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조선조 제 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5km 전방에 솟아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3등 삼각점이 있다

산의 지세가 고구마처럼 길게 자리를 잡고있고 산 아래에 국화처럼 생긴 국지골이

있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영월읍의 안산인 태화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산세가 유순하고 부드러워 가족 산행지로는 최적의 산이다.

 

북으로는 영월읍을 감싸고 있는 봉래산과 계족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완택산과

고고산이 보이며 두위지맥인 계족산과 응봉산, 만경대산이 긴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남동쪽 흥월리 건너 지나온 태화산의 모습이 보이고 신선봉, 국망봉,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소백산 주능선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기도 한다

국지산 삼각점(△영월308 / 2004 재설)

부드러운 산이고 가족 산행지로는 최적의 산이라고 안내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그런지 못한것 같다... 우선 정상에 오르는 길이 암릉구간이라

여간 까탈스러워 가족 산행지로는 위험하고 정상에 오르니 정상석 이왼

아무것도 볼 것도 없는 그저 오지의 산에 불과하다

국지산 정상에서 조금 지나니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좌측은

급경사의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이곳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질

않아서 주의가 요망되는 구간이다

급경사로 내려오는데 마사토에 낙엽길이라 상당히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는데

집안 조카한테서 전화가 온다... 다급한 목소리로 종만이 형 부인이 별세했다고 한다

우째 이런 일이~~~ 이 친구는 나와 한 고향친구로 나이가 동갑이라서 참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부인이 6년전에 백혈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고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 지난 6월에 이 친구를 만났을 때는 많이 호전되서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술 한잔을 같이 하였는데 이런 비보를 받으니 가슴이 아프다

부디~~~ 왕생극락을 기원한다... 낼은 아무래도 장례식장에서 밤을 세워야 할갓 같다

헬기장(14:05)

헬기장에서 바라본 국지산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영월군 남면 조전리 외내기골의 모습

북쪽 산에서는 보기드문 감나무를 만난다

484봉(16:10)

잣나무 숲을 만나면서 등로는 거의 보이지 않으나 좌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희미한 능선 분기봉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이곳은 등로가 희미하여 잘보이질 않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없어 신경쓰야 한다

450.8봉(16:25)

관리가 안된 묘지를 지나고...

444봉(16:38)

등로 아래에로는 여유로운 조전리의 농촌풍경이 조망되고...

검은 돌이 깔려있는 등로를 지나니... 이동통신 중계기지가 나온다

이동통신 중계기지(16:45)

이동통신 중계기지를 지나면서 빠른 걸음으로 관음당 고개로 향한다

능선 끄트머리에서 급경사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도로가 보인다

드디어 관음당재로 내려선다... 어둡기 전에 고개를 내려서면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더군더나 초반에 무릎 통증으로 인해 고생을 많이했고, 더군더나 해가 많이

짧아져 걱정을 했는데 무사히 마무리 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쉰다

관음당재(觀音堂峙:352m:16:50)

영월군 남면 연당리 승당(昇堂)에서 조전리(진밭)의 상촌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로

영월에서 충북 단양군 춘양면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지나가며 고개 정상에‘조전리’라는

표시석이 서 있는 조그만 소공원이  자리를 잡고있는 고개이다

 

고려 인종의 아들인 충희(沖曦)대사가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에 있을 때, 그 절에 봉안할

부처님(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이 고개에서 쉬었다가 넘어갔으므로 '관음당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이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산마루에 당(堂)을 세웠는데, 지금도 관음당재로 오르는

당마루 밑의 마을을 '오를 승(昇)'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승당→신댕이→신댈'이라고 부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기록

이곳은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다

산행을 마무리하면서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지나가는

차량을 상태로 앵벌이(히치)를 시도하는데 역시 차량 인심은 강원도가 최고다

10분만에 1톤트럭이 오길래 손을 들었더니만 차를 세우더니 타라고 한다

아마 농삿일을 하시는 분 같은데 어디가냐고 묻길래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

달래기는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서울을 가야하는데 버스를 탈 수 있는데

내려 달라고하니  이곳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곳이라 하면서 버스를 타려면

19시 20분이 되야 버스가 온다고 하면서 영월 버스터미날에 내려 주신다... 감사합니다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18시발 동서울행 버스표를 예매하고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간단하게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분식집에 들어가 유부우동에 김밥

한줄을 먹으면서 조금 아쉬워 옆에있는 매점에서 캔맥주를 하나 사먹었더니만

젊은 쥔장이 자기 아들 혼내듯이 무지하게 꾸지람을 한다

이곳은 학교근처라서 음식점에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목이 너무말라

먹었노라고 양해를 구한다... 담부터 절대 안그러겠노라고... 담에 올일도 없지만 ㅋㅋㅋ

영월발 동서울 버스표

식사를 마치고나니 15분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화장실에 들려서

양치질을 한 다음에 버스에 올라서 여느때의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버스는 문막을 지나 여주 휴게소에 지나면서 차량이 엄청나게 밀리기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 예상 도착시간보다 1시간정도 늦은 시간에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집에오니 밤 10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