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을 하면서 숏다리의 悲哀를 참으로 많이 느낀 하루
☞ 산행일자: 2014년 12월 25일
☞ 산행날씨: 맑고 쾌청함... 강한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17km + 어프로치 5.9km / 9시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동막고개-주택단지-NO11 송전탑-특용작물 재배지-NO 7송전탑-NO 8송전탑-690봉
용두산-송한재-867봉-오미재(못재)-728봉-피재점-768봉-석기암-906봉-헬기장
문바위 갈림길-824봉-데크목 전망대-감악봉-감악산 월출봉-감악산 일출봉-백련사
마당바위-감악고개-825봉-816봉(천삼산 분기점)-693봉-680봉-싸리치-마지 버스 정류장
☞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고암동, 송학면, 봉양읍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지난 주는 정신적으로 참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도반이자 가장 절친했던 법우였던 자운(慈雲)법사님이
열반하시는 바람에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기분으로 멍하니 보냈다
지금 금방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실건만 같은데 그게 현실이 아닌 一場春夢이 되버렸으니...
生이란 이리도 허무하단 말인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땐 산행이 최고인듯 싶다.
오늘은 타 종교 교주님의 생신이어서 달력엔 빨간 글씨라 특별히 할 일도 없고하여
이른 새벽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컴퓨터에서 지도한장 출력하여 영월지맥 4구간을
가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제천 세명대행 버스표(06:30)
선릉역에서 지하철 첫 차를 타고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버스표를 에매하고 평소에 들리는
식당에서 부대찌게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양치질까지 한 다음에 제천가는 버스에 오른다
세명대 교정안 버스정류장(08:35)
동서울에서 손님이라곤 달랑 8명을 태우고 제천터미널에 7명을 내려주고 나 혼자
태우고 세명대학교 안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내려주고 버스는 타시 제천터미널로 향한다
세명대학교 버스 정류장
세명대학교 정문
버스에서 내려 정문을 지나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동막고개로 향한다
사거리를 지나 직진을 하니 SK 주유소가 나오고 잠시 후 동막고개에 도착한다동막고개(東幕峙:08:50)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 있는 고개로 동쪽에 막을 친 것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동막'은 다른 지역에도
흔히 보이는 지명이므로 한자 지명에 맞춘 인위적 설명에 불과하다
동막마을에「효자 박전(朴瀍)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마을이다
효자 박전 이야기의 전반부는 효박전(朴澱)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병환이 든
아버지를 살리고, 후반부는 아버지가 음력 6월에 배를 드시고 싶다 하자 죽음을
무릅쓴 지극 정성으로 배가 든 작은 상자 궤짝을 구하여 드렸다는 효행담이다.
세명대학교에서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동막마을이 있고, 이 마을을 지나는 길옆에 박전효자문이 위치하고 있다
4일만에 다시 동막고개를 찾는다... 이곳에 오니 4일전과는 달리 그리 춥지는 않다
고개 정상에서 베낭을 내리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다음에 스패치와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틱을 편 다음에 도로 좌측 절개지로 올라서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절개지의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눈 덮인 밭이 나오고 좌측 주택단지 도로로 올라선다
빙판이 되어버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우측 소나무 사이로 동막마을이 보인다
장어나라라는 음식점이 나오고 아마 이곳은 택지분양을 하는데 잘 안되는 모양이다
넓은 택지엔 집이라곤 달랑 서너채만 있는 황량하고 택지부지에 잡초만 무성하다
택지 끄트머리에서 본격적인 등로에 접어든다
초입에 있는 나무에 걸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홀로 걷는 산꾼을 격려한다
처음부터 희미한 등로로 오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후에 NO11송전탑이 나오고...
NO 11송전탑(09:18)송전탑을 지나니 좌측으로는 밭이 보이고 등로 우측에 原州李公과 부인 江陵柳氏 합장묘가 있다
다시 등로를 조금가니 좌측으로 밭과 호화묘지 몇 기가 보이고 영월지맥길은 우측 산으로
접어들어야 하나 특용작물 재배지역이라 철조망이 처져 있고 길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험한 구간에도 선답자들이 지나 갔는지 시그널이 보인다
기왕이면 원칙대로 가고 싶어 편한 등로를 버리고 험한 구간으로 올라섰는데
후회가 막심하다... 길은 없고 철조망에다가 잡목의 저항이 초반부터 엄청나게 심하다
힘들게 능선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일반 등산로가 보인다
철조망을 통과하니 출입금지 팻말에는 도둑으로 오해 받을 수 있으니 출입하지 말란다
등로 합류점(09:40)
편안 등산로를 따라서 용두산으로 향한다
용두산이 제천의 진산이라 그런지 오르내리는 등산객을 심심찮게 만난다
등로에서 만난 이정표(09:45)
용두산 오르는 등산로의 소나무들은 비교적 건강하게 보인다
NO 7송전탑(09:47)NO 8송전탑(09:52)
NO 8송전탑을 지나자마자 편안 등산로를 버리고 우측 길이 없는 곳으로 꺽어진다
우측 지맥길을 들어서니 바로 뒤따라 오던 등산객이 아저씨 그리 가면 길이 없는데
하면서 내려오라고 한다... 암 말없이 오른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
능선 오르는 길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만난다... 대단혀요
690봉(10:00)
690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등산로와 만난다
오르막 등로에서 돌탑을 만나고...
등로 곳곳에는 휴게용 벤치들이 보이고...
용두산 정상 오르는 길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드디어 제천의 진산이라는 용두산 정상에 오른다
정상은 넓은 헬기장에다가 삥돌아 휴게용 벤치들이 설치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앙증맞은 오석으로 만든 용두산 표시석이 서있다
용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제천시내조선조 영조 때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 종환은 제천땅에 대한 기록을 저술하기를 “만첩 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동사강목』을 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제천에서 태어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한 곳이며 직제학을 지냈던
원호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 벼슬을 내놓고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번자리에
살면서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원호는 날마다 이 정자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고 탄식하다가 날이 저물면 비로소 돌아가고는 하였으며, 철 따라 나는 과물(果物)을 나무 상자에
넣어 정자 밑을 흐르는 시냇물에 띄워서 단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제천시는 본래 고구려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청풍으로 고쳐 내제군(奈提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충주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1317년(충숙왕 4) 이 고을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660년(현종 1)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제천군에 병합시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였다가 1917년에 청풍면으로 고쳤다.
지명의 유래는 이곳의 산천경개가 빼어나 남도의 으뜸으로 쳐, 이에 따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한 데에서 따온 것이며 조선시대에는 진산(鎭山)인 인지산(因地山) 부근의 남한강유역에 한벽루(寒碧樓)가
있어 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군사적으로는 오현봉수(吾峴烽燧)가 있어 동쪽으로 단양군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와
서쪽의 충주 심항산봉수(心項山烽燧)에 연결되었다.
오늘 동막고개에서 용두산까지 내가 걸었던 등로의 궤적
용두산(龍頭山:873m:10:25)
충북 제천시 모산동과 송학면 포전리,도화리, 오미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용두산이라는
명칭은 산 모양이 용의 머리 형국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용 신앙과 관련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용두산이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용두산은 감악산의 줄기이다.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산 정상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동쪽으로 가라곡현(加羅谷峴)·이치(梨峙)·삽현(揷峴)·조흘치(助屹峙)가
되며 동남쪽으로 솟아나 오작산(烏鵲山)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서쪽으로 석기암, 감악산과 이어지고 용두산에서 발원한 물이 용두천을 이룬 뒤 의림지로 흘러든다.
용두산 서쪽 862m 봉우리는 황소가 드러누운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석기암과
감악산, 멀리 치악산 남대봉 줄기가 보인다
용두산은 의림지로 흘러드는 수원의 발원지로 제천시의 상징적 진산으로 따라서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의림지를 지나 제2의림지 오른쪽 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오르면 용담사 대웅전 앞에 이르고, 용담사에서
약 100m 올라가면 동릉과 서릉으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서릉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동릉 코스는 경사가 가파라서 용두산 깔딱고개로 불린다.
정상에는 330.58㎡ 남짓한 공터 북쪽 끝머리에 삼각점이 박혀 있다
옆에 있는 등산객에게 부탁하여 인증샷 한장 남기고 물 한모금 마신 다음 잠시휴식을 취하는데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상당히 추워지기에 서둘러 길을 나선다
우리나라 산의 명칭중에 용두산도 꽤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부산 시내에 있는 용두산이며, 호남정맥길인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도 용두산이 있고, 문수지맥길인 에천군 상리면에도 용두산이 있다
용두산 정상 삼각점(△307 / 건설부) 용두산에서 우측의 송한재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곳으로는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지 사람들이 거의 없고 등로에는 쌓인 눈은 무릎까지 차오른다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멋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외롭게 걸어가는 산꾼을 반긴다
홀로 눈길을 걸어 조금을 더 내려가니 휴게용 벤치가 있는 송한재가 나온다
송한재(松寒峙:725m:10:50)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와 모산동 물한이 마을 갈림길로 지명은 송한리에서 따온듯 하다
정상에는 이정표(←물한이 1.9km ↑송한리 4km ↓용두산 0.8km →피재점 3.2km)와
휴게용 벤취가 있으며 지맥길은 피재점 방향으로 이어진다
오르막으로 올라서는데 이쪽으로는 사람들의 거의 다니지 않고 안부 능선에는 눈의 양이 많다
뒤돌아 본 송한재의 모습송한리의 지명유래는 송학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송한리(松寒里)의 송학산(松鶴山)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송한리에는 절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우리나라에 대거 침입하여 조정에서 강화도로 천도할 무렵, 서울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에 온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낮이고 밤이고 부처님 앞에 나가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중 절 근처에 살던 젊은 머슴이 이 아름다운 부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날마다 불공드리는 부인을 멀리서 엿보며 가슴의 연정을 달래었다.
그러던 어느 달 밝은 밤, 부인이 불공을 마치고 절 뒤편으로 잠시 나온 것을 보고
뒤를 따라가 부인에게 달려들어 부인을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얼마 후 절로 돌아온 부인은 자기가 기거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자진(自盡)을 하였다.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절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부인이 기거하는 방이 있던 자리에서 바위가 하나 솟아 나왔다.
사람들은 부인의 한이 사무쳐 바위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바위를 ‘설통바위’라고 불렀는데, 부인의 화신(化身)이라고 믿었다.
등로 옆에는 영월신씨 5대조 묘가 눈 속에 파묻혀 있고... 송한리 계곡의 모습 영월 신씨를 묘지를 치고 올라서니 휴게용 벤치 2개와 국가지점번호‘라사 6208 1217’ 구조 표지판이 있고... 능선에서 좌측으로 약간 꺽어진 다음에 다시 내리막길로 향한다 지나온 용두산을 한번 뒤돌아 보고... 867봉(11:00)867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마루금은 이어지고 이곳부터는 눈이 많은 곳은
허리까지 차오르는데 눈을 피해 능선 아래로 걸으니 잠시 후 전망쉼터가 나온다
전망 쉼터(11:02)
쉼터에 올라서니 바로 아래로는 모산동과 의림지, 제2의림지와 세명대학교 캠퍼스가 보이고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지난 구간 걸었던 왕박산 시루봉과 그 너머로 삼태산(누에머리봉)이 보인다
전망 쉼터에서 바라본 의림지(義林池)의 모습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우리나라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 지방(湖西地方)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이 의림지가 기준이 되었다
의림지가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도 전하며 그로부터 700년 뒤 이곳에 온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는 설도 있으나, 제천이 고구려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인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수는 2곳에 있으며 주민들은 큰 의림지와 작은 의림지 혹은 제1 의림지와 제2 의림지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제천)에 "큰방죽(大堤)이 한곳 있으니,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의림제(義林堤)라 한다.
길이가 5백 30척이며, 논 4백 결에 물을 댄다."고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 '의림제'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천)에 "의림지가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관개하는 것이 대단히 넓다."
그리고 "순채(蓴)가 의림지에서 난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옛 지도에 용두산 남쪽에 의림지가 그 형세와
함께 크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의림지를 중심으로 연자암 · 폭포 · 영조정 · 우륵대가
그 형세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대부분의 지도에는 하나의 의림지만 표기되어 있지만, 특히 『조선지도』에는
의림지 남쪽에 제2 의림지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제천)에는 현좌면과 현우면 · 남면에 9개의 제언이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의림지만 그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이 문헌에서는 "의림지 제언의 둘레는 5천8백 5척이고,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부잣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찾아온 스님에게 탐욕스럽고 심술 사나운 집주인이 거름 한 삽을 스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며느리가 쌀을 한 바가지 퍼서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 터이니 빨리 산속으로 피하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뒤를 돌아본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했다. 집이 있던 자리는 땅속으로 꺼져 버렸는데
그곳에 물이 고여 의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라고 한다.
의림지를 중심으로 경호루 · 와소정 · 의림정 · 영호정 · 용폭포 · 임폭정 · 홍류정 · 청폭정 · 후선정터 등이 있다
전망 쉼터를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의 발자국이 적어지며 눈의 양은 많아지는데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니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으나 모노레일 같은게 나타난다
마치 20여년전에 골프장에 있었던( 지금은 없지만) 골프빽 나르는 모노레일처럼...
능선 분기봉(11:05)
능선 분기봉에서 모노레일과 헤어져 우측으로 꺽어지니...
S라인 소나무
몸매는 S라인 ♩~~~♬ 샤방샤방 아주 그냥 죽여줘요
눈의 양은 점점 많아지고...
오미재(五味峴:11:13)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에서 모산동 용두산 산림욕장으로 내려서는 고개로
오미리의 지명을 따서 오미재라 부르며 의림지 윗쪽의 고개라 하여 못제라고도 불린다
오미리의 지명유래는 야생 오미자가 많이 자생해서 오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또 다섯 골의 물맛이 골마다 달라 다섯 가지 맛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자연마을로 나랭이, 나막신골, 선바우, 소바우, 우암, 일오곡 등이 있다. 특산물로는 고추, 담배가 있다.
오미재의 이정표
넓은 공터같은 고개 정상에는 이정표와 휴게용 벤치가 있고, 죽은채 누워있는 고목
한그루가 있는데 영월지맥길은 피재점 1.1km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 고개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오미리(점골)에서 오미천을 만들고 다시 오미저수지를
지나 황둔천이 되고 다시 서만이강이 되고 서만이강은 주천강이 되었다가 다시 평창강이
되고 드디어는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水界를 이루고 있다.
728봉(11:17)
영월지맥은 우측으로 이어지며 좌측은 용두산 산림욕장으로 내려가는 등로이다
피재점(784m:11:35)
피재 갈림길에 피지점이란 이정표가 서있고 이곳에서 피재까지는 1.3km의 거리란다
정상에는 멋진 금강송 3그루가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피재는 “직티”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제천시 모산동에서 봉양읍으로 넘어가는 9번 도로상에 있다
피재점 정상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50여m 정도 내려오니 석기암에서
피재점으로 오르지 않고 피재로 향하는 Y 임도에 이정표가 서 있다
768봉(11:40)
768봉은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측 석기암이란 표지판을 따라 우회를 해야한다
정상으로 가봐야 직벽 암릉이라서 되돌아 와야 한다
송한재부터는 등산객들이 아예 보이질 않고 눈이 많은 곳은 허리까지 차오른다
혼자서 러셀을 하면서 걸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고...숏다리의悲哀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누군가 가긴 간 모양인데 눈의 양이 많아 그리 도움은 안된다
이 첩첩산중에... 경상도 사람들의 산에 대한 집착 참으로 대단혀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가지 마라,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 김구선생이 자주 인용했다는 서산대사의 禪詩 中에서
768봉에서 우측으로 안부로 떨어졌다가 다시무명봉 서너개를 오르내리는데
예상보다 적설량이 많아 당황스럽다...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많은데 시간이 지체된다
석기암 우회길(12:08)
개념도상으로는 직진으로 가야 맞지만 암릉구간이 오를 수가 없다
우회길에서 바라본 석기암 능선의 모습
석기암 갈림길(12:13)석기암(石基巖:903m:12:15)
충북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와 봉양읍 명암리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의
경계에 있는 암봉으로 명칭이 특이하게 ‘봉(峰)이 아닌 암(巖)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은
그저 평범해 보이나 아랫쪽 뾰족한 암릉으로 상당히 산의 지세가 험하다
정상에는 이정표와 제천시에서 설치한 오석(烏石)의 표시석에는 고도가 906m 라고
되어 있지만 906봉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봉우리이라 오기(誤記)라 생각된다
지명의 유래는 이 봉 아래에 있는 황둔리 물안골 서북쪽에 있는 석기동 마을에서
유래된 듯 하며 석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은둔하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석기암 정상에서 바라본 제천의 山河
오늘 내가 지나온 용두산과 좌측의 뾰족한 송학산이 보이고, 그너머로 삼태산까지
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나 잠깐 사이에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이는듯 춥다... 눈 속에 파묻힌 삼각점을 찾다가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석기암 갈림길(12:20)
석기암 갈림길을 지나니 눈은 마치 성을 이루듯 쌓여있다
잠시 후 갈림길이 나오고...
906봉을 오르려니 너무 눈은 많이 쌓여있고 능선위의 암릉에는 얼음이
빙벽을 이루고 있어서 정상을 포기하고 우측 사면으로 향하는데 나무에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는데 이곳 역시 눈이 장난이 아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고 나가니...
나홀로 산꾼의 안위를 걱정한 산짐승이 길을 안내한다
다시 우회길을 지나 정식 등로로 접어든다
등로 우측에 멋진 암릉을 만나고 이 암릉을 바람막이 삼아 점심상을 펼친다
점심이래봐야 반찬도 없이 집에서 싸온 도시락에 미역국... 캔맥주 하나로 점심을 해결한다
송한재 이후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천삼산에에서 왔다고 하니 나만큼 걸은 모양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폐헬기장(13:05)
넓은 공터인데 눈이 하도 많이 쌓여 헬기장인지 구분이 안된다
폐헬기장을 지나자마자 문바위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문바위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면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824봉으로 향한다
편한 우회길을 두고 고집스럽게 824봉 정상으로 오른다
824봉(13:10)
힘들게 정상에 올라 왔건만 눈에 파묻힌 봉우리뿐...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선다
급경사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멋진 암릉이 산꾼을 반긴다키 큰 전나무 사이로 감악산이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으론 전나무숲, 좌측으론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고 잠시 후 제사골재로 내려선다
제사골재(698m:13:20)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제사골에서 충북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 요부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석기암 아래에 있다고해서 석기재라고도 부른다
824봉에서 이곳까지 내려온 만큼 다시 감악봉으로 올라서는 길이 힘이든다
제사골재 이정표
제사골재에서 눈을 피해 좌측 사면길로 올라서니 백두대간 남진과
호남정맥을 했던 산악회의 반가운 시그널이 산꾼을 반겨준다
능선에 올라서니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감악3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크고 작은 무명봉을 오르내리는데 암릉구간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5년전 낙동정맥 산행때 경북 봉화, 울진, 영양의 산길에서 만났던 상처난 소나무를 이곳에서도 만난다
감악봉 오르는 능선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들이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油類가 부족하자 이 나라 山河의 소나무에 칼집을 내어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 보인다
古來로 국가가 힘이 없으면 民草들이 고달프거늘...
한반도 주변의 강국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自國의 이익을 위해 눈을 불을켜고 설치는데
도대체 이 나라의 정치하는 무리들은 어느나라 국민인지 알 수가 없고 맨날 자기들끼리
아무 쓰잘데 없는 정쟁에만 박터지게 싸우고 있으니... 언제쯤 저꼴 안보고 살꼬
하긴 하나 단합 잘되는거 있기는 있더군...당신네들 세비 올릴때는 완벽하고 잘하더군
이보시요! 여의도 나리님들 民心은 天心이라 했소... 民草들 그만 괴롭히소... 정말 힘드오
급경사의 암릉구간을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13:48)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걸어온 능선의 모습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등로의 궤적 눈이 쌓여도 너무 쌓여있는 능선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멋진 암릉사이로 힘들게 올라선다 멋진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로프를 만나고...로프는 얼어있고...힘들게 안부 능선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리막을 내려서는데 로프가 있고 음지라 눈은 허리까지 차오르는데 아이젠은 무용지물... 안부로 내려서는데 미끄러져 한바퀴 굴러면서 쳐박히긴 해도 눈속에 파묻히는 바람에 다치지는 않는다 다시로프를 만나 능선위로 오르는데 재사골재에서 감악산 오르는 능선 오르는 길은멋진 암릉들이 계속해서 산꾼을 유혹하지만 암릉구간의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계속해서 만나는 멋진 암릉들 감악봉(紺岳峰:886m:14:02)충북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의 경계에
잇는 봉우리로 좌측으로는 명암리 요부골로 이어지는 등로가 있는데
모든게 눈에 파묻혀 별 특징이 없고 정상의 삼각점도 찾을 길이 없다
명암리는 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청정한 지역으로 치악산 줄기인 석기암(905.7m)과 감악산(886m)이
있으며 감악산 꼭대기에는 바위로 된 두 개의 영봉이 있는데 일출봉, 월출봉이라 부른다.
일(日) 자와 월(月) 자를 합쳐 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횡치(橫峙)리와 직치(稷峙)리를
병합하여 명암리가 되었고 자연마을로는 피재, 헌텃골 등이 있으며 특산물로는 사과와 표고버섯이 있다
다시 암릉구간의 급경사로 내려선 다음 약간 좌측으로 우회하여 걷는데 이곳 역시 음지라 적설량이 상당하다
암릉에 매달린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긴다
갈라진 암릉길을 걷는데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라 오금이 저려온다
감악산의 지세를 보면 서쪽에서 보면 정말 온순한 양처럼 보이나
동쪽에서 보면 상황은 360도 바뀌어 날카로운 호랑이 이빨같은 느낌이랄까.
능선 우측으론 황둔리와 지나온 용두산과 석기암, 송학산이 보이고 능선 아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악산(岳山)이다... 왜 지명에 ‘岳’자가 들어가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등로를 조금 더 진행하니 감악산 아래 절벽에 로프 2개가 보이는데 아마도 석이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설치해논 모양이다...이곳이 석이버섯이 많이 나오는 곳인가보다
백련사 갈림길(14:20)
갈림길에는 이정표(←용두산, 석기암 3.6km 백련사 0.8km → 감악산 정상 0.2km)를
만난 다음 감악산 정상으로 올라서는데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눈은 그리 많지 않다
감악산은 흔히 감악 3봉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출봉(동자바위)과 월출봉(선녀바위)이 있는데정상은 월출봉인데 지금 월출봉 아래로 통과하는데 마치 선녀의 치마처럼 바위가 주름이 잡혀있다
감악산 월출봉으로 올라서니 넓은 공터 우측으로 전망대가 있고 정상은좌측 암릉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빙벽으로 변해버린 암릉에 로프가 매달려 있다
감악산 전망대(14:23)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조그만 두 다리로 참으로 많이 걸어왔다늘 쥔장 잘못만나 매주 고생을 하지만 늘 두 말없이 따라주는 두 다리(足)에게 늘 감사, 감사
저 넘어 어띠쯤에 울고넘는 박달재인데... 구분이 안되네
감악산(紺岳山:945m:14:25)이와 같이 옛 문헌에는 대부분 '감암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제천)에는 "치악산의 동남쪽 줄기이다.
감악산 월출봉(紺岳山 月出峰)
감악산에는 감악3봉이라 하여 3개의 뾰족한 암릉이 있고 월출봉과 일출봉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월출봉이 실질적인 감악산 정상이다... 월출봉도 2개의 암릉이 붙어 있는데
일명 선녀바위라고 부르며 감악산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감악산 월출봉도 2개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조그만 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곳에서 조금만 발을 삐딱하면 암릉 아래로 황천길이다... 눈이 얼어있는 겨울에는...
월출봉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선다
암릉 최정상에 오르니 바로 아래에서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했다는
백련사가 보이고 저 너머로 천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천 용두산을 지난 다음부터는 석기암과 이곳 감악산을 나홀로 전세(?)내어
정말로 호젓함을 느끼는데 이 추운 겨울이 아니면 어찌 이 명산을 나홀로 차지할 수 있으랴...
천삼산(天蔘山:819m)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산으로 20여리에 달하는
능선 자락에 시루봉, 상봉, 중봉, 동굴, 천수암터, 흔들바위 등 기기묘묘한 바위천국이며
용암3리 선터골 상단부에 철철바위가 있는데 늦가을철 비가 내리면 산삼 씨앗이
흘려 내려와서 하늘에서 산삼 씨앗을 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천삼산이라 부른단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련사 계곡감악산 자락은 불교, 천주교와 함께 민간신앙이 한곳에 자리할 만큼 성스러운 곳으로
감악산 서쪽의 신림면의 지명은 신성한 숲이라는 뜻이며 동남 방향의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로 신유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에 숨어 살았는데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 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배론은 골짜기가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 하였다고 한다.
신림역 인근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있는데 복음화를 통한 구국과 농민운동의 목표아래 창설된 그리스도교
사회교육기관으로 가나안은 요단강 서쪽땅의 옛 이름으로 여호와가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상향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슬로건아래 1973년 원주시 신림면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농군학교다.
또 감악산 밑에는 신라 고찰 백련사(白蓮寺)와 치악산의 유래를 낳은 상원사(上院寺)가 자리하고 있다
백련사는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창건 시 연못에서 백련이 피어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백련사 뒤를 올려다보면 두 개의 바위가 보이는데 동자바위와 선녀바위다.
동자바위는 월출봉, 선녀바위는 일출봉으로도 부르는데, 명암리라는 동네 이름은 바로 이 두 이름자의
‘일(日)'자와 ‘월(月)'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 전해온다
감악산 서북쪽의 모습
월출봉 맨 위 봉우리에 오르니 감악3봉과 황둔리와 그너머 감악산의 모산이라는
치악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바로 앞에 동자바위라 불리는 일출봉은
감악산에서 가장 일찍 뜬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며 2.3봉은 영월지명에서 비켜나
있고 일출봉(동자바위)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지맥길을 이어간다
월출봉 정상에 누가 저 돌을 올려 놨을꼬?
감악산 월출봉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지나온 봉우리들... 눈길에 참 많이도 걸었다
다시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로 되돌아와 베낭을 이용해 인증샷을 남기고 암릉을 내려온다암릉에서 내려와 이정표에서 좌측 황둔리 방향으로 향한다
황둔리(黃屯里)는 원주시 신림면에 속해 있는 마을로 치악산 자락에 있는 산간분지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송계리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성남리, 남쪽으로는 감악봉과 석기암을 경계로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매봉산과 첫고개를 경계로 영월군 수주면과 접하고 있고
자연마을로는 물안골, 소야, 신목정, 재사동, 창골 등이 있다. 마을 안에 있는 매봉산과 감악봉은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며 특히 감악봉과 백련사, 매봉산은 유명한 관광지이다.
손가락만한 로프를 붙잡고 감악산 월출봉을 우회하며 걷는다
로프지대를 지나 위로 쳐다보니 마치 관악산에 있는 관악문처럼 보이는 암릉도 만난다
감악산 일출봉(14:40)
감악산 일출봉 아래의 이정표에서 멋진 일출봉 정상은 오르지
못하고 좌측 천삼산 방향으로 우회하여 감악고개로 향한다
일출봉을 지나면서 우측 사면은 천길 낭떠러지이고 좌측 아래는 백련사가 보인다
좌측 소나무 아래로는 고즈넉한 백련사가 보인다
아무리 갈길이 멀더라도 백련사 법당에 내려가서 참배라도 하고 가야겠다
자운법사의 열반 소식에 정신이 멍한데 엊그제(23일)는 절구통 수좌로 유명한
성철스님의 제자이자 11대, 12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던 도림당(道林黨) 법전(法傳)
큰 스님께서 세수 90세의 일기로 원적(圓寂)에 드셨다... 종정 재직시 매년 조계사 법회에서
노구(老軀)에도 불구하시고 우리 포교사들에게 감로법문을 전하면서 주장자를
내리치시던 큰 스님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가시다니...
법전스님이 떠나시면서 남기신 임종게(臨終偈)
“산색수성연실상(山色水聲演實相) /만구동서서래의(曼求東西西來意)
약인문아서래의(若人問我西來意) /암전석녀포아면(巖前石女抱兒眠)”이다.
‘산빛과 물소리가 그대로 실상을 펼친 것인데 /부질없이 사방으로 서래의
(불자의 화두라는 뜻)를 구하려 하는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앞에 석녀가 아이를 안고 재우고 있구나’라는 뜻이다.
백련사 갈림길(14:45)
이곳 우측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진채 백련사로 향한다
백련사(白蓮寺:14:50)
충북 제천시 봉양읍 감악산(紺岳山)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로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무염당·보응문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 중건되었고 내부에 석가모니불 좌상을 모시며,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불상은 조선시대 유물로 목조이며 높이 75cm, 어깨 너비 45cm이다.
이밖에 신중탱화와 나한을 그린 벽화 4점이 있으며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62년에 세워졌다.
백련사가 창건된 것은 662년(신라 문무왕 2년) 화엄십찰을 창건한 의상조사가
백련지 동쪽에 백련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으며 당시 이 산의 이름은 치악산이었다.
그 자락인 감악산에 따로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산정에 올라서면 동북쪽 기슭은 원주시
신림(神林)면으로 치악산이 건너다보이며, 서남쪽 기슭은 제천시 봉양면에 속한다.
의상대사는 이 제천 쪽 정상부근에 있는 백련지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백련암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암자는 효소왕(孝昭王) 1년(692년) 큰 비로 매몰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 후 헌덕왕(憲德王) 11년 무착선사(無着禪師)가 중창하였는데 이 때 우물에서 금빛이 비친다고 하여
산의 이름을 금수산(金水山)으로 고쳤고 중창 주 무착선사는 경순왕(敬順王)의 왕사로 알려져 있으며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上院寺)와 보문사(普門寺) 국향사(國享寺) 등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무착선사는 주로 치악산에 머물면서 용마를 타고 백련사를 내왕하였다고 한다.
절 앞 우물도 당시 용마가 물을 마신 곳이라 하여 용마수라고도 한다.
무착선사가 사실상 백련사의 창건주라는 주장도 있다
등로에 내려서 가람 입구로 들어서니 백련사 유래 안내판이 있고 우측으로 가니
불사공덕비와 불사 기와가 보이고 우측으론 감악산 오르는 등로와 약수물이 있다
우측 아래 주차장 자리가 옛날 이 산에 있었던 백련지의 터라고 한다.
이곳이 적어도 해발 850m 정도는 되는데 약수물이 그대로 있어 물한모금 마시고
법당으로 향한다
백련사 일주문 역할을 하는 홍예문
절 입구는 서쪽에서 진입한 길을 따라 석축 아래를 지나 석축 동쪽 끝에서 계단을 올라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이곳에 옛날 감암산성이 있었던 점을 상기하기 위함인지 짧은 석성을 쌓고 홍예문을 만들었는데 무지개형 석문이다.
백련사를 40년간 지키며 수도하시는 담월스님께서 손수 절터 닦고 돌을 나르며, 신도들의
시주금을 극구 마다하며 억척스럽게 지금의 백련사를 중창하셨다고 한다
“마음은 넓히면 허공도 삼키지만 좁히면 바늘끝 꽂기에도 모자라요”,
“相에 집착 진리를 모르면 얼굴 맞대도 천리같이 멀고, 마음비워 도를 알면 천지가 한집입니다”
담월 스님의 법문중에서 발췌
백련사 삼성각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1358년)에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를
창건한 후 이곳에 와 중수한바 있고 이때의 산 이름은 일월산(日月山)이었다.
일월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산 정상에 선녀바위와 동자바위 등 큰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이중 선녀바위를 일출봉(日出峰), 그 옆 동자바위를 월출봉(月出峰)으로 부르는데서 비롯됐다
조선 초기 백련사는 감암산(紺岩山) 감암사(紺岩寺)로도 불렸으며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감암산 감암사(紺岩山紺岩寺)로 나오고 있다.
감암사로 불릴 시기인 선조 20년(1587년)과 인조 2년(1624년)에 각각 중수된바 있다.
정조 22년(1798년)에는 처봉선사(處峰禪師)가 절을 중수한 후 이번에는 산의 이름을
감악산(紺岳山), 절의 이름을 감악사(紺岳寺)로 고쳤다.
절의 이름이 오늘날처럼 백련사로 바뀐 것은 1916년의 일로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창하면서
창건 초기의 이름을 되살려 백련사로 고친 것이다.
그 후 백련사는 6.25 한국동란 때 폭격으로 반파돼 1957년에 중건하였고, 1976년에는
수해로 대웅전이 무너져 1979년 지금 있는 축대를 쌓은 후 중건했다
특이한 형태의 사천왕문
경내로 들어서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대문에는 금강역사상의 그려져 있고 양 옆 벽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다
사천왕문이 있고 들어서면서 좌우에 사천왕상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여는 절처럼 조각이 아닌 벽화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좌측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보관을 쓰고 갑옷과 천의(天衣)을 입고 분노한 표정으로 칼을
들고 있으며, 우측의 남방 증장천왕상은 굳게 다문 입에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좌측의 서방광목천왕상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듯 위엄있는
모습에 오른손엔 깃발을 잡고 왼손엔 무엇인가 손에 오린듯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측의 북방 다문천왕상은 높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을
하고 짙은 눈썹에 긴 턱수염이 선비형의 모습에 가까우며 비파를 들고 발 아래에는
고통스러원 하는 악귀가무거운 모습을 받쳐들고 모습인데 이곳은 살짝 변형된
모습인지 발 아래의 악귀(惡鬼)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백련사 극락전
절 마당에 들어오니 마당 가운데 서 있고, 북쪽에 큰 법당인 극락전이 남쪽을 향해 있다.
마당 양 옆엔 동서 요사가 있는데 서쪽 요사엔 무염당(無染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동쪽 요사에는 보응문(普應門)이란 편액이 걸렸있다... 극락전으로 들어가려니
눈밭에 굴렀던 탓인지 옷이 너무 엉망이라 이런 꼴로 부처님을 친견한다는 건
예의가 아닐것 같아 선 채로 극락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법당을
나와 다시 베낭을 벗어둔 등로로 올라선다
등로에 복귀하여 베낭을 메고 급경사로 내려서니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나오고 맞은편에는 잠시후에 올라야 할 825봉이 기다리고 있다
다시 미끄러운 눈길을 내려서니 좌측으로 백련사로 향하는 임도가 나오고 감악고개에 도착한다
감악고개(紺岳峴:770m:15:15)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장촌마을에서 충북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가막재, 감악현으로도 불리며 넓은 공터에 이정표가 있고
백련사로 이어지는 명암리 방향은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이어지고
우측 장촌방향으로는 일반 등산객들이 감악산 오를때 거의 이쪽으로 다니는지
시그널이 주렁주렁 바람에 휘날린다... 지맥길은 천삼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감악고개 이정표
825봉(15:23)
골짜기 끄트머리에 장촌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응봉산이 물끄러미 이곳을 바라본다
858봉(15:33)
싸리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감악삼봉(紺岳三峯)
감악산(紺岳山) 정상인 일출봉(日出峰)의 북쪽 바위봉인 월출봉(月出峰)에서
다시 북쪽으로 갈라지는 암릉상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한다.
즉, 황둔리 창촌에서 남쪽 감악산을 바라볼 때 세 개의 암봉이 뾰족한
톱날처럼 이어져 보이는데, 이중 가장 높은 오른쪽 봉우리이다
조그만 로프가 설치된 암릉구간을 지나 무명봉을 내려섰다 올라서니 눈속에 묻힌 묘지 한기를 만난다
무명 묘지를 지나니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의 천삼산 방향은 눈길이 뚜렸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조심할 것은 영월지맥을 타는 전문 산꾼들의
시그널이나 영월지맥은 우측으로 가야한다... 저 시그널은 천삼단맥을 타는 시그널이다
천삼산 분기봉(816m:15:40)
천삼산 분기봉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달리 등로가 보이질 않고 험하다
등로 끄트머리는 암릉에다 벼랑끝이라 끄트머리 직전에서 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직벽에 가까운 낭떠리지를 우회하여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무명봉 정상에 올라서니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지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진다
680봉(16:20)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지만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암봉을 내려서니 우측으로 원형 철조망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특용작물 재배지역이라 원형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특용작물 감시초소(16:40)
SK텔레콤 성남 중계기지
특용작물 감시초소에서 눈속에 파묻히면서 급경사로 내려오니 좌측 이동통신
중계기지가 보이고 잠시 후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싸리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힘들게 싸리치에 도착한다
싸리치(595m:16:50)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서 황둔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정상은 예전에 차량이 다니던
고개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88번 국도가 지나가는 신림터널이 뚫리면서
차량통행이 거의없는 잊혀진 고개가 되어 버렸다... 정상에는 싸리치 詩碑와 사각정자,
그리고 휴게용 벤치가 보이며 우측 황둔리쪽으론 민가와 농장이 보인다
싸리나무가 많다 하여 싸리재, 싸리치재, 싸리고개라고 하며 조선조에 단종 임금이
영월로 유배를 갈 때 울면서 넘었던 고개이고 방랑시인 김 삿갓이 넘었던 한많은 고개이다
이곳에서 장비를 정리하고 나니까 오후 5시가 조금 넘는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황둔리에는 싸리치 버스 정류장이 있으나 버스가 저녁 6시에 있고 신림역이 멀기에
좌측 신림방향으로 가기로 마음 먹고 아직도 해가 좀 남아있고 이곳은 옛날에 도로였기에
길은 무지 좋으나 차량이 전혀 다니지 않고 길에 눈이 쌓여 있지만 차량이 다녔기에 러셀하는
수고로움을 들지 않아도 되기에 스틱을 접고 카메라를 베낭속에 넣은 다음에 베낭에서
헤드렌턴을 꺼내 머리에 쓰고 마라톤하듯이 들고 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왠걸 가도가도 끝은 보이질 않고 해가 떨어지면서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싸리재농원을 지나면서부터 컴컴해지기 시작하여 헤드렌턴을 켜고 달리지만
무거운 베낭에다 눈길이 미끄러워 생각보다 거리가 줄지 않는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간간히 민가가 보이고 동네 개쉬끼들이 난리 부르스를 친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는데 우측으로 엄청나게 큰 교회 수련원이 보이면서 차량소리가 들린다
차량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도로가 가까워졌다는 것 아닌가...
GPS를 보니 싸리치에서 도로까지 4.6km에 50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드디어 도로가 나타나고 마지 버스 정류소에 도착하여 물한모금 마시고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어둠속에 히치를 시도하는데 지나가는 스타렉스 RV 차량이 세워주는데 기사가
40대중반의 여인이다... 이 사람은 이 동네 사람인데 서울가야 하는데 역까지 태워달라
하니까 타라고 하는데 5분만에 신림역에 도착한다
신림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열차 시간표
신림역에 도착하여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엄청나게 허기가 져서 뭘하나 먹으려고 하는데 역에는 아무것도 사먹을게 없다
이곳 신림역은 신림면 중심지에서 외진곳에 있는 데다가 무궁호 열차만 간간히 서는 곳이고
중앙선 복선공사로 인해 2017년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다고 한다
신림발 →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티켙
우선 허기를 면하기 위해 베낭을 뒤지니 초코렛과 쥬스 하나가 보이기에 그걸 먹는다
열차표는 좌석이 없고 입석뿐이란다... 좌석이 있어도 입석표 끊을 판인데 잘됐구먼
좌석과 입석의 가격 차이가 1,300원이나 나는데 1,000원만 더 보태면 캔맥주가 하난데 ㅋㅋㅋ
아무래도 오늘로 영월지맥은 접어야 될듯 싶다... 많은 눈에다가 혼자 다니니
겨울산행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것 같아서 중단 했다가 봄부터 다시해야 할듯 싶다
신림역 플랫홈
열차는 예상보다 5분정도 늦게 역으로 들어온다
열차에 올라 4호차인 식당칸에 들어서니 일요일이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손님이 없다
우선 배가 너무고파 먹거리를 찾으니 도시락이나 빵은 없고 소세지에 과자 부스러기
그리고 캔맥주가 있기에, 소세지 2개에 캔맥주 3개를 마시고 나니 좀 살것만 같다
원주역을 지나면서 맥주를 마셨겠다, 발 아래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스팀 탓인지
졸음이 밀려오는데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청량리 역에 도착할때까지 꿀맛같은
단잠을 잤다... 몸이 개운하다
청량리역(20:40)
청량리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왕십리역에서 다시 바꿔 탄 다음 집에오니 밤 10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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