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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영월지맥(終)

영월지맥 제3구간 - 중산재에서 동막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4. 12. 22.

 

魂이 나간듯 너무나 힘들게 걸었던 제천땅의 山下

 

☞ 산행일자: 2014년 12월 21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상당히 추움... 오후 늦게 눈

 산행거리: 도상거리 17,5km  / 8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중산재(참나무쟁이골)-523봉-522봉-550.5봉-598봉-591봉-임도-602봉(갑산지맥 분기점)

                 672봉-가창산-682봉-설매산 분기봉-524봉-문영월재-567.7봉-524봉-조움재(조을치)

                 527봉(왕박산 시루봉)-38번 국도-삭고개-고암정수장-뱃재-고암테크노 공단-다랑고개

                도화동 마을-개나리추모공원-모산재-동막고개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 제천시 흑석동, 자작동, 고암동, 송학면 / 강원도 영월군 남면

 

요즘 들어서 나를 위해 사는지 남을 위해 사는지 참으로 혼란스럽다.

매주 찾아오는 결혼 청첩장과 송년회니 뭐니하는 모임에다 이번달 들어서

유난히 많아진 弔事... 주위의 지인들이 이승과 하직을 많이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 했는데 왜 그리도 급하신지?

거기다가 모 진보 정당이 헌정사에 있어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체되는 비운을 겪는다.

정치에 있어서는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맞춰야 나라가 발전하는 법이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처럼...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쪽도 그리 잘하는 건 없지만, 진보진영은 참 아니올씨다다.

국정에서는 정부쪽에 하는일엔 사사건건 시비나 걸고, 진보당 국회의원이란 자는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국회 안에서 최루탄을 터트리지 않나

대화와 타협보다는 맨날 머리띠 두르고 데모나 해대면서 헌법에서 적국으로 규정된

북한의 못된 만행에는 늘 옹호하거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비운을 맞았다.

 

민주, 자유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걸 누리려면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르는걸 아셔야지

이제 며칠 안남은 새해부터 제발 여의도 나리들은 정쟁 그만하고 당신네들

밥그릇만 챙기지 말고 民草들의 아픈 삶을 좀 보듬어서 밥값 좀 하시길...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선릉역(05:35)

연일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번주에 내가 가야할 영월지맥 제천쪽에도 눈이 꽤나 많이왔다.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산행을 하다보니 추운 겨울 날씨에는 좀 망설여진다

내가 다녔던 산악회 쑥영감의 민주지산 비박 산행을 따라 나설까하다가 비박한 후 철수할때의

추위가 싫어서 이른 아침에 홀로 베낭을 메고 제천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매서운

칼바람이 살을 에이는듯 차갑기만 하다... 06시 48분 선릉역에서  첫열차를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쓰인 詩

 

외로움

                        최일화

 

바람처럼 가벼이 들길을 걷다가

봄볕 속에 앉아 신록의 산야를 바라보며

인생은 참으로 외로운 것을

어제의 추억이 있고 내일의 희망이 있어도

친구 있어 기별오는 일상이 늘 바쁘더라도

사람 사는일 참으로 외로운 것을

오늘도 온종일 네 생각

삶이 외로워 네가 그리운 걸까

네가 있어 이 봄날 외로운 걸까

바람처럼 허허롭게 들길 걷다가

풀밭에 앉아 호수의 물결 바라보니

꽃피는 계절도 이렇게 외로운 것을

 동서울행 제천발 버스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예매하고 평소에 들리던 식당에서 따끈한 해물 순두부로

식사를 마치고 커피한잔을 마시고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한 다음에 탑승구로 향한다

 제천가는 버스(06:30)

버스에 올랐는데 차량의 히터가 늦게 가동된 탓인지 상당히 춥다.

창문가에 앉아서 잠이 들었는데 너무 추워서 30분만에 잠에서 깬다.

그 이후로 잠이 오질 않아서 멍하니 차창밖에 바라보다 제천터미널에 도착한다 

 제천버스 터미널(08:20)

40인승 버스에 손님이라곤 달랑 7명만 타고 제천 터미널에 도착하니 08시 20분

터미널을 빠져나와 맞은편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중산재로 향한다.

지난주와는 달리 이곳 제천에는 눈이 상당히 많이와서 미끄럽다

온 세상이 雪國으로 변한 느낌이다... 제천에서 단양군 어상천으로 넘어가는

갑재에는 빙판이다... 그러다보니 택시는 거북이 걸음이다

갑재를 지나 좌측으로 가면 중산재로 향하는 지름길인데 빙판이라서

고개로 택시가 갈 수가 없어서 다시 돌아나와  어상천쪽으로 간 다음에

영월방향으로 돌아가다보니 시간도 예상보다 많이 걸리고 요금도 30,000이나 나왔다. 

중산재(中山峙:343m:09:10)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제천에서 영월과 쌍용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있고 우측 아래 대전리에 참나무쟁이 마을이 보인다.

예전에 참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중산재라는 지명은 산과 산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라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사람들은 장재(場峙)라고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 이곳 어상천 사람들이 제천에 있는 장(場)에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장재(場峙)’ 또는 ‘장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이곳에는 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득실거리기도 한 곳이란다

 

제천에서 이곳까지 2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1시간 가까이 걸려 중산재에 도착하니

잠깐 사이에 손이 굳어버릴 정도로 맹추위인데다 지난주와는 비교가 안 될만큼 적설량이 많다.

베낭을 내려 스패치와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틱을 편 다음 완전무장을 한 다음 산행을 나선다.

행 시작하면서 오르자마자 ‘陽川 許公과 孺人 全州李氏’ 부부 합장묘를 만나면서 급경사로 올라선다

대다수의 기,지맥길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초반부터 길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눈이 많이와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지만 그동안 독립군으로 걸었던 경험으로 맥길을 찾아서 걷는다

 참나무쟁이 고개라 부르는 중산재에서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가 눈 아래에 있는 낙엽 때문에

시간이 참으로 많이 걸린다... 10분이 조금 지난 시간에 孺人 仁同張氏 묘를 만나고...

 잠시후 또 다른 陽川許公의 묘지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 능선을 따라서 영월지맥을 이어간다

 522봉 직전의 안부에는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쌓인 곳에는 산짐승들이 놀이터가 돼버렸다 

 522봉(09:35)

522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향하는데

아무도 다니지 않은데다가 눈 아래 낙엽으로 인하여 아이젠은 무용지물이다.

마치 스키를 타는 기분으로 엉덩이를 땅바닥에 대고 베낭으로 속도 조절을 하면서 내려선다

 

522봉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550.5봉 오르는 길은 오늘 코스중에 가장 힘이든다

급경사에다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올라서면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서면 또 다시

미끄러지고 시간은 지체되니 초반부터 자꾸만 맘이 급해진다

등로에서 바라본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술미마을의 모습

술미는 ‘순산’이라고도 부르며 중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수리매가 이곳에 있는 느티나무에 집을짓고 살았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550.5봉(10:10)

힘들게 550.5봉 정상에 오르니 좌측으로 간벌지역이 보이고 그 너머로 단양의

산그리메가 저 멀리까지 보이는데 지도상으로 백두대간 소백산 구간인듯 싶다 

별을 알 수없는 550.5봉 삼각점

550.5봉 아래에서 매서운 칼바람이 살을 에이는듯 시리다

그래도 내리막이라 걷기는 조금 수월하다

잠시후 십자안부로 내려선다... 간벌을 하면서 생긴 임도인듯 싶다

枯葉

598봉 오르면서 조금전에 힘들게 걸어온 구간과 지난주 걸었던 누에머리봉의 모습

598봉 오르는 길에는 간벌을 하고 새로운 소나무를 심어놨다

그리고 이곳은 양지라 그리 눈은 많지 않지만 등로는 보이질 않는다

감각적으로 걷는데 조금전 걸었던 등로에 비해서 급경사는 아니건만

눈 아래에 있는 낙엽 때문에 이곳 역시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598봉(10:30)

591봉(10:38)

등로에서 바라본 어상천면 석교리(石橋里)의 모습

어상천면 석교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돌다리가 있어 석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석교, 배락바웃골, 십일시장터, 절골, 장밭, 장안마을

등이 있으며 석교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석교리의 그것과 같다.

배락바웃골마을은 벼락을 맞아 갈라진 큰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십일시장터마을은

열흘마다 장이 서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절골마을은 절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장

밭마을과 장안마을은 조선 때 있던 목장의 바깥쪽과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591봉을 내려서니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인 가창산이 시원스레 보인다

우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나뭇숲으로 들어선다

處士 安東權公 묘지(11:00)

591봉에서 내리막을 내려서니 안동권씨와 부인 김해김씨의 묘가 눈에 파묻혀 있다

이곳에서 정상적인 지맥길은 묘지 뒷쪽으로 가야하나 길이 없고 금새 임도로 내려선다

거의 대다수 선답자들이 좌측 임도로 따르기에 나 역시 좌측 임도로 따른다. 

 

處士 安東權公과  孺人 金海金氏 묘소

묘지를 지나니 트럭이 다니는 넓은 임도가 나오고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눈쌓인 임도를 따라가다가...

도로를 따라서 2분정도 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접어든다

등로에 접어드니 지맥길은 눈속에 묻혀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고

급경사의 오르막에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니 미칠지경이다

너무 스틱에 힘을 준 탓인지 장딴지와 팔목엔 통증이 오고 자꾸만 시간은 지체되고...

천신만고 끝에 능선에 오르니 갑산지맥 분기점이란 표지판을 만난다

이곳이 개념도상의 602봉이다 

602봉(갑산지맥 분기봉:11:15)

능선에 올라 숨한번 크게 들이 마시고 우측으로 꺽어져 가창산으로 향한다

갑산지맥(甲山枝脈)개념도(산경표를 따라서(박종률님 카페 인용)

갑산지맥(甲山枝脈)이란
영월지맥 가창산(歌唱山.819.5m) 동남쪽 0.9km 지점인 602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갑산(甲山.747m),호명산(虎鳴山.479m. →0.3km),295. 1m(금수지맥분기점),성산(城山.425.6m),
한티재,중앙고속도로 제천휴게소,국사봉(國師峰,632.3m),대덕산(大德山.577m →1.5km),
마미산(馬尾山.600.8m),부산(婦山.780.4m → 1.4km)을 지나 제천천이 남한강 충주호에 합수하는

충주시 동량면 사기리까지 이어가는 도상거리 46.2km 의 산줄기로 제천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필요한지도. 1/25000. 매포.구룡.공전. 황강.
1/5만. 영월. 제천. 덕산.
영진 1/5만.176.175. 201.

602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안부 능선을 따라 걷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오른다

그런데 앞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쳐다보니 멧돼지가 땅을 뒤지다가 도망을 간다

멧돼지의 흔적

갑자기 추운 날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이 넘에 추위에 먹이를 구하지 못한 탓인까

혹 다시 나타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능선으로 오르니 672봉이 나타난다

672봉(11:50)

672봉에서 가창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가창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가창산(歌唱山:819 m:11:55)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조선시대 연산군 때 의리있는 두 선비의 전설로 알려진 가창산(歌唱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 명문가 출신의 두 친구가 양평 용문산에서 10년 넘게 수학하였다.

어느 삼짇날 스승의 권유로 속세로 돌아온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자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펼치고 싶어 알성시를 보아 장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우정을 배신하였음을 깨닫고 옛 친구에게

사과하고자 각 지방관들에게 친구를 찾아 달라 부탁하였다.

얼마 뒤 강원 감사를 지내던 친구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들은 그가 제천현에 있는 산에 은거하는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가니,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두 사람이 소박한 저녁을 먹은 뒤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 화답하며 우정을 나누자 친구의 아내도

동화되어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껏 가야금을 타니, 친구는 아름다운 가야금 가락에 넋을 잃었다.

이처럼 한 여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이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후에 사람들이 이 산을

가창산(歌唱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피난살이로 고달픈 왕이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붙인 이름 이라고도 한다

가창산 뒷면의 모습

가창산은 일명 까창산이라고도 하며 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으로 정상 전면에는

그저 그런 산으로 보이지만 후면에는 석회암 덩어리로 형성된 암릉이다

가창산을 중심으로 태영석회 장자광업소, 석교광업소 등이 있다고 한다

옛날 신선(神仙) 이곳에 내려와 가무()를 즐겼고, 바둑을 두었던 너럭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리저리 둘러봤으나 눈 속이라 그런지 찾을길 없어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상 표지목에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져 날등 능선을 타고 내려서는데 바람의 영향으로

인하여 눈이 허리까지 차는 곳까지 있어서 러셀을 하는데 상당히 힘이든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여있다... 바람의 영향으로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곳도 있다

Y자 갈림길(12:25)

가창산에서 계속해서 내려서니 좌측으로 제천시 두학동 장치미 마을로

내려서는 뚜렸한 임도가 나오지만 이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접어든다.

여기서는 독도에 바짝 신경써야 할 구간인듯 싶다

 

제천시 두학동은 옛날에 제천향교 뒷산 독순봉에서 학 두 마리가 날아오다가 한 마리는 학다리에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바람부리 서쪽에 있는 학들에 떨어져 죽었다 전하는데, 학들 동쪽의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自作里)를 편입하면서 학의 머리 쪽이 되므로 두학(頭鶴)이라 하였다.

학들은 두루미 서식처로 작은황새골, 큰황새골, 오리골 등의 지명이 전하며 학들 옆에 있는 마을은

학평(鶴坪)으로 불린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등로는 보이질 않고 이 높은 산에 엄청나게 큰 송수관이 설치되어 있다

아마 우측에 있는 폐광산의 시설물인 모양이다

송수관을 넘어 억새밭을 지나니...

폐광산

가창산 아래이니 아마도 석회석을 채취했던 광산인 모양이다

지금은 폐광이 되어 안전 장치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어 위험해 보인다 

북쪽으로 바라보니 영월 쌍룡의 시멘트 공장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나온다

이곳 제천 단양일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회석지대로 백두대간 자병산을 지나면서도 봤지만

땅속의 석회석이 물에 녹으면서 땅이 함몰되는 카르스트지형의 ‘돌리네’가 이곳 주변에도 목격이 된다.

능선 좌측으로는 제천시내가 보이기 시작하고...

다시 안부로 떨어졌다가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릎까지 차는 눈을 러셀하면서 걷는데도 힘이 부치는데 산딸기 나무가 자꾸만 테클을 건다

682봉(12:35)

정상은 좌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고 일자봉이라 부르는데 이곳까지 오는데

러셀로 인하여 예상 소요시간보다 1시간 30분이상 더 걸리는 바람에

정상을 포기하고 직진으로 올랐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능선에 올라서서 뚜렸한 직진등로를 포기하고 좌측으로 꺽어져서 등로를 이어간다

완만하게 내려서니 눈덮인 무명묘지가 나오고 묘지 위를 지났다가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12:45)

임도를 가로지른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우측의 임도와 나란히 간다

우측의 임도에는 폐광산의 시설물이 망가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설매산 분기봉(12:48)

분기봉에는 이정표(←설매산 2.63km,↑문영월재 1.0km →가창산 2.6km)와 사각 말뚝이 서있다

이곳에서 영월지맥은 우측으로 꺽어져 문영월재로 향한다

설매산 분기봉 이정표

설매산 분기봉으로 내려서면서부터 적설량은 점점 많아지고 갈길이 바쁜데 넘어진 나무들이 태클을 걸어댄다

524봉(12:55)

밋밋한 524봉을 내려서니 우측으로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가 보인다

문영월재(13:05)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정상에는 제천시에서 세운 이정표만 있을 뿐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567.7봉(13:20)

문영월재에서 꽤나 힘들게 능선에 오르니 개념도상 567.7봉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삼각점이 있다고 하여 이리저리 눈속에 삼각점을

찾아봤지만 찾을길이 없어서 포기하고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우측 능선으로 가니 너덜길 같은 암릉길이 눈에 파묻혀 상당히 미끄럽다

y자 갈림길(13:23)

567.7봉에서 3분정도 내려오니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우측으로 뚜렸한 길은 토교리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영월지맥인데

지형상 혼란스러운 구간이다... 더군더나 좌측 영월지맥길은 거의 보이질 않고

실제로 우축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서너개나 달려 있으니 상당히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위치한 토교리(土橋里)는 산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주로 

밭농사를 행하고 있으며 무동산과 가창산에서 시작된 토교천이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토교리다.

자연부락으로는 무도리, 두릉, 점말, 음지말, 물여울, 양지말, 사기장골, 조리재 등이 있다

『여지도서』에도 토교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흙으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흙다리 또는 토교라고 하였다.

y자 갈림길에서 내리막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꼭 껴안고 있는 소나무를 만나고...

524봉(13:27) 

서문리 갈림길(13:30)

524봉에서 3분정도 내려오니 십자(十)자 안부가 나오고 서문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서문리는 제천시 흑석동에 있는 조그만 자연마을로 서무니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서문리(서무니)가 있는 흑석동은 마을에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이 많고 진주강씨 세거지에

 ‘현암(玄巖)’이라는 글자를 새긴 오석이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새김글은 조선 명종  때 진주 강씨 후손이 기묘사화 때 모해를 받아 흑석동에 낙향하여

새긴 것으로 전해 오며 『한국지명총람』에 “흑석리는 검은 빛깔의 돌이 많으므로

검은돌 또는 흑석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오르막을 올라 능선을 하나 넘어 내려서니 돌탑이 보인다

오늘 산행은 짧은 구간에 오르내림이 많은 빨래판 구간이고 거기다가

눈이 많아 예상보다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는데다가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이 산꾼을 주눅들게 한다 

조을재(鳥乙峙 490m:13:45)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그 지형이 조리형국이라 조리재라고 부르며 곡식이 많이 모여들어서 큰 부자가 나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영월로 가는 관행(官行) 길이었다고 한다.

무동산,왕박산, 삼태산이 삼각형으로 우묵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조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조올치와 가창산 사이에 제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는 아래부터 차례로1봉, 2봉, 3봉,

땀봉으로 부르며 영진지도에는 조을치로 표기되어 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조리재로 부른다

 

조을재 정상에는 민초들의 만든듯한 돌탑하나와 이정표가 서 있고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엔 무속인들이 걸어논 듯한 천들이 바람에 세차게 휘날린다

조을재 이정표
15분전에 지나온 서문리 갈갈림길에도 왕박산 1.7km라고 써놨는데 이곳도 1.7km라니
처음 이곳에 온 산꾼을로서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조을재의 전설

옛날 충청도 지방에 김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키도 작고 성품이 몹시
경망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이름 대신 '조리'라는 별명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런데 김조리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조리는 혹시 아버지의 묘를 잘못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유골을 괴나리 봇짐 속에 소중히 모신 다음 명당이 많다는 강원도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김조리가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인 왕박산밑 점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그는 주막집의 목로방(木盧房)에서 장사꾼들과 함께 자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잠자리에 들 때에야 머리맡에 모셔 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은 없어지고

참빗 장사꾼의 큰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유골 봇짐을 잃어버린 그는 대성 통곡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조리는 유골 봇짐과 바꾸어진 참빛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참빗이 잘 팔려 큰 돈을 벌었다

.

그 후에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어 몇 년 안가서 장가도 들고 땅도 많이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함께 자던 참빗 장수는 김조리가 봇짐을 소중하게 여기므로 혹시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하는 욕심으로그날 새벽 봇짐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쳐서 조리재

중턱에서 봇짐을 풀어보니 뜻밖에도 사람이 유골이 나왔던 것이다.

참빗장수는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나서 그 유골봇짐을 큰 참나무 밑에다 휙 던져버리고

조리재를 내려오다가 아!나도 조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참나무 밑에

유골을 묻어준 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충청도의 큰 부자집 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머슴은 숫돌에다 낫을 갈면서 "주인 어른,올해도 벌초를 안 가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머슴살이도 하고 행상도 했다네.

그러나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아버님의 유골을 강원도의 명당 자리로 모시고 가던 중에

어느 참빗장사가 실수로 봇짐을 바꾸어 가는 바람에 아버님의 유골을 잃어버렸다네."

주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가 바로 그 때 유골을 훔쳐간 참빗장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인은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아버님의 유골을 찾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김조리는 이름난 지관을 모시고 머슴과 함께 이곳 왕박산 줄기의 큰 참나무

밑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찾아냈고 지관은 패침을 놓고 유골이 묻힌 묘를 한참 주시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어느 유명힌 지관 어른이당대에 발복하는 조리형국의 혈에다 묘를 잡아 주었소?"라면서

놀라는 것이었다.그 후 김부자는 참빗장사였던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친형제처럼 의좋게 살았다고 한다.

조을재 능선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조금 늦은 시간에 조을재 북쪽 아래 바람을 피해서 점심상을 펼친다

점심이래봐야 집에서 싸온 밥에다가 오징어국에 반찬도 없다... 거기다가

따끈한 커피 한잔이 오늘 점심의 전부... 잠깐사이에 손이 굳어 버린다

핫팻을 꺼내 손을 녹인 다음에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입에 쏟아 넣고 그냥 삼킨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는 서둘러 길을 나선다 (식사시간 10분)

추워도 너무 춥다...매서운 바람의 영향으로...

조을재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눈이 발목까지 차오른데다 눈 아래 낙엽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제체된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10분이나 소요되고 능선 정상에 오르니 우측으론 왕박산과 무등산이 보이고

좌측 능선 아래로는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제천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안부를 지나면서 바라본 제천 시내의 모습

능선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

무등산(無騰山:620m)

충북 제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무등산(無騰山)은

‘없을 무(無)'에 ‘베낄 등(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산으로 무등산의 가까운 남쪽에 위치한

왕박산(王朴山 597.5m)은 고려의 한 왕이 왕비와 대신들과 함께 이성계를 피해 들어와 피신한 곳이라고 한다.

 

무등산(無騰山)은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무둥산[舞童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이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는 무등산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피난 온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자 신하들이 목말을 태우고 다녔다는 이

야기에 가탁하여 목말의 방언인 '무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씨 성을 가진 왕은 성을 박씨로 바꿔 살았는데 당시 본관은 의흥으로 현재까지 의흥 박씨는 존재하고 있다.

주변 산군을 이루는 무등산과 한편 왕박산보다는 좀더 남쪽 아래에 솟은 가창산(819.5m)의 이름 또한 이 유래와 관련 있다.

 

무등산은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무등을 태우고 다녀서 무등산이라 했으며,

가창산은 왕을 위해 신하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무등산은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으로 무동산이라 했다고도 전하나 지금 현재 전해지는 한자마저

달라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 외에도 주변 지역명인 ‘절골'은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며, ‘사기장골'은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승지골'은 말 그대로 스님이 살던 곳이란다

 

왕박산 갈림봉인 527봉에서 무등산까진 약 3.7km이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왕박산과 무등산의 형태는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보인다

왕박산(王朴山:598m)

충북 제천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일가를 처형

하자 고려의 왕족으로 승지(承旨)벼슬을 지낸 왕을규(王乙規)가 화를 피하기 위해

이 산으로 숨어들어 성씨를 그의 외갓집 성씨인 의흥 박씨(義興 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하여

그 후로 이 산을 왕박산이라 부른다.

 

고려의 장수였던 이 성게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여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권문세족들을 무너뜨리고 온건개혁파인 사대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이었던

왕을규(王乙規)도 멸족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의 형인 이부상서(吏部尙書) 왕갑규(王甲規)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고려에 남은 왕을규는 외갓집 성을 따라 의흥 박씨(義興 朴氏), 즉 박을규로

행세하며 영춘현 차의곡(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피난와 살았다

그래서 의흥박씨를 흔히 왕박씨(王朴氏)라고 하며 3대까지 영춘에 살았으나

영춘에는 현청이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신변의 불안을 느끼자 4세손 박근부터 왕박산 아래인 제천시 송학면 만지동

(음지 만지실)에 은거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의흥박씨의 관향조인 박을규(朴乙規)의 본성은 왕씨로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을 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春城)[현재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외가(外家)의 성(姓)인 박씨를 따랐다.

그 후 후손들은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인 박득서(朴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세조(世祖) 때 좌익공신인 박근(朴瑾), 중종(中宗) 때 박승종(朴承宗) 등이 저명하다

왕박산 분기점인 527봉 가는 능선은 바람의 영향 탓인지 어떤곳은 눈이 허리까지 차오른다.

숏다리인 산꾼 범여는 걷기가 너무 힘이든다... 자꾸만 지쳐가는데 눈덮인 무명묘지가 나온다

枯葉 가운데의 등로에 쌓인 눈... 러셀이 힘든줄 예전엔 몰랐습니다

왕박산시루봉(527m:14:20)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개념도상에는 527봉 또는 왕박산 갈림길로 되어 있고 “왕박산 시루”라고 한다

정상에는 제천시에서 설치한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산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처럼...

지명유래는 왕박산가 흡사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였는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왕박산에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은신하고, 성을 박씨(朴氏)로 고쳐 살았다.

성을 바꾸어 박씨가 된 고려 왕족은 그 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바꿔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왕박산’또는 ‘왕박산 시루’라

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왕박씨’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왕족들이 성을 왕씨에서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수필집 『추강냉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레아 박건석님이 붙혀논 왕박산 시루봉의 표지코팅지

왕박산 갈림길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했던 시간보다 2시간 30분이상이 더 걸리는 바람에

왕박산을 갈까말까 갈등이 무지하게 심하다... 안 가자니 찝찝하고 가자니

오늘 목표지점인 동막고개까지 가기는 정말 빡빡하고, 삭고개나 뱃재에서

끊자니 나홀로 산행에서 다음 구간 끊기가 애매하여 왕박산을 포기하고

서문리로 향한다... ‘산은 늘 거기 있는데 담에 오지’하는 위안을 삼으면서...

지나온 왕박산 시루봉의 모습

서문리 갈림길(14:25)

왕박산 시루봉에서 3분정도 내려오니 y자 갈림길이 나오며 뚜렸한 서문리로

향하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길이 거의보이질 않는 능선으로 접어든다

아무도 다니지 않았던 길에는 짐승들의 발자국만 산꾼을 안내한다

무릎까지 빠지는 등로를 내려오는데 이곳 역시 아이젠은 무용지물이다

낙엽속에 몇번 쳐박히면서 힘들게 급경사를 내려오니 좌측에 두릅나무들이

보이는 농장이 나타나고...

조금 더 내려오니 우측 철조망 너머로는 인삼밭이 보이고...

등로 끄트머리에는 지맥길을 밭이 점령하고 있어서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마을도로로

내려오니 38번 국도를 만나는데 차량이 너무많아 무단횡단을 포기하고 굴다리로 향한다 

38번국도 굴다리(14:40)
제천에서 영월로 향하는 38번 국도 굴다리를 지난다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꺽어져 수로를 타고 올라서는데 빙판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水路를 힘들게 올라 38번 국도를 끼고 절개지로 올라선다

이곳부터 개나리추모공원까지는 마치 마을 뒷동산을 걷는 느낌이다

마치 한남정맥 용인 수지구간을 걷는 느낌인데 뒷동산이긴 하나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아 쌓인 눈과 무성하게 우거진 잡목의 태클이 상당히 심하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등로의 궤적

접도구역 표시석을 끼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등로가 거의 보이지 않는곳에 산행지도로 유명한 진혁진님의 시그널이 반갑기만 하다

삭고개(14:50)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로 삽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지명:서면)으로 가는 고개로 양 옆으로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높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은 곳으로 건너야 한다

이곳은 바로 옆에 있는 38번 국도의 영향으로 차량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 완전히 빙판이다

힘들게 토사 방호벽을 넘으니 수로에 쌓인 눈을 짐작 못하여 빠지는 바람에

그곳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나와보니 도둑넘이란 씨앗이 옷에 잔뜩 붙는다.

다시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올라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묘지가 나온다

뒤돌아보니 왕박산시루봉, 왕박산, 무등산이 보이는데 왕박산 가지 못한게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346봉(15:00)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이곳은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보인다

무명묘지를 지나니...

NO가 없는 송전탑을 만나고...

NO10 송전탑(15:05)

조그만 능선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무명묘지를 만나고 잠시후 철조망을 만난다 

고암정수장 철조망(15:15)

영월지맥길 정 가운데 고암정수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이곳부터 개나리추모공원까지는 고암정수장, 고암테크노 공단, 제천변전소가

영월지맥을 점령한 바람에 정규 코스로 갈 수 없고 우회를 해야하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철조망의 좌.우로 가야하는데 좌측으로 향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긴 하나 우측으로 우회하는게 훨씬 편할듯 싶다 

정수장 울타리를 따라 가다가 군 벙커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좌측으로 고암 정수장을 끼고 넓은 도로를 따라서 뱃재로 향한다

도로 우측엔 송학영농법인 간판이 보이고 중기공장과 그 너머 동막I.C가 보인다

도로에서 3분정도를 걸어오다가 우측 내려서 밭 가운데를 지나 태백선 폐선로를 지난다

태백선 폐철길(15:25)

예전에 태백선이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태백산 직선화 공사로 지금은 폐선이 된 곳이다

태백선은 태백산 지구의 지하자원 개발에 따라 생산된 석탄과 중석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개설된 철도이다.

1949년 5월 3일 영월선과 함백선 건설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11월 5일 영월선 제천~송학 간 9.8㎞를

개통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건설 공사에 재착수하여 1956년 1월 제천~영월 간 38.1㎞를 준공하였다.

1955년 12월 31일 제천∼영월 간 38.1 km의 영월선을 개통한 후, 1957년 3월 9일 영월∼함백 간 22.6 km를

개통하면서 함백선이라 불렀고 1966년 1월 19일 다시 예미∼고한 간 30 km를 개통하면서 고한선이라 하였고,

1973년 10월 16일 고한∼태백 간 15 km를 추가 개통하고, 마지막으로 1975년 12월 5일 태백∼백산 간 9.3 km를 개통하였다.

이로써 제천~백산을 연결하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부터 태백이라 부르게 되었다.

폐철로가 되어버린 태백선을 지나 밭 가운데를 질러 38번 국도로 올라선다

차량들이 생각보다 많이 다니는 4차선 국도를 무단으로 가로질러 주유소 방향으로 향하는데

이곳이 뱃재라는 곳이다... 주유소 입구에 표시석이 있으나 화물차들에 가려져 잘 보이질 않는다

뱃재(敗峴:15:30)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38번 국도의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자라잡고 있다

지명 유래는 여러가지 설로 전해내려 오는데 고개 형상이 배(船)와 같이 생겼다고 뱃재(船峴),

배를 많이 팔았다고 배고개(梨峴), 임진왜란 때 왜적에 패했다고 팻재(敗峴)...등등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에 관한 설이 가장 많다

제천 지역의 신혼부부는 예전부터 신행길로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가는 고개를 피했다.

임진왜란 중에 우리 관군과 의병이 이곳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고개에서 맞아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팻재’ 또는 ‘패현’이라 하였고,

신혼부부는 불길한 장소라고 여겨서 이 길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혼부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기에 ‘실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팻재를 금기로 하여 이 고개를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뱃재입구에 있는 주유소 폴싸인 기둥뒤의 절개지로 올라서서 영월지맥길을 이어간다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에 송전탑이 있고 외래식물인 자리공이 말라 죽은 뒤에도

외로운 산꾼에게 태클을 걸고 도둑넘 씨앗은 자꾸만 바짓가랑이 붙어면서 귀찮게 군다

좌.우측으로 중장비 공장들이 많이 보이고 지저분한 능선엔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527봉(왕박산 시루봉)을 내려온 이후로는 계속해서 마을 뒷동산을 걷는다

좌측으론 조금전에 지나온 오일뱅크 주유소도 보인다

그러니까 산이 마을로 내려와 人間群象들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우째 사는지...

한마디로 재미없소이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民草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저분한 등로를 지나니 좌측으로는 고암테크노 공단 철조망이 보이고 소나무 조림을 해놨다

고암동 테크노 공단 철조망을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고암동은 제천시에 있는 법정 동으로 예부터 고인돌과 같은 큰 바위가 있어 고라미, 고래미, 고암이라고 하였다.

한자의 뜻으로 보아도 ‘옛 돌’이지만 이두식으로 읽어도 ‘고인돌’의 ‘고’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연 마을로 양구터, 고척, 고래미, 당머루, 벌말, 거루, 무덤실, 대곡도티(垈谷道峠), 뒤터, 둔전골 등이 있으며

무덤실은 당머루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장으로 추측되는 묘지가 있다.

묘목 조림지를 지나 철조망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꽤나 큰 소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다시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공단 철조망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좌측엔 배밭이 나오고 곧바로 배밭 철조망을 무단침입(?)하여 배밭으로 내려선다

배밭 맨 갓쪽으로 걸어서 가니...

가건물이 나오고 다시 눈덮인 농로를 따라가다 좌측으로 꺽어져 밭 가운데를 가로 지른다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저 멀리 송전탑을 포스트 삼아 걷는다... 마을 길이 있는 곳까지...

마을길을 만나고 좌측 철조망을 끼고 직진하여 걷는다

대진환경산업(주) 갈림길(15:55)

폐기물 업체인 대진환경산업(주) 간판을 보면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도로를 따라서 다랑고개로 향한다

도로 좌측 철조망 안에는 PAR 3 골프장이 겨울잠에 빠졌다

이런 곳에서는 숏게임 연습장으로는 최적인데...

우측으론 금강레미콘이 보이고...

도로로 내려서니 4차선도로인 82번 국도를 만난 다음 좌측으로 다량고개로 향한다

다랑고개(06:05)

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도화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제천변전소

버스 정류장과 우측으로 농약 제조공장인 인바이오믹스(주)가 있고 원 지맥길은

변전소 정류장 뒤로 올라서야 하나 변전소가 자리잡고 있어 우회를 해야한다

변전소 버스 정류장 뒤로 가야 원래 영월지맥길이나 철조망으로 인해 갈 수가 없어 우측 도로로 우회를 한다

버스 정류장과 인바이오(주) 공장사이 도로를 따라 걷는다

마을길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문자 메세지가 뜬다... 발신자는 국민 안전처인데 처음받는 문자다

언제부터 국가에서 나홀로 산꾼의 안위까지 걱정을 했나... 눈물나게 고맙구먼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고 이곳에 산행을 하는지는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혹 아침에 나를 태워준 택시기사가 신고를 했나... 내가 산행을 끝나면 전화하겠노라...

오후 4시쯤이면 끝날거라 이야기해서 그랬나... 자꾸만 의구심이 든다.

안 그래도 그 기사양반이 위험한데 혼자 다니냐고 하면서 가지말라고 말리더마는...

도화동 입구(14:10)

도화동 마을 표시석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마을 표시석 뒤에 기록된 마을의 지명유래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우측에 버스정류장과 수퍼가 있기에 날씨가 추워

점심시간 이후 이곳까지 쉬지않고 걸었더니만 허기가 져서 몸도 녹일겸

막걸리  한병 마시려고 갔더니만 문이 굳게 잠겨있고 ‘임대합니다’라고

쓰여 있기에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한계영당(韓溪影堂) 이정표가 나온다

조선시대 선조임금의 어의(御醫)를 지낸 한계군 이공기(李公沂) 선생의

옥축(玉軸)과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리고 한다

 

목은 이색 선생의 6대손인 이공기 선생은 조선 선조 때(1567~1608)의 인물로

침술에 능하였으며 왕비의 인후증을 치료한 공을 인증받아 동반(東班)의 직을

받으면서 허준과 함께 선조의 내의(內醫)가 되어 1593년(선조26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을 치료한 공으로

159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의관으로 한양에서 의주까지 선조대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3등인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功臣)에 책록되어 한계군에

봉해져 녹봉으로 토지를 하사받아 제천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한성부윤에 추증되고1944년에 아들인 한풍군 이영남의 품계에 따라

판돈령부사겸 오위도총부에 추증되었으며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 한산이씨

집성촌에 영당을 세워 제사하고 있다 

 

흔히들 제천을 한방의 고장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공기 선생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개나리추모공원 입구(16:20)

이곳에서 도로 좌측으로 꺽어져 개나리 추모공원 입구로 들어선다

도로에서 5분정도 올라서 좌측으로 꺽어져 송전탑으로 향하는데 도반한테서 전화가 온다

평소 존경하는 자운(慈雲)법사님이 청도 적천사 도솔암에서 동안거를 하시다가 열반하셨단다

이 무슨 날벼락인 말인가... 갑자기 다리가 풀리면서 도로에 주저앉아 버린다

70이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대쪽같은 삶으로 스님 못지않은 수행을 하신 분이다

나와는 1996년 능인불교대학 동기이고, 조계종 포교사 고시를 같이 본 동기이기도 한

인연으로 내가 2년간 조계종 포교사 염불팀장으로  있을 때 같이 염불봉사를 다니면서

참으로 많이 도와 주신 분이셨는데... 그리고 조그만 공사만 나와도 나에게 소개해주었고

한달전 까지만 해도 매주 이메일로 法談을 나누었는데 뭔 변고란 말인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럽고 맘이 급해진다...마치 제 정신이 아닌것처럼

아무래도 내일은 법사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염불이라도 하러 가야겠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10분을 넘게 추모공원 아스팔트 도로에 멍하니 앉아서 법사님을 생각한다

참으로 법사님과 많은 염불봉사를 다녔던 기억과 여러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법우들과 성지순례를 갔다오면서 야단법석(席)을 벌이면서 치열하게

불교교리를 난상토론 하였고, 젊은이 못지않아 재치와 유머로 법우들을 웃겼던 법사님!

당신의 모습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추모공원 좌측으로 가서 우측의 추모공원 묘지를 바라보며 걷는데 이곳은 음지에다가

최근에 소나무를 간벌하고 마구 버려져 있어서 등로 주위가 상당히 어지럽다

거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고 조그만 봉우리의 오르내림은 계속된다

무명묘지를 지나니 386봉 정상에 정상에는 참호가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NO 4 송전탑(16:55)
또 다시 눈덮인  무명묘지를 지나 T자 능선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는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눈구덩이에 빠진다... 아마 웅덩이 같은 곳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허둥대다가 올라와 따시 빠른 걸음으로 정신없이 지맥길을 걸어간다 

NO 7 송전탑(16:58)

ㅜ자 능선(17:05)

NO 7 송전탑을 지나자마자 조그만 능선을 올라 좌측으로 꺽어져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ㅜ능선이 나오는데 이곳은 조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우측으로의 등로는 너무나 뚜렸하고 지맥길 다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서너개나

보이나 영월지맥길은 약간 좌측의 10시방향의 희미한 길로 가야한다

425봉(17::07)

숲속이라 벌써 어둠이 시작되고 똑닥이 카메라라 그런지 사진이 흑백으로 나온다 

다시 능선에서 크게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늦은 시간이라

맘이 급한 탓이라 빠르게 걷는데 갑자기 왼쪽 신발이 굉장히 미끄럽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왼쪽에 아이젠이 없는게 아닌가... 나 원참 이걸 어쩌나

아마 조금전 구덩이에 빠졌다가 허우적대면서 올라올 때 빠져버린 모양이다

모산재(山峙:17:15)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서 고암동으로 통하는 조그만 고개로

이곳은 예전에 모산동(洞)이었는데  행정개편으로 인해

고암동에 편입된 곳으로 모산재의 지명 유래는 의림지의 안쪽이라는

뜻에서 못안이라고 불리다가 발음하기 쉬운 모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즉 모산()은 못 안의 이두식 지명이다.

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된 조그만 小路로 측으로는 의림지로

통하는 마을 도로처럼 보이는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이 모산재란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안부 철조망(17:20)

우측에는 개사육장이 있는지 야리꼬리한 가축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개쉬끼들의 합창을 하면서 짖어대는데 안부가 떠나갈 듯 하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만나면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어둠속에 커다란 묘지를 만난다
慶州李公 묘지(17:25)

묘지 가운데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과수원 건물이 보이고 과수원을 지나 좌측으로 꺽어진다 

과수원 도로를 따라서 동막고개로 향한다
동막고개(17:30) 

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도화리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의 도로로

고개 좌측에는 세명대학교와 솔밭공원, 의림지가 있는 곳이다

드디어 오늘 너무 힘들게 걸어온 한 구간을 마무리 짓는 동막고개에 도착한다

적설량이 너무 많아 참으로 힘들었고 내가 숏다리라는 것에 비애(悲哀)를 느낀다

힘들게 동막고개에 도착하니 벌써 가로등에는 불빛이 켜져 있다

 

어둠속에 산행을 끝낸 다음에 스패치와 아이젠을 벗고 스틱을 접고 있는데

과수원쪽에서 RV 차량이 내려오고 있는게 아닌가... 이제 히치에 관해선

얼굴에 철판을 깐 뻔돌이가 다 되었기에 차량앞을 가로막고 태워달라 하니까

주저없이 타라고 하여 제천 터미널까지 편하게 무사히 도착한다

제천 터미널(17:50)

제천 터미널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들러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베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조금전에 나를 태워준 분이 대합실에서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찾고 있는게 아닌가... 왠일인가  했더니

차에다 장갑 한짝을 두고 내렸다고 하면서 가지고 온 게 아닌가

너무나 고맙기에 인사를 하고 표를 끊으려고 호주머니에 돈주머니

(난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음)를 찾으니 아무리 찾아도 돈주머니가

보이질 않는다... 베낭을 2번이나 뒤지고 자켓을 꺼꾸로 뒤집어도

나오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아무래도 지도를 보느라

주머니를 열고 닫을 때 빠져버린 모양이다.

이곳은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아침에 태우준 택시기사분에게

전화를 하여 혹 아침에 차량뒤에 황색 돈주머니 못봤냐고 하니까

못봤다고 한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20,000원만 빌려 달라고 하니까

근처에 있었던지 5분도 안되어 달려왔다... 그 돈으로 표를 예매하고

캔맥주 하나로 목을 축인다

 

영월지맥 이 구간을 타시는 후답자께서는 조그만 황색 손지갑에 영문으로

“VAUDE” 라 쓰여 있으며 금액은 5만원권 한장과 만원권 2장, 천원짜리 3장정도

있으니 등로에서 혹 찾으시면(010-5254-3321) 꼭 연락바랍니다

그 돈으로 막걸리 사드릴께요

제천발 서울행 버스(18:30)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오늘 산행은 마치 뭐에 홀린듯 산행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서울오자마자 고마운 택시기사에게 빌린 돈을 송금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