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5년 9월 4일~5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산행하기 좋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km / 먹고 마시며 여유롭게 9시간 55분소요
☞ 참석인원: 안내 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갓바위 주차장(대구방면)-보은사-관암사-1365계단-동봉갈림길-관봉(갓바위부처)
선본사 중단- 삼성각-선본재-노적봉-전망암-북방아덤 갈림길-도장바위-은혜봉
헬기장-느패재(능성재)-운부봉-삿갓봉-바른재-신령봉(도마재)-헬기장-동화사 갈림길
염불암 갈림길-바위병풍-염불봉-동불(미타봉)-동봉-약사여래불장구메기봉-헬기장
동화사 갈림길-비로봉-약샤여래마애불-오도재-서봉(삼성봉)-부인사 갈림길-미정재
장군바봉위-톱날능선-가마바위봉-마당재-헬기장-공터-학생야영장 갈림봉-파계봉
파계봉-파계재-헬기장-원당봉산터-삼갈래봉-한티재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동구 능성동, 도학동, 용수동, 신무동 신룡동 / 경북 경산시 화촌면 /
영천시 청통면, 신령면 / 군위군 부개면 / 칠곡군 동명면
지난주 8개월간의 영춘지맥 대장정을 나홀로 끝내고나니 지맥을 또하나 끝냈다는
쾌감과 환희, 그리고 또 지맥 하나를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머리가 약간 아파온다
그리고 7월초 백두산을 3박4일을 갔다 왔고 7월말에는1박2일의 지리산 남부능선 구간을
걸었고 8월 중순경에 충북알프스 구간을 2박3일 걸었더니만 슬슬 체력에 무리가 오는듯 하다
거기다가 요즘 나홀로 산행길에 계속 부딪히는 멧돼지와의 조우와 뱀들과의 만남이
조금은 부담이 되고하여 오늘은 백두산을 같이 걸었던 신난다 대장님을 따라 팔공산 산행을 나선다
지난주 목욜이 우란분절(백중)이라 은사스님 사찰에서 부모님 천도제를 지냈지만 늘
부모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이번주 산행구간에 갓바위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백두산 여행때 만났던 山友들도 볼 겸...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갓바위 주차장(04:40)
서울에서 밤 10시30분에 출발하여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한 다음에 팔공산
갓바위 주차장(대구쪽)에 도착하여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4:45)
보은사 입구(04:47)
내가 이곳으로 갓바위로 오르기는 10년이 넘은듯 싶다
경산쪽으로는 4년전에 오르기는 했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조금넘었지만 이곳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桑田碧海가 된 느낌이다
예전엔 어둠속에 후레쉬를 켜고 관봉 정상까지 오르며 약사여래불 정근을
하면서 걸었건만 지금은 정상까지 밤새도록 훤하게 가로등이 켜져있고 1365 돌계단이
되어 있으며 예전에 무질서하게 난립해있던 상가들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아님은 못 보았던지) 사찰들이 많이 보인다
그 첫번째 만난 사찰이 보은사인데 새벽예불이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대관음사 팔공산 도량(04:57)
예전에 없었던 대관음사 팔공산 도량도 새롭게 보인다
대구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는 회주 우학스님이 1992년 영남불교대학을
설립한 후 2006년에 한국불교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지속적으로 수많은 포교와 양질의
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배움과 나눔의 도량으로 성장해 왔고 대관음사는 대구 최대 사찰로 알려져 있다.
대관음사의 회주인 무일(無一) 우학 스님은 동국대 한의대에서 수학하던 중 귀의를 결심하고
통도사에서 출가했으며 그 후, 동국대에서 선학을 전공했다. 우학 스님은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
<완벽한 참선법>, <내 인생 최고의 만남 붓다> 등의 많은 저서와 학교 교재인 <새법요집>,
<새로운 불교공부> 등을 쓰고 직접 강의를 하여 신도들이 불법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관암사 대웅전(05:00)
한국불교 태고종 제14대 종정백암대종사께서 기도중 불상을 발견하고 터만 남은 이곳이 중생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시고 1962년 3월 관암사를 창건하였고 제2대 주지인 혜공 화상이
200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2010년 5월 대웅전등을 낙성함으로서 가람의 형태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관암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지장전 칠성각 산신각 종각 용왕당 요사등
12동의 전각을 소유하여 전통 가람의 면모를 갖추고 팔공산의 정기를 간직한 영험한 기도 도량이다
八公山 冠岩寺 의 모습(사진 - 펌)
관암사의 대웅전 柱聯에 이런
글귀가 써여 있다고 하는데 어두운 밤이라 확인을 못했다
枯木花開劫外春 고목에 꽃이 피는 세월 밖의 봄이여
山河一片白銀團 이 산하는 한 조각 흰 눈덩이라네
神光久立安心處 신비론 빛 오래 머물러 안심처 구했지만
豈似今朝徹骨寒 어찌 오늘 아침 뼈에 닿는 추위만 하랴
관암사 대웅전 본존불
관봉으로 오르려면 무조건 관암사를 거쳐야 하는 구조이다
관암사에 도착하여 대웅전으로 올라 선 채로 부처님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마침 새벽예불을 마치신 스님께서 양초에 켜있는 촛불을 끄신다.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와서 물한모금을 마신 후 관봉으로 향한다
관음사를 빠져나오면서 돌계단이 시작되는데 계단이 1365개란다
관봉 오르는 길에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구시내의 야경
우리나라 제3의 도시인 대구(大邱)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野性이 강한 도시였고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심화되고 있을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고 이 2.28학생의거는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던 곳이 대구였지만
그 이후로 현재의 대통령까지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이후로 국가정책에
가장 협조적인 여당성향으로 바뀌어 버린 보수적인 도시가 대구이다
지당하게 옳으신 말씀인데 실천이 안되네요
동봉 갈림길(05:35)
드디어 갓바위라고 부르는 관봉 정상으로 오른다
선본사 유리광전(琉璃光殿)
이곳 갓바위 부처님이 있는 선본사는 독특한 구조의 가람형태를 갖추고 있다.
선본사 본찰은 저 아래에 있고, 맨위의 갓바위 부처님과 이곳 유리광전을 상단
관봉 바로 아래에 대웅전과 삼층석탑이 있는 곳을 중단, 바로 삼성각을 하단이라 부른다
유리(琉璃)란 시공(時空)을 초월한 仙人(선인)의 경지를 말한다. 선도에서 미래세계를
유리세계라고 표현하는 바 이 말은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영적인 눈으로
휜히 다 보게 된다는 뜻이고 공간(空間)적으로는 하늘 끝, 땅속(바닷속) 어디라도 모두
神眼(신안)으로 다 볼 수 있는 경지라는 뜻이다
관봉(冠峰:852m:05:38)
대구광역시 동구 능성동과 경북 경산시 와촌면의 경계에 있는 팔공산 봉우리중에
하나로 본래의 지명인 관봉(冠峰)보다는 갓바위로 더 알려져 있는 곳으로 동쪽 게곡엔
청도천(淸道川), 서쪽 계곡엔 문암천(門巖川)이 각각 발원하여 금호강(琴湖江)으로 유입된다
멀리서 보는 산형태가 갓모양같이 생겼다 하는데서 유래 되었으며 갓바위부처님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갓바위>라고도 불리는 해발 850m의 험준한 팔공산
관봉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된 단독 원각상이다.
이 불상은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7년(638) 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의현대사가 이 돌부처를 만드는 동안 밤마다 큰 학이 날아와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갓 모양의 자연 판석(板石)을 올려놓은 머리는 살상투가 뚜렷한 민머리이며 두 손 모양은
석굴암(石窟庵) 불상처럼 8세기 불상에서 유행했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유사하다.
왼손에 작은 약호를 든 것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약사여래상으로 볼 수 있다. 근엄한 얼굴,
거대한 체구에 밀착되어 흐르는 통견의 유려한 옷주름선이 선각화되어 상현좌를 이루고 있으나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배제된 점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의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벙글 아우님! 뭘 그리 간절하게 기도를 하시는가 ?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보물 제431호)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전체 높이는 4m에 이르며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眺望)된다.
이 부처님은 화강암 한 돌로 만든 것인데, 몸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정면의 모습
이 불상의 학술상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이름에서 굳이 약사불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이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미륵불, 아미타불 등 이론(異論)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왼손에 보면 약합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또 옛날부터 이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여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이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어쨌든 손위의 약합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는 약사여래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현재 갓바위 부처님 앞에는 약 100여평 가량 널찍하게 터가 닦였고, 바닥에 돌이 깔리고 주위에는 철제 난간이
둘러쳐져 있으며 그와 함께 선본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더 넓혀지고 계단과 철제 난간이 많이 보완되어 있고
그래서 예전에 비해 한결 기도드리기 편하게 되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웃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하며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고,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하는데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裙衣)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절에 전하는 바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로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봉에서 여명을 맞이하다
갓바위 정상에서 20분간 머물면서 부처님에게 여법하게 예를 갖추고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약사여래 정근을 따라하면서 내 주위에 인연있는 모든 분들에게 병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하루 빨리 완쾌하시길 기원을 하는데 아마도 꼭 들어주실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갓바위 부처님께서는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갓바위를 찾아 정성껏 기도하면 한번의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에
부처님을 참배하러 오는 기도객들이 참으로 많다 100평이 채 안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수험시험 입시 전날에는 3만명이 넘는 기도객이 찾는다고 하니
아둔한 범여의 머리로서는 상상이 잘 안되는 편이다
5년만에 다시 찾은 갓바위 부처님을 배경으로 인증샷 하나를 남기는데
바로 옆 유리 상자에 있는 인등의 불빛 때문에 카메라가 얼굴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탓에 인증샷을 남기는데 실패를 한다.
오랫만에 왔기에 많이 아쉽기만 하다... 1시간만 늦게 왔으면...
갓바위 난간에서
아직은 입시철이 멀어서 그런지 기도하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번에 동화사에 개최된 팔재계 수계식에 참석한 다음 이곳에 왔을 때는 발디딜 틈도 없었는데...
20분동안 관봉 정상에 머물다가 가야할 길이 멀기에 선 채로 부처님께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길을 떠난다(06:00)
왔던 길로 되돌아 우측 능선으로 가면 관봉 정상으로 갈 수 있는데 동료 山友들은 우측으로
내려서서 선본사 삼성각쪽으로 향해 버리는 바람에 관봉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간다
많이 아쉽다... 혼자 좌측으로 가서 관봉 정상을 찍고 갈까 하다가 동료들에 민폐가 될 것
같아서 말없이 따라가는데 이런델 오니 맥산행을 하는 산꾼들과 많이 다르다
맥 산꾼들은 정상을 밟으려고 목숨을 거는데(흔히들 봉따먹기라고 함)... 일반 산우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선본사 중단
갓바위 부처님에게 예를 올리고 계단으로 내려오자말자 선본사 중단이 나타난다
선본사 중단에는 대웅전과 삼층석탑 그리고 공양간이 있다
마당 가운데 서있는 삼층석탑을 만불대원탑이라고 한다
애자모 지장보살
수자(水子)는 다른 말로 치자(稚子)라고도 한다.
이 말의 뜻은 출산 직후의 아기, 또는 태아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수(水), 즉 "미즈"라는 고어로 사산아(死産兒), 유산아(流産兒)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산아나, 유산아를 수자로 칭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옛날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는데, 출산 직후 사망한 영아들은 바다나 강물에 떠내려 보냈기 때문에 수자라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 뱃속의 양수를 따서 수자라고도 하였고, 일본에서는 "화찬"(추운강가 모래밭의 지장가요)이란
구전가요의 내용상으로는 '부모나 세상을 볼 수 없는 아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추운 강가 모래밭의 지장 가요"
어린 영혼들이나, 영아 영가들이 추운 강가의 모래밭에 모여서 아버지가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그리움에 울고 있는 영혼들의 슬픔이 뼈를 깎는 듯하다. 영아 영가들은 모래밭의 돌을 모아서
회향 탑을 쌓는데 한 층은 아버지를 위해, 또 한 층은 어머니를 위해, 또 한 층은 형제들을 위해서
회향 탑을 쌓으며 부모 형제를 한없이 기다리지만 밤이 되면 어느덧 지옥의 귀신이 찾아와서
밤새도록 쌓아올린 탑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무너뜨린 탑을 보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영가들에게 지장보살님이 나타나시어
"너희들은 부모로 인해 단명해서 죽은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아주 다른 세계여서
너희 부모를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이 명부세계의 지장보살님을 부모로 생각하고 의지하여라"하시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장보살님의 법의(法衣)를 펼쳐 어린 영가들을 포근히 감싸 삼도천을 건너 주신다
동굴속에 조성된 애자모 지장보살의 모습
선본사 삼성각(06:05)
마치 단양의 구인사에 온 것처럼 착각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가파른 절개지에 지어져 있는 느낌이...이곳 삼성각을 선본사 하단이라고 한다
삼성각이란 사찰에서 산신(山神)ㆍ칠성(七星)ㆍ독성(獨聖)을 함께 모셔져 있는 전각으로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봉안되어 있으며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ㆍ독성각ㆍ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ㆍ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ㆍ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ㆍ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으로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삼성각에 들렸다가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한모금 시원하게 마시는데 생각보다 물맛이 좋다
좁은 통로를 따라 삼성각을 빠져 나오자마자 모노레일이 나오고 레일을 넘어 동봉으로 향한다
잘 정리된 산길을 따라 고도를 높인다
선본재(禪本峙:820m:06:20)
이른 새벽에 갓바위 오르기 직전 80m 지점에서 갈라진 등로와 합쳐지는
지점이 선본재인데 고개의 지명이 바로 아래에 있는 선본사에서 따온듯 하다
좌측으로는 관봉 정상.바로 내려서면 북지장사 2.0km 지점에 있고 우측으로
동봉이 6.7km, 한티재15km가 있다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팔공산 지장신앙의 발원지인 북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485) 극달화상이 창건한
사찰로서 팔공산 관봉의 서쪽 지역인 노적봉(해발 600m) 남쪽 기슭에 자리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9교구 동화사의 말사로 보물 제 805호인 대웅전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6호인 삼층석탑 2기, 제 15호인 석조지장 보살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북지장사 "지장보살도"라는 탱화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정표(↓갓바위 0.6km, ↑동봉 6.7km, →선본사 1.0km, ←북지장사 2.0km)가
있는 이곳에서 물한모금 마시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노적봉(露積峰:887m;06:25)
대구 광역시 동구와 경북 경산시 와촌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노적단(볏섬)을 쌓아 놓은것같이 생긴 봉우리라 하여 노적봉이라 한다
선본재에서 동료 산우들과 선 채로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등로에
올라서자말자 커다란 암릉이 길을 막는데 바로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며 걷는데 이 암릉이 노적봉이란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자료에는 노적봉을 도장(印)과 같다하여 인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족봉 산형이 노적(露積)을 쌓아 놓은 것과 같다하여 노족봉이라하다 와전되어
노족봉이라 부르고 있는데 돌 봉우리 두 개가 토끼의 두 귀같이 솟아 있는 모양이다.
남사면의 동네 노인들은 예부터 '방아쌀개덤'이라 불렀다고 했다.
디딜방아의 부품에 비유했을 터. 그럴 경우 더 적확한 비유어는 '방아볼씨덤'이 될 것이다.
이 봉우리의 이름을 국가 공식 지도는 두 가지로 헷갈리게 표기하고 있다.
2만5천분의 1 지도는 인봉(印峰)이라 했다. 그러면서 거기서 출발한 산줄기가
한참 내려 간 지점에 있는 봉우리를 노족봉(老足峰)이라 적어 놨다.
그러나 같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만든 5천분의 1 지도는 그 두 이름을 뒤바꿔 표기했다
위의 것을 노족봉, 아래 것을 인봉이라 써 뒀다. 즉, 토끼 귀 같이 생긴 것은 '방아덤'이다.
볏가리 같이 위가 불룩하고 덩치가 큰 봉우리는 '노적봉'이고 노적봉에서 흘러 내려간
산줄기의 북지장사 윗부분에 있는 돌 봉우리의 이름은 '인봉'(도장바위)이다.
(대구 매일신문 자료 인용)
등로에서 바라본 선본사의 모습
팔공산 관봉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 속해 있다.
선본암 중수기문과 여러 자료를 통해 491년 신라 소지왕 1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뒤 수청스님이 1641년 인조 19년에 중창하였다.
그 이후로도 1765년 영조 41년에 기성스님의 중창을 포함하여 여러차레 중수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내 모든 성보 문화재는 모두 신라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갓바위 부처님도 선본사가 직접 관리를 하는 곳이다
뒤돌아본 노적봉의 모습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농바위에는 옷을 노적봉에는 양식을
넣어 두고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고도 했다.
뒤돌아본 관봉의 모습
벙글아우님...참으로 대단한 수퍼우먼이다
가려린 여인의 몸으로 1대간 9정맥 9기맥을 끝내고도 성에 안차는지 지금도 꾸준히
지맥길을 걷고 있으니... 아우님! 참으로 부러우이... 무리하지 말고 살살 댕기시게나
전망암(06:30)
장쾌하게 뻗은 팔공산 동부 능선의 모습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지나온 구간들
전망암에서 산우들과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동봉으로 향하는데
계속되는 위험한 암릉구간이긴 하지만 계단으로 되어있어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매번 길이없는 오지의 지맥길을 홀로 헤매다가
이렇게 제도권 등로를 걸어니 오랜만에 범여의 두 발(足)이 호사를 누린다
북방아덤 갈림길
이 이정표 좌측 아래로 남.북 방아덤이 있는데 직접 가지는 않는다
옛날부터 남방아덤과 북방아덤을 방아쌀개덤이라고 불렀다 한다
도장바위(道臧岩:06:40)
도장골(道臧骨) 윗쪽 능선에 있는 바위라 도장바위라 부르며 약 1500여 년 전
신라시대 스님이 몸을 숨긴 지역이라 하여 도장이라 명하고 건립한 사찰을
도장사라 하였으나 사찰은 없어지고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서 얻은 지명이다
가야 할 팔공산 동봉이 아련히 보이기 시작한다
도장바위를 지나자마자 꽤나 높은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능선 아래로 팔공C.C가 보인다
팔공C.C의 모습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새벽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경치는 끝내주지만 팔공산을 놓고 봐서는 자연경관을 망치는 憂를 범했구나
나도 이번달에 2번이나 라운딩을 나가야하는데 연습장은 한번도 안가고
허구한 날 이렇게 산에만 다니고 있으니... 이번에도 내 돈 먼저 보는 넘이임자일듯 싶다
다시 급경사에 설치된 철계단을 따라서 내려간다
또다른 봉우리를 살짝 넘으니...
운무가 살짝 낀 채로 다가오는 팔공산의 주능은 마치 고려시대 개경에서 뭇남성의
가슴을 설레게했던 황진이의 치맛자락처럼 보이는게 산꾼의 범여의 애간장을 다 녹이누나
024번 구조 이정목을 지나니...
등로에서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우측으로 우회하는 길이 나오는데
동료들은 다들 우회길로 가버리지만 벙글아우와 난 기어코 정상으로 오른다
이게 어쩌면 맥산행을 하는 산꾼들의 아집인지도 모르지...
능선으로 오르니 선답자들의 띠지들의 보이고...
은해봉(銀海峰:882m:07:00)
등로 위로 오르니 멋진 암릉구간이 나오고 팔공산 주능선이 나오는데
이곳이 트랭글에서는 “은해봉”이라고 하는데 팔공산 능선에 있는 지명들은
한 지역이 대체적으로 2가지의 이름을 가진 곳이 많아서 상당히 혼란스럽다
지명의 유래는 아마도 우측의 영천시 청통면에 위치한 은해사에서 따온 지명인듯 하다
경산시 와촌면과 영천시 청통면 그리고 대구시 동구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은해사골
남쪽 줄기이자 와촌면 갓바위골의 북쪽 봉우리로 윗면이 상당히 넓다
와촌 솔뫼기(솔목) 마을의 한 어르신은 그 봉우리 이름을 '시루봉'이라 기억해 냈다.
꼭 정상을 고집하는 벙글 아우님... 역쉬 맥 산꾼들은 달라요
은해봉을 내려서니 남쪽에서 약간의 먹구름이 보이면서 바람이 부는데 비가 올라나...
하긴 기상청에서 오늘 대구지방에는 비가 내린다고 하긴 했지만 정통산꾼들은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본인들이 구름과 바람을 살피며 날씨를 알아낸다
그리고 비가오면 비를 맞고, 눈이오면 눈을 맞으며 자연에 순응하며이 山河를 누비고 다녔는데
그런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더군더나 오늘 산행을 리딩하는 대장과는 백두산과 지리산
신년일출도 멋지게 감상했고 아마도 대장이 갓바위부처님에게 비오지 말라고 했으니 안오겠지
차양끈적버섯
오랫만에 같이 걷는 하양 회장님과 벙글아우... 그리고 오늘 처음본 벙글
후배님과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보니 느패재(능성재)에 도착한다
은해봉에서 3분정도 내려서니 느패재(능성재)가 나오는데 정상에는 예전에
있었다는 팔각정의 추춧돌만 남아있는 공터인데 콘크리트 추춧돌이 흉물스럽다
대구시 동구 능성동과 영천시 청통면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지세가 마치 성(城)처럼
생겼다고 해서 능성재라고 불렸으며 느패재라는 옛 지명도 있다
우측으로 6km 정도를 내려가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혜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좌측인 대구 방면은 팔공C.C라는 골프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고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느패재(820m:07:05)
대구시 동구, 영천시 청통면, 경산시 와촌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옛날
포항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한다.(국토지리정보원)...느패재도 '능성재' '능선재'로
엉터리 표기되고 있었다며 대구-경북의 공원관리사무소가 곳곳에 안내판을
붙여 엉터리 이름을 널리 전파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
더욱이 느패재는 위치 표시에서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느패의 지명유래는 넓은 곳이어서 느패로 불렸을 것이라는 추측과
△늪 같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으리라는 추측 및
△능패령에서 느패령으로 변화하면서 생겼으리라는 풀이가 제시됐다
(대구 매일신문의 자료인용)
은해사는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八公山)의 대표적인 사찰로 조선 31본산,
경북 5대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본사로 경북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금마타리가 피기 시작하는걸 보니 가을이 오긴 오는가보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팔공C.C에서 설치한 난간을 부여잡고 내려선다
억새가 피기 시작하니... 무더운 여름은 벌써 저만치 가는 느낌이다
헬기장(07:10)
헬기장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암릉구간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다
보면 볼수록 환희심으로 다가오는 팔공산의 모습
멋진 소나무가 산꾼 범여를 반기고...
암릉구간을 계속 올라가니...
운부봉(:雲浮峰:930m:07:25)
대구시 동구 도학동과 경북 영천시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동화사골 위에 있는 봉우리로
대구쪽은 동화사와 팔공C.C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거조암이 있는 청통면 신원리 마을,
남쪽으로는 은해사골이 있으며 느패골과 동화사골 안으로 '운부암'(雲浮庵)이라는
암자가 있어서 운부봉이라 부르는데 그 지명은 확실하지는 않다
지나온 능선의 모습
삿갓봉(07:35)
삿갓봉에서 다시 내리막길 좌측으로 내려서니 바른재가 나온다
바른재(850m:07:40)
동화사에서 올라오는 폭포골 끝지점 능선에 있는 바른재는 거조암골로 통하는 고개인데 정상은
ㅓ자 형태의 등로가 있고 팔공약수터와 이정표가 있는데 대구쪽으로 등로가 뚜렸하지만 영천쪽의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바른재 정상의 이정표
바른재 정상을 지나자마자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산상의 조찬(07:42~08:40)
헬기장에서 오랫만에 산행을 같이한 하양회장님과 벙글아우와 후배님...
빙둘러 앉아 산상의 만찬이 시작되는데 늘 홀로 산행을 하면서 청승스럽게
밥을 먹다가 오랫만에 여렀이 밥을 먹으니 밥맛도 있고 막걸리 한잔의 맛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1시간여 동안 식사에다 후식으로 따끈한
모닝커피까지 한잔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편안한 등로를 오르다가 로프가 있는 암릉구간을 지나니...지도상으로 신령봉이 나온다
팔공산 산행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많은 정보들이 오류 투성이다
지명도 맞질않을 뿐더러 산행기를 쓰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니 상당히 혼란스럽다
명색이 도립공원이고 대구 사람들이 진산이라고 여기는 팔공산의 정보가 이렇게
오류투성이일줄은 정말 몰랐다...쓰잘데없이 100m마다 이정목을 세울게 아니라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는게 어떨런지...거기다가 정상을 표시하는데는
어찌 그리 인색한 지...개념없는 사람들 하고는... 정말 실망스럽다
신령봉(新寧峰:997m:08:55)
경북 영천시 신령면, 청통면, 대구시 동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능선은 도마재로
잠시 몸을 낮췄다가 997m 봉우리로 올라서면서 동쪽으로 '신녕지맥'을 내려보낸다.
신녕면과 청통면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신녕천의 둑 역할을 겸하고,
남사면으로 '거조암'을 품어 안기도 하는 중요한 산줄기이다
노란소름그물버섯 같기도 하고... 조금은 아리까리하다
팔공산은 초입부터 멋진 암릉들을 계속해서 만나는데 근육질의 멋진 암릉을 보면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마재(955m:09:05)
도마재는 대구시 동구와 경북 영천시 신령면을 잇는 고개로 개념상에 신령재로 되어 있다
영천 신령면 치산리 등의 민초들이 치산계곡의 동애골을 타고 올라가 이 재를 넘으면 동화사
폭포골로 연결되어 있어 대구로 다니던 애환이 서린 고개이도 하다
정상에는 팔공산 자연공원 안내도와 이정표가 서있다
도마재에서 동봉방향으로 오르자마자 이정표를 만나고...편안한 육산(陸山)을 잠깐 걷는다
도마재에서 조금 올라서니 너른 공터가 나오고 꽤나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멋진 암릉사이로 가야할 팔공산 산자락이 보이고...
하양회장님과 벙글아우... 오랫만에 시작부터 끝까지 같이한 산행 즐거웠습니다
동화사 갈림길(09:25)
팔공산은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와 가까웠던 탓인지 팔공산 곳곳에 사찰과 암자,
불교유적과 불교지명이 많이 있으면 조계종단 25개 교구본사중 2개의 교구본사를
품고있는 (동화사, 은해사)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팔公山 桐華寺 鳳凰門)
일주문이 아니고 봉황문이라,,, 좀 특이하다
동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자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대구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22km 떨어진 팔공산 남쪽 기슭에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세운 절로, 그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구 경북지역을 관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9교구 본사이다.
동화사는 비로암,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염불암, 약수암 등 6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보물 6점,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 7점을 보유하고 있다.
1992년에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하여 많은 건물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봉황문 천정에 용 두마리
동화사는 일부문 대신에 “봉황문”이라고 부르고 지붕 천정에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용 두마리가 조각이 되어있다. 이 용의 이름은 ‘마라난타’ ‘난타’라는
이름을 가진 용으로 난폭하기 그지없고 중생들을 엄청나게 괴롭힌 아주 못된
용이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들고 아주 착한 용으로 변하여 늘 부처님을 외호하고
중생들을 보호하는 용으로 변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용은 사찰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8재계 수계실천 대법회에 참석하러가는 범여 (2011년 9월 25일 사진)
통일약사 여래대불
석조대불 높이 17m, 최대둘레 16.5m, 좌대 높이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 3m로 총 33m이다.
석조대불 원석 규모는 8등분으로 조성되며 약 300톤 원석으로 조각 되었으며 불상원석은 2,000톤
(전북 익산군 황동석), 좌대원석 : 3,000톤. 총 5,000톤이고 원석을 300km 옮겨서 조성된 석불중 세계 최대이다.
1992년에 완공됐다
석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고 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를 세웠고 대불 앞에는 통일대전을 건립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한 발원을 모았다
동화사 갈림길에서 동봉가는 길은 병풍바위 능선길이라 상당히 조심스럽다
계속되는 암릉길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동화사의 모습
동화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 493년 극달화상이 세운 유가사를 832년 왕사
심지가 겨울철에 중창하였는데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동화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1732년 중건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있고,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6점의 보물이 있다.
1992년에는 높이 30m의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조성되었다.
옛부터 팔공산의 멋진 풍광에 반하여 시를 읊은 시인들이 많았다
서거정은 '대구 10경'의 하나로 '公嶺積雪'(팔공산 능선에 쌓인 눈)을 들었다.
첩첩 산줄기 공산이 천 길인데 公山千丈倚峻層
하늘 가득 쌓인 눈이 이슬까지 맑게 하네 積雪漫空沆瀣澄
신령이 무심찮음 이로써 알겠으니 知有神祠靈應在
매년 정월 원삼일에 풍년을 여는 구나 年年三白瑞豊登
매월당 김시습은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험준한 공산이 우뚝 솟아서 公山峻聳嶸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할꼬 却東南幾日程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多少風光吟不得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 只緣憔悴病中生
팔공산에는 구절초가 만개를 시작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生을 마감한 恨많은 며느리 밥풀꽃도 피어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암릉길을 로프에 의지한 채 걸어간다
염불봉 갈림길(09:50)
염불암 갈림길 이정표
염불암의 모습(2011년 9월 25일 산행때의 사진)
팔공산의 6부능선에 자리한 즈음에 자리한 염불암은 동화사의 말사로
신라 경순왕 2년(928년) 영조대사가 창건하여 1962년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 옛날에 바위 뒤에서 염불소리가 나서 이곳에 암자를 지어 ‘염불암’ 이라
지었다고 한다, 염불암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인 청석탑이 있다.
청석탑은 벼루를 만들던 흑색 점판암으로 만든 탑으로 현재는 10층의 지붕돌만
포개진 채로 남아있다.
또다시 고도를 높이며 동봉으로 향한다
염불봉과 흔들바위로 오르는 길... 그러나 길이없다
급경사 낭떠러지 좌측으로 오르면 염불봉과 흔들바위 오르는 길인즉
병풍바위 능선으로 오르는 길인데 예전에는 통행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위험구간으로 지정하여 출입을 금지해논 구간이라 오를수가 없다
위험한 옆사면길을 지나니 생긴지가 얼마되지 않은듯한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동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옛 공산성(公山城)의 모습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요새처럼 보인다... 지금은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으나 지난 2012년 8월에 팔공기맥을 걸으면서 영천시 신령면
자주고개에서 시루봉으로 오를때는 공산성의 흔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병풍바위(1,121m:10:05)
염불암 갈림길에서 이곳 너럭바위까지를 지도상에는 병풍바위 지대라고 해놨다.
힘들게 너럭바위에 오르니 우측으로는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공산성 터,
좌측으로 동화사로 이어지는 수도골과 폭포골의 넓은 골짜기와 동화사가 보인다
병풍바위에서 바라본 수도골과 폭포골의 모습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비로봉과 공산성(공군부대)의 모습
염불봉(念佛峰:1036.1m)
경북 영천시 신령면과 대구시 동구의 경계인 병풍바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염불암 위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대구시 연구보고서인 '팔공산'(1987)도 등산로 설명 편에서 이걸 '염불봉'이라 지칭했으며
병풍바위 능선에 있어 오를수 없다
병풍바위에서 동료들과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동봉으로 오르는 길
좌측엔 비박장소로는 최고인 넓은 공터가 보인다
철제 난간을 잡고 동봉으로 오른다
드디어 동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염불암 아래서 갑자기 짙은 안개가 밀려오며 바람이 부는데 느낌상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시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동봉 정상이 나온다
팔공산 동봉(彌陀峰:1,167m:10:25)
대구 광역시 동구 용수동과 경북 영천시 신령면, 청통면에 걸쳐있는
이 봉우리 아래의 옆 사면은 멋진 암릉으로 되어 있고 바로 아래에는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군부대와 통신사의 송신소가 점령(?)한바람에
동봉이 팔공산의 실질적인 주봉 노릇을 하고 있다.
팔공산의 지세를 보면 비로봉을 본존불을 하고 동봉과 서봉의 좌우
협시불로 두고 있는 형상이며 동봉의 원래 이름은 미타봉(彌陀峰)이라고도 한다
미타(彌陀)란 아미타불(阿彌陀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방 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에 머물며 설법을 한다는 부처로,
주로 정토교(淨土敎)에서 숭앙하는 구제불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ῑ-vyūha-sūtra)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원래 법장(法藏)이라는
비구승, 즉 법장보살이었는데, 48개의 큰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서원을 모두 이룬 뒤
부처가 되어 서방 극락세계를 세워 다스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정토(淨土)라고 하면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킬 만큼 일반인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아미타불과 관련된 각종 존상(尊像)이 세워져 예배되는데,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아미타불 옆에 관음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菩薩)의 두 보살이 있는 상이다
팔공산 동봉 표시석 뒷면
동봉 정상에 서니 서봉과 영천시 신령면 쪽으로 雲霧가 살짝 끼긴 했어도
팔공산을 감상하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이곳에서 후미팀들이 오길 기다리며 아이스케키 하나를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휴일이긴 하지만 정상에는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많지않아 편하다.
4년전 가을에 이곳을 왔다가 인증샷 남기려고 줄을 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후미팀들이 도착하는 걸 보고 다시 비로봉을 향하여 급경사의 계단을 내려선다
동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부악(父岳), 중악(中岳)이라고 하여 신라 오악중에 하나이다.
오악이란 토함산(동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으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 당하고 말았다.
그 때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하며 이 때 신숭겸·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이라 불리워 졌다 한다.
팔공산은 사방 수백 리에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정상에 서면 온 세상이 일망무제.
더 올려다 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다. 하늘과 만날 수 있는 통로, 하늘의 뜻을
물으려면 찾지 않을 수 없는 자리... 그곳이 바로 팔공산이다.
팔공산은 '우리'가 수 천년을 기대 살아 온 산,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산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산,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산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거기서
핍박받던 나라 지킬 힘을 빌었다. 원효성사는 10년을 이곳에서 구도했고 신라는 국가적인 대제(大祭)를 하늘에 올렸다.
많은 유학자들은 수행처로 삼았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품안을 찾아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그 날개 밑을 둥지 삼아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 중이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우리 중생들의 마음들도
끊임없이 쉼 없이 팔공산을 향하고 있다.
팔공산은 그 뭇 생명들을 그 오랜 세월 보듬어 왔다. 그들의 뜻과 고난을 지켜봤다. 몽고군이 처절히 유린할 때는
민초들과 함께 아파했고 왜군이 짓밟을 때는 의병을 감싸 안았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으며 공비들로 인해 동네가 화염에 휩싸이고숱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처절함,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수십 호가 같은 날 제사를 모셔야 하게 됐던 참혹함에도 팔공산은 말없이 그 아픔을 함께 했다.
동봉에서 바라본 영천쪽의 능선
신라 오악이라는 것은 동쪽 토함산(동악), 서쪽 계룡산(서악), 남쪽 지리산(남악),
북쪽 태백산(북악) 그리고 중앙의 공산(중악)을 지칭하는데 이는 곧 팔공산이
통일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 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신령스러운 땅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로서 원찰 조성과 원탑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공산"이라고만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는데, 이는
태조 왕건과 후백제왕 견훤이 동수대전에서 격돌했을 때 신숭겸, 김락 등 여덟 장수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고친것이라 한다.
이 흐름은 고려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부인사에 봉안되고, 유가종의 거봉인 홍진국사 혜영, 자정국사
자안은 동화사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가 인종태실수보사찰로, 파계사가 영조의 장수(長壽)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이같은 전통으로 이곳에는 현재도 수십개소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팔공산의 불국(佛國)은 영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방 세력의 거점지였기 때문에 신라.고려. 조선 등
왕조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왕실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각 왕조의 중심적 불교문화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지방 호족적이면서도 중앙왕실적 불국으로서의 팔공산의 불교사는 군위 삼존석불을 비롯, 동화사,은해사 등
도처에 남겨진 불적과 현존하는 사찰들에서 그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온 불교의 역사와 함께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이같은 불적들을
보노라면, 마치 이 곳에 불교의 모든 사상 형태들이 포함된 듯이 보인다.
아미타신앙, 미륵신앙, 밀교신앙 등이 시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에 따른
불교예술도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시간성을 배제하고 본다면 팔공산은 모든 불교신앙이 집약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팔공산의 지명 유래를 보면...
공산은 우리 말로 곰뫼 즉 웅산이란 뜻이다. 고대에 곰은 신, 신성의 뜻을 가졌다.
곰나루가 공주가 되듯 '곰'이 '공'자로 표기되었다.
이 공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① 8장군이 순절했다고 하여 ② 8고을에 걸친 산이라 해서 ③8간자를 봉안했다고 해서
④ 8성인이 득도해서 나온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여덟 장군의 순절설을 보면 고려의 통일전쟁시에 태조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이
동수대전에서 격돌했을 때 신숭겸, 김낙 두 장군 외에 다른 장군의 순절사실은 없었다.
8성인이 득도했다던 설은 원효의 제자 8인이 천성산에서 공산에 들어와 세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불교계의 전설이다. 또 하나는 신라 헌덕왕자인 심지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팔간자를 받아와서 공산 동사에 봉안한
사실에서 생겨난 불교계의 전설이다.
여덟 고을에 걸쳐 있었다는 설은 조선초기에 생긴 팔공산의 이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기 이후 공산은 해안, 하양, 신녕, 팔거, 부계 등 다섯고을 즉 현에 걸쳐
있었지만 여덟 고을에 걸쳐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팔공산 명칭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것은 사대주의 모화 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안휘성 봉대현 동남비수의 북, 회수의 남에 위치한 팔공산에서 북조 전진왕 부견과
남조 동진 효무제 사이에 팔공산 비수에서 대전이 전개되어 부견왕이 참패한 고사와 유사성이
있어 그 고사에서 따다가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보겠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산을 혹 팔공산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에 공산을
일명 부악(父岳)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악이란 공(公)자가 부자와 닮은 자로
붓으로 베낄 때 혼동된 것이라고 보겠다. 2천년간 공산이라 써오던 이름에 팔공산이란
이름이 후세에 생기게 된 것은 중국문화를 숭모해온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젖은 우리의
유학자들이 중국 역사사실의 유사성에서 붙인 명칭이었다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10:50)
팔공산 정상인 동봉에서 약간 낮은 서쪽편의 초우지에 위치한 거대한 화강암석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깝게 조각된 이불상의 높이는 약 6m로 상당히 높은 곳에 서쪽을 향해 직립하고 있다. 머리는 소발에
얕은 육계가 있으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없다. 두 볼은 풍만하며 입가의 미소와잘 조화되어서 이웃집에서
늘상 만날 수 있는 소박하고 자비심 많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다.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나, 목의
표현이 없어 삼도 또한 뚜렷하지 않다. 법의는 통견으로 도포자락과 같이 무릎 아래까지 닿아 있다.
신체비례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크게 표현된 양손과 발은 세밀하게 조각되었지만 그 수법은 고르지 못하다.
오른팔은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을 안쪽으로 하고있으며 왼팔은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려 중지와 엄지를 구부리고
있는데 지물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광배 또한 두광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마모가 심해 확실치 않다.
이 불상은 손과 발의 기형적 조각수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거대한 입불에 잘 조화되는 옷주름이나 얼굴모습 등의
조각솜씨로 보아 갓바위 불상과 같이 통일신라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약사여래(藥師如來) : 동방의 정유리세계
(정유리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이다.그는 과거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의 공덕에 의해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대구 동구청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안내판
장군메기(1128m:10:52)
동봉(미타봉)에서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내려오면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만나고 헬기장과 좌측으로 동화사로
내려가는 고개에 초파일이 지나도 한참 지났건만 연등이 달려있는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장구메기재라고 부른다
또한 근처 북사면의 백학마을 사람들은 '생부처메기'라 불렀지만, 남사면 사람들은 '장군메기'라고 했다. 생부처메기는 그곳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석불상에 인연한 이름이고 장군메기라는 호칭에는 이곳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던 지역민들의 기억이
깔려 있는 듯 하다.
헬기장을 지나면서는 가을을 재촉하는 구절초가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등로에 유봉지맥이란 표시가 보인다
유봉지맥이란
낙동정맥 방각산 지나 어통산 못 미쳐 남쪽으로 분기한 팔공기맥은 시루봉 지나 파계봉 못미쳐
동쪽으로 재분기한 [2213] 유봉지맥은 팔공산, 봉화산, 유봉산을 지나 자호천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33.7km 영천 지역의 지맥으로 좌측으로 신령천을 우측으로 금호강을 흐르게 한다.
3년전 팔공기맥길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팔공산 제천단(祭天壇)
비로봉 바로 아래에 신라시대에서 祭를 지내던 祭天壇이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봉은 옛날 조상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이다.조상의 얼이 기려있는 자손만대
기리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웠다.
2001년 7월 2일 달구벌 얼찿는 모임
비로봉(△군위11 / 79.10 재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공산성 북측 사면의 모습
팔공산은 우리나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와 후백제의 다툼, 몽고군의 침입,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히데요시
(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여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대구쪽으로 몰려올 때
조국을 침략하여 강토를 유린하고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일삼는
왜적을 섬멸하고 조국과 겨레를 지키고자 주변 고을의 선비 사대부들이 팔공산에 모여 들어
구국 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세한 것이 바로 공산회맹이다.
이때 회맹한 의병장은 대구, 상주, 밀양, 영천, 하양, 흥해, 청송, 청도, 영일, 울산의 수십명이었다.
임진 7월, 신녕의 권응수 장군은 각 고을 의병장들을 거느리고 군사교통의 요충인 영천성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3천 5백의 창의정용군이라 이름한 구국충절에 불타는 군대로 영천성을
공격하여 화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 휴정으로부터 팔도의 승려들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받고 영규, 처영, 사명당 유정 등이 승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용감히 싸웠다.
동화사에는 영남 승군 사령부를 두어 사명당 유정선사가 승군 총섭(사령관)이 되어 승군을 훈련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 지역을 수호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재침략했을 때도 이곳 팔공산성은 민초들을 지켜준 곳이다.
팔공산 전쟁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2대 전투를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 하나는 신라말 후삼국을 통일하는 통일전쟁시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전광석화처럼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세운 후 국보, 인재를 약탈하여 개선길에 오른 후 백제 견훤군을 맞아
신라 구원군으로 달려온 고려태조 왕건의 5천 기병부대가 팔공산에서 싸운 동수대전이다.
여기서 왕건군은 전멸하고 왕건은 겨우 탈출했다. 이로 인하여 팔공산이 역사적인 전적지로 삼아
파군치, 왕산, 살내, 일인석, 지묘사 등 이 대전과 연관된 많은 지명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6·25 때에 북한 공산군의 결정적인 패전이 된 다부동 전투는 전쟁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엄청난 전사자를 내어 시산혈해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팔공산 다부동 전투였다.
지금 그곳에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자취는 없어지고 전적기념비가 서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다
팔공산 비로봉(八公山 毘盧峰:1,193m:11:00)
경북 영천시 신령면, 군위군 부계면과 대구광역시 동구에 걸쳐잇는 산으로팔공산의 주봉으로 제왕봉이라 부르며
우측 봉우리가 동봉(1,155m)이고 송신탑이 있는 좌측으로 서봉(삼성봉:1,147m)이다.
팔공산은 대구의 진산으로 최고봉인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 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것처럼 펼쳐있다
대구 중심부에서 2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쪽으로 뻗어진 낙동정맥에서 떨어져 나와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서 솟아
올라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영천시, 경산시, 칠곡군, 군위군과 경계를 맞닿은 엄청나게 큰 산으로
계곡이 아름답고 산봉이 웅자하며 부근에 많은 사적이 있어, 1980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비로봉이란 이름을 부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이 어디일까. 아마도 금강산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금강산 1만2000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주봉인 비로봉의 높이는 해발 1638m. 그뿐인가. 원주 치악산의 주봉도
비로봉(해발 1288m)이고 소백산 주봉의 이름도 역시 비로봉(1440m)이다. 그 외에도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1563m)과
속리산국립공원 내의 비로봉(1057m)도 빼놓기 아쉽다.금강산 외에 북한의 또 다른 명산인 묘향산의 주봉도 마찬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해발 1909m로 가장 높다. 이렇듯 비로봉은 많은 명산의 주요 봉우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공산 비로봉이란 이름이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비로봉과 서봉, 동봉 등으로 명명돼 있는 팔공산 주요 봉우리들은 예전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비로봉은 제왕봉, 동봉은 미타봉, 서봉은 삼성봉이었다는 것. 일부 산꾼들이 옛 이름 찾기 운동을 하고 있단다.
비로봉(毘盧峰)의 '비로'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비로(毘盧)자나'는 모든 곳에 두루 비치는 부처님 몸의 빛을 뜻한다. 또한 '비로(毘盧)자나불'은 법신불을 뜻한다.
즉 산봉우리에 붙은 비로봉이란 이름에는 그 산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라는뜻과 불교적 의미가 함께 내포돼 있다.
팔공 기맥은 보현지맥상의 석심산(750.6m)에서 군위군과 영천시의 경계를 따라 금호강과 위천을 분기하며
최고봉인 팔공산(1192.8m)으로 오른다. 이후 가산(901.6m) 북서쪽 1.8km지점에서 팔공지맥은 금호강 북쪽
울타리 역할을 포기하고 위천의 물줄기를 따라 군위, 의성, 구미시 경계를 경유하며 낙동강과 위천의 合水處인
경북 상주시 중동면 새띠 마을까지 이어지는 120.7km의 산줄기를 신상경표에서는 팔공기맥이라 칭한다.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을 저술하신 조 석필님은
'산맥'으로 읽지 말고 '산경'(山經, 산줄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산맥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질 구조, 산경은 땅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산줄기라고 했다.
산줄기 흐름을 족보로 파악한 것이 '산경표'(山經表)라는 저술이고,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산경도라고도 했다.
'태백산맥은 없다'는 산과 물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철리(哲理)를 하나 내걸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둘이 아닌 하나이나 섞일 수는 없다는 말. "남과 조화는 하되 혼동하지는 않는(和而不同)" 것이 군자라 했던 공자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 옛 조사 말씀이 연상됐다.물이 시작되는 곳이 산 끝나는 곳이노라, 산은 물을 나누는 물가름이 되고(山自分水嶺),물은 산을 구획 짓는 산가름이 되노라….
산을 산맥으로서가 아니라 산경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산줄기에는 대간, 정맥, 기맥(岐脈) 등의 등급이 있다. 가장 중요한 맥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따라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오는 백두대간이다. 대간은 태백 즈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반도의
복부로 들어 가 버린다. 대신 동해를 따라 계속 달릴 줄기를 하나 남겨 두니, 그것이 낙동정맥이다.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을 지나 신불산 천성산 금정산에 이른다.
팔공산으로 오는 줄기는 이 낙동정맥의 가지줄기 중 하나이다. 포항 죽장면의 '가사봉'(744m)에서 정맥을
빠져나와 달의령-꼭두방재 맥으로 그 고을을 가로지른다. 베틀봉(934m)-면봉산(1120.6m)을 거치며 죽장의
북부-서부 경계선을 이루고 보현산(1124m)에 도달한다. 팔공산에서 바라 봐 정북(正北) 기준 60도 방향에
허리 부분을 구불구불한 도로 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 면봉산, 그 바로 앞의 것이 보현산이라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영천 화북면의 북서쪽 경계선을 만들며 갈재-방각산-노귀재를 거쳐 석심산(750m, 군위 고로면)에 이른다. 수기령-방가산(755m)을 지나 화산(824m)으로 오면서 영천과 군위를 경계짓는다. 갑령재를 거치며 물길을 신령천과
위천으로 나눠 붙인다. 그리고는 드디어 신녕∼부계 사이 도로의 두 고을 경계점에 있는 재(일명 자주고개)를
통해 본격적으로 팔공산 덩어리로 들어선다.
팔공산에서는 그 맥을 받는 배꼽 격인 시루봉(726m)에서 급하게 치솟아 정상에 도달한다.
비로봉, 제왕봉, 혹은 중봉이라 불리는 그것이 주봉이다. 높이 약 1193m, 낙동정맥에서 빠져 나온 이 가지줄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이것이 팔공산의 태생적인 족보이다.
(대구 매일신문 기사 인용)
비로봉에서 왔던 길로 내려와서 우측의 공터를 지나 서봉으로 향한다
비로봉 정상에는 공군부대, kt 중계소를 비롯하여 KBS,MBC, BBS,
대구방송 등 우리나라 산 중에서 중계탑이 아마 가장 많은 곳 같다.
몇년전만 하여도 이곳은 보안상 이유로 전혀 개방이 안된 곳이지만
지금은 개방하여 팔공산 최고봉을 오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린다
개당귀꽃
공터 끄트머리에 있는 억새밭을 지나니...
3년전 팔공기맥길에 만났던 이중 철조망은 그대로 팔공산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이중 철조망 개구멍의 아이러니
예전의 철조망 앞에 또다른 철조망을 쳐놨지만 이곳 역시 개구멍이 생겼다
이 철조망은 뭐란 말인가?... 이 철조망 위에 있는 TBC(대구방송)은 지금 다른곳으로
이사를 하여 TBC(대구방송) 송신소는 텅 빈채 흉물스럽게 정상을 점령하고 있고
철조망 역시 흉물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대구의 진산이라는 팔공산 정상 비로봉... 이제 ‘甲’질 그만하고 산꾼에게 돌려 주시길...
비로봉 정상에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는 TBC(대구방송) 팔공산 송신소
철조망 아래의 옆사면길을 따라 편하게 서봉으로 향해도 되지만 맥산행의 습성 때문에
기어코 정상으로 올라 능선길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我執...부처님께서는 모든걸 내려
놓으라 했는데 산에 대한 범여의 아집과 탐욕...불제자로서 잘못 사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 능선에서 서봉을 바라보며 암릉길을 걷는 재미도 솔솔하다
서봉가는 길에서 바라본 동봉의 모습
산과 女子는 역시 멀리서 봐야 이쁜법 ㅋㅋㅋ...
4년전 친구와 둘이서 이곳을 걸으면서 마가목을 한 베낭이나 땄는데 이번에 오니
벌써 누가 다 따가 버리고 손이 닿지않는 나무 꼭대기에만 조금 달려 있어서 포기한다
마가목 군락지가 있는 암릉에서 바라본 서봉의 모습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수태골의 모습
동봉에서 서봉까지 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부채꼴 형상으로 여러갈래의
지, 계곡을 만들어 한곳으로 모아 넣는데 바로 수태골이다
대구매일신문에 게재된 팔공산의 개념도를 보면 동봉에서부터 서쪽으로
국도림골, 주추바위골, 삼성골, 용무골, 보라웃골이 오롯이 수태못으로 들어가고
수태못에서 한줄기로 합한 이후부터 수태골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암릉에서 급경사로 내려서니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이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10:55)
이곳 절벽(絶壁)에 새겨진 이 불상(佛像)은 통일신라때의 뛰어나고 거대한 마애약사불상(磨崖藥師佛像)이다.
연꽃대좌(臺座) 위에 앉아 불꽃무늬에 휩싸인 이 불상은 민머리칼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세련되고
단아한 이목구비, 탄력있고 우아한 얼굴과 어깨의 둥글고 탄력감나는 표현, 잘쑥한 허리와 무릎에서
밖으로 내려뜨린 오른손과 무릎 위에 얹어 약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의 세련성 등은 이상적인
사실양식(寫實樣式)을 나타낸 것이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불의(佛衣)는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편인데, 옷 주름들은 유려(流麗)하고도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혀지는 등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신광(頭身光)과 불꽃무늬의 거신광(擧身光)으로 구성되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唐草)무늬가 유려(流麗)하면서도 정교(精巧)하게 새겨졌으며, 대좌는 연꽃대좌로
복련 (伏蓮)과 겹잎의 앙련(仰蓮)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받치고 있는 용(龍) 두 마리가
표현되어 있어 화려하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안내판
팔공산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산(本山)인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하여 은해사
(銀海寺)․파계사․부인사(符仁寺)․송림사(松林寺)․관암사(冠岩寺) 등이 있고, 비로․
부도(浮屠)․양진(養真)․염불(念仏)․거조(居祖)․백흥(白興)․운부(雲浮)․묘봉(妙峰)․중암
(中巌)․내원(内院) 등의 암자가 산재한 불교의 성지이다.
마애여래좌상 옆에는 아마도 무속인들이 설치한듯한 제단이 있고
母子인듯한 두 남.녀가 목탁을 치면서 천수경을 독경하고 있다
마애불을 향해 선 채로 저두 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도재(느지미재:1,080m:12:30)
이곳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경북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고개로
등산객들이 꽤나 많이 다니고 있는 수태골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느지미재'라고도 부르는데 이 재 아래 마을인 용수동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느지미재라
불렀으며 오도재란 명칭은 그 너머의 오도암에서 따 등산인들이 붙인 이름인 듯했다
수태골(水台谷)은 대구시 동구 용수동의 자연부락으로 경주최씨들이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수태(受胎)의 유래는 불임의 여자가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끝에 임신에 성공했다고 해서 수태골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항상 계곡에 물이 넘쳐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오도재에서 다시 서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고도를 높혀야 하는데 3년전
팔공기맥길에 있었던 통나무 계단은 사라지고 데크목 계단으로 바뀌었다
3년전 팔공기맥길에서 만났던 통나무 계단(2012, 7, 8)
계단에서 바라본 비로봉과 동봉의 모습
팔공산은 남동쪽으로 동봉(일명 미타봉)을 거쳐 염불봉~인봉~노적봉~관봉(갓바위·850m) 연봉을 뻗고,
서쪽으로는 서봉(일명 삼성봉)에서 한티재와 가산(901.6m) 까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뻗쳐있다
비로봉과 공산성의 모습
저 공산성 아래에 사는 군위군 부계면 사람들이 '남포루'라 불러 왔다고 했다.
‘남쪽에 있는 대포 요새’ 같이 생겼다는 뜻이라고 그렇게 불렀단다
공군부대가 둥굴게 울타리를 치고 있는 저봉우리가 옛 공산성(公山城)이었다
후삼국 시대(927년)에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이 이곳에서 견훤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위급해지자 태조 왕건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싸우다가 전사를 했는데
견훤은 이를 왕건으로 알고 신숭겸의 목을 베어 갔다고 한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조금을 더 가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암릉이 서봉이다
삼성봉(三聖峰)
신라시대 3성인이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는 이 지점은 동쪽으로
동화사까지 팔공산 주능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점부터는 파계봉까지 계속 톱날능선이 이어진다.
곳곳에 암릉에 올라갈 수 없다는 주의 문구가 있으므로 암릉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아 나 있는 산길을 따라 진행한다.
서봉이나 삼성봉이나 결국은 같은 봉우린데 이름이 둘인 셈이다.신라시대 삼성암에서 3성인이 득도하였다고 삼성봉이란다.
서봉의 또다른 봉우리 명이다. 비로봉을 제왕봉, 동봉을 미타봉이라고 하듯이...
서봉은 그 바로 밑에 있었다는 '삼성암'(三聖庵)이라는 절 이름에서 따 '삼성봉'이라 했다.
삼성암 절 자리는 100여평. 방향은 정 서남향. 우물도, 굴도 있었다.
초석들이 여전히 제자리에 놓여 있고, 뒤로 빙 둘러 천연의 기암 병풍이 벌려섰고,
바로 앞으로 삼성봉의 아들이라 할만한 '성인봉'(903.5m)이 우뚝이 보였다.
서봉(西峰:1.150m;11;40)
똑같은 봉우리에 이름이 다른 정상석... 처음 온 산꾼들은 상당히 헷갈리겠다
이렇듯 대구의 진산이라는 팔공산... 유명세에 비해 지명에 관한한 모든게 부실하다
부인사 갈림길(11:45)
팔공산 자락에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와 10교구 본사인 은해사,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보호를 받았던 파계사, 초조대장경으로 유명한
부인사와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갓바위등의 큰 절들이 있다
벙글아우 시그널
이곳에서부터 파계봉까지 본격적인 톱날능선이 시작된다
벙글아우님과 함께 편안한 옆사면길을 버리고 본격적인 암릉구간을 걷는다
팔공산을 지키는 멋진 소나무
가지 말라고 안 가냐... 멋진곳은 가봐야제
가야할 파계봉이 보이기 시작하고...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계단을 따라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내리막의 안부가 미정재라는데 생각없이 통과한다
서봉에서 파계봉가는 길은 소위 말해서 톱날능선이다.
등로는 뚜렸하나 계속해서 등로에 암릉이 태클을 거는 바람에 도저히
산행속도를 낼 수가 없다. 능선 안부에는 계속해서 멋진 암릉을 만난다.
팔공산이 어떻게 해서 이런 특징을 갖게 됐는지 살펴보면
약 1억년 전쯤 경상도는 거대한 호수였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돼 있는 땅.
그 사이에 '경상도 호수'가 있었고 기본 지질은 퇴적암이었다.그때는 지질시대
구분상 중생대 백악기. 화산 폭발로 산들의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뒤였다.
비슬산과 대구 앞산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앞산의 바위는 검은 화산암이다.
화산 폭발 시기가 하도 오래 돼 흔적들이 많지 않으나, 그곳에서도 기둥 모양(柱狀)으로
갈라진(節理) 바위들은 발견된다. 마그마가 식을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기암괴석
그리고 멋진 소나무
저 아래 보이는 쪽이 6.25때 치열한 낙동강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이다
65년이 지난 지금도 이 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분단국가이다
우리나라가 내세우는 것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단일국가라는데
작금의 사태는 어찌한가... 얼마전 GOP에 목함 지뢰를 묻어서 젊은 청춘을
송두리채 망가뜨리는 30대의 귀때기 피도 안마른 넘이 지도자라고 앉아 있는
국가가 아닌 조폭같은 조직인 북한과 아직도 대치하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구나
졸각무당버섯
좁은 암릉사이를 지나고...
다시 로프지대를 지나는데 생각보다 그리 힘이 들지는 않는데
이 넓은 바위가 대구 사람들은 장군바위라고 부른단다... 유래는 모르겠고...
바위 위를 오르니 여성산우 한 분이 소나무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셀카놀이를 하는데 저 분도 나처럼 독립군(나홀로 산행) 기질이 보이는군요
장군바위(12:40)
계속되는 톱날능선 암릉구간
톱날능선의 메인코스는 너무 위험하여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걷는다
다시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암릉위로 올라선다
내가 지나온 톱날능선의 모습
마당재를 가기전 바로 우뚝 솟은 벼랑바위 능선이 장관을 드러낸다.
당장 118m에서 1,054m로 더 높아져, 드디어 1천m를 넘는 능선을 이어가는 것.
주봉 서쪽의 이 벼랑바위 능선을 '칼날능선'또는 '톱날바위'라 불렀다.
하나 이가 어긋난 모양새로 봐서는 '톱날능선'이란 이름이 나아 보인다.
가마바위봉(1,054m:13:00)
힘들게 암릉구간을 오르니 스마트폰에 깔린 앱에서 가마바위봉이라고 알려주는데
팔공산 지형도에는 가마바위봉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벼랑바위란다
좌우지간 팔공산 능선을 3번째 걷기는 하지만 지명에 관한한 무지하게 헷갈린다
가마바위봉을 지나는데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고 그 아래쪽은 천길 낭떠러지이다
멋진 암릉구간은 계속되지만 산행시간은 자꾸만 지체된다
마당재(948m:13:15)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서 대구 광역시 동구 용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이 지역 사람들은
용무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구쪽은 부인사가 있는 곳이다
이곳부터는 대구 올레길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데 3년전에는 없었던 팻말이다
마당재에 서 있는 구조 이정목
헬기장(13:17)
당간지주처럼 보이는 쌍둥이 바위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공터(13:20)
이곳이 대구 올래길이라네요
裸木
대구 학생야영장 갈림길(13:45)
파계봉(99.2m:13:45)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경계로 대구 공산산악회에서
파계봉이라고 검은 표시석을 세워 놓았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한 느낌이다.
대구매일신문의 ‘팔공산하’에는 ‘장꼬방봉’으로 나온다. 주민들은 '장꼬방 말랭이'라 부른단다.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이다. 그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비유일 것이다.
파계봉이란 명칭은 지형도에는 없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파계사는 이곳 봉우리에서는 꽤나 먼거리에 있어 파계봉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파계봉 정상 삼각점(△311 재설 / 78, 11 건설부)
물봉선
파계봉을 지나고 부터는 암릉구간이 끝나고 부드러운 육산이 연결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가는데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달걀버섯
흐미 이쁜 넘... 먼저간 조폭대장(?)은 이 귀한 걸 보지 못했나 동행한 산우들도
소 닭쳐다보듯이 가는데 사진을 얼른 찍고는 재빨리 따서 베낭에 넣는다
달걀버섯은 로마시대에 네로황제가 버섯의 무게만큼 황금을 주고 바꿨다하여
일명 제왕버섯 또는 황금버섯이라고도 할만큼 귀한 버섯이다
달걀버섯은 두꺼운 백색 대주머니에 싸여 있고, 성장하면 외피막이 파열되면서
갓과 대가 나타나는 형태를 가지며 표면은 황색이고, 갓 둘레는 다소 연한 색이며
약간 빽뺵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여름부터 가을까지 활엽수와 전나무 숲 속의
흙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게 특징이다
폐헬기장같은 넓은 공터를 지나고...
파계재(把溪峙:830m:14:05)
대구시 동구 신무동과 군위군 부계면을 연결하는 옛 길이 마루금을 넘어가는 고개로 등로는 뚜렸하다.
이곳에서 대체적으로 좌측인 파계사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산한다.
파계사 뒤쪽 고개라 파계재인데 파계(把溪)란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가면 경주의 석굴암보다도 제작연도가 100여년이 앞선다는 군위 제2석굴암이 나온다.
우측으로 제2 석굴암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시석이 서 있다 우측으로는
제2석굴암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파계사로 향하는 길이다.
파계사(波溪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804년(애장왕 5)에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절로 그 연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뒤 1605년(선조 38)에 계관(戒寬)법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원통전(圓通殿)을 중건하고,
1695년(숙종 21)에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6년 6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에
들어서면 법당인 원통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 높은 기단 위에 서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설선당(說禪堂)이 있다. 이 건물 뒤쪽으로 기영각·산령각·응향각(凝香閣)·미타전
등이 있는데 그중 기영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御筆)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어필각(御筆閣)
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해지지 않는다. 중요문화재로는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을 비롯해 삼장보살도(1707)·팔각석 등이 있다.
또한 절의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원의대사의 부도와 비(1648), 전명대사의
부도와 비(1658), 현응대사의 부도와 비(1701)가 있다.
근처에 있는 부인사가 신라의 선덕여왕과 인연이 있다면
파계사는 조선시대 영조대왕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진동루(鎭洞樓)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파께는 원래 아홉갈래나 되는 사찰 좌,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地氣가 흘러 나가는 것을 방비하는 의미가 들어있으며 진동루 또한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氣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원통전
파계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없고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진동루 등이 네모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605년 계관법사가 중건하고, 1695년 현응조사 때
삼창하여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한다.
성전암
파계사에서 약 1km를 가서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성전암이 나온다.
성전암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1695년(숙종 21)에 현응(玄應)이 중창하였다.
이 성전암터는 경상북도의 3대 참선도량 중 도리사(桃李寺) 다음으로 손꼽는 곳이며,
조사 현응이 영조의 탄생을 위하여 백일기도를 하였던 곳이다.
영조는 자신의 탄생을 감사하는 뜻에서 11세 때 현응전(玄應殿)이라는 현판을 써서
이곳으로 보냈는데, 그 편액은 지금까지 성전암 법당에 걸려 있으며,
영조 때 제작한 특이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임자는 성철스님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수도도량으로 만든 선원으로도 유명한데
1955년부터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곧 한 번도 성전암 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였다고한다.
앵초
벌개미취
파계재부터는 고도차가 거의 없고 편안한 육산으로 마치 산보하는
느낌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은 한티 휴게소가 가까워 그런지
등산보다는 그냥 휴식을 위한 트레킹족들이 가끔씩 보인다.
파계재에서 조금 올라서니 멋진 소나무 2그루가 등로에 서있다
헬기장(14:13)
파계사 원당봉산표석 갈림길(14:15)
파계사 원당봉산표석
팔공산 파계사 원당봉산표석은 팔공산 파계재에서 한티재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원당은 왕실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지한 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석은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의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게 하고 주변 산림도 보호하고자 세운 것이다.
1806년 작성된 『파계사원당사적把溪寺願堂事蹟』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조선 숙종22년)세자(영조)의
탄진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696년 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
원당봉석표석에서 조금을 더 지나가니 등로옆에 멋진 암릉이 나타난다.
삼갈래봉 갈림길
삼갈래봉 정상은 넓은 공터가 있고 이곳에서 한티재는 우측으로 이어진다
삼갈래봉(834m:14:18)
삼갈래봉 이정표
삼갈래봉을 내려서니 등로옆에 무명묘지 한기가 보인다
한티재가는 길은 마치 고속도로를 걷는 기분이다
한티재는 얼마 남지 않았고...
등로옆의 소나무는 참으로 건강하다
산괴불주머니
오늘 산행중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선다
관봉에서 이곳까지 15km의 구간에 150개의 이정 구조목... 山友님들은 어케 생각하십니까?
친절한 금자씨... 아니 엄청난 세금낭비... 500m 정도에 하나씩만 세워도 충분할 걸 민초들이
피땀흘려 낸 세금을 쌈지돈 쓰던 마구 낭비한 대구시의 무책임한 탁상행정... 참으로 한심하다
그 돈으로 헷갈리는 지명의 정비와 봉우리 표시석이나 제대로 좀 만드시요
제2 석굴암가는 길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위치한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석굴사원 삼존석굴은
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 한다..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삼존석굴은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의 동굴안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온화한 모습 그대로 전해져오는게 느껴진다..
당초에 석굴앞에 절이 있었다고하는데 폐허가 되고 주축돌만 남아있었는데 사찰 복원사업으로
1989년에 선방, 산신각등 증개축하였다고 한다.. 주변 경치가 수려해여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고구려때부터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 자락에서 시작되었고 신라왕도 경주로
전혀져 결실을 맺었다고해서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라고 한다..
삼존석굴 모전석탑은 단층기단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조금 특이한 형태로 통일신라시대때
건립된것으로 추정되며 탑신부는 근세에 다시 축조되어 추언형에서 변형되었다고하는데
탑형을 유지한 귀중한 유물이며 일정치 않은 판석을 쌓고 여러단의 층급을 놓았다..
높이는 약 4미터 정도되며 문화재자료 제241호로 지정되어있다.
군사의 위세가 매우 당당하다고 해서 고려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지어준 지명 군위..
일반사람들에게는 사과 재배지로 알려져있지만 곳곳에 숨겨진 관광지와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곳이
많다고 하는데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도 군위에 있고 지금 소개할 경주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된 석굴사원 삼존석굴도 이곳 군위 팔공산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삼존석굴 비로자나불좌상은 작가 미상의 좌상으로 대좌와 광배는
소실되었으며 9세기경의 불상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한다.. 양쪽어깨의 법의가 조금 걸쳐져있었고
앞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었으며 손은 비로자나불의 전형적인 지권인을 나타내고 있다고한다..
목에는 삼도를 표시하였으니 다른 불상에 비해 짧은 편이였으며 얼굴은 풍만하고 두뺨과 함께 길게
늘어진 두귀 그리고 뚜렷한 각부의 모습은 양감을 느끼게 해준다.
가운데 본존불 여래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의 특징인 장중한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좌우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목과 허리 다리에서 살짝 굽은 삼곡자세를 하고 있다고한다.... 솔직히 가까이서
자세히 볼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인지 정확하게 기록할수 있겠지만 지금은 삼존불을 보호하기위해
일반인들에게 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니 아래에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렌즈로 최대한 가깝게 찍어봤지만 난간때문에 앉아있는 모습이나 손모양을 볼수가 없었지만
온화한 자태는 충분히 느낄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해 본다..
경주 석굴암과 비슷하여 제2의 석굴암으로 흔히 불린다고하는데 1960년대 말까지
세간의 눈에 띄지않았으나 1970년대 학자들에 의해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이상 일찍
창건된것으로 밝혀져 세계적인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 한다.
한티재(718m:14:40)
2차포장도로의 79번지방도로가 마루금을 지나가는 칠곡군 동명면과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한티재는 팔공산 도립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휴게소 건물도 멋지고
넓은 안부에는 대형주차장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과 차량들로 마치 돗대기 시장을
방불케하는데 가산과 팔공산을 가르는 이 고개는 예전엔 교통이 불편하여 한적한 고개였으나
팔공산 허리로 연결되는 구불구불한 한티재를 돌아가는 동안 만나는 절경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여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곳이라고 한다
한티재 끝에는 ‘군위삼존석굴’로 불리는 제2석굴암이 있고 이곳에서 가까운
인각사는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인각(麟角)으로 이름 지어졌다.
인각사는 고려시대 전국 굴지의 사찰로 이름을 떨쳤는데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께서
1284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던 사찰이다
오랫만에 하양 회장님과 벙글아우와 같이 걸었던 10여시간의 힐링산행(실제 산행거리 8시간)
먹고 마시며 떠들다 끝나는데 나홀로 산행할 때와는 달리 긴장감없이 산우들 따라가다 보니
전혀 피곤하지 않은 채 산행을 마무리 하고 한티재에 도착하여 장애자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에 우의와 우산까지 단단히 챙겨서 비오는 걸 대비했는데
산행을 끝나고 비가오니 기분이 쿨~~~하다.
오늘 리딩대장인 신난다 대장의 ‘신은 매울 (申)이 아닌 귀신 신(神)’이닌가?... 아뭏든 날씨에
관한한 귀신처럼 맑은 날만 산행 날짜를 택일하니...탑골공원 앞에다 돗자리 하나 까시죠
하도 용하여 복채가 쏠쏠하게 들어올 것 같으데...ㅋㅋㅋ
지리산과 백두산. 팔공산에서 좋은날만 택일해서... 아뭏든 복 받을깁니다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다 후미가 도착한 다음에 대구쪽의 식당으로 옯겨서 맛있는 오리고기에
술한잔 거하게 하고 늦은 시간에 대구를 출발하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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