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화. 불상.주련

사찰장식 문양에 깃든 상징의 해설

by 범여(梵如) 2016. 2. 29.

사찰장식 문양에 깃든 상징의 해설

 사찰은 단순히 문화유적이거나 관광지이기 전에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며,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도량이다.

큰 사찰에 가보면 일주문에서부터 법당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문루가 서 있고,

종이 있고 탑이 있으며, 법당과 불상이 있고, 곳곳에 다양한 장식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이들은 단순히 겉을 꾸미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이상과 종교적 염원을

배후에 일관되게 간직하고 있다.

봉국사 광응전에 계시는 부처님

연화좌에 앉아 계신다

경국사 극락보전 옆문 솟을빗살연꽃살문

연화문

1. 연 꽃 -청정한 불국세계의 꽃
사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양 가운데 연꽃이 있다.

불, 보살이 앉아 있는 연화좌를 비롯해서 불전을 구성하는 불단과 천장, 문살, 공포, 공포벽 등은

물론이고 탑,부도, 심지어는 기와의 암, 수막새에 이르기까지 연꽃이 장식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또한 사찰 장식의 여러 소재 중에서 연꽃만큼 내밀한 불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드물다.

연꽃문양은 주로 시각적으로 반응하는 현대인들의 눈에는 단순한 치레 정도로 비칠 수 있으나,

진실로 그것은 불교의 정신세계와 불자들의 부처를 향한 신앙심을 짙게 투영하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통도사 대웅전으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밟고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돌 조각이 연꽃문양으로 화려하다

통도사 기단에도 아름다운 연꽃 문양으로 조각해 넣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통도사 대웅전 뒤쪽에 통도사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불사리탑이 기단에도 연꽃으로 장식을 했다

 

보광사 연화 화생도
파주 보광사 대웅전 뒤쪽 판벽板璧에 수십 송이의 만개한 연꽃마다
보살과 동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연꽃이

연화화생의 상징형으로 표현된 좋은 사례가 된다.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 북측면(뒷면)에 그려져 있는 연화화생도

서방정토에서는 불보살들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O 연화 화생 - 극락왕생의 기원
연꽃은 인도의 고대신화에서부터 등장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신비적 상징주의 가운데

혼돈의 물 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내용의 신화가 있다.

 

이로부터 연꽃을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꽃으로 믿는 세계연화사상이 나타났다.

세계연화사상은 불교에서 부처의 지혜를 믿는 사람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 화생(蓮華化生)의 의미로 연결되었다.
한편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때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이는 바로 연꽃이 화생의 상징물임을 나타낸다.

사찰벽화나 불단 장식 중에서 동자가 연꽃 위에 앉아 있거나 연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

역시 연꽃이 화생의 상징임을 묘사한 것이다.

미륵사지 출토 금동향로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53호

금동향로의 뚜껑에 새겨진 8엽 연화문은 당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 와당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세련된 연화문을 그대로 살려낸 듯하다

 

O 팔엽원 - 불법의 진리로 모이는 여덟 장의 꽃잎
연꽃 문양가운데 여덟 장의 꽃잎을 가진 8엽 연꽃은 불교 교의와 신앙 체계를

나타내는 상징형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엽 연꽃의 중심은 대일여래, 즉 불법의 진리를 상징하는 실상불인 법신불에 해당하고,

주변 8엽은 법신불의 큰 자비의 방편으로 나타난 네 부처와 네 보살에 해당한다.

여덟 장의 연꽃잎이 하나하나로 분리되어 있지만 연꽃의 중심에 붙어 있는 것처럼,

 

네 부처와 네 보살은 결국 하나의 법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8엽 연꽃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본성인 불성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8엽의 심장

곧 마음의 연꽃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O 청정과 미묘 - 연꽃에 서린 불, 보살의 향기
연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펄흙에 물들지 않으면서 맑고 미묘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연꽃의 생태적 속성이 불교의 이상과 부합되어 청정과 고결, 미묘의 상징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화엄경탐현기>에 의하면 연꽃은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향(香), 결(潔), 청(淸), 정(淨)이 그것이다

불, 보살이 앉아 있는 자리를 연꽃으로 만들어 연화좌 또는 연대라 부르는 것도 번뇌와 고통과 더러움을

뒤덮여 있는 사바세계에서도 고결하고 청정함을 잃지 않는 불, 보살을 연꽃의 속성에 비유한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이요, 그것은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견성성불(見性成佛)과

왕생극락(往生極樂)을 내용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연꽃문양에는 모든 망상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의 천성을 깨달아,

죽어 극락정토에 가서 연꽃 속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부자들의 종교적 열망과 신앙심이 담겨 있으며,

 

청정한 부처님의 경지와 미묘한 권능에 대한 숭모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연꽃문양은 불성 그 차체인 울 근본 심성의 표징이며, 신앙의 가르침과 그 내용을 도상화한 기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연꽃문양은 불교 교의와 신앙 체계를 비롯하여 부처님에 대한 불자들의 신앙심과

종교적 염원 등 여러 가지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불교 상징문양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미황사 대웅전 용두

미황사 대웅전 보물947호
소 재 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247 미황사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美黃寺)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美黃寺)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 의조화상(義照和尙)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미황사 대웅전 용두   

북지장사 대웅전  공포 끝 용모리 조각이 돋보인다

불갑사 대웅전 공포 용두 정면의 화려한 외2출목 공포

백련사 대웅전 용두

보광사 반야용선

 

2. 용 -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사찰의 수호신
사찰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으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식물은 단연 용이다.

용은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을 비롯하여 법당 안의 닫집, 천장, 기둥, 벽, 그리고 계단 소맷돌 등에 주로 장식되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법당 어간(전면의 중앙 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해 놓은 용두와 계단 소맷돌에 장식된 용이다.

법당에서는 전면 바깥쪽에 용두를,안쪽에 용미를 장식한 경우가 있는데

 

이때 용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선수(船首)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또한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말하며, ‘바라밀다’는 ‘피안의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탈것이 필요하다 <금강경>에서는 피안으로 향하는 탈것을 뗏목에

비유하였으며 뗏목은 배와 상통한다. 법당은 불자들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그 배가 향해 가는 곳은 바로 피안의 극락정토이다. 이때 법당 앞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용두는

극락정토로 향하는 반야용선의 선수가 되고, 용미는 선미(船尾)가 된다.

 

다시 말하면 법당 건물에 조각해 놓은 용두와 용미는 그곳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용은 장식 위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범종을 매달기 위한 목적으로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늘 종뉴라 하는데,

대부분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고 종 위에 앉아 있는 용을 특별히 포뢰라고 한다.

 

포뢰는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범종 장식물이다.
용은 설법을 들으러 온 청중인 동시에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찰 도처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사찰 초입의 돌다리 밑에 숨어 있는 용도 그 중 하나이다.
다리 밑이나 법당 안의 닫집, 대들보, 기둥 등에 장식된 용은 도량을 청정하게 유지하고,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자 불법을 설하는 장소인 법당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용이 가지고 있는 이런 다양하고 신비스러운 능력은 따지고 보면 용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불자들의 종교적 열망과 끊임없는 상상력은

용을 더욱 영물스러운 존재로 만들었고, 그 용을 그림과 조각상으로 만들어 곳곳을 장식함으로써

사찰, 나아가 관념상의 불국세계를 더욱 청정하고 신비롭게 장엄했던 것이다.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중앙의 귀면형 보주  후면 갑신오월이라 적혀있다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중앙의 귀면형 보주 전면             

불국사 귀면 문고리 

희양산 봉암사 대웅보전 꽃창살문 귀면

 

3. 귀면 -사악한 무리를 경계하는 벽사의 화신
사찰 법당의 안팎에서 흔히 다리도 없고 팔도 없고 몸뚱이도 없는,

오직 얼굴만 보이는 물상을 만나볼 수 있다. 주로 법당 전면 문짝의 궁창이나, 처마 밑,

 

기둥머리, 창방, 평방, 불단 등에 장식되며 그림이나 목각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눈은 반구형으로 돌출 되었고 코는 중앙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높이 솟아

콧구멍이 드러나 있다. 귀와 수염, 머리카락을 갖추고 있으며 눈 위쪽 좌우에는 큰 뿔이 솟아 있다.

입을 크게 벌려 커다란 치아를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아래위로 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압적인 인상을 준다.

 

전체적인 인상이 용과 비슷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용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연꽃이나 당초(唐草) 등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물상을

용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귀면상을 일명 ‘낯휘’라고도 한다.

 

‘낯’은 얼굴의 또 다른 말이며, ‘휘’(暉)는 몇 가지의 색깔 띠로 나누어 채식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의 귀면상은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입에 아무것도 물고 있지 않은 얼국이고, 다른 하나는 연꽃이나 풀잎 등을 입에 물고 있는 얼굴이다
이런 형식의 귀면상은 사찰 장식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머리는 산발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머리에 뿔이

하나인 우리나라 전래의 도깨비상과는 구별된다.

 

성격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 전래의 도깨비는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사찰의 귀면상은 어디까지나 사찰과 불법 수호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용과 관련해서 보면 용은 대부분 여의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입에 물고 있지 않는데 반해

 

사찰의 귀면상은 풀잎이나 연꽃 등을 입에 물고 있어 도상적인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사찰의 귀면상이 용의 얼굴도 아니고 전래의 도깨비상도 아니라고 할 때 ,

그 조상은 인도의 불교사원에서 볼 수 있는 키르티무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귀면상은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상으로 제작되어 법당을 장식하기도 하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하다.

단독으로 장식된 경우는 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나 둘 이상일 경우에는

바라보는 방향이 각각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이는 다양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주시함으로써, 언제 어느 곳으로 들어올지 모를 사악한

무리들을 막아 사찰을 수호하는 벽사상(辟邪像)의 기능을 한다.

에밀레 종에 새겨진 비천상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이 에멜레종 표면에 새겨진
비천상을 탁보하여 실물크기로 벽면에 걸아 놓아 그 신비로운아름다움에 눈길이 머문다.
에밀레종의 명문(銘文)에는 [성덕대왕신종](통일신라 771년)이라 새겨져 있다

 

국보  제126-17호 청동제비천상(靑銅製飛天像) 통일신라/ 불국사 소유자/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상도선원 석가모니부처님 불단 

불상 뒤의 광배(아우라)도 독특하다. 선녀들이 하늘을 나는 반원의 비천상(飛天像)을 머리 뒤에 걸었다.

멀리서 보면 광배, 가까이서 보면 비천상이다.

상도선원 석가모니부처님 불단 

선녀들이 하늘을 나는 반원의 비천상(飛天像)을 머리 뒤에 걸었다.

멀리서 보면 광배, 가까이서 보면 비천상이다.

4. 비천상 -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아름다운 선녀
비천상은 주로 사찰의 범종에서 볼 수 있으나 때로는 석등, 부도, 불단이나 단청의 별지화(別枝畵)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교의 천국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면서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

찬탄하는 천인(天人)의 일종이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마치 도교설화 속에

등장하는 선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원래 비천의 조상은 오늘날 우리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거나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비천은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건달바(乾闥婆)와 긴나라(緊那羅)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향(香)만을 구하여 몸을 보호한다. 또 스스로 몸에서

향기를 발산하므로 향음신(香音神)이라고도 하며 속악(俗樂)을 연주한다.

이 건달바가 불교 성립과 함께 팔부중의 하나로 포섭되어 하늘의 가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의 형상은 원래 사람인지 짐승인지 새인지 일정하지 않으며, 노래 하고 춤추는 괴물의 모습일 한다.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하거나, 말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는 등 그 형상도 일정하지 않다.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래될 때 비천도 그 뒤를 따랐다.
중국에서 매력적인 선녀의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수입되었다.

고구려 고분에서부터 시작하여 불교미술에 수용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 변천을 거치면서

한국적인 비천상으로 정착되었다.

 

현존하는 비천상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꼽는다면

단연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일 것이다.
조형물로서의 비천상 그 자체는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 아무런 생명도 활기도 없다.

 

눈에 보이는 모습 이외에 감성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관조의 상태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비천상에서 생명을 보며 천의와 구름이 허공을 날고 있음을 느낀다.

그 속에서 비천의 자유롭고 환희에 찬 움직임과 울려 퍼지는 미묘한 음악소리를 느낄것이며,

비천이 비행하는 불국정토의 정경을 마음 속에 그려낼 것이다

5.卍(만) -길상과 만덕의 표징
‘卍’은 불교의 상징이다.

사찰 건물에 불교의 상징으로 가장 흔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밖에 건물의 서까래와 기와,

탑비의 귀부(龜趺), 불화 등 여러 방면에 나타나 있다. 원래는 글자가 아니라 상(相)이요, 상징형이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슴과 발 등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슴과 발 등에 나타나는 이 문양을 ‘상서로운 상(相)’

곧 실상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부처의 경지를 나타내는 불심인(佛心印)으로도 사용하였다.
십자형을 기본으로 하는卍은 동서남북의 상징에 오른쪽으로 도는 운동적 요소를 가미한 형태이다.

십자형의 네 가지(枝)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구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옮겨가는 태양의 궤적에 따라 공간이 분할된다는 사실이다.


卍에 대한 또다른 해석도 있다.

가로로 한 번 그은 선은 삼세(三世)이고, 세로로 그은 것은 시방(十方)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무형적인 시간이고, 시방은 방위적인 공간이다.

 

이때 공간은 평등이고 시간은 곧 차별이다. 그래서 卍은 일심(一心)의 덕
(德)이 삼세 시방을 곤통해서 종횡무진한 것을 나타낸다.
또 석가모니 부처가 녹야원에서 행한 설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卍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불상시대에 예배 대상의 하나였던 바퀴 모양의 법륜(法輪)을 도식화한 것이라고도 한다.
卍이 오른쪽으로 도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우주와 태양계의 회전운동에 동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도는 우선(右旋)을 우주 자연의 정상적인 운동 원리로 여겼으며,

그 반대 방향 즉 좌선(左旋)을 우주 질서를 역행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배척하였다. 탑돌이를 할 때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 하여 탑을 중심에 두고 시계 방향인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절을 하는데,

 

이는 우주의 운행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당나라 측천무후 장수 2년(693)에 불교의 길상상(吉祥相)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卍모양의 글자를 만들어 정식 문자로 채택하였으며, 만덕이 모였다는 뜻을 새겨 ‘만’자로 읽었다.

 

결국 卍은 만상(萬相)이 원만(圓滿)유전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길상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卍문양의 역사는 매우 길다. 가장 오래된 예로는 석가모니 부처가

입적하기 직전에 남겼다는고대 중인도 마가다국에 있는 족적(足跡)이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탑 부근의 정사(精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돌에 부처님의

족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삼장법사 현장이 친히 이 족적에 예배하고 스스로 본을 떠서

중국에 가져 왔으며, 지금은 산시성 방주에 있는 옥화산의 돌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부처님의 족적에 표현된 다섯 발가락과 발바닥에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卍문양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고려시대 불화에서 卍문양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불화에는 우선하는 형태의 문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간혹 귀부 등의 석조물에서

좌선하는 형태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좌선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우선하는

형태가 혼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지은 사찰에서는 좌선하는 卍문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축한 사찰 건물 지붕의 합각(合閣) 부분이나 서까래 마구리에 그려진 것은 물론이고,

종단에서 불교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표지 역시 卍문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6. 토끼와 자라 -바닷속 불국정토로 향하는 불전설화의 주인공
사찰 경내에는 종종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조각이나 그림들이 눈에 띈다.

토끼와 자라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그림이나 조각의 형태로 법당 문이나 평방 또는 법당 안팎의 벽면에 장식되는 경우가 있다.
사찰장식에 나타나는 토끼는 헌신과 희생의 상징형으로 달에 살고 있는 토끼와 부처의 전생설화와 관련된 토끼이다.

 

토끼가 헌신과 희생의 상징형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제석천과 토끼에 얽힌 불교설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별주부전은 인도에 뿌리를 둔 불전설화를 근원으로 한다.
또한 토끼는 보이지 않고 자라만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자라가 아니라 완연한 거북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 둘은 설화속에서는 양자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용왕의 신묘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용궁은 바닷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여겨졌다.

불자들은 현세에 불법이 유행하지 않게 될 때에는 용국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 믿었으며

반야용선의 용두처럼 자라와 거북도 현실을 떠난 이상세계인 바닷속 용궁을 향해가는 탈것의

상징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자로서뿐만 아니라 사찰의 특정 공간을 바닷속 용궁으로

조성하기 위한 상징물로 존재하기도 한다.


사찰 장식에 등장하는 토끼와 자라는 가깝게는 <별주부전>의 주인공들이며, 근원적인 의미로는

석가모니의 본생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화현(化現)이자, 반야귀선의 주인공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요, 이상향인 용궁을 현실 공간에 구현해 놓고

그 세계로 향하고자 했던 불자들의 마음이 사찰의 토끼와 자라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주 보광사 목어

만해 기념관 목어     

처마의 풍경이나 목어 등 사찰에 물고기 형상이 많은 것은 물고기를 숭배해서가 아니라

잠을 적게 자는 물고기처럼 깨어 있으라는 의미다

 

7.물고기 -원천적 자유와 수행의 상징

물고기가 맑은 연못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는 모습은 일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범(梵)의경지’를 연상시킨다.

 

살아 있는 동물 사육을 금기로 여기는 사찰에서 물고기만을 예외로 취급하여

연못에 놓아 기르는 것을 보면 물고기가 지닌 불교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물고기가 지니는 상징 의미는 도가의 비조(鼻祖)인 장자(莊子)가 갈파한 ‘어락(魚樂)’이라는

말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때 어락이란 원천적 자유를 누리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말하며

사찰에서 보이는 물고기 장식의 의미도 이와 상통한다.


절에는 물고기가 연못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도 떠 있다.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맑고 청아한 금속성 소리를 내는 풍경의 물고기 장식이 바로 그것이다.

일체의 구속과 거리낌을 여읜 바람과 그에 몸을 맡기고 있는 물고기가 연출해내는 맑고 청아한 소리는

 

바로 청정 무애한 범천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잘 때나 눈을 감지 않을뿐더러 죽어서 까지도 눈을 감지 않는다.

풍경소리 또한 낮이나 밤이나 바람이 부는 한 그치지 않는다.

이에 연유하여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자지 않고 항상 부지런하게 도를 닦으라는 뜻에서

풍경에 물고기를 매달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목어와 목탁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것 역시 같은 뜻에서이다.
이처럼 사찰의 물고기 장식은 단순한 장식의 차원을 넘어 수행의 중요성,

더 나아가 불법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의미의 상징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릉빈가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가릉빈가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 가릉빈가

연곡사 동부도 가릉빈가

동화사 아미타설법도의 가릉빈가- 남녀 한쌍의 얼굴이다. 

연곡사 북부도 가릉빈가

연곡사 동부도 가릉빈가

세 개의 발가락과 날개의 표현이 특징적인 가릉빈가로, 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있다

 

8. 가릉빈가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묘음(妙音)의 새
고승의 부도나 와당, 그리고 불단 등에서 새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인두조신(人頭鳥身)의 새를 만날 수 있다.

 

범어로 카라빈카라고 하는 이 상상의 새가 바로 가릉빈가(迦陵頻伽)인데, 히말라야에 있는

설산(雪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자태는 물론이고 소리 또한 묘하고 아름다워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 또는 옥조(玉鳥)라고 한다.

 

극락정토에 사는 새라고 하여 극락조라 부르기도 한다.

가릉빈가는 어떤 상황이나 장소를 미화하고 이상화하려는 방법으로 흔히 사용된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고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 남쪽의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날에

가릉빈가가 내려와 춤을 추었고,묘음천(妙音天)이 가릉빈무(迦陵頻舞)라고 하는 무곡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불전이나 부도를 장식하는 소재로 가릉빈가가 자리잡게 되었다.
가릉빈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다리와 몸체와 날개는 새으 형상이고, 얼굴과 팔은 사람의 모습이다.

 

몸체는 깃털로 덮여 있으며, 깃털이 달린 화관을 쓴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장식문양으로 가릉빈가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이다. 가릉빈가문양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고승대덕(高僧大德)의 부도인데, 대표적으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그리고 구례 연곡사의 북,동부도가 유명하다.
가릉빈가라는 새가 갖는 불교적인 존재의 의미는 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있으며,

 

그것은 범음(梵音)의 구상적인 표현이자, 상징형이다. 범음의 소리는 미묘하여 그 무엇도 흉내낼 수 없으며,

사방에 두루 미치고 듣는 사람이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범음을 내는 가릉빈가는 다름 아닌 부처의 또 다른 화현이라 할 수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 주악 비천상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국보 36호로서, 통일신라 725년에 제작되고

높이 1690mm, 입지름 910mm. 동종에는 주악 비천상이 주조되어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  주악 비천상 탁본
탁본의 사진과 실제의 사진을 올렸다


9. 주악인물상 - 공양과 찬탄의 연주자
주악상은 장구, 북, 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을 조각 또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천인들이 천의를 입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있다.

그밖에 두광(頭光)을 갖춘 보살이나 평범한 복장을 한 범부(凡夫)의 모습 등

다양한 형태의 주악인물상을 사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찰에서는 원칙적으로 가무와 기악을 금하고 있으나 불(불), 법(법), 승(승) 삼보(삼보)를

위한 찬탄과 공양의 의미를 가질 때에만 그 가치가 있고 이때 음악은 불도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악상에는 날개가 달리거나 보살 또는 범부의 모습을 한 인물상들이 많으며,

대부분 사리기와 불상, 범종, 불탑, 부도 등에 장엄과 공양 그리고 찬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만약 이 주악상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끝없는 환희와 열락 속으로 빠져 들 것이다.

10. 태극 - 절대 평등과 원융(圓融)의 조화

성리학에서 태극은 우주 만상의 근원이며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사멸(死滅)이 없는 구원(久遠)의 상으로 이해된다. 한편 불교에서 불성(佛性)이란 심오하고 참된 법으로,

불생 불멸하는 만물의 실체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태극과 불성은 모두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태극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으나,

그 원리는 인간 주체로부터 인식되는 것이므로, 인도(人道)의 극치가 곧 태극이며,

 

태극이 다름 아닌 인극(人極)이라는 뜻이다.
태극 도형이 사찰의 장식문양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태극이지닌 상반(相反),융합의원리와

사상이 절대 평등과 원융(圓融)을 추구하는 불교의 교의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뜻이 아무리 서로 통한다고 해도 수용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태극문양 자체를

 

사찰의 장식문양으로 채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불교 신앙 체계의 한 축을 이루는 산신각의 산신은 불교가 포용한 불교 밖의 무속신이다.

또 양의 수(기수)를 적용한 탑의 층수나 불전의 칸수 등도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음양오행사상이 적용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특유의 포용력으로 불교 외적인 요소들을 폭넓게 수용해왔다.

성리학에 뿌리를 둔 태극 도형이 사찰 장식 문양의 한 요소로 정착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태극(太極)

순환성지닌 원융무애 상징…불성과 밀접

감은사지 장대석 문양, 주돈이 태극도형보다 4백년 앞서 

고대 한국인 정신세계가 창조…생명의 순환운동과 상통

천은사 극락보전 심우도 원상

그림은 운여(雲如) 김광업(金廣業)의 <원상(圓相)>

 圓相  向上眞如卽  不變也  眞空也  寂也  涅槃也  實相般若也  見性也

(원상 향상진여즉   불변야  진공야  적야  열반야 실상반야야   견성야) 

 

원상은 참인 즉

변하지 않고, 텅비어 있고, 고요하고, 열반이고, 실상반야이고, 견성이라
※ 원상(圓相)은 8세기 당나라 남양국사(南陽國師)가 자신에게 법을 구하러 온

스님에게 공안(公案)이라 생각되는 원(圓)을 그려준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원상(一圓相)이라고도 한다.

 

11.원상 - 깊고 오묘한 불법의 표상
사찰의 선방에 들어가보면 때로 커다란 원이 그려진 족자나 액자를 볼 수 있다.
원상(圓相)의 형상은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그 속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성(佛性)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일체 법의 실상을 관(觀)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우주 사이의 모든 사(事)와 물(物)이 항상 변화하고 그 자체로서 고유한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자태로 있는

원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상을 대함에 있어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일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것을 관심(觀心)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만법(萬法)의 주체이며 모든 것과 관련이 있으므로,

마음을 살피는 일은 곧 일체를 관찰하는 것과 통한다. 따라서 인간이 그의 본성을 깨달았다고 하면

모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선가의 스님들이 좌선을 통하여 마음의 본성을 찾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원상의 형태적인 특징과 일차적으로 연결되는 상징 의미는 무엇인가?


기하학적으로 볼 때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은 영원성을, 그리고 원호에 둘러싸여 있는 내포(內包)는

전체성(全體性)의 사상과 상통한다.

또한 원은 크기의 대소를 불문하고 그 자체로 완전성을 지닌다.

이는 불교의 원만(圓滿),원각(圓覺), 원통(圓通), 또는 원공(圓空)의 개념과 상통한다.


원은 또한 만월(滿月)을 연상시킨다.불가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만월에 비유한다.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추어도 분별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본성인 보리심을 보름달에 비유하여 심월(心月)이라 하기도 한다.

 

더구나 만월의 모양 자체가 원상이니 원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달의 표징이 되었을 것이다.
원상은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는 원융의 상태, 일체 불이의 완전한 평등 거리낌과 부족함이 없는

원만의경지를 나타내는 우주와 인간 본성의 상징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상은 그것을 보는 태도에 따라 단순한 도상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그 형태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기하학적 도형에 머물 것이고,

수신(修身)의 방편으로 여긴다면 신비스럽고 오묘한 관심의 상징형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12. 불단 - 현실과 환상의 신비로운 공존

법당 정면에 부처님을 높이 모시기 위해 만든 단(壇)을 불단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불단을 일명 수미단이라 부르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한 곳이

수미산 정상이었다는 설화와 관련이 있다. 불단의 일반적인 형태는 정방형 또는 장방형이며,

 

불교 상상의 산인 수미산의 모습을 상징한다.
불단은 부처님의 상을 직접 모시는 자리인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식문양들로 가득하다

 

신령계의 환상적인 동물들과 현실계의 길상 상징물, 그리고 불교적인 상징형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불단은 불교 장식문양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물상들과 신성의 또 다른 화현으로 생각되는 조류와 동자상,

부처님과 그의 세계를 수호하는 벽사상, 그리고 길상과 상서(祥瑞)의 상징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 모든 불단 장식문양은 표면적으로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감성이나 쾌락이 배제된

숭고미(崇高美)가 잠재되어 있으며, 수승(殊勝 : 세상에서 제일 뛰어남)한 부처님과

그의 자리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한 불자들의 종교적 열망과 신심이 짙게 배여 있다.

미황사 대웅전 천장 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

미황사 대웅전 천장

미황사 대웅전 천장

미황사 대웅전 천장

미황사 대웅전 천장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대웅전 천장

 

13. 천장의 꽃 -하늘에서 내리는 환희의 꽃비

법당 안에서 장식적인 요소가 특히 강하고 풍부한 곳이 천장이다.

천장에는 井자 형태로 분할한 구획마다 연꽃을 비롯한 다채로운 형태의 꽃들을 빈틈없이 장식해놓고 있다.

그림을 그린 것도 있고 조각된 것도 있으며, 그 색깔 또한 다양하고 현란하다.

날씨가 청명한 날 밝은 햇살이 법당 안을 가득 채울 때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천장을 올려다본다면 ,

 

마치 허공에서 꽃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것이다.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고 삼매에 들었을 때나 정각(正覺)을 얻었을 때, 하늘에서 축복의

꽃비가 내린 것을 우화서(雨花瑞)라고 한다.

 

하늘에서내린 꽃비의 의미를 <법화경소>권2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事)에 의하여 말하면 이미 비상법(非常法)을 설하니 모든 천(天)이 감동하여 꽃 공양을 한 것이고,....

이치로 말한다면 하늘은 청정한 것이며, 사부대중의 마음이 이미 청정하였으므로, 경을 듣자 바로 성불한 것이다.

 

네 종류의 꽃비는 바로 사부대중이 성불한 것을 나타낸다.
법당은 부처가 사부대중을 위해 불법을 설하는 영산회(靈山會)의 장소를 상징한다.

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나타난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우화의 상서는 하늘에서 수많은 꽃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축산의 상서를 법당 안에 재현하기 위하여 천장을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불상 머리 위쪽의 반은 천판에 쌍룡이 노니는 보개형(寶蓋刑) 닫집을 조성하였고 나머지 반은

井자형으로 구획하였으며, 각 구획마다 꽃 한송이씩들 그려 넣었다.

꽃은 연꽃이라고 하기 어려운 관념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허공에 머물고 있는 이 꽃들은 불단 위의 부처가 설법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공양한 우화의 상서를 상징한다.

경국사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경국사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전각 속의 또 하나의 전각인 닫집을 3층으로 올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청룡과 황룡,

하늘에는 백학이 날아다니며 서로 다투는 듯한 쌍룡이 몸을 비틀어 수호하고

연꽃봉우리가 조각되어 있는 것에서 극락세계를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다.

 

안에는 3층의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극락조와 공작, 백학이 하늘을 날고,

여의주를 입에 문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어 마치 극락세계의 한 장면인 듯하다.

이 닫집 아래에는 목조아미타삼존과 그 뒤에 보물 제748호로 지정된 아미타후불목각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오른쪽 벽면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87년(고종 24) 조성한 신중탱을,

왼쪽 벽면에는 지장보살좌상과 근래에 조각한 아미타후불목각탱을 봉안하였다.

이외에도 근래에 조성한 범종이 하나 봉안되어 있다.

불갑사 대웅전 

포작을 확인키 어려운 화려한 닫집

대웅보전 삼세불. 후불탱. 닫집 

대웅보전 후불탱.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창건 당시 조성.

 

대들보에 서린 용두와 화려한 닫집

 

14. 닫집 - 불전 속에 세워진 또 하나의 궁전

불전 내부에 들어가면 불좌 위에 작은 집의 모형이 있는데, 이것을 보통 닫집이라 부른다.

 ‘닫’이란 ‘따로’라는 옛말이니, 닫집이란 집안에 ‘따로 지어놓은 또 하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당가(唐家)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닫집의 일반적인 형태는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와 화려한 장식,

그리고 허공에 매달린 기둥을 특징으로 한다. 얼른 보아도 화려한 궁전을 연상시킨다.


닫집에는 용과 극락조(봉황)을 비롯하여 연꽃, 비천 등을 장식함으로써 화려함과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닫집을 천개(天蓋)라고도 하는데, 하늘 덮개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닫집의 지붕은 그 자체의 아무런

무게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기둥은 있으나 떠받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촉수(觸手)나 걸려 있는 뿌리처럼 아래로 내려뻗어 있을 따름이다.
어떤 조형물에 성스러운 영감을 불어넣기 위하여 동원되는 보편적인 방법은 그 위치를 높여 하늘

가까이하고, 황홀하고 섬세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다포계의 섬세한 포작 기술을 총동원하고 용,

극락조, 연꽃 등의 화려한 장식을 한 천개로서의 닫집은 신성하고 숭고한 천상세계인 불국정토의

개념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닫집을 통해 불국정토의 본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생사 유전(流轉)이 끊임없는 미혹한 세계의

부정을 은폐하고자 한 것이다.

 

15.사사자상 -권위 그리고 오묘한 불법의 표현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위엄을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에 곧잘 비유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도 사자가 소리쳐 울 때 작은 사자는 용기를 내고

기타 일체의 금수는 도망쳐 숨어버리는 것처럼, 부처님이 설법할 때 보살은 정진하고 도를

벗어난 악귀들은 도망가기 때문이다.


불탑이나 석등의 사자상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부처님의 화신으로서, 그 권위와 위엄으로 불법을 믿지 않는 자나 악마를 제어하는

동시에, 몸, 입, 마음의 삼업(三業)을 조화하여 모든 악행을 제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하나는 그 입 모양을 통하여 법성 진리를 터득하는 단계, 즉 현실적 경험과 의식 상태, 미묘한

꿈의 의식 상태,미분화된 의식의 자연적 상태, 그리고 법성과 일체된 자아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일체 중생이 자증과 타화를 본래부터 갖추고 있음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