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1구간 - 중산리에서 거림골까지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한 지리능선... 천왕봉에 오른다
☞산행일자: 2016년 5월 14일~ 15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았다가 흐렸다가 변화무쌍한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7.5km(실제거리(약 20km) / 10시간 소요(어프로치 11.8km / 마루금 5.7km)☞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42명과 함께
☞산행코스: 주차장-중산리 두류동-중산리 탐방안내소-법계교-허우천추모비2010년도 KBS 2TV에서 방영한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 중에서
팔봉선생의 한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천재가 노력하는 놈 못이기고 노력하는 놈은 즐기는 놈을 못이긴다’
그래 어차피 피할 수 없으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2년전 백두대간 남진 때 같이 걸었던 배 형기 아우님이 백두대간 북진의
대장을 맡았단다... 축하를 해주기 위해 아픈 무릎을 이끌고 첫 구간을 따라 나선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무엇인가"
대간(大幹)이란 큰 줄기를 뜻하며, 백두대간 이란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능선)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큰 줄기를 말한다.
즉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 출발하더라도 제대로만 가면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말해,백두대간은 우리땅의 골간을 이루는 한반도의 등뼈이며 우리땅 전체가 남과 북이 이 땅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백두산에서 금강산.설악산을거쳐 지리산까지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부른다.
모든 산맥은 중심산맥인 백두대간에서 다시 가지치고 있는데, 북쪽과 남쪽의 연결산맥인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그 순서에 우선하고 나머지는 북쪽에서 차례대로 정하고 있다.
이들 산맥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백두, 장백이고 그 지방의 이름으로 된 것이
해서(海西),호남(湖南)이고, 강이름과 관계한 까닭은 모든 정맥은 강의 경계능선의 분수령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인데 산이 곧 물과 관계된 자연의 섭리로써,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며 얻어진 축적된 지리인식이며 이에 동화된 생활상식이었다.
백두대간 중 영취산(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에 있는 산) 에서 가지쳐 나간 호남정맥을
경계로 판소리는 동편제.서편제로 나뉜다.
또한 백두대간을 경계로 경상도,전라도,충정도의 말씨가 다르고, 삼국시대에는 국경을 이루기도 했다.
백두대간에서 장백정간과 13개의 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반도는 비로서 삼천리 강산이 된다.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1대간,1정간,13정맥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개념은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인시체계의 바탕이 된다.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총길이는 1.625km이며, 이 중 남한 구간은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의 지도상거리가 690km이고 실측거리는 740km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중산리 오르는 도로(03:40)
범여를 태운 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단성I.C를 빠자나와 중산리로 향한다
산청군에 속한 조그만 마을 단성...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골목대장 같은
이곳은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민초들의 삶의 질을 개선한 문익점
조선조의 재야 유학자 남명 조식선생...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게송으로 유명한 한국 현대불교사의 걸출한 선승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哲) 큰스님의 이곳 단성이다
어둠속에 가로등의 불빛을 받으며 술취한 듯 버스는 좁은 길을 따라 시천면 중산리로 향한다
한참을 비틀거리며 오르다가 대형버스라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도로 중간에서 산꾼을 내려놓는다
이곳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피곤하다... 어제 초파일이라 휴식이 취하지 못하고
산행에 나서기도 했지만 무박 산행은 5개월만이라 조금은 부담이 된다
중산리 매표소
도로에서 한참을 걸어오니 중산리 주차장 매표소가 나온다
산청군 시천면(矢川面)은 낙동강의 발원지 강 상류로부터 흐르는 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하여 矢川(화살 시(矢),내천(川))으로 불리며
물이 빠르고 계곡이 깊고 주변경관이 산자수명하여 유래한 지명이고
중산리는 이름 그대로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개국 당시 패망한 고려의 지지한 세력들의 은둔지였던 탓에
조선의 탄압을 받았던 곳이 중산리 마을이다.
이조시대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기록 속 중산리는
계단식 논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묘사된 곳이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03:57)
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마자 어둠속에 야영장이 나오고 우측으로는 순두류로
가는 길이고 우린 좌측의 중산리 계곡길로 올라서는데 어둠속에 들리는 계곡 물소리는
도시의 지친 삶에 찌든 범여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데 법계교를 지나니 로타리 산장이
나오고 진주산악회에서 설치한 추모비를 만난다
宇天 許萬洙 선생 추모비(04:05)
지리산 산신령으로 알려진 진주출신의 우천선생은 한국동란 이후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했으며
숱한 사람을 구조하고 안내했던 산악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분이 1976년 6월에 세석고원의 철쭉을 뒤로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당시 지인들에게 “이제 지리산으로 영원히 들어가니 한달내 오지 않으면 내 소지품을
불태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가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의 어느 곳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아는 이가 없다
1980년 6월 8일 진주산악회에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법계교 근처에 추모비를 세웠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가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내용인데 어둠속이라 잘 보이질 않는다
홍수예.경보 시스템(04:20)
목재 철책이 둘러처진 편안 등로 좌측으론 중산리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2014년 8월에 대간을 끝냈으니 거의 2년여만에 대간 동지들과 태양 아우님
대장을 축하하는 산행에 나서는데 다들 만나서 반갑고 정겨운 얼굴들이다
하기야 진부령에서 천왕봉까지 18개월동안 750여km를 걸어면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대간 동지이기에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니...고도를 높인다
칼바위(刀巖:800m:04:35)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등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어둠속에 뾰족한 암릉을 만나는데 이름하여 칼바위다
칼날처럼 뾰족하게 생긴 바위는 원래 하나였는데 벼락을 맞아 갈라졌다고 한다
칼바위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임금에 오른 직후 그 목숨을 노리는 자의 은신처가
이곳이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이성계는 부하에게 그 목을 베어오라 명령을 하였다
이 성계의 부하는 선비를 발견하고 칼로 쳤더니 갈라져 유암폭포 아래 ‘홈바위’ 로
그 칼이 부러지며 2km 위인 여기에 날아와 꽂혀 지금의 '칼바위'에 꽂혔다고 한다
칼바위를 지나면서 출렁다리가 나오고 넓은 공터의 장터목 산장으로 나오는 갈림길이 나온다
장터목 산장 갈림길(04:38)
칼바위 이정표 옆으로 갈림길이 나있는데 직진을 하면 장터목산장으로 향하는
중산리 계곡길이고 천왕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우측 돌계단을 따라서 간다
칼바위를 지나면 등산로와 100 m 떨어진 곳에 법천폭포가 있는데 어둠속에
찾아가 볼 수도 없고해서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는데 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낸다
어둠속에 등로를 살짝 벗어나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다들 도망(?)을 가는 바람에 졸지에 오늘도 꼴찌로 간다
망바위(1.068m:05:20)
장터목 갈림길에서 계속해서 오르막을 오르니 시화님과 까치샘, 백두대간을
처음 탄다는 젊은 친구와 진권아우님... 휴식을 취하는 넓은 공터에 망바위란
이정표가 있는 곳에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생긴 암릉이다
망바위는 1489년 4월에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랐던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에는
세존암(世尊巖)이라 기록되어 있고, 해방 전후에 이곳 지리산에 은거해 있던
빨치산들이 이 바위 위에서 망을 봤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더니만 금새 날이 밝아오면서 智異山 선경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홍수 예.경보 시스템(05:40)
홍수 예.경보시스템 기둥에는 “문창대”라는 글씨가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법계사도 보인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암봉이 나오고 이곳이 문창대(文昌臺)라는 곳이 나오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라는데 내가 꼴찌라 포기하고 법계사로 향한다
그러나 문창대라 불리는 암릉은 1979년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에에 의해서 문창대는
이곳이 아닌 법계사 서북쪽 30여m 있는 곳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옆사면의 편한 길을 따라서 가니 멋진 암릉들이 즐비하다
헬기장같은 넓은 공터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장터목산장과 연하봉이 아련히 보이건만
지리산 일출이 시작되는 모양이다...법계사 방향으로는 햇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터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모습
화사하게 핀 분홍색 병꽃도 범여를 반긴다
지리일출
3대가 공덕을 쌓아야만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이미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 버리긴 했어도 지리산에서 일출을 본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적선지가(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經)이라”이라 3대에 걸친 공덕(三代籍善)을 쌓아야만
지리일출을 볼 수 있다 했던가 지리산 일출은 언제가 산꾼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든다
로타리대피소(1,335m:05:55)
1972년에 부산 로터리클럽이 세운 산장으로 법계사 바로 아래에 있으며, 수용인원 60명이란다
로타리 대피소 우측으로는 순두류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는데 지난번 남진때 이용했던 길이다
순두류는 이름 그대로 백두대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렀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란 의미의 지리산 옛 지명중 하나이다
순두류는 해발 900m의 지대에 경사 10도에 전개된 3만여평의 평지인데
두류산의 지세가 순하게 흘러서 산 속의 평원을 이룬 곳으로, 가파른 연릉이
사방을 감싸않은 특이한 지세로 한때는 인삼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법계사 일주문(06:00)
몇해전 태풍으로 인해 쓰러져 2년전 남진길에 없었던
일주문이 단청을 하지 않은 채 민낯으로 산꾼 범여를 맞이한다
입구에 선 채로 법계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가람안으로 들어선다
하늘 아래 첫 산사(山寺) 지리산 법계사(法界寺)는 어제가 초파일이라 그런지 연등이 꽤나 보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로서 해발1,450m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로서 신라시대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전국을 살펴본 후 산세가 좌우로
급박하게 구성되어 있고, 오직 동남쪽으로만 시야가 트여 있으니 일출과 함께 천기(天氣)와
지기가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는 곳이라 천하의 승지라 여겼다.
이에 진흥왕5년(서기 544년)에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법계사의 마당으로 들어서니 절집 소임을 맡은 보살이 살갑게 인사를 한다
나 역시 합장으로 예를 올리면서 초파일 행사를 치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건넨다
하늘아래 첫 절집 치고는 연등이 꽤나 많이 달린걸로 보아 한해 농사(?)를 잘 지은듯 싶다
종무소 앞에는 일본놈들이 법계사의 氣를 빼앗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둑을 전시해놓고 있다
법계사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르며,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이라 하는데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영월) , 태백 정암사(淨巖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등이다.
법계사의 적멸보궁(寂滅寶宮) 안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신중탱(神衆幀)이 봉안(奉安)되어 있다
법계사는 참으로 수난이 많았던 절이기도 한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9월에 남원의 황산대첩 싸움에서 이 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추성 통로로 후퇴하면서 천왕봉 성모상을 칼로 찍고 천왕봉을 내려와 법계사를 불태웠다고 한다
1908년 항일의병장 박동의가 이끄는 부대가 덕산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한 뒤 일본군과 맞섰지만 다시 패했는데 또다시 일본군이 법계사를 불태웠다
그래서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없어져야 일본이 흥한다는 말이 있다
법계사는 적멸보궁 이외에 산신각과 극락전,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 3층석탑(부처님 진신사리탑)
등이 있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장군(將軍)이던 시절에 법계사(法界寺)에 와서 민중(民衆)을
살피는 대통령(大統領)이 되겠다고 새겨놓은 박민중(朴民衆)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는데
이건 박대통령이 쓴 것이 아닌 왜곡 전달되었다고 법계사 보살은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법계사 내의 암벽에는 이름을 써놓은 글에는 유난히 박(朴)씨 성이 많이 보인다
법계사 3층석탑(보물 제473호)
이 석탑은 산신각 앞에 있는 높이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이형석탑이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는 몸돌을 얹었다
자연 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하는 예는 신라 이래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하부 기단부를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으며 지붕돌은 두텁고 지붕 주름은 각층이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여지는 포탄형의 석재가 상륜부에 얹혀져 있다
전체적인 수법과 만들어진 수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5m이다
3층 석탑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약수터에서 시원한 감로수 한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내려오니 조금전 지나온 망바위의 봉우리였던 세존봉이 법계사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일주문을 나오니 동료 산꾼들은 천왕봉으로 가버리고 일주문 앞에 벗어논 내 베낭만 쥔장을 기다린다
다시 베낭을 메고 천왕봉쪽으로 오르는 길에 좌측으로 넓은 바위가 나오는데 이곳이 문창대인가?...
문창대(文昌臺?:06:15)
법계사 서북쪽 30여m 떨어진 곳에 커다란 암벽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지리산(청학동)에서
이상향을 꿈꾸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렀던 곳으로 암벽에는
“孤雲崔先生 杖屦之所(고운최선생 장구지소: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가
새겨져 있다는데 내가 가장 후미인지라 어디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 천왕봉으로 향한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꽤나 땀을 흘려야하는 난이도도 높고 힘이드는 구간이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의 고도차 약 1450m인데 법계사까지 그래도 걸을만한 구간이나
법계사에서부터는 급격한 경사도 때문에 땀으 꽤나 흘려야 하는 구간이다
이곳은 지금 한창 철쭉이 피기 시작하는데 다른곳의 철쭉과는 달리 참으로 곱다
고비나물도 이제사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천불암터((千佛菴:06:40)
지리산 유람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법계사는 천왕봉과의 거리가 20여리이다.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강(天王舡)이라 부르며 이 절에서 천왕봉 쪽으로 3, 4리쯤 되는 곳에 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들어앉을 수 있는 이곳을 천불암(千佛菴)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세상을 피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부뚜막, 굴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불암(千佛庵)은 천왕봉 밑에 있으며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고 했다. <대동지지>에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이 있는데,
집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아래에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으며 법주굴(法住窟)이라고 부른다"며
유람록과 엇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륙은 세조 조와 성종조의 명신으로 서울의 청파동에서 출생하였다고 호가 청파(靑坡)이다.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22세(1459년)에 생원과와 진사과에
오르고 갑신년(1464년)에는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 병조참판ㆍ대사헌에 이르렀다. 저술한 책으로는 《청파집(靑坡集》이 있다.
또 인조 때 난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은 육의 현손이다
등로에서 좌측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있기에 관심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아래로는 150cm 정도 되는 높이의 굴이 있고앞이 탁 트인 굴 안은 생각보다도 넓었다.
암자라기보다는 천연수도처에 가깝다. 벽에는 누군가 새긴 이름들이 낙서처럼 어지럽다.
제법 널따란 공간은 십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수풀에 가려 있지만 은둔처로서는 그만이다.
세상과 단절된 편안함이 느껴지며 바닥에도, 천장에도 그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한평생을 지리산에 바친 김경렬 옹은 <다큐멘터리 지리산>에서 "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에 있었던 암자로 절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근세에 와서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란 때 의병도총부 소관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병란,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암법주굴은 천불암이다.
그럼, 그가 말한 '(암)법주굴'은 어디일까. 천불암이야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암)법주굴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자료 인용)
천불암터에 들려다가 올라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주위에는 얼레지꽃들이 많이 보인다
지리산의 등로에는 돌들을 깔아놓아 생각보다 무릎에 상당히 부담을 준다
아마도 대간팀들은 아닌듯하고 일반 등산객인듯 한데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분이 가다가 쥐가 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등로 퍼질러 앉아 있다.
내가 해줄수 있는 건 아스피린 한알 건네줄 일 밖에 없다.
바로 앞에 있는 공터에서 아스피린을 먹고 휴식을 취하라고 한 다음에 난 길을 떠난다
다시 철계단을 올라가 또다시 급격하게 고도를 올린다
개선문(凱旋門:1780m:07:00)
천왕봉 북서쪽에 있는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으로 오르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인데 원 지명은 하늘을 여는 문이라 해서
개천문(開天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엔 좌.우의 비슷한 높이의 바위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우측은 무너져 없어지고
좌측의 것만 10m 높이의 우람한 바위가 서 있는데 폭 2m의 공간 사이를 지난다
개선문에서 뒤돌아 본 중산리 계곡
중산리에는 천상병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이다
고인이 생전에 이상향이라 여겼던 지리산 천왕봉
건강이 나빠서 오르지 못했지만 늘 동경했던 곳이 천왕봉이었단다
歸天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산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지리산 식생대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조금전 법계사쪽에는 철쭉이 만개했건만 이곳은 이제사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다
또다시 계단을 따라서 고도를 높이니 천왕봉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우측을 바라보니 웅석봉은 구름에 가려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맑은 날씨에 이곳에 서면 덕천강과 경호강이 보이고 남명 선생의
산천재가 있는 덕산마을이 보일 곳이지만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남명 선생께서 천왕봉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지어 지내며 제자를 기르던 산천재가 있고,
또 그의 학맥을 잇는 남명학파의 중심인 덕천서원이 있으며 또 그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며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으로 불리웠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1501년 같은해에 태어나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됐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퇴계는 仁을 중시하며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나갔으며
남명은 직선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비판자로서 義를 숭상했다
기질과 학풍, 현실관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 ‘퇴계는 온화하고 포근해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은 우뚝 솟은 기상이 지리산을 닮았다’고 당시 선비들은 평가했다
그러기에 지금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 서북부 지역사람들은 남명의 성품을 닮아 반골 기질이 강한듯 하다
천왕봉 가는길에 어느 산꾼을 유혹하려나...
천왕샘(07:25)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르는 샘물이 있는 이 곳이 천왕샘이라 부르는데
이 조그만 샘이 서부 경남지역의 식수원인 남강댐의 발원지라고 한다.
이곳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으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흐르게 된다
개선문을 지나면서 부터는 날씨가 상당히 차갑워 땀은 전혀 흐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물한바가지 마시며 쉼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천왕봉 오르는 마지막 관문에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은 숨이 턱에 찰 만큼 급경사다
예전에는 이곳에 오를땐 너덜길 같은 곳이라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어서 오른 기억이 아련하다
웅석지맥 분기봉(07:40)
웅석지맥 이란 지리산 천황봉(1908.0m) 아래에서 북쪽으로 분기된 웅석지맥은 중봉(1875m),
하봉(1755m), 두루봉(1617m),을 세우고 왕등재와 밤머리재를 지나 1067봉 바로 아래에서
북동방향으로 약 0.3km 지점에 웅석봉(1100m)을 세우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큰날등봉(1008m).
선인봉(809m), 백운산(515m), 석당산(533m), 을세우고 진주시 귀곡동 진양호에 맥을 묻는 도상거리
약 57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도엽명 1/50.000 ;웅봉, 산청, 곤양, 진주
1/25.000 ;가흥, 대성, 생초, 사리, 단성, 대평, 진주
웅석지맥 개념도
남한의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에 올라 동료 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긴다
정확이 기억은 나질 않지만 젊은 시절부터 20여번 가까이 올랐던 지리산 천왕봉!
올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한 지리산!...나만의 감정일까?
천왕봉(天王峰:1915m:07:42)
천왕봉은 언제부터 불리워진 이름일까?' 아직 밝혀진 바 없고, 문헌상 기록도 없다.
천왕봉의 이름은 다양한 유래를 품고 있는데 천왕봉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사찰에 들어설 때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과한다.
즉, 천왕봉은 사천왕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산봉우리 이름에는 불교적인 이름들.
천왕봉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이외에도 여러 곳지만 불교 성지인 지리산 천왕봉도 예외일 수 없을 듯하다.
지리산에는 천왕봉 말고도 제석봉, 반야봉, 연하봉 등... 불교에서 따온 지명이 무수히도 많다
또 다른 설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일제는 우리글과 말을 못쓰게
하였는데 사람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여 그것이 "창씨개명[創氏改名]"에서
비롯 되었다는 설도 있다...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큰 산 이나 봉우리 이름 등...
"왕[王]"을 황[皇]또는 왕[旺]으로 왜곡 시켰다는 설도 있다.
예를 들면, 속리산의 천왕봉[天王峰]을 천황봉[天皇峰]으로 바꾸었다는...
이는 '일본천황'이나 '왕[旺]=[日+王]'을 연상시키기 위해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천왕봉 정상 뒷면의 모습
현재의 표지석은 19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규호씨와 민정당 실력자 였던
권익현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웠다고 하며 높이 1.5m의 자연석을
옮겨와 세운 이 표지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남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되다를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로 언제부터인가 바꿔 새겨 놓았다
예전의 정상석 후면엔 남명선생의 詩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請着千石鐘 (청간천석종) 청하여 천석종을 보니
非大叩無聲 (비대구무성) 큰 종채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아니한다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아니하네
동료산꾼들과 정상에서 기념 사진을 남기는 사이에 세찬 바람에 오한이 밀려온다
정상에는 이른 아침이라 산꾼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증샷을 남기기
위하여 정상석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런꼴 안보려면 나홀로 걷는 지맥길이 제일인데
세찬 바람을 피해 정상석 아래로 내려서서 옛날 천왕사와 성모상이 있는 공터로 내려선다
오늘 태양 아우님의 백두대간 북진 출정식을 산신에게 고하는 出山祭를 지내는 곳으로
내려서는데 정상 끄트머리에 지리산 조망 안내판이 서 있다
예전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 있게 일월대 (日月臺)라고도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월대란 이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으며, 월출과 월몰을 한 곳에서 바
라볼 수 있는 곳이 일월대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을 잘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일월대는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日月臺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그 아래의 바위에는 암각화로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곳에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天柱”라는 암각 글씨가 보인다
천주(天柱)란 “하늘을 받히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가 각자되어있는 곳은 천왕봉 정상석 옆의 표지안내판
“노고단 천왕봉까지 역사현장에서!”라는 안내 표지판 바로 아래에 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를 정확한 기록은 알 길이 없다
出山祭
출산제의 장소는 옛 천왕사와 성모상이 있었던 넓은 공터에 제단을 차린 다음에
백두대간 출정식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백두대간의 산왕대신을 모신 다음에
여법하게 출정식을 알리는 제를 올린다
지리산 산왕대신을 비롯한 산신들이시여! 내 아우 태양 대장이 백두대간을
시작하며 산신님들에게 香과 茶를 비롯한 조촐한 상을 차려 예를 올리니
부디 어여삐 여기시어 1년 반동안의 긴 여정에 부디 안전 산행을 보살펴 주옵소서
백두대간상의 산왕대신을 초청하여 여법하게 祭를 올린 다음에 조촐한 산상파티로
아침을 대신하고 단체 사진을 찍은 다음에 북진길의 첫 발을 내딛는다
지리산의 옛 지명은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남악산(南岳山), 방호산(方壺山)으로
불리우기도 했는데 방장산은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영주산(瀛洲山:한라산)과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신산(三神山), 또는 삼선산(三仙山)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여기에 묘향산을 더해 4대 신산, 다시 구월산을 더하면 5대 신산 또는 5악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멀리 백두대간에서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여 서쪽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등
3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이 형성되어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총 면적은 440,485㎦로 설악산의 1.2배, 한라산의 3배, 속리산의 1.5배
가야산의 7.5배로 가장 크다
경상도가 55%를 차지하고 전라도가 45%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형은 융기 작용및 침식,
삭박에 의해 산간 분지와 고원, 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어 있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 사찰과 국보, 보물등이 문화재가 많으며 800여종의
식물과 400여종의 동물들이 있으며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지리산(智利山)이었다고 하며 여기서 다만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智慧로운 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란 뜻으로 智異山으로고쳐 부르기도 한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 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년) 최치원이 쓴 비문에서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민족의 그 많은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슬픈 내색한번 안하고 모든 산꾼을 보듬어 주고있는 어머니 포근한 품안같은 산이다.
어머니의 품안같이 포근함이 그리워 매번 지리산을 찾는데
올 때마다 느끼는 그 감동 난 언제 그 빚을 다 갚을까?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산이 크다고 산국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세속에서의 찌들고 힘들었던 무거운 짐은 어머니의 품안같은
이 지리산에 묻어버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천왕봉에서 제석봉으로 향하는 소위 칼날 능선의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가야할 제석봉, 장터목 산장으로 향하는 길은 구름에 가렸다 보였다 하는게
마치 고려시대 개경에서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다 녹였던 황진이의 치마차락을 연상케 한다
매번 지리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벅찬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다가오는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아 여자들의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장쾌하고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산이라 부르고 싶다.
골짜기마다 슬픈 역사와 동족상쟁의 아픔을 가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매년 찾아오는 지리산 천왕봉이지만 올때마다 가슴속에 다가오는 느낌은 다르다
또 다시 짙은 안개가 몰려와 제석봉을 가려 버린다
늘 대견스럽게만 보이는 주원아빠... 볼면 볼수록 멋진 친구다
아직까지는 날씨가 좋다... 저 멀리 덕유능선이 아련히 보인다
해발 1800고지... 이곳은 이제사 봄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현호색이 피기 시작하고 나뭇잎에 새순이 이제사 돋기 시작한다
통천문으로 내려선다
통천문(通天門:09:05)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결국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에서까지의 지리능선의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가 만나는 문이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그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산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시인 고은님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적고 있는데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통천문 입구에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大刻字)가 암굴 동문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는데 옛 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얼레지(꽃말:바람난 여인)
제석단(?:09:15)
통천문을 지나 10분정도 넓은 공터가 나오고 돌탑이 있는데 이곳이 제석단이 있었던 자리인가?
아니면 지리산기에 나오는 향적사 절터인가?... 아뭏든 둘중에 하나인것 같은데 알 길이 없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향적사가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승려가 없다.
지리산의 물줄기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발원하고 또 하나는 법계사 아래서 발원하여
살천에 이르러 합쳐져 하나가 된다"고 했다
등로에서 바라본 중산리 계곡의 모습
다시 오르막을 올라 멋진 암릉을 지나면서 제석봉으로 향한다
제석봉(帝釋峰:1,806m:09:25)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봉우리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있다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
2년전 백두대간 남진을 같이했던 동료 산꾼들
참으로 오랫만에 같이 산을 걸어본다
1년반 동안 750km 긴 여정을 같이하면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서 서로의 눈빛만봐도 알 수 있을정도이다
가야할 연하봉은 뚜렸이 보이건만 뒤돌아보니 천왕봉을 가장 완벽하게 볼 수 있다는
제석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왕봉은 짙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허 형만님의 詩...행복에서 발췌
제석봉엔 하얀 고사목들이 처연하고 봉우리 일대가 황량하다
제석봉 정상은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들이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인재에 의한 고사목이라고 한다.
즉 자유당 말기에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사람의 삼촌이란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봉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론이 악화되고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흔적을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렀단다.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이 빚어낸 결과 치고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른듯 하다
장터목 대피소(場基項:1,653m:08:50)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북쪽 기슭의 주민과 남쪽 기슭의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장터목에서 장을 열어
서로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즉 남쪽 산청 시천면 사람들이 생선, 소금 등
해산물 따위를 지고 법천골로 해서 장터목으로 올라오고, 북쪽 남원과 함양 마천면쪽 사람들은 곡식, 직물,
약초 등을 짊어지고 백무동으로 해서 올라와서 물물교환을 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가장 높은곳에
장이 선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장터목이 지금은 천왕봉을 오르는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예전의 장터보다도 어쩌면 더 번잡한지도 모른다
크게보면 다섯 곳의 등반로가 모이는 곳이고 천왕봉 일출을 고집하는 분들이 묵어 가는 곳이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라본 백무동 계곡의 모습
민족의 아픔을 가슴속에 묻고있는 지리 능선의 모습
이곳 지리산은 6.25 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생매장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 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
일출봉(日出峰:10:05)
장터목 대피소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지리능선을 걸어가는데
이른 새벽에 잠을 못 잔 탓인지 자꾸만 졸음이 몰려오고 다리는 무거워진다
등로의 주위의 얼레지꽃들이 산꾼을 유혹하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걷는다
동행한 김포오야지님은 고비나물 채취에 여념이 없다
피곤한 육신을 끌고 오른 것은 일출봉... 몇해전에 없었던 명칭이 새로 생겼다
이곳에서 동료들과 가져온 수박을 나눠 먹으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연하봉 가는 길
연하봉에서 촛대봉으로 향하는 구간은 환경처가 지정한 특정야생식물 보호구역이다
이곳은 금강제비꽃과 약용식물인 땃두릅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연하봉(煙霞峰:1,730m:10:15)
연하봉(煙霞峰)의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극히 사랑함을 뜻하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연하선경은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새벽 여명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며 고사목이 숲을 이루고
원시림이 가득하여 연하봉 일대의 비경을 지리10경중에 제8경인 연하선경(煙霞仙京)이라 부른다
연하봉 이정표
뒤에서 바라본 연하봉
연하봉을 지나 헬기장을 만나고 다시 꽁초봉으로 올라선다
꽁초봉(?:10:30)
연하봉을 지나 철제 사다리를 지나 넓은 암릉으로 오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북쪽의 백무동쪽과 남쪽의 도장골과 거림골 방향 너머로 사천쪽도 아련히 보이건만
유난히 지나온 제석봉과 천왕봉은 구름에 갇혀있어 아쉽기만 하다
이곳은 원래 무명봉이었는데 등산객들이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바위 틈에서
끼워 넣고 갔다고해서 꽁초봉이라 불렀다고 해미님이 가르쳐준다
꽁초봉에서 바라본 연하봉의 모습
서서히 피로가 몰려온다... 아직도 세석산장이 2.1km나 남았는데...
촛대봉으로 가는 길은 기암괴석과 고사목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신비감을 더해준다
쉼터의자가 있건만 잠은 쏟아지고... 비몽사몽간에 길을 걸어간다
전망바위(10:55)
이곳에 서면 지리 남부능선과 낙남정맥길이 다 보이는 곳이건만 지금은 五里霧中
좌측의 도장골은 약간 보이지만 지난해 7월 지리 남부능선을 걸어면서 이곳에서
멋진 仙景을 감상했던 내.외 삼신봉을 비롯한 멋진 능선은 아예 구름속에 갇혀 버렸다
또다시 촛대봉으로의 오름길은 시작되고...
촛대봉 이정표(10:20)
힘들게 촛대봉 이정표에 오르니 호야를 기다렸던 연진낭자의 슬픔의 눈물로
변했는지 갑자기 구름이 촛대봉을 뒤덮으며 한치 앞도 보이질 않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라 갑자기 맘이 급해진다... 그래도 그렇지 촛대봉으로 향한다
촛대봉(1,703m11:25)
음양수 전설의 주인공인 연진처자가 낯에는 세석평전의 철쭉밭을가꾸고,
밤에는 죄를 사하기 위해 촛불을 켜놓고,기도를 올리던 장소라하여
촛대봉이란 이름이붙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짙은 구름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국공파들이 처논듯한 출입금지 로프만 보인다
촛대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자연 훼손이 가장 심각한 곳이며 지리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곳인데 촛대봉 암봉들은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세석평전을 사이에 두고 영신봉을 마주 바라보는 봉우리는 천왕봉 웅장함과
발아래 도장골 풍경이 조화를 이룬 멋있는 바위들을 모아 놓은 봉우리다.
촛대봉 아래 40분 거리에는 산나물 최대 군락지가 있다.
알면서도 못가는 곳이고 거림 쪽으로 찾아 오르기 쉬운 곳으로 거림마을
사람들이 나물과 약초를 뜯으러 다녔던 길은 인적이 드문 산속의 오지다.
지리산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약초는 국내 수요를 충당하고도 생산량의 반 이상을
일본·홍콩 등지로 수출하며 산수유를 비롯하여 오미자·익모초·작약·천궁·도라지·구절초·
능소화·화살나무·천남성·연령초·지황·만병초·석장포·자금우·개비자·탱자·현삼·구기자 등이 많다.
약초 외에도 식용식물로 고비나물·고사리·왕머루·보리수·잣·다래·상수리나무·고광나무·산딸기
등과 차풀·생강나무 등의 차(茶) 대용품도 있다.고 한다
촛대봉의 전설
호야(乎也)와 연진(連眞) 두 사람은 대성골에서 사랑의 보금자리를
펴며 정착, 지리산의 대자연 속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했던 사랑은 너무도 짧게 끝나 버린다.
'결국, 촛대봉의 전설로 남은 애틋한 슬푼 사랑이야기다.
호야와 영신은 산나물과 과일을 따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한 가지 아쉬움이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호야가 집에 없을 때 연진에게 곰이 찾아와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신비의 음양샘의 비밀을 일러주었다.
영신은 남편과 상의할 틈도 없이 음양샘으로 달려가 샘물을 마신다.
그러나, 곰과 사이가 나빴던 호랑이 그 사실을 산신령에게 고해 바친다.
산신령은 음양수의 비밀이 인간에게 누설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며
곰은 토굴에 갇우고 호랑이는 백수의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음양수 샘물을 훔쳐 마신 영신에겐 무거운 형벌로 세석평전에서 혼자서
철쭉밭을 가꾸고. 밤마다 촛대봉에 촛불을 켜고 잘못을 빌라는 벌이었다.
세석 철쭉꽃이 그녀 손끝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 때까지 그리고 연진은
밤마다 촛대봉에 촛불을 켜고 잘못을 빌었다...산신령에게 잘못을 빌다 빌다
연진은 촛대봉 정상에 한 여인이 기도하듯 무릎 끓고 앉아 있는 모습의 바위가 되었다.
짙은 안개에 갖혀버린 세석고원(細石高原)
남녘의 개마고원이라 부를 수 만큼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고원이다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세석평전이란 이름이 붙은 세석고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에 달한다.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세석평전은 상, 중, 하로 식물군락이 나뉘어진다.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보초, 좁쌀풀, 산새풀 등 여러 종류의 초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중간층은 철쭉이 집단 서식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굴참나무 등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 생태 분포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수련장이기도 했고 갑오농민전쟁때는 영.호남 동학의 마지막
잔존 세력들이 이곳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장기 항전을 꿈꾸기도 한 곳이란다
세석고원 습지
동의나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지만 철쭉은 날씨탓인지 아직은 필 생각이 없다
다음 산행때 이 구간을 지날땐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겠지
지리산 철쭉하면 이곳 세석고원의 철쭉이 압권인데 지금은 바래봉 철쭉을 더 알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바래봉의 철쭉과 세석고원의 철쭉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설가 문순태는 자신의 소설「철쭉제」에서 세석 철쭉을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 놓은듯...
하늘 끝까지 붉게 물들여 있는 듯”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리산 아래 하동 출신의 작가 이병주는
「산을 생각한다」에서 세석 철쭉이 화려하게 만개했을 때 발생한 한 빨치산의 자살사건 얘기에서
그때 유서로 남겨진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아! 꽃으로 치장하고 너만 이처럼 호화스러울 수 있느냐!” 라고 세석 철쭉을 표현했다고 한다
세석갈림길(11:40)
세석 산장에 들려 오랫만에 같이 동행한 김포오야지님과 문수농장 대표, 김포대님
그리고 노루패밀리와 함께 간단하게 술한잔 나누는 사이에 밀려오는 구름과 바람이
심상치가 않다... 오랫 산행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비가 올듯 싶다
일행들이 술 한잔 더 마시는 사이에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거림골로 향한다
남부능선 갈림길(12:00)
촛대봉에서부터 거림골까지 5.5km 거리를 계속해서 내려가야 한다
촛대봉에서 발원하는 계곡 물소리가 싱그러움을 더해준다
세석교(12:15)
내려가는 길에 오랫만에 보스님과 같이 동행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대간 남진에서 몇번 만나 걸었는데 정말 멋쟁이 친구이다
1400고지 전망대(12:20)
이곳에 서면 삼천포가 잘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전망이 꽝이다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간다... 무명교 2개와 철계단이 있는 깔딱고개를 내려선다
등로 주위에는 구상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북해도교(北海道橋:12:35)
세석산장과 거림골의 대략 중간쯤에 위치한 곳에 북해도교란 다리가 있는데
일본의 북해도처럼 기온이 많이 낮아서 지명을 붙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일제강점기에
오부자와 관련해서 붙혔다는기록만 해놓고 구체적인 내용의 설명은 없다.
거림골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조금 크게 들리더니 잠시 후 천팔교 다리가 나온다
천팔교(千八橋:13:00)
해발 1,008m에 지점에 설치되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등로를 내려오니 무명폭포가 보이고 좌측의 촛대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는 곳이다
홍수 예.경보기(13:20)
이곳 어디쯤에 신선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친다
조릿대 사이의 호젓한 길을 걸어가는데 잠이 쏟아진다
긴급통신 중계기(13:22)
과연 거림골이라 불릴만하다... 우거진 숲이 이름값을 한다
홍수통제 경보기(13:50)
홍수통제 경보기를 지나니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산행의 끝지점이 보인다
이곳에 도착하니 아리송 회장, 참이슬 대장, 아가다 총무, 산소지우님이 시원한 맥주병을
가지고 반갑게 맞이하는데 션한 맥주 2잔을 연거푸 마시고나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거림골(居林谷)탐방 지원센터(14:00)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이 있는 내대리는 골안이 넓다하여 한찰이라 불리는 한차리의
안쪽이라 해서 내대(內大)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내대리의 거림마을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는 거림(居林)이란 이름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으로 마구 벌목이 되었고 8.15 광복 이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나가 한때는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한다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니 좌측으로 길상암으로 향하는 도장골로 오르는 길이 보이나
이곳은 국공파들이 강력하게 단속하는 구간이라 지리산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구간이다... 지난 1월 3일 새벽에 신백두대간 첫구간의 출발지가 여기였으니 5개월만에
다시 찾아온 거림골... 상가를 지나 버스 정류장이 있는 식당에 도착하면 산행을 종료한다
산악회에서 제공한 펜션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에 오리백숙으로
점심을 먹고나니 다시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는데 진권아우가 가져온 꿀벌로 벌침을 맞는다
산악회 뒷풀이가 끝나고 16시에 서울가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대 이름은 지리산
작사.작곡/박문옥, 노래/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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