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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3구간 - 성삼재에서 여원재까지

by 범여(梵如) 2016. 6. 13.

智異山의 많은 福을 차지하고 있다고 이름하여 萬福臺

거기에 오를 수 있는 梵如도 정령 복받은 사람이겠지...

 

☞ 산행일시: 2016년 6월 12일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엄청난 무더위... 산행 막판에 약간의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0.6km  / 9시간 소요

☞ 참석인원: 진권아우와 둘이서

☞ 산행코스: 성삼재-헬기장-당동마을 갈림길- 작은고리봉-멋쟁이소나무-헬기장-무명봉-무명봉

              묘봉치-폐헬기장-공터-전망바위-1350m봉-만복대-암릉-견두지맥 갈림봉-무명봉

              암릉-폐헬기장-정령치-이동통신중계탑-개령암지 마애불상갈림길(왕복)-개령암지 마애불상

              계단-조망바위-전망바위-큰고리봉-급경사-암릉-고기삼거리-덕천버스 정류장-운천교회

             덕천보건지소-노치마을-노치샘-노치마을 당산-구룡폭포 갈림길-덕은봉-덕은치

             연산골갈림길-수정봉-입망치-710m봉-성터흔적-묘지-주지봉갈림길-임도-주막집-여원재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광의면, 산동면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운봉읍, 이백면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쳐보기가 겁이 난다...

다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은 왜이리 많은지.

얼마전 수원에서는 30대의 어느 싸가지 없는 년이 자기 옷가계 장사가 안 된다고

지나가는 70대노인네를 발로 차고 뾰족구두(하이힐)로 때려서  사회의 공분을 사게 하더니만

이틀 전에는단돈 15,000원을 뺏으려고 사패산 등산로에서 50대의 여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리 살기가 힘든 생존경쟁 시대라고는 하나 해도해도 너무들 하다

말법시대에나 일어날 중생들의 삶... 이 팍팍한 삶의 탈출구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닐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용산 → 구례구역 무궁화호 열차 승차권

밤 10시 45분에 여수 엑스포역으로 떠나는 열차를 탄 다음에 수역역에서 탑승하는 진권아우를 만나

구례구역으로 향하는데 바로 앞 좌석에 50대 중반쯤 되는 대여섯명의 여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꼴랑 밤을 센 다음에 구레구역에 도착하니 새벽 03시 10분이 조금 넘었다

구례구역(03:12)

구례구역에서 내려 성삼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니 이 버스는 성삼재로 바로 가는게 아니라

구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30여분을 구례 터미널에서 쉰 다음에 다시 성삼재로 향한다는데

요금이 구례구역에서 터미널까지가 1,000원이고 또다시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4,500원이니

지리산을 종주하는 산꾼들은 구례구역에서 곧바로 택시를 타야할 듯 싶다

요금은 무조건 합승하여 1인당 10,000원이니 그 요금은 훨씬 싼 느낌이다

30여분간 버스에서 기다리기가 무료하여 근처에 있는 설렁탕집에서 이른 아침을 해결하는데

설렁탕집의 음식맛이 말 그대로 설렁설렁하니 음식맛도 맛이지만 너무나 성의가 없다.

남도지방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맛이 없는 음식도 처음으로 먹어본다

구례시외버스 터미널(03:25~03:50)

진권아우가 사주는 설렁탕 한그릇으로 이른 아침에 먹고 다시 성삼재로 향한다

구례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성삼재로 가는 버스 시간표

성삼재 휴게소(1,090m:04:25)

구례 터미널에서 03시 50분에 출발한 버스는 화엄사 입구에 도착하여 산꾼 서너명을 내려주고

구절양장의 지리산 능선의 구비구비를 돌아 가쁜 숨을 내쉬면서 04시 25분에 성삼재휴게소 도착한다
20여명의 산꾼들이 어둠속에 내려 대다수가 노고단으로 향하고 남은 산꾼은 진권아우와 단둘이다

성삼재의 유래 안내판

성삼재 휴게소앞 데크목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새벽기온은 차갑기만 하다

1년중 낮이  가장 길다는 夏至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새벽 4시 반이 조금 지나자 서서히

여명을 밝아오기 시작하여 조금은 아쉽지만 워낙 가야할 길이 멀어서 떠날 채비를 한다

아직은 주위 사물이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걸을만하여 조금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한다 (04:40)

들머리로 가기위해 도로를 걷는데 심원(深遠)마을의 표지판이 보인다

구레군 산동면에 위치한 심원마을은 구례군(www.gurye.net) 자료에 따르면

이 깊은 산중에 마을이 형성된 때는 조선 고종시대. 약초와 한봉을 위해

한두 호씩 모인 것이 지금에 이르며, 해발 고도는 대략 750m쯤이다.

마을 주변 수㎞ 이내에 근접한 마을이 없어서 '심원'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행 들머리(04:45)

경방기간이 끝난 탓인지 철조망문은 활짝 열려있다

헬기장(04:50)

어둠속에 헬기장을 만난다... 헬기장에는 비박족들의 텐트 서너동이 보이는데

똑닥이 카메라가 어둠속에 피사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림을 망쳐 버린다

30분만 늦게 출발할 걸... 어둠속에 걷는게 딱 질색인 범여는 오늘 왜 이리 서두르나...

당동마을 갈림길(04:52)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당동마을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있는 당동마을은 원래 탑동이라 불렸는데 지리산 남악신사당이

있었다하여 당몰로 변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동으로 고쳐졌다고 한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주위 사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뒤돌아 본 성삼재 휴게소

작은 고리봉(1,248m:05:25)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령치”뒤에 있는 “고리봉”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고리봉”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2년전 남진때 정상에 있었던 오석으로 된 표시석 대신 새로운 표시석이 보인다

고리봉의 유래는 산세가 흡사 배의 닻을거는 쇠고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은 지명으로

“고리봉”은 한자로“環峰”이라고 한 것이라 “고리 환(環)”이라 부른 모양이다.

아득한 옛날 남해안 하동 앞 바다에서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남원의

오수정까지 배를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그때 오르 내리던 배들을 묶어

놓았던 고리가 이 산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작은 고리봉에서의 인증샷

아침이 되니 지리 능선의 윤곽은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데 짙게 흐린 날씨 탓인지 모든게 어둡다.

그나마 반야봉 말고할매의 은덕인지 이나마 보이는게 어디인가... 반야봉과 종석대가 보이고

지난주 정말 좋지 않은 추억을 가졌던 노고봉은 미안함 때문인지 구름에 가려있다

구례군 산동면 지역은 짙은 안개로 인해 윤곽이 뚜렸하지 않다

등로는 아직도 어둡다... 작은 고리봉 아래로 내려서니 멋진 소나무가 범여를 반긴다

폐헬기장(05:25)

성삼재를 2km 지난 지점에서 만난 이정표

무명봉에서 바라본 반야봉의 모습

무명봉(05:45)

자란초(紫蘭草)

조개나물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짧게 기는 밑부분으로부터 20-30cm 정도의 줄기가 곧게 뻗어나와 있다.

잎은 긴 달걀 모양이며, 마주 달려 있다. 꽃은 자색으로, 5-7월경이 되면 줄기 끝에 원기둥 모양의 이삭을 이루면서 달린다.

주로 들에서 자라며, 한반도 각지에 분포하고 있다. 꽃이삭은 건조시켜 이뇨제로 이용한다.

꿀풀에는 약효가 있어 급성황달형 간염에 복용하면 황달이 없어지고 간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된다.

또, 안과 질환에도 이용되고 두통과유방염·결핵성 임파선염 및 간기능 장애로 인한 고혈압에도 효과가 있으며,

흉막염이나 폐결핵에도 치료 효과가 인정되고 있으며 조개나물이라고 부른다

묘봉치(妙峰峙:1,108m:06:00)

구례 산수유 축제로 유명해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에서

하늘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덕동리 심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있고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목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심원쪽에 있었다는 묘봉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묘봉치에서 세워져 있는 이정표

묘봉치는 옛날 심원마을과 상위마을을 잇는 주요 통로였으며 「용성지(龍城誌)」를 비롯한

옛 기록에는 남원시 지리산 제1봉(반야봉) 아래에 더 없는 절터에 묘봉사 (卯峰寺)가 있고

그 아래에는 용연기우처(龍淵祈雨處)가 있다고 하며 묘봉사의 창건주와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조 명종때 문장가인 권응인(權應仁)이 젊었을 때 5명의 친구와 함께 이 절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과 1592년 7월 2일 왜군이 침입해 오자 남원판관 노종령(盧從笭)이 장령(將領)과

관아권속들을  이 절로 피신시켰으며 이듬해 7월  왜군이 이 절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묘봉치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찔레꽃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이 길을 왕복이나 3번이나 다녔는데도  늘 낯설기만 하다

넓은 공터(06:08)

넓은 공터 좌측으로는 ‘탐방로 아님’이라는 이정표가 있는데 아마도 위안리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작은 고리봉과 무명봉이 마치 여인의 乳頭처럼 2개가 볼록 솟아있다 

폐헬기장(06:12)

자이언트 하귀드

카프카스 지방이나 중앙 아시아에서 자라던 식물이 19세기에 영국으로 관상용으로 수입되었고

미국은 1971년 오너멘탈 가든에서 키웠다는게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유럽과 미국의 벌판을 적령하며  토종 동식물들을 생태계를 파괴하며  생태 교란식물로

전락한 광독성(光毒性)식물로  빛이랑 반응해서 독성을 보이는 식물이다

 

잎, 뿌리, 줄기, 씨앗에는 퓨라노코우마린(Furanocoumarin)이라고 불리는 독을 함유하고 있다.

수액이 사람 피부에 닿게되면 작게는 물집, 수분내로 3도의 화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수액에 닿는 피부는 영구적으로 자외선에 대한 피부 보호력을 잃게 되어서  햋빛만 쬐도 화상을

입는다고 한다(수액속 광독성 물질이 빛과 반응을 일으켜 피부 보호 능력 상실)

 

거기다고 잎이며, 줄기, 꽃 등 식물 전체에 있기 때문에사실상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위험하여 행여 진액이 눈에 들어가면 식물까지 될 수 있는 독성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식물에는 '퓨라노쿠머린' 이란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기형아를 일으키는 발암물질인데

독일에서만 2003년도에 16,000명의 희생자가 나온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식물이다 

광독성- 평소에는 조사되어도 문제없던 광량에도 피부에 염증이 생기게 하는 성질로

피부를 빛에 민감하게 한다고 한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동쪽인 심원계곡쪽은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서쪽인 산동면 지역은 거의 급경사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례, 곡성, 남원, 운봉 등은 주거지와 차단된 듯한 지리산 서북능선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옛부터 군사적 천연 요새로 불리웠던 곳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원과 운봉지역 민초들은 정령치 일대로 피신했고,

6.25전쟁 당시 남부군을 비롯한 빨치산 세력들이 달궁계곡 일대에서 한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의 영향이 컷다  

등로에서 바라본 구례군의 모습

삼한시대때 구례를 중심으로 섬진강 유역에 “고랍”이란 부족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고랍”이란 명칭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꾸라” “꾸리”로 변하여 백제때에는 구차례(仇次禮)라고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구례”로 고쳐졌으며, 다음과 같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일설도 있다.

 

백제시대 때의 중앙관제는 6좌평 22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중 두 좌평이 서로 반목하고

세력다툼을 하다가 마침내 간신이 득세를 하게 되고 충신은 하야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충신 좌평은 노경에 이르러 서울에서 머물만한 연고도 없이

오랜 생각 끝에 산자수명한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기로 결심하고, 찾아온 곳이

바로 구례의 봉성산하로 이곳에 조그마한 초가 한칸을 마련하고 땅을 일구며 가족끼리 단란한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 수년이 지나자 과거 간신이었던 좌평 역시 전과(前過)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벼슬을 사직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곳이 또한 구례 (당시는 봉성고을) 마을이다.

 

옛 속담에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고 과거불화로 서로 반목하던 두 좌평이 다같이 야인이 되어

산중의 적막한 곳에서 만나게 되니 과거 서로 반목했던 일들은 깨끗이 잊고 서로 다정하게 예를 갖추어 당시의

조정근황 등을 얘기하다 밤이 되었으나 집은 단칸방 하나뿐이어서 서로 걱정한 끝에 먼저 내려온 좌평이

이 지방의 지리에 익숙하다하여 집을 비워주니 찾아왔던 좌평이 감격하여 백배사은(百拜謝恩)하고

가져왔던 금은보화를 다 바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서로 구원(舊怨)을 씻고 화함을 이루어 잘 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이 백제왕에게 전해져

두 좌평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동시에 봉성고을 이름을 과거 원수가 만나 차례로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구차례현(求次禮顯)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야할 만복대가 뚜렸이 보이고...

1,350m봉(06:25)

맞은편에는 생각보다 반야봉과 임걸령, 돼지령이 뚜렸하게 보인다

만복대 아래 몽돌도 예전 그대로이다

오늘 아침에 내가 걸었던 등로의 궤적

이슬 머금은 원추리

전망바위(06:30)

힘좋은 진권아우는 계속 도망(?)가는 바람에 나혼자 걷는다.

약간의 박무로 인해 지리능선은 흐리게 보이지만 산행으로

성취한 기쁨의 쾌감은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룬 나만의 만족스런 감정은 가득 채워져 포만감의 절정을 맛보듯 하다.

이 순간을 위해 홀로 기도하듯 걸어왔고 사람 마다 갈 길의 목적지가 있기에 걷는 것이다.

 

걷는것도 수행이다...일요법회에 참석하여 천수경을 독송하고 108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포행(布行: 걸으면서 하는 수행)도 수행이다

힘은 드나 地, 水, 火, 風, (땅과 물, 태양과 바람) 有情 無情, 모든 자연과 내가

의사소통하는 시간이며 망념된 생각을 버리고 내 자신을 되돌아본다.

 

無念과 無心이라 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답지 않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그치는 것이라 했던가. 一心이 되면 찰나적 이나마

무념과 무아의 경지에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지나가면 없고 미래는 당도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현재는 그 속에 끼여 간격이 없다.

자연의 이치는 물은 흐르고, 인연 따라 바람 불면 구름은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썩은 고목엔 꽃이 피질 않는다.

만복대(萬福臺 1438.4m:06:35)

만복대는 전남구례군 산동면과 전북의 남원시 산내면 경계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로 성삼재(1,090m)와 정령치(1,172m) 사이 백두대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꼭지점을 형성한 곳이며 풍수지리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북풍한설에 피어난 설화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리산 최고의 억새능선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린다..

가을이면 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의 군무가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친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장쾌한 풍경을 출한다.

 가을에 다시한번  이 길을 걸어 보리라

 

만복대 능선은 대체적으로 심원 계곡이 있는 동쪽 사면은 완만하고,

산동마을이 있는 서쪽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서쪽의 남원, 구례, 운봉 같은 큰 고을로부터 접근하려면

가파른 능선은 자연스레 천연의 요새가 된다.

이 때문에 마한의 피난 왕조는 물론이요,

빨치산들도 한동안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만복대 정상 아래에는 비박족의 텐트 2동이 보인다...

저 산꾼들도 나처럼 간을 집에 빼놓고 다니는 모양이다

국공파 오기전에 얼른 텐트를 접어야할 듯싶소

 

 道    伴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이성선·시인, 1941-2001)

만복대의 정상석

2년전에 서 있던 정상석은 어딜가고 새로운 정상석으로 바뀌었구나

만복대 정상 이정목

만복대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능선

오늘 걸어야 할 수정봉은 짙은 박무에 가려 멀게만 느껴진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시어미상이라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 같은 분위기이고

등로 정상에 바람 한점이 불지 않아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하다

암릉(06:50)

조심하겠습니다

견두지맥 분기봉(07:00)

견두지맥 개요

견두지맥은 백두대간이 만복대 직전의 능선 분기점(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의 경계점)에서 동북쪽과 동남쪽 및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6.7km의 산줄기로,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신월리의 병방 마을에서

그 맥을 섬진강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영제봉(1048m), 견두산(774.7m), 상무봉(645m), 천마산(653.8m), 깃대봉(690.8m),

도장봉(635m), 가동봉(497.9m), 형제봉(621.7m), 천왕봉(695.0m), 수양봉(615m), 갈미봉(494.7m),

깃대봉(241.7m), 병방산(163m) 등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산줄기의 북쪽과 서쪽에는 앞냇물, 남원천, 요천,

신덕천, 수지천 등이 섬진강으로 흐르며,이 산줄기의 남쪽과 동쪽에는 계월천, 음천, 둔기천, 신도천, 서시천,

백련천 등이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뒤돌아 본 능선

넓은 공터(07:10)

넓은 공터에 서있는 안내판

조망바위(07:12)

돌양지꽃(꽃말: 사랑스러움)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정령치로 향한다 

암릉을 우회하며 걷는다

이정표(07:15)

바람 한점없는 등로 ...이른 아침이지만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공터(07:18)

넓은 공터에 올라서니 큰고리봉을 비롯한 지리산 서북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편한 내리막길에서 다시한번 올라서니 출입금지란다

예전에 저기 정상에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던 장소인데...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정령치로 내려선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정령치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각종 건축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차량은 몇대가 없다

좌측으로 정령치에서 육모정으로 이어지는 도로 윗쪽으로 동물이동통로

설치공사가 진행중인데  백두대간 잇기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정령치(鄭嶺峙:1,172m:07:35))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737번 지방도가 지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眞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위해 鄭氏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이곳을 지키게끔 하였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치는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 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 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 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정령치에 도착하면서 오늘 처음으로 휴식을 취한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구례에서 설렁탕을 먹은 탓인지

배는 그리 고프지 않으나 등로가 유순해서 그런지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마침 정령치 휴게소에 문이 열려있어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과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진권아우와 둘이서 인증샷을 남긴다

정령치에서 20여분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길을 나선다

고광나무(꽃말: 기품, 품격, 추억)

멀리 보이는 외로운 빛이라는 뜻을 가진 고광(孤光)나무

흰 꽃이 밤에도 환하게 비친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란다

 

우리나라 각처의 골짜기에서 자라는 범의귀과에 속하는 낙엽소목이다

생육환경은 토양의 물빠짐이 좋고 주변 습도가 높으며 부엽질이 풍부한 곳에서 자란다

키는 2~4cm 정도이고 잎자루는 짧고 잎은 마주나며 양쪽 끝이 뾰족한 계란형으로 덜 발달된 톱니가 있다

뒷면은 연녹색으로 잔털이 있고 가지는 2개로 갈라진다

작은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있고 2년색 가지는 회색이고 껍질이 벗겨진다

육모정에서 정령치로 오르는 737번 지방도로 얼마나 꼬불꼬불한 지

강원도에서도 볼 수 없는 길을 만나는데 저 도로를

개설할 때 환경단체와 지역민간의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개령암지 갈림길(08:03)

2번의 백두대간을 걸었지만 늘 동료 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들리지 못했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오늘은 홀로이기에 걸릴것 없어 무조건 마애불상군 방향으로 향한다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표시석(磨崖佛像群:보물 1123호:08:10)

큰고리봉 아래 절벽을 이루는 바위에 부처님의 모습을 돌에 새김한 이 불상들은 모두 12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4m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 으뜸으로 모셔진거라 여겨지며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에서 고려시대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 하며 1~2m 크기의 작은 불상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주위에 감싼 산자락의 적막함이 헐어진 불상의

무상함을 더해 주는데 이 불상은 1960년대초부터 학계에서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으며

한때는 마한의 장군상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후에 마애불로 판명나 1992년 1월 보물로 지정됐다

「명월지불(明月智佛)」로 알려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모습

 

12분의 부처님이 암각되어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모습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배치도

개령암지 마애불상을 보고 나오는 범여의 꽉막힌 가슴이 펑 뚫리는 느낌이다

되돌아 나오는 등로는 잘 관리되어 있으며 잣나무 조림지가 보이며 좌측 아래는 정령치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새들의 소리도 특징이 있는가 봐요

다시 개령암지 갈림길(08:20)

저도 3번째 백두대간을 걷고있는 중입니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아직도 정신 못차리는 철쭉을 만난다

전망바위(08:25)

뒤돌아 본 만복대와 정령치대피소의 모습

등로 좌측으로는 남원시 이백면과 고기저수지의 모습

앙증맞은 돌탑하나를 만나고...

정령치에서 큰고리봉로 향하는 길에는 산성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곳은 정령치에 가까운 곳이라 아마 마한시대부터 있었던 성이 아닐까?

정령치와 지리산 서북능선 자락의 지명중에는 마한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8년) 10월에 백제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까지 정복당해 멸망당했다고 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는 “지리산의 북쪽 기슭에는 반야봉이 있고 그 봉우리

좌우에는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는 두 고개가 있다 옛날 중국 한나라 소재(재위BC87~74)가

즉위한 지 3년만에 마한의 왕이 진한, 변한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황, 정 두 장수에게 축성과 감독을 맡겨 그 성이 완성된 뒤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서 짓고

72년동안 유지해왓고,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576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와서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사찰명을 황령암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큰고리봉(1,305m:08:35)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북고리봉 또는 큰고리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잠시후에 만나야 할 남원과 구례의 경계에 있는 작은 고리봉과의 구별을 짓기위해 큰고리봉이라 하는데

이곳이 해발이 조금 높아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또 달리 부르는 이름은 환봉(環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만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큰고리봉 정상 암릉으로 이루어진 고리봉 정상에는 이정표(←정령치 0.8km →바래봉8.6km↑고기리 삼거리3.0km)와

2등 삼각점(△운봉 23/1991재설)이 있고 가야할 정령치와 만복대 그리고 맞은편의 반야봉이 한 눈에 들어오며

우측 능선은 지리산 서북능선으로 세걸산과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으로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 뒤돌아본 만복대와 정령치의 모습

큰고리봉에서 바라본 반야봉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리웠던 영남 사림의

太頭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하늘이 열번을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곳 서북능선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이제사 겨우 그 뜻을 알듯싶다.첫날밤을 치르고 떠나 버린

반야도사를 기다리는 마고할미의 근심인지 반야봉은 박무에 가려있다.

 

지리산 8경의 하나인 반야낙조로 유명한 반야봉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기궁뎅이처럼 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반야봉은 보는 곳에서 따라 모습이 바뀐다고 하는데 이곳의 반야봉은 마치 여인의 둔부같이 보인다

고리봉 정상에서 진권아우님

큰고리봉 정상 2등 삼각점(△운봉 23/1991재설)

천왕봉과 재석봉도 아련히 보이고...

큰고리봉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선다

넓은공터(08:50)

멋쟁이 암릉을 우회하며 걷는다

이정표(08:55)

계속 내리막길에서 무명봉을 지나고...

관리되지 않은 무명묘지도 지난다

큰고리봉에서 해발 400m이상 내려오자 식물분포도가 서서히 비뀌기 시작한다.

울창하던 갈참나무 숲이 서서히 줄어들고 소나무와 산죽으로 우거진 호젓한 길이

나오는데 좌.우 양쪽으로 소나무와 삼나무가 뚜렸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정표(09:10)

멋진 소나무숲을 기분좋게 지나는데 등로 좌측에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난다

기.지맥과는 달리 이런 맛에 백두대간을 걷는게 아닌가?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반가운 시그널이 산꾼 범여를 반기고...

좌측의 효자비를 바라보면서 고기삼거리로 내려선다

고기 삼거리(09:40)

남원시 주천면에 속하는 고기리는 고촌리와 내기리를 병합하여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고촌리는 마을이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며,

내기리는 깊은 산중의 안쪽에 있는 안터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내기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정씨와 이씨가 피난와서 정착하여 형성되었고,

고촌마을은 경주이씨, 밀양박씨 등이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1995.1.1 남원시와 남원군의 통폐합에 따라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고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매우 높고 깊은 산중 마을이다.

 

해발 500~6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로 정령치에서 발원하는 원천천의

상류지역으로 물이 매우 맑고 마을 앞으로는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이 펼쳐져 있어 산수경관이 수려하다

도로 우측에 있던 7년전 북진길에 있던 정령치 모텔은 운봉자연치유센터로 바뀌었다

노치마을 가는 도로는 지금 한창 공사중...

짙은 밤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밤꽃 향기는 여자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왜냐고 하면 밤꽃의 냄새가 남자의 정액 냄새와 같다나 우쨌다나...

도로를 따라 끊어질듯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

고기 삼거리에서 60번 지방도를 따라서 운동으로 가는 길에서 노치마을

향하는데 주천면 덕치리와 운봉읍 주촌리 사이 60번 지방도는

운봉분지의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덕치리 버스 정류장(10:00)

운봉으로 가는 굽어지는 도로에서 좌측 주촌면 덕치리로 들어서니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백두대간 길이 마을 가운데로 지나가는데가 딱 2군데인데 공교롭게도 춘향이의

이곳 남원골인데 첫번째가 이곳 노치마을이고 2번째가 다음구간인 매요리 마을이다 

진권아우와 둘이서 터벅터벅 길을 걷는데 지나가는 버스가 지나가다 멈춰서더니

버스 기사가 하는말... 더운데 왜 걸어다니셔... 하길래 차바가 없어서 걸어간다고 하니

껄껄 웃으면서 하는 얘기... 공짜로 태워주겠단다... 버스 안을 보니 손님은 한명도 없다
운봉에서 주촌면을 거쳐 이백면으로 가는 버스인데 기왕 태워줄려면 백두대간 능선인

 

수정봉을 지나 여원재의 백두대간 능선으로 가면 타겠다고 하니... 처음엔 뭔소리인지

못알아 들었다가 한참후에 버스 기사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여원재까지는 태워주겠단다

버스를 세워놓고 한참 농담을 하다가 서로의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도로옆에는 포도농장이 보이고 예전에 없던 민박집과 전원주택들이 많이 보인다

노치마을쪽에도 예전과는 달리 멋진 주택들이 많이 보이는데 한네산 산악회

J.R 아우님의 고향이 이곳 어디쯤일텐데... 운천교회를 지나 덕치보건진료소가 나오고

새로 생긴 민박집의 개쉬끼가 엄청나게 짖어댄다... 별로 기분이 안 좋으니 좀 조용히 해라이

논가운데 도로를 따라서 노치마을로 향한다

반갑습니다

노치마을로 들어서니 덕은봉과 수정봉이 보인다

노치마을회관(10:15)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은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가 터 잡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노치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서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갈대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 갈대 노(蘆)고개 고개(峙) 표현하여 노치마을이라 불리운다. 
한국전쟁때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전국에서 백두대간 능선이 유일하게 통과한다.

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다.
이 마을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갈대 노(蘆) 고개 치(峙)를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평지가 아닌 고개임을 암시한다.

노치마을은 섬진강과 진주 남강의 분수령으로 물의 흐름이 나뉘게 된다.운봉고원인 이곳은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가재마을은 바닷가재에서 딴 이름이고, 주촌(舟村)은 ‘배마을’이란 뜻이며, 고리봉은 배를 맨 고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수령 500년이 된 느티나무 쉼터에서 베낭을 내린다

일제가 조선땅의 백두대간 맥을 끊으려고 묻었다는 목돌도 전시되어 있고...

“일본 사람들이 땅을 잘 알잖우. 저그 지리산의 기운이 시작하는 곳에 뜸을 떴다니께.”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물을 댄 논에 지리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일본인들이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구덩이를 파 숯을 묻고 돌침을 놓은 뒤 아예 저수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를 없애고 돌침을 꺼내놓았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내린 물도 덕유산에서 내린 물도 물길은 정확하게 좌우로 갈라져 흐른다.

마을의 조산은 마을 좌우로 헛헛한 기운을 보하고 흐르는 물을 따라 마을의 정기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미신으로 치부하면 보이지 않지만 이치를 따져보면 비보풍수는 자연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것을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옛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흐름은 발원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니 산의 발원지도 백두산 한 곳이어야 하고, 지리산의 시작은 덕유산의

산줄기가 내리막을 타다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는 노치마을로 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늦은 아침(10:15~11:00)

노치마을 쉼터옆 느티나무 아래서 늦은 아침상을 펼친다

가져온 도시락에다 훈제고기를 구어서 상치쌈에 캔맥주... 그야말로 꿀맛이다

45분간의 여유로운 식사와 휴식시간을 갖고 회관옆 수도에서 간단하게 씻고

양치까지 한 다음에 다시 베낭을 메고 수정봉으로 향한다

노치마을에서 인증샷

노치마을 가운데에는 커다란 노거수 한 그루가 있고 백두대간 기념석과 사각정자와 화장실이 있다

대간 기념석은 대한민국 전도, 「백두대간과 14정맥」,「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 마을,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라고 적혀 있다

비보풍수(裨補風水·풍수의 원리에 따라 재앙을 막는 것)의 한 모습인 조산탑을 돌아들어 자리잡은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 백두대간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노치마을 유래 안내석

백두대간 표시석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뭔 꺽정이람...여유로운 마음으로 여원재로 향한다

마을을 가로질러가니 노치샘을 만난다 

노치샘(11:02)

현재 노치샘은 원래 고려시대의 절터로 고승이 도술로 판 샘이라고 한다

바위에서 나오는 생수는 물맛이 뛰어나 염병(장티푸스)같은 돌림병이 심하게

돌던때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신기하게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고 한다

 

혹시 물을 쓰다가 부족할 때는 우물속의 달팽이 모양에서 물을떠야 하는데 반드시

마을처녀가 물을 퍼올려야 할만큼 정하게 여겼다

 

주산제때는 정월 초하룻날 우물을 품고 새끼줄로 금줄을 쳐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해놓고 당산제 당일 이른 새벽에 제사에 올릴 정안수를 뜨러가면 산신인 호랑이가

샘 주위를 지키다가 제사가 시작되고 첫물을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노치샘의 모습

노치샘을 지나 노치마을 당산으로 오른다

섬초롱꽃

노치마을 당산(11:05)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였다.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몇 년 전 자손이 없던 마을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자정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된다.

또 상주를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뒤돌아 본 노치마을

당산 위를 오르니 예전에 없었던 노치마을 안내 표지판이 있다

노치마을 당산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에 진권아우는 벌써 도망가버리고 없다

늦은 아침을 먹었겠다... 오르막길에 좀 힘이 드는데 젊은것이 행님을 버리다니... ㄱㅇㄴ

주위는 가느다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바닥에는 노루발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예전에 몇년동안 어느 누구보다도 참으로 많이 정맥, 기맥,

지맥을 걸었던 젠틀맨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지금 어디냐고...

 

예전에 동료산꾼이었던 젠틀맨님은 서울에 살다가 3년전에 이지역인 남원시 이백면으로 귀촌했다.

귀촌이 생각보다 싶지 않을터인데 과감하게 귀촌생활을 하는 젠틀맨님이 부럽기만 하다

오늘은 젠틀맨님에게 신세를 좀 저볼 요량으로 전화를 했더니만 쾌히 수락한다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니 시간에 맞춰서 여원재로 마중을 나오겠단다

전화를 끊고 부지런히 아우를 따라가는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구룡폭포 갈림길(11:30)

구룡폭포 갈림길에 올라서니 대간팀의 시그널들이 지저분할 정도로 어지럽게 걸려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3.3km를 가면 구룡폭포가 나온다는데 언젠가 가봐야 할듯 싶다

구룡폭포는 판소리 동편제를 집대성한 운봉 출신 판소리의 歌王 송 흥록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였다고 하여 유명해 진 곳이란다... 그쪽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크게 한번 심호흡하고 부지런히 수정봉으로 향하는데 등로는 양넘 지갑줏듯 편안하다

 

구룡폭포의 유래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갈래 폭포를 이루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털거리듯 하므로 교룡담( 交龍潭)이라고 하고 이곳이 바로 용호구곡의 마지막 구곡이다

교룡담 이곳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살다가 등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구룡폭포라 불린다  

편안길을 걸어가니 또 버릇이 나온다... 쏟아지듯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걷는다

2년전 남진길에는 어둠속에 지나쳐 잘보지 못했는데 개념도상의 750m봉 정상에는 시그널이 많다

덕운봉(750m:11:35)

개념도상 750m봉 정상에 예전에 없었던 덕운봉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이곳에 오니 먼저 도망간 아우가 기다린다... 사진을 찍어 달라는 얘기다

그래 행님이 그런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제

750m봉을 내려오니 이정표가 서있는데 이곳은 덕운치라고 이정표 기둥에 써있다.

이곳부터는 지리산 구간을 완전히 벗어나고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능선을 걷는다

덕운치(德雲峙:11:38)

덕운치에서 조금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지맥 능선을 타다가

이런곳을 타면 누워서 떡먹기보다 더 쉽다
오르막길에 암릉에 끼어 살아가는 소나무의 삶이 마치 민초들의 삶처럼 힘들어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이백면의 들녘

좁은 암릉구간 사이를 빠져나오니 연산골 갈림길이 나온다

연산골 갈림길(11:50)

좌측으로 내려서면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연산골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조용하던 등로에 갑자기 시끌벅적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대간 산꾼들이 몰려온다

노루발(꽃말:소녀의 기도)

쌍떡잎식물 진달래목 노루발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로서 노루발풀이라고도 한다. 숲속에서 자란다.

높이 약 26cm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벋으면서 퍼져나간다.

꽃줄기는 곧게 서고 잎은 1∼8개가 밑동에 달리고 둥글거나 넓은 타원형이며 길이 4∼7cm, 나비 2.5∼4.5cm이다.

잎자루와 더불어 자줏빛을 띠지만, 잎맥부분은 연한 녹색이고 가장자리에 얕은 톱니가 있다. 
 
꽃은 6∼7월에 피고 노란빛을 띤 흰색이거나 흰색이며 5∼12개가 밑을 향하여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화관은 넓은 타원형이고 5갈래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이고 암술대는 1개이다.

씨방은 납작하고 꽃받침은 5갈래로 갈라지나 밑동은 붙는다.

열매는 삭과로서 납작한 공 모양이며 9월에 갈색으로 익는다. 지름 7∼8mm이다.

직진의 급한 봉우리를 올라서니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대간 산꾼들이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무명봉에 오르는데 우측의 우회길도 보인다

노치산성 터(12:03)

노치산성은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 뒷산인 수정봉에 있었던 산성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운봉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해발 500m 이상되는 산봉우리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다.

즉, 수정봉의 노치산성, 준향리의 음지산성·양지산성, 장교리·고남리·가산리·황산의 석성, 신기리의

토성 등이 있고 산성의 주변지역에는 준향리·매요리·임리·권포리·연재마을·비전마을

 

등지에서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이 확인되며 또 준향리에는 가야토기의 도요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지역과 이웃한 아영면과 동면에서는 월산리·건지리·두락리 등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사된 바 있다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노치산성이다.

지나온 750봉과 노치마을, 회덕마을, 정령치, 만복대 등은 삼한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중요한 국경 방어지역이었고 노치마을의 경우 한국전쟁 때 공비 토벌

명목으로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 비운의 고장이기도 하다.

2분정도를 걸으니 수정봉이 나오는데 어느 산악회 대간꾼들이 수정봉을 점령하고 있다

수정봉(水晶峰:804.7m:12:05)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려한 봉우리로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수려한 봉우리이다.

산 중턱에 수정(水晶)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수정봉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두 개의 산봉우리를 표주박 형태로 감싸는 양지산성이 있다.

 

수정봉은 운봉읍에 속해있는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운봉 쪽에서 바라보면

야산과 같이 보이지만 남원 쪽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주능선과 같이 하늘금에

맞닿아 있고, 산세는 부드러운 능선길로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5년전에 없었던 정상석이 새로운 모습으로 멋지게 설치되어 있고

옛 정상목과 스텐레스 안내판도 그대로 설치되어 있다

북진길에 이곳에 올라 우측으로 보였던 동편제의 本香인 운봉읍의 모습은 지금 불빛만 보인다

수정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수정봉 정상 삼각점(△운봉303 / 1981 복구)

 

산경표상에 아주 중요한 수정봉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이 수정봉은 남원에 들어선

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서 이곳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주천면 덕치리 벌판 너머에지리산 서북능선 자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 선생이 저술한『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수정봉은 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과 섬진강
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노치산성 흔적

수정봉 정상에는 40여명의 대간 산꾼이 점령하고 있는 바람에 서 있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여원재로 향하는데 이곳에도 노치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녹음이 우거진 등로의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려서니 소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저멀리 주지봉과 그 너머로 다음 구간의 고남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좌측으로는 이백면 들녘은 짙은 안개에 가려서 잘 보이질 않는다

폐헬기장(12:15)

노루오줌(꽃말: 여전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범의귓과의 여러해살이 풀로서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이 많다.

그중 뿌리에서 노루 오줌 냄새가 나서 붙었다는 설과 노루가 자주 오는

물가에서 많이 보여 그렇게 지었다는 두 설이 지배적이다.

산골짜기의 냇가나 습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키는 약 40-70센티미터이고,

줄기에는 긴 갈색 털이 나 있으며 잎은 겹잎으로 2-3번 갈라져 세 장으로 된 잔잎이

2-3장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잔잎은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톱니가 있다.

꽃은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을 띠며, 7-8월에 원줄기 끝에서 원추꽃차례로 무리 지어 핀다

열매는 씨방이 여러 개이며, 익으면 말라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그렇지만 특별하게 지린내가 나지는 않는다

 

한방에서 전초를 ‘소승마’, 뿌리를 ‘적승마’라 하여 약으로 쓴다. 소승마는 해열, 두통 등에

쓰고, 적승마는 타박상 등에 쓰며 전초를 술로 담가 먹기도 하고,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입망치(笠望峙:545m:12:20)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입촌마을과 운봉읍 행정리 갓바래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갓바래재라고도 한다.

고개의 유래는 입촌(笠村)은 중이 삿갓을 쓰고 배낭을 지고 가는 모습의 산혈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얻은 지명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홍거리와 두무실 가운데 아홉 가지 혈 중에서

바래혈이 있다하여 갓바래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우마차가 많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입망치 이정표

입망치를 올라서자 전주이씨 묘지가 나오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여원재로 향한다

땅비싸리

가야할 710m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온 750m봉과 수정봉의 모습

710m봉(12:55)

누군가가 정상에다 갓바래봉이라는 표시를 해놨다

햇빛이 나질 않고 잔뜩 지푸린 날씨이긴 하지만 바람이 전혀 불지않아 엄청나게 덥다

웃도리에 흐르는 땀이 바지로 흘러내려 마치 오줌을 싼 것처럼 보인다

710m봉 정상의 시그널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신 다음에 다시 여원재로 향한다

양지산성의 흔적(?)

입망치 남쪽에 위치한 양지산성은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동덩쿨

이정표(13:10)

710m봉에서 10분을 조금 넘게 걸어니 무명봉이 나오고 대간길은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곳도 양지산성이었는지 성터의 흔적이 보이고 급하게 내려섰다가 마지막 오름길로 오른다

무명묘지(13:17)

산죽길을 지나니 주지봉 갈림길이 나온다

주지봉 갈림길(13:22)

좌측 능선으로는 주지봉으로 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우회로를 만들어 놨다

원 길은 능선 정상으로 올랐다가 우측으로 떨어져야 맞을듯 싶다

이정표(13:25)

이정표를 지나면서 넓은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넓은 도로를 따라가다가 다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드는데 후답자들은 그냥 도로로 가시길...

2분도 안되어 다시 도로를 따라야 하니... 아무런 의미가 없을듯 하다 

다시 갈림길(13:27)

다시 능선으로 들어서서 내려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비에 맞으나 땀에 젖어나 옷이야 어차피 다 젖은 상태이니 시원하게 걷는데 젠틀맨님이

여원재에서 우리를 기다린단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예전의 백두대간 등로는 폐쇄되고 우회길로 걸어가게끔 만들어 놨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엉컹퀴

여원재 주막(13:35)

비를 맞으며 여원재 주막집을 지나가는데 산꾼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세히보니

안면이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다니던 산악회 후배들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친구들...어둠속에 다니는게 싫어서 홀로 다니는데 얼마나 미안한지...

여기서 붙잡혀 꼼짝도 못하기에 여원재에 있는 젠틀맨님을 오라고 해서 합석을 한다

젠틀맨님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역력하다... 우리를 대접하려고 집에다가 삼겹살과

주류를 잔뜩 준비해놨다고 하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젠틀맨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서 후배들과 추어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술을 마시는데 후배들한테 얼마나 미안한 지... 

수완좋은 여원재 주막집 주모는 하나도 안 변했다

7년전 대간길에 이 아지매한테 지갑 홀랑 다 털린 슬픈 추억이 잇는데...

능글능글한 함에다가 걸쭉한 음담패설은 예전 그대로이다

여원재

후배들한테 붙잡혀 여원재 정상은 밟지도 못하고 주막에서 산행을 종료했다.

젠틀맨에게 고맙다는 안부도 못하고 얼떨결에 헤어져 엄청 미안하다

여원재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채 안된 시간이다

편하게 왔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한 구간이었다...다들 복받을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