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 산행일시: 2016년 6월 5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 추움
☞ 참석인원: 진권아우와 둘이서
☞ 산행코스: 백무동 버스정류장-야영장-백무동 탐방안내센터-장터목 갈림길-첫나들이 폭포
한신계곡-가내소폭포-오층폭포- 한신지계계곡-무명폭포-세석갈림길-세석산장
공터-영신봉-1,556m봉-망바위-칠선봉-전망바위-선비샘-덕평봉(우회)
오공능선 갈림길-벽소령-석문-전망바위-형제봉-암봉-삼각고지-음정마을 갈림길
연하천대피소-명선봉-토끼봉-화개재-548계단-삼도봉-무명묘지-노루목-쉼터
임걸령-피아재삼거리-생태복원지역-돼지령-공터-헬기장-돌탑-공터-쉼터-노고단
노고단대피소-무넹기고개-성삼재
☞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마천면 / 산청군 시천면 /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전남 구례군 토지면
丙申年을 맞이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째 접어든다...세월 참 빠르다
2주만에 또다시 지리산으로 향한다... 2번이나 남.북을 오가며 백두대간을 걸었지만
아직도 뭔 미련이 남았는지 또다시 백두대간 길을 나서는데 왜 이리 가슴이 설레는지...
이번에는 산악회가 아닌 혼자서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걸어볼 생각이다
대간길을 타면서 산악회를 따라서 가는것과 독립군으로 가는 건 一長一短은 있다.
산악회를 따라가면 시간과 제약... 특히 시작이 어둠속에 출발이라 딱 질색이다
장점이라면 교통편을 걱정 안해도 되고 경비가 적게 들어 간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가면 모든게 내 맘대로이지만 경비가 만만찮다
사실 백두대간을 왕복을 하고 산행기를 책으로 내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자료가
부족하여 다시 길을 나섰는데, 그리 쉽지는 않을듯 하지만, 어차피 나선 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 하나 맘에 걸리는게 있다면 후배가
모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대장을 맡았는데 같이 동행하지 못하는게 미안하다
어둠속에 걷는것과 雨中산행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형님 마음 이해해 주겠지
오늘은 절기상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알맞은 때인 芒種이다
동네 누님이 이사를 한다고해서 저녁에 들렸다가 집에와서 간단하게 베낭을
준비한 다음에 밤 11시 50분에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동행하기로 한 진권아우를 만나
탑승구로 향하는데 자정 무렵 10분 단위로 출발하는 버스는 모두 다 滿車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 → 지리산 백무동행 버스표
지리산가는 버스 탑승구엔 지리산으로 등산객들로 인산인해이다
마치 남대문시장 노점상같은 기분이다... 심야 버스에서는 기본룰이 있다.
특히 산꾼들에겐... 근데 이곳은 아닌듯 하다... 대체적으로 소등을 하면
지침 모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곳은 밤새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는 등산객과
차에서 발 냄새가 난다고 소릴 지르면 기사에게 항의하는 인간도 있다.
그라믄 자가용타고 댕기지... 뭔 지랄 맞다고 대중교통을 타는겨.
그래서 산꾼(맥 산꾼)과 등산객(일반 등산객)은 수준 차이가 난다니까.
백무동 탐방안내센터(03:50)
탐방 안내센터가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어제 지리산에 내린 비로 인하여
날씨는 상당히 춥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오니 진권아우가 추운데 컵라면
하나 먹고 출발하자면서 컵라면 2개를 시켜놨다
새벽에 문을 연 구멍가계에서 컵라면 하나로 속을 다스리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맞은편에 있는 천왕할매상으로 향한다
백무동 버스 주차장 우측에 지리산 천왕할매상이 있는데
이곳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마을의 이름은 창조 신화의 여신 마고할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여신 마고가 반야와 결혼한 후 그의 딸 100명을 무당으로 전국에
배출하였는데 지리산에서 그 딸들이 내려왔던 통로가 이곳 백무동이였다고 한다
백무동 마고할매에게 오늘 무사 산행을 도와 달라고 예를 올린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04:00)
백무동 야영장
백무동 탐방지원센터(04:10)
버스정류장에서 0.5km 정도 걸어온 지점에서 본격적인 지리산 산행을 시작한다
장터목 대피소 갈림길(04:02)
동서울에서 10분 단위로 출발한 3대의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의 99%정도는 장터목 대피소로
향하고 세석대피소로 향하는 산꾼은 진권아우와 달랑 2명만이 호젓하게 걸어간다
들머리에 들어서자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과 가내소 자연관찰로라는 말뚝이 있다
초반에 편안한 등로로 올라서니 어둠속에 돌탑이 보이고 잠시후 긴급이동통신 중계기를
지나니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도심에 지친 범여의 가슴이 뻥 뚤리는 느낌이고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정겹기한 시간이다
첫나들이 폭포(630m:04:40)
어둠속에 첫나들이 폭포를 지난다... 내가 이런 밤에 다니는 거 싫어서 혼자 다니는데
오늘은 불가피하게 어둠속에 걸어면서 첫나들이 폭포 다리를 건너는데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지리산의 벽소령이나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을 해야하는데 그럴 여유는 없고...
2012년 8월 26일 지리산종주 산행때의 첫나들이 폭포 사진
가내소 폭포(04:50)
먼 옛날 한 도인이 이곳에서 수행을 한 지 12년이 되는 어느날
마지막 수행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묵고 눈을 감고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지리산 마고할미의 셋째 딸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하였고 , 도인은 그 유혹에 넘어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도인은 “에이~ 나의 도(道) 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고
이곳을 떠났다. 그래서 ‘가내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소설 “동편제”에 나오는 소리꾼 정구룡이 이곳에서 得音을 얻었다는 곳이다
1993년도 이 청준 소설 “서편제” 를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서편제는
많이 알고 있으나 동편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 8월 26일 사진
가내소 폭포를 지나나는데도 아직까진 어둠속이다
시원한 물소리를 걸으면서 부지런히 세석대피소로 향하는데 헤드렌턴 불빛이 보이면서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조금을 더 오르니 2~30대 젊은 남녀 10여명이 가내소폭포
전망대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컵라면 먹고 있을때 먼저 올라온 모양이다.
젊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세석 대피소로 향한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15분정도 걸어 오층폭포에 도착하지만 어둠이 덜 거친 탓인지 카메라 렌즈가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오층폭포(855m:05:05)
4년전에 비해서 세석대피소 오르는 길은 잘 정비를 해놔서 걷기가 훨씬 편한 느낌이다
홍.수해 예방 경보기(05:30)
한신계곡(寒新溪谷)
깊고 넓은 계곡 또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산하다고 해서 부르던 이름이 한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에 한신이라는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여러 개의 폭포를 이루면서 10여㎞에 걸쳐 흐른다.
백무동 위에서 세석까지 흐르는 본류 외에도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과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흐르는 한신지계곡 등 4갈래의 물줄기가 엄천으로흘러 남강 상류를 이룬다.
본류는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을 흘러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한다.
지리산 계곡 가운데 폭포를 가장 많이 끼고 있으며, 지리산 등반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나홀로 산행길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진권아우
이른 아침에 어디로 출타중이신가?
등로 관리가 잘 관리되어 세석으로 오르는 등로는 훨씬 편하다
산함박꽃
한신지계곡(06:05)
좌측으로는 장터목 산장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세석으로 오르는 길이다
마지막 물줄기를 만나고 세석고원으로 향한다
忍苦
이정표(06:20)
4년전 세석고원에서 이곳을 내려올 때 0.7km를 1시간 걸려 내려왔는데
그 당시에 비하면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이라 참으로 걷기가 편하다
어제(6월4일) 지리산에는 비가 상당히 많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등로는 촉촉히 젖어있고 공기는 상당히 맑다
앞서가던 진권아우는 벌써 도망을 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눈개승마(꽃말:산양의 수염)
미나리아재비과의 다년생 초본으로 은행나무처럼 암.수가 구분되어 있다
비슷한 꽃으로 눈빛승마, 황새승마, 나물승마, 촛대승마 등이 있으며
하얀꽃이 겹겹히 쌓인 모습이 겨울에 온 눈과 같다고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승마(升麻)는 식물체인 마(麻)를 나타내는데 옛날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가난한 부인이 병이 났는데 약을 지을 돈이없어 고민하던 중 지나가는 도사가
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이름도 없던 마종류의 풀을 달여 먹으라고 가르쳐 주고
떠났는데 그 풀을 달여먹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세석고원 정상(06:55)
우측으로 지리산에서 氣가 가장 세다고 하는 영신봉이 보인다
아마 사천의 와룡산 정도 되는 모양이다
綠陰에 묻혀버린 세석대피소
촛대봉 갈림길(06:57)
세석산장 아침만찬(07:10~40)
세석대피소로 들어서서 가져온 라면을 끓여서 훈제고기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다시 성삼재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세석대피소에서 올라오니 풍력발전기 2기가 굉음을 울리며 돌아가고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가시거리가 엄청나게 멀게 보인다
아침에 지나온 백무동 너머로 덕유산의 멋진 山群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보인다
영신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촛대봉과 세석고원의 모습
북에는 개마고원이 있다면 남에는 세석고원이 있다.
작은 돌이 널려있는 평지라는 뜻을 가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리산의 중심지이다
세석평전(1600m)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평원이다. 높은 산 고원 어디서 이런 습지가 있단 말인가!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아직도 세석에서 떠나질
못하는는가 보다 사랑의 힘이 이리도 무섭고 애절하단 말인가..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이 슬픈 사랑의 원인 제공을 한 그 넘의 호랑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지리산은 정말 올때마다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항상 기대치에도 어긋나지도 않고 말이다.
2주전에 촛대봉을 내려올 때는 짙은 박무로 인해 아무것도 못보고 거림으로 향했는데...
영신봉(靈神峰:1,651m:07:50)
신을 맞이하는 뜻이라는 봉우리로 지리산 주능선에 있는 봉우리중에
가장 영험한 기운이 모였다해서 명명된 봉우리로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대에는 지리산 10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영신봉의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세개골 상단에 영신사라는 절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좌고대와 창불대, 가섭상이라는 바위가 있다.
신 동국여지승람은 영신사 좌고대에 올라 3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을 이룬다고 하였다.
영신사는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세석평전 아래 음양수 아래 대성동의
큰세개골 위가 영신사 터라고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영신봉
지리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고 빨치산의 참상을 겪은 슬픈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산. 그러나 찌든 세속에서 중생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함을 주는 산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지리산의 모습
그렇게 잘 보이던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인 반야봉을 순식간에 구름에 가려 버린다.
마고할매의 심술인가... 부디 부탁하오...지리산의 멋진 仙境을 볼 수 있게 해주소서
1,556m봉(08:00)
등로에서 바라본 대성동골
대성동 전투가 6.25때 지리산 전투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이었다고 한다.
1952년 1월 17일 수도사단의 동계 토벌작전에 막바지에 몰린 빨치산들은
폭설로 인해 인근 빗점골, 거림골 등의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도망쳐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도사단 토벌군은 중무장한 야포와 박격포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러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미군 비행기들이 휘발유가 가득 드럼을 온 산에 떨어뜨리고 포탄과 총격을 가해 눈이 내려
정결하기 이를때 없는 설원은 피범벅이 되어 아비규환의 땅이 되어 사흘이나 계곡을 적셨다고 한다.
남부군은 대성골의 참패로 인해 몰락의 길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휩싸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리산의 넔이
되버린 저 民草들의 흐느낌이 70여년이 된 아직도 아직도 범여의 깃가에 맴도는 같구나
영혼이여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제 모든걸 잊버리고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마시고 부디 西方淨土로 가시길...
부디 왕생극락 하옵시고.
지리산 대성골에 피바람을 몰고온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강원도를 출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었다는 詩가
대성동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非凡非聖(비범비성)이여 : 범부도 성인도 아니며
一法不修(일법불수)이니 : 한 법도 닦을것이 없으니
一塵一色(일진일색)이 : 한 티끌 한빛같이
總是一佛(총시일불)이로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도다
菩提煩惱不二(보리번뇌불이) :깨닭음과 번뇌가 둘이 아니며
煩惱本來空寂(번뇌본래공적) : 번뇌는 본래 텅비고 고요하니
大道曉在目前(대도효재목전) : 큰 도는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는데
將道更欲覓道(장도갱욕멱도) :도를 쥐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네
최근에 진권아우와의 자주 산행을 하는데... 늘 고마운 후배이다
오늘 지리산의 가시거리는 엄청나게 좋다... 저 멀리 광양의 백운산과 하동의 금오산도 보인다
칠선봉(七仙峰:1,558m:08:25)
일곱개의 바위가 기묘한 암봉으로 서 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천상에서
내려온 칠선녀가 한자리에서 노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망바위에 서 있는 안내판
망바위(08:35)
지리산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울 엄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포근하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같은 산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늘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여유로움
언제든지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안아주는 여유로움을 가진 산
그런 지리산은 옛날 신선이 내려와서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중의
하나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사는 산”의 뜻이라는 지리산(智異山),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내려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란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소(沼)를 품은 산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1967.12.29)으로 지정되었고 쌍계사와 화엄사, 실상사
대원사 등 수많은 고찰들은 품은 산,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이데오르기의 산물로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군 유격대의 근거지가 되어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이데올르기의 제물로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의 영혼을 감싸안은 슬픈 산이기도 하다
조금전에 지나온 영신봉과 칠선봉이 금방 구름에 기려 버린다
저 아래 어느 골짜기에 서산대사가 출가했다는 원통암이 있는 곳이겠지
원통암은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된 암자로 의신마을 부근에 있던 의신사 31개 산내암자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다 폐사되고 원통암만 복원되었다고 한다.
서산대사(1520~1604)는 1534년 원통암에 출가해 이곳 주변 암자를 돌며 수도했다.
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18년간 지리산에 머물렀으며 지리산에서 도를 깨쳤고 금강산에서
수양하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을 조직하여 전쟁에도 참여했고,
사명대사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선가귀감을 저술하는 등 조선불교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서부터 성삼재까지 진권아우와 헤어져 걷는다
젊은것이... 형님을 버리고 혼자 걷다니... 니는 안 늙을줄 아느냐
거기다가 오늘은 지리산 태극종주를 하는 울트라 산행팀들이 계속 달려 오는
바람에 산행 속도는 자꾸만 느려지는데 진권아우는 보이지도 않는다
산함박꽃(꽃말:수줍음)
함박꽃나무는 예로부터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쓰였는데
목란은 향기가 나서 꽤 고급한 목재로사용하였다 한다
선비샘에 도착하니 많은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선비샘(1,443m:09:10)
옛날 덕평골 화전민 이씨 노인은 평소 천대와 멸시를 받고 살았는데 죽어서라도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 자식들에게 자신을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노인이 죽자 자식들은 샘터 위에 묘를 만들었는데 샘터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고개
숙여 물을 마시니, 무덤에 절하는 형상이라 죽어서 존경 아닌 존경을 받고 있는 셈이다
살아생전 얼마나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면 죽어서라도 억지 존경을 받고 싶어 했을까.
그 한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그 후로 동네사람들은 덕평봉 아래에 있는 샘터의 이름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배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걸을수가 없어서 등로를 이탈하여 볼 일을 봤지만 계속 배는
아파오고... 그렇게 하여 볼 일을 본게 노고단까지 6번의 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버리는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참으면서 능선에 오르는데 이곳 정상이 덕평봉인데 정상은 오를수가 없다
덕평봉(德平峰:1,522m:09:20)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상덕평 마을위에 있는 봉우리로 아마 지명은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이 봉우리 아래에서 우회한다
쉼터(09:30)
뒤돌아 본 오르지 못한 덕평봉
멧돼지의 횡포
대성골과 빗점골, 의신마을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덕평봉과 멋진 바위가 있는 쉼터를 지나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온데 오공능선 갈림길이다
오공능선 갈림길(09:40)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새벽에 오른 백무동 앞에 있는 오공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출입금지란다
오공능선의 공터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 가는길은 지리산 등로중에서 가장 편안 길인듯 싶다
벽소령가는 길은 낙석이 떨어지는 지역이라 조심해야할 구간이다
조금전에 걸어왔던 지리능선은 또다시 짙은 구름에 휩싸여 버린다
그러다가 금새 지리능선은 속살을 보인다...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피의 능선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1952년 지리산에 숨어 들어 저 곳 대성골과 빗점골, 의신마을로
은거하고 있을 때 군경 토벌대의 공격으로 명선봉쪽으로 도피하던 중 군경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필사의 탈출을 했으나 대분분 전멸한 저곳... 그래서 피의 능선으로 불리는 곳이다
해방 후 좌익이란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남부군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주변 강국들에 의해 잘못 줄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이태 남부군)...
62년 전 처절했던 전쟁의 상처는 저 대성골 안에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한다
벽소령(碧宵嶺:1,350m:10:00)
이 고개에서 보는 달빛이 희고 맑아서 푸른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벽소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는 옛 6.25당시의 벙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남쪽계곡이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 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벽소령(碧宵嶺)은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가 높고 푸른 산릉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자꾸만 배는 아파오기에 또다시 해우소에 들렸다가 오는 사이 시간은 지체되고...
몇번을 볼일보고 나니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서서히 체력저하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석문(10:15)
전망바위(10:25)
전망암 바로 아래로는 해방이후의 좌.우 이념에 휘말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아무 말이없는 지리산 능선의 삼태골과 절골, 대성동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남해바다가 보이며 바다너머로는 사천 와룡산, 그리고 남서쪽으론 광양 백운산이 보인다
형제봉 이정표
형제봉(兄弟峰:1,452m:10:40)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이곳 달빛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벽소령의 명월보다 못지않다.
태고의 정적과 고요 속에 구상나무 숲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고, 창백한 달빛과 은하수가 아름답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고도를 계속 높이는데 암릉구간이라 무릎의 통증도 시작된다
형제봉을 지나 암릉구간을 빡세게 오른 다음에 내려서니 커다란 암릉이 나오고
넓은 공터에 도착하니 연하천에서 오는 등산객들이 지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멋진 암릉을 만나지만 오르지 않고 우회하여 걸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해방이후의 좌.우 이념에 휘말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아무 말이없는 지리산 능선의 삼태골과 절골의 모습
여인의 乳頭처럼 생긴 산함박꽃 봉오리
석문을 통과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산꾼 범여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한다
석문을 돌아서니 편안한 등로가 나오고...
이곳은 산함박꽃이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삼각고지(三角高地:1,462m:11:15)
함양군 마천면 심정마을에서 연하천으로 오르는 직등 코스로 6.25 동란 당시
군사 요충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봉우리로서 근처에는 그 당시 벙커의
흔적과 총알을 맞은 나무도 보이고 당시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 현상이
사살 당하기 직전까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밋밋한 능선에 지리 01-24 이정목이 서있고 좌측 능선은 삼정산 가는 길이기도 하다
삼각고지에서 조금을 내려서니 음정마을 갈림길이 나온다
음정마을 갈림길(11:20)
음정(陰丁)마을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속하는 마을로 양정,
하정마을과 함께 삼정리로 들어가며 마을의 위치가 음지에 취락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음지정제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음지말 남쪽 골짜기를 비내리골이라 하는데 옛날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나뭇꾼과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남편과 아들이 하도 원통하여 눈물을 흘려서 비내리골
만들어졌으며 그 자리에서 바위로 변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벽소령 정상에는
부자(父子)바위가 서 있다고 한다
음정마을 갈림길을 지나니 국공파들의 초소하나가 홀로가는 범여를 째려보는듯 하다
평지에 가까운 등로를 따라서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빠르게 걷는다
연하천(煙霞泉) 대피소(11:35)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여 연하천(烟霞泉) 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례에 있는 연하반 산악회(현 지리산 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다.
‘구름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연하천의 샘물은 사계절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지역 자체가
고산지대임에도 늪지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항시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글 이원규, 노래 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연하천 대피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데 생각보다 춥고 바람이 불어서
베낭에서 바람막이 자켓을 꺼내입고 휴식을 취하면서 주위를 살펴보지만
진권아우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나쁜쉐이... 만나기만 해봐라...
잠깐 사이에 땀이 식은지라 추워서 견딜수가 없기에 다시 길을 나선다
나무계단을 따라서 올라서니...
반달곰과 만났을 때 대처하는 요령 안내판이 보인다
명선봉으로 오르는 길
명선봉(1,586m:11:50)
연하천 대피소 뒤의 봉우리로 산꾼들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있는 명선봉~삼각봉~형제봉~벽소령 능선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 국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어서 '피의 능선'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선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빗점골이라는 골짜기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알려졌다
가야할 토끼봉의 모습
잠시 편안길을 걷는다... 잠시 후 오르막을 오르는데 2년전 남진길에
단현님과 주원아빠 등 동료산꾼들과 아침상을 펼쳤던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당시 동료산꾼들이 그립다... 천리마님도... 천왕봉의 막걸리맛 아직도 잊지않고 있습니다
반야봉의 모습
반야봉(般若峰1,734m)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토끼봉 정상의 모습
토끼봉을 지나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하던 샘인 총각샘은 등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 발견한 샘인데 장터목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인 이름이라 해서 노총각 2명이
고심 끝에 총각샘이라 이름 붙였다 하는 샘을 찾으려고 주변을 살펴보지만 찾을길이 없어서 포기한다
토끼봉 정상을 내려서니 넓은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 이정표에 토끼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토끼봉 정상 아래에 있는 헬기장
토끼봉(卯峰:1534m:12:50)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 그러는게 아니고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좌측으로 반야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토끼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겨울에 한 번 불을 때면 3개월간 溫氣가 돈다는 ‘亞’자 방으로 유명한 칠불사가 나온다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
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우아할 뿐 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쉬어가기 알맞은 고봉이다. 정상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토끼봉에서 화개재 내려가는길은 여태껏 힘들게 걸어온 길을 쉬면서 걸어가기 좋다
좁은 소로에 철쭉을 좌우보처로 삼아 걷는데 날라리봉 너머로 왕시리봉이 아련히 보인다
내리막길에는 산불화재의 흔적이 보이고...
연하천 대피소에서 토끼봉을 거쳐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등산객 한명도
보질 못할만큼 나홀로 호젓하게 길을 걷는다... 사실 이 맛에 홀로 다니는거 아닌감
화개재로 내려서는 길에 반야봉과 삼도봉이 보이는데 시간상 반야봉에 오르기는 힘들듯 싶다
화개재(花開峙:1,316m:13:20)
화개재는 먼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한다.
먼 옛날 산내장터애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너무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서려있다.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이 곳 능선안부가 화개재이다.
화개재는 남원군 산내면과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속하고 뱀사골 정상인데
예로부터 양측 주민과 상인들이 물물교역을 위해 넘나들던 길목이다.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긴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해 가을에 걸었던 뱀사골 가는길
1970년대 가수 김상진이 불러서 히트를 친 “이정표 없는 거리”라는 노래가 있다
이리가면 고향이요... 저리가면 타향인데...로 시작되는 노래의 가사를 지은 이가
진주 출신의 박대림씨었는데 그가 1970년 봄 뱀사골에서 화개재로 올라오면서
여기 서있는 이정표를 보고 지리산의 장쾌함에 감동해 가사를 썼다고 한다
지나온 토끼봉의 모습
설사의 영향인지 체력은 바닥나기 시작하고 갈길은 먼데 다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삼도봉으로 오르는 548계단이 시작되는데 힘이 들어서 도저히 더 걸을수가 없다
계단 중간의 쉼터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먹는게 겁이난다
그래도 어쩔수가 없다... 오렌지 쥬스하나에 초콜렛으로 허기를 면한다
능선 암릉사이로 바라본 칠불사 계곡
삼도봉(三道峰:1499m:13:55)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삼도봉 정상에서 반야봉을 배경으로...
해발 1,732m로 지리산 3대 주봉 중 하나인 반야봉은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봉우리이다.
천왕봉과 노고단, 만복대 등 지리산의 중심에 있어 지리산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맑은 날이면 무등산과 덕유산까지 보이고,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落照)는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이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1.3km 거리에 있는 반야봉의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이 상록 원시림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반야봉 남쪽 중턱 경사진 고원은 철쭉군락지로 5월 하순경이면 붉은 철쭉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날라리봉 능선
피아골과 목통골의 경계...아니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일명:날나리봉)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촛대봉이 보이고... 바로앞 영신봉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 능선도 장쾌하다
목통골의 모습
반야봉의 전설
반야봉에는 지리산 산신 중 여신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 또는 마고할미, 노고할미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의 딸이다.
그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으며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팔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
이정표에는 노고단까지 거리가 5.5km라고 적혀 있는데 보이는 노고봉은 멀게만 느껴진다
삼도봉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데 대구에서 왔다는 산악회원들이
간식을 먹으면서 술과 과일을 권하는데... 예전 같으면 안 주면 빼앗라도 먹으련만
지금은 주는데도 그리 반갑지 않으나 예의상 과일만 먹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성삼재로 향한다
무명묘지(14:08)
반야봉 갈림길(14:10)
서울로 가야하는 차량시간 때문에 반야봉은 포기하고 노루목으로 향한다
반야봉 갈림길에 서니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꼭 반야봉을 가야 하는데...
여기서 반야봉을 갔다오면 왕복 1시간... 그러면 서울로 복귀하는걸 포기해야 한다
작년 10월에서 뱀사골에서 피아골 산행때 반야봉 오른걸로 대신하고 성삼재로 향한다
노루목 (1498m:14:20)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한다.
또 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반야봉가는 갈림길이다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일부러 가기에는 그리 쉽지않는 봉우리이다.
노루목을 지나면서 지나온 등로와는 달리 길은 상당히 유순하다
호젓한 산죽길을 따라서 빠르게 걸어야 하는데 체력저하로 생각만큼 속력이 나질 않는다
쉼터(14:27)
산꾼들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나무
얼마나 시달렸는지 발가 벗긴채로 生을 마감했다
임걸령(林傑嶺:1,320m:14:45)
조선 선조때의 좀도둑인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그가 활동한 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이곳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임걸령 이정표
임걸령 약수물
산꾼들에겐 지리산이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식수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700ml 수통으로 선비샘과 연하천에서 보충한 물이 모자라 이곳에서 보충한다
설사로 인해 6번의 볼일을 보고 나니 힘도 없지만 물을 먹는것도 겁이 난다
임걸령 아래 약수터에서 물을 보충하고 오는데 남,녀 등산객 3명이 휴식을 취하면서
징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따! 힘든디 사과나 하나 드시고 가셔’ 사과를 하나 건네준다
피아골 삼거리(14:55)
지리산의 단풍 산행코스로 유명한 피아골은 6.25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물들은
계곡이라해서 피아골로 불린다고 알려져있으나 피아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심었던 골짜기라,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피는
보이지않고, 빨치산과 토벌대가 흘린 수많은 피가 먼저 생각나는건 아마도 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피아골이란 유래는 옛날 속세를 버리고 이곳의 한적한 仙景을 찾은 仙客들이 이곳에서 오고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을 그 후 변음이 되어 피아골로 불렀단다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면서 높은 봉우리가 나오지만 정상을 오르지 않고 옆사면을 걸어가는데
서울대 남부학습림에서 설치한 국가장기생태 연구지 팻말과 함께 넓은 공터가 나온다
지리산 종주 몇번과 백두대간 몇번을 걸었지만 늘 이곳은 어둠속에 걸었기에 아무런 생각이 안 난다
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15:00)
방장산(지리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 이름이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국가 장기 생태 연구지를 지나니 넓은 헬기장이 나오는데 돼지평전이라 부르는 돼지령이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임걸령을 지나면서 이곳까지 오는데 등산객을 한명도 안보인다
돼지령(1,384m15:05)
돼지령 주변으로 여름이면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는데 멧돼지들이 원추리 뿌리를
캐먹기 위해 자주 출몰했는데 그런 사유로 돼지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노고단 가는 길에서 바라본 왕시루봉 능선과 피아골
예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마지막 회에 운무가 낀
설원의 산정에서 하림(박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인공 대치(최재성) 와 여옥(채시라)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촬영지가 바로 이곳 돼지령과 노고단 일원이었다고 한다
지리산답지 않게 길은 무지 좋으나 다리는 무겁기만 하다
헬기장(15:15)
등로에서 바라본 노고봉(길상봉)
노고봉(1,507m)은 천왕봉(1,915m)과 반야봉(1,732m)과 함께 지리산 3대봉우리의 하나로
옛날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老古)를 모시는 단(壇)이 있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곳은 고산지대로서 전망이 매우좋고 시원해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 수련장으로 이용
되었다고 하며과거 192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곳에다 건물을
짓고 여름을 보냈다고 하며 실제로 노고단 대피소 숲속 좌측에과 왕시리봉에 선교사들의
별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추강 남효온은 그의 지리산 기행록인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노고단을
고모당(姑母堂)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할미당이나 삼신할미당이란 뜻이다
한때 나라의 제사터였을지라도 그러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은 오래전에 맥이 끊긴 상태이라
‘노고’라는 말은 선도성모가 아닌 삼신할미로 보는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지대로서 약 30만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추리 군락과 각종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돌탑(15:20)
1970년대 초에 고교생들이 겨울 산행 도중에 이 능선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돌탑이란다
지나온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고할매의 은덕인가?
지리산에서 이렇게 遠景을 즐길 수 있다는건 크나큰 영광이 아닐까
아무도 없이 홀로 지리능선을 걸을 수 있다는 것도 영광이면 영광이랄까
노고봉으로 오르는 길은 반달곰 활동지역이라 출입금지란다
쉼터(15:30)
조팝나무
노고단이 0.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노고단 통제소(15:47)
부지런히 왔는데도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곳은 성삼재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등산객이 아닌 대부분이 트레킹족으로 성삼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온 사람들이다
뒤돌아 본 반야봉
지리산을 걸어면서 오늘처럼 가시거리가 좋은 날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런날에 반야봉을 오르지 못하고 온게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더군더나 이곳 노고단에서 지리 선경을 바라본 것도 처음이라 그런지 더욱 더 아쉽기만 하다
지리산 국립관리공단의 횡포
노고단에 도착하니 15시 50여분이 채 안 된 시간이다... 노고봉을 오르기 위해
죽기살기로 왔건만 이게 청천벽력같은 날벼락인가... 15시 30분이후로는 출입금지란다
난 그것도 모르고 베낭을 벗어놓고 부지런히 노고봉으로 오르려는데 국공파의 젊은 직원이
가지 말라며 제지를 한다... 일기도 불순하지 않고 이 좋은 날씨에 왜 오르지 못하냐고 항의를
하니 써 있는 팻말을 보란다... 자세히 보면 정말로 웃기는 짬뽕이다
이곳은 사고가 날만한 위험지대도 아니고 운동화 신고도 오를 수 있는 정말 편한 곳인데
10시에 개방하고 오후 3시반에 문을 닫는다니... 근무는 쥐 ㅈㅁㅋ 하고 민초들이
피땀 흘려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고...
정말 화가나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니 올라 가실려면 가시라... 과태료를 부과하겠단다.
그래... 과태료 부과할려면 해라 하고 항의를 하니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동조를 하면서
‘선생님 말씀이 맞다’고 일부 동조를 하는데 이 젊은 친구는 꿈쩍도 않고 앞길을 막는다.
갑자기 다리가 풀리면서 푹 주저 앉는다...너무나 맥이 빠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데 국공파들은 뭘 믿고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는지... 과연 이 나라에 저런 자들을 위에 세금을 내는
내 자신이 갑자기 서글퍼지며... 한없이 나약한 나 자신에 화가 치민다
국립관리공단을 산하에 두고 있는 김종덕 문화관광부 장관님!
혹 환경부 산하인지는 모르겠으나...
7년전 모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북진을 함께했던 범여입니다
혹시 이 글을 접하시거던 꼭 노고단에 들리셔서 현장을 확인하시고
문제점이 있어시면 시정조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10분간 국공파 직원과 실랑이를 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약이 오른채로 성삼재로 향하는데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 나라 공무원들... 당신들 정말 국민들을 주인으로 생각하는거 맞소?
민초들의 피땀으로 녹을 받는 자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한 짓거리... 언제쯤이 안볼까.
최근에 구의역에서 발생한 사고로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김모군 사건
이 사건 뒤에는 메피아라는 듣도보도 못한 희안한 단체가 있고, 그 외도 0피아, ×피아, ?피아
같은 공무원 조직의 이익단체 때문에 민초들이 겪는 피해... 언제까지 계속 되려는지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노고봉의 모습
지리산 3대봉중의 하나이며 지리십경 중에 제3경인 노고운해(老古雲海)가 펼쳐진다는 노고봉
오르지 못하고 한없이 바라만 보다가 성삼재로 향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하다
내 나라 내 땅을 맘대로 밟지 못하는... 버러지만도 못한 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오늘같은 날 저곳에 오르면 섬진강이 흐르는 지리산군들이 한폭의 동양화 같을텐데...
노고단을 내려오다가 하도 약이올라 저쪽으로 가서 옆사면으로 치고 올라볼까
생각도 해봤지만...다 부질없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성삼재로 향한다
노고단 대피소(16:10)
무넹기 고개(16:15)
무넹기 고개(코재)가나온다. 무넹기는 '물이넘쳐 마을로 들어온다' 라는 뜻을가진
"무너미"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데 그 가파름에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 코재 ' 라고 하기도 한다
지리산 남부 탐방소 김승완님의 고견에 의하면
" 코재 " 의 유래는 노고단을 얼굴 전체로 보면 코에 해당하는 부분의 위치에 있어서 코재라 불려진다고 한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코재 위에 눈썹 바위가 있고 무넹기를 전라도 방언으로 ' 데망생이
'( 표준어: 이마 ) 라하니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코재라는 유래 보다 현재의 위치가 코에
해당한다는 유래가 신빙성이 더 있지 않나 싶다. (자료 인용)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화엄사 가는 길이 나오고 남서쪽으로는 갈 수 없는 종석대가 있다.
성삼재 탐방지원센터(16:28)
무넹기 고개를 지나는데 칠선봉을 지나면서 헤어진 진권아우한테서 전화가 온다
‘형님 어딘교?’하면서 전화가 온다... 16시 40분가 와있는데 이 버스 다음에는 18시 20분 차란다
이곳에서 베낭을 동여메고 목숨을 걸고 달리기하여 약 2km를 13분만에 내려오니 숨이 막힌다
성삼재에서 구례가는 버스(16:30)
성삼재에 도착하니 구례가는 버스가 시동을 걸어놓고 있다
버스는 타자마자 성삼재를 출발하여 화엄사를 거쳐서 구례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서울가는 표를 예매하려니 오늘 서울가는 버스표는 매진되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어 택시를 타고 구례구역으로 향한다
구례구역 입구의 모습
구례구역(求禮口驛:17:40)
구례구역에 도착하여 열차표를 예매하려니 이곳도 처음에는 입석표도 없다고 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잠시 후 직원이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취소된 표가 있다고 하는데
요금이 비싼 KTX 열차표란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땐가...난 용산역을 예매하고
진권아우는 수원에 서는 KTX가 없어 관광열차를 타고 따로 귀가를 한다
구례구역의 안내 표시석
차표를 예매하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플렛홈으로 향한다
구례구역을 출발하여 정확한 시간에 용산에 도착하여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좀 안된 시간이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3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제8구간 - 안성탐방지원센터에서 빼재까지 (0) | 2016.08.01 |
---|---|
백두대간 제7구간 -육십령에서 안성대피소까지 (0) | 2016.07.25 |
백두대간 제4구간 - 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0) | 2016.07.17 |
백두대간 제3구간 - 성삼재에서 여원재까지 (0) | 2016.06.13 |
3번째 백두대간길을 나서다 (0) | 2016.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