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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4구간 - 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by 범여(梵如) 2016. 7. 17.

동편제의 本鄕 운봉의 대간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6년 7월 17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높은 습도...약간의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0km / 8시간 15분소요

☞ 참석인원: 젠틀맨님, 진권아우와 함께

☞ 산행코스: 여원재-안부-장재마을-장재-562m봉-안부-592m봉(방아산성 갈림길)

              방아치-785m봉-필바위-고남산-헬기장-송신탑-도로-통안재-704m봉

              상사바위 갈림길-573.2m봉-무명봉-유치재-매요마을-매요휴게소

              매요교회-도로-유치삼거리-618m봉-가산성지-방현고개-628m봉

             사치재-헬기장-민둥봉-폐헬기장-암봉-697m봉-폐헬기장-새맥이재

             무명봉-781m봉-안부-돌탑-아막산성터-너덜겅-시리봉갈림길-601m봉

             옛복성이재-농장도로-무명봉-복성이재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이백면, 산동면, 운봉읍, 아영면 / 장수군 번암면 
오늘이 제헌절 68주년이자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初伏이다

 

제헌절... 법의 제정하는 여의도의 지체높으신 분들은 안 지켜도 되는 것이고

법을 집행하는 검찰이라는 조직 중에서도 높은 자리인 검사장이라는 분은 불법으로

주식을 취득하여 아둔한 범여로는 상상도 안되는 엄청난 금액의 이익을 취했다가

감방에 수감되는 치욕...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왜들 그리 욕심을 내시는지... 저승갈 때 동전한닢도 못가져 갈걸

 

한달만에 다시 대간길을 나선다

오늘은 나하고 낙동, 호남정맥과 진양, 팔공, 호미, 금남기맥을 같이 걸었던 남원땅으로 귀촌을 한

젠틀맨님의 초청을 받아 남원으로 가서 1박을 한 후 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구간을 하기로 하고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남원가는 버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업무를 종료하고 서둘러 베낭을 챙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진권아우가 먼저 도착하여 나를 기다린다... 16시 60분 남원행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호남고속도로를 지나 익산~광양간 고속도로 오수I.C를

빠져나와 공사중인 국도에 접어들면서 춘향이의 고향 남원땅으로 들어선다

남원고속버스 터미널(19:50)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정확하게 3시간 10분만에 남원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젠틀맨님 부부가 차량을 대기시켜 놓고 우릴 기다린다

오랫만의 해후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젠틀맨님의 자택이 있는 이백면으로 향한다

젠틀맨님 집에 도착하다

남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7분거리인 남원시 이백면 계산마을로 2년전에 귀촌한

젠틀맨님 집에 도착하여 사모님이 준비한 저녁을 먹으면서 둘이서 소맥을 말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꽤나 많은 술을 마시고 밤 11시경에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본 젠틀맨님의 전원주택(05:20)

04시 30분에 일어나 씻고 거실로 내려오니 박여사님(젠틀맨님의 어부인)께서 속을 풀라고 누릉지를

끓여서 주는 바람에 그걸 먹고나니 속이 한결 편한 느낌이다... 그리고 젠틀맨님이 오늘 백두대간길에

동행을 하니 박여사님께서 3인분의 점심에다 막걸리, 과일까지 바리바리 싸준다

그리고는 손수 운전하여 집에서 10분 거리인  여원재까지 태워다 주니 오늘은 양넘 지갑 줏은 느낌이다

여원재(女院峙:480m:05:30)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하며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24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서편에 구릉을 이룬 곳이 운봉읍이며

섬진강의 상류가 되고 이 지류가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진다.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엔 함양. 운봉. 남원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 이기도 하였다.

 

 

고려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이 성계가 이 재에 도착했을 때

백발의 할머니가 나타나 그대들의 용모와 지혜가 뛰어나 지리산 신령님의

도움으로 크게 무찌르리라는 할머니의 예언대로 이곳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성계가 그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여원치(女院峙)

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학란 때도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치열했다는 곳이란다.

 

 

원래 연재(鳶峠)라 불렀으나 여원재로 이름이 바뀐 것이며, 고개 마루턱에 여신을 수호하는

산신각이 있어 그곳을 여원(女院)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여원재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말 이성계장군이 운봉현까지 내려와서 그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던 왜구를 무찌를 때, 꿈에 여신이 나타나서 이성계에게 길을 인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신은 함양(咸陽)에 살던 청상과부로 왜구의 우두머리 아치발도(阿只拔都)가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칼로 더럽혀진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 후 원수를 갚고자 이장군의 꿈에 현몽하여 여신으로 나타나 전략을 알려주어서 적장 아치발도를 죽게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훗날 이성계는 이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여원이라 불렀다 한다.

여원재에 있는 雲城大將軍 벅수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이 벅수가 세워져 있는 마을은 천석꾼과

만석꾼 등 부자들을 배출한 마을로 꽤나 부자 동네가 많다고 한다.

이곳 남원시 운봉읍은 넓은 고원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부자들이 많은 곳이라 한다

젠틀맨님과 진권아우가 벅수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여원재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이곳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5:40)

도로에서 올라서니 풀섶에 있는 여원재 이정표(←유치삼거리 10.5km →노치샘 6.7km)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2014년 3월에 남진길에 이 길을 걸었으니 거의 2년반에 다시 이곳을 지나가니 감회가 새롭다

안부(05:45)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산행을 시작한 지 5분만에 바지가랑이 다 젖어 버린다 

등로에서 바라본 장동마을(운봉읍 장교리 소재)

장교리(長橋里)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지형이 긴 다리와 같다고 하여 장다리 또는 장교리라 하였다.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펴보니 고남산() 줄기가 마을까지 뻗어 내린 모양이 마치 긴 교량을 가설한 듯

하므로 마을 이름을 장다리라 하였고, 이 마을은 장차 이씨와 김씨의 터가 될 것이라는 예언했다고 한다.

장동(獐洞)마을은 예로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장동이 되었고 연동(蓮洞)마을은 연꽃 형국의 길지라 해서 연골, 연동

또는 삼막, 산막이라 하였다

밭 가장자리를 걸어가다 내려서니 좌측으로 이백면 강기리로 내려서는 포장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밭 가운데로 올라서야 백두대간 길이다... 지난번 남진길에는 한 겨울이라

밭 가운데로 걸어 왔지만 지금은 농작물이 심어져 있고 촌로들이 밭에서 일을 하신다

촌로가 저렇게 힘들게 농사를 짓고잇는 밭 가운데로 간다는 건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우측으로 돌아서 장동마을로 들어 왔다가 장재(치)로 올라와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장재(獐峙:485m:05:55)
운봉읍 장교리 장동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로서 지세가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장동이 되었다

마을 벗어나 본격적인 백두대간 등로로 올라선다

등로로 접어드니 어제 온 비의 영향인지 안개가 끼여 있긴 하지만

산행하는데는 더 없이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가선대부를 지낸 김해김공과 배부인 경주 김씨 묘지를 지나 올라서니 야트막한 봉우리가 나온다

562m봉(06:05)

562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좌측으로 묘목을 심어논 밭이 나오고...

안부(06:10)

안부를 지나니 십자길이 나오는데 아랫쪽으로는 장교리로 향하는 길이고 우측에서 살짝 꺽어진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좌측엔 전주이씨 묘지가 나온다 

우측으로는 묘지와 송전탑이 지나고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남원시 운봉읍(雲峰邑)

동쪽으로 동면()·산내면(), 서쪽으로 산동면()·이백면(),

남쪽으로 주천면(), 북쪽으로 아영면(面,)장수군 번암면()과 접한다.

1995년 3월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에 덕두산(:1,150m)·비대봉(1,165m)·

세걸산(:1,207m) 등 1,000m 이상의 지리산 자락, 서쪽에 고남산(:846m)·

여원치(:480m) 등이 솟아 있으며 지형적 영향으로 고랭지 기후

를 나타내어 눈도 많이 내리고 여름철도 서늘하여 25℃ 이상의 기온이 드물다.

 

동쪽의 높은 산에서 넓은 분지로 용산천()·동천() 등이 흘러 개석()하면서

골짜기를 만들고 퇴적물이 그 주변에 엷게 덮여 있다. 풍부한 수원()으로 벼농사가

발달하여 전북에서 추수량이 가장 많아 그해 작황의 예상지표가 되나 냉해가 잦다.

 

산기슭의 완사면에는 면양 목장이 있고, 마늘·고추·배추 등의 고랭지 채소가 생산된다.

광주∼남원∼대구 간 국도가 통과하며, 동쪽의 동면에 위치한 팔량치()가 전북과 경

남의 교통로가 되어 양도의 문화적 접촉지역을 이룬다. 목기()가 특산품으로,

1994년 장교리()에 목기특산단지가 조성되어 10여 개 업체가 가동중에 있다.

문화재로는 황산대첩비지(:사적 104), 남원 서천리 당산(西:중요민속자료 20), 운

봉향교대성전(殿:전북문화재자료 50), 운무사, 장교리 합민성(), 수미성() 등이 있다.

비에 젖은 며느리 밥풀

다시 묘지지대를 지나니 592m봉 갈림길이 나오는데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가 서 있다

592m봉(06:25)

2번의 백두대간을 걸어면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정표가 서 있는데 방아산산성이란다

방아산 산성이란 처음 들어온다... 원래의 지명은  장교리 산성이며 합민성이라고 하는데

새로 설치한 이정표에는 방아산 산성이라 해서 혼란스럽다. 자료를 함 찾아봐야겠다

 

남원 장교리 산성은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북서쪽에 있는 해발고도 595m의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으로 긴 사다리꼴이며 현재 길이 3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벽 높이는 약 4m이고 판상할석()을 이용하여 내탁법(외부 성벽만

돌로 쌓고, 내부 성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축조법)으로 축조하였다.

산성의 서남쪽 귀퉁이에 누각을 세웠던 흔적이 있으며, 동문·남문·서문의 터와

건물터·우물터 2개소·적대 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적대(;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는 장방형으로, 외벽 바깥으로

10~12m 정도 돌출되어 있고 성터에서 삼국시대의 기와편과 격자문·승석문(삿무늬·노끈무늬)이

새겨진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운봉면 장교리에 있고 합민성()이라 한다.

석축 둘레는 200간이고,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방아치(06:28)

592m봉에서 3분정도 지나니 펑퍼짐한 안부가 나온다

예전에는 무심코 그냥 지나간 곳에서 얼마전에 방아치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공원을 가로 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다

1894년(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당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통과하였다

 

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하였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방아치 안내문

방아치에서 오늘 처음으로 선 채 1~2분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파리버섯

독성이 아주 강한 식용불가한 버섯으로 국내에서는 살충제가 나오기 전부터

파리버섯을 따다가 밥에 비벼 놓으면 파리가 이것을 빨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오름길에서 비에 젖은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솔향이 참으로 상큼하다

묘지를 지나...

785m봉(06:50)

등로 가운데에 있는 金海金公의 묘지를 지난다

다발방패버섯

달걀버섯

달걀버섯은 어릴 때는 달걀 모양으로 흰색 주머니 속에 싸여 있다가 위쪽을 뚫고 땅 위로 화려하게 솟아나온다.

표면은 화려한 노란색·등황색·선황색이고 충분히  펴진 갓은 편평하며 가운데가 약간 볼록하고 둘레에는 방사상의 홈 줄이 있다.

동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에 분포,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식용버섯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에 따라 달걀버섯 또는 계란버섯으로 불리는 반면 유럽에서는

‘카이사르(Caesaria)’, 영어로는 ‘시저’라고 불리는데 버섯 중에 제왕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 버섯은 제왕(帝王)버섯, 황금버섯이라고도 한다.

함암작용 등이 입증되면서 현대인들에게 건강식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버섯은 예로부터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맛과 향, 영양면에서 완벽한 식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진시황제가 찾던 불로초가 영지버섯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버섯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식품으로 인정받아왔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평민들에게 버섯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시대에 네로 황제에게 버섯을 진상하면 그 무게를 달아

같은 양의 황금을 하사했는데, 그 버섯이 바로 달걀버섯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S라인 소나무가 있는 암릉을 지나면서 먼저가던 젠틀맨님이 베낭을 내리고 판을 벌인다

참 오랫만에 같이 마시는 막걸리

서울에 살때 어는 누구보다도 정맥, 기맥, 지맥을 많이도 같이 탔던 젠틀맨님

여전히 酒님을 즐기신다...이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이백 막걸리

후배 산꾼 J.R아우님 고향이 이곳 운봉인데 꼭 추천했던 이백 막걸리

박여사께서 싸주신 과일에다 막걸리 서너잔을 연거푸 마시니 기분 쿨하다

마음이 통하는 동료와 마시니 더욱 더 꿀맛이다...젠틀맨님 감사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여원재에서 홀로 대간을 하신다는 분을

만나서 같이 길을 걷는다 

풍선끈적버섯인가?...아리까리하네

필바위(07:30)

늘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진권아우...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밝다

요즘은 왠일인지 술을 입에도 안대니 술 욕심이 많은 범여는 요즘 횡재를 한다

오늘도 젠틀맨님과 막걸리를 둘이서 독차지하는 행운(?)을 누린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짙은 안개에 휩싸인 고남산 정상이 나온다

고남산 정상의 모습

고남산에서 바라본 권포리와 지리산 능선은 모든게 햐얀 여백이다

고남산 정상에는 정작 있어야 할 정상석은 없고 산불감시초소와 통신탑,

대삼각점 그리고 예전에 없었던 고남산제단지 안내판이 안개속에 휩싸여 있다

고남산 정상 대삼각점

고남산 정상으로 오르자마자 갑자기 산불감시초소 뒤쪽의 시설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산불조심 하라는 여성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흘러 나온다... 이것 역시 2년전엔 없었다

고남산제단지(古南山祭壇地) 안내판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가 인월역에 진을 치고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고려군을 지휘하고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 장군은

이곳 고남산에 석축을 쌓고 필승의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남산 주변으로 남아있는 석축제단은 그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주위 사물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고남산 정상에서

오랫만에 3명이 인증샷을 남기고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백두대간 북진길(1차)때의 자료

고남산을 중심으로 남원지역 곳곳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듯 하다.

지난 구간에 걸었던 지리산의 성삼재, 정령치.팔랑치가 기원전 삼한의 전장(戰場)이었던 데 비해, 여원재를

중심으로 한 고남산 주변은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요, 노략질에 눈 멀었던 왜구들의 무덤이 아니었던가.

무장(武將 , 려말 이성계))은 고남산의 기를 빌어 왜구를 섬멸했고,

고산자 선생은 이곳에 서서 대동여지도에 넣을 곡중분수령을 찾아 지리산을 찾아들지 않았을까?

 

고남산(古南山:846.4m:07:40)

남원시 산동면(山東面) 부절리(釜節里)와 운봉읍 권포리(權布里)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태조봉(太祖峯)·고조봉(高祖峯)·제왕봉(帝王峯)·적산(赤山)·일광산(日光山)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앞의 것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들이다.

 

아침에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빛나 일광산이라 하고, 저녁이면 노을에 붉은 빛을 띤다 해서

적산이라 불렀다.

 

남쪽으로 반야봉을 비롯 수정봉이 보일 듯 말 듯 동쪽으로는 운봉 평야가 있다.

이 산의 고도는 846.5m에 지나지 않지만, 송신탑이 말해주 듯 중요한 통신시설의 한 곳이다.

이 산은 또 "운봉평야"에 우뚝 솟아올라서, 예부터 전쟁터와 격전지의 방어선이 되곤했다는데,

지역 주민들이 "고남산"을 "태조봉"이라고 불렀다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왜구 2천명을 이끌고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에 맞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변안렬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출발하여 전주 한벽당에 잠시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한 뒤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면서,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패랭이꽃(꽃말:순결한 사랑)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산수국

하늘나리

헬기장(07:40)

헬기장에서 대간길은  KT송신소가 있는 우측으로 가야하나 좌측으로 내려선다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도로 우측으로 잠깐 올라섰다가...

적사함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도로에서 바라본 KT 송신소

안개에 휩싸인 松林은 운치를 더해주고...

도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통안재가 나온다

통안재(655m:08:00)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서 운봉읍 권포리와 임리를 잇는 고개로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란다. 고개 위에는 고남산 통신탑이

내려다 보고있고 서어나무들이 있는 넓은 공터가 보이며 이 지역사람들은

독골재라고 부르며 고남산 정상에 있는 KT송신소로 가는 포장도로이다

 

 

권포리(權捕里)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고남산 아래서 산신제를 올릴때 주둔하던 마을로

군사와 말을 샘터 주변에 터를 權氏 일가의 권세가 커다하여 권포리(權捕里) 하였다 한다

고남산이성계 장군이 왕업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하여, 일명 태조봉·제왕봉이라 하였다.

제왕봉은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인근 지형 역시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붙인 마을 이름이다.

삼봉 정도전이 권포리(權佈里)라 지었다 한다.

통안재에서 능선으로 오른 다음에 지루할 정도의 편안한 능선을 걷는다

704m봉(08:10)

등로에 묘지 한기가 보이고 좌측으로 밋밋한 봉우리가 보이는 곳이

704m봉인데 대다수의 대간꾼들이 그냥 우측으로 내려간다

상사바위 갈림길(08:25)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지나 운봉읍 임리에서 월석리로 통하는 고남산 송림속에

상사바위가 있는데 옛날 운봉읍의 한 마을에서 시집 못간 처녀가 상사병에 걸려

미쳐 돌아 다니자 보다못한 부모가 처녀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마을 뒷편의 큰 바위에서

 처녀를 밀어 떨어뜨리고 부모들도 자결을 하였다

이후 죽은 처녀는 커다란 지네가 되었고 이 지네가 풀섶을 지날때는 한길이 넘는

풀이 덜덜 떨린다고 하였다...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했는데 지금도 주변에 처녀의 머리카락이 있다고 한다 

접시껄껄이 그물버섯 (식용이 가능하다)

간벌이 된 우측 등로 너머로는 임리제(저수지)가 보인다 

573.2m봉(△운봉403 /1981재설)

573.2m봉에서 만난 대간꾼들의 흔적

좌측의 간벌지 너머로 2년전 백두대간 남진길에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도로가 보인다

영진 1/50,000의 지도를 찾아보니 새로 확장 개통된 88고속도로이다

어제 내린비로 인해 풀섶은 젖어있다

무명봉(09:00)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갑자기 시야가 확트이면서 임리마을이 보인다

농작물을 심어논 밭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남원시 운봉읍 임리(林里)는 마을 둘레 야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그 풍경이 일품이라 하여

 ‘숲머리’, ‘숲멀’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를 차용하여 임리()로 표기하였다.

또한 임리는 조선시대 현지 시찰을 위한 원님 행차 시 운봉 동헌을 출발하여 아곡()으로

넘어갈 경우 마을 앞을 지날 때쯤이면 꼭 점심 때가 되어 마을 앞에서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고 하여 밥재이들[식정()]이라고도 한다

유치재(柳峙:470m:09:05)

남원시의 운봉읍 임리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사이를 연결하는 고개로 버들재라고 한다.

백두대간 줄기로 북서쪽의 시리봉에서 산지가 이어지며, 동쪽으로 통안재, 고남산 등이 위치한다.

여지도서』(운봉)에 "유치(柳峙)는 황산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동일문헌 남원부의 기록에도 "팔량치와 닿아 있는 곳이며 영남으로 통하는 길이다.

관애를 만들어 방어할 만하다."라고 하여 그 이전부터 지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운봉 대부분의 지리지에서 유치가 수록되어 있다

 

포장도로가 나오고 매요마을로 내려가는 이곳이 대부분의 지도에는 유치재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범여의 생각으로는 지도상 오류가 아닌가 싶다.

유치재는 이곳에서 한참을 더가야 유치 삼거리가 나오는데 말이다... 매요마을로 내려선다

매요마을(남원시 운봉읍 소재)

매요리는 운봉읍 소재지에서 부터 4km 지점에 있으며 8번 군도가 마을 앞을 지나며

이곳에서 남역역까지 운행되는 버스가 있다 ... 백두대간을 통과 2개마을 중에 하나인 곳이다

마을 뒤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고남산과 황산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과 경계에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매요마을은 말의 허리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을 이름을 말마(馬), 허리요(腰)를 써서 '마요리(馬腰里)'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유정대사(惟政大師: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며

이곳 마요리에 머무를 때 지금의 마을 이름으로 바꿔놓았다는 애기가 전해지는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해서 눈속에서도 꽃이시들지 않고

순결한 향기가 난다는 의미로서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쳤다고 한다.

 

 

지리산 북쪽 운봉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동네이다

또한 이마을 우리나라 십승지중에 하나인 운봉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초석을 마련했던 황산대첩... 황산대첩비가 이곳에서 가까운 비전마을에 있다 

매요마을 버스 정류장(09:08)

매요마을 버스 시간표

매요리 휴게실(09:10 ~ 09:35)

백두대간 산꾼 치고 이곳을 안 거쳐간 산꾼이 있으랴... 산꾼들에겐 사랑방같은 곳이다

휴게실 쥔장인 신순남 할머니... 여전히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반갑기 그지없다

진권아우와 고남산 아래에서 만난 산꾼은 막걸리를 입에 대지도 않는 바람에

젠틀맨님과 나 둘이서 막걸리 2병을 게눈 감추듯이 해치운다

쥔장 할머니가 주신 묵은지 김치맛은 정말 일품이다

 

흔히들 남자 셋이 모여 군대 이야기하면 1박2일은 한다고 하지만

우리같은 맥산꾼이 만나면 기본이 5박6일이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다

오랫만에 젠틀맨과 어젯밤에 그렇게도 많은 산 이야기를 하고도 모자라

지금 이 시간에도 막걸리 마셔대면 이야기를 나누니까 ... 진권아우가

막걸리값을 내는데 쥔장 할머니와 실랑이다

2병값으로 만원짜리 한장을 냈는데 잔돈이 없다고 막걸리를 한병 더 먹으란다

그러니 아우가 나머지는 할머니 용돈하시라고 하니까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한사코 거절을 하면서 실랑이를 벌인다... 진권아우! 젊은것이 싸가지가 좀 있다

최근에 나와 많이 다니는데 예의도 바르고 산도 잘타고 맛이간 나하고 같이

다녀 주는것만도 범여에겐 행운이 아닐까?

할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막걸리 한병을 더 챙겨 다시 길을 떠난다

주막에서 나와 매요교회와 폐교된 운성초교를 지나니 확트인 시야가 나타난다

아마 저 어디쯤이 황산대첩으로 유명한 황산벌일 것이다

운봉하면 동편제의 本鄕으로 歌王 송홍록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판소리라 함은 이조 영조, 정조 때 가장 널리 보급되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주로 남자들이 부를 수 있었던 것을 이조말 대원군이 경복궁 경회루 落成式때

진채선이란 여성을 불러 소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 여성명창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며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강산제)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고 한다.

 

지리산을 휘감고 있는 남원은 역사와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송홍록,송만갑,김정문,이화중선,강도근,안숙선,오갑순,강정렬등 수많은

명인명창을 배출한 국악의 성지이자 판소리 동편제의 本鄕이다.

우리나라 고전을 대표하는 춘향전과 흥부전,현대문학의 걸작인 혼불의 무대이기도하다.

유치 삼거리(420m:09:45)

도로 좌측에는 사치마을 표시석이 있고 이곳에서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정목이 서있다

관리가 안된 묘지위로 오르니 건강한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솔향의 향기가 진하다

618m봉(09:55)

가산성지(佳山城址:09:55)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에 있는 삼국시대에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은 산성)으로 602년 신라

진평왕이 백제 무왕의 공격을 받고 축성한 4개의 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와 아영면 봉대리 그리고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경계지역에 있는

해발고도 550m의 산 정상부에 있으며 산의 동북쪽으로는 아영면으로 진입하는 사치재,

서북쪽으로는 운봉읍으로 진입하는 유치재가 이어지는데 가산성은 이 두 고개를

방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터의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 내리막길에는 최근에 쓰러진 소나무가 보인다

김해허공 가족묘(10:15)

젠틀맨님과 진권아우는 먼저가고 난 비가 온 뒤라 버섯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있어

그걸 카메라에 담으려다보니 자꾸만 일행들과 떨어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다

방현고개(10:15)

운봉읍 가산리 방현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가산이란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이며, 방현은 방을 붙인 고개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옛날부터 운봉 관아가 있는 운봉읍과 권농병마사가 있던 아영 지역의 중간

통로였기 때문에 이 고개에 운봉현 유생들이 과거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이 붙었는데,

이곳에 합격여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방을 기다렸다는 데서 유래한다

고개 아래로 보이는 운봉읍 가산리의 모습

방현고개에서 능선으로 접어드니 묘지가 나오고... 

628m봉(10:22)

올해 처음으로 영지버섯을 만난다

잠시 공사판 표지를 만나면서 내려서니 예전에 없던 동물이동통로가 보인다

사치재 동물이동 통로 윗쪽의 모습

예전엔 국도보다도 못한 88고속도로를 4차선으로 확.포장공사를 하면서

백두대간 지형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동물이동통로에서 바라본 88고속도로 지리산휴게소쪽의 모습

사치재(沙峙:500m:10:30)

전북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서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을 잇는 고개로

이슬재라고도 하며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사치(모래재 부락:장수군 번암면 소재)는 과거 백제의 영토였으며,

신라 영토인 가산리(남원시 운봉읍)와는 국경 분쟁지였다고 한다.

 

사치재는 옛날 전란시절 재 아래 숲 속에 몇 집이 살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이곳을 지나 갈 때에

이 마을 한 집에서 아낙네가 베를 짜고 있었다.

그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군사들이 하는 소리가 그 새소리 참말 처량하다

하면서 동리가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하여 모래재라 이름 하였다고 전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비안낙사(飛雁落沙)라 하여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형국이라 한다

사치재에서 철제 난간을 지나고 한참을 치고 오르니 에전의 백두대간길이 나온다

헬기장(10:45~11:10)

힘들게 올라와서 헬기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고남산 아래에서 먹다 남은 이백 막걸리로 다시 판을 벌린다

물론 젠틀맨님과 나... 단 둘이서... 그리고 이야기의 주 메뉴는 맥 산행에 대한 이야기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남원시내의 모습

남원시는 전북 동남부에 위치한 남원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발달하였고,

천헤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이 산재한 관광도시다.

지리산의 서북 관문인 남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진 곳이다.

벼 한말을 심으면 140두를 추수할수 있다는 축복받은 땅이다.

 

남원은 국악의 발상지이고 이성계의 이조 창건의 단초가 된 곳이며, 황산대첩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남원성싸움이 있던 곳이다. 삼국시대 남원성 서편에 만인의 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 은

정유재란때 전사한 1만여 명과 순절한 8충신을 합장한 무덤이다.

 

또 운봉읍 화수리에는 1380년 이성계,이지란장군의 황산대첩비가 세워져있다.(1577년 선조10년)

왜장 아시누키 미야코를 물리친 사실을 기념한것이다.

 

남원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이후 1300년간 지속된 지명이다.

남원은 옛부터 목기특산물,유배지,춘향전,기생이 유명한곳이기도하다.

지금 길을 걷고있는 이곳 운봉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판소리라 함은 이조 영조, 정조 때 가장 널리 보급되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주로

남자들이 부를 수 있었던 것을 이조말 대원군이 경복궁 경회루 落成式때 진채선이란 여성을 불러

소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 여성명창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며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강산제)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고 한다.

바로 아랫쪽에는 확장된 88고속도로와 지리산 휴게소가 보이고 그 너머로

운봉의 넓은들이 보이는데 옛날부터 이곳에 국경분쟁이 많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민둥봉(11:18)

7년전 북진길에 산불이 났던 지역인데 비록 잡목이긴 하지만 산림이 많이 복원된 느낌이다

폐헬기장(11:23)

암봉(11:25) 

새로 확장한 88고속도로의 모습

697m봉(11:30)

암봉을 치고 오르니 697m봉에 산꾼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등로에 숲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길이없는 지맥길 걷는거 비해서야 그야말로 고속도로다

폐헬기장(11:35)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인데 앞서가는 3명은 부지런히 가고 범여는 늘 꼴찌다

노루오줌(꽃말:쑥쓰러움)

뿌리에서 노루의 오줌냄새가 난다하여 노루오줌이라는 얘기도 있고

노루가 물 마시러 오는 물가에 핀다하여 노루오줌이라는 얘기도 있다

새맥이재(515m:11:45)

전북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에서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와 논곡리를 잇는 고개로 번암쪽으로는 임도처럼 보이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지만 아영쪽으는 등로가 보이질 않고 부산 낙동 산악회에서 걸어둔 표지판만 없으면

무심코 지니치기 좋을만큼 그냥 평범한 고개이다

 

아막성과 가까운 이 재는 신라와 백제가 땅따먹기 게임으로 밀고 당기며 싸우던 곳이요,

이성계는 이곳 남원땅을 침략하여 노락질을 일삼던 왜구를 물리치고, 조선 개국 발판의 시금석을 마련한 곳이

오늘 걷고있는 이곳 운봉땅이 아니였던가?

 

또한 개화기에 동학의 힘찬 민중이 마지막 항거로 쓰러져 누운 고개가 이곳이였으며 그리고 동족상쟁의

피비린내 속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오직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치산에 몸을 담았다가 이유도 없이 죽어간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고개이기도 한 곳이다

새맥이재 안내판

남의 집 월세살이가 힘드시지죠?

 

죽을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척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했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한통 하지 않을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면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닌것을...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새맥이재에서부터 계속되는 오름길

흐릿한 날씨는 맑아지고 햇살이 따갑긴 해도 간간히 송림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그래도 걸을만 하다... 여인의 젖가슴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는데 앞서가던 젠틀맨님과 진권아우가 등로에다 밥상을 펼친다

그런데 고남산 아래에서 동행한 산꾼은 그냥 가버린 모양이다

왜~~ 밥을 좀 먹이고 보내지 하고 젠틀맨님에게 이야기 하니 배고 안고프다고

하면서 그냥 갔다고 하는데 여기서 복성이재까진 그리 멀지 않지만 산행시

갑자기 허기가 지면 대책이 없는데... 베낭이란 뒷동산에나 갈때 메는 것이던데

걱정이다... 대간 선배의 경험이요... 특히 나홀로 산행시는 0.0001%의 변수에도 대비해야 하오

점심만찬(12:15~12:45)

박여사(젠틀맨님 사모)께서 바리바리 싸준 5가지의 반찬에다 많이 먹으라고

꾹꾹 담아준 도시락에 막걸리 한잔... 이렇게도 많은 음식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여기서도 젠틀맨님과 산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날줄 모른다

자주 내려와서 빈대 좀 붙겠소이다

 

젠틀맨님 집에서 하룻밤 묵고 시작해야 할 지맥이 견두지맥, 연비지맥과 백두대간 한 구간

운붕 십승지 3구간에다 웅석지맥 첫 구간까지 포함하면  앞으로 6번은 더와서 귀찮게

굴텐데 그때까지도 지금처럼 해줄란지... 아부 좀 해야겠다

그나저나 먼저간 산꾼이 이 많은 음식을 좀 먹고 갔으면 좋으련만... 잘 갔는지 걱정이다

여유있는 점심만찬을 즐기고 오르막길에는 암릉구간이 펼쳐진다

비비추(꽃말:신비한 사랑)

비비추는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뿌리는 한약 재료료

봄에 돋아나는 연한 잎은 데쳐서 쌈으로 먹거나 묵나물을 만들기도 하며 산지나 냇가와 같이 습기가

많은 곳에 잘 자라며 30~40cm의 키로 자라고 잎은 비스듬히 자라나며 잎은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8~9맥이 있다.

 

비비추 전설

신라 시대에 설녀라는 쳐녀와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났고 아버지도 군인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 설녀를 마음에 두었떤 청년이 찾아와 아버지 대신 병역을 가겠다고 합니다.

청년의 마음에 감동한 설녀는 청년이 병역을 마치고 돌아오면 혼인하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6년이 넘도록 청년은 돌아오지 못하였어요.

마을 사람들은 설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하였지만, 설녀는 청년만을 기다렸습니다.

청년을 기다리는 설녀의 집 앞 마당에 그윽한 향을 품는 보랏빛 비비추가 피어났꼬

이 꽃이 다 지고나면 혼인을 하겠다고 설녀는 사람들과 약속을 하였죠.

하지만 비비추는 피고 지고를 반복하였고 결국 3달이 지난 뒤 청년이 돌어와

설녀와 혼인을 하였다는 아름다운 전설입니다.

무명봉(13:05)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복성이재로 향한다

물봉선(꽃말: 나를 건드리지 마셔요)

S라인 소나무

뾰족한 바위를 지나니... 지도상 781봉이 나온다

781m봉(13:10)

781m봉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흥부마을로 향하는 길인 모양이다

까치수영((꽃말:동심)

안부(13:25)

아막산성 돌탑(13:28)

등로에서 바라본 흥부마을의 모습

아영면 성리가 흥부마을인데 우리나라 판소리중 '동편제'의 발생지라 한다.

또한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부가의 배경이된 마을이기도 하다

돌탑을 지나 편하게 걸어가니 등로 가운데 묘지가 나오고 묘지를 직진한다

아막산성 안내판((전라북도 기념물 38호:13:30)

안내판 뒷쪽ㅇ으로는 허물어진 채 망가진 아막산성터 돌들이 보인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동안 이 땅의 숨결이고 삶이었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들을 느끼며 아팠다. 지나온 시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고,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란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 수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일이다. 오늘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지나간 역사란 없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이다. 결코 잊혀 질 수도 없고 잊혀 져서도 안 되는 오늘의 일이다어느 지성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안내판 뒷쪽의 아막산성의 흔적

진권아우의 해맑은 모습

아막산성(阿莫山城) 터(630m13:35)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면 아영면 성리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봉화산과 시리봉 사이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에서는 아막성(阿莫城), 신라에서는 모산성(母山城)으로 불렀다.

아막(阿莫)은 주성(主城)또는 주곡(主谷)을 뜻하는데 이 지역이 섬진강의계곡 분지를 나타내는

지형상의 특색과 그 만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의미다.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주도권을 잡기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167년에 백제는 신라릐 서방을 침공하였고, 서기 17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를 침범하였다.

그 후인 서기 188년 초고왕 1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모산성(아막성)을 침략하는 등

이 산성을 두고 신라와 백제가 영토분쟁이 치열한 곳이 이 아막산성이었다.

 

그 후 백제 무왕 3년(602년) 백제는 4만의 군사로 아막성을 공격하였으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였으며 그러나 후일재차 공격을 하여 성을 탈환하였지만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그 후 무왕 17년에 백제는 또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였다.

모산이나 아막은 운봉의 옛 지명으로 신라의 영토임을 알 수 있다.

성은 포곡식 산성이며 현재 파악되는 성의 규모는 632.8m 이며 3개의 문지와 치성, 토루, 우물, 적대, 수구 등이

확인되고 있고현재는 북문지가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동, 서문지는 잔존 부위가 남아있는 곳도 있으나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다.
축성법은 산 사면에 내탁하여 축성하고 그 위에 넓이 3.5m 정도의 회랑을 설치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6m에 이르며 능선과 이어지는 성곽 외면에는 공호를 파서 둘렀다.

북문지 안쪽에는 운성암이란 암자가 자리를 잡고있다.

허물어진 성터를 내려서니 너덜겅이 나오고...

시리봉 갈림길(13:37)

시리봉 갈림길을 지나 오르막에 오르니 무명봉이 나오고 잠시 후 옛 복성이재를 만난다

옛복성이재(13:45)

아영면 흥부마을로 통하는 커다란 임도가 있고 이정표가 있다

예전에 현재의 복성이재가 있는 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을 넘어

흥부마을 사람들이 장수군 번암면 성암마을로 넘너든 고개같다.

임도(13:50)

임도를 가로질러 무명봉을 올랐다 내려서니 오늘의 날머리인 복성이재가 보인다

복성이재(550m:13:55)

복성(複星)마을에서 연유되어 생긴 이름인데 그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복성마을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사이에 있는 조그만 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으로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룬 첩첩산중이어서 농로도 제대로 없었다.

 

옛날에 변도탄 이라는 기인(奇人)이 있었는데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糧官)으로 있었다.

어느 날 천기를 보고 삼년 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잇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전란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 했으나 평화시에 흑세무민(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는 하는 수 없이 피난처를 물색 하던 중 지리산을 의중에 두고 천기를 보니 북두칠성의 복성(複星)이 갑자기

남쪽에서 비치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 쪽으로 가다가 별 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웃 복성마을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을 했으며

전란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같이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젠틀맨님과 인증샷을 남기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어제 산행을 하시고 힘들었을텐데 오늘 동행해준 젠틀맨님 감사합니다

글고 젊은 것이 깡자 안부리고 응아하고 놀아주는 진권아우님도 고맙고...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하고 버스를 타기위해 인월 방향으로 향한다

뙤악볕에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땀이 비오듯 흐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 시간을 물으니 오후 4시 30분에 온다고 한다

아직도 2시간이나 더 남았다... 귀경하는 차편 때문에 택시를 불러놓고

마지막 베낭털이로 막걸리 한병을 마시고 나니 택시가 도착하여 인월 터미널로 향한다

인월 버스터미널(15:00)

인월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15시 15분에 동서울로 향하는 버스가 있다

젠틀맨님은 자택으로, 진권아우는 남원에서 용인가는 버스를 타겠단다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일행들과 헤어져 나는 여기서 동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인월발 동서울행 버스표

백무동에서 마천, 인월, 함양을 거쳐 동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경부고속도로 죽암 휴게소이다...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서울로 향하는데 비는 조금씩 내리지만 차량이 밀리지 않아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저녁 6시 50분이다... 젠틀맨님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