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관악산

by 범여(梵如) 2016. 9. 15.

☞ 산행일시: 2016년 9월 13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약간 덥고 후덥지근한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9.km  / 5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kt 과천지사-과천향교-돌탑-대피소-깔닥고개-전망대-제1약수터-제2약수터

                 연주샘 갈림길-산장-연주암-정상-연주대-암봉-우회능선 갈림길-촛대바위

                 지도바위(579.5m봉)-관악문-관악사지 갈림길-559.3m봉 아래-520m봉-헬기장

                 암봉-463m봉-남근바위-계곡-낙성대공원 갈림길-상봉약수터-봉천동 마애여래좌상

                 암봉-서울 둘레길-조망대-인헌 아파트 앞

소 재 지: 경기도 과천시 / 서울시 관악구

 

추석 명절전이긴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형제간 중에 막내(내 밑에 여동생이 있긴 하지만 나이차가 많다보니 늘 내가 막내다)가

있긴 하지만 위에 형님들은 늘 나를 막내 취급을 한다... 며칠전에 연로하신 누나와

형님댁을 미리 갖다왔으니 할 일도 없고 제사는 시골에서 지내니 제사 음식도 할 일이 없다

명절에 시골에 안 가는 대신에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 추석날 은사스님의 사찰에서 다례를

올리긴 하지만 그거야 제사비용만 내고 참석만 하면 되니 편하다

고향을 잊어버린 불알친구들이 관악산을 산행하고 족구를 하면서 술이나 한잔 하잔다

10시에 사당역에 만나자고 하니  난 조금 일찍 출발하여 과천에서 역으로 넘어가면 만나겠다

 

관악산 지도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내룡(來龍)은 백두대간에서 이어진 태백산·소백산·새재· 희양산을 거쳐

속리산이 중조(中祖)가 되어 한남금북정맥을 이루고, 북으로 치달아 칠현산·광교산·청계산을 이어,

관악·금지산·남태령에서 한강을 경계선으로 강남의 서쪽 벌판에 우뚝 솟아 강북의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관악산은 청계산·삼성산과 함께 옛 금천의 진산(鎭山)인 금지산경(衿芝山經)을 이루는데, 이 산경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 된다.


빼어난 수십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 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하여 서금강이라고 한다.

시민의 주요한 휴식처로 숲과 맑은 공기, 확 트인 조망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곳곳에 드러난 암봉들이 깊은 골짜기와 어울려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으나 산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고 도심에서 가까워 가족동반 당일산행 대상지로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

봄에 관악산 입구 쪽에 벚꽃이 만발하고, 철쭉이 필 때 철쭉제가 열리기도 한다.

관악산 서쪽에는 무너미고개를 사이에 하고 삼성산이 솟아있는데 남쪽 계곡에는 안양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명산 선정 사유

예로부터 경기 5악의 하나로서 경관이 수려하며, 도심지 가까이 위치한 도시자연공원(1968년 지정)으로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주봉은 연주대(戀主臺)로서 정상에 기상 레이더 시설이 있으며

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 태조가 중수(1392년)한 연주암과 약사여래입상이 유명하다

집에서 물한병과 과일, 갈아입을 옷만 베낭에 넣고 집을 나와 도곡역에서 11-3 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과천청사역 직진인 KT 앞에서 내려서 골목으로 올라가 시청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08:20)

관악산 가는 만난 연주대 안내판

과천향교(果川鄕校:08:30)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400년(정조 2)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407년에 재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건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39년 중건하고 1690년(숙종 1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44년에 시흥향교·안산향교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가, 1959년에 시흥향교로 개창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로 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인과 장의(掌議) 수인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과천 향교 안내판

과천 향교의 모습

참으로 오랫만에 이 코스를 걸어본다...오르는 길에 장승이 범여를 반긴다

많은 가뭄탓인지 계곡을 메말라 있고...

돌탑(08:40)

추석 명절 전날이라 그런지... 벤취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주암 오르는 길이라 그런지 예전에 보이지 않던 계단이 많이 보인다

산꾼이 산길을 걸어야지...이게 뭐야...야성미를 잃어가는 관악산 등산로...안타깝다

대피소(08:50)

돈많이 발랐다...마치 둘레길을 걷는 기분...맥 산꾼 범여는 어색하다

깔딱고개(08:55)

들깨풀

포토존이라는데...

물이 없어서 별로다

쇠서나물과 약간 혼란스러움을 줄 수 있는 조밥나물

하얀 쑥부쟁이

제1약수터(09:00)

물 한모금 마시고 연주암으로 향한다

제2약수터(09:20)

돌계단으로 오르니...

또다시 인공적인 냄새가 너무도 많이나는 데크목 계단 지난다

참으로 귀한 노란물봉선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우리가 알고있는 봉선화는 인도, 말레이시아,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종이며

우리나라에서 자생하고 있는 토종 봉선화는 미색물봉선, 노랑물방선, 가야물봉선,

산물봉선, 하얀물봉선, 처진물봉선, 제주물봉선 등이 있고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셔요’이다

쉼터(09:28)

쉼터 이정표

관악산 산장(09:30)

연주암 오르는 길은 명절 전날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언 넘이 안내판에다 온통 × 표시를 해놨다...고얀 넘

또 다시 예전엔 없었던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연주암 천수관음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주암 오르는 길가에서 만난 둥근이질풀

계단으로  올라서니 연주암 마당이 나온다

꽤나 오랫만에 연주암에 오니 감회가 새롭다... 14~5년 권지홍 법사님이 계실때 염불공부를 다니던

곳이 이곳인데 그때 염불공부하던 양성도(홍륜스님)님은 스님으로 출가하셨다가 지병으로 열반에

들었고 박평종 법사님을 비롯한 도반들은 이제 연로 하시어 지금은 만남이 뜸한 편이다

천수관음전(千手觀音殿)

연주암에서 가장 최근에(1996년) 지어진 전각으로 3층 건물인데 2층은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3층은 관음전과 더불어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겹치마를 이루고 있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용마루 좌우에는 용두를 장식하고 있다

법당 가운데는 천음관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보궁의 닫집이 있다.

관음상이 위치하고 있는 어간을 제외한 다른 면에는 조그만 원불들이 봉안되어 있다.

천수관음은 손이 천개이고 눈이 천개이며 얼굴은 11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천수관음전(千手觀音殿) -노천월하(老天月下) 종정의 글씨(사진 - 펌)

관음전 법당의 모습

연주암(戀主庵:09:45)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서 알려져 있다.

연주암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대사(義湘大師:652~702)이 창건한 절로서 의상대사는 관악산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冠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200일기도를 하였다.

 

이 절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중수작업 때에는 명성왕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신축하였으며, 1918년에는 경산(慶山)의 주도 아래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는 재운(在芸)에 의해, 1936년에는 교훈(敎訓)에 의해 새로 건물을 세우거나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그 뒤편에 금륜보전(金輪寶殿:삼성각)이 있고 연주대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금륜보전은 현재의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서 1929년에 신축한 것이고 대웅전 및 기타 건물은 1970년대 이후에 지은 것이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천수관음전과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1호)을 모신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3.2m의 고려시대 양식의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16나한의 모습을 비단에 그린 탱화가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고,

약사여래 석상이 응진전 옆의 암벽에 마련된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연주암 대웅전

본존불은 소조여래이며, 좌우로 소조를 입힌 석조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봉나된 불상이다

연주암에는 1929년 많은 불화가 조성되어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 용주사 효행 박불관 등으로 옮겨져

갔고  현재는 일부 탱화만 남아있다

연주암 3층석탑((戀主菴三層石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높이 3.6m의 이 석탑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위에 각 면6판의 단엽(單葉) 연화문(蓮花紋)을 조각하였다.

연판(蓮瓣) 위에는 각형(角形) 3단의 받침을 만들어 기단을 받쳤다. 기단은 단층으로 4매의 판석을 엇물려서 조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가 정연하다.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기단 갑석(基壇甲石)의 아래에는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받침 위에 굽형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塔身)과 옥개석은 각 1석으로 각 층의

탑신에는 양 우주가 표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 각형2단의 받침을 두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밑에는 낙수홈이 있다.

옥개석의 받침은 초층은 4단이나 2 · 3층은 3단씩 조성되어 규율성을 잃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합각선은 두툼하며,

전각의 반전(反轉) 역시 둔중하여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층 옥개석의 상면에는 1석으로 조성된 부연이 있

는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있다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균형 잡힌 안정감을 주는 이 탑은 조선 태종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둘째 왕자 효령대군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부탁한 후 궁궐을 나와 이곳에 머무르며 수도할 때, 효령대군이 세운 탑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기단이 1층이고, 탑신의 지붕돌이 두툼하고 받침수가 줄어드는 등 조성수법에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

어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

연주암 범종각

현판에는 단순하게 범종각이라 기록하지 않고 “通一願鐘閣”이라 했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평면을 하고 있는데 어간을 협간에 비해 매우 넓게 조성됐다.

축대 위에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엇고, 기단 상단부에는 석난간을 둘렀다.

기둥은 약간의 흘림이 있는배흘림 기둥을 이용했고, 공포는 다포식으로 만들었는데

 외 2출목, 내3출목을 이루고 있고, 내부에는 2개의 고주를 사용했다.

고주와 고주를 연결하는 굵은 보를 각각 걸어 그 사이에 범종을 걸 수 있는 보를 걸었다.

고주로 이루어진 단칸의 평면에는 범종만이 놓여있고, 북, 운판, 목어는 퇴간에 배치시켰다.

범종에 기록된 명문에는 범종이 불기2528년(1984년)에 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종각 뒷편으로 올라서니 孝寧閣이라는 좀 특이한 전각이 등로 좌측에 자리잡고 있다.

효령각(孝寧閣) 편액 -노천월하(老天月下) 종정의 글씨(사진 - 펌)

효령각(孝寧閣: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효령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인 맞배지붕건물로 불기 2540(1996)년에 건립되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이 형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하여 늘 아버지 태종을 따라서 사냥터를 다녔다고 한다

효령각 안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지금은 자물쇠가 잠겨있어 내부를 볼 수 없는게 아쉬움이다

 

가로 74cm, 세로 90cm의 효령대군 영정은 정면을 바라보며, 왕이 평상시에 쓰는 관인 익선관(翼善冠) 형태의

황색관모(黃色冠帽)를 쓰고 갓과 소매에 녹색의 선율을 댄 홍포(紅袍)를 입고서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의자와 발을 올려놓는 족좌대(足坐臺)는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로 비록 여러번 옮겨 그려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기 어려우나 원본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얼굴은 정면을 보는 관계로 각 세부가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됐다

하지만 오른 손으로 물건을 잡고있는 자세는 조선전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곳으로 이 영정이 갖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 작품은 비록 여러번 모사된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초상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효령각의 주련

出自王宮通佛域 (출자왕궁통불역) :  스스로 왕궁 나와 불세계에 이르렀고

仰瞻天國上仙臺 (앙첨천국상선대) :  천국을 우러르며 신선대에 올랐어라.

 

효령대군의 영정(사진 - 펌)

금륜보전(金輪寶殿)

금륜보전은 대웅전 뒤편으로 637×508㎝의 기단 위에 건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1929년 김재예(金在藝) 화상이

새로 건립하였다고 전하는데, 사찰의 건물대장에는 1981년 5월 26일 낙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간(柱間)거리는 정면이 1.7m, 측면이 1.8m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넓은 방풍판을 대고 네 모퉁이에 풍경이 달려 있다. 대웅전과 달리 익공계의 건물이다.

처마는 이중 겹처마를 구비하였고, 기둥에는 배흘림 수법이 보인다. 단청은 화사한 편이다.

각 2칸씩 구성된 정면의 창호는 아자형(亞字形)이다. “금륜보전”이라 쓰여진 현판은 111×41㎝의 크기이며,

글씨의 지름은 18㎝인데, 해강(海岡)이 쓴 것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아미타탱(阿彌陀幀)을 중심으로 독성탱(獨聖幀)과

산신탱(山神幀)이 봉안되어 있어 건물의 용도가 다양함을 보여준다.

최근에 조성된 12지 탑은 친구들이 자꾸 전화가 오는 바람에 포기하고 정상으로 향한다(10:13)

꽃향유(꽃말: 과거를 묻지 마셔요)

꽃향유의 전설

옛날 충청도의 어느 한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이 청운의 꿈을 이끌고

집을 나섰하지만 막상 집을 떠나니 힘들고 지치는, 고난의 연속이였다.

그러는 사이에 청년이 지니고 있던 부푼 꿈들도 시련과 고통에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없고, 속상했던 청년은 돈이 모이는 족족 도박판과 술집을

드나들며 유흥비로 탕진했고, 중년의 나이가 되서는 이곳 저곳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젊은 시절을 낭비하며 보냈던 자신을 반성하려 했지만 그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거지가 된 그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추운 겨울 밤 어딘지도 모르는 길거리에서 죽고 말았는데, 이때 그는 죽어서 옥황상제에게 빌었다

자신의 지난 삶이 너무 후회 때문에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저들 옆에 곱게 있게 해주세요"
하고 빌었더니 옥황상제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결국 그는 귀엔 꽃이 없고

앞모습만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꽃향유가 되었다고 한다.

가을산에서 자주 만나는 왕고들빼기

연주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관악산 정상의 모습

포토존에서 바라본 관악사지(冠岳寺址)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고 한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포토존(10:20)

포토존에서 바라본 연주대(戀主帶 : 경기도 기념물 제20호)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악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다.

1411년(태종 11), 동생인 충녕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姜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관악산 정상 오르는 길에서 만난 기름나물

꿩의 비름

잎은 대생 또는 호생하고 육질이며 타원형 또는 긴 타원상 난형이고 길이 6-10cm,

폭 3-4cm로서 가장자리에 뚜렷하지 않은 둔한 톱니가 있으며 끝이 둔두이고 밑부분이

좁아져서 짧은 엽병으로 흐르며 털이 없고 윗부분이 약간 오목해지며 과실은 골돌과로서 5개이다.

 

꽃은 8-9월에 피며 백색 바탕에 붉은빛이 돌고 원줄기 끝의 산방상 취산화서에 많은 꽃이 달리며 화관은 소형이다.

꽃받침잎은 5개로서 긴 삼각형이며 연한 녹색이고 꽃잎도 5개로서 피침형이며 백색 바탕에 붉은 빛이 돌고

길이 5-6mm이며 꽃받침잎보다 3-4배 길다. 수술은 5개이고 꽃잎과 길이가 비슷하며 꽃밥은 자주빛이 돌고

암술은 5개이며 붉은빛이 돈다.

원줄기는 분백색이 돌며 둥글고 원주형으로 곧게 서며 높이 30-90cm이다

 

꽃은 8~9월에 피는데 흰 바탕에 붉은빛이 도는 자잘한 꽃들이 줄기 끝의 취산꽃차례에 모여 달린다.

얼핏 보면 산방꽃차례로 보일 정도로 풍성하다. 수술과 암술 모두 5개이다. 열매는 골돌열매이다.

 

풀 전체나 잎을 피가 났을 때나 종기가 났을 때 약으로 쓴다. 한약명은 경천(景天)이다.

부스럼이 났거나 종기가 났을 때 잎을 따서 껍질을 벗겨 상처에 바로 붙이기도 한다.

관악산(冠岳山:629m:10:33)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내용(來龍)은 백두대간에서 이어진 태백산·소백산·새재· 희양산을 거쳐

속리산이 중조(中祖)가 되어 한남금북정맥을 이루고, 북으로 치달아 칠현산·광교산·청계산을 이어,

관악·금지산·남태 령에서 한강을 경계선으로 강남의 서쪽 벌판에 우뚝 솟아 강북의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관악산은 청계산·삼성 산과 함께 옛 금천의 진산(鎭山)인 금지산경(衿芝山經)을 이루는데, 이 산경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 된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하며 시민의 주요한 휴식처로 숲과 맑은 공기, 확 트인 조망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곳곳에 드러난 압봉들이 깊은 골짜기와 어울려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으나 산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고 도심에서

가까워 가족동반 당일산행 대상지로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

봄에 관악산 입구 쪽에 벚꽃이 만발하고, 철쭉이 필 때 철쭉제가 열리기도 한다.

관악산 서쪽에는 무너미 고개를 사이에 하고 삼성 산이 솟아있는데 남쪽 계곡에는 안양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 자체가 산()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듯 관악의 산 이름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의 산 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옛 지명에는 관악산이 아닌 연주봉(戀主峰)으로 기록된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로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다.

일찍이 고려 숙종 원년(1069) 김위제가 지리도참설에 의해 남경 천도를 건의할 때 삼각산 남쪽을

오덕구(五德丘)라 말하며, 그 남쪽의 관악은 모양이 날카로워 화덕(火德)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쪽 봉우리 삼성산 중턱에 있는 삼막사에는 몽고항쟁 때 적장 사리탑을 살해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물론 관악산은 그 이전 한강을 중심으로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쟁탈전을 펼치고 당군(唐軍)을 축출할 때

그 지형상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서쪽 끝 봉우리에 해당하는 호암 산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 산성이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기록인 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 신라 문무왕 17(677) 의상대사가

관악사와 의상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추석 전날인데도 아이스케키 장사는 어김없이 등산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2달전(7월 10일)에 2,000원 주고 사 먹은게 억울하여 오늘도 2,000냥입니까

하니까...오늘은 1,000냥에 하나 주겠단다... 1,000원을 주고 아이스케키를 먹고

있으니까, 다른 등산객들도 하나씩 달라는데 2,000원씩 받는다...전형적인 장사꾼이다

아이스케키 하나를 먹고 연주대를 참배하러 간다 

연주대 말바위(馬岩)
연주대 초입에 있는 말바위...말 안장처럼 생긴 이 바위에 올라타면 득남(得男)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사이에 핀 꼬들빼기

뭔 소원을 빌까?

마침 사시예불중이라 잠깐동안 참석하였다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 온다

관악산 정상에 있는 샘...마치 금정산 정상에 있는 금샘과 비슷하다

관악산 정상 삼각점(△안양23 / 1976재설)

가야할 능선

쇠줄을 부여잡고 곡예하듯 내려선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암봉(10:48)

짙은 박무로 인해 과천시내의 그림은 흐리기만 하다

관악산 우회로(10:55)

뒤돌아 본 관악산 정상의 모습

촛대바위(11:02)

요건 뭔 바위인지 몰러...

요넘도 모르것네

지도바위

관악문(冠岳門:11:05)

힘들겠다

관악사지(冠岳寺址) 갈림길(11:10)

관악사지 갈림길에서 559.3m봉 오르는 벙커옆 너럭바위(11:12~12:10) 
아침을 먹지않고 왔던차에 허기가 지고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곳은 일반 등산객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라 땀에 젖은 웃도리를 스틱에

걸어서 말리고 가지고 온 라면을 끓여서 캔맥주 하나로 허기를 달랜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라서 웃도리가 다 젖었다

독립군의 여유로움

라면에다 캔 맥주하나 깔끔하게 마시고 베낭을 베고 꿀잠을 잔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520m봉 광장(12:20)

헬기장(12:22)

헬기장에서 직진으로 가면 마당바위쪽인데 오늘은 왠지 거시기 바위가

보고싶어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는 헬기장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참으로 오랫만에 이 능선을 걸어본다...아마 10년도 더 된듯 싶다

예전에 있었던 철 파이프는 그대로이다... 이 길은 일반 등산객은 잘 안다니는 편이다

스프레이로 등로 표시를 해놨는데 이곳은 외길이라 길을 잃어버릴 걱정은 없는 곳이다

암봉(12:35)

뒤돌아 본 관악산 정상

마당바위와 하마바위로 이어지는 관악주릉의 모습

전망봉(12:45)

암봉에서 내려서서 편안한 등로를 따른다

암봉에서 바라본 양재동 방향의 모습

청계산 방향도 오리무중

공터를 지나 내려서니... 거시기 바위가 나온다

남근바위(12:50)

인증샷

한많은 사연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

개울을 건너니 수방사 철조망이 나오고...

알았습니다

암릉구간 우측으로 올라서니...관악산 주릉이 나온다.

관악주릉(13:02)

등로에서 바라본 서울대학교

낙성대공원 갈림길(13:07)

서울대 운동장에서 족구를 하고 있는 불알친구넘들을 만나기 위해 낙성대 공원방향으로 향한다

수없이 관악산을 올랐지만 이 방향으로는 난생 처음으로 내려간다

껄껄이그물버섯인가?...버섯을 아무리봐도 아리까리하다

벤취가 보이고...

상봉약수터가 나온다

상봉약수(13:13)

저기도 나처럼 명절날 고향을 실향민들이 막걸리 파티를 벌리고 있다 

봉천동마애미륵좌상 방향으로 향한다

봉천동마애미륵불좌상((奉天洞 磨崖彌勒佛坐像:13:15)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9호호 관악산 북쪽 중턱의 거대한 절벽 바위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불상으로,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둥근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늘씬하게 표현된 신체와 둥글게 깍인 어깨 등으로 보아 상당히 우수한 조각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1630년이라는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시대 조각사 편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는 글을 통해 17세기 조선사회에도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을 대표하는 기준이 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봉천동마애미륵불좌상

미륵존불 숭년3년경오4월 대시주 박산회 양주(彌勒尊佛 崇禎三年庚午四月日 大施主朴山會 兩主)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존상의 조성시기와 시주자를 알 수 있는 존상이다

 즉, 1630년 박산회 부부의 시주로 조성된 미륵불이라는 뜻이다

미륵불은 측면상으로 즉, 참배객이 찾아오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복련 연화대좌, 신광, 두광이 표현되어 있고, 소발에 중간 계주를 표현하였다.

다소 이국적인 갸름한 상호는 도톰하며 이목구비가 뚜렸하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통견의 법의에 건장한 가슴을 노출시켰고 승각기에는 띠매듭을 새겼다.

 

연화좌대위의 두 발은 군의가 덮고 있고 명문 이외도 연꽃을 들고 있어 미륵불임을 알 수 있으며

두 손은 속옷에 감싸져 있고, 전체적으로 선각으로 새웠으나 상호는 참배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양감이 되어 있다 

봉천동마애미륵불좌상을 참배하고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암봉(13:22)

서울둘레길(13:27)

조망대(13:28)

조망대에서 바라본 봉천동(奉天洞)

봉천동 동명은 이 마을이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어서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 데서 한자명으로 봉천(奉天)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봉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과 과천군 하북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동면

봉천리와 과천군 하북면 본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로 칭하였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동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봉천동이 되어 영등포구 관악출장소에 속하였다.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491호로 관악출장소가 폐지되어 영등포구의 직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봉천동은 관악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낙성대 가는 길에서 친구들이 있는 서울대로 가기위해 좌측으로 내려선다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서는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 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 보인다.

등로에서 만난 둥근이질풀

인헌아파트 버스 정류장(13:40)
이곳에서 서울대 안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불알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