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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속리산

by 범여(梵如) 2016. 9. 26.

☞ 산행일시: 2016년 9월 25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18km / 8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법주사-저수지-세조길-목욕소-세심정-이뭣꼬다리-복천암-용바위골 휴게소

                  할딱고개-보현재휴게소-중사자암 갈림길-냉천골휴게소-문장대탐방지원센터

                  문장대-문장대탐방지원센터-문수봉-청법대-신선대-경업대 갈림길-입석대

                  상고외석문-비로봉-뚜꺼비바위-배석대갈림길-천왕석문-돌탑-상고암 갈림길

                  장각동 갈림길-조망처-천왕봉-상고암갈림길(왕복)-상환석문-상환암-시멘트 다리

                 세심정-목욕소-세조길-저수지-부도-일주문-매표소-탐방지원센터-터미널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 경북 상주시 화북

 

이번주 계획은 원래 진권아우와 주왕지맥 4구간을 가기로 약속했으나 팔재계 수계식을

빠질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법주사에서 어제 오후 5시부터 오늘 새벽 6시까지 꼬박밤을 세우면서

수계식을 마치고 회향식이 끝난 후 도반들과 이별을 하고 등산복을 갈아입은 다음에 법주사를 나서 문장대 방향으로 나선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고

망개나무, 미선나무 등 1,00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197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고, 법주사(法住寺), 문장대,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 및

천연기념물 제207호인 망개나무가 유명 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대한팔경 중 하나다.

주봉인 천황봉(1058.4m)을 비롯해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등 8봉과 입석대, 문장대, 신선대 같이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며 우뚝 솟은 8대8석문이 활처럼 휘어져 자리하고 있고  이러한 화강암의

기봉(奇峰)과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잘 조화되어 승경을 이룬다

 

파른 화북면 쪽에 비해 산자락이 너른 내속리면 쪽에는 법주사, 복천암, 중사자암, 상환암 같은

명승고적을 품고 있고 첩첩 봉우리들 사엔 은폭동계곡, 용유동계곡, 쌍룡폭포, 오송폭포 등이 있으며,

1016가지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원의 보고이다.

천황봉은 조선 3대명수(삼파수, 달천수, 우통수)중 하나인 삼파수의 발원지로

이곳에 내린 빗물은 동쪽 낙동강, 남쪽 금강, 서쪽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서해바다까지 뻗어 나간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의 분기점에 솟아 올라 조선팔경의 하나이자

소금강, 또는 제 2의 금강이라 불리는 속리산(1,058.4m)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쳐 있는 명산으로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중 제10위에 랭크되어 있는 산이다

속리산 등산지도

속리산 지도

오랫만에 밤이슬을 맞으면서 철야정진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팔관재계를 끝내고 법주사를 나오면서 도반들과 작별을 하고 속리산 산행에 나선다

속리산 능선으로 오르는 코스가 두갈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난 문장대에서 천왕봉 코스를 택한다(06:20)

저수지(06:30)

저수지를 지나니 태평휴게소가 나오고 도로가 갈라진다

갈림길(06:35)

기존의 도로가 있고 새로 생긴 트레킹 코스인 세조길이 있는데 트레킹 코스로 향한다

내일 준공식을 한다는 세조길... 이곳 속리산과 법주사는 세조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탈골암() 갈림길(06:45)

탈골암()은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비구니 선객들의 도량으로
탈골암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 두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진표 스님이 이곳에서
영심(

융종(불타() 등의 제자들을 깨우쳐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케 했다하여 불렀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탈해왕 때 경주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닭의 머리를 한 자신의 용모를 한탄하던 중

속리산의 한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물을 마시고 사람의 머리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암자를 탈골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이름을 두고 사람들은 달리 이야기를 하며 사찰의 내력을 가름하여 왔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누구의 말이 옳고 그런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탈골암을 보면 진표스님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한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는 청산과도 같은 대중과 흰 구름처럼 떠다니는 납자들이 어우러져

윤회의 틀을 깨고자 정진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탈골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골암의

중심은 월산() 스님께서 이름을 붙여주셨다고 하는 대휴선원이다. “대휴()”란 크게 쉰다는 말로,

선방에 들어서는 수행자 모두가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는 구하는 마음을 쉬어 일체 번뇌의

 뼈를 벗어 버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탈골암(충북)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인용

이 둘레길이 세조의 사은 순행길이란다

멋진 암릉을 지나니...

정조대왕의 글귀도 보이고...

데크목의 편안한 둘레길을 지나니...

황진이한테 반했던 개성의 난봉꾼(?) 화담 서경덕의 싯귀도 보인다

세조길 끝자락(06:50)

세조길 끝자락에서 기존 도로를 만나 가니 목욕소가 나온다

목욕소(沐浴沼06:51)

조선조 7대 임금 세조가 국운번창을 기원하며 대법회를 연 후 복천암을

방문하여 세조가 피부병을 낫기 위해 홀로 목욕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명을 받을 받고 온 

월광태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피부병이 곧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사라졌는데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신기하게도 몸의 종기가 없어졌다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목욕소 안내판

세심정(洗心亭:07:05)

법주사에부터 이정표에 계속 나타나는 세심정

다른 지역에서 만나는 세심정(洗心井)은 마음을 씻는 우물을 칭하는데 이곳의 세심정(洗心亭)은

정자를 뜻하는데 천년의 쉼터라는 정자는 온데간데 없고 음식점이 정자대신 신꾼을 유혹한다

 

세심정 안내판

오늘 내 베낭에는 먹거리라곤 빈 수통과 초코렛 2개가 전부이다.

팔재계의 계율은 오후불식(午後不食)... 어제 오후 2시 이후부터는  물 이외는 아무런 음식을

섭취하지 않았는데도 오랫만에 맛보는 부처님에 대한 환희심에 배고픔을 모르겠

근데 이른 아침에 등산객이라곤 거의 보이지도 않는데 40대 중반의 어느 여인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커피 한잔 하고 가란다( 물론 커피는 공짜가 아니다)

커피는 됐고...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산채 비빔밥이 가능하다고 한다

산채 비빔밥 한그릇 먹고 빈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뭣꼬 다리(07:30)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다리이름이다.

다리 이름이 이뭣고다리(是甚麽橋 : 시심마교)란다.

바를 시(是)는 이것이란 말이고, 심할 심(甚)은 무엇이란 뜻이고,

갈 마(麽)는 의문을 나타내는 말로 시심마는 “이것이 무엇인가?”

줄여서 소위 "이뭣고?", “이뭐꼬?” 라는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복천암 입구(07:32)

오늘 산행의 컨디션은 최고로 좋은 느낌이지만 후반의 체력저하가 겁이나서

복천암은 그냥 패스하기로 한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복천선원(福泉禪院)

복천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속리산 법주사 산내 암자로 720년 신라 성덕왕 19년에 진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고려때 공민왕은 이곳에 머물며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근대 한국의 선풍(禪風)을 일으킨 경허선사, 동산, 성철, 청담스님이 수행 정진한 유서깊은 선원으로

금강산 마하연과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원으로 자리 매김한 사찰이기도 하다 

복천수(福泉水)는 조선 세조가 물을 마시고 감탄을 했다는 '석간수'로 조선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면서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올 정도로 복천암의 샘물이 약수로서 유명하다고 한다..

복천수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흘러 넘쳐도 복천암 샘물은 한결같다고 했다.

암자 옆의 큰 바위 틈에는 암자이름과 관련한 샘인 복천(福泉)이 있다. (자료 - 펌) 

용바위골 휴게소(07:32)

휴게소 쥔장은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지 가계문은 굳게 닫혀있다

바위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娑婆世界의 衆生들 만큼이나 힘든 삶이로구나

할딱고개(07:45)

숨을 할딱거리면서 올라온다고 해서 할딱고개인가?

그럼 깔딱고개는 뭐야!...매주 맥산행을 하는 범여로서는 이 정도는 식은 죽먹기다

할딱고개로 올라서니 댕기머리를 한 쥔장인듯한 사람이 마당을 쓸다말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다

인상이 참으로 좋아보여, 음료수라도 하나 팔아줄까 하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않고 내 체력을

한번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에 인사만 건네고 마당을 지나 문장대로 향한다

이 매점이름이 보현재 휴게소란다

보현재 휴게소 이름이 예전엔 경상도집이었던 모양이다

보현재 휴게소를 지나 다시 철난간을 따라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편안한 등로로 접어드는데...

때이른 단풍철에 성질 급한 넘인지...튀고 싶은 넘인지...

중사자암 갈림길(07:55)

중사자암 인법( 사진 -펌)

중사자암은 원래 상사자암, 하사자암과 함께 지어진 고찰이다.

이후 상·하 사장암은 1900년경 폐사가 되고 중사자암만 남아 있다가 6·25전쟁 때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라”며 소개령을 내린 군부에 의해 소실됐다가 1957년에 다시 중사자암만 복원됐다.

중사자암은 사찰의 창건은 신라 성덕왕 19(720) 의신조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찰의 초창과 고려조에 대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찰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중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중사자암은 현 동쪽 35리 속리산아래에 있다.

元宗大王 願堂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로서 조선의 16대왕인 인조의 아버지이다.

원래 정원대원군이었으나 인조 즉위 후 왕으로 추존된 분이다.

따라서 중사자암은 인조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사자암은 인조 19(1641) 에 창건되었는데 이때 인조의 형인 능원대군과 능창대군의 청에 따라

지선(智禪)스님이 일을 감독하고 낙성일에 능원대군이 용화에 있는 전답을 절에 희사했다고 한다.

능창대군은 1615년 광해군 시기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능창대군에 의했다기 보다는 그 가문에 의한 것으로 파

악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후 영조 33(1757)에 중사자암을 중수하였는데 명례궁으로부터 궁감 이수창과

주지 현익에게 감독하도록 하였다하며 또 헌종 3(1837) 대차여신영원과 총섭 하운을 파견하여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 24(1887) 중사자암을 다시 크게 중수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등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사찰은 일시 폐사되게 되었다. 기존에 화려했던 전각들은 모두 폐허로 변했다.

현재의 중사자암은 1957년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85년 종현스님이 사찰을 중수했으며 1986년에는 삼성각을 새롭게 건립했다

 

사자는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부처님을 좌우로 모시는 협시보살로 문수와 보현보살이 있는데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다. 또 보현보살은 서원을 상징하며,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사자암이 위치한 곳은 문수봉. 건너편 코끼리봉이라는 보현봉과 대칭되는 지점에 중사자암이 있다

중사자암 입구에 있는 바위

계속되는 암릉구간... 무릎 보호를 위해 조심스럽게 걷는데 바로 앞에서 등산객 소리가 들린다

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등산객을 만나는데 20대 중반쯤 되는 여자 3명, 남자 2명이 왜 그리 시끄럽던지...

문장대가는 길에는 이런 매점들이 3개나 보인다

냉천골 휴게소(08:10)

주인장이 빚은 막걸리가 별미라는데 이른 아침이라 입맛만 다시고 문장대로 향한다

오리방풀

문장대 오르는 길에서 만난 돌계단... 世俗과  天上界를 나누는 느낌이다

아직도 잠이 들 깬듯한 꼬들빼기도 보이고...

병조희풀

좋은 시절 다 가고 서서히 이별을 준비한다

병조희풀은 넓은잎 작은키나무로 가는 줄기가 무더기로 올라와 키 1m 정도로 자라며 가지가 엉성하게

나와 전체가 엉성하고 넓게 둥그스름해집니다. 깊은 산 300~1,300m 고지의 숲속 활엽수 나무 아래나

계곡가에 주로 서식하며 밑동은 나무지만 겨울에 줄기 위쪽이 풀처럼 말라 죽는 것이 특징이다.

조희풀에는 병조희풀과 자주조희풀이 있는데 병조희풀은 꽃모양이 호리병을 닮아 꽃 입구가

좀 더 날렵하고, 자주조희풀은 꽃 입구가 많이 갈라지면서 뒤로 뒤집어지는 차이가 있다.

이 바위 이름이 없다...거북이 바위, 아님 뚜거비 바위...에라 모르겠다...니 맘대로해라

문장대 오르는 길

천남성

고서에 따르면 천남성은 중풍을 낫게 하고 담을 삭히며 가슴을 편안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몸에 있는 수분을 말리고 몸 안으로 침입한 풍의 기운을 제거하는 동시에 경련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효능과 지통의 효과도 있다.

응용되는 증상으로는 중풍, 두통, 파상풍, 종기등이 있다. 간에 풍이 침입하여 고통을 겪을 때 양호한 효능을 나타내는 약재이다.

독성정보 유독(有毒): 독성이 강한 약재중 하나인 남성은 복용시 조심하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수도 있으므로 환자나 일반인들의 병증에 알맞은 가공방법을 거친 것을 사용하여야 하며,

대량을 복용하거나 전문가와 상의없이 임의로 복용하지 않도록 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는쑥부쟁이

문장대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

산괴불주머니

우리나라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생화로 양귀비과의 식물로 옛날 귀신을

쫓기 위해 차고 다녔던 '괴불'을 닮은 꽃때문에 괴불주머니라 불리게 되었다.

봄에 피는 괴불주머니와는 잎모양과 꽃 모양이 다소 다르다.

늦여름에 피는 노란색의 꽃에 붉은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장대 탐방지원센터(977m:08:38)

지난해 8월 2박3일간의 충북 알프스 종주때 왔으니 꼭 1년이 조금 넘은 싯점이다

이곳 공터에는 산림복원 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공사장을 방불케하는 돗대기 시장이다

문장대로 가는 길에 분홍색 구절초도 간간히 보인다 

평생에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을 간다고 했다던 문장대... 난 10번정도 올랐으니 도리천쯤 ㅋㅋㅋ
고운 최치원(857 ~ ) 선생은 이곳에 올라 지었다는 詩

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려하고

山非離俗俗離山: 산은 속세를 밀어내지 않는데 속세가 산을 밀어내려하네'

아마 이 시가 속리산의 유래가 되지 않았난 싶다

문장대(文藏臺:1,054m:08:40)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속리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에서 비로봉에 이어서 2번째 높은 봉우리로 흰 구름이 항상 정상에

걸려 있다고 해서 운장대(雲藏臺)라고 부른다.

평생에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을 간다고 했다

 

운장대라 불리운 문장대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복전암에서

감로수를 마시며 요양을 하고 있을때 꿈속에서 월광태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현몽하여

운장대에 올랐더니 “삼강오륜(三講五倫)”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로 불리웠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3천명이 앉을만하다고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문장대는 본래 구름 속에 잠긴다고 운장대(雲藏帶)로 불렸으나 세조가 이곳에서 신하들과

글을 논했다고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속리산 자락을 자신의 우상화 무대로 물들였던 세조.

그가 전국 명소 중 속리산을 선전장으로 택한 이유는 중부권 민심을 다독인다는 목적 외에도 가슴 한켠에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문장대에 와있는 젊은 친구에게 부탁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정상석 뒷면 쓰여있는 속리산의 유래

밤재로 이어지는 속리산 구간 비법정탐방로

늘 국공파들이 가지말라고 하는 저곳 그래도 도둑고양이처럼 2번이나 지났던 곳이라 감회가 깊다

그 너머로 택리지를 저술한 이 중환이 극찬한 청화산과 그 뒷쪽의 조항산은 안개에 휩싸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능선 너머로 청화산과 조항산은 자기의 속살을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다...모든게 흐릿하게만 보인다

정상 오르는 길에서 만난 갯쑥부쟁이

문장대 정상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칠형제바위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법주사가 있는 사내리(寺內里)의 모습

문장대에서 바라본 속리 주능선의 모습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이루는 12종산의 하나이다.
그 산세가 웅대하고 기묘한 바위봉우리들이 구름위로 솟아 있어
옥구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소금강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암괴석과 맑은 물,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대한 8경"에도 꼽힌다.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된다.
8봉은 천황봉을 비롯해 비로봉, 문수봉, 보현봉, 길상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를 비롯해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를 말하며,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을 일컫는다.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관음봉(觀音峰:985m)

법주사 북쪽 계곡 안쪽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 골 건너에 있으며

관음(觀音)이란 관세음보살을 말하며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

보살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의 모습

가는 쑥부쟁이

다시 문장대 탐방 지원센터로 되돌아와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문장대를 지키고 있는 낙랑장송

문수봉(文殊峰:1021m:09:30)
문장탐방지원센터에서 8분정도 걸으니 문수봉이 나오는데 등로는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아랫쪽 사면길로 가기에 일반 등산객은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이다
문수봉은 전국의 명산마다 있는 봉우리로 불교용어로 된 산봉우리 지명중에 가장많은

문수보살을 지칭하는 봉우리이다.

문수 보살을 지칭하는데 부처님이 열반한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로서 표현되어왔고 지혜를 취급한 ≪반야경≫을 결집•편찬한 이로 알려져 왔다.

또한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으로 보살의 지위에 있지만 이미 예전에 성불하였고,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가 될 보살이라고 한다

 

문수봉에서 아래로 내려서니 맞은편에 청버대가 보이는데 청법대 역시 오를 수 없는 곳이다

청법대(聽法臺:1,018m:09:10)

청법대(聽法臺)는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座臺)처럼

생겼다고 해서붙혀진 지명으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을 외우는 소리에 제 정신을 차렸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오를수가 없으며 샛길로 돌아 우뚝 선 바위로 오를수가 있다고 한다

호젓한 산죽길 능선을 따라서 신선대로 향한다

뒤돌아 본 속리산의 모습

 

昔我遊松源: 예전에 내가 송원에서 노닐 때 

遙瞻俗離山: 멀리 속리산을 바라보았지

嵯峨倚靑空: 높이 솟아 푸른 허공에 섰고

縞白露層巒: 흰구름 속에 봉우리 드러났네 

始信雲冪峀: 구름이 봉우리에 장막을 친 줄 처음 알았고

終覺玉爲顔: 옥이 산의 얼굴이라는 것을 처음 마침내 깨달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은 친척 이성환이 보은현감으로 나가자 ‘족손(族孫) 천장(天章)에게 주다’라는 시를 선물했다.

미역취도 이제 끝물로 들어선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신선대가 나오는데 신선은 온데간데 없고 흉물스런 사설 매점이 보인다

신선대(神仙臺:1,026m:09:25)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막이 있다.

옛날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서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며 춤을추고 있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을 달려갈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고있는 봉우리를 신선대(神仙臺)불렀다고 한다

매점 쥔장이 얼굴을 내밀면서 막걸리 한잔하라고 유혹하는데 갈길이 멀어 그냥 지나친다

경업대(慶業臺) 갈림길(09:30)

신선대에서 산죽길로 조금을 더 내려오니 우측으로 경업대와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경업대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400m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속리산 8臺중의 하나인 경업대의

지명의 유래는 임 경업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했는 곳이라 한다

 

임경업장군은 문장대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바위를 세우고(입석대) 남아의 기사을 세운 곳이다.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명분인 명나라를 지지하다가 이자점의 계략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는다

속리산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문장대에서 천왕봉가는 속리 주릉선 구간에는 등산객 한명 보이질 않는다

예전엔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새로 생겼고...

등로에서 바라본 입석대(立石臺:970m:09:38)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임경업 장군이 7년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조선조 인조(16대임금)때 임경업 장군이 6년동안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정도 단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수가 없다.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의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장군은 정신을 차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주 보이는 석벽위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의 비석처럼 세워 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들린다

장군은 경업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세우려 했으나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장군은 그의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수련하여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해서 입석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계단에 설치된 입석대 안내판

등로에서 뒤돌아 본 속리산의 모습

입석대 옆쪽에 있는 바위

늘 산꾼을 반기는 구절초가 오늘따라 참으로 청순하게 보인다...첫사랑의 설레임처럼

 산부추... 급하게 찍느라 카메라가 흔들린 모양이다

바위떡풀도 속리산에서 보이는구나

까치꼬들빼기

지리산 꼬들빼기와 많이 닮았다.

지리산 꼬들빼기는 엽축(잎줄기)에 날개가 있고, 까치 꼬들빼기는 날개가 없다

문장대에서 천왕문가는 꼭 통과해야하는 좁은문

이곳 역시 데크목 계단을 설치한 모양이다

뒤돌아보니 백두대간 능선이 범여 가슴을 뒤흔드는구나... 그래 조만간 다시 한번 가리라

상고외석문(10:00)

고릴라를 닮은 이 바위는 자세히보면 어미와 새끼 고릴라 두마리가 나란히 앉아

경관을 감상하는듯한 모습인데 속리산 8석문의 하나인 상고외석문이라고 한다 

비로봉(毘盧峰;1,032m:10:03)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 안에서 좌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췄고 이에 율사께서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햋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율사께서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에 그곳을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께서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진표율사께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모든것을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로봉 정상엔 오르지 못하고 암릉사이를 통과한다

속리산에는 오르지 못할 봉우리가 많다... 문수봉과, 청법대, 입석대, 비로봉도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서 걷는데 비로봉을 지나면서 문장대 이후 처음으로 등산객 2명을 만나 인사를 나눈다

속리산에서 가장 멋있는 암릉구간이 시작되는데 암릉사이로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죽 등로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모습

멋지게 펼쳐지는 속리산의 암릉을 옛 선인들은 속리산을 말하기를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여 소금강산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이라 하여 그 승경을 조선8경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뚜껍등 바위라고 하는데 바로보니 뚜껍등처럼 보이지 않는다

조금을 더 걸어가서 보니 뚜꺼비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산죽과 미역줄기가 서로  뒤엉켜 사는 등로앞에는 도룡농 바위가 보이가 보이고...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당겨본 도룡농 바위

함박꽃 열매

배석대 갈림길(10:09)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608년에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왕석문(天王石門:10:10)

배석대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천왕석문

마치 지리산 통천문을 지나는 느낌이지만 내가 보기엔 통천문보다 훨씬 나은 느낌이다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갈 수 없는게 마치 요즘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태를 꾸짖는 것 같다... 오만과 탐욕을 다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가라고...

돌탑(10:15)

前生에 무슨 業報를 지었길래 저렇게 힘든 삶을 살아갈까?

상고암(上庫庵) 갈림길:10:17)

속리산은 주봉이 천왕봉이지만 문장대의 명성에 가려 푸대접을 받는곳이다

흔히들 속리산하면 문장대란 공식이 정답인양 알지만 천왕봉이 엄연한 주봉이다

법주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을 능선 위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능선이 펼쳐져 있다.

좌측이 문장대이고 우측이 천왕봉이며 그 가운데 우뚝솟은 봉우리가 비로봉이다

이곳이 속리산 전체를 가장 잘볼 수 있는 곳이다.

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왕봉도 보인다

마치 기암괴석을 모아논 암릉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곳...

속리산 전체 계곡 구석구석을 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상고암이란다.

장각동 갈림길(10:22)

좌측으로 올라서면 갈림길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이곳에서 내려서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상오리 칠층석탑과

장각폭포가 나오는 곳으로 장각동(長角洞)은 소의 뱃속모양의 명당터를

일컫는 곳으로 우복동(牛腹洞)의 쇠뿔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의 모습

상오리에는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서 시작한 시냇물이 장각동 계곡을 굽이쳐 흐른다.

6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떨어져 작은 못을 이룬다. 금란정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폭포

위에 자리 잡은 정자로 폭포 위의 기암에는 금란정이 세워져 있고 주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숲이

있어 한층 더운치를 돋운다.
장각폭포와 금란정은 사극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영화 낭만자객 촬영장소이기도하다

조망처(10:25)

조망처에서 5분정도 올라서니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에 오른다

천왕봉 정상에는 사람들은 흔적은 전혀없고 하늘 가득히 잠자리떼만 보인다

천왕봉(天王峰:1,058m:10:22)

충북 보은군 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속리산 능선 9개의 봉우리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의 主峰이긴 하지만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주봉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대자재천왕이 10월 인일 축시에 이곳 천왕봉으로 내려와

45일동안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천왕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9봉9대(九峰九臺)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정상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대목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십이지종산(十二之宗山)의 하나이자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이곳부터 한남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 칠장산까지 와서 북쪽으로 김포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하는 한남정맥과 남쪽으론 칠장산에서

태안 앞바다인 안흥만에서 맥을 다하는 420km의 금북정맥의 시발점이 이곳이다

천왕봉 정상에는 2개의 삼각점이 있다.

천왕봉 1등 삼각점(△속리 11 / 2008재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 따르면 속리산의 원래 이름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峰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광명산(光明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신라시대에 지금의 속리산으로 불리웠는데 784년(선덕여왕 5년)에 김제 금산사의 고승으로 주석하고

계셨던 진표율사가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주변에 밭을 갈던 소들이 모두 율사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럴진데 하물면 사람인 우리가 율사를 몰라봤다’며 진표율사를 따라서 속세(俗世)를 떠나(離)

입산수도했다는 데서 “俗離”라는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

천황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

으로 이어지고,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은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맑은 날 천왕봉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천왕봉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듯 장엄하다.

속리산을 12대 宗山의 하나로 삼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의 24절경을 꼽는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천왕봉에서 10분동안 있었는데도 등산객이 한사람도 오질 않는다

이 명산의 정상을 홀로 전세를 낸 느낌이다

10분동안 이곳 저곳을 두루 전망을 하고 다시 상고암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상고암 갈림길(10:55)

갈림길에서 상고암, 법주사로 내려서는 길은 상당히 급경사이다

그리고 곳곳에 등로 보수공사를 하느라 완전히 공사판으로 변해있다

개울도 건너고...

상고암 갈림길(11:10)
속리산을 윗쪽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보이는 좌측은 문장대이고, 우측은 천왕봉이다

문장대와 천왕봉 사이에 우측으로 치우진 볼록한 부분이 비로봉인데, 사람들은 제일 높은

천왕봉이나 문장대에 올라서야 속리산을 다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속리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비로봉 아래 있는 상고암이다.

상고암(上庫庵)은 그 이름에서 위쪽 창고쯤으로 어림할 수 있는데,  상고암의 지명유래는

'법주사를 창건하며 사용할 목재를 저장하고 가공하던 장소가 바로 상고암 자리라서 상고암이란

지명이었다고 하며, 속리산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상고암 갈림길에서 철계단을 내려오다 등로에서 만난 멋진 암릉 

계속에서 내리막길로 내리오니 엄청나게 큰 석문을 만난다

상환석문(上歡石門:11:30)

 내석문·외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과 함께 속리산 8대 석문으로 꼽힌다 

상환석문을 빠져나와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산객들

뒤돌아 본 상환석문의 모습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상환암으로 향한다

상환암(上歡庵)과 학소대의 모습(11:35)

속리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상환암은 720년(성덕왕 9년)에 혜우스님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암자이다.

『보은군지』에 의하면 720년(성덕왕 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주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91년(공양왕 3)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이곳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창건 당시부터 이 절을 상환암이라고 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세조가 복천암()을 다녀갈 때

이곳에서 7일 동안 기도하고 선왕 태조의 유적을 추모하는 즐거움이 비할 데 없다 하면서, 이 암자를 상환암이라고

했다는 구전이 있기 때문이다.

 

6·25 때 전소되었던 것을 1963년 정면 6칸의 원통보전(殿)과 삼성각()을, 1968년 요사채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수도처로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담() 등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다.

원통보전의 정면에는 1976년에 건립한 삼층석탑 1기가 있으며, 암자의 주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순조대왕태실()과 학소대()·은폭동()·신은폭동() 등의 명소가 있다

상환암은 지금 한창 불사중이라 마치 공사장을 방불케한다

공사 감독을 하는 스님의 눈치가 보여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등로로 되돌아 온다

학소대(鶴巢臺:680m)

상환암 앞에있는 학소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봉황대·산호대와 함께 속리산의

8대(八臺)중에 하나이며 학이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학소대 아래 계곡에는 

바위 아래에서 물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를 은폭동이라고 불린다

상환암을 창건한 혜우스님이 수행하는데 암자앞 계곡의 폭포소리가 매우 성가셨는데 별안간

바위가 무너져 폭포가 바위속에 숨어 버렸다고 한다 

상환암 입구 이정표

시멘트 다리(11:55)

다리를 건너 계곡옆 도로를 따르는데 태실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순조 태실(純祖 胎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으로, 이곳에는 순조의 태가 안치되어 있었다.

항아리에 태를 넣어두었던 것을,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왕의 태실로서 여러 석물을 갖추고 태실비를 세웠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을 기본으로 한 부도(승려의 사리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8각의 돌난간이 둘러 놓았다.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태실비가 있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 놓았다.

조선 정조 11년(1787)에 만든 것으로, 이 때부터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산이라 하고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있다. 8각형의 돌난간은 1982년 해체, 보수한 것이다

속리산의 계곡물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아침에 헤어졌던 세심정이 보이는데 지금은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려는데 세심정 절구가 보인다

세심정 절구

세심정 절구의 유래

다시 세심정(洗心亭:12:03)

다시 목욕소(12:08)

아침에 걸었던 시멘트길을 버리고 낼 정식 오픈을 한다는 세조길을 걷는다

이곳 속리산 곳곳에는 세조와 관련된 지명과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속리산은 조선 세조와 인연이 많다고들 한다. 문장대의 유래나 목욕소와 같은 곳이 세조의 흔적이다

저수지(12:25)

세조길 옆에서 마치 주왕산 주산지를 연상케하는 저수지가 있다

눈썹바위(12:30)

세조가 바위아래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자리로, 속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비바람과 한 낮의 더위를 피했던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생긴 모습이 마치 산람의 속눈썹을 닮았다고하여 눈썹바위라고 부른다

곳곳에 세조에 관한 글들이 많이 보인다

법주사 부도(12:40)

법주사 일주문으로 향한다

법주사 일주문 천정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법주사 일주문(12:45)
법주사 일주문을 뒤돌아보며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법주사를 빠져 나온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서 걷는다

법주사 매표소(12:50)

등산객들에게 비싼 입장료를 받는다고 원성이 자자한 곳이다

법주사 탐방지원센터(12:52)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호젓한 송림을 따라서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속리산 버스터미널(13:00)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1시이다...버스 시간표를 보니 동서울 터미널행은 13:40이고

강남고속버스 터미널행은 14:20분이다... 40분 이상에서 허비할 이유도 없고 하여 13시 40분

버스를 예매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간단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근처 식당에서

민생고를 해결하려고  하니 모든 식당들의 메뉴와 가격이 획일적이다

그냥 귀찮아서 초코파이 하나에 우유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니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속리산 터미널 버스 시간표

참으로 황당한 버스

서울고속이란 버스를 타고 속리산을 떠나 잠에 빠졌다가 깨어보니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보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 없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넘의 버스는 보은 지역의 미원과 보은을 거쳐, 청주의 곳곳을 거친

다음에 청주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20분... 거기다가 이곳 터미널에서

10분 이상을 정차한 다음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동서울터미널 도착한 시간이 저녁 6시경

보은에서 서울까지 4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부산에서 서울오는 시간과 막 먹는 시간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참으로 이상한 버스 노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