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7년 4월 2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산행하기는 더없이 좋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4km / 5시간 35분 소요
☞ 참석인원: 한울타리. 수헌아우님과 함께
☞ 산행코스: 달재-257.7봉-고성이공묘-왕봉산-돌문재-옛 1041번 도로-250.6봉-무명봉-순흥안공묘
한이불재 갈림길-236.7봉-임도-250.4봉-태부산 갈림길-임도삼거리-무명봉-임도
232.1봉-시멘트 임도-양동고개-177.5봉-임도-294.3봉 갈림길(왕복)-294.3봉
임도 삼거리-201봉-210봉-248.7봉-임도삼거리250봉-산성재-안부- 182.3봉-무명봉
성산마을 갈림길-167.1봉-진양정공 묘-남재-성황당-85.1봉-59봉-마지막 봉우리
성산마을 버스정류장-기강나루
☞ 소 재 지: 경남 의령군 유곡면, 정곡면, 지정면
어젯밤 의령읍내서 1구간을 자축하는 파티(?)를 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끝내고 숙소에 들어왔다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근처의 식당으로 가는길에 도로는 짙은 안개로 인해 신호등도 안 보일 정도이다
동태탕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산에서 먹을 우유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달재로 향하는데
남강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과 함께 운해를 이루는 멋진 광경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을 구경하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이곳은 요즘 도로 개량사업을 하는데 예전에 꼬불꼬불한 도로를 직선화 하는 공사가한창이다...
우리나라 재벌중 한명인 삼영화학의 관정 이종환 회장,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의 생가를지나 어제 산행을
끝냈던 달재의 도로옆에 애마를 세우고 이틀재의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일출
의령군 용덕면에서 정곡면으로 넘어가는 남강변의 고개... 일출과 함께 운해가 환상적이다
20번 국도변에 애마를 세워두고 산행을 준비하다(07:00)
달재(月峴:105m:07:00)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와 정곡면 오방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북쪽으로 옥녀봉, 남쪽으로 왕봉산과 이어진다.
지명은 달이 비친다는 의미에서 이름지어졌다고 하며, '월나현(月羅峴)', 월현(月峴) 등으로 불렀던 것의 한글표기이다.
『대동지지』(의령)에 "월나현(月羅峴)은 오른쪽 길이다(東路)."라는 기사가 있다.
『조선지형도』(의령)에는 월현(月峴)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의령)에는 월치(月峙)·
월령(月嶺)으로 한자를 달리해 표기되어 있다. 지명과 관련하여 남서쪽으로 월현지(月峴池)가 있는데
정곡면 오방리의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이 일대에서 월현천(月峴川)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남강에 유입된다.
좌측 아래에 있는 세간마을은 의령을 의병의 고장이라 부르게 한 동기를 만든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망우당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메달아 놓고 의병을 조련 시켰던 현고수(縣鼓樹)가 있는데 아직도 마을 사람들이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도로를 건너서 마루금으로 찾아가고 있다... 원래 마루금은 절개지로 올라야 하는데 그냥 우회한다
마루금으로 진입하여 본격적인 우봉지맥 2구간을 시작한다
어제내린 비로 인하여 꼬깔제비꽃은 촉촉히 젖은 상태이다
남산제비꽃
제비꽃은 우리나라에만도 60여 종이나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환경에서든지 그곳에 맞춰 자라니까 그만큼 종류가 다양해진 것이다.
남산제비꽃은 서울 남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우리나라 산과
들에 자라는데, 특히 산지에 잘 자라고 양지나 반음지의 물 빠짐이 좋은 흙에서 자란다.
제비꽃과에 속하며, 세엽근채 또는 남산오랑캐꽃이라고도 부르며 꽃이 예뻐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다른 제비꽃처럼 봄에 어린순을 삶아 나물로 먹기도 한다. 또한 예전에는 약재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도 서식하며, 꽃말은 ‘소박함’, ‘순진무구한 사랑’이다.
초반이라서 그런지 등로가 잘 보이지 않은곳을 치고 오르니 경주이공의 묘지가 보인다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서니 고도가 낮아서 그런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빛내림
꽃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거늘
요즘 마치 지가 대통령이 다된 양 꼴값을 떠는 정치하는 자들만
저 뜻이 뭔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 지훈님의 시 “落花”
257.7봉(07:20)
257.7봉을 내려서니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묘지를 만난다
고성이공 묘지
다시 꽃밭길을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왕봉산(262.8m:07:30)
의령군 정곡면과 유곡면, 지정면의 삼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준.희 선생의
패찰이 붙어 있긴 하지만 지명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길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가면 노은봉이 있고, 정곡면 상촌리 마을이 나오는데 예전엔
정동(正洞)이라 불렀으며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회장의 생가와 가까운 마을이다
옛날에는 꽉막힌 지역이였으나 근래 와서는 지정이나 신반 쪽으로 통하는 도로가 잘 나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동네가 됐다. 이 마을은 성씨별 집성촌으로 안촌, 조촌, 전촌 모두 세뜸인 셈이다
수헌아우가 내 사진을 영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왕봉산을 직진으로 내려서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인데 비에젖은 낙엽으로 인해 어찌나 미끄러운지...
차량소리가 들리면서 내 고향 신반에서 마산으로 이어지는 1041 지방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돌문재(石門峴:119m:07:38)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와 정곡면 오방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조선지지자료』(의령)의
일정동면(현재 정곡면)에 석문현(石門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현재는 산고개 자체를 많이 낮추어서 큰 길이 나 있지만 옛날에는 높고 험한 잿길이었다고 한다.
지명은 고개 너머 큰 바위들이 서 있었는데 꼭 문기둥 같았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돌문재라 부르지 않고 좌측 세간리에 있는 고송마을 이름을 따서 고송골재라 부른다
돌문재를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세간리 고송마을의 지명을 따서 고송골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고개를 엄청나게 깍아 내려서 길이 평탄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전엔 이 길이 엄청나게
높기도 하거니와 비포장도로에다 험한 길이라 교통사고가 참 많이 났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風前燈火같은
조선을 지키는데 일조를 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이다
사진 - 펌
곽재우 장군은 명종 7년(1552년) 경상남도 의령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했다.
1585년(선조 18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왕의 뜻을 거스른다하여 파방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란하자
4월 22일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장군은 홍의에 백마를 타고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정암진 기강 현풍 창녕 화왕산성 진주성 등의 전투에서 실로 신출귀몰하는
전략·전술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백전백승함으로써 왜병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했다.
이때 붉은 옷을 입고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목사를 지냈고 한성부 우윤,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지금도 세간마을 입구에는 현고수라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의병을 훈련시킬 때 쳤던
북을 걸어놨던 나무라 하여 현고수(懸鼓樹)라 부른다
세간리 현고수(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7호) - 사진 펌
보통 느티나무는 곧게 자라 좌우로 균형 있게 가지를 뻗는데, 이 느티나무는 특이하게도 2m쯤 곧게
크다가 한쪽으로 허리를 홱 구부린 모습으로 마치 북을 걸기 좋게 누군가 나무를 휘어놓은 것 같다.
나무의 높이는 20m, 가슴높이의 둘레는 8.4m이며, 가지가 동서로 16m, 남북으로 15m 정도로 뻗었으며
수령은 6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곽재우 장군은 이곳 세간마을에서 태어나 16세 때부터 남명 조식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다가
자굴산에 있었던 보리사에 들어가 병서와 경서를 읽었다고 하며 그 뒤 조선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언심(許彦深)과 의논, 재산를 모두 털어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곽재우 장군이 집 앞에 있었던 이 느티나무에 큰북을 매달아 놓고 둥둥둥 치면서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발상지이자 의병 훈련장이었던 셈이다.
이 느티나무의 이름이 현고수로 불리워지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단다.
돌문재에서 지정면 방향으로 조금 내려섰다가 좌측의 절개지로 올라선다
절개지로 오르면서 바라본 정곡면 상촌리(上村里)의 모습
의령군 정곡면에 있는 마을로서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촌지와 고랑못골이 있다.
본래 읠여군 일정곡면의 지역으로 일정곡면에서 가장 위가 되므로 웃마을 또는 상촌이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난지골짝, 복양동, 새터, 점터 등이 있다. 난지골짝은 새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인 난지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난지골짝이라 한다. 복양동은 새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보가리라고도 한다.
새터는 상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 또는 신기라 한다.
점터는 전에 사기를 구운 흔적이 남아있는 점터에 있다 하여 점터라 한다.
끙끙대면서 미끄러운 절개지로 올라선다
옛 1041번 지방도
예전에 이곳이 1041번 지방도였다... 어렸을 적에 기억에 아버지따라 부산에 있는 고모집
갈 때 버스를 타고 이 도로를 간 기억이 있는데 너무 높아서 멀미를 한 적이 있었던 곳이다
다시 옛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서니...
돌문재에서 힘들게 치고 오르니 비교적 편안한 등로가 나온다
오래된 묘지를 지나니...
성황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가 나오고...
250.6봉(07:55)
250.6봉을 찍고 살짝 우측으로 방향을 꺽은 다음에 지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봉(08:02)
移葬한 듯한 묘지의 흔적이 보이고...
순흥안공 가족묘(08:07)
순흥안공 가족묘를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한이불재 갈림길(08:08)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지정면 태부리를 잇는 고개로 원래 핫이불이란 말이 쉽게 발음하면서
한이불이 된 것이며, 재를 넘어가자면 핫이불을 둘러 쓴 것처럼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 재를 넘으면 유곡 세간의 고송골로 빠지게 되는 산길이라 옛날에는 연락부절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동네건너 갓골 안으로도 산고개가 있는데 보가리재라고 한다.
임도를 따라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파들은 임도를 따르는데 곧이어 만난다
236.7봉(08:12)
다들 임도로 향하는데 무슨 벼슬이라고 개고생이람...
236.7봉 바로 아래엔 묘지 한기가 있고...
y자 갈림길에서 우측의 넓은 임도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빗물을 머금은 나뭇가지 사이로 기분좋은 빛내림이 시작되고...
호젓한 임도를 걷다가 보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08:18)
한 동안 넓은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임도 건너편에는 동산공원묘원가 보인다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어제 지나왔던 한우산과 그 옆엔 의령의 진산인 자굴산도 보인다
경남에서도 郡勢가 가장 약한 의령은 출중한 이물을 참으로 많이도 배출한 지역이다
의령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일 것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갈수록 커져 2천에 달하였는데,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명이 가야금의 우륵선생도 내 고향인 의령 신반 출신이란다
총독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고, 종교를 통하여 민족자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끝내 옥사하신 백산 안희재선생도 의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박사이며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효상 박사도 부림면 입산출신이다.
의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과 경제인을 배출한 고장이다. 정치인으로는 제11,12,13대 국회의원을
거쳐 경기도 성남시 시장으로 재직했던 이대엽 시장이 의령출신인데 말년에 불미스런 일 때문에 안타깝다.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용덕면 와요리에서 태어났으며,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창조한 주역이며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한 진대제도 의령의 자랑스런 인물이고, 그리고 해수부 장관을 지냈던 주호영 국회의원,
더불어 민주당 안민석의원과 요즘 고초를 겪고있는 조윤선 전 청화대 민정수석 부친도 의령이다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 설립하여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전자를 이룩해내었으며,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한 호암 이병철 회장은 의령이 낳은 경제계의 거목이다.
삼영화학그룹을 세계적인 모범기업으로 성장시켜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향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이종환 회장, 전 제일모직 대표이사 원대연, 그랜드 백화점 김만진 회장도 의령출신이다
체육인으로는 한국씨름의 대명사인 이만기가 있으며, 주현미의 짝사랑,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
편승엽의 찬찬찬, 윤희상의 카스바의 여인, 이자연의 찰랑찰랑 등 수 많은 히트곡과, 의령군가를
작곡한 이호섭 후배도 의령의 자랑이다.
간벌지역으로 올라서니...
250.4봉(08:25)
이곳에서부터는 좌측으로는 여태껏 같이해 온 유곡면과 작별을 하고 좌.우로 온전히 지정면이다
250.4봉 좌측 아랫쪽인 지정면 유곡리 계곡엔 雲海가 환상적이다
태부산(太夫山) 갈림길(08:32)
우측으로 지정면 태부리로 향하는 뚜렸한 임도가 보이나 지맥길은 좌측의 내리막길이다
지정면 태부마을 뒷산이 태부산(太夫山)이었기 때문에 지명의 정리 때 산이름대로 정했다는 것이다.
태부마을은 옛날 상태부(上太夫)라고 했던 지역인데 웃땀(상촌), 중땀, 아랫땀과 안골(안땀)등 네뜸이다.
태부산으로 부르는 뒷산도 기록에는 나오지만 보통으로는 동네뒷산이라고 부른다. 중땀 건너 산골짜기를
개장골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옛날 아기무덤(보통 깨장이라고 부르는 돌무더기 무덤을 말함)이
많아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 삼거리가 나온다
임도 삼거리(08:38)
좌측의 시멘트 도로는 양동소류지로 향하는 길이고 우측은 비포장 임도이다
이곳에서 임도의 유혹을 뿌리치고 등로로 올라선다
무명봉(08:41)
표고점이 없는 봉우리라서 범여의 기준으로 무명봉이라 칭한다
무명봉을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잠깐 사이에 거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고 내려서니...
임도(08:44)
자칭 정통 맥산꾼이 임도로 갈 수야 없제
다시 힘들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232.1봉(08:54)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시멘트 임도(09:00)
시멘트 임도에서 바라본 지정면 유곡리 양동마을의 모습
시멘트 도로를 가로 지르니 밭이 나오고 다시 잡목을 헤치고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오니 또다른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양동고개(09:08)
시멘트 도로 아래로 내려서면 양동마을이다... 도로를 가로질러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급경사의 오르막에서 만난 백두사랑 시그널
177.5봉(09:15)
묵묘을 우회하면서 내려서니...
등로가 또다시 거칠어지긴 해도 그래도 걸을만하다
임도(09:25)
임도 우측 아래에는 굉장히 큰 규모의 농장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낙동강과 박진나루가 보인다
도로를 가로 질러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직진으로 가면 묘지가 나오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등로 아랫쪽에는 낙동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명 묘지를 지나서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새벽에 아침을 먹은 탓인지 배가 엄청 고프다
동행한 수헌아우님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베낭을 내리고 빵과 우유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재선충의 피해가 엄청나게 심하다... 소나무 무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박진나루의 모습
박진지구 전투는 6.25동란 당시 북괴군이 경남 창녕군 남지읍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낙동강을
도하하여 박진에서 남지읍과 장마면, 그리고 영산읍과 도천면 일대에 전개된 치열한 공방전을
말하며 6.25 한국전쟁 戰史에는‘ 낙동강 돌출부 전투’ 로 명명되었다
박진나루는 박진지구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6.25 당시 최후의 방어선으로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미 제2사단과 국군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끝에 북한군을 물리치면서,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곳이다
다람쥐 옹달샘인가?
294.3봉 갈림길(10:00)길
이곳에서 우봉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294.3봉으로 향한다
294.3봉(10:02)
294.3봉 삼각점(△남지 310 / 2002복구)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등로를 걷는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우봉지맥 능선의 모습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임도 삼거리(10:13)
낙동강 건너 창녕땅이 보인다...건너 보이는 능선이 화왕지맥 능선인듯 싶다
현재 계획으로는 내년쯤 한번 걸어볼 생각이다
임도 삼거리에 서있는 표지판
임도를 따라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201봉(10:17)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임도 건너편의 창녕땅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다시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뒤돌아 본 박진나루의 모습
210봉(10:24)
잡목속에 갇혀 버렸다... 개고생이다... 얼굴이 할키고...베낭은 찟기고...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서 걷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나뭇가지 사이로 낙동강 모래사장이 보이고...
248.7봉(10:34)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서 걷다가...
임도 삼거리
이 험한 곳을... 맨발님...존경스럽습니다
250봉(10:48)
우봉지맥의 끝자락인 기강나루 합수점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가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5분도 안되어서 다시 만나는 임도...개고생하면서 오를 일이 없다
잡목을 헤치면서 올라서니...개고생만...
뭔 지랄인지...
낙동강 너머로 내년쯤 걸어볼 예정인 비슬지맥 능선이 보이고...
등고선상의 255.4봉인듯 한데... 아리까리하다
조금전에 헤어졌던 임도로 내려서는데 괜스레 올라갔다는 후회가 든다
준.희님의 산패가 붙어있는 산성재에 도착한다
산성재(山城峙:255.4m:10:55)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와 성산리의 경계에 있는 재로서 지정면의 산하를 휘두르고
다니던 임도가 여기서 끝이나고 그 끄트머리에는 육각정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 서면 낙동강과 내가 가야할 기강나루, 그리고 그 너머로 창녕군 남지읍이 한 눈에 보인다
정자를 좌측에 두고 등로를 이어간다
소나무 사이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보라색 제비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고...
산하가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는 안부로 내려간다
안부(11:05)
182.3봉(11:08)
호젓한 소나무 숲사이를 걷다가... 다시 안부로 올라서니...
마구 파헤쳐진 묘지가 나오고...
무명봉(11:14)
솔밭 사이로 편하게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성산마을 갈림길(11:20)
이정표(←성산재 정상 1.1.km,↑성산리 0.5km, 등산로 입구 1km)가 서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杜谷里)의 모습
두곡리는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충적평야가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천이 흐르고 북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두곡저수지와 관동소류지가 있다.두목산 밑이 되므로 두곡이라 하였고 자연마을로는 관동, 산성, 삼거리, 안촌, 손촌 등이 있다.
관동은 두곡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산성은 산성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산성이라 한다.
삼거리는 두곡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세 갈래 길이 있다 하여 삼거리라 한다.
안촌은 두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아랫땀이라고도 하며 박씨가 많이 산다 하여 박촌이라고도 한다.
손촌은 아랫땀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땀이라고도 하며 손씨가 많이 산다하여 손촌이라고도 한다.
능선 정상에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167.1봉이 나온다
167.1봉(11:25)
167.1봉 정상에는 4등 삼각점(△남지 429) 이 있고...
관리가 안된 무덤들이 보이는데 묘비를 자세히보니 예전에 통정대부를 지낸 진양정공의 묘지다
진양정공 묘(11:35)
이곳 지정은 수박으로 유명한 곳이고 남강 건너 함안군 대산면도 수박으로
유명한 곳인데 들판에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전부 수박재배지라고 보면된다
예전엔 이곳은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 비만오면 침수가 되는 바람에 이 동네
처녀들은 시집갈 때 까지 쌀밥을 한번 못 먹고 시집갔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제방둑을 막아서 옥토로 변했고, 특히 4대강 사업으로 정부에서
농토를 많이 돋구어 준 바람에 침수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묘지 끄트머리에서 좌측의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괴불주머니(꽃말:보물주머니)
가시덩쿨을 헤치고 내려서니 남재가 나온다
남재(南峴:11:45)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와 성산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 우측에는 청주이공의 효성을 기리는 창효각이 있다
창효각(彰孝閣)
청주 이씨로 자는 경언(景彦) 함자는 경일(景一)공인데 영조(1737년)때 출생하셨고 평소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순조때 왕명으로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남재먼당 소자각(효자각)이란 말이 지명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여행차가 이 남재를 넘으려 하면 난데없이 큰 뚜끼비(두꺼비)가 나와서는 길을 막았고 상두꾼들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온다. 그래서 하마현(下馬峴)이니 두끼비고개란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창효각 뒷쪽으로 올라서 묘지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맥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의 잡목 능선이 나온다
성황당(11:57)
성황당의 제단
아직 새순이 나지 않은 탓이라 아카시아 군락지를 편하게 지나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지정면 성산리의 모습
지정면소재지에서는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지역이다.
임난때 의병이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로 유명한 거름강나리(기강나루, 岐江津)가 있는
마을이라 성산이란 지명보다는 기강나루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동네 어귀의 나직한 산고개가 남재(南峴)고개이고 남재너머가 성산마을인데 마을의 지명유래는 간단하다.
산성산(山城山) 밑에 있다해서 앞의 산(山)자만을 빼고 성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어른들의 얘기로는 회정(槐亭 보통 발음은 해정으로 들림) 즉 아주 오래된 홰나무가
동신목이면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여 회정말(회정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또 화동(花洞)이라 불렀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괴화(槐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홰나무의 꽃(회화꽃이라고도 함)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지명을 쓴 것 같다.
성산마을은 남재를 넘어 왼편 산밑에 있는 듬이 안땀(안동네) 또는 본동이고
들가운데 있는 뜸이 하동(아랫동네, 들가운데)이며 꼬까실이란 뜸은 단 두집만 살고 있다.
옛날 강둑이 없던 시절에는 안땀 바로 앞으로 강물이 흘렀다고 하며 지금 넓직한 들판은
무듬이땅이라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85.1봉(12:00)
완만한 등로로 내려가니 김녕김공 가족 묘지가 나온다
김녕김공 묘지
후배들과 임도에 주저앉아 베낭털기를 한다.
마지막 남은 오렌지와 우유, 소보로 빵으로 허기를 면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등로에서 바라본 우봉지맥 합수점
저 곳은낙동강과 남강이 합수점이라 왜 진양기맥이 진양호가 아닌
기강나루로 와야 하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곳이기도 한 곳이다
좌측의 강 건너로 남지읍내가 보이는 곳이 화왕지맥(계성지맥)이고 우측의
강 건너는 낙남정맥 광려산에서 분기되는 화개지맥(광려지맥)이 되는 곳이다
3개군(의령, 함안, 창녕)과 3개지맥(우봉, 화왕, 화개)이 만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임도가 끝나고 다시 등로로 들어선다
59봉(12:14)
등로가 아예 없는 곳이다... 약간 우측으로 꺽어진다
안부(12:16)
우봉지맥 마지막 봉(48m:12:18)
나무로 만든 의자가 부서져 있고 곳곳에 스텐레스판에 쓴 싯귀들이 보인다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대밭 사이로 내려서니
성산마을 버스 정류장(12:22)
60번 군도를 따라서 기강나루로 향한다
도로 좌측에는 한국농어촌공사 성산배수장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서 기강나루로 향하는데 강건너에 화왕지맥의 끝자락이 보인다
이해하질 못할 M.B의 치적사업
이곳이 4대강 사업에서 파생된 가강수변생태공원이란 곳인데 엄청난 세금으로
만든 생태공원의 각종 시설물들은 억새밭에 묻혀 버리고 개미새끼 한마리 안보인다
엄청난 세금을 걷어 하는 짓거리... 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민초들의 등골은 휘는데
박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앞당겨진 대선...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 제발 표를 얻기위한
선심공약 하지마시고 우짜면 민초들이 두 다리 쫙피고 살 수 있나를 고민하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거요... 세금은 당신네들 쌈지돈이 아니라오
기강나루(12:32)
한우산 동봉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같이 걸어온 우봉지맥은 이곳에서
입수를 하면서 우봉지맥을 종료하며 산행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는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강물에 손을 담그려 했는데 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고향에서 택시를 모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이곳으로 오라고 해놓고 보덕각으로 향한다
기강(岐江)나루터
경상남도 의령군의 지정면 성산리 기강에 위치한 나루터로,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군 남지면 용산리와 마주한다.
지명은 성산리의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기강(岐江)이라 하는 데서 유래한다.
창녕으로 나룻배를 타고 이동하던 주요 나루터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의령)에 기강진(岐江津)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적군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이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佑, 1552~1617)장군의 첫 전승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곽재우는 강을 뛰어 넘을 정도로 비범했는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기강나루에서 왜병과
대적할 때 밤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혀 놓고 줄에 매달아 불을 붙여 흔들어서 수백 명이 강을 막고 서 있는
것처럼 위장전술을 써서 승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곽재우 장군을 기려 세운 불망비(不忘碑)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인 보덕각(報德閣)과,
손인갑(孫仁甲, 1544~1592)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 1565~1592) 장군을 기리는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기강나루는 일명 거름강이라고 하여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주력부대가 조선 땅 깊숙히 진격하면서 낙동강 수류를 이용하여
낙동강 하류에서부터 남강과 낙동강 상류의 주력부대에 후방병력 수송과 그 밖의 군수
물자를 보급하였는데 기강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년 5월 4일 우리고장에 왜군의 그림자가 처음 비친 곳이 바로 이곳 기강으로써
이날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10여명의 잘 훈련된 부하를 거느리고 기강둑에 나가 있다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는 왜선 3척을 발견하였다.
곽 망우당은 왜선이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들기를 기다리며 부하들과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왜선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여 조총을 쏘며 응전하였지만 적의 탄환은 강둑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이쪽에서
쏘는 강력한 화살은 백발백중으로 왜군을 쏘아 맞히자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낙동강 하류로 달아나 버렸다.
이후 곽 망우당은 기강뚝을 굳게 지켜서 이곳에 나타나는 왜선을 모조리 격퇴시키니 왜군의 병참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홍의장군 곽 망우당의 명성은 왜군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기강은 옛 기강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기강언덕의 보덕각과 쌍절각, 그리고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점을 바라보면서 곽 망우당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전적지로써 의병의 전투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뜻깊은 곳이다.
이곳 기강나루에서 남강을 따라서 함안(대산면)쪽으로 올라가면
남강을 건너는 악양(岳陽)나루터가 있다.
낙동강 강~바람이~~ 이 구절로 시작하는 유명한 옛노래 처녀 뱃사공 노래가 탄생한 곳이 악양나루터다
작사자인 윤부길은 유명가수인 윤항기와 윤복희의 부친이 되시는 분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동란이
막 종전했을 그 무렵 윤부길 단장이 함안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는 길에 이곳 악양나루터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전쟁중 입대 후 소식이 끊긴 오빠를 기다리며 그를 대신해 노를 저어 사람들을 건
네주던 두 처녀뱃사공의 사연을 듣고 작사하게 되었단다.
비극적이게도 그 오빠는 결국 전쟁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1959년 처녀뱃사공이란 노래가 탄생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애창곡이 되었단다
기강(岐江나루(기음강)와 가야낙동강 일대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땅이요, 가야의 땅이기도 하다.
우연찮게도 가야 나라의 이름과 같은 지명이 용산리 창날 기강(岐江 : 거룬강나루)의 옛 지명기음강(岐音江)이
바로 가야진(伽倻津)이라는 기록이 있어 우리 고장의 역사성을 더 한층 높이고있다.
또 주목하여야 할 점은 기음강의 [岐音]을 이두식으로 읽으면 [가라 가? 가름]으로 바로 삼국시대
이전 경상도에 있었던 나라 [가야, 가라]의 국명(國名)과 상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야시대는 아마 우리 고장은 가야의 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선시대에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 읍의 북부지역은 창녕의 불사국, 또는 비화가야(比火伽倻)의 땅이 아니었나 싶다.
또 남쪽 지역은 영산 서화(西火)나 계성에 있었던 가야의 작은 나라의 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영산현] 조에 가야시대의 지명임을 들어내는 기음강(岐音江)이 나온다.
靈山縣 - 奴音江 在縣西二十八里有龍堂春秋令守令行祭祝文稱伽倻津溟所之神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도 창녕현 감물창진 하류 의령현 정암진과 합쳐지는 곳이 기음강인데
옛날에는 가야진이라 일컬었다고 했는데 또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이 있는데 사전(祀典)에는
가야진 명소라고 하여 봄 가을로 본읍(영산현)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가야시대의 고성(古城)으로 알려져 있는 구진산성과 고곡산성 등과 함께 가야진은
또 다른 나라와의 경계지점으로 병사들이 주둔하였던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가야]라는 이름이 붙은 나루가 우리 읍에 있으니 어쩌면 이곳에서 [가야, 가라]라는
나라의 이름이 발생하거나 연유된 곳이라 볼 수 있어 먼저 기음강=가야진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한다.
가야진이라 기록된 곳은 바로 용산리 기음강이란 곳이다.
기음강은 지금 지도상에는 기강으로 나와 있다.
기음강이 기강으로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지칭하고 있다.
곧 남강의 끝이며 창녕 함안 의령 3개 군이 만나는 경계점이며, 우리 읍의 용산리 속칭
거룬강(또는 거름강)나리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기강은 바로 용산을 지칭하고 있기도 하며, 지금은 창나리, 창날이라고도 하는데 의령군
지정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먼저 [가야]의 어원을 살펴보면 [??] [?]의 차자로 양주동 박사가
지은 {고가연구}에서는 보고 있다.
[?? ?]이 [갈, 곳갈](冠)로 쓰여지면서 [弁]으로 기사 되어 변한(弁韓)의 어원이 되며, [??]의
차자로 [가야, 가락]으로 쓰여 나라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즉 [가야, 가락]이 [가?, 갈]의 음 훈차(音 訓借)인데 그 뜻은 [分 岐]의 뜻이라 했다.
변한을 [가르한]으로 읽으며, 낙동강 분기지대(分岐地帶)에 있으므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라 하였다.
낙동강 하류는 강 흐름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짐(分岐)으로 기음(岐音)으로 기사 되었으니
기음은 [가?] 즉 강의 고훈(古訓) [??]은 이에 연원(淵源)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가야]는 강의 갈래를 말하고 곧 강의 옛말 [??]이며 다시 그것을 한자로 써서
[기음]으로 기사 되어 [가야, 가라]는 곧 [기음강]과 같다는 것이다. (자료 인용)
보덕각 안내판
보덕각(報德閣:12:45)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강변을 따라 기강(岐江)언덕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맞아
싸워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홍의장군 곽재우의 전공을 기리는 비각이 있다.
1간(間) 팔작(八作) 기와 지붕으로 된 이것은 1739년(조선 영조 15년)에 건립한 것으로
망우당 곽재우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뜻에서 그날의 전첩지였던 이곳 기강에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에는 「有名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라 새겨 있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선조 임진년의 왜란에 우리고장 의령땅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으니 의령을 거점으로 성주, 합천, 창녕 등지에서 닥치는 대로 왜적을 쳐부수고 구국의 선봉이 되었다.
당시 곽망우당의 전첩지 가운데 특히 이곳 기강싸움은 유명한 것으로 그는 기강언덕에 미리 의병을
매복 시켰다가 낙동강의 수로를 따라서 이동하는 왜적의 선단(船團)을 보이는 대로 모두 쳐 부셨던 것이다
보덕각의 모습
보덕각 비문 내용
有名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이라 적혀 있다
쌍절각의 모습
쌍절각 안내판
쌍절각(雙節閣)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강변의 보덕각 옆에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한 후지당 손인갑과 그의 아들 손약허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旌閭)이다.
당초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지금의 봉수면 신현리에 세워졌던 것을 그 뒤 1943년 5월에
장군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쌍절각의 비문 내용
보덕각과 쌍절각의 모습
보덕각과 쌍절각의 비는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하명으로 만든 비란다
기강나루 이곳 저곳을 살피는 사이에 친구의 택시가 도착하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달재에 도착한다
달재에서 애마를 회수하여 난 고향의 산소로 향하고 후배들의 친구의 차를 타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고향에 도착하여 조부모님, 부모님 산소에 들렸다가 집에 들려 시골에 계시는 큰 형님을 찾아뵙고
마을회관에 들려 가지고간 쥬스와 두유, 어르신들에게 용돈을 드리고 다시 면소재지 목욕탕에서
후배를 만나 소고기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서울로 향한다
내 고향 신반(新反)의 모습
내 고향 신반은 옛부터 풍류를 즐겼던 곳인 모양이다.
가야금을 만든 악성(樂聖) 우륵이 이곳 신반이 출신이며, 경남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고성 오광대도 원래는 이곳 신반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맨 처음에는 초계(草溪: 지금의 합천군)의 밤마리(栗旨)장터 죽광대(竹廣大)패의 공연된 극을
관람한 다른지방 사람들이 자기고장에 가서 탈놀이를 시작한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00년 무렵에는 신반, 의령, 진주, 산청, 거제, 창원, 고성, 통영, 김해 등에서
탈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신반이 가장 성행했다고 한다.
오광대란 명칭은 다섯 광대가 나와 오방(五方)의 잡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또 고성과 통영에서는 다섯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오광대란 설도 있다.
주된 내용은 1, 백사의 의식무(오방신장무) 2, 양반에 대한 모욕 3, 파계승에 대한 풍자
4, 일부(一夫)와 처첩의 삼각관계에서 오는 가정비극 5, 축사연상(逐邪延祥)의 축원무(사자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형식은 춤이 주가되고 재담, 노래, 동작이 곁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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