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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1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 32구간(소백산구간) -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고치령

by 범여(梵如) 2010. 3. 22.

산행일시: 2009년 7월 25일~26일

산행구간: 죽령-제2연화봉(1357.3m)-연화봉(1383m)-제1연화봉(1394,3m)-비로봉(1439.5m)-국망봉(1420.8m)

             상월봉(1394m)-늦은맥이재(1265m)-마당치(1032m)-고치령(950m)-좌석리

거리/시간:  마루금26,2km/날머리 5km, 9시간 30분 소요 

 

7월들어 세번째 무박 하려니 체력이 좀 달리는것 같다. 토욜 낮엔 서울의 날씨는 정말 좋았다

남한산성에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 갔는데 저 멀리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이 손에 잡힐듯

오늘 무박은 정말 끝내주겠다는 부푼 꿈에 젖어...  저녁 9시경 핸드폰이 울렸다

라이온스 회장 동우회 회원의 빙모상이란다. 경북 울진 의료원 장례식장. 정말 갈등이 많았다

산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모임에 총무가 나이기에 얼른 화원에 전화해 조화를 보내고 회원들에게

문자 날리고 회장, 재무에게 연락을 취하고 베낭을 베고 저녁 9시반에 집을 나섰다.

 

어느 한 知人의 말 백두대간은 조상이 돌보지 않으면 완주를 할 수 없다는 말이 생각 나기에...

울진이니까 산행 하산 지점이 영주 지역이니 끝나고 울진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새벽 2시 죽령에 도착하니 좋았던 날씨가 안개비로 돌변하기 시작하고 안개로 주위는 

아예 볼 수도 없고 오늘도 걷기만 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죽령에서 천문대까진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뛰다시피 걸었다. 상가집에 조문가야 한다는 생각에 제 1연화봉까자 7.8km를 2시간에

도착 숨을 쉬고 초콜렛 한개, 양송이 스프로 일단 허기를 달래고 비로봉으로 출발 새벽 4시 20분경

안개비는 그치고 소백산에도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 부지런히 비로봉으로 향했다

 

비로봉에서 부터 뛰다시피 하여 마당치 도착하니 이젠 비로 변하고 고치령으로 좌석리까지...

죽령-제2연화봉(1357.3m)-연화봉(1383m)-제1연화봉(1394,3m)-비로봉(1439.5m)-국망봉(1420.8m)

상월봉(1394m)-늦은맥이재(1265m)-마당치(1032m)-고치령(950m)-좌석리로 마루금26,2km

날머리 5km를 9시간 30분 소요 영주에 오니 울진가는 버스 시간이 안 맞아 울진 택시타고

조문하고 올때는 회원들 차로 삼척 임원항에 들러 회 한접시 하고 집에오니 새벽 1시가 지나고

아 피곤하다 범여는.....   

개괄도

 

죽령 휴게소엔 산꾼을 태운 버스만 덩그렁이... 사진이 영(새벽 2시)

오늘은 蓮華藏世界(연화장세계 : 극락)에 들렀다가 드디어 부처(毘盧)가 되는 날이다. 

죽령에 도착하니 무더운 더위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후덥지근한 날씨에

운무가 잔뜩 끼어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오늘 코스는 죽령을 출발하여 연화봉을 거친

다음 비로봉-국망봉-상월봉-늦은맥이까지의 노선이다.

 

북쪽 방향의 꽤 가파른 포장길을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1시간여를 밟아 오르는 동안

왼쪽 단양 시가지의 밝은 삶들이 골마다 소담스런 불빛을 반짝이며

연화골을 따라 함께 오른다. 兩白之間 生 人之地(정감록)라 했던가..

蓮花浮水 명당터(풍수지리서)라 했던가..신라 진덕여왕 때 삭주도독

사술종공이 竹旨郞을 노래하며 죽령으로 부터 날아 오른다.

 

30여분만에 1,012봉 안부를 지나고 선두조의 걸음이 유난히 속력을 내는가 싶으며

1시간만에 중개소 갈림길에 도착하여, 마루금 진행을 아쉽게도 포기하고 왼쪽으로

우회하는 제2연화봉 단양쪽 전망대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이는가 싶더니 이내 꽤 굵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배낭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꺼내 입으니 다소 쌀쌀하던 高地의 바람을 막아주며 따뜻함을

느끼긴 하지만 빨리 비구름이 걷혀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후미조를 기다린 후 송신소 중개탑을 우회하여 북동으로 꺽여지는 평탄한 내림길에서  

가늘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우의를 도로 벗어 배낭에 집어 넣는다.

이미 선두조의 빠른 행렬은 사라지고 서너명의 다른 팀 후미조와 동행을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 녘을 열어주는 밝음이 사위에 퍼지면서 오른 쪽 어깨 위로 첨성대 모양의

천문대 관측소 건물이 검은 능선길에 우뚝 솟는다.

 

천문대 정문 못미쳐 길가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동트는 단양 시가지를 굽어 보니

불빛이 맑게 다가와, 흐린 날씨에 안개까지 끼어 시야 확보는 쉽지 않을듯 싶다 

콘크리트 도로로 오니 무릎이 아프고

제2연화봉에 올라섰을 때 주변의 풍광은 이미 오늘의 산행이 심상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저 아래 마을의 희미한 가로등만이 맛이간 산꾼들을 반기는듯 하다

전통지리에서 이 땅의 등뼈가 되는 대간 길을 정할 때 마루금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느냐(지금의 태백시 북쪽 피재 부근에서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선)아니면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금의 대간 즉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한 데에는 속리산과 더불어 소백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연화봉이나 비로봉에 올라서지 않고 여기 제2연화봉에 서서도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땅의 대간이 '山太極(산태극) 水太極(수태극)', '음양이론',

'대간과 10대강의 발원지' 그리고 '산자분수령' 등의 철학과 원칙을 견지하며

 아름답게 자리잡는 데에는 소백산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여명은 밝아오고

비로봉 가는 길에 여명이 밝아온다. 어렴풋이 보이는 비로봉은. 사방 거칠 것이 없이 우뚝 솟았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기 비로봉보다

높아 보이는 곳은 없다. 체구 또한 당당하다.

그러면서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인자한 큰 형님의 모습이다.

인자한 모습은 비로봉만이 아니다.

 

 지난 구간에서의 촛대봉, 묘적봉, 도솔봉 그리고 오늘 구간에서의 연화봉, 국망봉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 봉우리를 통틀어 하나의 山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 일게다.

그 이름이 小백산이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소백산이란 이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上백산 혹은 主백산으로 불려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작을 小(소)를 앞세운 소백산이라 불려지는 것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군자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소백산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을 가르치고 있다.

“달은 수줍음을 타는 듯 자주 구름 속에 숨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달처럼 수줍어하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
………”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고, 뽐내려 하지 말고,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라’는 뜻으로서

「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이지만 바로 오늘 소백산의 모습이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

 

비로봉에 서면 조망도 조망이지만 피할 수 없는 불청객 ‘바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백산에서의 바람은 일종의 붙박이다.

사시사철 불어댄다. 그러다가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면 바람이 자는 날 소백산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로봉에서의 바람은 절대 쉬어가는 법이 없다.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은 한여름에라도 비로봉에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小白山 毘盧峰..그 이름 만큼이나 이 땅을 두루 잘 비추이며, 빛나는 봉우리..

뽐내지 않고부드러이 여러 봉우리를 보살피는 法神佛 毘盧蔗那佛의 이름이

어울리는 고스락에서 잠시 생각에 젖어본다. 무릇 중생을 이끌어 줄 진정한 등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힘차게 고함치며 그 옛날 충심으로 받들어 따르던

이 땅의 선각자들이 일구어 놓은 오늘의 역사는, 질곡된 아픔을 죄다

치료해 낼 그 날이 가까이 와 있는 것일까..자연의 섭리대로 말없이 웃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밝혀줄 부처는 곳곳에 있을진대..

오늘 전쟁의 비극을 생각하는 걸음내내,  못된 이른바 지도자들의 그릇된 자기 이론이 선한 이 땅의

 백성들을 얼마나 궁핍하고 혼란스런 역사로 몰아가고 있는지..인간이 인간을 계도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로봉 표지석 뒷면에서 剛中 徐拒正이 쓴 한시를 <小白山>을 읽어본다.

 

小白山連太白山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百里揷雲間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로 솟아있네*(비스듬히 이어질 )

分明畵盡東南界       뚜렷이 동남의 경게를 그어

地設天成鬼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아낄 )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에 입을 다물고 현실과 타협하여 그가 누렸던 부귀영화와

넘쳐나는 여유가 소백정상까지 그 풍요로움을 이어 왔던가..

그들의 스승 이계전에 동문 수학한 梅月堂 金時習이 생육신으로 어려운 삶을

여위하고서도 훗날 역사의 조명을 받을 수 있었음에 어떤 보람을 배우고,

내 아들들에게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아니 우선 나의 삶은 어느쪽에 가까운 것일까.. 

天惠夢遊處 소백산 기슭에는 그 시대의 삶이 혼돈스런

대립자들이 훗날 이 공간의 영원한 영혼들의 어울림 마저도 대립되는 것일까..

비로봉 정상 돌탑에서 - 요즘 범여는 고민이 많은가보다  친구 생각에...

 

바람과 스킨십을 하고 있는 비로봉을 보면,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이라는 성어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스스로를 대할 때에는 가을 서리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은 엄하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가볍게 하면(躬自厚而薄責於人)

 원망은 멀어진다(則遠怨矣)라고 하고 …………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君子求諸己)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小人求諸人)라고도 했다.

비로봉에게 칼바람은 가을 서리와 같은 존재라면, 비로봉은 군자 같은 모습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평하면서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전후사정을 사정을 내세워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타인의 사정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경향은 시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최소한의 형평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비로봉을 비롯한 소백산은 겸손을 가르치고 있지만 비로봉이 몸소 보여주는

‘待人春風 持己秋霜’이 더욱 당면한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비로봉에서 국망봉 가는 길 소백산은 참 관리가 잘 돼있다

오른쪽 희방사 지구의 새벽은 아직도 고요한 잠에 빠져 있는 듯, 스님의 새벽 독경소리는

멀어지고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밟고 올라선 짙은 녹음에 가려진 채 공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높은 고도에서 관목 숲을 이룬 고스락은 대간 길에서 그리 흔치 않다.

시간이 적당하다면 피곤한 여름 발길을 충분히 쉴 수 있을 법하다. 오른 쪽으로 방향을 꺾어 북동쪽

비로봉으로 향하는 마루금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작은 오르내림으로 여러가지 야생화와 함께

아름다운 들길을 보여주고 있다.

 

소백산의 여성스러움에 못생긴 남성네도 한 껏 부드러운 애무를 맛보는 아침이다.

 간간이 장식처럼 솟아있는 거친 살결의 바위들이 제각끔 조각작품을 이루며

그 이름짓기를 바라면서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맑은 이슬을 머금은 비로봉 근처 초지들도 산꾼을 반기고

 

1382봉을 지나면서 점점 걸음이 늦어지며 다가오는 비로봉의 구름배경에 감탄하고,

길섶을 장식하는 야생화들과 사귀다 보니 어느새 홀로 산행을 하고 있다.

 빼어난 꽃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는 포근한 능선길에서 넓은 초원의 아량을

배우고,도회에서 온갖 풍상으로 각진 마음을 포근히 적셔 담아낸다.

 

 어디선가 새벽잠을 깬 찌르래기 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려온다.

내 무엇을 크게 바라고 전력을 투구하며 각박한 서울 살이를 애써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진대, 이제 머지 않은 장래에 내 한몸을 이끌고 자릴잡을

그 곳은 이처럼 포근한 풀섶을 가까이에 두고 있겠지..꿈도 녹아들고 한도 녹아들은

우리네 땅 어느 한 귀퉁이에서, 미련없는 한 생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걸어 오를 산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상월봉 가는길에 짙은 안개속에 일출을 맞이하고

국망봉에서 - 국망봉은 충북 단양 가곡면과 경북 영주 순흥면의 경계로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신라를 왕건으로부터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 걸치고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가는 길에 이 곳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하여 국망봉이라 불렀다한다

 

국망봉에서 상월봉으로 이어지는 눈 덮힌 마루금. 길진 않지만 장쾌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대간 마루금 가운데 장쾌함으로 치면 여기만한 곳은 드물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올라서서 없어진 국가(방향)를 바라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국망봉.

그는 國望峰에서 서서 신라 쪽(경주, 서라벌)을 바라보며 亡國(망국)의 한을 곰씹었겠지만

상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장쾌함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국망봉에서 비로봉을 배경으로

 

 캔 막걸리 한잔이 덥지 않은 날씨 탓에 그 효과가 반감되지만

역시 땀 흘린 뒤의 한 잔 막걸리는 내 기쁨들 중의 하나다.

 국망봉 정상에서 식사를 마친 후 1328안부를 올라서니 국망봉으로 오름길이

잘 정비되어 반겨주고, 초암사 갈림길을 지나 아름다운 바위들로 장식된 정상을

빠른 걸음으로 내딛으며 올라선다. 멋진 정상 암릉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자리한

정상표지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옆에 있는 안내문에서 영혼을 접해본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제천 백운면에 '東京邸'를 짓고 칩거할 때, 월악산의

덕주공주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슬퍼하던 마의태자의 영혼을

적고 있다. 한편 조선 선조 때 수천장 배 순이 돌아가신 임금을 그리워하던

장소로도 전해지기도 한다. 

흔히들 소백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 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국망봉에서 바라본 비로봉 - 보일듯 말듯 사내의 애 간장을 녹이는 여인처럼

자기 모습을 노출을 안 시키려고 애쓰는 비로봉의 모습

 

국망봉을 지나 펼쳐지는 상월봉 내림길은 멀리 동쪽으로 부터 밀려오는 겹겹의

산마루 파도들로 장관을 이룬다. 다소 흐린 날씨가 일구어 내는 또다른 절경이요, 

이것이 바로 이 땅의 영혼들이 골마다 살아 있는 진정한 산수화임에 틀림이 없다.

10여분을 밟아 내린 후 왼쪽 우회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상월봉 정상을 

 올라서니 멀리 신선봉 갈림길의 늦은 맥이재를 향하는 행렬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 천태종 구인사의 上月大師가 이곳에서 절터를 골랐던 모양이나,

 좋은 전망에 비해 정상표지석은 없고 단지 내림길이 고약하게 위험하여

우회길을 만든 모양이다. 간이 로프라도 하나쯤 설치했으면 좋겠다.

바위틈에 숨어 고운 자태를 뽐내는 청사초롱- 상월봉 가는 길에서

늦은맥이재(해발1265m)에서

신선봉 갈림길의 늦은맥이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추스린다. 

비교적 빠른 진행에 날씨마저 여름을 식혀주니 배낭 속의 식수가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여유로운 내림길에서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오른쪽 안부를 올라서니 구인사 길은 출입을 통제하고, 

오른쪽으로 서서히 내림길을 밟으니 1시간여의 잡목 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후반 구간의 발길이 더욱 편하고, 발아래 묵은 낙엽이 양탄자를 밟는 기분으로

 발바닥에 쿠션을 더해준다.

여기까지 울매나 뛰었던지 범여 신발좀 보소 - 오늘은 산을 왔는지 유격훈련을 왔는지 나도 모르겠소

 

1,060봉을 지난 후 연화폭포 쪽 좌석리 갈림길에서 잡목 숲을 지나 1시간여의

지루한 숲 속에서의 전망없는 트래킹을 계속하여 1032봉을 내려서니 마당치에

도달하고 꽤 넓은 공터에 이름 모를 잡초만 가득하여 움푹 패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스쳐오는 녹엽에 피곤해져 오는 시선을 멈춘 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의 영혼이 몸을 누이고 이 곳 숲속으로 피신했음직하다.

산수국도 참 이쁘게 피어 있고

 

마당치를 지나 형제봉 갈림길까지 꽤 가파른 오름길을 모처럼

트래바스하면서 30여분을 마지막 힘을 쏟는다.

소백의 큰 줄기를 벗어나기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며 부드러운 발길로

이어진 종주길을 마지막 큰 오르내림으로 마감을 지어준다.

 왼쪽 형제봉으로의 오름길을 버리고 급경사 내림길로 이어지며 잠시

칼바위 봉우리를 올라 섰다가 다시 우회길로 내려선다.

헬기장을 지나 고치령 0.9km 이정표가 반갑다.

길섶의 야생화들이 작별을 아쉬어 하며 고치령으로 향한다

오늘 백두대간 끝지점 고치령(해발950m) 에서

긴 소백산 종주의 마지막 발걸음을 수수하게 생긴 소백지장군 장승과 그 수졸 장승이 반겨준다.

고갯길 건너편에 새롭게 단장된 산신각이 꽤 화려하다.

북쪽 영월 땅에서 생을 접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이 되어 태백천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에 모셔져 있고, 남쪽 순흥 땅에서 복위를 도모하다 안동에서

생을 마감한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이 되어 소백지장군의 호위를 받는다.

산행이 끝났나 싶었는데 이런 아스팔트 길로 5km를 걸어 좌석리까지 오니 엄지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좌석리 신작로 옆 맑은 개울에서 땀을 씻으니 한 여름의 더위가 가져다준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