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7년 6월 29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무덥고 짙은 박무
☞산행거리: 도상거리 19.6km + 어프로치 0.6km / 7시간 35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추풍령 터미널-추풍령-금산-매봉재-무명봉-498m봉-해주오공 묘지-435.7m봉
곤천고개-502m봉-사기점고개-시멘트도로-난함산갈림길-시멘트 도로
신애원 농장-작점고개-무좌골산-갈현-기도터 바위-폐헬기장-687m봉
용문산-웅북리갈림길-용문산기도원 안부-용문사 갈림길-기양지맥 분기봉
안부-웅이산-안부-683.5m봉-암봉-475m봉-무명묘지-갈림길-큰재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 경북 김천시 어모면,봉산면 / 상주시 공성면, 모동면
한 주일내내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응어리로 모든게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걸 풀기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인데... 막상 떠나려니 갈데가 없다
거기다가 이번 주말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우중산행을 할 수도 없고, 진권 아우를 꼬셔서
남은 부용이나 주왕지맥을 끝내려고 하는데 젊은것이 어찌나 바쁜지 스케줄을 맞출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대간의 한 구간인 추풍령에서 큰재까지 가기로 하고 열차표를 예매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수서발 → 대전행 열차표
예전에 주중에 상상도 못했는데 요즘이 간이 배밖까지 나와 주중 산행을 감행한다
사무실에 있어봐야 별로 할 일도 없고, 요즘에 공사를 수주해봐야 이익도 별로
없어서 속된말로 죽쑤어서 개주는 꼴이다... 공사 어설프게 맡았다간 명색이 오너라는
사장이 현장에서 청소하는 잡부보다도 못할 정도로 수익이 엉망인 레드오션 직업이 돼버렸다
내가 종사하는 업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인건비는 천정부지이고 그러다보니 가게 쥔장은
수익성이 없으면 놀고 앉았지 일감을 수주하지 않는다
요즘에 비정규직 철폐, 시급 10,000원을 올려달라고 노조 간부라는 자들이 연일 데모를 하는데
정작 그 자들은 정치 권력화, 귀족화가 되어 있는데 뭘 더 바라는 건지...
요즘 자영업자의 현실은 일하는 사람이 100원 받으면 쥔은 50원 벌이도 안 되는걸 알기나 하는가...
수서역(05:15)
예전엔 내가 사는 동네는 열차 타기가 참으로 불편하여 가급적 대중교통은 버스를 이용했는데
작년부터인가 집에서 10분거리에 있는 수서역에 SRT라는 특급열차가 생겨서 참으로 편하다
당일날 대중교통으로 추풍령을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SRT를 타고 대전역으로 가서 다시
대전복합터미널... 거기서 거창가는 버스를 타고 추풍령에서 내리는게 가장 빠를듯 하다
수서역에서 대전역으로 가는 05시 30분발 열차를 타고 열차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경제신문을 잠깐 보는 사이에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을 한다 (50분 소요)
대전역에 도착하니 06시 20분... 플렛홈을 나오니 예전에 한번 들렸던 가락국수집이 보인다
이곳에서 가락국수 한그릇에 꼬마김밥을 곁들여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역을 빠져 나온다
대전역(06:45)
대전역을 나오니 역전앞에는 마치 서울 중앙시장을 연상케 할만큼 노점상이 벌려있어 이채롭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대전복합 터미널로 향한다(택시비 3,800원)
대전복합터미널(06:55)
대전발 → 추풍령행 버스표
출발시각 | 차편정보 | 노선명 | 어른요금 | 아동요금 | 중고생요금 |
07:20 | 거창고속(일반) 1:00 소요 |
대전복합발 거창행 3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08:20 | 거창고속(일반) 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0:20 | 거창고속(일반) 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1:3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3:3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4:5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6:3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8:2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19:40 | 거창고속(일반)1:00 소요 | 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 4,500원 | 2,300원 | 3,600원 |
대전에서 추풍령가는 버스 시간표
1.노선정보(대전복합발 거창행 3행): 대전복합 -> 금강유원지 -> 황간
-> 추풍령 -> 김천 -> 지례 -> 대덕(경북) -> 적하 -> 웅양 -> 거창
2.노선정보(대전복합발 김천행 1행): 대전복합 -> 금강유원지 -> 황간 -> 추풍령 -> 김천
07시 20분 대전발 → 거창행 버스
표를 예매하고 나니 20여분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버스에 오르니 이른 아침을 집을 나온 탓인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대전을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선 다음에 금강휴게소, 황간을 지나 추풍령에 도착한다
대전에서 12명이 버스를 탔는데 황간에서 11명이 내리고 달랑 나혼자만 타고 추풍령으로 향한다
추풍령 터미널(08:10: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소재)
난생 처음와 본 추풍령터미널은 전형적인 시골의 버스터미널이다
이곳에서 내려 오늘의 백두대간 들머리인 추풍령고개로 향하는데 대교삼거리를 지나
좌측으로는 골재 채취로 인해 산의 절반이 날아가버린 흉물스런 금산이 보인다
추풍령터미널에서 도로를 따라서 10분정도 걸어니 추풍령 삼거리가 보인다
추풍령(秋風嶺:221.3m:08:2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가 221로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추풍령은 죽령,조령, 화령과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4대 고개였다.
그러나 다른 고개에 상대적으로 비해 낮기 때문에 관방으로서의 역할이
미약했던 것 같다. 관방이란 방어진지 또는 요새 개념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조령과 추풍령으로 정했다.
왜군이 이들 두 고개를 너머 충주와 청주를 진출한 다음에 한양으로 입성했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최고의 문장가인 다산 정약용은 ‘추풍령을 넘어며’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풍령을 넘어 대전과 천안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청주와 죽산(지금의 안성땅)을 지나 한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쌓네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였다만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디 누가 안단말고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추풍령을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남상규 노래비가 있는 추풍령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님의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며,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 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내륙 한양길의 절반 - 반고개인 추풍령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 준공기념탑
경부고속도로의 가장 중간인 추풍령 휴게소에 준공 기념탑이 서 있고 이 기념탑의 설명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우리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이곳 추풍령에 건설과 번영을 상징하는 높이 30.8M의 탑을 세운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 온 뒤
감명을 받아 특유의 군대식 밀어붙이기로 건설한 도로라고 잘 알려져 있으며, 공기는 불과 2년 5개월에 불과했다.
최단기간 건설로 기네스북에 오른 고속도로, 전국 일일 생활권 연결로 산업화 시대를 열어젖힌 조국 근대화의 기수.
경부고속도로를 수식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커팅식(1970년 7월 7일)
백두대간 산꾼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는 모텔 카리브 앞 골목을 따라서 올라가니 예전에 없었던
농협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곳을 지나 비닐하우스 포도밭을 지나 대간 숲으로 들어선다
숲으로 들어서니 산꾼들의 시그널들이 외로이 걷는 범여를 응원하는 듯...(08:30)
언젠가 한번 이용하리다
평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등로의 거미줄이 상당히 성가시다
높은 습도와 바람 한점없는 길을 힘들게 올라서니 산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금산 아래에 도착한다
금산의 안내판
김천(金泉)의 유래가 되었다는 금산은 인간의 탐욕으로 산 정상이 날아간 채로 흉물스럽게 보인다
가지 말라는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금산에서 바라본 추풍령면(충북 영동군 소재)과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추풍령에서 작점고개로 가는 도로의 모습
정상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금산의 모습
人間의 傲慢과 貪慾으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금산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금산(金山:370m:08:43)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북지역에서 보면 산이
온전하게 보이나 충북지역은 산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다.
채석을 중단한지는오래 되었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한 후 방치 되고 있다.
아찔한 벼랑으로 변해버린 산 정상에는 어느새 인적이 뜸해진
백두대간 종주로가 벼랑과 평행선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다
금산 정상을 내려와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매봉재(08:52)
고개의 역할을 잃어버린 매봉재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만이 고개를 지키고 있다
산수국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도 등로에는 거미줄이 많아 상당히 성가시다
무명묘지도 만나고...
무명봉(08:58)
다시 내리막길...최근에 내린 비 탓인지 영지버섯 幼生들이 간간히 보인다
다시 편한길을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동물이동 추적기도 보인다
등로 우측의 묘지를 바라보며 올라서니...
또다른 무명봉이 보이고...
다시 호젓한 길을 나홀로 걷는데 오랫만에 범여의 두 발(足)이 호강을 한다
등로옆에 있는 앙증맞은 바위
노루발(꽃말:소녀의 기도)
쌍떡잎식물 진달래목 노루발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로서 노루발풀이라고도 한다. 숲속에서 자란다.
높이 약 26cm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벋으면서 퍼져나간다.
꽃줄기는 곧게 서고 잎은 1∼8개가 밑동에 달리고 둥글거나 넓은 타원형이며 길이 4∼7cm, 나비 2.5∼4.5cm이다.
잎자루와 더불어 자줏빛을 띠지만, 잎맥부분은 연한 녹색이고 가장자리에 얕은 톱니가 있다.
꽃은 6∼7월에 피고 노란빛을 띤 흰색이거나 흰색이며 5∼12개가 밑을 향하여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화관은 넓은 타원형이고 5갈래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이고 암술대는 1개이다.
씨방은 납작하고 꽃받침은 5갈래로 갈라지나 밑동은 붙는다.
열매는 삭과로서 납작한 공 모양이며 9월에 갈색으로 익는다. 지름 7∼8mm이다.
암릉사이의 오르막으로 오른다
498m봉(09:20)
등로 좌측 아랫쪽에 묘지가 있고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보인다
묘지 너머로 보이는 동무골산은 짙은 박무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보인다
海州吳公 묘지(09:32)
다시 완만한 오름길
435.7m봉(09:38)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곤천고개가 나온다
곤천고개(09:42)
김천시 봉산면 곤천마을에서 영동군 추풍령면 작동마을과 작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무심코 가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지도상에는 옛고개로 표기가 되어 있다.
고려 말까지는 마을 앞에 건천내가 있어 건천이라 하였으나. 그 후 음향오행설에 의해 조선시대 황간군
백호촌장 손정만이 곤천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손씨를 비롯하여 여러 姓氏가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무명봉으로 올라선 다음 우측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바람 한 점이 없고 생각보다 습도가 많은 탓인지 상당히 덥다
502m봉(09:55)
502m봉에서 내려서자마자 우측으로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짙은 박무에 가려진 난함산이 보인다
대간 등로에서 바라본 난함산의 모습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733.4m)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卵含山)이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마도 한문에 ‘알 난(卵)’을 ‘토끼 묘(卯)’로 잘못 해석한
해프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범여의 생각 中에서)
무명봉을 지난 다음에...
편안한 등로를 걷다가보니 넓은 임도가 있는 사기점고개에 도착한다
사기점 고개(沙器店:390m:10:28)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沙器店)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올라간다
대간길에서도 만나는 신 선생님의 시그널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능선으로 접어든다
조금만 무명봉에 올랐다가 내려서는데 좌측으론 사방댐같은 시설물이 보인다
국방부 팻말이 있는 곳으로 오르니...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오는데 난함산 정상은 군부대와 KBS송신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10:48)
일월비비추가 요염한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듯 하다
급경사의 능선으로 올라서니...
난함산 갈림길(10:57)
이곳에서 우측으로 900m 지점에 난함산이 있으나 그냥 작점고개로 향한다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난다(11:05)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코너에서 오목거울을 만나고... 셀카놀음을 한다
굽은 도로에서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지름길을 택한다
자귀나무(꽃말: 환희)
자귀나무는 밤중에 수면 운동으로 잎이 접히는 모습이 부부 금실을 상징한다 하여
음양합일목·합환목(合歡木)·합환수·합혼목(合魂木)·합혼수·야합수·유정수라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예전에는 자귀나무를 울타리 안에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
자귀나무처럼 잎이 예민한 미모사(신경초·잠풀)는 외부의 자극에 잎이 오므라들어 붙어
버리지만 자귀나무는 낮에 펼쳐졌던 잎이 해가 지면 서로 마주 보며 접힌다.
이처럼 밤중에 잎이 접혀지기 때문에 자귀나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고,
자귀의 손잡이를 만드는데 많이 쓰이는 나무여서 자귀나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쌀나무·소밥나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콩깍지 같은 열매가 바람이 불면 흔들려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여설수라는 이름도 붙었다.
꽃이 아름답고 화려하여 사랑을 받는 관상수이다. 줄기는 굽거나 조금 누운 것처럼 보이며 잿빛이 도는 흑색이다.
긴 가지가 드문드문 나와 퍼지는데 작은 가지에는 털이 없고 능선이 있다.
유사종으로 작은 잎이 길이 2~4.5cm, 나비 5~20mm인 것을 왕자귀나무라 한다. 관상용·약용으로 이용된다.
나무껍질을 합환피(合歡皮), 꽃봉오리를 합환화(合歡花)라고 하며 약재로 사용한다. 목재는 기구 및 수공 재료로 쓴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산제로 하여 사용한다.
직진의 숲으로 들어선 다음에 조금을 더 내려가니...
또 다시 조금전에 헤어졌던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산딸기가 지천이다
개망초도 많이 보이고...
개망초(꽃말: 화해)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외래종 식물로 꽃의 모양이 계란과 비슷하여 계란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망초는 우리나라에서 철도가 건설될 당시, 미국에서 수입된 철도 침목에
묻어와서 자란 꽃으로 철도가 놓인 곳을 따라 흰색 꽃이 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이 꽃의 씨를 뿌렸다고 하여 망국초(亡國草)라 불렀고 다시 망초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에 망초보다
더 예쁜 꽃이 나타났는데 망초보다 더 나쁜 꽃이라하여 개망초라 불렀다고 한다
신애원 농장 갈림길(11:20)
갈림길 우측으로 태양광 방열판이 보이는 신애정신병원과
신애원 농장이 나오는데 가축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
예전에 밭이었던 넓은 공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쓰러진 나뭇가지 아래로 下心을 하며 지나니...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대간길 능선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密陽 朴公의 묘지를 지난다
무명봉(11:28)
무명봉에서 내려오니 추풍령에서 김천으로 넘어오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에서 바라본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雀店里)의 모습
내남산 자락에 있는 작점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성동소류지가 있으며 밭농사를 주로 하는 산촌마을들로 자연마을로는 작점, 작동 등이 있다.
작점은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은 임진왜란 후에 김씨들이 다래
덩굴을 쳐 내고 이룬 마을로 숲이 우거지고 새 소리만 들리는 한가한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도로에서 내려서 우측으로 내려가니 작점고개의 상징물과 능치정(能峙亭)이 있고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로 향하는 도로가 보인다
능치리는 예로부터 도요지가 많은 것을 미루어 보아 오래된 마을로 여겨진다.
1568년 평택임씨가 입향하였으나, 거의 떠나고, 몇 집만이 살고 있다.
1578년 경주최씨 진반이 황금면 반수에서 이주하였다.
능청 마을은 1889년 밀양박씨 형희가 공성 영오에서 이주하였고,
황산여씨와 풍양조씨 양문도 일찍 들어와 살았다.
능치 1리는 능점. 능청 두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초에는 어모현에 속하였다.
1416년 김산현이 승군됨에 따라 본현을 흡수하고, 김산군 구 소요면과
아천면을 통합하여 어모면이라 개칭하고 그 관내가 되었다.
1949년 군을 금릉이라 개명하고, 1971년 능청. 능점을 합하여 능치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어모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10km 떨어진 산간 오지에 있는
두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마을의 거리는 800m 정도이며, 능청(能靑)에는
초등학교와 보건진료소가 있다. 동쪽은 옥계리에 인접하고, 북쪽은 깊은 골짜기로 능치 2리에
이어지고 서쪽은 충북땅인 황금면으로 이어진다. 능치 혹은 능점. 능청에서 능(能)-계의 지명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곰을 뜻하는 말이며, ‘능치’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곰티라고 풀이하면 옳을 것으로 본다.
작점고개(雀店峙:340m:11:30)
경북 김천 어모면 능치리에서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로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는 능치재라 부른다.
작점고개 이름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능치정(能峙亭:11:30~12:05)
작점고개에 있는 능치정...이곳은 엄격하게 말하면 영동군 작점고개가 아닌 김천시 능치고개가 맞다.
행정구역도 영동군이 아닌 김천시이다... 이름은 영동군이고 소유는 김천시 형국이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산꾼을 만난다
서울 교남동에서 오셨다는 박 선생님... 어제 추풍령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셨다는데 100L정도 되는
베낭에다 뭘 잔뜩 넣으셨는지...이곳에서 옷을 말리고 오늘은 이곳에서 비박을 하시려는 모양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이신데 최근에 공직에서 퇴직하여 홀로 유유자적 대간길을 걷는 중이시란다
그러면서 조금전에 추풍령 택시로 막걸리를 택배해와서 혼자 마시려는 중인데 잘 되었다고 하면서
나를 불잡고 엄청나게 큰 그릇에다 막걸리를 주시는 바람에 배가 고프던 차에 잘 먹었다
안 그래도 베낭 무게를 줄이려고 빵과 우유로 점심을 대신하려고 했는데 이런 횡재를...
커다란 코펠에다 막걸리 몇 잔을 얻어 먹으니 배가 든든하여 그 대신에 내가 가지고 온
빵과 우유를 난 박선생님에게 드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40여분의 시간이 지나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는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조그만 표시석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아그들의 흔적
박 선생님과 작점고개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대간 능선으로 올라서니 예전에 없었던 묘지가 나온다
등로에 올라 호젓하게 걷는데 갑자기 고라니 한마리가 놀라 도망을 간다
등로 우측으로 희미한 임도가 보이는 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무좌골산을 향한 빡센 오름길이 시작된다
무좌골산(474m:12:25)
예전에는 474m봉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지도상에 무좌골산이라
기록이 되어있건만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무데도 없다.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삼각점만 덩그러니 대간길 가운데에 있다.
마모가 심해 활자를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 무좌골산 정상 삼각점
무좌골산 정상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2시 방향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한 여름철에 녹음으로 우거져 조망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데 갑자기 우두둑하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려 옆으로 쳐다보니 커다란 뫳돼지 한마리가 베낭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는데 나도 엄청나게 놀랐다
갈현(葛峴:12:4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에서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도치량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갈현 또는 칡고개라 부르는데 예전에 칡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고개 아래에 도치량마을은 최근까지도 옻(漆)이 많이 생산되어 옻칠을 하는 행랑
즉 도칠랑(塗漆郞)이라 하는 것이 변음이 되어 그 후 도치량(道治良)으로 변했다고 한다
갈현고개에서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바람 한점이 없어 무척이나 덥다
평평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상주중앙 라이온스에서 각국의 인삿말을 적은 플라카드가 보인다
쩍벌 소나무
이곳에는 봉따먹기 대가들의 시그널이 있는걸로 봐선 봉우리 이름이 있을듯 한데...
기도터 바위:12:52)
폐헬기장(12:55)
계속되는 오름길... 호젓하게 홀로 걷고 있는데 조금전 작점고개에서 만난 박 선생이 격려 카톡을 보내준다
숲속이긴 해도 바람 한점이 없다보니 무척이나 덥다
687m봉(13:20)
687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능선이라 그런지 오늘 처음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편안 등로가 나오고...
용문산 아래에 있는 헬기장이 보인다
용문산(龍門山:708.3m:13:45)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응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 지명은 맷돌봉이라고 불렀다.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다.
1800년 무렵 박송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용문산(龍門山)이라 이름 지었고,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기도원인 애향숙(愛鄕塾)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는 누구나 다 용납하고 만나 준다’는 뜻으로 ‘용(龍)’자를
용서하다는 의미의 ‘용(容)’자를 써서 용문산(容門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25000 지형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산이지만 용문산기도원(일명 용문산 신앙촌)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경북 상주군 공성면 백학산, 국수봉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문산을 지나 갈현(葛峴),사기점고개,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며 이 일대 백두대간 산줄기 높이는 500~700m로 대체로 낮은 산지를 이룬다.
능선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쪽 비탈면인 용문산마을에서는어모면의 주요 하천이자
어모천을 대표하는 지명인 아천(牙川)이 발원하여 골짜기를 따라남쪽으로 흐르다가 갈현 부근에서 발원한 아천의
다른 지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본류를 이룬다. 영동군에 속하는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반계천과
추풍령천을 이루어 초강으로 흘러든다.
용문산의 유래 안내석
이곳 삼각점도 마모가 되어 인식을 할 수가 없다
뒤돌아 본 용문산 정상의 모습
용문산은 숲에 가려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기에 서둘러 국수봉으로 향한다
용문산에서 내려오니 조금만 암릉구간이 나오고...
나무 계단을 내려섰다가 오름길로 올라선다
강아지처럼 생긴 바위도 만나고...
웅북리(熊北里) 갈림길(13:55)
영동군 추풍령면에 있는 웅북리는 추풍령면의 동북쪽에 있다. 지장산 자락에 위치하여 맷돌봉,
국주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관리천이 흐르며, 쌀과 과수를 주로 재배하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곰뒤(웅북), 각골(각곡,중웅), 상웅, 하웅 등이 있으며 마을이 곰산(웅이산) 뒤쪽에 있어
곰뒤 또는 웅북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상웅은 웅북 위쪽에 있는 마을이며, 하웅은 웅북리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중평이라고도 부르고 신수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멋쟁이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니...
무명봉(14:08)
나무 계단이 나오고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또다시 무명봉이 나오고...
이정표가 나오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무명묘지(14:11)
무명묘지에서 급하게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웅북리와 용문산 기도원으로 이어지는 안부가 나온다
용문산 기도원 안부(14:15)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愛鄕塾)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심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며,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하는데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1979년 3월 30일 미국 오순절(五旬節) 성결교회와 제휴하여 대한예수교 오순절 성결교회를
설립하고 제단법인체를 구성하여 7명의 인사로서 사무, 전도, 교육, 출판, 농림, 건설, 후생의
7국을 각기 분담하여 용문산기도원 사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다고 한다.
오늘 산행중 가장 힘든 곳으로 용문산에서 V자 형태로 안부까지 뚝 떨어졌다간 다시 올라가는데
주변에는 철쭉 군락지인데 상당히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바람 한 점이 없는 탓인지 엄청나게 힘이 든다
용문사 갈림길(14:30)
우측으로 용문사로 향하는 등로가 보이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기양지맥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기양지맥 분기봉(734m:14:32)
안부(14:36)
기양지맥(岐陽支脈)은 기양지맥(岐陽支脈)은 백두대간 국수봉(794m) 남쪽 0 .6km지점인 무명봉( 734m)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여남재(3번국도),백운산(631m),기양산(705m),수선산(683m),주아현,형제봉(532m),신산(457m)를 지나
감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구미시 선산읍 원리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45.8km되는 산줄기로
감천(甘川.69km)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또다시 나무계단의 오르막은 시작되고...
조그만 암릉구간에 손가락 굵기의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의 모습
숲길을 벗어나니 햋볕이 무척이나 따갑다
상주시 공성면에 있는 영오리(靈梧里)는 바로 옆 용문산을 비롯 많은 산들이 주변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오동, 샛터, 큰마, 말랑 등이 있으며, 마을 앞의 들판에 많은 바위가 까마귀가
앉아 노는 형상이라하여 오동이라 불렀으며, 오동부락에 살던 주민들이 지네의 등살에 못이겨
피신하여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라 하여 샛터라 불렸다.
큰마는 당초 오동부락에서 피신하여 온주민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영오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주 특작물로는 감,밤,모과가 있고 특히 밤나무가 많다.
웅이산(熊耳山:795m:14:52)
경북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최근엔 지명이
웅이산(熊耳山)으로 바뀌었고 정상석도 국수봉((掬水峰)에서 웅이산으로 바뀌었다
국수란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뜬다는 의미의 掬水(국수)’, 라 부르는데
뜬 물은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말인 즉 국수봉 또한 물을 가르는(낙동강과 금강을 가른다) 분수령이라는 뜻일게다.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으로 맑은 낮에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되는 곳이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2009년 3월 22일 8년전 백두대간 북진 길에서...저 때는 아주 영계였는데 ㅋㅋㅋ
최근까지 국수봉(菊水峰)으로 불리어 오다 2012.5.18.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웅이산(熊耳山)'으로 확정하였다 하며
국수봉이라는 지명이 유래도 뜻도 없이 붙여졌다고, 상주시에서 국가지명위원회에 변경의뢰를 한 결과라고 하며.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덩치에 비해 작은 곰의 귀(熊耳)처럼 산정이 능선에서 살짝 솟아올라 있다 한다
다음 구간인 백화산과 그 너머로 윤지미산이 아련히 보인다
정상석은 국수봉에서 웅이산으로 바뀌었건만 이 안내판은 예전 그대로이다
웅이산에서 큰재로 내려서는 등로는 상당히 급경사이다
급경사의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서는데...
외로운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안부(15:05)
무명봉(15:12)
다시 편안한 길로 계속 내려간다
683.5m봉(15:15)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걸어둔 산패가 있고, 누군가 민영봉이 적어놨는데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스마트폰의 트랭글앱에서도 민영봉이라 일러주는데 등로 가운데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인식할 수 없는 683.5m봉 삼각점
뒤돌아 본 683.5m봉
계속되는 내리막길
암봉(15:20)
다음에 가야할 백두대간 등로와 큰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만큼이나 참으로 힘들게 사는구나... 前生에 뭔 業報이기에...
475m봉(15:27)
무명묘지(15:40)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갈림길(14:54)
우측으로 뚜렸한 임도가 있고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도 있다
지기재 산장 안내판도 보이고...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큰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큰재 내려서기 직전에 있는 신곡리 마을 표시석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에서 도곡리를 넘어가는 920번 지방도 지나는 곳으로
이 신곡리는 일면 납실 또는 남실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김천에
살던 신씨(申氏)가 이곳으로 피란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신곡(申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실마을 초입에 있었던 욕쟁이 할머니 집(2013년 3월 13일 남진때의 사진)
8년전 백두대간 북진길에 큰재에서 내려와 땀에 젖은 몸을 좀 딲으려고 이 집에
들려 수돗물 썼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집이다. 산꾼들에겐 욕쟁이 할머니로
소문난 집이었는데 지금은 그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2009년 3월 22일 북진때의 큰재 모습
큰재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어 버렸다
예전에 욕쟁이 할머니집도 없어져 버렸고, 큰재 앞에 있었던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는 폐교가 되고
그 대신에 상주시에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백두대간 생태 교육장을 만들어 놨다
드디어 큰재가 있는 920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큰재(320m:15:55)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곡리에서 공성면 도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의 초등학교 자리는
상주시에서 운영하는 백두대간 생태 체험장이 들어서 있고, 예전에 비해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낙동강과 금강의 발원지로 갈라지는 큰재는 우하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상주에서 한양으로 가기위해 넘어야 할 큰 고개라 해서 큰재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라 임진왜란을 비롯한 각종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기도 한 곳이다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생태 교육장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으려는데
남실마을에서 하얀 승용차 한대가 나오는게 아닌가... 씻는 걸 포기하고 손을드니 차가 선다
김천에 산다는 40대 초반의 여인... 친정인 남실마을에 포도 농사를 도와주고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그러면서 옥산까지 태워 주겠다고 하니 갑자기 양넘 지갑 줏은 느낌이다
이 여인은 옥산 버스 정류장 직전에서 나를 내려주고 김천으로 가는 도로로 올라선다
더운 날씨에 너무 고마웠습니다...세세생생 복받을 깁니다
옥산 버스 정류장(16:10)
이곳에서 10분정도 기다렸다가 상주시내로 가는 직행버스를 탄다
상주 시외버스 터미널(16:40)
터미널에 도착하니 17시에 동서울터미널로 향하는 버스가 있다
식사할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얼른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근 다음에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 2개와 닭꼬치 2개를 사서 버스에 오른다
17시에 상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근처의 점촌을 거친 다음에 서울로 향하는데 손님이라곤 달랑 7명이다
버스에서 닭꼬치와 캔맥주 2개를 허기를 면하고 깊은 잠에 빠지는데 고속도로는 공사구간이 많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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