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섭존자가 행했던 頭陀行을 생각하며 佛國土의 大幹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7년 7월 8일~9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오후에 맑고 엄청나게 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28.5km (실제거리:약 30여km) / 13시간 1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2명과 함께
☞ 산행코스: 댓재-산신각-댓재옛길-햇댓등-934m봉-명주목이-1,024m봉-1,028m봉-1,016m봉
통골재(목통령)-갈림길-1,241m봉(경주김씨 묘)-조망바위-두타산-의가등-무명봉
박달령-문바위-문바위재-학등-청옥산-연칠령성-망군대-고적대-쉼터-전망대
고적대삼거리-암봉-갈미봉-1,143m봉(우회)-너덜지대-샘터-898m봉-이기령-960봉(H)
안부-상월산-암봉-원방재-암봉-820m봉-862m봉-1,022m봉(H)-전망대-987m봉-859m봉
863m봉-832m봉-서낭당-쉼터-NO225송전탑-백복령
☞ 소 재 지: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미로면 / 정선군 임계면 / 동해시 달방동, 삼화동 / 강릉시 옥계면
본격적인 장마철인가 보다...토욜날도 하루종일 비는 내리고...
대간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험난한 두타, 청옥산 구간 참으로 많이 망설여진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후배 태양대장한테 전화를 한다.
장마철에 비도 많이 오는데 장거리 산행을 가야 하느냐고...
어째던지 비 맞으며 하는 산행이 싫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데 젊은것이 씨알도 안 먹인다
행님...강원도 영동지방에는 비가 안 온답니다... 그렇다고 이런 곳에 빠지면 책 잡힐것 같아
대간길을 나서는데... 아들이 난리를 친다...아부지 위험한데 꼭 가야 하십니까
이제 나이를 먹으니 나중에 제삿상 차려줄 아들의 눈치가 슬슬 보인다.
일찌감치 나를 포기하고 사는 마눌은 소가 닭 쳐다보듯 하고...
하기사 8년을 넘게 매주 베낭을 메고 집을 나가는 사람 말린다고 안 갈 사람도 아니며
거기다가 한꼬라지하는 성질머리에 말 붙혔다가 본전도 못 찾으니 참고 사는 모양이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샤워를 끝낸 다음에 탑승지인 사당역으로 향하는데 그 사이에 비는 그친다.
비라도 쏟아지면 핑계잡고 집으로 오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버스에 올라 용인휴게소에 도착하니 오랫만에 진권아우가 탑승한다
대장의 어쩌구 저쩌구 산행구간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늘따라 의자가 엄청 불편하게
느껴지며 도데체 잠을 이룰수가 없는데 버스는 어느덧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동해안 고속도로로
향하는데 차창 밖으로 내다보니 비는 커녕 윤오월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동해안 고속도로 구정 휴게소에서 속초에서 온 산꾼부부를 태우고 댓재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댓재(810m:03:00)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38번 도로를 빠져나와 미로면소재지에서 정선으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424번 지방도로를 오르면서 가뿐 숨을 내쉬는데 나 역시 야심한 새벽에 뭔 짓거린지...
버스는 힘들게 여러번의 용트림 끝에 댓재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니 심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온도계는 21.7도를 가리키고 그리 춥지 않으니 산행을 할만 할듯하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위치하며 두타산과 황장산을 잇는 백두대간상의
고개로 삼척의 진산인 두타산 산행은 댓재에서 부터 시작이 된다.
큰 산줄기를 넘어가는 고개의 의미인 “대고개(大峙)”가 변음 되었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山經表에는 죽현(竹峴), 고산자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죽령(竹嶺)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조릿대(산죽)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죽현,
죽치령이라고도 불리며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을 잇는 옛 고갯길로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인데 1984년 10월 이곳으로 424번 지방도가
개통되면서 지금의 댓재가 되었다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산행을 시작하다(03:20)
頭陀山 山神閣
댓재 광장 바로있는 산신각은 “頭陀山 山神閣”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산신각은 쉰음산에 있던 것을 고갯마루로 옮겨 왔다고 한다
댓재에서 능선으로 접어들자 야심한 새벽에 산신각을 만나는데 오늘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산왕대신에게 예를 표하려고 문을 열려니 문은 아쉽게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다.
선 채로 저두일배의 예를 올리고 길을 떠난다
댓재 옛길 표지판(03:27)
산신각을 올라선 지 얼마되지 않아 댓재 옛길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올라서면 햇댓등으로 올라서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명주목이로 향하는 길이다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으로 빠른 속도로 올라서는데 선두는 벌써 얼마나 가버렸는지 렌턴 불빛조차 안 보인다
그나마 산행하기 좋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고마운 바람이 불어줘 편안하게 햇댓등에 도착한다
햇댓등(03:37)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유래를 보면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래도 이 햇댓등은 조금 더 가면 만나는 댓재 부근에 있는
산신각 때문에 생긴 지명인듯 싶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햇댓등에 도착하니 선두로 가신 분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이곳에서 선 채로 1분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어둠속에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명주목이(03:48)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에서 하장면 번천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햇댓등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내려오니 명주목이가 나온다
이곳은 정통으로 대간을 걷는 산꾼들에겐 아주 유의해야 할 구간이다
북진을 하는 산꾼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남진을 하는 산꾼들은 대체적으로
이곳에서 이정표를 따라서 걷다보면 햇댓등을 놓치는 憂를 범할수가 있는 곳이다
어둠속에 금강송이라 부르는 멋진 황장목(黃腸木)들이 자주 눈에 띤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난구간의 황장산에는 황장목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그곳을 황장산이라 부르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명주목이에서 다시 오르막 길이 시작되고 크고 작은 무명봉을 오르락 내리락거린다
1,024m봉(04:18)
로보캅 바위(04:22)
산행 시작 1시간만에 어둠속에 커다란 암릉구간을 만나는데 밝은 날에 보면
마치 로보캅처럼 보인다고 해서 로보캅 바위라 불러본다(범여의 생각中에서)
어둠속에 서서히 여명이 시작된다
등로가 살짝 열린 곳으로는 삼척시 미로면 소재지와 그 너머 동해가 보인다
어둠속에 만난 1,028m봉(04:27)
1,028m봉 정상 삼각점(△ 443 재설 / 776 건설부)
1,016m봉(04:48)
어둠속에 시원스럽게 쭉쭉 뻗어있는 황장목들이 주변에 많이 보인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최근에 내린 비로인해 등로가 많이 젖어있어 조심스럽다
날이 밝아오는가 보다... 주변의 사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통골재(木桶嶺:980m:04:55)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두타산과 댓재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목통령이라고도 부르며 두타산 남쪽 허리가 잘록한 노루목으로 거무소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허나 삼척시 미로면으로 내려서는 길은 없다. 따라서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단순한 허리부분이다.
목통령은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동물의 '목'에 해당하는 '목통'이다.
한자어로 표기하는 '木桶嶺'은 적당히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목통령에서 우측 통골로 내려가는 길은 우천시 조심해야 할 듯 싶다
목통령에서 선두와 만난 다음 선 채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두타산을 향하는 빡쎈 오르막이 시작된다
빡쎈 오름길에서 바라본 일출(05:20)
갈림길(05:25)
갈림길 정상에는 이정표와 산림욕 안내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갈림길에서 오리지널 대간길은 우측으로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는 곳이 아니고 직진이다
그래도 명색이 정통 산꾼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범여가 편안한 우회길로 갈 수야 없지 않는가
직진으로 올라서니 정통을 자처하는 산꾼들의 띠지가 몇장 보이는데 반갑기만 하다.
당신을 정통 산꾼으로 인정합니다
멋진 나무도 만나고...
1,241m봉(05:30)
1,241m봉 정상을 지키는 유인 김해김씨지묘
생전에 백두대간 산꾼이었던 모양이다
묘지 주변에는 참당귀가 지천이다
유인 경주김씨 묘지를 지나면서 오랫만에 참으로 귀하고 만나기 힘든 분홍바늘꽃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데 아쉽다면 흐리고 습한 날씨에 걸어 가면서 급하게 찍는 바람에 카메라가
흔들려 사진이 흐리게 나와 아쉽다
분홍 바늘꽃은 꽃이 진 뒤 씨방이 마치 바늘처럼 가늘고 길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봉오리 모양도 길쭉하고, 꽃이 피었을 때 수술 꽃밥 끝도 바늘귀처럼 생겼다.
꽃은 연한 홍자색인데, 분홍색 꽃이 피는 종을 분홍바늘꽃이라고 한다.
강원도 대관령 이북 산록의 개활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자라며 키는 약 1.5m 정도이고 잎은 어긋나며 앞이 뾰족한 피침형으로 양끝은 좁고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잎 뒷면은 분백색으로 잎맥 위에 구부러진 털이 있고 길이는 8~15㎝가량이다.
꽃은 7~8월에 줄기 끝에 뭉쳐서 피는데 지름은 2~3㎝가량이다.
열매는 9~10월경에 맺으며 길이는 8~10㎝로, 종자에 갓털이 있다.
바늘꽃과에 속하며 큰바늘꽃, 버들잎바늘꽃이라고도 한다. 관상용으로 쓰이고 강원도 황병산에 분포한다.
참고로 바늘꽃과는 전 세계에 640종이 분포하는데, 특히 온대 지방에 많이 자란다.
우리나라에도 26종이나 분포하고 있으며 꽃말은 “섹시한 연인, 떠나간 이를 그리워해요”이다
묘지에서 2시 방향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합류지점(05:33)
조금전 헤어진 갈림길을 다시 만나고...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등로
고단한 월세방 신세의 일엽초
두타산이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짙은 개스가 등로를 뒤덮기 시작한다
조망바위(05:52)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전경... 모든게 하얀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노루오줌꽃이 등로를 장악한 넓은 공터를 지나고...
한 여름에 웬 철쭉... 이 넘도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드디어 두타산 정상에 오른다... 두타산에서 쉰음산 방향으론 비박족들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다
두타산(頭陀山:1353m:05:57)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동해 에서 30리 떨어저 있는 산이다
북쪽으로 청옥산과 무릉계곡이 동쪽 으로 고천계곡 남쪽으로 태백산군 서쪽 으로 중봉산 12당골을 거느린 산이다
두타산에서 산줄기는 둘로 나뉜다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백두대간 분수령이요
동북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두타산성과 쉰움산으로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지맥 이다
임진왜란때왜군 5,000명이 백두대간을넘어 강릉거쳐 이 지방 까지 쳐들어 왔을때
바닷가 사람들이 두타산성으로 피난 하고 의병을 조직 왜군과 싸운 전적이 있는 산이다
이곳 두타산 정상에서 산줄기는 둘로 나뉘는데 서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두타산성과 쉰움산을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쌍둥이처럼 서있는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이는데 부처의 모든게 아련히 베어있는 이 능선길을 걷는 즐거움
수도자가 두타행의 즐거움을 얻는 그 기분과 같을까?
두타산은 인도 초기불교의 두타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범어(梵語:산크리스트어)인 “dhuta” 를
소리나는대로 음역한 것으로 버리다, 씻다, 닦다 등의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佛道를 닦는 수행을 뜻하는데 오늘 청옥산을 지나
두타산을 걷는 오늘 대간길은 세속의 길을 벗어나 정진의 길을 걷는 두타행이다.
어찌 함부로 걸을 수 있는 만만한 길이겠는가?
조선중기에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천하에 산수가 빼어난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으며, 영동의 산수 중 최고는 금강산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고 기록하였다.
불교에서 두타(頭陀)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 인도의 수행자들은 수행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 열두 가지 두타행을 실천으로 삼았다.
인가(人家)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물면서 수행을 하고 항상 걸식을 하며 걸식할 때는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으며 하루에 단 한번만 음식을 먹고 과식하지 않고 점심 이후에는
과실즙이나 꿀 등도 먹지 않고, 헌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또한 무상관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 곁에 머물고 나무 밑에 거주하거나 지붕이 없는 곳에 앉고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는다.
수행자들은 불교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산이나 들,
세상을 편력하며 고행하고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는데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칭송되었다.
두타산 정상 이정표
두타산에 도착하니 대장이 곡차과 과일을 제물로 두타산신에 예를 올리고 있다
나 역시 산신에게 예를 올리고 음복술 한잔을 빈 속에 마시니 속이 짜리하다
15분동안 두타산 정상에 머물다가 짙은 박무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두타(頭陀:dhota)란 佛家에선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탐욕을 갖지않고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을 말하며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투타행의 제1인 가섭존자를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頭陀(dhuta)라..모든 번뇌와 티끌을 털고 이 곳에서 내려갈 때는 가벼운 걸음 만이 남기를..
잠시 세속에서 멀리 떠나 이곳 阿蘭若處 頭陀洞川(무릉계곡)에 머물며,험한 옷 입고 험한 음식으로
수행하던 許穆(1595-1661)의 영혼이 쉰음산 두타산성 능선을 타고 올라온다.
짧은 인생 好衣好食하며 살기도 모자랄...
오늘날에, 내가 두고 가야할 모든 것과 내가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오늘 나는 이 먼 길을 작은 수행으로 삼아 걸어 가는 것일까...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에서 두타와 청옥의 이름이 지금의 두 위치와 바뀌어 나타나니,
분명 가장 큰 봉우리는 두타임에 틀림 없으련만,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뒤바뀐 두 봉우리가 20리 남북으로 큰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두타산에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나홀로 급한 내리막길을 따라서 걷는다
이런 분위기는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꾼들과 어울려서 가다보면 봐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고 잡념이 많아지기
때문인데 오랫동안 독립군으로 지맥길을 다닌 탓에 생긴 버릇이기도 하다
이곳 등로에는 유난히도 노루오줌꽃이 많이 보인다
간간히 백색 꿩의다리꽃도 보이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예전에 없던 로프 시설들이 많이 보인다
비가 온 뒤라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지만 그래도 호젓하게 혼자서 걸을만하다
잠시 후 등로가 트이고 박무가 걷히면서 무령계곡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무릉계곡(武陵溪谷)
두타산과 청옥산, 고적대, 갈미봉, 1243m봉으로 둘러싸인 반석계곡이다.
무릉계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청옥산과 두타산은 언제나 쌍둥이처럼 붙어 다닌다.
무릉계라는 보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사뭇 달라 청옥은 듬직한 육산(肉山)인 반면
두타는 울끈불끈 골산(骨山)으로 되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옥'이라는 이름은 바위산에 어울리는 듯하며, 집착을 버리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는 '두타'는
저 요란한 무릉계곡을 지긋이 굽어보고 있는 후덕한 봉우리에 어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분명 남쪽 것이 두타라고 나와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지정됐고, 강원 동해시 삼화동에 소재한 약 2-3km의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어서 이 두 산의 상징이 된 무릉계곡은 고려 충렬왕 때 이 곳에 들어 은둔생활을 했던
이승휴가 중국의 무릉도원 같은 선경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짓고 극찬했다는 골짜기다
(삼척부사 김휴원이 지었다는 설도 있음).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하였건만 두타산이 너무 좋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였다.
후에 조정에 복귀, 승지까지 지낸 후 다시금 이곳에서 은거하며 <제왕운기> <동안거사집>을 저술하였다.
청옥산, 두타산 고적대, 갈미봉이 에워싼 계곡에는 태암, 미륵암, 반학대, 능암, 쌍현암, 용추폭포,
기암괴석과 시인, 묵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武陵盤石) 과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말로,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굴속에서 진(秦)나라의 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같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두타산에서 한참을 내려왔는데 겨우 0.6km라니...
우측으로는 등로가 트이면서 무릉계곡이 시원스레 보인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의가등이 나온다
의가등(衣架嶝:06:40)
청옥산에서 두타산까지는 3.7km이고, 이 두 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의 중간지점 쯤에 박달재가 있다.
의가등이란 명칭은 두 산을 잇는 능선이 마치 옷걸이 모양을 하는데서 연유한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의가등 정상 이정표
다시 호젓한 등로를 나홀로 걸으면서 최근에 배운 일장춘몽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걷는다
♪이래저래 살아봐야 일백년 인생이요♬
♪아둥바둥 살아봐도 일백년 인생이라네♪
크게 우려했던 비는 오질 않지만 아침을 지나면서 높은 습도와 기온 상승으로 인해 슬슬 체력 고갈되는 느낌이다
청옥산 2.2km라... 세월 지나면 도착하겠지
무명봉(06:48)
좀 특이한 구조 표지판
박달령(朴達嶺:06:56)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 청옥산과 두타산을 향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이라 하는데 정확치 않다.청옥산과 두타산의
중간에 위치하며, 무릉계곡의 박달폭포로 내려서는 분기점이다.
삼거리에는 너른 쉼터가 있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박달골과 박달폭포의 뒤편 고개를 뜻한다.
박달고댕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댕이'는 '고개'의 강원도 방언이다.
두타 청옥 능선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참으로 많다
두타산에서 시작된 나홀로 산행 너무 좋다
지맥길에서 붙어 다니던 진권아우도 행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리고
선두는 너무 앞서가고 후미는 따라오지 않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예전의 남진길에는 보이질 않던 이정목은 간간히 보인다
너덜길이 나오기 시작하고...
대간길은 저 윗쪽 능선이건만 암릉이라 가지 말란다
지맥길이라면 개척자의 심정으로 악착같이 올라 가겠지만 아무나 다니는 대간길
무모하게 힘쓸 일이야 있겠나... 조신하게 편안길로 가야제
집채만한 암릉구간을 지나니 문바위가 나오는데 문바위재란다
그러나 개념도상에는 이곳이 문바위이고 문바위재는 조금을 더 가야 한다
문바위(07:02)
이정표와 표시석, 하산금지 팻말이 있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로
내려서는 길이 보이는데 번천의 유래는 들판이 조금 넒다 하여 처음에는 벌안[伐內:버당안]이라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번천(飜川:番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좌측으로 등로는 이어지고 완만한 너덜길을 따라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문바위재(07:25)
너덜길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지는 고개에 오르는데 지도상에는 이곳을 문바위재라고 표기를 해놨다
내가봐도 여기가 문바위재가 맞을 듯 싶다... 조금전에 지나온 곳은 문바위이고 이곳은 문바위 윗쪽의 고개니까.
고개를 지나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 서는데...
대간길 좌측으로 ‘중봉(번천) 하산길→’ 코팅지가 있고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참조팝 나무
중부 이북의 산 속 바위지대에 자라는 낙엽 떨기나무로 세계적으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동북부
등지에 분포하며, 줄기는 높이 1-2cm, 연한 갈색 또는 붉은 갈색을 띠며 잎은 어긋나며, 난형 또는
난상 타원형, 가장자리에 고르지 않은 거친 톱니가 있다.
잎 앞면은 녹색이며, 뒷면은 연한 녹색, 양면에 털이 없고 꽃은 5-6월에 가지 끝의 겹산방꽃차례에 피며,
붉은빛이 도는 흰색이며 꽃받침통은 종 모양이며, 안쪽에 털이 있다. 꽃잎은 난형으로 수술은 많으며,
꽃잎보다 길며 열매는 골돌이며, 털이 거의 없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뿌리에는 알카로이드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해열, 신경통, 말라리아및 토담증(吐痰症) 치료제로 쓴다
청옥산 오름길도 지나온 두타산길 마냥 짙은 박무로 앞이 잘 안보인다
청옥산으로 오르는 등로에는 참조팝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학등(鶴嶝:07:35)
멀리서 이곳을 보면 학(鶴)의 등처럼 보인다고 해서 학등이라 부른다고 하며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가면 무릉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학등을 지나자마자 청옥산 정상이 나온다
이 표지판 좌측 아랫쪽에는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샘이 있다
청옥산 정상은 지나온 두타산과 마찬가지로 짙은 박무로 인해 모든게 흐릿하기만 하다
4년전 남진길에도 참으로 비를 허벌나게 맞았는데 나와는 좋은 인연이 안되려는가 보다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산이다.
청옥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으로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가지 보석(七寶)중
하나로 일곱가지 보석은 금, 은, 수정, 적진주, 마노, 호박 그리고 청옥이다.
그러니 청옥산은 곧 극락이다. 이 땅에 있는 극락의 세상이다. 한 정진의 길, 수행의 길…,
하지만 이 길은 또한 역사의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 아픔의 길이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와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두타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보석 중 하나인 청옥에서 온 지명이라 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안했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고 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 하기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는 한 그루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걷다보면 ‘李承休’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약 700여 년전인 고려 충렬왕 때 直言과 罷職(파직)을 거듭하면서 帝王韻紀(제왕운기)를 집필한 인물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제왕운기는 상편은 帝를, 하편은 王을 언급하고 있다.帝는 중국의 황제, 王은 고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편은 곧 세계사이며 하편은 국사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승휴는 하편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특히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마저도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지만 이미 700여 년 전에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이승휴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간 관점에서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와 지리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하나 이승휴는 親家가 경상도 경산임에도 外家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외가가 강원도 삼척이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여기 청옥-두타 아래 흐르는 무릉계곡이다.
청옥-두타가 대간의 중요 부분임을 감안하면 이승휴가 여기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청옥산 정상에 도착하니 동료 산꾼들은 보이질 않고 분당에서 왔다는 대간 5명이 있어 인증샷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물 한모금 마시고 삼각점을 첮는데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산 정상이 완전히 초지로 변해 버린 탓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청옥산 정상은 이제서야 앵초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노루오줌과 꿩의 다리꽃이 많이 보인다
고적대로 향하는 길
등로가 안 보일정도로 잡목이 무성하다
분홍색 노루오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슬맞은 꿩의 다리
백색 노루오줌
연칠령성을 향한 계속되는 내리막길
멋진 나무도 만나고...
한참을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0.8km 지났다고 한다
호젓한 길을 나홀로 걸어가는데...
조금을 더 가니 동료 산꾼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아마도 아침만찬을 하는 모양이다
두타산에서 이곳까지 나홀로 여유롭고 편하게 왔다...난 독립군 체질인가 보다
연칠령성(連七星嶺:08:00)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에
자리한 해발 1283.5m인 중봉산(中峰山)에 걸쳐 있다.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자리한 무릉계곡에서 문간재(신선봉 갈림길)를 넘고 호계를 지나
막다른 골짜기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넘나 들기가험난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고도 불려 왔다.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정상에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탑과 이정목이 서 있고 좌측으로 무릉계곡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대간꾼들이 이곳에서 한구간 끊고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다
아침만찬(08:00~08:35)
동료산꾼들과 아침만찬을 즐긴 다음에...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짙은 박무가 걷히고 햇빛이 나기 시작하면서 등로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습기로 인해 슬슬 지치기 시작한다
백두대간 등산로라는 팻말을 지나니 망군대가 나오는데 동료산꾼들은 관심조차 두질않고 가버린다
병조회풀
조회풀의 ‘조회’는 줄기가 가늘고 나무질이 약하여 나무의 역할을 못하는 풀이라는
의미에서 ‘조회풀’이고 병조회풀은 꽃이 병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독초이다
산지 숲 속에 자라는 낙엽 떨기나무로 줄기는 높이 1m쯤이고 아래쪽이 나무질로 된다.
잎은 마주나며, 작은잎 3장으로 된 겹잎으로 잎 가장자리에 보통 3개의 얕은 결각이 있고
이 모양의 톱니가 있고 꽃은 7-8월에 피며, 잡성으로 짧은 원추꽃차례에 달리고, 하늘색 또는
보라색, 드물게 흰색이며 꽃받침은 꽃잎 모양이다. 열매는 수과이며, 납작한 타원형으로 깃털
모양의 긴 암술대가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한다.
망군대(望君臺:1,244m:08:42)
연칠령성에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서 7분정도 걸으니 등로 우측으로 커다란 암릉이
나오고 등로에는 망군대라는 팻말이 있는데 동료 산꾼들은 뭣이 그리도 바쁜지 관심도
두질않고 정신없이 도망을 가버린다...이곳은 연칠령성 정상으로 望京臺라고도 하는데
조선조 16대 임금인 인조 원년(1623년) 때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낙향하여
중봉산(삼척시 하장면 소재 ) 단교암에 기거할 때 이곳에 올라 서울(한양)을
사모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望京臺)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서울에 계신 임금을 바라 보았다" 하여 망군대(望君臺)라고도 부른다.
망군대에서 바라본 중봉산(정선군 임계면 소재)의 모습
잠시 후 가야할 고적대는 짙은 운무에 가려있고...
망군대에서 다시 내려와...
고적대로 향한다
긴산꼬리풀(꽃말:달성)
줄기 끝에 긴 꼬리를 달고 있는 꽃이 핀 줄기 부분이 마치 동물의 꼬리처럼 보여서 꼬리풀이라고 하며
꼬리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긴산꼬리풀은 산꼬리풀과 닮았으나 키가 더 커서 붙여진 이름이며
산꼬리풀은 키가 40~80㎝이고, 긴산꼬리풀의 키는 80~120㎝이다.
지리산 이북 지방의 산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반그늘과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며 전체에 털이 없거나
또는 짧은 털이 흩어져 있고 잎은 마주나거나 서너 개씩 돌려나기도 하며 잎의 길이는 약 10~12㎝, 폭이 2.2㎝이고
타원형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고적대로 향하는 길
산림욕 안내 표지판이 보이고...
고적대로 향하는 빡센 오름길이 시작된다
이곳은 한참 돌양지꽃이 滿開하기 시작한다
고적대 전위봉(09:05)
로프 하나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암릉구간의 고적대로 향한다
고적대 오름길에서 바라본 무릉계곡의 모습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 중에서
고적대(高積臺:1253.3m:09:05)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삼척시 하장면, 동해시 삼화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고적대는 동쪽으로 뻗혀진 청옥산, 두타산이 아울러 해동삼봉(海東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전천(箭川)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임계천(臨溪川)으로, 남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골지천(骨只川)으로
각각 흐르는데, 동쪽 비탈면은 급경사를 이루나 국민관광지 제1호로로 지정된
무릉계곡으로 이어져 경관이 수려하고,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고적대 안내판
연칠령성에서 망군대를 지나 고적대 오르는 길에서 너무 힘을 뺀다... 땀이 비오듯이 흐른다
고적대 삼각점(△ 임계 306 / 2005 재설)
고적대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진양기맥길의 거창 기백산에서 만났던 책바위처럼 생긴 암릉을 지난다
고적대를 내려서면서부터 짙은 박무는 사라지고 가야할 능선이 뚜렸이 보이기 시작한다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등로를 지나니...
쉼터(09:25)
쉼터 뒷편으로는 전망대 바위가 보이고...
전망대(09:28)...선달님 사진 캡처
오늘 산행중에 조망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지나온 두타, 청옥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서 오랫만에 대간길에서 후배들과 인증샷을 남긴다
능선 우측 아랫쪽 무릉계곡 끄트머리에 삼화사가 아련히 보이고 동해바다도 살짝 보인다
삼화사 일주문(사진: 불교 카페에서 인용)
“頭陀山三和寺” 현판은 탄허스님께서 쓰신 것이란다.
삼화사(三和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서 오대산에 성지를 열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가 두타산의 산세에 반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고 흑련대(黑蓮臺)라 부른데서 기원하였다.
당시 자장율사에게 한을 품고 악신이 된 3명의 여신(女神)을 감화시켜 이들의 도움으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 3명의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나중에 절 이름을 삼화(三和)라 하고 마을 이름을 삼화동이라 한다
또 다른 설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라말에 3명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떠난 후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불렀으며 그후 얼마 뒤 사굴산문(闍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국사가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
고려말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가 절 가까이에객안당(客安堂0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으며이곳에서 10여년간 삼화사에 있는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면서 간장암(看藏庵)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두타산과 청옥산 입구에 살며시 위치한 천혜의 삼화사(사진.글: 불교카페에서 인용)
삼화사를 말할 때 수륙재를 빼놓을 수 없다.
삼화사에서는 조선시대(태조 4년) 최초로 국행수륙대재가 설행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친고려 성향의 세력들을 포용하여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의 삼화사와 강화도의 관음굴, 거제도의 견암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햐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하늘과 땅(天地) , 죽은자와 산자( 冥陽 ), 사성과 육범(水陸)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소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대가 설행된 배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가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이며, 이들 왕씨 일가의 영혼을 달래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하야 매년 봄과 가을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설행한 의례였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나온 고적대의 모습
고적대 삼거리(09:40)
우측으로는 사원터라는 이정표가 있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용추폭포와 무릉계곡이 이어지고
그 유명한 삼화사와 무릉반석이 있는데 삼화사를 가 본지가 10년은 넘은듯 하여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동해시 삼화동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쌍용양회의 시멘트 공장과 광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릉반석(武陵盤石 - 사진 불교카페에서 인용)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조선의 4대명필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에 왔다가 그 풍광을 칭송하여 남긴 글인데,
관동의 제일가는 명작으로 꼽히며, 이 글씨를 썼을때 그 필력에 감응하여
산천이 사흘동안 흔들렸다고 전해진다.
그 의미를 해석하면, `여기는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라, 물과 돌이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 열리네.`라는 뜻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어머니에게 바친 詩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은 삼척부사를 지내면서 이곳의 풍광을 시조로 노래한 글이란다
무릉계 반석은 1000평이 넘는 대반석이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이라고 쓴 글은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하며 일중 김충현이 고증하여 새로이 양각한 것이다.
원래의 글씨는 무릉계 반석 왼쪽 아래쪽에 남아 있으나 세월의 풍상과 계류에 휩쓸려 내려온
돌과 모래의 힘으로 거의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시피 한 것을 재현하여 옛사람이
감동한 두타산 무릉계의 빼어남을 기린 문장을 전승하려 한 것이다.
석장암(石場岩)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던 이곳 무릉반석은 5,000m²나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이룬다.
반석위에는 이곳을 찾는 명필가와 묵객 등이 음각하여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다.
이들 중 백미는 무릉도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초서체로 크게 새긴 제자(題字)로 현세와 이상향을 넘나드는 옛 선인들의 기계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고적대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앞서가던 동료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 멋진 암릉구간이 보이고...
세월앞에 장사없고...
지나온 두타산(좌측)과 청옥산(우측)이 시원스레 보인다
암봉(10:13)
정상은 육산으로 보이지만 밑에는 천길 낭떠러지의 암릉으로 되어있어 지도상에는 암봉으로 되어있다
갈미봉(葛味峰 1,260m:10:18)
동해시 삼화동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인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갈(葛)”은 나누다(分)와 “미(味)”는 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갈미봉'이란 순수한 우리말로서 봉우리가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높은 봉우리에 갈미봉이라 붙였고 괘병산(수병산)과 함께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고 한다.
한자로 칡“갈(葛)”자를 써서 칡이 많은 산인줄 알았는데 이곳은 칡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갈참나무 잡목만 우거져 있는 곳인데 오늘 산행을 하면서 강원도에서 합류한 젊은 부부 산꾼이
먼저 도착하여 황도(통조림)를 먹고 있다가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무거운 것을 지고 온 것을 생각하면
사양을 하겠지만 체력 보강을 위해서 염치 불구하고 얻어 먹긴 하지만 조금은 미안하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암봉(10:35)
우측 능선으로 오르면 1,143m봉이 나오고 예전에 있었던 묵은 헬기장이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잊어진
봉우리가 되어 버렸고 대부분(거의 다)의 산꾼들은 1,143m봉을 오르지 않고 너덜길의 사면길로 간다
갈미봉에서부터 대여섯명의 동료 산꾼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는데 오랫만에 진권아우를
만나니 참으로 반갑기만 한데...9월부터 2개월동안 희말라야 로체 등반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와서 같이 걸어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아그야! 부디 완등하길 행님이 기원해주마...
능선(11:10)
1,143m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에는 산꾼들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 있고, 이곳에서 급한 내리막길이다
샘터(11:12)
샘터에는 올 여름의 가뭄탓인지 주위가 지저분하고 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 식수로는 부적합하다
산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의자 2개가 있는데 선두조들이 휴식을 취하다가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겨우 절반을 조금 더 왔는데 햋빛은 따갑고 습도가 많아 지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선 채로 잠시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샘터를 내려오니 자작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신갈나무 숲속도 나온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집터의 흔적(범여의 생각 中에서) 같은 곳을 지난다
까치수염(꽃말:동심)
하얀 꼬치처럼 꽃이 무리지어 피는 꽃을 보면 하얀색의 작은 꽃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것이
꼭 수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강아지 꼬리처럼 보이기도 해서 개꼬리풀이라고도 한다.
또 수영이라는 식물을 닮아 까치수영이라고도 하며 까치수염은 산과 들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모래와 돌이 많은 양지에서 잘 자라며, 키는 50~100㎝ 정도이며,땅속줄기가 퍼지고 풀 전체에 잔털이 난다.
줄기는 붉은빛이 도는 원기둥 모양이고 가지를 친다
이기령이 1.1km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면서 아주 멋진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소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향... 머리가 시원할 정도이다... 그래서 산이 가장 훌륭한 의사라 하는구나
898m봉(11:35)
898m봉을 지나면서 완만한 산죽길이다...편하게 내려서니 이기동(동해시)으로
내려서는 넓은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잠시후에 돌무더기가 있는 성황당이 보인다
이기령 정상에 있는 성황당의 모습
예전 대간길에 보지 못했던 안내 표지판도 보이고...
이기령(耳基嶺:810m:11:50)
강원도 동해시 이기동과 정선군 임계면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로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는데, “구리터”의 중간 자음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되었다 한다. 이곳이 이기령이 된 理由는 대강 이렇다.
"銅基" 의 순수한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개명으로,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 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의미하는 '령'으로 넘어 가니 "이기령<耳基嶺>이 되었다.
이 고개는 강원도 삼척의해산물과 강원도 정선의 특산물을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 우마차가 넘나 들던 고개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이기령은 백복령과 더불어 옛 북평읍에서 정선으로 통하게 되는 주요 관문구실을
하였으나, 백복령이 지방도로로 개통되면서 이기령은 고개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이제는 점점 잊혀져 가는
옛길로 밀려나 이제는 백두대간 산꾼들만 걷는 고개가 되어 버렸다.
이기령에서 부수베리로 이어지는 도로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그와 비례하여 범여의 몸뚱아리도 지쳐가기 시작하는데,
평소에 호화준족이던 선두들도 힘이드는 모양이다... 그 분들도 이곳에서 쉬고 있다
아직까지 가야할 거리가 10km 이상이 남아 있기에 이기령 옆에 샘에서 식수를 보충한 다음에
이곳 평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가져온 떡과 쥬스, 커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상월산으로 향하는 완만한 능선으로 오르니...
리기다소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땀을 흘리며 능선으로 올라 좌측으로 꺽어지니...상월산이라 되어있는 960봉이 나온다
960m봉(12:35)
정상에는 헬기장과 삼각점이 있고 이곳에 상월산이란 팻말이 있는데 잠시후에 가야할 970.3봉을
상월산이라 적힌 지도들이 많아 약간의 혼란을 주고 있다... 트랭글앱에서는 이곳을 상월산이라 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3D백두대간 지도를 펴낸 고산자의 후예들에서 나온 지도와 영진 1/50,000의
지도에는 970.3m봉을 상월산이라 해 혼란을 주고 있으나 잠시후에 가야할 봉우리가 상월산이다
960m봉 정상 삼각점(△ 임계 423 2005 재설)
960m봉 정상 헬기장
햇빛이 엄청나게 뜨겁다...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안부(12:45)
상월산에서 안부까지 내려온 만큼 또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자꾸만 산행 속도는 떨어지는데 내 뒤에는 대장밖에 보이질 않는다
조금전 이기령에서 쉬었던 산꾼들은 아마도 중간에서 산행을 포기한 모양이다
등로에서 뒤돌아본 960m봉의 모습
이기령쪽에서는 상당히 부드러운 陸山이나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은 岳山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동해시 이기동의 모습
상월산에서 안부까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오르막에 오르니...
상월산(上月山:970.3m:13:00)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동해시와 정선군의 그 어느 자료에도
상월산에 자료는 찾을 길이 없는데 다만 국어사전에서 “상월(上月)”은 지난달의 옛말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산이 아닐까 싶다.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이곳에다가 상월산이란 산패를 걸어놨고 산꾼들이 쉴 수 있도록 나무의자 2개가
놓여 있는데 지나온 960m봉과 이곳을 상월산이라 하는데 지도마다 다르니 조금은 헷갈린다
이곳에서 선 채로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데 그 사이에 땀은 비오듯 흘러 내린다
능선을 따라서 원방재로 향하는데 야속하게도 바람 한 점이 없다
암봉(13:05)
무명봉(13:10)
또 다른 봉우리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원방재로 한없이 내려서는데 나무
계단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걷기가 엄청나게 불편하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원방재(遠方峴:740m:13:30)
원방재는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 관촌마을과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를 넘나 들던 고개로
옛날 삼척사람들이 정선에 소금을 팔러가면서 넘었던 고개란다
원방이란 '먼 지방' 또는 '먼 곳'을 의미하며, 먼 거리 고개를 힘들게 넘나 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란 뜻이다.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는 정선땅 아우라지로 흘러가는 부수베리(부싯돌을 생산하던 곳)계곡과
삼척방향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드는 서학골 계곡이 흐른다.
부수베리라는 지명은 ‘부수’는 부싯돌,‘베리’ 는 벼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는 힘에 부칠 때 산객들이 탈출로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아직 백복령까지 가야할 길이 7.09km나 남았다
이런 컨디션이라면 최소한 3시간 반은 더 가야 백복령 도착이라 고민이 생긴다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노바님과 속초에서 오신 젊은부부는 중간 탈출을 결심하는데
나 역시 고민이 생긴다... 식수도 부족할 것 같고... 그러나 대간길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않아
완주를 결심하는데 다행히 중탈하시는 분들이 식수를 나에게 다 주신다...얼마나 고마운지 복 받을깁니다
다시 백복령을 향하기 위해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지나온 상월산의 모습
암봉(13:55)
820m봉(14:00)
862m봉(14:10)
1,022m봉(14:35)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좌측으로 달팽이산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이나 대간길을 우측으로 내려선다
1,022m봉 헬기장
땅바닥에 떨어져 나 딩구는 이정표에는 아직도 백복령이 5.0km나 남았단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잡목으로 인해 등로가 잘 보이질 않는다
다시 오르막길에는 산죽이 살짝 보이고 넘 피로했는지 난셍 처음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동행한 진권아우와 시화님은 도망을 가버리고 하는 수 없이 아스피린 2알을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오름막길 좌측에는 멋진 암릉이 보이고...
전망대(15:15)
987m봉(15:25)
숲속에 숨어있는 987m봉 삼각점(△ 구정 467 / 2005 재설)
삼각점은 아무도 보지 않았는지 나무숲에 숨어있고 이끼가 끼어있다
987m봉을 내려서자 미역줄기가 너무 우거져 등로가 잘 안보이니 원시림처럼 보인다
959m봉(15:32)
호젓한 백두대간 등로...참으로 강원도스럽다
다시 안부로 떨어졌다가 오르막을 오르는데 갑자기 체력이 뚝 떨어진다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한 여성 산꾼이 매실 엑기스가
있으면 좀 달라는데... 없는데 어떡하죠...貧寒한 산꾼은 남은 거라곤 물밖에 없소이다
863m봉(15:45)
여기서부터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걸려 뛰다시피 걷는다
832m봉(16:00)
직진쪽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독도에 조금은 조심해야할 듯 싶다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서낭당(16:08)
아직도 1.3km나 남았다니...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서낭당의 흔적인지 돌무더기가 보이고 이곳에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오후 4시가 지나니 맘은 급해지고... 달리기 하듯 백복령으로 향한다
쉼터(14:23)
쉼터에서 10시방향 좌측으로 내려선다
송전탑이 보이는 걸 봐서 백복령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NO225송전탑(16:28)
물레나물(꽃말:임을 향한 일편단심)
물레나물은 꽃이 마치 물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바람개비를 닮기도 했고, 스크루를 닮기도 했다.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반그늘이나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의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며,
키는 50~80㎝이고, 잎은 마주나며 피침형이며. 잎은 밑동으로 줄기를 감싸고 길이는 5~10㎝, 폭은 1~2㎝이다.
끝이 뾰족한 바소 모양으로 투명한 점이 있고, 6~8월에 황색 바탕에 붉은빛이 도는 꽃이 줄기 끝에서 1송이씩
계속해서 피며 지름은 4~6㎝이고 수술은 많으며 암술은 1개이고 암술머리가 5개로 갈라진다.
10~11월에 열매가 달리는데, 작은 그물 모양의 종자는 한쪽의 길이가 0.1㎝ 정도로 아주 가늘다.
물레나물과에 속하며 애기물레나물, 매대체, 좀물레나물, 긴물레나물이라고도 한다.
유난히 긴 수술들이 윤기가 나고 옅은 노란색 꽃잎이 노랑나비 같아 ‘금사호접(金絲蝴蝶)’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로가 보이면서 지나가는 차량소리가 들리고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보이니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백복령(百複嶺 780m:16:30)
백복령은 강릉, 동해, 정선,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는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정선과 강릉을 가르는 마루금엔 '아리랑의 고장 정선'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으며 예전엔 삼척에서 정선 임계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 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아무래도 어딘가 께름직한 느낌이다.
문헌을 들추어보니 『택리지』에 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 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인다
동해 푸른 물결 손 흔드는 소금 고개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정선군 홈페이지 아라리 중에서」
백복령 정상의 모습
30여km의 거리에 13시간 10분의 길었던 산행
마치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 듯한 산행... 과연 내가 지금 잘살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自問을 해도 알 수가 없다...過猶不及이 아닌지
아뭏든 간에 힘든 한 구간을 끝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산행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펜션에서 알탕을 하고는 강원도 메밀 전병에 옹심이이에다 거나하게 한잔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빗줄기는
강해지고... 그나마 비를 맞지않고 산행을 했다는게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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