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버려야만 하나를 얻는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가르쳐 준 백두대간 석병산 구간
☞ 산행일자: 2017년 7월 22일~23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산행내내 장맛비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6km / 7시간 4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 산행코스: 백복령-임도-834m봉-869m봉-카르스트 지형-큰원피 삼거리
786m봉-871m봉-생계령-강릉 서대굴-829m봉-922m봉-쉼터
안부-900m봉-고뱅이재-908m봉-안부-백두대간수목원 갈림길
쉼터-상황지미골 갈림길-석병산 갈림길-석병산-일월문-석병산 갈림길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H)-995m봉-만덕지맥 분기봉-두리봉-덕우리재 갈림길
무명봉-산죽지대-863.7m봉-외고단 갈림길--780m봉-임도-삽당령
☞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옥계면 / 강릉시 왕산면 / 정선군 임계면
서울 시내의 온도가 아마도 평균적으로 35도가 넘는듯 하니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듯 흐른다...그러니 뭔가 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설령 한다고 해도 능률도
오르지 않으니 쉬는게 상책이다...요즘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하여 사무실에서
에어컨 빵빵 틀어놓고 지인 스님이 신간을 출간 하였다고 하여 읽어보라고 택배로
보내주신 책 한권을 읽다가보니 어영부영 한 주일이 지나 버린다
예전에 어르신들께서 세월은 流水 같다고 했는데 요즘 범여가 느끼기엔 유수같은게
아니라 총알같은 느낌이다...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눈 깜빡할 사이에 한 주가
지나고 또 다시 주말... 이번주에 대간길을 나서려는데 내가 가야할 정선, 강릉구간에
비가 많이 온다는 기상청의 예보다
지난주에도 상주에 가서 허벌나게 비를 맞았는데 또 비야?...
구라청(기상청)의 예보를 일단 무시하자
비를 피해 남녘지방 지맥길을 찾아서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후배들과의 약속 때문에 대간길을 나선다
밤 11시... 사당역 탑승장소에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들과 해후를 하고 버스에 올라
깊은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버스는 강릉 대관령 휴게소에 정차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들머리인 백복령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비도 오질않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03시 10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 구간의 지도
대동여지도 (출처:규장각)
백복령(02:50)
2주만에 다시 백복령에 도착한다...비가 많이 온다는 구라청의 예보는 현재까진 틀렸다.
음력 유월 초하룻날 새벽 하늘에는 별빛이 보이진 않지만 느낌상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시원하고 상큼한 강원도의 새벽 공기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백복령의 새벽공기...서울에서 상상도 못할 이 공기... 정말 올길 잘했구나
오늘이 초하루에다 일요일... 오늘 일요 법회에 참석 못한 것이 은사스님에겐 죄송하기만 하다
야심한 새벽의 백복령 풍경
백복령(百卜嶺:780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 삼흥동의 경계에
잇는 고개로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다.
고개 정상에는 백두대간 표시석과 정선 아리랑 표시석이 있고 좌측 옥계쪽은 매점이 있다.
백복령은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또한 백복령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는 않다.
고갯길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 데
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제법 복잡 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 때 지도 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택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정선 아리랑의 유래
고려왕조가 망한뒤 고려유신 72명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하여 세상 미련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송도(개성) 두문동에 은거하여 살았다. 여기서 유래 된것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이성계일파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응하지 않자 역적을 살려둘수 없다 하여 두문동을 불바다로 만든다.
거기서 나온다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한사람도 나오지 않고 그곳에 있던 유신은 모두다 불타 죽었다.
그때 비명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민족사에 이처럼 불행한 역사가 또 있었을까.
한나라의 인재가 모두 몰살 되는 순간이었다.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는 그과정에서도 처절하고 눈물겨워다고 하며
집뒤에다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를 진상을 모셔놓고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
몇년후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데 바로 목은 이색이다.
목은 이색 문하에서 배운 뛰어난 인재들(정도전,정몽주,길재,등..)과
고려왕조 중책에 진출해 있던 성리학 인재들이었다.
모두 불타 죽기전 두문동에서 나온 단 한사람이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이다.
그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을 도와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놓게 된다.
정선아리랑은 두문동에서 강원도 정선이라는 유배간 전오륜(형조판서)외 선비들이
망국의 한과 고향의 그리움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마을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오늘날 정선아리랑 이라 한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남과 북을 합쳐 3,600여 수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의 진도 아리랑, 경남의 밀양 아리랑이 3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타관객리 외로히 난 사람 괄시를 마라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떨치고 청려에 의지하여 지향하여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달라 만물이 소연한데
해저무는 저녁노을 무심히 바라보며
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것이 모두시름 뿐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태산준령 험한고개 칡넝쿨 얽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구비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허위단심
그대를 찾아 왔건만 보고도 본체만체 돈담무심
- 정선 아리랑 가사中 일부-
동료들과 단체사진
예전에 없었던 안내 표지판
산행을 시작하다(03:10)
백두대간 산행구간중에 대간길이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 이곳 백복령 구간이다
시작 초입부터 원 대간길과는 무관하게 정반대의 길로 대간을 이어가는데 원래는
오르자마자 직진으로 올라서 자병산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석회석 광산 개발로 인하여
자병산이란 산 자체가 사라져 버린 곳이 이곳 백복령 구간이다
2009년 북진길과 2013년 남진길에는 망가지긴 했지만 자병산을 근접하게 볼 수 있는
생태복원 현장까지 갈 수 있게 만들어 놨으나 지금은 그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하게
대간길을 180도 반대 방향으로 대간길을 돌려놔 버려 처음에는 알바를 하는줄 알았다
도로(03:18)
석회석을 채취하여 공장(한라 라파즈)으로 나르는 도로를 어둠속에 지나니 아마
공장에서 설치한 듯한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도로를 가로질러 등로에 접어들면서 사진 몇 컷 찍는 사이에 선두는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834m봉(03:28)
834m봉을 지나자마자 1분도 안되어 송전탑을 만나는데 어둠속에 NO를 확인할 길이 없다
어차피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이곳이 오리지널 대간길도 아니니까.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통나무 계단이 설치가 되어있다
그런데 통나무 계단이 너무 넓게 설치가 되어 있어 숏다리인 범여로선 너무 힘이 들어
좌측으로 올라 서는데 비가 온 뒤라 너무 미끄러워서 상당히 애를 먹는다
869m봉(03:37)
예전에 북, 남진길에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자병산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산행을
했었는데 이제 아예 자병산 근처로는 얼씬도 못하게 대간길을 완전히 돌려놓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신은 인간에게 자연을 파괴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자연은 스스로를 조절할 뿐 파괴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문명이라는 탈을 쓰고 자연을 허물고 더럽힌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상으로 많은 것을 베풀지만 인간은 자연의 고마움을 모른다. 자연은 그냥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삶의 터전이지만 인간은 자연을 현재의 자산가치로만 본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가 아니라 공생의 관계라는 것을...
자병산(紫屛山 :872.5m)...2013년 9월 15일 남진길에서 바라본 자병산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려한 경관의 산계8경에 속하는 자병산이 있었으나 시멘트 재료 채취로 형태마저 없어졌다
자병산은 강원도를 동서로 가로 질으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자리 잡고 있고
수병산, 괘병산,석병산 등과 함께 아름다운 산군을 형성 하였다.
자병유화로 불리기도 하는 자병산(자주빛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란 뜻)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생겨 난 말이며 가뭄 때 자병산 산자락에 있는 닭목병대(닭목대)에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러한 기우제는 80년대초 까지 이어 지다가 자병산이 헐리기 시작하면서
오랫 동안 전해져 오던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紫屛油花 또는 紫屛血花“란 닭의 피를 뿌릴 때 나타나는 모습이 ”혈화”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낼 때 혈화(닭의 피꽃)가 피면 비가 내린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869m봉에서 바라본 자병산
석회석 채취 현장에서 서면 “자주 빛 병풍은 옛말” 운운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병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진행한 구간 일대는 카르스트지형이다.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자병산은 원래 백두대간에 포함된 산으로, 1994년 이전에는 자병산이 있어
대간 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쳐 갔으나, 그 뒤 한라시멘트에서 시멘트 재료인
석회석을 채취하기 위해 대간길을 완전히 기형아로 만들어 버렸다
어둠속에서 869m봉을 내려오자 예전에 없었던 출입금지 팻말이 나오고 그냥 무심코 걷기만 한다
내리막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내려오니 양탄자처럼 푹신한 등로가 나오고...
카르스트지형(03:48)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카르스트지형으로 움푹움푹 웅덩이처럼 들어간 곳
(일명 둘리네 또는 쇠곳 이라고도 함)으로 정신 없이 돌고 돌아가는 곳이다.
안개 상습지역이라 날씨가 좋지 못하면 운행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지만
특히 미끄러움이 많은 지역이라 비라도 올 때는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구간이기도 하다.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가 생겨놨고 황토음식점이 새로 생긴 모양이다
완전히 망가진 대간길에 “산림 생태길 걷기축제”라니... 하여간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어랴! 거기다가 쉼터용 평상까지 만들어 놨네
등로는 마치 카펫을 깔아논 것 처럼 거적을 깔아놨다
큰피원 삼거리(03:52)
직진으로 가면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 숲속으로 들어선다
786m봉(04:05)
또다시 길을 걷는다
871m봉(04:22)
871m봉을 지나자마자 어둠속에 봉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무명묘지를 만난다
다시 어둠속에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넘고 또 넘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장님 문고리 잡는식으로 걷는 산행
범여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나, 강원도 산길은 워낙 접근성이 불편하여
어쩔 수 없이 산악회를 따라서 다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길이 들여지는 느낌이다
부지런히 걷다가 보니 선두로 가는 산꾼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아마도 생계령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생계령(生溪嶺:640m:05:32)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피원을 잇는 고개이다.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로 산계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고개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고개에서 도토리 열매를 채취했다
생계령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생계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변음(變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르게 ‘쌍계령’ 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산계령이 경음화 된 것으로 보인다.
백복령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이곳(생계령)에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생계령 이정표 좌측 아랫쪽으로 내려서면 카르스트 지형이 있는 곳인데 어둠속에 그냥 지나왔다
카르스트 지형( 일명 쇠곳. 돌리네(Doline)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용해되거나 지반의 함몰로 생간 우묵한 타원형의 지형이다.
이곳의 토양은 붉은 색을 띄는데 이는 석회암에서 탄산칼슘이 용해된 후 철 등 불순물이
남아 산화된 것으로 이러한 토양을 테라로사라 한다.
* 돌리네 : 석회암 지대에서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패인
웅덩이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와지 안에서 경작할 수 있는 크기를 돌리네라 부른다.
테라로사라 불리는 토양이 발달하며, 돌리네가 연결된 경우 우발레라 한다.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이 스며들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서 깔때기 모양 또는 작은 양념절구 모양의 오목하게 패인 웅덩이를 형성한다.
크기는 지름 1m 내외에서 100m에 이르는 등 다양하나, 최근의 국제적인 정의(定義)에 따르면
그 와지 저면(底面)에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발달할 정도의 크기를 돌리네라고 하기로 하였다.
돌리네의 저면에는 테라로사(terra rossa)라고 불리는 토양이 발달된 곳이 많으며,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돌리네가 더욱 용식(溶蝕)되어 인접된 돌리네와 연결되어 좁고 긴 와지를
이루는 경우를 우발레(uvale)라고 한다.
아드리아해(海) 동안의 카르스트 지방,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아키요시다이[秋吉臺]가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의 충북 단양(丹陽) 일대에도 매포(梅浦)를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임계면 문화 체육위원회에서 설치한 ‘산림 새태길 걷기 축제’ 코스길
한가지 부탁하겠소이다... 이것이 먼저가 아니라 대간길 피괴를 막는게 먼저가 아닐런지?
우리들은 세상을 얼마나 더 뜯어고쳐야 평안을 얻을까.
산천을 막무가내로 뜯어고치는 건설의 포크레인 소리,
여기저기 엄청나게 파 뒤지어 쌓아놓은 흙더미, 아! 아! 하루라도 좋다.
건설 없는 평화로움 속을 나는 거닐고 싶다. 정말 우린 왜 사는가?
뜯어고쳐야 할 세상을 두고 사람들은 강과 산을 뜯어 고친다”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님이 읊은 「세한도」의 일부 中에서
예전에 없었던 쉼터들이 많이 보인다
강릉 서대굴(강원도 기념물 제36호:05:10)
하부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8천만년 전)에 퇴적된 조선누층군 석병산층 석회암 내에 형성되어 있다
석병산 석회암층(石屛山石灰岩層) 내에 형성된 수직동굴(垂直洞窟)이다. 일명 ‘범록굴’이라고도 한다.
주굴의 길이는 약 800m이고, 총 연장은 1,500m이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중복벼랑에 위치한다.
서대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으며 주변의 동대굴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으며 옆면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서대굴이 위치하고 있는 산계리 지역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들이 모여 있는 동굴지대로서 동굴들의 형태가 모두 같다.
강릉 서대굴은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어둠속에서 바라본 강릉 서대굴
829m봉(05:18)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명물인 금강송이 뚜렸하게 보인다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 지 등로에 선 채로 한참을 쉬었다 간다
멋진 소나무(05:29)
다시 길을 나선다
922m봉(05:30)
922m봉에 서 있는 裸木
922m봉에서 바라본 자병산의 모습
짙은 운무로 인하여 흉물스런 자병산 대신에 멋진 운해가 장관을 이룬다
등로에서 바라본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철저하게 망가진 자병산의 모습.
석회석 채취 현장에서 서면 “자주 빛 병풍은 옛말” 운운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병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진행한 구간 일대는 카르스트지형이다.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자병산은 마루금에서 사라진 대신 생태보전 관련 매스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산으로 변해버렸다.
생계령에 도착할 무렵 눈에 뒤 덮힌 듯하기도 하고 스키장이기도 한 듯한
산이 멀리에서 시야에 들어온다.
자병산이다. 눈인 듯 보이는 것은 석회석 채취 때문이고, 스키장인 듯 한 것은
정상부를 슬로프처럼 깍아내었기 때문이다.
산의 형태가 변했으니 병풍은 있을 리 없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
자주빛 병풍이라는 말은 옛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2013년 9월 15일 백두대간 남진길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미끄러운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쉼터가 나온다
쉼터(05:35)
안부(05:40)
829m봉에서 한참을 내려온 다음 안부에서 다시 내려온 만큼 급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먹구름이
몰려 오면서 빗방울 굵어지기 시작하여 얼른 베낭 커버를 씌우고 하이엔드 카메라는 베낭에
넣고 방수형 똑딱이 카메라를 커내서 사진을 찍는데 액정 메모리 카드가 부족하다고 메시지가 뜬다
빗방울은 굵어지고... 자세히보니 메모리 카드를 넣지않고 사진을 찍어대니 사진이 저장될리가 없제
장가가는 넘이 집에다 거시기 두고 가는 꼴이 되었으니... 내가 요즘 왜이리 사는지...
쉼터(06:30)
931m봉(06:40)
2013년 남진길의 사진으로 대체를 한다
동자꽃의 슬픈 전설(꽃말: 기다림)
강원도 첩첩산중 조그만 암자에
할배스님과 동자승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
노 스님이 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양식을 구하러 간 노스님은
암자로 돌아 올 수가 없었지요.
눈은 일주일 이상 내렸고 눈이 그친 뒤
암자로 돌아와 보니 어린 동자승은
마당 끝에 나와 마을로 난 길을 바라보며
앉아서 얼어 죽었데요.
노 스님은 어린 동자승을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 주었는데
그 이듬해부터 무덤가에는
동자승을 닮은 홍안의 꽃들이 피기 시작했데요.
우의를 입지않고 걸으니 차리리 훨씬 시원한 느낌이다
933m봉은 전망이 뛰어난 곳인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인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그냥 통과를 하는데
이곳은 일반 등산객은 거의 오질않고 대간꾼만 다니는 길이라 그런지 등로가 전혀 보이질 않을 정도로
잡목이 우거져 마치 악명(?)높은 지맥길을 한 구간 걷는 느낌이다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900m봉(07:10)
900m봉 삼각점(△434 재설 / 77 건설부)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비를 맞아서 그런지 훨씬 더 청순하게 보이는 꿩의 다리
등로는 미끄럽고 잡목은 성가시고 졸음은 쏟아지고 빗줄기는 굵어지고...이것도 수행이련가?
내가 그의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와서 꽃이되었다
내가 그의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싶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 춘수의 꽃
그래도 나리꽃이 산꾼 범여를 응원하니 외롭지는 않소이다
오랫만에 보스아우님과 둘이서 단촐하게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다가보니
갑자기 산꾼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먼저간 동료들이 비가 오는 고뱅이재에서 아침상을
펼쳐놓고 식사중이다
고병이재에 왠 석병산 안내판... 번지수를 잘못 찾은듯 싶다
고병이재(07:30)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골의 동서로 잇는 고개로
석화동굴(石花洞窟)은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동굴로 절골에 있어 절골굴이라고도 한다.
만덕봉·두리봉·석병산 일대는 약 1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석회암지대로 곳곳에 많은 석회동굴이
발달해 있는데,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연장 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이라 한다.
비를 맞으면서 맞이하는 아침밥상
고병이재에서 비를 맞으면서 청승맞게 밥한술을 뜨고 나홀로 호젓하게 산길을 걷는다
선두는 진작에 가버리고 후미는 따라오지 않으니 자연스레 나홀로 산행이 돼버렸다.
난 이렇게 호젓한 산길을 너무 좋아한다... 비를 맞으면서 야생화도 바라보고 홀로 콧노래도 부르면서...
홀로 걷는 이 길... 비가 오면 어떻고 길이 미끄러우면 어떠리... 조심하면 되는걸
빗길에 홀로 걷는 범여를 솔나리가 응원을 하고...
908m봉(H:09:05)
908m봉 정상은 이젠 역할이 끝나버린 폐헬기장 자리를 잡고 있고 좌측으론 백두대간 수목원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인다
908m봉을 지나서 다시 미끄러운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비에 젖은 잔대
오늘 구간에는 4년전 남진길에 없었던 쉼터들이 많이 보인다
안부(08:18)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이젠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의를 입지 않았던 탓인지 이젠 비와 땀이 범벅이 되어 구분이 안되고
계속되는 산죽 오름길... 갑자기 뫳돼지 한마리가 도망을 간다
갑자기 나타난 뫳돼지 때문에 그 넘도 놀라고 나도 엄청나게 놀랬다
산죽길을 벗어나니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08:24)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곳에는 풀섶에 묻혀버린 무명묘지가 1기가 있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쉼터(08:26)
상황지미골(上凰池尾谷) 갈림길(08:28)
상황지미골은 강릉시 옥계면 산계3리에 있는 마을로서 지명의 유래는 봉황이 날아오는 정자에
못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며, 상황지미골[上凰池尾]은 황지미골 안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석병산과 만덕봉에서 내려온 줄기 사이에 있고, 상황지미골로 들어서면 증어리가 나오고,
왼쪽 계곡인 증어리골로 들어가면 석병산이 되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선목이가 된다.
증어리골에는 범바우골이 있는데 이곳이 황지미골 마갈이며 산계8경 가운데 하나인 호암잔설(虎岩殘雪)에 해당된다.
상황지미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하황지미가 된다
옛날에 사일거사(四一居士) 심래조(沈來助)가 무릉도원을 찾다가 황지미에 들어오게 되었다.
심래조는 이곳이 무릉도원과 비슷하다고 하여 냇가 바위에 방도계(訪桃溪)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그 옆에 봉황이 많이 날아오는 곳이라 하여 봉래정(鳳來亭)[나중에 迎鳳亭으로 고침]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
지금까지도 마을 입구 냇가 바위에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상황지미골 갈림골을 지나면서 등로는 다시 숲으으로 변해 버린다
표시목을 지나니...
조금 이른 시기이지만 금마타리가 피기 시작하고....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석병산 갈림길(08:32)
석병산 전위봉에 있는 깨진 삼각점
석병산 전위봉에서 인증샷
이곳에서는 주위가 一望無際로 다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모든게 짙은 안개로 하얀 여백이다
강한 빗줄기에 바람도 세차게 불어온다... 또 오늘 산에서 한가지를 배운다
하나를 버려야만 하나를 얻는다는 비움의 철학을...
비가오니 무더운 더위를 피할 순 있었지만 주위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지...“산은 영원한 인간의 스승”이라고...
솔나리(꽃말:새아씨, 깨끗한 마음)
나리 종류는 참으로 많아 왠만한 야생화 전문가가 아니고는 구분이 그리 쉽지는 않다.
육십령에서 출발하여 서봉 오르는 암릉구간에는 원추리와 털중나리, 말나리 등이 군락을
이루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조금 보기 힘든 빨간색의 솔나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800미터 이상의 고지대 암벽이나 능선에 산다는 솔나리를 만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솔나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로서 높이는 70cm 정도이며 잎은 어긋나며 가늘고 길다.
초여름에 붉은 자주색 꽃이 피고 열매는 삭과로 거꾸로 된 달걀 모양이다
석병산 전위봉에서 바라본 석병산의 모습
석병산 가는 길에서 만난 골짜기
석병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일월문으로 가는 길이다
석병산(石屛山:1055m:08:40)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석병(石屛)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다.
동쪽과 북쪽의 급사면에서는 주수천(珠樹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서쪽의 완사면에서는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남동쪽 비탈면에 옥계석화동굴이 있고, 생계령 기슭에는 임계 카르스트지형이 있다.
서쪽 기슭으로는 강릉~태백 국도가, 남쪽 기슭으로는 정선~동해 국도가 각각 지난다.
석병산에는 바위 한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일월문과 철쭉꽃 군락지가 있다.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 삽운령 동북쪽 줄기 상에 있는 큰산으로 “담정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산이 석병산이다.
이러한 표기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도 나타나는데 석병산이란 이름을 기암괴석들이 바위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돌 병풍처럼 보인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석병(石屛)산”으로 불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담정산이란 지명은 남대천이 발원하는 석병산과 두리봉 사이의 골짜기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으로
불리던 것이 구전된 것으로 보이며 담정골에는 고려에 대한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져 온다.
고려 "우왕"은 전란을 피해 대관령 근처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피난시절을 보냈는데
이 때 성 안에서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의 위패를 모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석병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석병산 정상인 일월봉에서 내려와 일월문으로 향한다
석병산 일월문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석병산 일월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한다.
흰색 꼬들배기인가?...까실쑥부쟁이인가 빗속이라 아리까리하다
다시 석병산 갈림길(08:50)
두리봉쪽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석병산 갈림길에서 두리봉을 향하는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진 느낌이다
큰비단 그물버섯인가?
버섯은 야생화와는 달리 볼 때마다 헷갈린다
등로 좌측에 있는 카르스트 지형의 웅덩이
나홀로 호젓하게 걷는 이 맛... 참으로 좋다
급경사의 돌계단을 내려서니...
안부를 지나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폐헬기장이 나온다
폐헬기장(H:09:05)
폐헬기장에 서있는 이정표
폐헬기장을 지나면서 계속 이어지는 산죽길
다시 미끄러운 등로를 따라서 급한 오르막은 시작되고...
정선 소방서에서 설치한 지점좌표 이정목을 지나니 두리봉이 나온다
흰독큰갓버섯
식용으로 쓰는 큰갓버섯과 유사하나 갓의 중앙에 담황갈색의 대형 막질 인피가 없고
조직은 상처시에 변하지 않으며 갓의 조직과 대의 조직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고 준독성 버섯이다
두리봉(斗里峰 1033m:09:25)
강릉시 옥계면 북동리, 왕산면 목계리,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정상에는 산꾼들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목재 테이블이 여러개 있고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으며 이곳에서 우측으로
난 길이 만덕지맥 가는 길이다
국토지리정보원과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 ‘두리봉(頭理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두리’는 ‘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로 ‘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다.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산줄기의 분기하는 가지줄기는 만덕봉에서 두 줄기로 나누어 진다.
한 줄기는 옥계로 보내고 다른 한 줄기는 칠성산으로 불리는 담정산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지는데 산자락 끝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인 굴산사가 있다.
만덕지맥(萬德枝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두리봉(x1033.4m)에서 분기하여 △만덕산(1035.3m봉)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 피래분맥 (皮來分脈)을 북동쪽으로 보내고, 만덕지맥은 칠성대(953.7m봉), 매봉산(820.7m),
△갈미봉(813.6m봉), △모산봉(104.4m)을 거처 강릉시 견소동 공항대교에서 맥을 다하는 섬석천, 강릉남대천 분수령이다
두리봉에서 삽답령 방향으로 내려서니 가늘어졌던 빗줄기는 다시 굵어지기 시작한다
덕우리재 갈림길(09:27)
덕우리재 방향으로 시그널이 꽤나 많이 보인다
초보 산꾼들은 조금은 혼란스러운 구간이나 이곳은 울트라 마라톤 코스이다
빛바랜 얼레지 안내 표지판
무명봉(09:30)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강릉바우길 표지판이 나온다
강릉 바우길이 대간길과 겹쳐지는 구간이다
강릉바우길이란?
소설가 이순원씨와 산악인 이기호씨가 강원도 전역의 길들을 이어 개척한 길로 백두대간 대관령,
선자령의 풍력발전단지에서 경포대, 정동진을 경유하는 11개의 트레킹 코스에는 바닷길, 산길, 숲길,
마을길, 둑방길 등 모든 길들이 포함되어 있다.
'선자령 풍차길', '산 우에 바닷길' 등 11개 구간의 각 이름은 이순원 작가가 붙인 것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르키며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강원도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친화적인 트레킹코스이다.
바우(Bau)는 바빌로니아 신화에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을병을 낫게 하는 아주
친절하고도 위대한 건강의 여신이기도 하다. 이 길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바우 여신의 축복처럼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길 위에 담았다
굵은 빗줄기는 이제 장마비 수준이다... 자꾸만 습기가 차는 카메라가 걱정이다
삽답령으로 가는 계속되는 내리막길... 그래도 홀로 호젓하게 산죽길을 걸어간다
갈림길(09:57)
무명봉(10:02)
굵은 빗줄기 사이로 산죽길을 헤치고 가니....
삼각점이 있는 863.7m봉이 나온다
863.7m봉(10:08)
863.7m봉 삼각점
외고단(外高丹) 갈림길(10:15)
강릉시 왕산면 고단리 외고단마을로 내려가는 등로가 좌측으로 보이는데 고단리 마을은
1916년 한늪이, 다릿골, 사반동 등을 합쳐 고단리가 되었고, 1917년 면제개혁 때 상구정면이
왕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왕산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이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있으며, 1009m의
덕구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마을 가운데로는 삽당령에서 발원한 고단천이 흐르며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이 많아 국내 최고의 고랭지 농업 지역이다.
고단(高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관도(官道)에 딸린 고단역이 있었다 하여 유래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충신인 고상단충(高尙丹忠)이 이곳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자연마을로 한늪이, 샛골, 다릿골, 사반동 등이 있다.
한늪이는 과거 이곳에 큰 늪이 있었다는 데서 불리는 이름으로, 현재는 개간되어 고랭지 농업이 활발하다.
사반동은 마을이 송현천 가에 있어 모래가 쌓여있었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문화재로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던 덕우산 칠연정이 있다
780m봉(10:20)
정선소방서에서 설치한 구조목...난수표인지 가방꾼 짧은 범여는 이해가 안되는구먼
앙증맞은 바위를 지나면서 조그만 삼거리가 나오는데 직진의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이정표(10:30)
왕산면 송현리(松峴里) 방향으로의 이정표는 통행금지란다
지명의 유래는 조선 태조 때 송경(松京)을 생각하면서 강릉의 서남쪽을 송현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송현리는 본래 구정면 지역으로 소재[솔재] 밑이 되므로
소재[송현리]라고 하였다는 설, 옛날 이 고개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생긴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다.
‘소재’는 ‘솔재’의 ‘솔’에서 ‘ㄹ’이 떨어져 나가 생긴 이름이다.
급경사의 나무계단
이리 저리 망가지고 넘어지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임도(10:37)
오늘 산행 거리는 비교적 짧은거리의 산행이지만 산행내내 비를 맞으면서 한 구간을 끝낸다
삽당령(揷唐嶺:680m)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임계면을 잇는 35번 국도가 지나는 해발 680m의 고갯마루로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짚고 왔던 지팡이를
버리고(꽂아 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揷)'자를 써 삽답령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유래는 정상에서 북으로는 대기(大基)로 가는 길과서쪽으로는 고단(高丹)가는 길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 삼지창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이 고개는 강희 54년(숙종41년)인 1715년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府) 서쪽 60리 정선으로 가는 길’이라 기록되어 있다.
삽당령은 강릉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그리고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으로 몸을 섞는
송현천의 발원지기도 하다.
고갯마루에 당집이 있어 당집 사이에 있는 고개란 뜻의 샅당령이 변해서 삽당령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 곳의 옛이름은 삽운령(揷雲嶺)인 것을 보면 백두대간의 마루금에서 수시로 변하는 기후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지 주민들은 삽당령이라 부르지 않고 “삽달령”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또다른 유래는 고개에 사당이 있는데 사당령이라 부르던 것을 변음이 되어 삽답령으로 부른단다
삽당령 수준점
삽당령에서의 인증샷
삽당령 성황당과 안내판
삽당령에 도착해 내 몰골을 뒤돌아보니 마치 물에 빠진 생앙쥐같은 느낌...내가봐도 우습다
고개에 있는 욕쟁이 할머니집에 가서 동동주 2병을 사서 버스에 오른다
예전의 기개 넘치던 욕쟁이 할매는 이제 이빨빠진 호랑이같은 느낌이고 손녀가 장사를 한다
욕쟁이 할머니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것을 느낀다...세월앞에 장사 없다는 것을...
산행을 마치다(10:40)
대간길치고는 비교적 짧은 거리이고 비가와서 그런지 이른 시간에 산행을 끝내고 후미가 도착한 후
삽답령 고개 아래에 있는 정선군 임계면 소재지로 가서 목욕탕에서 깔끔하게 목욕재계 한 후에
인근 식당에서 진수성찬의 요리로 만찬을 즐긴 후에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임계면(臨溪面)소재지의 모습
강원도 정선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가목리 · 도전리 · 직원리 · 임계리 등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당시에는 명주군에 속했다가 고려 시대에는 강릉군에 속하였다. 임계역이 있어 임계면이라고 하였다.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청구도』, 『동여도』에 임계역이 표시되어 있으며 임계역은
조선 시대에 강원도 역도(驛道)인 보안도(保安道)에 속하였고 『호구총수』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여러 고지도에 임계면이 표기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1리 · 2리 · 3리의 위치, 호구수 및 인구수가
기재되어 있으며 전국지도에 임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임계창(臨溪倉)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06년(광무 10)에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날씨가 맑아지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보니 아직도 강원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다
빨리 집에가서 내일부터 1주일간 부탄으로 성지순례를 가야하는 가방을 싸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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