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란 승자의 기록이란걸 가르쳐 준 갈령으로 가는 대간길
☞ 산행일자: 2017년 8월 8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높은 습도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2.2km + 어프로치 1.3km / 5시간 5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화령재-수청거리 삼거리-상곡리 갈림길-490m봉-창안마을 갈림길-공터
산불감시초소-안부-안부-안봉-봉황산-암봉-공터-무명봉-암봉-459m봉
비재-무명봉-510m봉-안부-조망바위-무명봉-무명봉-암봉-억시기고개 갈림길
무명봉-못제-무명봉-안부-헬기장-구병산갈림길-무명봉-안부-무명봉
갈령삼거리-암봉-암봉-고래바위-헬기장-갈령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외서면, 화동면, 화남면, 화북면
일욜날 갑자기 생긴 일정 때문에 산행을 하지 못한 탓에 평일날 대간길을 나서게 된다
원래는 후배 산꾼과 함께 차량을 가지고 가서 늘재에서 버리미기재 구간을 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후배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나홀로 산행을 나서게 되는데 무더운 날씨에
차량을 가지고 가서 10시간 이상 산행을 하고 다시 차를 끌고 서울로 온다는게 부담이 되어
일정을 바꾸어서 당일 산행으로 부담이 없는 화령재에서 갈령삼거리까지의 구간을 계획하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서둘러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상주행 버스 티켓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선릉역에 도착하여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간발의 차이로 전차는 가버리고...
이른 새벽이라 지하철이 자주 없는 관계로 그 다음 전차를 타고 강변역에서 내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30분이 거의 다되어 버려서 차표를 예매하고나니 아침 먹을 시간이 없다
06시 40분 상주행 버스를 타고 상주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09시 10분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할려고 했는데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우유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일반버스를 타는 곳으로 가니 화령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06시 40분 상주행 버스를 타고 상주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09시 10분정도가 되었다.
상주터미널에서 화령가는 버스 시간표
09시 45분에 화령으로 출발하는 버스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을 한다
좌석 맨 앞에 앉아서 기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다가 화령재에
도착하는데 원래 이곳에는 버스가 서질 않고 이곳에서 한참을 지나 화서 면소재지에서
서는데 사정을 했더니만 고개 정상에내려 주는 바람에 30여분의 시간을 절약한다
버스기사의 배려로 버스 정류장이 없는 화령재 정상에서 내린다
버스에 내리는데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다
화령(化寧:320m;10:40)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로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화령은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화령정의 모습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자료 인용 - 민병준님의 향토기행 상주 4 에서)
화령정(火嶺亭) 정자에 걸려있는 건립기
베낭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
산행을 시작하다(10:50)
화령(化寧)의 이름처럼 평온한 이 고갯길에서 이제 나는 속세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해 갈 것이다.
비록 영원한 떠남은 아닐지라도 대간의 발걸음을 옮기는 날 만큼은 속세의 진토들을 털어버리고 싶다.
도로를 따라서 가도 되는데 너무 더워서 숲속으로 가니 산꾼들의 시그널이 종종 보인다
숲을 헤치고 가다보니...
2분도 안되어 다시 25번 국도로 다시 내려오고, 좌측엔 예전에 없었던 화서태양광 발전소가 보인다
수청거리삼거리(10:55)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수청거리 삼거리는 화령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술청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으로 25번 국도에서 괴산과 화북, 문장대로
이어지는 49번 국도가 지나는 삼거리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 교통량이 상당히 많았으나 바로 옆에 당진~영덕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바람에
지금은 교통량이 별로 없는 한적한 도로가 되었다
도로를 건너서 본격적인 능선으로 접어든다
우측으로 꺽어서 올라서니...
산꾼들의 흔적이 홀로걷는 범여를 반긴다
잣나무 숲이 있는 능선으로 올라겄만 오늘도 얼마나 더울런지 바람 한 점이 없다
상곡리(上谷里) 갈림길(11:02)
우측으로 화서면 상곡리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문화식당.여인숙 간판이 보인다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상곡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금강의 지류가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계곡리, 명통리, 상달리, 금곡리 등을 병합하면서 상달과 금곡의 이름을 따 상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중촌, 명통, 퉁점마을 등이 있다. 금곡마을은 상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금이 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촌마을은 상곡리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명통마을은 금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퉁점마을은 명통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놋점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상곡리 갈림길에 있는 광고판
자그만한 능선이 초반부터 많이 보인다
최근에 온 비 탓인지 땅에서 올라오는 습한 기운이 장난이 아니다
접시껄껄이그물버섯
오르막길에서 만난 무명묘지
멧돼지의 횡포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서면의 모습
화서면은 동으로 내서면과 외서면, 북서쪽으로 화북면, 화남면, 남으로
화동면에 접해있고, 상주시와의 거리는 26km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명은 화서면(化西面)이고, 화령(化寧)이라고 부른다.
화서는 중화지구(中和地區)의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16년에는 화령현(化寧縣)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그대로 따라 썼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13년)에 현으로 고쳐서 상주목에 속하였다.
우측으로 약간 꺽어졌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490m봉(11:25)
힘들게 올라온 만큼 또다시 나무 계단을 따라서 급하게 내려간다
급하게 내려 왔다가...
커다란 봉우리가 눈 앞에 들어오나 착하게도 좌측으로 대간길은 사면으로 이어진다
편안한 능선을 이어가는데... 좌측으로 띠지가 걸려있는 등로가 보인다
창안마을 갈림길(11:33)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에 있는 창안마을은 상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창터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으로도 등산객들이 다니는 모양이다...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소나무숲을 지나는데 이제서야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한다
공터(11:40)
다시 급한 오름길이 시작되고 우측으로 상곡리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인다
산꾼들의 시그널이 많이 걸려있는 능선으로 오르니...
쪼그라든 노란망태버섯
산불감시초소(570m:11:48)
산불감시초소에서 바라본 화서면소재지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서 높은 습도 때문에 땀은 비오듯 흐르고 따가운 햇살에 개고생하면서 걷는다
안부(12:05~25)
안부에 도착하니 오랫만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침을 먹지 못한 탓인지 허기가 지기에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옷옷을 벗어 말리고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 밥상을 펼친다
20여분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고나니 시원한 바람탓에 옷은 뽀송뽀송... 다시 길을 나선다
貧寒한 산꾼의 단촐한 점심밥상
멋진 소나무도 예전 그대로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대궐터산의 모습
봉황산 오르막길에 올라서니 건너편에 있는 속리산 구간 자락인
대궐터산(청계산)과 그 아래 산속에 파묻혀 있는 극락정사가 아련히 보인다
대궐터산은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래 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도 부르고 또다른 이름은 청계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으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라고 한다.
지나온 등로 너머로 보이는 상주시의 산그리메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바로앞의 높은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길로 오른다
안부(12:30)
암봉(12:40)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東觀里)의 모습
동관리는 두루봉, 형제봉, 봉황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가운데로
이안천이 발원하여 흘러나가며 밭농사를 주로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동관음리(동관음), 갈골(갈동), 비조재(비조티,동관,동비령리),
웃비재, 장자골(장자동), 절골(싸동), 정착촌 등이 있는데 동관음리는 전에 동관음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후에 동관리가 되었으며 갈골은 갈이 많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며 비조재는 비조재 고개 아래 위치한 마을이다.
장자불은 동관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다. 정착촌은 6.25때 피난민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도를 높이며 암봉을 치고 오르니 봉황산이 눈 앞에 보인다
봉황산 정상의 모습
봉황산(鳳凰山:740.8m:12:45)
경북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표지석엔 '白頭大幹 鳳凰山 740.8m'라 적혀 있고
삼각점과 백두대간 안내 표지판, 원형의자,준.희 선생님의 팔음지맥 분기봉 표지판 보이는데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높은 산이며 유일하게 산의 지명이 있는 중화지구 화령(化寧)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백두대간상의 산이다.
삼각점(관기? 303, 1980 재설)이 있으나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글자가 희미하여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영주 부석사 뒷산인 봉황산(819.9m)이 하도 유명하여 이곳의 봉황산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지에서는 꽤 알려진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1300여 년 전 이 산에 봉황새가 찾아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봉황산이 됐다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정상을 봉황새의 머리라 하고, 양쪽으로 뻗은 봉우리들을 날개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런 대로 봉황 같다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전설이 배태된 것이라고 본다.
봉황산은 팔음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팔음지맥(八音枝脈)이란?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남서방으로 분기하여 천택산(683.9m), 팔음산(771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449.5m)을 만들고 북으로는 보청천, 남으로는 송천(초강천)의
분수령이 되어 금강2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봉황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봉황산 정상 삼각점(△관기303 /1980 재설)
눈에 익은 기분죤산악회 시그널이 보인다
선두대장인 나와 갑장인 봉사맨 친구가 걸어 놓았나?... 이보게 친구! 잘 있는가?
요즘도 선두에서 죽기살기로 가는지 궁금하네그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살살 다니면서
山川景槪를 유람하며 다녀야지 뭣이 그리 급하다고 아무것도 못보고 죽기 살기 다니시는가
하긴 대간길의 산행대장들은 다 자네처럼 몇km를 몇 시간에 도착하냐에 목숨을 걸기는 하다마는
이제 자네는 그리하지 마시게... 후미들도 생각해야지... 언제 시간나면 탁배기라도 한 잔합세
암봉(12:55)
직진으로 대간길이 이어지나 위험한 암릉구간이라 우회를 하면서 걷는다
우회를 하면서 능선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도 예전에 없던 대간길 이정표가 보인다
다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비조령으로 향한다
공터(13:18)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다시 바람한 점 없는 대간길...생각보다 의외로 힘이든다
무명봉(13:25)
범여님! 힘내셔요라고 하는듯...
위험 표지판을 만나고...
암봉(13:40)
암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봉황산의 모습
이장(移葬)을 한듯한 묘지의 흔적도 보이고...
459m봉(13:55)
비재를 향하는 내림길이 시작되고...
열심히 매달아 놓으셨군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려서니...
리기다 소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잠시 후 우측은 잣나무... 좌측은 신갈나무 식생대를 만난다
예전에 없었던 나무 계단이 나오고...
2% 부족한 비재 이정표... 거리 표시를 해놨으면 좋았을 걸
2013년 12월 29일 남진할 때 공사중이던 동물이동통로가 완공되어 대간길로 이어진다
비재 윗쪽으로 지나는 동물이동통로
비재에서 바라본 동관리 방향
비재에서 바라본 화남면 평온리 장자동쪽의 모습
화살표가 가리키는 비석이 백두대간 비조령이라 써놓은 표시석이다
예전과는 달리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비재를 지난다
비재(飛鳥峙:320m:14:10)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평온리의 장자동 사이에 있는 재로 새가 나는 형국이어서 불리는 이름으로 비조치(飛鳥峙),
비조령(飛鳥嶺)으로 불리우며 산꾼들이 사용하는 지도에는 대부분이 비재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예전엔 철계단에 2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은 백두대간 잇기 공사로 동물이동통로가 생겨서 도로로 내려서지 않고 편하게 비재를 지난다
《‘비스듬하다, 비탈, 벼랑’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지명에서 한자로
표기할 때는 ‘천(遷), 애(崖), 별(別), 성(星), 비(飛)’로 나타난다.
상주지역에서는 ‘비루, 비알’이라고 한다. ‘비탈’과 ‘비루’를 땅이름에서
한자로 옮길 때 ‘비(比, 飛, 琵)’를 썼는데 특히 ‘비(飛)’가 많이 쓰였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대궐터산(청계산이라 부르기도 함)에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고, 지금도 대궐터, 차력굴, 용암, 추춧돌, 우물터가 있다고 한다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오르막길에는 예전에 없었던 쉼터가 보이는데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통나무 계단을 따라서 510봉으로 향하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쁜 넘... 오늘은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영지버섯을 쏠쏠하게 수확을 한다
달걀버섯(식용버섯)
이 넘도 내 베낭속으로 들어간다
무명봉(12:28)
비재에서 무명봉으로 급하게 치고 오른 다음에 다시한번 꺽어서 오르막으로 오른다
피어버린 달걀버섯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510봉이 나온다
510m봉(14:35)
비재에서 510m봉을 오르는 길을 땀을 꽤나 흘려야만 오를수가 있다
오르자마자 또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 이곳은 여름철엔 그리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다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대간길에서 오늘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난 산꾼
붉은비단그물버섯
안부(14:45)
집채만한 커다란 암릉이 앞을 가로 막는다... 저곳 위가 조망바위이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자일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로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암릉구간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조망바위 표지판이 보이고...
조망바위(14:52)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충북알프스 구간에 있는 구병산의 모습
구병산(九屛山:876m)...2015년 8월 15일~17일 충북알프스 종주때의 사진
충북 보은군 장안면,속리면, 마로면과 경북 상주시 화남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인기 순위중에 96위에 해당되는 산이다
구병산은 구병리 우복동과 삼가리 협곡을 사이에 두고 정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 속리산 천황봉이다.
이 상황은 아내가 자신을 버린 남편을 찾아와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보은지방에서는 속리산 천황봉과 구병산 그리고 금적산(金積山) 등 세 산을
‘보은삼산(報恩三山)’이라고 일컬어 왔으며이 삼산을 두고 ‘속리산은 부산(夫山)이요,
구병산은 부산(婦山)이요, 금적산은 자산(子山)’이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속리산 국립공원 남단 경계를 이루는 구병산의 산세는 동에서 서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능선 상에 아홉 개에 달하는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다.
아홉 봉우리로 인하여 옛날에는 구봉산(九峯山)으로도 불리었다 한다.
암봉을 이룬 아홉 봉우리들마다 각각 신선대, 백운대, 봉학대, 노적봉, 쌀개봉 등
저마다 이름들이 있었다 전해지며 이중 최고봉인 정상이 백운대, 정상 서릉 상의
쌀개봉과 노적봉, 동릉 상의 신선대 정도만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이 산은 물가에 드리운 기암절벽들이 한 폭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서원계곡과
삼재팔란(三災八亂)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로 알려진 구병리 우복동, 속리산 정이품송의
아내라는 얘기를 듣는 정부인 소나무, 삼가저수지, 최근에 발견된 정상 바로 옆 풍혈과
구병리 동굴풍혈, 숨은골의 쌀난바위, 그리고 주능선 남과 북을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 등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풍광에 뛰어난 볼거리들이 온 산을 수놓고 있다
다음구간에 가야할 형제봉의 모습
무명봉(14:55)
斷石
무명봉(15:00)
무명봉을 내려서니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언젠가 걸어야 할 작약지맥과 우복동천 십승지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작약지맥과 우복동천 십승지가 겹쳐지는 능선 아래로 억시기 마을이 보인다
안부에서 다시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체력이 바닥나면서 몸뚱아리는 천근만근이다
로프에 육신을 의지한 채 힘들게 암릉구간을 올라선다
암봉(15:25)
암봉을 지나 다시 내려서니...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듯한 안부를 지나고...
무명묘지를 지나면서 억시기고개 갈림길이 나온다
억시기고개 갈림길(15:28)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있는 고개로서 못제의 견휜에 대한 전설과 연관된 고개란다.
옛날 견휜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신라 황충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자
황충장군이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염탐꾼을 시켜 뒤를 밟은 결과 견휜이
기진맥진 상태에서도 이곳 못재에서 힘이 솟구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황충장군은 견휜이 지렁이 자손임을 알고 지렁이가 소금물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곳 못재에 소금 300석을 풀게 하였다.
소금을 푼 물에 견휜이 목욕을 하고 난 뒤 힘이 빠지자, 견휜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한다
무명봉(15:32)
무명봉을 내려오니 충북알프스 표지판이 보이면서 못제가 나온다
충북 알프스는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사이에 걸쳐있는 산줄기로서 보은군 서원면
서원교를 들머리로 하여 충북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구병산 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산줄기를 이어서 보은군 신정리나 또는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활목고개를
날머리로 하는 산행코스로 충북 보은군에서 1999년 5월 17일 ‘충북 알프스’로 특허청에
등록하였고 이곳에는 신라 진흥왕때 의신조사가 창건한 법주사와 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구병산과 그리고 수석 전시장이라
불릴만큼 기암괴석과 속리산을 비롯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주요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충북 알프스와 겹쳐있고 못제에서 문장대까지는 함께한다.
못제(16:35)
못제는 백두대간상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작은 습지로서 천지(天池)라고도 하며 사방이
막혀있는 2~300평의 정도에 물이 고여있는 면적은 10여평이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마저
보기가 힘들고 주변에는 참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 습지라는 걸 느낄 수 없는 실정이다
못제는 방죽을 의미하는데 산꾼들은 고개 이름을 착각하여 못(嶺)재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견훤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휜이 이곳 상주출신이다
못제의 맞은편에 솟은 대궐 터산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곳 못재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자,
이를 알게 된 신라 장군 황충이 못에소금 수백포를 풀어 견훤의 힘을 꺽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소금을 매우 싫어한다는 데 착안하여,「삼국유사」에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이 라는 데에서
유래된 듯한 전설이다.
전설에서 눈에띄는 것은 ‘지렁이’ 와 ‘소금 뿌리기’ 이다. 지렁이 이야기는 왠지 혐오감은
주고 있으며, 연못(습지)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유쾌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까?
어쩌면 자연보호 혹은 생태계 보호를 위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루금 상의 습지라면 각종 곤충의 집과 알,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 들이 서식할 것이다.
습지가 잘 보전되면 이들의 활동이 왕성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인간과
공생할 수 있는 보다 나은 터전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산림을 훼손하지 않고 아끼고 잘 보전하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나온 속담들일게다.
특히 ‘썩은 나무를 땔감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은 다른 생물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썩은 나무는 다른 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만약에 견훤이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이런 기록이 있었을까?
작금의 기록을 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탄핵으로 인해 대통령에 당선된 분은
국민의 과반수도 아닌 42%도 안되는 지지를 받고 권좌에 올랐건만 장.차관이나
정부 요직 인사를 지명하는 걸 보면 민초들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독불장군식의 인사정책...
인사가 만사라 했는데 문대통령의 스타일을 보면 대통령인지 NGO 대표인지 헷갈린다
제발 반대한 58%의 민초들의 생각도 헤아려 협치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시길...
오늘도 산에서 하나를 배운다...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아라는 것을...
못제에는 예전의 대간길에서는 없었던 벤취가 자그만치 8개나 새로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면서 베낭털이를 한다
그래봤자... 점심때 먹다 남은 포도 몇알과 오렌지 쥬스에 초코렛 하나뿐이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등로 주위에는 요리를 해 먹을만큼 튼실한 싸리버섯과 유생들이 많이 보이는데
아그(幼生)들은 그냥두고 먹을만 넘은 채취를 하여 베낭속으로 집어 넣는다
무명봉(15:42)
안부(15:43)
헬기장(15:46)
구병산 갈림길(15:50)
안부에서 내려선 다음에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길로 향한다
무명봉(15:57)
무명봉에서 6분정도 걸어서 내려서니 급경사 위험 표지판이 있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 다음에 암릉구간을 돌아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안부 능선(06:08)
다시 암릉 구간을 만나고...
급경사를 내려섰다가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로프를 부여잡고 능선으로 오른다
무명봉(16:13)
갈령삼거리(16:14)
오늘 대간 산행을 이곳에서 접고 우측의 갈령 방향으로 내려선다
갈령터널을 지나 억시기 마을 버스 정류장까지 가야 상주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맘이 급하다
갈령삼거리에 있는 십승지 안내판
이곳은 작약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하다
작약지맥(芍藥枝脈)개념도
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 대간 속리산군 형제봉 남동쪽 0.6km지점의 721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갈령(49번국지도),두루봉(대궐터산. 873m),동네실재,국사봉(703.3m),황령고개,칠봉산(598m),갈티재,
성재산(356m),작약산(774m),은점재,수정봉(488m), 태봉산(106m) 을 거처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낙동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9m되는산줄기로 이안천의 우측, 영강의 남쪽 분수령을 작약지맥(芍藥枝脈) 이라 칭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오직 버스를 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맘이 급해진다
암릉구간을 지나고...
이른 아침에는 흐리고 높은 습도에 힘들고 조망도 별로였지만 오후에는 조망이 참으로 좋다
오늘같은 날은 山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산을 신격인 堂山으로 삼아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나 동네마다 산신당을 두고
산신을 섬겼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산은 우리 가슴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산은 세상살이를 배울 수 있다’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산 넘어 산이다/산전수전 다 겪었다/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산보다 골이 더 크다/ 산에 가야 범을 잡지/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갈수록 태산이다/ 티끌모아 태산 …………등등
이런 말들은 수백 년 이상 오랜 기간 동안 민중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진리들이다.
생활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혜들 가운데 상당수가 산을 통해서 투영된다는 의미이다.
산은 신성한 것인 동시에 우리의 스승인 셈이다.
암봉(16:22)
십승지 중의 하나인 우복동천의 모습(화북면 소재지)
십승지(十勝之)는 예언의 땅이다.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이다.
조선시대 평범한 민초들이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흉년과 홍수로 굶어 죽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이 개죽음을 당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비결(秘訣)을 탄생시켰다.
비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법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비결서가 <정감록>이다.
십승지는 이러한 비결에서 유래되었다. <정감록>은 가장 널리 십승지를 알린 비결서다.
역사적 격동기에는 수많은 백성이 십승지에 나타난 예언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의 심층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우복동(牛腹洞)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로 상주 속리산 동편에 숨어 있다고 전해진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백성들은 물론 몰락한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약용의 <다신시문집> 제18권 ‘증언(贈言)- 다산이 제생(諸生)에게주는 말’에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단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빛이 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 중략 -
- 정약용 ‘우복동가(牛腹洞歌)’ 중에서 그 곳은 속리산 동편,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일대였다
급한 내리막길에도 먹을만한 싸리버섯이 보인다... 이것도 베낭에 주워 담는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암봉(16:27)
암봉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서는데 마사토 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덕다리 버섯
고래바위(16:30)
범여의 생각中에서
헬기장(16:35)
헬기장에서 갈령 삼거리로 내려선다
갈령 정상에 있는 도로개통 기념비
이곳 정상에는 갈령 표시석과 도로개통 기념비 그리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갈령(葛嶺:443m:16:40)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니인 상주 우복동이 있다.
갈령 표시석 뒷면의 모습
갈령은 이 고개 아래로 새로 생긴 터널 때문에 완전히 잊혀진 고개가 되어 버렸다
히치를 시도해 보려지만 차량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화북에서 상주로 가는 막차가 화북에서 16시 50분이니 적어도 도로까지는 17시 안에 가야 하기에
베낭을 메고 마라톤하듯 달려가는데 다행히 계속 내리막길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갈령터널이 보이고...
갈령삼거리(16:55)
갈령에서 49번 국도가 지나는 갈령삼거리까지 2km정도의 거리를 마라톤하듯 15분만에 도착한다
아직도 버스는 지나가지 않은듯 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억시기마을 버스 정류장은 보이질 않고...(17:05)
너무 숨이차서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터널쪽에서 버스가 오는게 아닌가.
버스 정류장이 아닌데도 무조건 손을 흔들어 대니 버스가 세워주는데 이게 누구여!
아침에 화령재 정상에 내려준 그 버스 기사가 아닌가... 손님이라곤 달랑 나혼자다
버스 기사와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버스는 화서면소재지를 들렸다가 상주 터미널로
향하는데 상주 시내에 와서 신호등이 자꾸 걸리면서 시간이 지체된다(버스요금 1,700원)
맘은 급해지고...17시 59분에 터미널에 도착하니 18시발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려고 한다
버스쪽으로 가서 표를 끊어 올테니 1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니 기다려준다
내가 버스표를 가져오자마자 버스는 출발을 한다
상주발 → 동서울행 버스표
버스에 오르니 손님이라곤 달랑 3명이다... 뒷좌석으로 가서 수통에 남은 물로
타월에 적셔 간단하게 몸을 닦고 속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한결 개운한 느낌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동서울터미널이다(20:30)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3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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