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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14구간 - 화령재에서 지기재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17. 7. 17.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편한 非山非野 지역인 중화지구대를 걷다

 

☞ 산행일자:  2017년 7월 16일

☞ 산행날씨:  폭우성 장마비...오후에 흐림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6.5km + 어프로치 0.4km  / 5시간 10분소요

☞ 참석인원: 안내 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화령재-무명봉-청원~상주간 고속도로 위-삼각점봉-임도-갈림길-무명봉

              윤지미산-지장봉-숭덕지맥 분기봉(437.7m봉)-무명봉-서원마 갈림길

              넓은 공터-무명봉-안부-무명봉-무지개산 갈림길-무지개산-무지개산 갈림길

              어산리 안부-장자봉 갈림길-노루골-갈림길-동래정씨 묘-이정표-영안동마을 갈림길

              304m봉-신의터재-NO140송전탑-이정표-갈림길-쑥밭골재-무명봉-갈림길

              김해김공묘지-금은골 입구-마을도로-지기재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서면, 화동면, 내서면, 모서면


이번 주말엔 무박으로 설악산 종주를 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하여 설악산

전체가 폐쇄되는 바람에 마땅히 갈 곳을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집에 있자니 몸뚱아리가

쑤시기 시작할 것이고...그래서 생각한 것이 백두대간에서 가장 수월하다는 상주구간

큰재에서 신의터재까지 가려고 생각을 해보지만 계속되는 장마비로 인해 나홀로 산행이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놓고 이곳 저곳을 검색하다가 보니 예전에 지맥길에 4번정도 간 적이 있는

산악회에서 지기재에서 화령재까지 산행을 한다고 공지가 올라와 있기에 전화를 해보니

자리가 있다고 한다...그래서 예약을 해놓고 아침에 일어나 빵 한조각에 두유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집을 나서는데 생각보다 빗줄기는 약해지고 탑승 장소인 잠실역에서 출발하여 천호,

강동, 상일동을 거치는 동안에 버스는 滿車다

 

산꾼들이 다 타고 버스는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회장이라는 분이 마이크를 잡더니만 

산행 공지와는 다르게 역산행을 하겠다면서 마치 유치원생 대하듯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는데

기분이 좀 상한다...나도 백두대간을 3번째 하는 산꾼으로서 북진을 하는데 남진이라니...

비탐 구간이라면 충분히 이해를 한다마는 여기는 비탐구간도 아닌데 산행 종료후에  알탕장소

때문이란 변명으로 일방적으로 코스를 바꿔 버리는데 괜히 왔다는 생각에 후회스럽다...

버스를 탔으니 어쩌랴...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대간길에는 이 산악회를 이용해봤는데 내 코드와는 전혀 맞지 않다

버스에서 왜 그렇게 떠드는지...마치 맥산행이 아닌 일반 산행을 온 느낌이다

이꼴저꼴 안 보려면 독립군(나홀로 산행)이 최고지...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음성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출발을 하는데 진천, 청주를  지나면서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장마비가 쏟아진다

잠깐 잠이 든 사이에 버스는 화서 I.C를 빠져나와 지기재가 아닌 화령재에 도착을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화령(化寧:320m:09:35)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로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다.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

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자료 인용 - 민병준님의 향토기행 상주 4 에서)

19세기 말에는 화령재 서쪽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에서 동학교도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른바 보은집회, 지리산 북쪽 대간길 남원땅에는 동학농민전쟁기념비가 있지만

이곳 보은은 그 중요한 마디(結節)였다. 1860년 서학에 대비되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는 최제우. 몇 년 뒤 잡혀서 처형을 당했다. 이후 동학은 꾸준히 조직을 갖췄고

1893년 교조(敎祖)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명목으로 교조신원운동 모임을 가졌으니 그것이 보은집회다.

한양땅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좋은 중심지이며

속리산의 험한 산맥을 끼고 있는 지형이라 선정됐을 듯하다.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뚜렷하다

산행을 시작하다(09:40)

25번 국도를 가로질러 등로에 들어서니 대간 산꾼들이 걸어논 시그널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생각보다 빗줄기는 그리 굵지 않아 카메라와 핸드폰 등 전자기기만 비닐로 싸고 우의는 입지 않는다

어차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기는 마찬가지일 터이고, 차리리 비를 맞는게 훨씬 시원할 듯 하다

버스에서 내려 베낭을 정리하는 사이에 산꾼들은 사라져 버리고, 이곳에서도 난 꼴찌이다

무명봉(09:45)

무명봉을 내려서니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등로 우측에는 商山金公과 全州李氏 부부 묘가 보이고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가니 고속도로 터널 위가 나온다

등로에서 바라본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예전에 청주에서 상주까지만 개통되었는데 지금은 당진에서 영덕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이다

삼각점봉(09:53)

삼각점 표지판

임도(09:55)

2009년 대간 북진길에는 임도 우측 능선으로 대간길이 이어졌는데 지금은 임도로 향한다

패랭이꽃(꽃말: 순수한 사랑)

옛날 서민들이 쓰던 모자를 패랭이라고 했는데, 꽃이 꼭 그 패랭이 모자를 닮아 붙여진

이름인데, 대나무처럼 줄기에 마디가 여러 개 나 있어서 석죽(石竹)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옛날부터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중국에 힘이 센 장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사는 마을에 석령(石靈)이라는 괴물이 살았다.

그는 괴물을 찾아 산으로 올라가 석령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얼마나 세게 쏘았던지 화살이

바위에 깊이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그 뒤 그 돌에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고운 꽃이 피어났으며,

사람들은 바위에서 핀 대나무를 닮은 꽃이라고 해서 석죽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패랭이꽃이다.

 

패랭이꽃은 우리나라 곳곳에 자생하는 숙근성 여러해살이풀로, 반그늘이나 양지쪽에 자라는데,

군락을 이루는 듯하면서도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식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키는 약 30㎝이고, 잎은 길이 3~4㎝, 폭 0.7~1㎝로, 잎 끝이 뾰족하며 마주난다.

꽃은 진분홍색으로 늦은 봄인 6월부터 여름까지 피며, 길이는 약 2㎝ 정도이다. 꽃은 줄기 끝에

2~3송이가 달리며, 꽃잎은 5장으로 끝이 약하게 갈라지고 안쪽에는 붉은색 선이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둥글게 보인다.

열매는 9월에 검게 익으며 모양은 원통형이다.

임도 갈림길(09:57)

임도에서 3분정도 편하게 걷다가 직진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앞서가던 산꾼 2분이 무심코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되돌아 온다

직진을 하면 상주시 화동면 판고저수지가 있는 판곡리 마륜마을로 향하는 길이다 

 

화동면 판곡리(板谷里) 마륜(말구리)마을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신의터재에서

화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11.3km 구간에서 주봉역할을 하고 있는 산으로

화동면 판곡리와 내서면 서원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윤’은 판곡리 마륜 (말구리)에서 유래했으며 ‘

지’는 고개를 뜻하고 ‘미’는 산을 뜻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언가 특이한 유래를 생각 했는데 이름에 비해 유래는 평범할 따름이다.

 

마륜 (말구리) 마을은 화동면 판곡리(板谷里)에 있는 마을로 예년에는 관청의 말을

사육하던 곳으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입주한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산골 마을이지만 큰 마을이었는데 판곡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어 지금은 20여 호만 남아 있다고 한다.

임도 갈림길의 이정표

무명봉(10:00)

무명봉을 내려서니 우측엔 仁同張公과 慶州李氏 묘지가 있고 미끄러운 길을 내려선다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졌지만 등로가 상당히 미끄럽다...요즘은 비만오면 산행을 하지

않았던 탓에 기억으론 올해 처음으로 雨中 산행을 하는 것 같다

인동장공 묘지에서 바라본 가야할 윤지미산의 모습

숲을 지나니 우측으로 인삼포가 보이고...

밭 좌측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서 걷다가...

농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윤지산 오름길에 들어서니 후손들이 돌보지 않는지 관리가 안된 묘지도 만난다

비가 온 탓인지 영지버섯 幼生들도 가끔씩 만난다

윤지미산으로 오르는 길...고도를 조금씩 높이기 시작한다

핸드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한다... 상주지역에 호우 경보가 내렸다는데

이곳이 상주가 아닌가...그런데 아직까진 위험할 줄 모르고 대간길을 이어간다

미끄러운 등로를 따라서 빡센 오름을 하니 잠시 후 윤지미산 정상이 나온다

윤지미산(538m:10:35)

경북 상주시 내서면과 화서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름이 좀 특이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대간꾼의  산행기를 보니

윤지미산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사서삼경 대학에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윤집걸중(允執乞中)이란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 맞힌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은 예전에 백두대간이 있기전에 선배 산꾼들이 여수에서 경기도,강원도까지

산맥길을 이어가면서 걸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윤지미라는 여성 산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성들이 맥 산행을 하지 않았던 터라, 남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곳을 오르면서 하도 힘이 들어서 엉엉 울었는데 남성 산꾼들이 그 여성 산꾼의

이름을 따서 윤지미산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었다는데 범여는 솔직히 믿음이 가질 않는다

 

원 지명이 있었는데 그 지명을 버리고 사람을 따서 산 이름이 된곳이 가끔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산이 양평에 있는 유명산이 아닐까?...유명산의 원 지명은 마유산(馬遊山)이었는데

1973년 한 일간신문사(한국일보)의 후원으로 국토 중앙자오선(127도 30분) 등반대가

여수에서 자오선을 따라 북상을 하다가 종주 등반을 하던 엠포르산악회 회원들이 지도에 표기가 없었던

이 산을 발견하고 대원중에 홍일점이었던 진유명(晉有明)씨의 이름을 따서붙혔는데 이후에 언론보도로

유명세를 타면서 이 산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윤지미산에서의 인증샷

빗줄기가 강해지기 시작한다...서둘러 길을 떠난다

오늘 산행중 가장 힘든곳에 초반에 통과한다

이곳 상주구간은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수월하다는 중화대지구라 힘 안들이고 산행을 한다 

 

등로 우측의 나뭇가지 사이로 판곡저수지 살짝 보인다

상주시 화동면에 있는 판곡리(板谷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동남쪽으로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판곡, 말구리, 서원, 적덕마, 전대, 중마마을 등이 있다.

판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너러실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말구리마을은 지형이 몹시 가팔라서 말이

굴러떨어졌다는 고개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마을은 서산서원이 있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적덕마마을은 청도 김씨가 살면서 덕을 많이 쌓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대마을은 밭이 넓게 분포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중마마을은 판곡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 판곡리에는 김준신의사 제단비(경북기념물 제113호)가 있는 곳으로

김준신의사는 청도사람으로 이곳 판곡에서 태어났는데, 판곡은 고려시대 이후로 청도김씨 세거지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준신은 솔령장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기위해 칠곡 석전까지 전진하였다가

다시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을 무찌르다가 순국하였으며 유적비는 신의터재에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낙화담(落花潭)- 사진 펌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판곡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가 있다. 김준신 의병장은 앞서 들렀던 북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 정예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분이다. 당시 김준신 의병장은 중과부적으로서 처음부터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타격을 입게 되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의병장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무기도 없는 민간인이 왜군 정규군을 당하겠는가.

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연못 이름이 낙화담(落花潭) 이다.

 

임진왜란 당시 1,600여 평에 이르렀다는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못 가운데 조성한 작은 섬엔 수백 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옛 이야기 들려줄 듯 서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낙화담 노송 옆에는 노산 이 은상 시인이 쓴 낙화담 詩碑가 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절사곡(節士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雪岳)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 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지장봉(地藏峰?:10:45)

이곳 상주에는'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우복 정경세, 김준신 의병장 이렇듯

환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 분이 모두 한 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상주 에서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벽돌깔때기 버섯

봄에서 여름사이 주로 불이난 곳에서 자주 보이는 버섯으로 2~5cm의 편평한

모양에서 차차 가운데가 들어간 깔때기 모양으로 되며 얇고 백색을 띠며

냄새가 강하며 표면은 황색이고 다소 미세털이 있으며 식용불가 버섯이다

숭덕지맥 분기봉(437m:10:47)

숭덕지맥(崇德枝脈)개념도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북으로 7.6km, 화령재 남쪽 3.6km 지점에 △437.7로 표기된 삼각점봉이 있다.

지형도 표기명칭은 아니지만 윤지미산에서 남쪽 0.6km 거리이고 삼각점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이안천의 남쪽 울타리가 되어 이안천을 영강에 보탠 다음,  영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까지 이어지는 1백리(44.3km) 산줄기다

숭덕지맥 분기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편안 등로를 내려서는데 비가와도 너무 많이 온다

예전에 만난 묘지 3기를 연이어 지나니...

이정표를 만나면서 다시 고도차가 거의 없는 무명봉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1:15)

계속해서 빗줄기는 굵어지고 우의를 입지 않은터라 내 몰골이 비맞은 새앙쥐 같다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재령강공과 유인 풍양조씨 묘지도 비에 흠뻑 젖어있다

서원마 갈림길(11:20)

우측 화동면의 판곡리 서원마와 좌측으로 산데기못 내려가는 길이 어렷풋이 보인다

다시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진다

넓은 공터(11:35)

간간히 영지버섯들이 보인다...이쁜넘들

무명봉(11:38)

무명봉을 내려서니 등로 우측으로 무명묘지들이 보인다

소나무들도 비에 젖어 있고...

또다시 무명봉에 올라선 다음 좌측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11:40)

우측 300m지점으로 가면 닥터블루베리 연구소가 있는 곳이란다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올라서니...

우측으로는 산림청과 상주시에서 조성한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무명봉(11:55)

앞에가던 산꾼들이 이곳에서 점심상을 펼치고 있는데 난 아직까지 배가 고픈줄 몰라 계속 산행을 한다

무지개산 갈림길(12:03)

무지개산(441.4m:12:10)

경북 상주시 내서면 어산리와 화동면 선교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등 삼각점이 있다... 그런데 높이는 지도마다 달라 혼란스럽다.

상주시청 자료에 의하면 산 근처에 무지개폭포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무지개골은 개울을 뜻하는 묻이개골에서 변음화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지개산 정상 삼각점(△ 상주 24 / 1981재설)

오늘 같이 걸어온 산꾼들은 무지개산이 등로에서 0.2km나 떨어져 있어 그런지 아무도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베낭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무지개산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무지개산 갈림길(12:15)

무지개산 갈림길을 지나니 등로에는 암반으로 된 곳이 나오고...

어산리(於山里) 안부(12:23)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에서 어산리로 이어지는 안부인데 좌.우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옛날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였는지 커다란 돌무기가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가 되어 있다

 

상주시 화동면에 있는 어산리(於山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소규모로 분포하며 동쪽으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어산, 갈미바웃골, 바랑골, 터골, 돌적골, 장자발, 점골마을 등이 있는데, 어산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갈미바웃골마을은 갈모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바랑골마을은 바람이 센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터골마을은 절터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돌적골마을은 어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돌이 많이 쌓여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장자발마을은

장자(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점골마을은 그릇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성황당의 흔적이 보이는 안부

등갈색미로버섯

버섯대가 없고 갓은 반원형이며, 매끄러운 표면에 털이 없고 베이지색에서 담갈색을 띤다

식용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약용으로 쓰는데 달여서 물을 마실수는 있지만 매우 쓰다고 한다

성황당이 있는 안부에서 무명봉으로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등로를 바꾸니 노간주나무 군락지 팻말이 보이나 정작 노간주나무는 몇그루밖에 없다

비는 완전히 그치고 새앙쥐 행세를 하고 걸으나 덥지 않으니 오히려 산행하기에는 훨씬 좋은듯 하다

다시 안부로 내려 섰다가...

개나리 광대버섯

어릴때 달걀모양이며 성장하면서 등황색 또는 녹황색을 띠며 맹독성 버섯으로 버섯이다

미끄러운 오르막 계단을 오르는데...

아그들의 흔적...반갑구먼

덕다리 버섯

침엽수나 활엽수의 생목 또는 고목 그루터기에 붙어서 자라며 버섯갓은 부채꼴 또는 반원형으로

여러개가 중첩되면서 30cm 내외의 덩어리를 이루며 날개의 갓은 너비가 너비가 5~20cm, 두께가

1~2cm, 표면은 오렌지색이고 아랫쪽은 노란색이다...어릴때는 식용으로 가능하나 생식을 하면

독성이 강해 중독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하고 닭고기 맛이 난다하여 닭고기 버섯이라고도 한다

장자봉 갈림길(12:37)

장자봉은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에 있는 장자발 마을 뒷산에 있는 산으로 지명은 마을에서 따온듯 하다

장자발마을은 장자(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장자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등로를 꺽어서 내려오니...

등로 우측으론 묘지 2기가 보인다

산꾼들의 시그널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잠시 전주가 서있는 임도가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노루골(12:43)

이곳 노루골은 화동면 어산리(於山里)에서 선교리(仙橋里)를 넘는 고개로 노루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북진을 알리기 위해 봉화대에 불을 지피는 장작을 쌓아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장자발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길게 늘어난다는 뜻을 가진 ‘느르’ 가 변음화 되어

노루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등로 우측에 있는 감나무밭은 쥔장이 관리를 안하는지 감나무는 잘 보이질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농장 끄트머리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숲속으로 들어서니...

2번째 노간주나무 군락지를 만나고...

갈림길(12:50)

직진의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의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동래정씨&풍양조씨 묘(12:52)

오늘 산행은 그야말로 양넘 지갑줏듯이 편하게 걷는다

이정표(12:55)

등로 우측으로는 커다란 사과밭이 보인다

갈 길이 바빠서 그 안쪽으로는 들어오라 사정해도 갈 일이 없소이다

서어나무 군락지(12:56)

안부에서 고도차가 거의 없는 등로를 올라 섰다가 내려서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가 보인다

영안동마을 갈림길(13:05)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에 있는 영안동 마을은 한산 이씨 영모재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봉이 있는 304m봉이 나온다

304m봉(13:10)

최근에 조성한 듯한 묘지 2기가 보이고...

계속해서 편안하게 대간길을 걷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시멘트 말뚝도 간간히 보이고...

이정표(13:15)

졸각버섯(식용가능)

여름에서 가을철 사이에 잡목림 내 지상 또는 도로변에 군생하거나 산생하는 왜생균근성균으로 맛과 향기가 부드럽다

이 팻말이 보이는걸로 봐서 신의터재가 다 왔다는 느낌이 든다...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개망초가 무성한 묘지지대를 내려서니...

신의터재가 보이면서 2차선 도로로 내려선다

신의터재(280m:13:23)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이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곳에 커다란

표시석 전면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령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가 세워져 있고,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신의터재의 모습

신의터재 정상에는 다른 곳에는 하나도 없는곳이 많은데 표시석이 3개나 있으며, 팔각정과 팔음산 포도 안내판

금강과 낙동강의 수분 경계 표지판, 의병 김준신 유적비에다, 산꾼에게 가장 유용한 음용수대가 있다 

 

그것도 모잘라 상주와 화동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판까지... 좀 과격한 표현을 빌리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도착하니 조금 허기가 지기 시작하여 팔각정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가져온 떡과 음료수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다음에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지명 혼용에 대한 안내문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

신의터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 김준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해서 이름 끝자를 따서

신의터재인 듯하며, 이번 구간 중간쯤의 화령재에는 화령장전적비가 있다.

 

이곳 신의터재는 조선의사 김준신이 상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 왜적이 김준신에게

당한 보복을 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판곡리 생가를 쳐 들어가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때당시 능욕을 피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마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켰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節谷이라고 하였고 연못이름을 落花潭이라 하였으며 이곳 고개이름을 신의터재 라고 하였다고 한다

 

節谷 마를 앞 연못 중앙에 소나무 한그루가 있으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선생이 쓴 낙

화담의적찬양시비에는 그때당시 상황을 시로써 이렇게 찬양했다고 한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절사곡(節士谷)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있으리 雪岳(白鶴山) 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는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신의터재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을 처음 꺾은 곳이고 화령장에서는 6ㆍ25 때 이곳 전투로

낙동강전선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가 있다

산림청에서 설치한 표지판

인증샷

다시 길을 나선다(13:38)

NO140 송전탑(13:43)

오늘 산행길에 처음으로 하늘이 열리면서 지나온 무지개산이 시원스레 보인다

완만한 고도차를 극복하면서 부지런히 지기재로 향한다

이정표(11:45)

대머리 묘지(?)를 지나니...

근처에 송전탑을 세우고 원상복구 개념으로 나무를 심었는데 다 죽어 버렸다

언젠가 한번 신세를 지리다

갈림길(13:53)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 가다가 내려서니...

솔나물꽃(꽃말: 찾을수가 없군요)

잎이 솔잎처럼 가늘게 생겨서 솔나물이라고 하며 솔나물은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주로 꽃을 보고 구분하며, 때로는 잎에 난 털을 보고 구별하기도 한다.

전국의 산과 들에서 자라는 숙근성 여러해살이풀로, 햇볕을 많이 받고 토양의 비옥도가

높은 곳에서 잘 자라며, 키는 70~100㎝ 정도이고, 햇볕을 좋아해서 묘지 주변이나 들판에

다른 잡초들과 섞여서 자라는 경우가 흔하다.

옆으로 자라는 뿌리줄기에서 마디마다 잔뿌리가 나오고, 줄기는 곧게 서며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려진다.

잎은 길이가 2~3㎝, 폭은 약 0.2㎝로 길고 뾰족하다. 잎은 줄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보통 10개 정도 달린다.

6~8월에 지름 약 0.2㎝의 정도의 작고 많은 수의 노란색 꽃들이 뭉쳐서 핀다.

쑥밭골재(14:05)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쑥밭골재는 쑥밭골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이곳이

쑥밭이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바깥쑥밭골마을은 쑥밭골 바깥쪽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넓은 농로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이 지역 특산품인 팔음산 포도가 탐스럽게 열려 있다

탐스럽게 열린 포도

우측의 포도밭을 끼고 1분정도 걷다가 농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농로 끄트머리에 있는 이정표

습랩지역을 지난다

다음 구간에 들려야 할 백학산도 보이고...고도를 조금 올려 능선에 오르니...

이정표가 나오고 우측으로 무명봉이 있는데 아무런 특징이 없고 대간길은 좌측 내리막이다

무명봉(14:23)

안전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갈림길(14:28)

함몰지역도 보이고...

계속되는 내리막길

김해김공 묘지(14:32)

질펀한 황토길을 내려서니 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이정표를 바라보며 도로로 내려선다

금은골 입구(14:37)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 있는 금은골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이정표에는 대간길을 마을 도로를 따라 가라고 표기를 해놨다

그렇다고 명색이 정통 산꾼이 도로를 따라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마을 도로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풍양조공과 부인 파평윤씨의 묘지를 지나니 대간꾼들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고

농장의 철조망과 잡목의 저항이 어찌나 심한지 마치 지맥길을 들어선 기분이다

목장 철망을 넘어 컨테이너가 있는 농장 가건물 있는 곳으로 향한다

다시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대간길 이정표가 나오고... 조금을 더 진행하다가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급한 내림길 좌측에는 잡목이 무성한 묘지가 보인다

成均 成公之墓 孺人長水黃氏附 묘비(14:45)

진사(進士)란 생원과 함께 조선시대에 성균관 대과(大科)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으로서 유교 

경전을 보는 명경과와 시부책과 한문학 시험을 보는 제술과에 합격하면 진사의 호칭을

받았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관직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정기시험인 식년 이외에  알성시,

별시 등을 치뤄 많은 수많은 예비 관료들을 배출하였고, 대부분의 생원, 진사, 선달들은 과거시험을

보아서 양반시험을 유지하는데 불과한 신분이라고 하며 진사라는 이름 자체가 벼슬은 아니였다고 한다

대밭이 나오고 낡은 농기구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백두대간 이정표를 따라서 걷는

대밭을 끼고 걸어간다

과수원이 나오고... 과수원이 있어 대간이 많이 변형되어 있다

과수원 가운데로 질러가야 원 대간길인데 과수원 쥔장의 눈치가 보여 우측으로 내려선다

금은골 입구에서 헤어진 마을 도로를 다시 만난다

마을도로(14:48)

마을 도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지기재가 나온다

지기재(260m:14:50)

경북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서 대포리를 잇는 고개로 90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지기재의 유래는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적기(賊起)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이름을 따 지기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한다

백두대간 중화 지구대인 이곳 상주지역은 고개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표지판이 있다.

동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흘러든다.

지기재 버스 정류장

담 구간에 나홀로 와야 하기에 버스 노선표를 확인하고  산행을 종료하며 스틱을 접는다

지기재에서 간단하게 장비를 정리하고 좌측 대포리 방향으로 500m정도 걸어가니

산악회 버스가 우릴 기다린다... 이곳 계곡에서 알탕을 하고 산악회에서 제공한

삼계탕에 막걸리 서너잔을 마시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