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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38구간- 미시령에서 진부령까지

by 범여(梵如) 2017. 10. 30.

바라 보이는 저 향로봉이 백두대간의 끝이 아닐진데...

 

☞산행일자:  2017년 10월 28일~29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은날씨...박무에 약간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15.6km / 10시간 07분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34명과 함께

☞산행코스: 미시령-825.8봉-무명봉-샘터-조망바위-암봉-헬기장-상봉-화암재-헬기장-신선봉

                 화암재갈림길-암봉-869.5봉-대간령-암릉전망대-880봉-마장터 갈림길-안부-갈림길

                 병풍바위봉-갈림길-마루금 샘터-마산봉 갈림길(왕복)-마산봉-쉼터(1)-쉼터(2)

                 쉼터(3)-감시초소-알프스콘도-홀2리입구-눈물고개-군부대정문-홀리마을-갈림길

                 농로-임도-이정표-백두대간 종주기념공원-진부령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토성면 / 인제군 북면


대간 2회, 9정맥, 9기맥을 끝내고 오지라 다름없는 지맥길에 미쳐서 대부분 독립군으로 다니다가

가끔은 사랑하는 진권아우와 다니다가 여름철 접어들면서 가시나무와 잡목, 거미줄에 진절머리가

나면서 지맥길을 잠깐 접고 후배들이 다니는 백두대간길에 기웃거리다가 바짝 피치를 올려 오늘

그 마지막길인 미시령에서 진부령 구간에 후배들을 따라 나서면서 오늘 그 대미를 장식하는 날이다

(물론 땜방으로 서너구간 남아 있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나서는 산악회는 7년전 호남정맥하면서 알게된 산악회인데 이곳에서 대간 남진을 했고

또 어영부영 따라 다니다보니 북진길에도 13번이나 따라 나서게 된 셈이다

탑승지인 사당역에 도착하니 졸업산행이라 그런지 다들 들뜬 분위기이다

서로의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탑승하니 대장은 감개무량한지 그간의 심정을 한참이나 이야기하고

각자 자기의 소감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버스는 서울 ~ 양양간 고속도로에 선 다음에 난 깊은 잠에

빠지고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동홍천I.C를 빠져나와 불이 꺼진 3.8휴게소에 도착한다

다시 한계령 갈림길을 지나 미시령 구도로 오르기 직전에 차를 세워 산행준비를 하고 미시령으로 오른다


알다시피 마등령에서 황철봉, 미시령, 상봉, 신선봉, 대간령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비탐구간으로

서슬퍼런 국공파의 등쌀에 못이겨 늘 야심한 새벽에 도둑고양이처럼 가슴 졸이며 걸어야 하는구간인데

오늘도 야심한 새벽인 새벽 2시경에 미시령을 살짝 지나 개구멍으로 통과를 시작한다


백두대간 개념도

백두대간이라는 말의 사용은 10세기 초,『옥룡기』에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이후 「고려사」,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산수고」와

「산경표」같은 문헌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과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백두대간은 10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인식개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를 지나며 산맥론에 묻혀 잊혀졌다.


이후 1980년대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가 헌책방에서「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백두대간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시민들에게도 친근한 개념이 되었다. 최근에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제정하여 백두대간의

실체를 법으로도 인정하였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엔 한반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14개의 산맥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으며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개념을 정립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백두대간은 또 어디서 나왔고, 산맥과의 차이는 뭐란 말인가?

 

우선 산맥에 대해서 여태 나온 설명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자

산맥은 고토분지로가 한반도의 자원을 침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반도의 땅밑 지질을 중심으로 엮은

체계를 말한다는 게 일반적이며 땅밑 같은 지질이 연속된 지형을 파악하고, 거기에 산맥 이름을 붙였다

 고토분지로의 일본의 지리학 사전엔 [산맥이란 산정(山頂)이 거의 연속해서 길게 선상으로 연결된 것]

이라고 적혀 있는데 고토분지로는 일본의 지리학 사전에도 나와있는 산맥의 개념을 정면으로 뒤짚으면서

한반도에서 새로운 산맥 개념을 정립했는데 1903년엔 펴낸 그의 [조선산악론]을 통해서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266일 동안 망아지 4마리와 인부 6명을 데리고 하루 20킬로미터씩 답사했다고

적고 있다. 1901~1902년까지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노골화 되지는 않았지만 자원 수탈을

위해서 정보를 수집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고토분지로의 답사는 그 일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그의 한반도 산맥 체계를 현대적 시각에 분석해보면 그가 실제 다녔다고 한 지역은 땅밑 지질학적

특성이 비슷하지만 그외 대부분의 지역은 지질구조와 상당히 다른다는 게 지형이나 위성분석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그러나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엉터리에 가까운 산맥체계가 아직까지 우리 교과서에

버젓이 올라 있고,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일제시대부터 학습해온 고토의 제자들이 아직까지 우리 학계를 잡고 있어 그 이론을 바꾸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고 이론 수정이 되는 날, 그들의 학문 밑바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현재 교과서의 산맥체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형태로 올라있다.

원래 고토분지로는 땅밑 지질 개념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으나, 이후 지리학자들이 한반도의 지형을

이해시킨다는 명목으로 산지의 분포나 산줄기의 연속성에 맞추어 계속 변형시켜 왔다. 땅밑 지질

기준에 땅위 산지를 엎어 놓은 셈인 것이다

 

대표적인 오류가 어디에도 없는 북한의 강남산맥과 남한의 차령산맥이다.

강남산맥은 압록강과 거의 평행하게 동서방향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지질조사를 해본 결과,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차령산맥은 남한강 등 여러

강과 하천으로 중간에 완전히 단절돼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산맥체계의 허점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으나 글이 너무 길어 질 것 같아 이 정도로 접고

백두대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두류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 백두대간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도선국사(道詵國師)]로 알려져 있다.

도선국사는 [한반도 산세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그친다며, 그 산세는 뿌리에 물을 품은

나무줄기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며 우리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는 조선 중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어 조선 후기 지리서인 [산경표]에서 한반도 산줄기와 갈래, 그리고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백두대간,장백정간과 13개 정맥으로 산줄기에 위계를 부여하여 체계화 했다.

 

이 [산경표]가 실제 산줄기와 물줄기의 흐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산과 강에 대한 독특한 인식체계로서 [강이 흐르듯 산이 흐르며, 산은 강을 가르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기준에 따라 분류했던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따라서 산맥은 땅밑 지질에 따라 정리한 개념이고, 백두대간은 산줄기, 산지에 따라 이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과서에 실려있는 산맥 지도는 완전히 변형된 체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산맥 개념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80년대 초 지금은 고인이 된 고지도 연구가 [이우영]씨에

의해서다. 이후 30년 가까이 산맥과 대간(일종의 산줄기)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아직도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의 고집인지, 소신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국민들은 정확한 지식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다양한 이론을 배우는 것과 정리되지 않은 이론을 배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제는 산맥 논쟁을 끝내고 통합이론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아래의 지도는 현 교과서용 산맥지도(왼쪽)와 지난 2005년도에 국토 연구원에서

연구용으로 발표한 백두대간형 산맥(오른쪽) 지도 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미시령(彌矢嶺:767m:02:10)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미시령()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 · 연수령() · 연수파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며

미시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에는 미시파령이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는데 바다 고을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본조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이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 『택리지』에는 연수령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데『여지도서』 간성군 관액조에는

미시령이 군 남쪽 팔십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간성군 석파령() 남쪽에 미시령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위치한 고개 지명으로 미시령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이름으로

연슈파 또는 큰영이라 기록되어 있다.

 

미시령은 진부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과 함께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고개로 미시령에 서 있는

정상석은 1960년에 이 고개로  46번 도로가 개통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호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랫쪽에 2007년 5월에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황철봉,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상봉, 신선봉, 마산봉 진부령으로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하다 (02:13)

야심한 새벽에 미시령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 좌측에 차를 세우고 신속히 개구멍(지하도로)을 통해서

상봉으로 향하는 우회 등로로 올라가는데 미시령 초소에는 국공파들이 없는지 오늘은 인기척도 없다

4년전 남진길에는 등로에 올라설 때 호루라기를 불면서 가지 말라고 난리부르스를 쳤는데...

태양 대장이 개척한 루트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예전엔 미시령 오르기 전 300m 지점에서 철조망을 넘어 월담을 하면서 개고생을 했는데

오늘은 지하통로를지나니 급경사의 너덜길이긴 해도 많은 산꾼들이 다녔는지 등로는 뚜렸하고

거기다가 간이 큰 어느 산꾼은자기의 흔적(시그널)까지 대담하게 표시해놨다...

대간 산꾼들 중 이곳을 다닐 사람은 다 다니는데 왜 못다니게하는지...아예 허가제나 개방제로 하던지 ...

아님 들어올 생각조차 못하게 철저하게 단속을 하던지...국공단의 전향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할 듯 하다

상봉을 오르는 길은 급경사의 너덜길이긴 해도 등로가 뚜렸하다... 좌측으로 감시초소가 있긴해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등로에 올라서다(02:21)

황철봉에서 미시령을 지나 상봉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등로에 올라서니 자갈길같은 넓은 등로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속초시 야경이 뚜렸하게 보이는데 다들 이제사 한숨을 내쉬면서 상봉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1년내내 심한 강풍을 부는 곳인데 범여의 졸업 산행을 축하해 주려는지 오늘은 바람한 점 없으니...

선 채로 약간의 휴식을 취한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알 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상봉을 향한 걸음을 재촉한다

825.8봉(02:35)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우회를 하는데 이곳에는 나무들과 풀들이 한결같이 한쪽으로 쓰러져 있다

그만큼 바람이 드세다는 뜻이다... 1년내내 바람이 불지 않은 날이 없다시피 한 곳인데 오늘은

바람 한 점이 없으니 그야말로 선택받은 날이다... 태양 대장이 선근공덕을 많이 지은 모양이다

이곳의 바람이 얼마나 세었는지 바람에 돌이날려 그 돌에 학이 맞아 죽었다고 하는 곳인데 그래서

이 능선 우측 아래에 있는 속초의 마을의 지명이 학사평(鶴死坪)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군부대의 표지판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강풍이 불지 않은 탓인지 땀이 나기 시작한다.

베낭을 내리고 자켓을 벗어 베낭에 넣고 다시 길을 걷는데 아직도 3시간을 더 넘게 어둠속을 걸어야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부산에 계시는 서선생님께서 진부령까지 합법적으로 걸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아줬는데...서 선생님!...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아그들 졸업식이라 그 넘의 의리 때문에 고추부대원 노릇이 싫어서 어둠속에 걷고 있습니다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부산에 갈 일 있으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소주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무명봉(02:48)

샘터(03:00)

바위 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리는 石間水는 생각보다 맑고 깨끗하다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고 싶지만 베낭속에 컵을 꺼내기 싫어 그냥 지나친다

샘터옆에 서 있는 마등령 무인감시 계도시스템 폴대

이곳에 산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무인폴대를 세웠는데... 쓸데없는 돈 쓰지마소가야할 산꾼들은 다 갑니다

간간히 보이는 대간산꾼들이 걸어논 시그널이 대간길임을 알려준다

본격적인 암릉길이 시작된다

조망바위(03:13)

낮에 이곳에 서면 속초시내와 울산바위, 황철봉을 비롯한 멋진 설악의 진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

보이는 것이라곤 속초시내의 새벽 불빛만 보일 뿐...모든게 적막강산이라 아쉽기만 하다

마치 맞은편의 황철봉에 오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황철봉을 방불케하는 집채만한 암릉구간이라 등로 찾기가 난해하다

다행히 군인들이 훈련하면서 쳐논 삐삐선(통신선)이 길잡이를 해주는 바람에 안전하게 걷는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머리엔 께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이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어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암봉(03:27)

어둠속의 암릉구간 등로가 상당히 난해하다

황철봉엔 야광봉이 길찾기가 수월했는데 이곳은 그런게 없으니 힘이든다

앞서가던 대장이 근심스러운지 렌턴으로 수신호를 보내면서 후미조를 기다린다

헬기장(03:31)

헬기장을 지나면서도 유해발굴 지역 표지판을 만난다.

70여년전 6.25 당시 상봉전투에서 전사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시작되는 곳을 지난다

이곳은 1951년에 북한군 6사단과 12사단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산화한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이다

 

이 분들의 장렬한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이렇게 부유하고 여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작금에는 6.25의 실체를 부정하고 북침이라고 우기는 자들까지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아직도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분단국가이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저 분들에게 면목이 없구나

저 북쪽에는 젊은 지도자 친구가 핵무기를 장남감 갖고 놀듯이 위험한 짓거리를 하고 있고, 민초들을

향해무자비한 폭정을 이루고 있건만  최근에 집권한 진보정권은 말한마디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려스럽다

분들의 고귀한 희생...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6ㆍ25전쟁 전사자 중 13만여명은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설악산 상봉 1243고지에서 저 분들의 희생...요즘 우리는 너무 가볍고 보고 있는 건 아닌지...

6·25전쟁 당시 국군 수도사단과 6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과 맞붙었던 격전지가 펼쳐진 곳인데

1951년 5월 설악산 상봉을 차지하기 위한 열흘 간의 전투 흔적이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곳곳에

남아있어 그 당시 치열했던  현장을 보는 듯 하다

어둠속에 무거운 가슴을 안고 어둠속에 상봉으로 향하는 여정은 계속된다

상봉(上峰:1,243m:05:1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 전체가 암릉으로 되어있고

정상에는 커다란 돌탑 하나가 서 있으며 오늘 구간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기도 하지만 금강산 일만이천봉중에

남한에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관리는 설악산국립관리공단에서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설악산권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금강산 자락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미시령을 경계로 북쪽은 금강산, 남쪽은 설악산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이곳 상봉과 신선봉 사이의 좌측 능선아래에 있는 화암사 일주문 편액에는 金剛山 禾巖寺

표기되어 있고 진부령 아래에 있는 유서깊은 사찰 건봉사 일주문에도 “金剛山乾鳳寺로 적혀있다

상봉에서 바라본 속초시의 새벽 야경

상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급경사의 암릉구간...상당히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어둠속에 로프를 부여잡고 내려서는데 한 사람씩 내려가다가 보니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두번째 암릉구간... 거의 직벽수준이다... 상당히 조심해야 할듯... 아예 스틱을 아래로 던져놓고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다

3번째 암릉구간을 지나니... 어둠속에 화암재를 만난다

화암재(禾庵峙:04:30)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서 고성군 토성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아래 화암사에서 고개 이름을 따와서 화암재라고 부른다.

화암재에 내려서니 비박꾼들의 텐트 2동이 보인다... 야심한 새벽에 이곳을

지나는 대간 산꾼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인데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화암사(禾巖寺) 일주문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로 손꼽히는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화암사(禾巖寺)는

전통사찰 제27호로 신라 혜공왕 5년(769)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비구니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진표율사는 법상종의 개조(開祖)로서 법상종은 참회불교의 자리매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으로부터 359년 전인 인조 11년(1633)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동쪽에 발연사를 창건하였고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화엄사(華嚴寺)라 불렀는데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면서많은 중생을 제도하였다.

그러면서 기도중에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하고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조선조 정조 18년(1794)에는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이 되었으며, 미타암의 화응전이 정조의 원당이 되면서

관음보살상과 정조친필병풍 8폭이 하사되기도 한 곳이다.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의 본당으로 1919년 7월에 완공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모셨으며, 정면3칸과 측면 3칸의 다포식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정면 창호의

어간과 협간에 모두 꽃창살을 달았으며정면 2칸은 잔잔하지만 바깥쪽 2칸은 시원스런 꽃문양으로 장식되었다

화암사에 대한 전설

간성군 남쪽 70리되는 곳에 있는 산으로서 석굴이 많고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나온다 하여

천후산이라 부르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양과 간성 사이에 큰 바람이 많은 것도 이 까닭이라 한다.

뛰어난 성인대가 있는데 돌모양이 불상과 흡사해서 성인대라 하였다.

그옆에 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곡식을 쌓아둔 둥근 곳집같이 보인다하여 세속에서 화암(禾岩)이라 부른다.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적과 싸울때 짚으로 만든거적으로 이 바위를 둘러싸서 마치

벼가리같이 보이게 하여 적을 물리쳤다하여 화암(禾岩)이라 했으며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낫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나 화자를 쓰지 않도록 하고 화재대신 수자로 쓰자는 것이다.

 

풍수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수극화(水克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하여 물 수(水)자를 써야겠는데

수(水)자를 쓰자하니 절이름에 대한 역사적의의가 없어진다해서 수(水)대신 수(穗)자를 쓰면

음(音)은 수(水)와 같고 뜻은 화(禾)와 같으니 수암(穗岩)이라 했으나 또 화재가 생겨

1912년에 화암(禾岩)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이 바위를 ‘수바위(穗岩)’로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수(穗)자는 좀 어려운 한자여서 아는 사람이 적고 바위경치가

아름답다해서 수바위(秀岩)라고 세속에서 쓰기도 한다.

 

수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벼(禾)에 얽히 이야기가 많다.

화암사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계란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어 초행길에도 찾기 쉬운 목표물이기도 하다.

바위위에 왕관모양의 바위가 또 하나 있는가하면 직경 1m 주위 5m가량되는 웅덩이가 항상 물이 고여 있고

가뭄이 심할때 이 물을 주위에 뿌리며 기우제지내면 비가 왔고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도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앞 사람의 헤드렌턴 불빛만 바라보면서 걷는데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잡목으로 인해 등로에서 약간 벗어놨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니 어둠속 암봉을 만난다.

암봉(04:55)

헬기장(05:00)

헬기장에 홀로 잠든 저 비박족...범여는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헬기장 우측으로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속초시내의 야경이 여유로워 보인다

다시 황철봉 구간을 연상케 할만큼 집채만한 암릉 구간을 올라서니 신선봉에 도착한다

신선봉(神仙峰:1,204m:05:03)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우리나라에는 신선봉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40여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북설악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선봉이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다고 한다.

정상부근은 완전히 너덜지대로 구성되어 있고  그 너덜의 바위로 이루어진돌들이 신선봉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시작이 되는 봉우리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중 남한에 있는 여섯 봉우리(향로봉, 칠절봉, 둥글봉, 낙타봉, 신선봉, 상봉)중 하나이다

산 중의 산, 절경 중의 절경이며 일만이천 봉이 위용을 자랑한다는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에 발원한

신선봉에서 시작되니 이 신선봉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첫 번째 봉우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미시령을 넘다 보면 양측으로 장관처럼 펼쳐지는 산이 있으니 우측의 산이 설악산이며 좌측의 산들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자락이다. 그러기에 금강산은 결코 휴전선 이북에만 있는 금기의 땅이었던

그 명산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보았고 디뎠던 그 산에서 시작된다 

신선봉은 뒤늦게나마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지난 2003년 8월26일 설악산 국립공원에 편입됐다.

동료산꾼들은 어둠속 신선봉에서 졸업산행의 여유로움을 맘껏 즐기는 분위기다

오늘따라서 왜이리 다들 여유로운지... 미시령에서 이곳을 오는데 암릉구간이긴 하지만

시간당 산행 거리가 1km 가 조금 넘는듯 하다

신선봉을 내려와 암릉구간에서 전체가 다 모인 가운데 선 채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난 선달아우님이 건네주는 캔맥주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는데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이곳에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바람이 없어 참으로 편하게 산행을 하는듯 하다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어둠속에 예전의 남진길에 있었던 군막사는 사라지고 공터만 보이며 좌측으로

화암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 곳을 지나니 어둠속에 우측에는 커다란 암봉이 나오는곳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어둠속에 만난 현오님의 시그널...
반갑기만 하다

다시 어둠속에 잡목을 헤치면서 걷다보니 헬기장이 있는 869.5봉에 도착한다

869.5봉(06:24)

동이 트려는지 갑자기 날씨가 상당히 추워지면서 주위의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869.5봉 삼각점(설악415 / 2007 재설)

869.5봉(H)에서 바라본 지나온 신선봉과 암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869.5봉(H)에 잠깐 서있는 사이에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벙커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려다 그냥 대간령으로 향한다

어둠이 덜가신 등로를 따라서 대간령으로 향한다

이젠 날은 완전히 밝아지고 가야할 등로가 뚜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군 벙커가 보이고 마산봉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죽변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대간령가는 길에서 바라본 마장터쪽으로 펼쳐지는 구름바다

대간령으로 향하는 길

대간령가는 길에서 만난 군벙커

대간령에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들이 아침밥상을 펼치고 있다

출입금지 철책을 넘어서면서 국공파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대간령(大間嶺:641m;07:30)

샛령 혹은 새이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진부령과 미시령의 사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샛령·새이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이 되었고, 큰 샛령(새이령)과 작은 샛령(새이령)으로

구분하여 대간령·소간령이 되었고, 그 옛날 인간이 네발(자동차)이 아닌 두발로 다닐때

강원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곳 대간령이란다

 

미시령과 진부령이 생기기전에 영동과 영서는 잇는 중요한 고개로 속초와 고성에서 해산물을 싣고 원통과

인제로 넘나들었다 하는데 대간을 순 우리말로는 사이이다. 그래서 "새이령"이라고도 한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간령은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옛길로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였다.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파령(石坡嶺)이라고도 했고,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어서 원기령(院基嶺)

이라고도 했다는 대간령,지금은 대간꾼 외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

석파령(石坡嶺)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온 이름으로 보인다

 

소간령(小間嶺 작은샛령)은 진부령 아래서 샛령을 향해 골짜기를 거스르다

만나는 고개인데 오름길이 된비알이라 이곳 사람들은 "된박재"라 부른다.지내면 비가 왔고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도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대간령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방향이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예전에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인제군 북면 마장터가 나온다

 

마장터는 고성과 양양(지금의 속초)사람들이 소금과 고등어, 이면수, 미역 등

내륙지역인 인제사람들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지게에 지고 올랐고 인제사람들은

감자와 콩, 팥 등 곡물을 지게에 지고 올라 농산물과 수산물을 교환하던 무역로였다.

마장터란 이름도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장터가 왕성했던 시절에는 농산물이 수산물보다 귀해 인제사람들의 수입이 짭짤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런했던 일부 고성과 속초사람들은 수산물값을 한푼이라도 더 받기위해 멀리있는

원통장까지 왕래하다보니 마장터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마장터는 산속에도 불구하고 30가구 이상

살았던 마을로 변창했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샛령정상 성황당에서

성황제를 올렸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화전정리가 시작되고 진부령과 미시령이

생기면서 마장터는 옛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전설의 고향이 됐다.

예전에 주막터가 있었던 곳에서 아침밥상을 펼친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만 보이는데

이곳 돌무더기 있는 곳이 예전에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한 주막이란다.

아침만찬(06:45 ~ 07:20)

날이 밝으면서 갑자기 추워진 날씨탓인지 손이 시리고 보온통에 밥을 싸오긴 했지만 밥생각이 없다

옆에서 보스 아우가 라면을 끓이고 있어 뜨끈한 라면 국물 한그릇 얻어 밥을 말아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백두대간 북진길의 마지막 봉우리인 마산봉으로 향한다

멋진 노송 한그루는 4년전과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능선 중간쯤 올라서니 신선봉 너머로 해는 이미 중천으로 올라와 버렸다

암릉 구간으로 올라서니 먼저가던 동료산꾼들은 갈 생각도 않고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다

멋진 雲海가 소간령에서 대간령을 넘어 도원리 마실을 가는데 그 모습이 가히 환상적이다

마장터에서 소간령으로 이어지는 雲海... 저 구름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다

태양대장과 시화총무님... 범여의 3대간.9정맥, 51지맥을 축하해준다...감사해용

다시 880봉을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고...

가야할 병풍바위봉과 마산봉도 조망이 된다

이 추운 날씨에 니가 제정신이니?

가야할 880봉의 모습

암봉은 정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를 해야한다

뒤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들은 뭣이 그리도 즐거운 지...

바람이 참으로 드센 모양이다...나무들이 한결같이 한쪽으로 누워있다

880봉(08:10)

마장터 갈림길(08:12)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가 서있고 좌측으로 등산객들의 띠지가 많이 보이는데 지도상으로 마장터로

이어지는 등로같은데, 대간꾼들이 다니는 길은 아닌듯 하며 아마도 마장터에서마산봉으로 오르는 등로인 듯 하다

마장터 갈림길 이정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편안길을 따라서 가니 안부에 도착한다 

안부(08:20)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라서 병풍바위봉을 향한 오르길이 시작한다

병풍바위봉 갈림길(08:48)

병풍바위봉으로 오르는 등로

병풍바위봉 직전에서 만난 이정표

병풍바위봉(1,075.5m:08:58)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간성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토성면쪽에서 보면 부드러운 육산으로 보이지만 간성읍쪽에서 보면 바위로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보여서 병풍바위봉으로 불리는듯 하는데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병풍바위는 백두대간상 마산봉과 대간령(새이령)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된 봉우리로 생긴 모습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조망이 아주 뛰어난 곳으로 북쪽으로는

마산봉과 향로봉, 칠절봉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어둠속에 지나온 신선봉과 상봉이 보이고 서남쪽은

매봉산이 멋진 모습으로 우리곁으로 다가온다

 

봄이면 주위에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여름이면 산의 푸르름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과 운해가 산에 끼면 마치 산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어 훨훨 타다가 연기를 품어

올리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며, 겨울에는 허리까지 빠지는 많은 눈과 아름다운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가야할 진부령과 홀리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 내 나라 내 땅이지만 비무장지대라는 이유로

밟지 못하는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대간 능선인 칠절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서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인제쪽은 그 어디에도 민가 하나 보이지 않고 산만이 보인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중에 홍천 다음으로 넓은 인제군의 면적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난다.

다시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지나온 상봉과 신선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동쪽으로는 잠시후에 가야할 마산봉이 우릴 기다리고 있고...

후배님들! 백두대간 종주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산은 늘 거기에 있으니 너무 조급하지 말고 안산하시길 바랍니다

범여도 축하 인증샷을 남긴다

갈 수 없는 북녘땅의 대간길을 바라보면서 카메라 앵글에 담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구름바다의 활홀경에 빠져 자꾸만 발걸음이 늦어진다

갈 수 없는 향로봉... 남한땅에 있는 봉우리이긴 하지만 민통선 안쪽이라 갈 수 없는 곳이다

멋진 그림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없는 선달아우님

선달아우를 처음 알게된 건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2~3년전인가 지리산 남부능선을

1박2일간 같이 종주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서글서글한 성격에 늘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동료산꾼들에게 멋진 사진을 봉사하는 대단한 친구다...

난 오늘 대포(DSLR)를가지고 오긴 했지만 너무 무거워 사진 몇커트 찍고는 다시 베낭속에 넣고 말았는데

참으로 대단하셔...

병풍바위 정상에서 20분을 넘게 머물다가 오늘 대간길의 마지막 봉우리인 마산봉으로 향한다(09:18)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병풍바위 오르기 전에 만났던 갈림길을 다시 만난다(09:25)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할 마산봉이 보인다

꼬여버린 나무...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마루금샘(09:32)

등로 우측 50m 지점에 마루금샘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처럼 추운날은 갈 일이 없다

마산봉으로 오르는 길...4년전에 비해 등로 관리는 상당히 잘되어 있다

마산봉 갈림길(09:42)

등로에서 좌측으로 30여m 떨어져 있는 마산봉으로 향한다

 

마산봉(馬山峰:1,052m:09:43)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토성면에 경계를 이룬 봉우리로 산세가 말과 같이 생겨 마산(馬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으로 전해지며 마산봉(馬山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911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대대면 죽포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두 곳의 마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이곳의 마산은 토성면 원암리의 마산이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와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마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는데 금강산 1만2천봉 가운데

하나로 설경이 뛰어나 건봉사(乾鳳寺), 천학정(天鶴亭) 화진포(花津浦) 등과 함께 고성 8경의 하나에 꼽힌다.

 

금강산 1만2천봉의 남한 제2봉인 해발 1,052m의 마산봉은 백두대간 준령의 알프스스키장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절경과 함께 겨울철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위용과 위엄을 함께 느끼게 하는데 마산봉은 봄철 등산코스로도

이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마산봉을 정점으로 서쪽 방향으로 수개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을 중심으로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쪽의 백두대간 최북단에 위치하며 신선봉과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이다.

마산봉 정상에 있는 2등 삼각점(△ 간성24 2004 이설)

4년만에 마산봉에 올라서니 예전의 앙증맞은 정상석은 그대로 있고 새롭게

커다란 정상석을 설치해놨건만 난 예전의 정상석이 훨씬 더 정감이 가는 느낌이다

마산봉 정상에서 동료산꾼들이 다 모여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고 휴식을 취하면서 베낭털이를 한다

마산봉에서 칠절봉과 홀리마을의 모습

칠절봉(七節峰:1,172.2m)은 영동과 영서지방을 경계하는 백두대간 진부령(陳富嶺) 서쪽에 있는

천봉(天峰)으로 신선봉 동굴봉 삼봉 향로봉과 함께 금강산(金剛山) 1만 2천 봉 중 남한에 있는 5개 봉

하나이며, 영서지역인 인제군 서화면 동개마을에서 일곱 굽이를 돌아 있다하여 칠절봉(七節峰)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한편은 그 옛날 진부령을 통해 영동과 영서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산적이 많은 이곳을 향해 7번의

절을 하며 무사통과를 빌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전해지기도 하는데 향로봉과 더불어, 백두산과

지리산에 이르는 1625km의 백두대간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곳, 휴전선에 가까이 접해 있다

마산봉 정상에 서서 향로봉을 바라보면서 갈 수 없는 북녘땅의 대간길에 대한 미련을 가슴속에 담는다

“바라 보이는 저 향로봉이 백두대간의 끝이 아닐진데”

산행을 하면서 너무 무거워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대포(케논5D Mark4) 카메라로 향로봉을 담아보지만

가슴에 진 응어리진 그 무엇이 풀리지 않는다...

내 생애에 저 넘어 북녘땅의 걸어볼 수 있으려나하는 조바심에...가슴이 답답하다

 

향로봉(1,298m)은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 중 하나이며 인제. 고성군 경계지역에 위치한
봉우리로 구름이 덮인 날이면 향로에 향불을 피워놓은 형상으로 보인다하여 향로봉이라 불린다.
맑게 개인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과 고성 절벽강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동해 해금강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산이다.

동료산꾼들은 인증사진과 베낭털이를 하고는 모두 진부령으로 가버리고

나와 하늘마음 아우님과 정상의 바람을 피해 양지바른 곳에서 캔맥주 하나를

나눠 먹으면서 마지막 대간길의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진부령으로 길을 떠난다

진부령 가는 길에서는 산비장이와...

가는 구절초가 작별인사를 하는듯 하다...그래 안녕내가 또 다시 백두대간을 걸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쉼터1(10:15)

마산봉을 떠나서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로 걸어간다

쉼터2(10:23)

나무의자가 쉼터에서 좌측으로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암봉이 나오고 우측으로 우회하면서 걷는데 예전에 없었던 로프 구간이 나온다

쉼터3(10:30)

쉼터에는 구조이정목이 있고 좌측으로도 뚜렸한 등로가 있고 나무의자 2개가 있는데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멋진 암릉이 대간길의 마지막을 축하해 주는듯...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는데 홀리마을과 부도가 난 알프스콘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홀리마을의 모습

흘리(屹里)마을은 산림이 울창하고 산이 높다하여 흘리(屹里)라 불렀고 속칭 밖(外)흘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마을의 면적이 광활하여 지역별로 구분할때 칭하던 이름으로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홀리의 행정구역은 고성군 간성읍에 속해 있으나 읍 소재지에서 워낙 먼 거리에 있고

백두대간 준령 최북단에 있는 오지중에 오지로서 예전엔 감자와 옥수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화전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나 이곳에 알프스 리조트가 생기면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피망과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면서 부농의 꿈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급경사를 내려서니 짓다가 부도가 나버린 알프스 콘도 철조망엔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지금부터 진부령까지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부도난 스키장의 리프트가 보이고...

감시초소(10:40)

전나무 숲사이를 걷다보니...

겨울을 재촉하는 억새밭이 대간길 졸업을 축하하는 듯...

리기다소나무 숲을 지난다

부도가 나버린 알프스 콘도로 내려선다

알프스 콘도(10:48)

공사를 하다가 부도가 나버린 알프스 콘도와 스키장은  흉가처럼 변해있다

이곳을 보고 많이 생긴 스키대여점 등에 투자한 홀리는 모든게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우측으로 우회해서 걸으니...홀2리 삼거리가 나온다

홀2리 삼거리(10:50)

우측으로 홀2리 마을표시석이 보이고 간성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온다

눈물고개에서 진부령가는 세밀도

눈물고개(10:51)

눈물고개 끄트머리에서 도로를 버리고 우측 농로로

접어드는데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호젓한 농로를 따라서 걷는데 축사의 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

농로를 버리고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동행한 하늘마음님이 멋진 모습을 하나 찍어준다...감솨

좌측엔 습지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곳을 지난다

잡풀을 헤치고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황토빛의 넓은 공터에 내려서니 능선 너머로 오르지 못할 칠절봉과 군부대가 보인다

원래 대간길은 군부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야 하나 통제구역이라 오르지 못하게 한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진부령으로 향한다

군부대 정문(11:00)

군부대가 이전을 했는지 폐허처럼 변해있다... 그라믄 대간길은 돌려 주셔야죠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올랐다가...

군부대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능선 좌측으로 내려선다

홀리마을 보이는 곳에서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면서 우측의 마을도로로 향한다

마을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앞에 보이는 저 능선이 원래 대간길이다

조금전 군부대 아래에서 헤어진 원래 대간길을 다시  만난다

임도를 따라 가다가 뒤돌아 보니...

지나온 병풍바위봉과 마산봉이 범여와 아쉬운 작별을 나눈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서 가는데...

폐축사가 보이고...

곧이어 또 다른 폐건물을 지난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임도로 들어선다

갈림길(11:35)

호젓하게 진부령으로 향하는 길

등로 좌측에는 군부대 통신 중계소가 보이고...

능선위에 보이는 송전탑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정표(11:42)

리기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진부령으로 향하는 마지막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홀리에서 진부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온다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힘든 여정을 끝냈다는 환희에 감격하는 여인들...

참으로 대단들해요... 그리고 진심으로 백두대간 완주를 축하 드립니다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11:50)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기념으로 산악회, 개인이 기념비를 세울수 있도록 한전kps에서 조성한 공원인데

현재는 한전kps 산악회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대간을 종주한 산악회의 기념비가 참으로 많이도 보인다

후배들과 기념촬영을 끝내고...

도로를 따라서 진부령으로 향한다

진부령가는 길에서 만난 정신줄 놓은 제비꽃

진부령(陳富嶺:520m:12:2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칠절봉 (七節峰:1,172m)과

마산봉(馬山峰:1,052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으며, 오래전부터 관동지방과 영서지방의

중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으며 남쪽의 대관령, 북쪽의 추가령과 함께 3대 영(嶺)으로 불린다.

고개길이는 약 60㎞이다. 이곳에 나 있는 도로는 1981년 국도로 승격되고, 1984년 10월에

2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으며 고갯길 구비구비에서 바라다보이는 동해의 모습이 장

관이며, 이곳에 안개가 감돌아 봉우리를 덮게 되면 대자연의 장엄한 모습이 연출된다.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에는 강설량이 매우 많다.

 

그 옛날 동서를 잇는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혔으며,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1987년 2차선 도로로 넓혔다."는 고개마루 빗돌의 글은

진부령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520m)은 한계령(1,004m),미시령(770m)과 더불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개다.

그러나 두 고개와 달리 진부령은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

고갯마루에 주차장이 있는가 하면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대간의 고개로는

통 믿기지 않는다.고갯마루가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

지난날,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는

 뜻으로 얻은 이름이다.

요즈음 부르는 이름으로 흘3리(屹三里)이며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그만 남북으로 갈라졌다.

고성은 북녘 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 땅이 되고,남녘 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창졸간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향수를 달래는 이름이다.

진부령 길은 이제 46번 국도로 바뀌어 제법 오가는 이의 발길이 늘었지만,알고 보면

마치 몸뚱이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운명처럼 아주 가엽고 애처로운 길이다.

아! 진부령

백두대간 남한지역의 최북단으로 남진의 시발점이자 북진의 종착지이기도 한곳이다.

물론 그 북쪽에 향로봉(1,296.3m)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군사통제지역으로 모든 대간꾼들이 이곳 진부령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육군 제3군단에서 세운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 안내판

택당 이식(澤堂 李植)의 진부령 유별시비

진부령유별시는 1633년 1월 이 식 선생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한양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진부령 정상까지 배를 주리며 따라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


西行正値北風詩(서행정치북풍시) :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 북풍이 불고

雪嶺參天鳥道危(설령참천조도위) : 눈이 덮히어 음산한 영마루 새도 넘기 험한 길

自是人情傷惜別(자시인정상석별) : 이제 인정에 마음 아픈 이별을 하네

君來饑我俄留詩(군래기아아유시) ;  그대들 배 주리며 따라서 왔는데 나는 이별시를 남기네

택당 이식 선생의 진부령유별시비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조선조 인조(조선 16대 임금) 때의 문신(文臣)으로 대제학, 예조판서를

역임한 분으로 그 당시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양평군 양동으로 낙향하여 택풍당

(澤風堂)을 짓고후학 양성과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1631년부터 1633년까지강원도 간성 현감을 지낸 바

있으며 택당은 이곳에서 양사제를 두어 강학에 힘썼으며 개간 사업을 통한 소득증대와 진부령도로

확장 등 지역개발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16331월 선생이 한양으로 승차되어 가는 길에 많은 군민들이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뒤따랐는데

그 추운 겨울 진부령까지 따라온 군민들의 인정에 택당은 시를 한 수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진부령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백두대간을 종료하는 終山祭에 참석을 한다

종산제를 준비하는 동료 산꾼들

1년 6개월동안 대간길을 무탈하게 걷게 해주신 대간길의 山神님들의 모두 진부령으로 초대하여

여법하게 예를 올리오니 어디 어느 산을 가더라고 산꾼을 늘 보호하고 외호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오며

조촐하게 곡차와 과일, 향을 올려 지극 정성으로 산신님께 청하오니 섭수하시어 음향해 주십시요

정성껏 산신님께 예를 올리는 산꾼들

1년 6개월동안 산악회를 리딩해 준 태양대장, 노루 부대장, 하늘마음 후미대장, 시화총무님

그리고 동행한 모든 산꾼들... 다들 수고하셨고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대간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가뭄에 콩나듯이 참석한 범여를 환대해 준 모든 동료 산꾼들에게도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노루 아우님... 건강을 꼭 챙기어 산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후배들이 범여에게 감사패를 준다...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암튼 감사합니다

축하 해주신 동료 산꾼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범여도 후배산꾼들에게 묻혀서 백두대간 3회, 9정맥, 51지맥을 마친다

다음주부터 또 이제 어느 산에서 헤매고 있을지...?

남은 111지맥길을 다리가 튼튼할때까지 걸어봐야제

후배들이 준 감사패

시화 총무님 감사해요...祝詩도 고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