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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19구간 - 은티재에서 이화령까지

by 범여(梵如) 2017. 10. 23.

   선지식들이“붓다로 살자고 다짐한 봉암사를 품은 희양산 능선을 나홀로 걷다

 

☞ 산행일자:  2017년 10월 22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강풍으로 인해서 상당히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20.3km + 어프로치 약 3km / 10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주차장-은티마을-은티재-주치봉-안부-오봉정고개-마당바위-구왕봉-암릉지대

              조망바위-지름티재-암릉구간-975m봉(희양산 갈림길:왕복)-마당바위-희양산

              희양산성사거리-안부-871m봉-안부-910m봉-배넘이평전-사선봉-시루봉 갈림길

              조망바위-도막갈림길-암봉-용바위-암릉지대-이만봉-암릉지대-곰틀봉-사다리재

              886m봉-뇌정산 갈림길-981봉-평천지-암릉지대-암봉-만덕사 갈림길-1,012m봉

              백화산-헬기장-옥녀봉 갈림길-암릉지대-전망봉-헬기장-흰드메갈림길-914m봉

              황학산-분지리(안말)갈림길-862m봉-이정표-산상습지-폐헬기장-헬기장-조봉

             무명봉-무명봉-폐헬기장-681m봉갈림길-사면길-도로-이화령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 경북 문경시 가은읍, 마성면, 문경읍 

 

토욜날 저녁 6시에 꼭 참석해야 할 후배 딸래미 결혼식이 있어서 저녁에 버스를 타고 하려던

산행을 꼼짝도 못하고 예식장을 참석했는데 예식이 기독교식이라 3명의 목사가 릴레이로

주례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데 결혼식인지 일요예배인지 알 지도 못하겠다...

더군더나 2시간동안 계속되는 예식에 비기독교인들은 상당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올 수도 없고하여 예식장을 끝내고 나오니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다

 

집에와서 잠깐동안 눈을 부치고 새벽 한 시쯤 차를 몰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고

괴산 휴게소에 들리니 생각보다 좀 일찍 온 것 같아 이곳에서 차에 히터를 켜놓고 1시간 정도

잠을 잔 다음에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서 마시고 연풍 I.C를 빠져나와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다.

이곳에다 차를 세워놓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상당히 춥다... 바람막이 옷을 입고 단단히 준비를 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산행을 시작하다(04:20)

주차장에서 옷을 단단히 입었는데도 강한 바람탓인지 아니면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초겨울을 연상케하는 추운 날씨에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愛馬를 세워놓고 주차장을 빠져 나오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과 은티마을 유래석이 서 있는 노송지대가 나온다 

은티마을 유래비 

조선 초기 연풍현 당시 현내면 연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에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인(義仁)이라는 동리명이

한국의 민족 정신이 함유 되었다고 하여 은치(銀峙)로 개칭하였으며 1914년 일제 때 행정구역

통폐합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이후 행정구역 세분화 작업시 이곳은 다시 주민들에 의해

은티라고 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여궁혈(女宮穴)로서 동리 입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건을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딸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입구 송림에 남근석을 세우게 되었다.

1996.6.20 은티마을 동민 일동

은티마을 버스 정류장(04:22)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이 생긴 여근곡(女根谷)이라고 한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기가 쎈 음기를 막기위한 풍수의 하나로 마을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전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유래비에 적혀있다.

괴산군 시내버스 버스 시간표

은티마을 남근석 유래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 위치한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점에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때문에 가끔 수해를 보는데 그 개울 줄기가 여인네의 오줌 줄기 같다 해서 수해의

방패막이로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워 놓고 끔찍이도 위하고 있는데 약 50cm정도의 작은 비석처럼 생긴 돌이다.

산꾼들에게 유명한 주막집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산꾼들에게 여시(여우의 경상도 방언) 아줌마로 소문난 酒母(이름이 이종숙)가 다른 사람에게 주막집을

넘겼다는데 현재의 주막집 쥔장은 젊잖은 사람인지 아님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띠지는 온데간데 없고 산꾼들이 지나간 흔적의 낙서만 보인다

은티마을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마을 담벼락에는 추억에 서린 그림들이 많이보여 童心을 지극케 한다

그런데 헤드렌턴을 켜고 지나가는 이방인을 보고는 동네 개쉬끼들이 마치 합창을 하듯이 짖어대는 바람에

곤히 잠든 民草들에게 민폐가 아닌지 노심초사하면서 걷다가 마을을 빠져나와 올라서니 사과밭이 나온다

탐스런 사과밭과 염소 사육장을 지나니 지난 여름에 션한 맥주 3병을 얻어먹은 김포대님의 친구분의 집에도

불빛은 꺼져 있구나... 얻어먹은 맥주를 갚아야 하는데 언제 이 구간을 다시 올지 기약이 없다

어둠속에 부지런히 걷다가보니 봉암사쪽에서 쳐논 목책이 있는 은티재 정상에 도착한다

은티재(銀峙:540m:04:55)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에서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은티재 또는

오봉정 고개라고도 부르며 은티(銀峙)마을은 조선시대에 의인촌리(義仁村里)라는 동네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인재의 출현을 막기위해 은티(銀峙)라고 개명을 하였으며 이곳에 은광(銀鑛) 탄광이 있었다고 한다

은티마을에서 올라와 은티재에 도착... 구왕봉쪽을 향해서 본격적인 백두대간 마루금 산행을 나선다

목책을 따라서 구왕봉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부시럭거리며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데

머리가 쭈빗하게 서는 느낌이다... 서둘러 베낭에 있는 라디오를 켜서 노래를 들으면서 걷는다

이 라디오는 여러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는 민폐이지만 홀로 다닐때는 심심찮은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짐승들을 퇴치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짐승들은 사람소리에 먼저 피하는 습성이 있다

주치봉(683m:05:10)

은티재에서 초반부터 15분정도 치고 올라오니 넓은 공터에 아무런 표시석도 없는 그냥 밋밋한 봉우리에

지나간 산꾼들의 시그널 대여섯개가 강한 바람에 희날리고 있는데 다시 올라온 만큼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안부(05:20)

주치봉에서 급하게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고 봉암사 출입금지라는 녹슨 안내판과 송이채취 금지

프랑카드가 보이는데... 스님! 송이채취 시기가 끝난것 같은데 플랑카드를 철거하심이 어떠신지요?

안부에서 2분정도 걸어가니 安東權公과 慶州孫氏 묘비가 있고 좌측으로 은티마을로 내려서는 오봉정 고개에 도착한다  

오봉정 고개(05:22)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 마을에서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안동권과 부인 경주손씨의 묘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문경쪽은 봉암사로 인해 길이 폐쇄가 되었고 은티마을로만 길이

있는데 지명유래는 오봉정 마을에서 따온듯 싶다... 그런데 조금전에 지나온 은티재도 오봉정 고개라고 부르는데

이곳이나 지나온 은티재 역시 오봉정 마을에서 은티마을로 넘어가기에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주위가 구암봉, 원평봉, 주치봉, 장성봉, 애기암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였다고 하여 오봉정이라 불렀다한다.

봉암사에서 산길로 약4km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1970년 독가촌 정리시에 완전히 폐촌이 되었다고 한다 

오봉정 고개를 지나면서 어둠속에 암릉구간이 계속된다

680m봉(05:32)

암릉구간을 걷는데 능선 좌측 아래에는 은티마을의 가로등 불빛이 아직도 새벽임을 알려준다 

암릉사이의 좁은 등로를 따라서 내려선다

마당바위(06:05)

마당바위를 지나면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그러나 산 속이라 아직은 어둡다

구왕봉(九王峰:879m:06:15)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맞은편에 있는 희양산의 명성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대사가 봉암사에 자리를 정하고 그 곳에

있는 큰 못을 메울때 연못에 살던 아홉마리의 용을 지증대사가 신통령을 발휘하여 내쫒았는데

쫒겨난 용들이 멀리가지 않고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내려다보이는 이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지증대사에게 연못에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소원을 들어주지 앉자 여기에서 돌로 변했는데

이 봉우리를 구왕봉이라 하는데 원래는 구룡봉(九龍峰)이었는데 봉암사에서는 이 산을 날개봉이라 하며

매년 이곳 정상에 소금단지를 묻어 氣를 눌러 준다고 한다

구왕봉 표시석 뒷면

구왕봉은 희양산 아래 봉암사 창건 당시 각종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모양새나 경치로 보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산으로 그저 일반 산이나 다름없이 둥그스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양산보다 구왕봉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사리’가 아니라 ‘사리 항아리’ 혹은 ‘들러리’라도 좋다. 가능하다면 구왕봉을 닮고 싶고,

구왕봉처럼 살아가고 싶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산 ...

살아가는데 필요한 평범한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산이기 때문이다.

조망바위(06:20)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조망바위에 서니 희양산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봉암사 계곡은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고 그 너머 원통봉쪽은 동이 트려는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급경사의 암릉구간으로 내려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가은읍 원북리의 모습

희양산 남쪽 봉암사가 있는 고을이 문경시 가은읍인데 후삼국 시대 한반도의 한쪽을

장악하고 고려, 신라와 자웅을 겨루던 인물이 문경 가은 출신의 견훤(甄萱)으로

황간 견(甄)씨의 시조로 본래의 성은 李氏로 아자개의 아들이다

 

892년(진성여왕6년)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측하여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되어 세력을 넓혀 나갔지만 935년 왕위

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로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가

이듬해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킨 비운의 인물이다.

 

문경군 가은읍은 1970년대에는 탄광이 40여 개나 있던 탄광촌이다.

지금도 읍 소재지 석탄 박물관에 가면 실제로 지하 갱도의 채굴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가은읍 갈전리 아차 마을은 후삼국 시대 패권을 다투던 견훤이 내어난 곳이다. 

대야산 아래 궁기리는 군사들을 훈련 시킨 곳이며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지역에는

견훤의 이름이 붙은 산성도 남아 있다.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곳은 급경사의 암릉구간으로 상당히 주의를 요하는 곳이다

조망바위(06:30)

날이 완전히 밝아지고 희양산은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시야로 다가온다

봉암사 계곡도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 봉암사! !

한국 불교의 불교의 생명수와도 같은 봉암사를 품고있는 희양산은 너무도 아름답다

일체중생이 번내의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국한 불성을 바로보아 사람과 스승이 천상됨이라...

 

봉암사와 성철스님...타락하고 세속에 찌든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신 분이 퇴옹당 성철스님이다

흔히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유명한 법문으로 유명한 큰 스님

‘부처님 삶으로 돌아가자’는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 정신

그 당시 일제에 의해 일제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었던 한국 불교의 법맥을 살리기 위해 해방 직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자운·보문 스님 등 수행승들이 “부처님 법대로”를 외치며 펼친 자정운동이다.

이후 수행과 참선을 중시하는 한국 불교의 법맥이 기사회생했던 곳이 저 곳 봉암사이다 

봉암사(鳳巖寺)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이 창건했다.

그리하여 봉암사에 선풍이 크게 떨치니 이것이 바로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국정쇄신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런 헌강왕의 개혁의지를 심어준 이념이 곧 지증국사의 선사상이었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소위 '봉암결사'라 하여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다져놓은 획기적인 불사가 봉암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종단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뜻에 부응하여 문경시에서는 사찰 경내 땅을 확정 고시했으며 희양산 봉암사의

법당을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는 특별수도원 지역으로 고시함으로써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불교계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므로 그 배후가 되는

희양산에 대한 특별관리를 등산객들은 이해해야 할 줄 믿는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곡예를 하듯 조심스럼게 암릉구간을 내려간다

몸뚱아리 하나가 겨우 나갈 정도의 암릉구간을 빠져 나가니...

봉암사 목책이 처져있는  지름티재로 내려선다

감시초소도 보이고...

지름티재(640m:06:45)

괴산군 연풍면과 문경시 가은읍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재로 희양산과 구왕봉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油)을 칠해 놓은것 처럼 미끄럽다하여 지름티재라고 불리고 있으며 지름티재 정상

바로 위에는 감시초소가 있고 우측의 봉암사 쪽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초소와 목책이 있어서

봉암사쪽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으며 은티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지름티재에서 만난 아그들의 흔적

목불인견(木不忍見)

거대한 암릉을 손가락보다도 더 적은 나뭇가지로 받쳐있는 저 뜻은 선지식(禪知識)은 어떻게 해답을 내 놓을까?

뒤돌아 본 구왕봉의 모습

좁은 개구멍을 지나니...

집채만한 암릉들이 즐비한 암릉지대가 나온다

봉암사를 외호하고 있는 목책사이에 있는 노송 한그루는 4년전과 똑같이 고고한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암릉지대를 곡예를 하면서 올라간다

힘들겠다

추운 날씨에 낙엽으로 인해서 등로는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로프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면서 힘들게 올라서니 희양산 갈림길인 975봉 정상에 도착한다 

희양산 갈림길인 975m봉 정상에 올라서니 오늘 일본지역으로

지나는 태풍의 영향탓인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드세다

희양산 갈림길(975m:07:25)

마당바위(07:28)

마당바위에 서니 오늘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저 멀리 속리산에서부터 청화산과 조항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아직 땜방구간으로 남아있는 대야산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애기암봉도 보이는데 저 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온다

지난 8월 19일에 혼자서 버리미기재에서 장성봉으로 오르다 짙은 안개에 갇혀 애기암봉까지

왕복 6km의 대형 알바를 하는 바람에 맥산행의 커다란 오점(?)을 남겼던 사건... 덕분에 팔자에 없는 애기암봉을 가봤다

이곳에서는 괴산의 명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다만 칠보산만 육안으로만 보일뿐 똑닥이 카메라엔 잡히질 않는다

희양산(曦陽山:999m:07:38)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은 백운대라 부르면

동.서.남 삼면이 거대한 암벽으로 구성된 암산(岩山)이다

암봉(岩峰)들이 열두판의 꽃잎처럼 펼처져 있어 멀리서 보아도 우람하고 단단한 기운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세로주위의 산군(山群)을 호령하고 있는듯 하며 남쪽 산 아래에는

천년고찰 봉암사가 자리를 잡고있다.

 

희양산은 문경지방에서 보아야만 희양산을 참맛을 느낄 수 있지만 산문(山門)을

1년에 한번밖에(사월 초파일) 개방하지 않는 희양사가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부득히 은티마을로 오를 수 밖에 없다.

 

희양산을 둘러보고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가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 처져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고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의 물은 백겹의 띠처럼되었으니

뿔없는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듯 하다’ 며 감탄을 하고 이 땅을 얻은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둑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백화산을 일으켰던 소백산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그 산들 중 하나가 희양산으로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산 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빚어논 바위들이 기기묘묘하고 바위끝에서 내려다 보는

봉암사의 까만 기와지붕이 감회를 불러 이르키고 20리 봉암사 계곡이

소나무숲에 쌓여 진풍경을 연출한다.

백두 대간을 달려오는 백호산과 이만봉이 가까이에 서 있고 원북리 계곡이 깊게 느껴진다.

희양산!

오늘 백두대간 길의 불교에서는 희양산을 우리 국토의 사리라고도

 하며, 혹자는 희양산은 우리 국토의 丹田이라고도 한다.

버리머기재에서 희양산을 거쳐 하늘재에 이르는 마루금은 여타 마루금과는 달리 인체의 內臟처럼

동서로 반복적으로 휘어지며, 이 가운데 희양산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해서 호칭이다.

그래서 그런지 희양산 아래에는 한국 선불교의 대표 사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희양산은 이런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가치를 발한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고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 배형정()·태평교()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진 곳들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행궁()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또한 봉암사 주변의 계곡에는 기생이ㅜ 세상을 비관하며 몸을 던졌다는 용연()을 비롯하여

최치원()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 야유암(),백송담(), 백운대()

등의 소()들이 있다  

희양산에서 내려다 본 봉암사 계곡

해방 이후 한국 불교는 600년 동안 이어온 조선왕조의 억불(抑佛)정책의 족쇄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표 되는 종교말살 정책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 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뀌었다.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이지만 근대와 와서는 한국 현대불교의 탯 자리로도 유명하다.

해방 직후 성철, 청담, 자운 등의 스님들이 “부처의 법대로 살아보자”며 용맹 정진한 곳이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

봉암사의 기본 수칙이 되었다... 오직 부처님 뜻대로 살자!

 
희양산 정상에 서면, 오늘 비록 조망은 시원찮지만 정상 그 자체의 자태만으로도

명산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래로 내려다 보면 풍수에 문외한이라하더라도 봉암사 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다. 

희양산과 봉암사.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산과 사찰을 없을 게다.

 

이런 희양산의 화강암 덩어리는 한북정맥에 있는 산들에서 볼 수 있는 판상절리(板狀節理) 현상의

박리(剝離) 작용으로 생긴 돔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언뜻 보면 서울의 불암산을 확대시켜 놓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불암산의 불암사도 지증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봉암사 계곡을 감싸고 있는 雲海

희양산 정상에 잠깜 머물고 있는 사이에 강풍 때문인지 추위가 엄습해온다

봉암사를 향해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마치 부산 금정산 고당봉에 있는 금샘처럼 생긴 바위도 만난다

다시 희양산 갈림길(07:50)

다시 대간길을 이어간다

산죽길로 내려서니...석축을 쌓은 산성터가 나온다

희양산성터

삼국사기에 견훤이 희양산성에서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신라말에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 왔다가 이곳 희양산성 중턱 성골(城谷)이라는 곳에 피신했는데

성터가 지금도 성 아래 있는데 수백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이 성터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바로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자 그 아비 아자개(阿慈介:고향은 상주)의

세력 기반이었던 곳이 바로 남쪽의 가은읍 일대였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며

옛 군창(軍倉)이었다고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희양고성은 가운현 북쪽 15리에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이 성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희양산성터 사거리(07:58)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과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를 잇는 사거리로

이곳은 은티 마을에서 우측으로 가은읍 봉암사 옆 성골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가은 방향으로는 봉암사에서 길을 막아 놓아서 통행이 금지 되었다.

이곳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대간길을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는 경우가 많고 희양산으로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는 곳이라

그런지 띠지들이 많이 보인다... 범여도 지난번 이곳까지 오려했는데 대형알바로 인해 은티재에서 끊었다

성터에 있는 119 표지판(제4지점)

성곽을 따라서 배너미평전으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은티마을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만나는 합수지점이고,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이 자주 범람하여 수해를 입는데 계곡줄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여인네의 오줌줄기

같다하여 수해방패막이로 마을앞 큰나무밑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이 남근석앞에 동네 남정내들이

여인의 손을 빌리지않고 음식을 장만하여 제를 올리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확연하게 그 모습이 마치 여인의 자궁처럼 보이니 여궁혈(女宮穴)이란 풍수지리설을 이해할 것 같다 

아기자기한 암릉구간을 지난다

가야할 능선의 모습

가야할 871m봉의 모습

안부(08:10)

871m봉(08:15)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다시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08:18)

산죽길을 지나는데...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강한 바람에 많이 휘날린다

910m봉(08:20)

다시 단풍이 고운 등로로 내려서니 배너미평전이 나온다

배너미평전(08:33)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군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 안부능선으로 좌측의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고개를

배너미 고개라고도 하는데 배너미라는 뜻은 고개의 불룩한 부분이 배가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호남정맥의 보성군 주월산 아래에 배너미고개가 있었는데 배너미재를 한자로 풀어쓰면

‘배 주(舟) 넘을 월(越) 재 령(嶺)’이라 배가 넘어 다녔다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문복대 가는 길에서 만난 고리봉도 배를 묶어둔 곳이라 했는데

아마도 예전에 이곳이 강이나 바다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리산 세석평전, 덕유산의 덕유평전에 이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평전(平田)이라는 지명답게

이곳부터 시루봉 갈림길, 그리고 은티 마을 갈림길까지는 넓고 평탄하다.

시루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노란 소나무 잎이 길을 덮고 군데군데 박석이 쌓여 있는 아름다운 길인데

오늘은 갈 길이 너무멀어 시루봉으로 오르는 걸 포기를 한다

박석(薄石)은 경복궁 근정전 앞 마당에 깔아 놓은 검고 얇은 돌로서

균일한 두께로서 단단하고 크기도 적당하여 아주 용도가 많으며 강화도에 많다고 한다.

배너미평전 이정표

이곳에서 좌측으로 0.9km 정도 올라가면 시루봉 정상이 나오는데 전국에 시루봉,

시루산이란 지명은 아마도 깃대봉, 백운산만큼이나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은티마을) 뒷산이 시루봉인데 이 시루봉을 중심으로 이화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등로는 ⊃형태로 이어지기에 등산 거리는 상당히 멀지만 들.날머리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에 차량을 가져올 경우 차량을 회수하는 비용이 많이 안드는 장점이 있는 곳이다

시루봉(914.5m)은 은티마을 뒷산인데 지명의 유래는 시루처럼 생겨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시루란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둥근 질그릇을 말하는데 모양은 자배기 같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다.

늘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서 오는 가루눈이 싸래기로 보여 싸래기눈이라 불렀듯이 높고 둥근

산봉우리를 보고 시루봉이라 한 것은 가난하게 살았던 조상들의 힘든 생활을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로 눈물겨운 이름이기도 하다.

 

시루봉의 어원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시루같이 생겨서 시루봉이라 한 것이 아니고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고대어인 '살'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루봉은 음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떡을 찌는 시루를 연상하고 연관지은

지명이 많지만 사실은 수리봉으로서 '주변에서 으뜸이 되는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며 수리산, 수레산, 시루산 등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서 한자로 웅산(熊山), 차산(車山), 차남(수레넘이-車南), 증산(甑山) 등으로 표기되면서 여

러 가지로 분화됨으로써 오늘날 지명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배너미 평전에서 우측으로 가다가 너덜길 같은 곳으로 올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우측으로 약간 꺽어졌다가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너덜길처럼 생긴 등로를 따라서 완만하게 올라선다

빛이 바랜걸로 봐서 4년전 남진때의 것인 것 같이 보인다

사선봉(四仙峰:963m:09:00)

지도상에 963봉인데 누군가 희양산 사선봉이란 아크릴판을 붙혀놨다

사선봉(四仙峰)이라... 4명이 신선이 노닐었다는 곳인가?

불쟁이의 딸 쑥부쟁이는 아직도 이승에 미련이 남아있는가 보다

고도차가 그리 크지않는 등로를 따라서 걷는데 강풍이 멈출줄 모른다

멋진 단풍나무 사이로 가야할 황학산이 아련히 보인다

시루봉 갈림길(09:08)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시루봉으로 가는 길인데 거리가 1.8km로 되어 있다

뒤돌아 본 시루봉 갈림길의 모습

바람이 너무 센 탓에 해가 중천에 올랐건만 날씨는 더 추워지는 느낌이다

조망바위(09:1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대간길

도막 갈림길(09:13)

도막마을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하여 도원수 권율장군 이곳에 군막을 첬든 곳이라고 전해져 도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두대간 당일 산행을 하는 안내 산악회에서는 이곳으로 하산을 하는지 도막쪽으로 띠지들이 많이 보인다

도막 갈림길에 서 있는 구조 안내판

시야가 확 트이는 조망바위를 지난다

등로에서 바라본 희양산

희양산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타고 앞으로 달려가는 형상이란다

등로에서 서서 뒤돌아 보는 희양산의 모습은 눈을 의심케 한다.

어줍짢은 형용사로는 희양산의 위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숨이 막힌다’는 생각밖에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가야할 백화산의 모습

암릉구간의 능선을 따라서 걷는데 좌측으로 간간히 시야가 열려 눈이 호강을 한다

월악산과 주흘산도 보이고...

문경의 진산 이며 문경새재의 주산 이라는 주흘산((主屹山))...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등 천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다고 한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등로의 궤적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연풍군 분지리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장군이

군막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으며 괴산군에서 최고봉인

백화산과 희양산의 중간에 위치한다. 독립된 산이기보다는 황학산, 백화산. 시루봉,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능선으로 표시 된다

암봉(09:22)

오늘 산행 날머리인 이화령도 아련히 보인다

예전과 다른 괴산 소방서에서 설치한 구조안내판도 종종 보인다

용바위(09:25)

용바위에서 바라본 가야할 이만봉과 곰틀봉의 모습

넓은 공터가 나오고...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암릉구간을 내려 선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이만봉(二萬峰:990m:09:38)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오석으로 만든 정상

표시석이 서 있는데 이만봉의 유래는 분지리의 중간 부분) 2만여 가구가 난을 피해 와서 살았다는

설과 만호라는 벼슬을 한 李 씨가 이곳 동리에 살았다는 설 등이 있다.

 

만호(萬戶)라는 벼슬은,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치된 만호부의 관직(4, 무관)으로서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했는데 초기에는 수군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지방에도 외침에

대비할 목적으로 직책과 임무가 부여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아래 골짜기(

셀카로 인증샷

백두대간의 문경 구간이 참으로 넓고도 길다.

백두대간을 거쳐가는 마루금이 116km(110km)라는 설도 있음)라고 하니

엄청나게 길게 통과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중에 문경에 있는

산(4개:주흘산, 황장산, 대야산, 희양산)이 가장 많다고 한다.

백두대간 벌재에서부터 안생달리, 차갓재, 하늘재, 이화령, 은티, 버리미기재, 늘재까지

여러 구간에 걸쳐 있으며 예전에는 안생달리 조금 지나서 대미산 이전까지는

예천군 이었는데 해방 후 행정구역 조정으로 문경으로 편입 되었다고 한다.

이만봉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

등로에서 바라본 뇌정산(雷霆山:991.4m)

뇌정산은 백두대간 백화산 동남쪽 능선에서 갈라진 줄기를 따라서 뻗어 문경시 가은읍 하괴리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벼락이 많이 치는 산이라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름 탓인지

벼락이 잘 치고 물 난리도 많이 나서 인근 마을에서는 `뇌정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현재는 안에서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내정산(內定山)이라 부르고 있다

이만봉에서 다시 고도를 낮춘 다음에 올망졸망한 암릉구간을 걷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의 모습

조망바위를 지나니..

또 다른 조망바위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곰틀봉에 도착한다

곰틀봉 정상의 모습

곰틀봉(:972m:09:55)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곰이

살았다는 이야기와 이 부근에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어서 곰을 잡는 틀을 놓았던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우측으로 뇌정산 정상과 천년고찰 봉암사가 있는 

지나온 희양산이 보이고 좌측으론 가야할 백화산과 황학산... 그 너머로 주흘산과,

조령산, 월악산,... 그 뒤로 포암산과 대미산도 아련히 보인다

정상에는 죽은 소나무에 누군가가 ‘곰’이란 표시만 해놨으뿐 아무것도 없다

가야할 백화산의 모습

뒤돌아 보니 지나온 이만봉도 보인다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강풍에 시달리며 외롭게 걷는 범여를 반기는 듯 하다

저 능선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백화산 오름길이 그리만만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습랩지대를 곡예하듯이 걸어간다

사다리재(10:12)

문경시 가은읍 한밤미 마을에서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를 잇는 재로

원래 지명은 미전치(薇田峙)라 했는데 사다리재는 그 출처나 연원이 불분명한

이름이며, 본래는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 마을과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

마을을 오가던 ‘고사리밭등’이 고개의 옳은 이름이라고 한다.

고사리밭등은 분적골 사람들이 고사리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부르던 이름으로

고비 미(薇)자를 써서 '薇田峙'라 하였다.

 

원래는 사거리였는데 문경쪽은 통행이 전혀었어 길이 없어지는 바람에

삼거리가 되어 버렸지만 분지리쪽은 백두대간 당일구간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기도 하는 곳이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편하게 걷는다

886m봉(10:32)

너덜길 같은 능선으로 올라서니...

멋뜨러진 단풍 군락지가 나오고...

뇌정산 갈림길이 나오는데 등산객들의 띠지들이 많이 보인다

뇌정산 갈림길(10:47)

뇌정산까지 2.6km라... 왕복 2시간정도 걸리니 대간 산꾼 범여가 가기에는 무리일듯 입만만 다신다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눈팅이로 뇌정산을 섭렵하고...

981m봉(11:05)

안부로 내려섰다가 올라서니...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산꾼을 만난다... 이화령에서 남진하는 당일 대간꾼들이다

평전치(平田峙:11:15)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인말을 잇는 고개로 일명 평밭등이라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는 분지리에서 상내리를 민초들이 넘나드는 길이었으나 예전에

있었던 평전치의 유래의 안내 표지판은 부숴진 채 땅바닥으로 마구 나뒹굴고 있다

평천지 남쪽에 있는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한실마을은 마원리, 중평리 여우목 마을

연풍지역과 더불어 천주교 성지로서 백화산 일대 백두대간 능선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으로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으로 분지말은 천헤의 은신처였다고 한다

가야할 백화산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분지리(盆地里)의 모습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분지리는 연풍면의 동남부에 있으며 소백산백의 영봉인 백화산 아래 위치한

농촌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이고 그 가운데 분지를 이루고 있어 분지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셋집매, 안말, 이만호골 등이 있으며 셋집매는 분지리 서북쪽(분지리 입구)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셋 집이 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이만호골은 분지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만호 벼슬을 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하여 도원수 권율장군 이곳에 군막을

첬든 곳이라고 전해져 도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봉(11:25)

암봉에서 로프를 타고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병조희풀도 이별을 준비하고...

다시 암봉으로 올라서는데 정상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하면서 걷는다

암봉 우회길

생각보다 상당히 힘이든다

1,012m봉(11:48)

만덕사 갈림길(11:52)

점심식사(11:54 ~ 12:10)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행동식으로 점심을 가져왔다

강풍탓에 너무 추워서 안부 윗쪽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다

1,012m봉(12:13)

암봉에서 뒤돌아 본 능선

뇌정산도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힘들고 올라서니 백화산 정상에 도착한다

백화산(白華山:1,063.5m:12:23)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마성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겨울철에

눈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한얀 천을 씌운듯이 보여서붙혀진 이름이란다.

 

백화산은 성인(聖人)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수컷이라고 하며 그 발치에 봉생(鳳生),

우측에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鳳鳴山) 좌측으로신라시대의 고찰인 봉암사를 두고 이화령과

시루봉으로 날개를 펼친 봉황새의 형상이라고 한다.

 

백화산은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이화령에서 잠시 숨을 죽인 뒤

속리산을 향하면서 치솟은 산으로 백두대간 문경지역으로 들어와 한참을

치고 들어가다가 빠지는 말발굽의 형세를 하고 있는데 그 정점이 이곳 백화산이다

조선말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처로 이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백화산은 멀리서 보면 봉황이 노는 형국이라고 하며, 특히 문경쪽에서 바라보는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있어 봉황의 부리이고 정상은 봉황이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보듯이 천지간의

산과 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남쪽 방향을 바라보면 영남 대로상 점촌에서 문경으로 들어오는 900미터를 넘나드는

봉우리를 따라 S자형으로 흐르는 조령천이 막아서는 진남교반이 있고 그 위로 고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쫓길 때 벼랑으로 도망가는 토끼를 보고 길을 찾았다는 토끼비리가 영강 천변을 따라

비탈길에 아슬 아슬하게 걸쳐 있는데, 그래서 이 구간은 임진 왜란 때 군사 한명 없이 왜군의 진로는

하루 지연 시킨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구간이다.

판독이 안되는 백화산 정상의 삼각점

백화산은 괴산 35 명산중에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강풍으로 인해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백화산을 떠난다

헬기장(12:25)

옥녀봉 갈림길(12:27)

옥녀봉을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뭔 꼬라지가 났는지 심사가 꼬여버린 갈참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등로에서 바라본 문경읍((聞慶邑)

문경(聞慶)은 장원급제 하고 돌아가는 선비들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곳 이란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며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로는 문경새재 외에도 추풍령과 죽령이 있지만

그러나 유독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죽령을 넘으면 과거시험에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던 반면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가야할 암봉의 모습

암봉 정상으로 직접 오르지는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한다

암릉 사이로 곡예하듯 걷는다

다시 로프를 부여잡고 오르막으로 오르니 암봉이 나온다

암봉(12:40)

암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들

헬기장(12:45)

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등로가 상당히 편안하다

흰드메 갈리림길(12:48)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흰드메와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民草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지 등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잊으진 길이 된 모양이다

 

흰드메는 안말에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하며 분지리 맨 꼭대기에 올라앉은

이 마을은 '겨울철 흰 눈 덮인 모습이 흡사 하얗게 핀 꽃 같다'는 백화산(白華山) 턱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 흰두뫼, 흰드뫼 등으로 불리다가 흰드미로 바뀌었다.

 

흰드미는 산 높고 골 깊은 산비탈이지만 땅이 넓고 기름져 옥수수든 감자든 콩이든

팥이든 심는 대로 풍작이었으며 그래서 삶에 지친 민초들이 희망을 심는 땅이었다.

그들은 아침 해가 산등성 위로 고개를 들 때부터 저녁 어스름이 연풍 들녘에 깔릴

때까지 땀으로 범벅된 채 이랑을 팠다. 그러다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이 피면 산을 내려갔고,그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공간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서 본격화된 화전민 정리 사업으로 하나둘 이곳을 등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외롭게 땅을 일구던 홍태식 할아버지 내외가 1990년대 중반 산에서 내려오자

흰드미는 지도에만 이름을 남긴 빈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 있는 문경 마원리는 고려시대부터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요지로

말(馬)을 많이 길러서 마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滿山紅葉으로 물든 등로를 따라서 여유로운 발걸음

914m봉(12:55)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길

황학산(黃鶴山:912.8m:13:05)

전설속의 누런 학에서 유래 되었으며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 거리에 솟아 있고 바로 옆에 있는 규모가 큰 백화산에 가려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호젓한 산길과 억새밭, 참나무 숲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문경읍이 뚜렷이 보이고 그 너머로 운달산도 조망된다는

곳이나 오늘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아쉽다

 

산 가까운 곳에는 연풍향교와 연풍성지가 있으며 연풍향교는 조선 중종 때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고,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 때의 신해교난 이후 연풍 지역에 은거하며

신앙을 지키다 순조 때 신유교난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자리를 성역화한 곳이다.

황학산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이다

오늘은 나의 산행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느낌이다... 아무래도 추워서 쉬지 않은 탓인 모양이다

안말 갈림길(13:15)

이정표 (이화령(5.1km →, 분지 안말2.8km↑, 백화산4.9km ←)가 있다

거기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문경읍 각서리와 풍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남쪽 길은 분지리 안말로 이어지는 곳인데 이정표에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다.

 

분지리(盆地里)는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연풍군 현내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괴산군 연풍면으로 바뀌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리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862m봉(13:21)

등로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이정표(13:23)

이정표를 지나 좌측으로 꺽어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조그만 개울이 나오고...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쭉쭉뻗은 리기다 소나무 조림지를 지나니... 산상습지가 나온다

산상습지(13:40)

마루금상의 습지(연못)가 있는데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백두대간 전체를 두고도 대간 능선 한가운데에 이렇게 웅덩이가 있는 곳은 여기뿐일 것이다. 

산상습지를 지나자마자 폐헬기장처럼 생긴 넓은 공터를 지나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아산장공지묘 표지판도 보이고...

편안한 등로를 지나니...

폐헬기장(13:47)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헬기장(13:52)

조봉(鳥峰:673m:13:55)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문경에서 세운 조그맣고 앙증맞은 정상석이 산꾼을 반긴다

지명유래는 조선시대 말엽 이 산봉우리에 새들이 많이 있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조봉 정상의 이정표

조봉 정상에는 군부대 벙커가 있고 오석(烏石)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곳부터 고도를 약간씩 낮추면서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분위기이지만 오랜 산행 경험상 바람의 느낌으로 봐서는

비가 올 날씨는 아닌것 같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바람에 졸면서 걷는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 졸면서 걷다가 임도 가운데 누워있는 나무에 걸려 된통 넘어지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든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 우측엔 광산의 흔적인지 커다란 함몰지대가 보인다

무명봉(14:15)

무명봉 좌측으론 오석으로 만든 군벙커가 보인다

무명봉(14:24)

내리막길에는 멋진 老松 한그루가 대간길을 지키고 있다

폐헬기장(14:30)

681m봉 우회길(14:31)

예전엔 마지막 봉우리인 681m봉으로 올라서 이화령으로 내려갔는데 산꾼들의 시그널이

전부 우측 사면길에 걸려있다... 아마 군부대에서 통제를 하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마지막에 체력이 고갈되서 힘이 들었는데... 울고 싶은데 빰맞은 격이다

편하게 우측 사면길을 따라서 이화령으로 향한다

우측 사면길에 걸려있는 대간 산꾼들의 시그널

나뭇가지 사이로 조령산이 빼꼼히 보이고...

군부대가 있어서 오르지 못하는 681m봉을 올려다 본다

이화령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을 만난다...681m봉에 올랐다면 좌측 계단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계단 아랫쪽에는 이화령으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고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산꾼들의 띠지를 보면서 도로로 내려선다

이화령 생태통로를 지나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이화령(梨花嶺:548m:14:45)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고개의 북동쪽에는 문경새재도립공원,

북쪽에는 월악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남서쪽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이 있는 곳으로 옛 문헌을 보면 이화령은

이화현(伊火峴),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1400년대에 작성된 고려지리사지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전하는 옛 기록물에는 계속해서 이화현이나

이화이현으로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서 굳어져가고 있다

 

문경지방에서는 예전에 “새재로 갈까, 이루리로 갈까” 하는 노랫말이 있었는데 길이 험해 혹 산짐승의

피해라도 입을까봐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고 해서 이우리재라고 붙혀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에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이곳 노인들은 이곳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며 현재 이화령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이화현은

언제 이 길이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문경새재보다 더 오래 되을지도 모른다

관음리쪽은 계립령(하늘재)이 주 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던 있었을 것이고

또 각서리(문경)에는 요광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6.25동란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새로 길을 닦았다고 하며, 이후에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이 고개 아랫쪽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 터널이 개통되면서 옛 명성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최근에는 드라이버 코스를 즐기는  차들과 라이더, 자전거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화령쪽 괴산쪽에는 휴게소와 파고라 쉼터 삼불감시초소가 보인다

백두대간을 잇는 이화령 생태통로 기념비

백두대간을 잇는 생태통로 윗쪽으로는 정작 산꾼들이 걸을 수 없다는게 아쉽기만 하다

이화령 고개 아래로 지나가는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모습

휴게소 마당에는 왠 표시석이 이리도 많은지...

이곳에서 은티마을 주차장으로 가기위해 연풍 택시를 호출하는데 한결같이 바쁘다고 오질 않는다

어떤 택시는 아예 전화를 받지않고 어떤 택시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쁘다고 끊어 버리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10통도 넘는 전화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근데 내 옆에서 내가 전화 하는걸 듣고 부부인듯한 등산객이 ‘어르신 혼자이시냐’고 묻는다

갑자기 웬 어르신...요즘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탓인지 어르신 소릴 참으로 많이 듣는다.

혼자라고 얘길 하니까...자기들이 음성에서 트럭을 타고 조령산을 왔다가 가는 길인데

태워 주겠단다...지금 내 입장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땐가... 트럭이면 어떻고 경운기면 어때...

그저 고마울뿐인데... 자기는 음성에서 고물상을 하는 사람이고 주말마다 근교 산행을 하는데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기에 은티재에서 이화령까지 왔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적재함에 내 베낭을 싣고 은티마을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 분들에게 너무 고마워  주차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사과 한봉지를 사서 줬더니만 이걸

받으려고 태워 준 거 아닌데 오히려 연신 미안해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더 고마운데...

이 분들과 작별을 하고 고속도로만큼이나 넓은 3번 국도를 타고 서이천I.C까지 와서

중부고소도로에 들어선 다음 집으로 향해 가는데 집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