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선비들이 靑雲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는 문경새재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7년 11월 12일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8.6km (실제거리약 21km) + 어프로치 3km / 9시간 4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이화령-헬기장-진주강씨 묘-헬기장-759m봉-폐헬기장-이화령 갈림길-폐헬기장-사면길☞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연풍면 / 충주시 수안보면
2주전에 후배 산꾼들이 백두대간 3회 완주를 축하해주는 완주증도 받았긴 했지만 원래 대간 3번째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6월에 지맥길의 개고생한 경험 때문에 잠깐 접고 대간길에
나섰다가 어찌어찌 하다가보니 욕심이 나나서 3번째 종주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다섯 구간이 남았는데 이번주에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아랫쪽에 남은 속리산 구간은
수헌아우님과 같이 하기로 했는데 발리로 도피(?)하는 바람에 그 다음 구간인 늘재에서 청화산
구간을 타기로 하고 지난번 잤던 둔덕산 가든에 전화를 했더니만 쥔장이 이번주에 시간이 없단다
마땅히 갈데가 없다... 그러다가 생각한 곳이 이화령 구간이다
첨에는 문경으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이화령으로 접속하려 했었는데 문경에는 24시간하는
찜질방이 없어서 꿩 대신 닭이라고 하는 수 없이 수안보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이화령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저녁에 대충 베낭을 챙기 다음에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수안보행 버스표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07시 20분... 잠시후에 수안보행 버스를 탔는데
지난주 부용지맥 마지막길에 탔던 버스에 똑같은 코스인데 생각보다 승객이 상당히 많아 滿車 수준이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일죽I.C를 빠져나와 생극,용원, 주덕,건국대(충주캠퍼스)에 도착하니
승객들은 모두 다 내리고 손님이라곤 달랑 나혼다
버스를 나를 수안보에 내려주고 미륵리를 지나 월악산 방향으로 가버린다
수안보 시외버스 정류장(21:55)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5분거리인 수안보 온천랜드 찜질방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10,000원을 주고 들어가 온천물에 1시간정도 피로를 풀고 수면실로 갔더니만
사람들이 많아서 잠자리가 마땅찮다... 거기다가 왜그리도 떠들어 대는지 잠을 자는둥 마는둥 밤을 지샌다
수안보온천랜드(22:00~06:20)
왕의 온천이며 백성의 온천이라 불리는 수안보의 지명 유래를 보면 수안보는 '물안비'라는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있는데 '물안보''물안비'라는 이름은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을 '물이 솟는
보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아름다운 우리말로 한자로 바뀌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수안보(水安堡)'가 되었다.
수안보 온천에 대한 기록은 조선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에서 맨 처음 볼 수 있고, 그 외에도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 등 수많은 고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태조 이성계가 피부병을 치료하려고
찾았다는 내용이 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숙종이 휴양과 요양을 위해 찾았다는 《청풍향교지》의 기록을 봐도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수안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성처럼 뜨겁던 53℃의 수안보는 왕이나 지위 높은 귀족을 위한 것 만은 아니었고 백성에게도 허락된
곳이었으며 논에서 처음 온천을 발견한 사람도 피부병에 걸린 백성이었고 논바닥에 누워 자다가 볏짚 아래에서
스며든 따뜻한 온천수를 발견한 뒤,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다가 피부병이 나았다는 것도 평범한 백성의 이야기이다
수안보 온천이 근대 온천으로 발전한 것은 1885년 노천식 온천을 설치하고, 1929년 현대식 장비를 사용한
온천공 굴착으로 인하여 온천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전설의 의하면 용이 따뜻한 곳을 찾아 이곳에서
겨울을 나던중, 병을 고치고 힘이 세어져 하늘로 승천하려다가 못내 이루지 못하고였다고 하는 슬픈 전설이
있으며한 겨울 수안보 그름매기 고개를 넘던 문둥병 거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곳에서 겨울을 나던 중 그곳
논 가운데서 따뜻한 물이 솟아 그 물로 아픈곳을 씻었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다
역사서를 보면 조선시대에 왕과 선비들도 수안보를 많이 찾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태조 이성계가 악성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안보를 자주 찾았고, 숙종도 요양과 휴양을 위해
이곳을 찾았으며, 세종대왕의 부마였던 연창위 안맹담, 세조때 우의정 권람, 숙종때 명유 권상하 등이
수안보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대에서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이 수안보 온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수안보 온천은 천연온도 53도의 단천수로 라듐 성분이 함유되어 있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중앙 집중 방식에 의한
개발 관리로 천연자원 보존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는데, 무색, 무취로 목욕과 식수로모두 가능하며 피부병, 신경통,
류마티스, 위장병, 부인병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따끈한 온천수에 몸을 녹이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이화령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온천탕이 있는 락카로 향하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고, 밤 11시부터 아침 6시까지 출입금지란다
기.지맥 산행을 하면서 대한민국 찜찔방을 수도 없이 다녀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후론트와, 식당, 매점을 다 다니면서 문을 두둘겨봤지만 어느곳 하나 인기척이 없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6시까지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면서 간단하게 씻고 아침도 굶은채로 택시를 타고 이화령으로
향하는데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었고, 식사도 못한탓에 베낭에 있는 거라곤 초코파이 2개와 쥬스 하나뿐이다
점심이야 문경새재에서 매식을 할 요량으로 처음부터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화령에 도착하니 아직은 어둠속...택시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요금 20,000원을 지불하고
서둘러 신행을 시작한다
이화령(梨花嶺:548m:06:35)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고개의 북동쪽에는
문경새재도립공원,북쪽에는 월악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남서쪽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이 있는 곳으로
옛 문헌을 보면 이화령은 이화현(伊火峴),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1400년대에 작성된 고려지리사지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전하는 옛 기록물에는 계속해서
이화현이나 이화이현으로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서 굳어져가고 있다
문경지방에서는 예전에 “새재로 갈까, 이루리로 갈까” 하는 노랫말이 있었는데 길이 험해
혹 산짐승의 피해라도 입을까봐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고 해서 이우리재라고 붙혀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에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이곳 노인들은 이곳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며 현재 이화령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이화현은 언제 이 길이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문경새재보다
더 오래 되었지도 모른다
관음리쪽은 계립령(하늘재)이 주 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던 있었을 것이고
또 각서리(문경)에는 요광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6.25동란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새로 길을 닦았다고 하며, 이후에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이 고개 아랫쪽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 터널이 개통되면서 옛 명성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최근에는 드라이버 코스를 즐기는 차들과 라이더, 자전거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행을 시작하다(06:40)
대부분의 등로가 11월 1일부터 내년 5월15일까지 경방기간으로 묶혀 있는대
이곳은 그 구간에 해당되지 않은지 금지 표지판이 안 보이기에 참으로 다행이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생태통로가 만나는 등로가 나온다
첫번째 헬기장(06:43)
아직까지 어둡긴 하지만 먼 동이 터려는지 동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배 진주강씨 호금지묘(06:48)
두번째 헬기장(06:55)
문경시내 너머로 일출이 시작된다
서리가 많이 내린 낙엽 때문에 등로가 상당히 미끄럽고 생각보다 춥다
일출(07:10)
759봉(07:11)
폐헬기장(07:12)
이화령 갈림길(07:13)
내가 걸어온 길은 백두대간 능선이라 일반 등산객들은 잘 다니지 않는 곳이고 좌측으로
나 있는 편안한 등로는 조령산을 찾는 일반 등산객이나 100대 명산을 찾는 편안한 등로이다
연풍 택시...3주전의 불친절한 경험 때문에 저 글귀가 가슴속에 썩 다가오질 않는다
폐헬기장(07:15)
등로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고...
등로는 우측 사면길로 이어지고...
희안하게 생긴 노거수
예전에 없었던 것같은 데크목 계단이 보인다
제1관문 갈림길(07:33)
조령샘(07:35)
깨끗한 약수가 흘러 내린다... 물 한모금을 마시고 조령산으로 향하는데 생각보다 춥고 손이 시리다
조령샘 이정표
뒤돌아 본 조령샘의 모습
잣나무 사이로 새로 만든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1,005m봉(07:45)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지형도상 1.005m봉인데 우측으로는 대간길이 이어지는 조령산 방향이고
좌측으로 2.7km 방향에 절골이라 표기가 되어 있는데 괴산군 연풍리에 있는 절골은 신풍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암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풍리(院豊里)는 작은 산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신혜원, 신풍, 절골 등이 있는데 신혜원은 조선조 시대의 원인
신혜원이 있든 곳이라 일찍부터 민가도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신풍은 조선조 중엽 이곳에
신풍역(新豊驛)이 설치 되면서 붙은 이름이며, 절골은 신풍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암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원풍이라는 명칭은 신혜원과 신풍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
보물로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있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의 암벽에 나란히 새겨진 2구의
고려시대 불상으로 이는 약 3.1m이며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있다.
헬기장(07:47)
조령산(鳥嶺山:1,025m:07:58)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날아가는 새들도 쉬어가는 산이란다.
그 옆에는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故 지현옥님의 추모비목이 서있다
조령산 이정표
조령산 정상에 오르니 남.녀 2명이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이른 아침에 이화령에서 올라 왔다고 하는데 자기들은 대간 산꾼이 아니고 100대
명산을 산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너무 추워서 산행이 뭐고 다 싫다고 하면서
다시 이화령으로 내려 가겠다고 한다
조령산 정상에는 생각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손이 시려도 너무 시리다
나도 삼각대를 꺼내기 싫어 이화령으로 내려 가시는 분에게 부탁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조령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故 지 현옥님의 추모비조령산 정상에 서니 구조물이 눈에 띈다. ‘故지현옥’의 추모비이다.
1993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여성 산악인이다. 그러나 1999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 길에 영원히 산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언젠가 모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차라리 견딜 만 했다……”
지금도 지현옥 하면 ‘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정작 그녀는 이런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을 듯하다.
그녀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운 인물로 각인되기를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침은 이 땅에서 기득권세력과 맞서 싸우려는 민중의 바램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령산 정상은 사방으로 두루 두루 공평한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지현옥이 쉬기에는 안성마춤인 것으로 보인다.
부디 편안하게 쉬시길...(자료인용)
지 현옥(1962~1999)
충남 논산 출신 여성 산악인으로 1998년 7월에 여성 최초로 파키스탄령 희말라야
가셔브롬 제2봉을 무산소 단독등정을 하였고 1999년 4월 세계에서10번째로 높은
희말라야 안나푸르나봉을 정복하고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산악을 배우고 훈련하였던 곳이 이곳 조령산이어서 지인들이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멋진 雲海에 휩싸여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주흘산의모습
조망봉(08:03)
조망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백두대간 길
조망봉에 서니 그야말로 모든게 일망무제이다
가야할 신선암봉과 그 너머로 신선봉, 마패봉 월악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게
장관을 이루고 있고 우측으로 주월산의 주봉과 영봉,부봉에서 6봉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은 설악산 못지 않는 멋진 조망을 연출하고 있다
조망봉에서 바라본 주흘산(主屹山:1,106m) 능선의 모습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위치한 문경의 진산으로서 고려 때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산이며, 북동쪽사면은 급사면이나 서쪽사면은 이보다 완만하며,
산록에는 846년(문성왕 8)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한 혜국사(惠國寺)가 있다.
또 서쪽 상초리에는 주흘산사(主屹山祠)가 있어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영남과 기호ㆍ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애사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보면 볼수록 멋진 장관
조망봉 이정표
4년전 남진길에는 이곳을 올라오면서 많은 시간과 땀을 쏟았는데 지금은 데크목 계단이 있어 많이 편해졌다
무명봉(08:08)
다시 엄청난 급경사의 절개지로 내려서는데 등로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마당바위 갈림길(08:12)
이정표(→신선암봉 1300m, ←조령산 480m, 마당바위 2400m)가 있는데 좌측 괴산쪽으로
상암사터가 있는 절골로 내려가는 곳이고 우측은 마당바위로 내려서는 곳인데 문경에서
설치한 이정표라 절골 방향은 표시가 없다
무명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 데크목 계단으로 인해 시간 단축이 많이된다
마당바위로 이어지는 계곡의 모습
절골갈림길(09:10)
절골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상암사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조령산 아래서 부터 이곳까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대부분 절골로 이어진다
안부에서 올라서니 비박족의 텐트 한동이 보인다
다시 오르막길...배는 고파오고 먹을거라곤 초코파이 2개... 지금 먹으면 안되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힘들게 889봉으로 올라선다
889m봉(08:35)
조령산 119 - 04안전등이 있는 곳에서 다시 내리막길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는 魔의 3.2km 구간...상당히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가야할 신선암봉의 모습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으로 인해 잠시나마 조금은 편하게 걷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괴산군 연풍면 延豊面)의 모습
서쪽은 장안면(長延面), 북쪽은 충주시 수안보면(水安堡面)에 접하고, 동쪽과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 마성면(麻城面) . 가은읍(加恩邑)과 도계를 이루며 면 전체가
백두대간의 산릉에 속한 험준한 산지이고 문경시와의 접경지대에 조령산(鳥嶺山:1,017m)·
백화산(白華山:1,064m)·구왕봉(九王峰:898m)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는 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고도가 낮아지며, 연풍천(延豊川) 주변에 좁은 평지가
분포되어 있을 뿐이고 평야가 협소하여 쌀 생산량이 적은 데 반하여 농가의 부업으로 양잠이
활발하며 잎담배와 약용작물을 재배하고, 특산물로 연풍사과·청결고추가 생산되고 있다.
이화령(梨花嶺)을 넘는 국도가 면의 중앙을 관통하여 문경·괴산·충주 방면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문화재로는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槐山院豊里磨崖佛坐像:보물 97),
연풍 입석의 소나무(천연기념물 383),연풍향교(충북유형문화재 103), 연풍동헌(충북유형문화재 162),
연풍향청(延豊鄕廳:충북문화재자료 13), 연풍성지, 경저 효자각, 행촌리(杏村里) 열녀각, 행정(杏亭),
조령 삼관문(鳥嶺三關門), 원풍리 사지(寺址), 모선정(慕先亭) 등이 있다.
지나온 조령산도 뒤돌아 보고...
로프에 매달려 신선암봉으로 올라간다
암릉 사이를 돌아서...
다시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다시 암릉길을 올라서니 신선암봉 정상에 도착한다
신선암봉(神仙岩峰:937m:08:55)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암릉으로 형성된 봉우리로 예전에는 고사리봉,
할미봉, 온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속해있고,신선암봉(神仙岩峰)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신선이 놀았다고 붙혀진 지명으로 괴산의 명산 35곳중에 하나이다
이곳이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고 잠깐사이에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길을 나선다
좌측으로 한섬지기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은 데크목 공사로 인해 상당히 지저분한데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의 지명유래는 수옥폭포 서남쪽에 있는 곳으로 앞 들의
면적이 한섬지기(20두락)라 해서 붙혀진 마을 이름이란다
다시 엄청난 급경사의 절개지 내리막길
등로는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고 낙엽으로 인해 산행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쭈구리바위 갈림길(09:20)
쭈구리 바위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2km정도 가면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만큼 큰 쭈구리가 살고 있었는데
바위에 앉으면 물 속의 쭈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젊은 아가씨나 새댁이 지나가면 이 놈이 희롱을 하였다고 한다
괴산군에서 새로 설치한 이정표
4년전 남진길에 없었던 이정표가 새로이 설치되어 있는데 괴산군 지역 표시만 되어 있다
뒤돌아 본 쭈구리바위 갈림길의 모습
똑같은 쭈구리바위 갈림길인데 괴산군과 문경시에서 따로 설치한 모습이
마치 이 나라의 현재 모습을 보는것 같다
괴산군에서 설치하면 어떻고, 문경시에서 설치하면 어떤데 민초들이 피땀흘려 번 돈을 세금으로 낸 걸 이렇게 쓰다니...
결론부터 말하면 이기주의적 사고의 발상은 아닌지...남의 것을 인정 안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마치 前 대통령의 탄핵으로 집권한 요즘 정권을 보는듯한 느낌이다...요즘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해 분.초를
다투는 시기에 전 세계가 AI니 4차원의 세계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 나라는 적폐세력이니 뭐니 하면서 전 정권들의 과오를 들춰내는데만 모든걸 집중하는 모습이
작금의 이 나라 상황은 마치 윤흥길이 쓴 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을 연상케 하는 느낌이다
전임 정부의 과오인 적폐청산도 필요는 하다... 그러나 그걸 보완하여 안고 갈수도 있는데 무조건
나쁜 놈으로 밀어 붙이면서 자기 사람 심기에 혈안인 걸 보면서 과연 잘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맘씨는 어딜 갔는지... 절골에 있는 2개의 이정표를 보면서 씁씁한 뒷맛을 느낀다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낙엽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럽다
뒤돌아 본 신선암봉의 모습
암릉구간에 올라서니...
멋진 기암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장은, 바위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을 뜻하고, 중장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지내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종장에서는 인간이 결코 최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의 영구적모습에서 초연(超然)하고 달관한 군자의 모습을 보여 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인간중심 사고에서의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수백년 전에 예견하고 있다 하겠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 바위가 유난히도 두드러지는 오늘 대간의 훈계이다.
안부(09:20)
좌측으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다시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가야할 능선이 보이는데...
923m봉(09:28)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대상이자 교감의 대상이었다.
심미적 대상을 넘어 자연과 교감했던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포함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道가 구현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단지 마주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가지는 유기체로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 가운데에는 ‘바위’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옛날의 많은 현인들은 바위를 찬미하곤 했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 五友歌에 나오는 바위 구절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바위를 인간과 평등한 관계로 보는 데에는
蘆溪 박인로의 立巖別曲(입암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無情(무정)히 서있는 바위 有情(유정)하여 보이는구나
最靈吾人(최령오인)도 直立不倚(직립불의) 어렵거늘
萬古(만고)에 곧게 선 얼굴이 고칠 적이 없구나
오늘 산행중에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조심스럽게 암릉구간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우측 계곡으로 조령1관문에서 문경새재에 있는 조령3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희미하게
보이고 예전에 방영됐던 KBS 드라마 왕건의 세트장이 있는데 박무로 인해 잘 보이질 않는다
문경새재는 전 구간이 흙길로서 우리나라의 부흥시킨 故 박정희 대통령하면
수식어로 따라 붙는데 박 대통령께서 이곳만은 시멘트 포장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 옆으로는 계곡과 수로가 있어 언제든지 손발을 닦을 수 있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거진 숲도 걷는 재미에 한몫을 한다.
이처럼 수려한 자연경관 덕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選'과 명승32호로도 지정됐다.
낮은 물론이고 늦은 밤에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운치 있는 풍경이다. 문경새재는 제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으로 이어진다.
전체 길이는 6.5km. 일정이 빠듯하다면 1관문이나 2관문까지만 걸어도 좋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생태전시관, 사계절썰매장, 새재스머프마을,
옛길박물관 등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옛길박물관은 과거길,
여행길 등 조선시대 길과 얽힌 문화를 재조명해놓았다.
1708년에 축성된 제1관문 주흘관을 지나면 왼편에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이 나온다.
'태조왕건', '대조영', '대왕세종' 등 내로라하는 사극은 죄다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운이 좋으면 실제 촬영 장면을 볼 수도 있다.
928m봉(09:33)
뒤돌아 본 928m봉의 모습
낙엽이 수북한 사면길을 지나니...
119-05 구조물(09:38)
계속되는 암릉구간을 지나니 나목이 서있는 799봉이 나온다
799m봉(10:00)
裸木
이 세상에 부귀영화
화려하게 꽃 피워도
한순간에 떨어지는
잎새 같은 것
삭풍에 몸을 떨며
침묵으로 외치는
너의 모습이
애처롭고 아름답다
삶의 시작도
허무의 점 찍고 가는 종말도
잎새 하나 없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고
벗은 몸으로 외치는
진리의 전도자
말 못하는 만물이
무지한 인간을 깨우치고 있다
김내식님의 詩
등로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
다시 로프 한가닥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로 암릉구간을 내려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수안보쪽의 모습
빛바랜 이정목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안부가 보인다
선바위 갈림길(10:03)
선바위를 끼고 로프에 매달려 윗쪽으로 올라선다
선바위(立石)의 모습
호젓한 낙엽길을 걷다가...
다시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제2관문 갈림길이 나온다
제2관문 갈림길(10:12)
제2관문이라 불리는 조곡관(鳥谷關)의 모습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곡관(鳥谷關)’ 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라고 한다.
문경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중 1594년(선조 27) 신충원에 의해 가장 먼저 축성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관방을 설치할 때 주흘관(草谷城)과 조령관(鳥嶺城)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옛 성을 개축하여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 훼손되어 방치되던 것을 197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때 ‘조곡관’이라고 개칭하였다. 이곳은 1․3관문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비해 계곡부가 가장 좁다.
그 뿐만 아니라 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동쪽도 비교적 산세가 험하고, 앞쪽 5m 정도 되는
지점에 성곽과 평행하게 개울물이 흘러서 외적을 방어하기가 쉽다.
임진왜란 당시 신충원이 이곳에 축성을 한 것도 이러한 자연지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좌우의 평지성, 동쪽(오른쪽) 평지성과 연결된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는 돌로 축조한 홍예문 위에 있다. 문루 아래는 잘 다듬은 입방체형 돌로 바른층쌓기를 하고
그 중앙부에 높이 3.6m, 너비 3.5m, 길이 5.8m의 홍예문을 두었다.
이때 석재들은 높이를 거의 일정하게 다듬어 8단으로 축조하였다.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문루 앞쪽에는 ‘조곡관(鳥谷關)’, 뒤쪽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오솔길님의 블로그 인용
가야할 마패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암릉구간의 마지막을 지난다
조령산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 암릉구간...약 3.2km 정도의 거리인데 시간당 1km씩 밖에 걷지 못한 느낌이다
757m봉(10:25)
집채만한 바위를 지나서 내려서니...
편안한 등로가 계속된다
등로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
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등 천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던 곳으로 문경읍을 감싸고 있는 문경의 진산으로 주흘산 최고봉은 1106m의 영봉 이다.
하지만 주봉은 영봉보다 낮은 1,076m인데 이곳이 주봉(主峰)이 된것은 산세가 막 비상하려는 학의 모양인데
이곳 주봉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 이라고 한다. 또한 주흘산에서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은데 그래서 높이에
상관없이 이곳을 주봉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을 보면 문경의 지명은
이 주흘산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흘산은 영남에서 서울 가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영남의
제일비경지인 진남교반의 고모산성을 돌아서면 우뚝하게 솟아나있다.
1,000m 정도의 아름다운 산이다. 맵시 있는 여자 같기도 하고,
절세미인이 단장을 하고 앉은 듯 단정한 산이다.
좌우대칭이 어우러져 있고, 내리 뻗은 품세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산 모양이 정자관(程子冠)처럼 생긴 것도 문경의 지명생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자관은 모자인데, 모자를 옛 우리말로는 ‘고깔’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 했다.
우리 말 ‘고깔’의 이두 식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했는데,
이 역시 주흘산의 생긴 모습이 정자관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당바위(10:30)
가야할 깃대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휴식시간(10:50~10:58)
어제 저녁에 동서울터미널에서 가락국수 한그릇 먹고는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너무 허기가 지기에 비상용인 초코파이 2개와 쥬스 하나를 여기서 다 먹어 버리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813m봉(11:00)
813m봉 정상 삼각점
깃대봉 갈림길(11:01)
깃대봉(835m:11:05)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위치한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봉우리 아래에는 치마바위가 있고 능선으로 넘어가면 조령산 휴양림이 나온다.
다시 깃대봉 갈림길(11:10)
조령으로 가는 길
조령성(鳥嶺城)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새재 정상 마안부에 위치한다.
선조 초에 쌓고 1708년(숙종 34)에 중창하였으며 ‘영성’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이라고도 한다.
1907년 훼손되어 홍예문 일부와 석축만 남은 것을 1975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곳은 북쪽의 마패봉과 남쪽의 깃대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마주보며 소멸하는 고개마루로
앞쪽(충북 괴산군 연풍면)은 비교적 좁은 계곡부이고 뒤쪽(경북 문경시 문경읍)은 넓고 편평한 편이다
임진왜란중에 영의정이었던 유 성룡의 제안에 의해 선조27년(1596)~30년(1600)에
축조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 많이 붕괴되었으며 숙종 10년(1684년)에 이르러
조령의 설관 문제가 논의되어 숙종 35년(1709년)에 조령산성이 축조되면서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혹은 조동문), 제3관문(조령관)을 설치하였다.
제1관문 양쪽에 뻗은 성이 초곡성이고 제2관문 성은 중성 제3관문인 이곳이 조령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정표(11:20)
이정표를 지나니 무명봉이 나오고 다시 내려서니 4년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보인다
다시 하산길... 산신각이 보이고 조령으로 내려선다
조령 산신각(山神閣:11:30)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산신각 아래에는 조령약수(鳥嶺藥水)가 있는데 조선 숙종34년(1708년) 조령성 축성시 새재정상(650m)에서
발견된 약수는 과거급제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유명한 약수터로
사시사철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약수를 즐겨 마시면 장수하는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한다
조령으로 내려서니 문화재 보수작업을 하느라 모든게 어수선하다
문경새재(650m:11:32)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고개로 조령(鳥嶺)이라
부르며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 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울창한 고개로서
새들도 쉬었다가 넘었다는 고개 정상에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館)이 산꾼을 반긴다
경상도 문경에서 새재로 오르는 길에는 조선시대에 나그네의 숙소였던
‘원터’와 조선조 산불을 막기위해 세워진‘산불됴심’ 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넘나드는 유서깊은 길이였다.
추풍령을 넘어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 하여
금기가 있지만 새재를 넘으면 장원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아주 중요한 고개로
사회 전반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중앙집권제를 실시한 조선왕조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X자형으로 9개
대로를 국도로 설치하였으며 그 중에 제4로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천혜의 요새였던 문경새재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상주를 치고 거침없이
문경새재로 넘어온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넘은 다음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카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 같은 연유로 약 6.5km 거리에 이르는 협곡 중간에 1594년 제2관문이
조곡관을 세우고 훗날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이곳을 세웠다.
여지도의 모습
조령산성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새재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북쪽의 마패봉(925m), 동쪽의 부봉(917m), 주흘산(1075m),
서쪽의 깃대봉(812.5m), 조령산(1,026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곽은 3곳에 위치한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각각의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평지성, 평지성과 연결되어 좌·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 아래에는 모두 홍예문을 두었고, 평지성은 매끈하게 다듬은 입방체형 석재나 면과 모서리를
다듬은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산성은 20~60㎝ 내외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문루의 명칭은 1·2·3관문에 걸려있는 현판에 따라 각각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라 하고, 산성의
명칭은 초곡성, 중성, 조령성이라 하겠다. 산성의 규모는 초곡성(草谷城) 2,270m, 중성(中城) 40m,
조령성 899m 정도 이다. 이 외에 북암문과 동암문에도 각각 333m, 750m 정도의 성벽이 있다.
부대시설로는 동암문, 북암문, 포루, 우물터 등이 있다.
그런데 문경새재와 관련된 각종 고지도에는 이외에 동창, 산창 등이 표기되어 있고,
최영준은 1관문 뒤에 조령관, 별장영, 산창, 병영, 무기고, 마당 등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놓았다.
이것은 곧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위치했던 곳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로 인해 옛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조령산성모습.
주흘관이 하문, 조곡관이 중문, 조령관이 상문으로 표시되어 있고,북암문, 동암문도 표시되어있다.
문경새재에 내려서 우측에 있는 매점으로 향하는 길에 감이 탐스럽게 달려있다
어차피 이곳에서 매식을 할 요량으로 베낭 무게도 줄일겸 점심을 싸오질 않았다
점심시간(11:32~12:15)
조령 제3관에서 우측에 있는 문경새재 매점으로 향하는 길에 부부 산꾼을 만난다.
느낌에 내 불방에 가끔 들어오시는 솔&다은 아부지 모습 같아서 여쭤봤더니만 맞다고 하신다
산꾼이 산에서 만나면 상당히 반갑다...솔이 아부지&엄마도 요기를 하러 매점으로 가시는 모양이다
나는 해물 라면을 하나 시키고, 솔이 아부지는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시켜 나에게 먹으라고 권한다
덕분에 파전에다가 막걸리를 거하게 얻어먹고 같이 주막을 빠져 나온다
솔이 아부지!... 막걸리와 파전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복 받을깁니다
매점을 나와서 문경새재 가운데에 있는 조령3관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경북 문경에 소재한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5백여 년간 문경새재를 넘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중에는 입신양면을 꿈꾸는 청춘도 있고, 거상을 꿈꾸며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들도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을 넘으면 보름, 죽령을 넘으면 열엿새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열나흘 정도면 너끈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지름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 미끄러지듯 낙방한다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문경새재는 거리가 짧은 만큼 길이 험하고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鳥嶺)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른 뜻으로 백두대간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란 의미도 포함된다.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는 설도 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이다.
마패봉으로 향하는 길...배가 부르니 만사에 걱정이 없다.
마패봉으로 향하는 길 우측에 군막터가 보인다
군막터(軍莫址:12:17)
예전에 조령관을 지키던 지키던 군사들이 대기하는 장소란다.
군막터를 올라서니 오미자 터널이 나오는데 늦가을이라 그런지 모든게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오미자(五味子)는 껍질은 시고, 살은 달며, 씨는 맵고 쓰며, 전체는 짠맛 등 다섯가지 맛이 나므로
본초학(本草學)에서는 오미자라고 부른다.
한방에서 이 다섯가지 맛은 우리 몸에 각각 다르게 이로움을 준다고 하며, 동의보감에는 예로부터
영약으로 피를 맑게하고, 식은 땀을 줄이며 갈증해소, 주독을 풀어주며, 남녀 모두의 정력을 보강해
준다고 하였다.
오미자는 덩굴설의 다년생 목련과 식물로서 주로 백두대간 깊은 산속의 해발 300~700m의 중간 산지에서
자생하며,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의하면 오미자가 문경의 대표적 주산물로 전국 생산량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06년 6월 20일에 정부로부터 문경 오미자 산업 특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마패봉으로 향하는 길...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묘지(12:25)
이곳에서 솔이 아부지와 작별을 하고 홀로 길을 떠난다
선바위(12:33)
아침에 비해 햇빛이 따사롭다...암릉구간을 오르는데 약간은 더운 느낌이다
조망봉(12:40)
조망봉에서 바라본 문경새재의 모습
능선 안부(12:45)
마패봉 가는길에 누군가 막걸리봉이라고 돌에다 적어놨다...막걸리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마패봉(馬牌峰:927m:12:48)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암행어사
박 문수가 조령 제3관문 위에 쉬면서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 놓았다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지도상에는 마역봉(馬驛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경북 문경지역에서는 마패봉으로 부르고 충북 괴산지역에서는 마역봉으로 부른다
* 박문수(朴文秀:1691~1758)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색당파중에 소론 계열의
인물이나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군정과 세제 개혁의
논의에 참여 했으며 부정한 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명성을 날렸다
마패봉 아랫쪽으로 신선봉으로 가는길에 등산객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이곳 마패봉은 신선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한데 신선봉(神仙峰:967)은 충주시 수안보면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백두대간 마패봉에서 1.3km, 수안보 온천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으로 괴산 35명산에 들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란다
산세가 아름답고 암릉으로 이루어져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는 곳으로 신선봉의
옛 지명은 할미봉이라고 하며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은 할미봉으로 부르고 있다.
할미를 닮은 할미바위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인데 지도상에는 신선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선지맥 개념도
신선지맥 (神仙枝脈)은 백두 대간 마폐봉(마역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신선봉(996m), 소조령,송치재,박달산(825m),맹이재,성불산(530m)을 지나
안민천이 달천에 합류하는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창리에서 끝나는 31.9km되는 산줄기다.
마패봉 정상에 있는 이정표
돌탑봉(12:50)
돌탑봉을 지나니 월악산을 비롯해 오늘 걸어야 할 능선들이 시원스레 보인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능선들의 모습과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월악산 주봉인 영봉이 시원스레 보인다
월악산(月岳山)은
달이 뜨면 주봉인 영봉(靈峰·1097m)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문헌에는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또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만큼이나 산이 높고 그 세(勢)가 험악해 설악산, 치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천혜의 지형 덕분에 예로부터 월악산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많았다.
지금의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북 문경시 일대를 말하는
중원(中原)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원을 장악하는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유 때문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됐고 몽골 침입 때 월악산 일대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동학농민전쟁 때 관군에 패퇴한 서장옥(전봉준의 스승)이 숨어든 곳도 월악산이었고, 광복 후
빨치산 마지막 잔당들이 최후를 마친 곳도 이곳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산 주변엔 많은 역사적 상흔과 전설이 서려있다
풍수학적으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족시키는 곳이 명당으로 불린다.
그런 면에서 충주호를 끼고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월악산 일대
곳곳은 대부분이 명당 후보지라고 볼 수 있다.
봉우리 높이만 150m. 하늘을 찌를 듯 기운차게 솟아있는
봉우리는 ‘한국의 마테호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또 영봉은 보는 각도에 따라 진안의 마이산처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그래서 ‘네 얼굴을 가진 봉우리’로도 불린다. 북서쪽에서 보면 쫑긋한 토끼귀,
동쪽에서는 쇠뿔, 남쪽에서 보면 거대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보는 듯 하다고 한다.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갈림길(910m:12:53)
사문리(寺門里)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미륵리
방향으로 2㎞쯤 올라가면 신선봉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마을은 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 마을 자리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지금도 절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평평한 봉우리에서 급하게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로프가 있는 철계단으로 내려서고...
다시 망가진 나무 계단...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이정표(784m:13:02)
이정표 월악04-05(←하늘재 8km, 부봉 삼거리 3.4km, →마패봉 0.6km)가 서있다
성터 위를 걸어면서 내려서니 북암문에 도착한다
북암문(北暗門:13:06)
넓은 안부로 내려서는데 이곳이바로 북암문으로 우측으로 동화원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뚜렸히 보인다
동화원(桐華院)은 지금부터 약 500여년前 密陽朴氏가 처음 정착한 이래 30여戶의 民家가 형성되었으며
5~6戶의 客主와 院이 있던 곳으로옛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한잔의 술과 음식으로 즐겨 쉬어가던 곳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동학 봉기 이후 산적들의 출몰에 여러 길손은 이곳 동화원에서 며칠을 쉬면서
큰무리를 이뤄 安全하게 지나다녔던 곳이기도 였다고 한다.
옛 院은 통상 하루 보행길 參拾里 간격으로 있었으나(新東國與地勝覽),
이곳 문경새재는 조령원(3.5Km)ㅡ>동화원(3.5Km)ㅡ>신혜원(3.5Km)으로 십리(拾里)마다 院이 있었는데,
이는 이곳 문경새재가 운송및 지리적 여건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산적들의 횡포에도 그 영향이 있었다 한다.
또한 동화원은 교통취락 成立에 경제적인 배경에 依한, 驛, 院, 渡, 中의 一部로서
시장 취락형태의 店, 幕, 酒家, 客主, 旅閣을 형성하고 있었던 곳이다
다시 성터를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756m봉(13:08)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멋쟁이 스타 소나무가 나온다
스타소나무(13:10)
이정표(734m:13:12)
졸음이 쏟아지고... 오늘도 이 나무에 걸려 된통 넘어진다
계명지맥 분기봉(13:17)
계명지맥 (鷄鳴枝脈)개념도
계명지맥 (鷄鳴枝脈)은 백두대간 마역봉(마패봉) 동쪽 1.2km지점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지릅재.
북바위산(779m).망대봉(730m).대미산(680.8m).발치.남산(636.1m).마지막재.계명산(775m)을 지나
달천이 남한강에 합수하는 충주시 탄금대교 앞에서 부용지맥을 마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36.4km되는
산줄기로 달천의 좌측 분수령이 된다.
이대장 요즘 존일 많이 하는구먼
70년도 넘은 일제 강점기의 대동아 전쟁 무렵 일본은 전쟁 물자가 모자라자
우리나라 산하의 소나무에 흉터를 내면서 송진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그 아픔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간길...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년동안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은 어떠한가
주변국들에 사죄는 커녕 갖은 망발을 일삼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라는
자는 반성은 커녕 또다시 군국주의 부활은 꿈꾸고 있으니...그런데도 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정치인들은 아직도 자기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안부(13:22)
안부에서 올라와 족보도 없는 봉우리에 오른다
이정표(월악 04-07: →마패봉 1.6km, ←부봉 2.4km, 하늘재 7.0km)를 지난다
묘지(13:24)
이곳은 월악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지역인데 말뚝에는 “내무부”란 표시가 되어 있는걸로 봐서는 80년대 이전의 것이다
764m봉(13:30)
아무런 표시도 없는 봉우리가 트랭글앱에서는 모봉이라고 알려준다
4년전 남진길에 있었던 모봉이라고 써 논 돌멩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764m봉에서 3분정도 지나니 길 가운데 삼각점이 보이는데 삼각점은 아닌것 같고 국립공원 표식인 지적도근점인 모양이다
좌측은 나뭇가지 사이로 계속해서 월악산이 보인다
이정표를 지난 다음에 754m봉에 도착한다
754m봉(13:38)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길
능선에 올라서니 오후에 불어대는 심한 바람에 생각보다 상당히 춥다
자꾸만 맘이 급해지긴 하지만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월악산에서 나오는 막차 시간 안에는 하산할 것 같기에...
741m봉(13:45)
이정표(월악 04-09: ←마패봉 2.6km →부봉삼거리 1.4km, 하늘재 6.0km)가 서있다
깃대봉에서부터 조령(조령3관문)을 지나 부봉 삼거리 아래까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조령산성터와 나란히 대간길을 걸어가는데 이곳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다시 산성터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동암문이 있는 느릿골재로 내려선다
동암문(東暗門:14:00)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이었던 이곳 1,500여년 역사가 흐르는 곳으로 동쪽에 있는 암문이라고 해서
동암문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이 한강유역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서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 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城)을 에워싸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동암문이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 이곳에서 부봉, 주흘산 영봉 갈립길을 거치지 않고
평천재까지 등로가 연결되어 있어 가끔 임도파들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한 곳이다
동암문에서 우측 능선의 절개지에는 4년전에 없었던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서 편하게 오른다
다시 능선에 올랐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낙엽이 수북히 쌓인 등로로 올라서니 부봉 삼거리가 나온다
부봉 삼거리(848m:14:15)
부봉에 오르는 길도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빈 몸으로 부봉 정상으로 향한다
부봉에서 바라본 주흘산 능선의 모습
오늘 날머리가 포암산 아랫쪽인데 아무래도 부지런히 걸어야 할 듯 싶다
암릉구간을 통과하여 부봉 정상에 올라서니 여전히 무명묘지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부봉(釜峰:917m:14:27))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주흘산의 제2 봉우리로
정상엔 무명묘지 한 기가 있으며, 주흘산에서 보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가마솥(부:釜)봉이라고
붙혀진 지명이란다...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뒤의 암산으로 6개의 봉우리중 제2봉인 부봉(917m)가
가장 높으며 좌측으로 동화원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백두대간에서 500m 떨어진 부봉을 제1봉이라 하고 높이는 917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다음 차례대로 이어져 조곡관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봉이 제6봉이다.
제2봉은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이고 사자바위가
있는 제6봉이 916m이다. 우리들이 부봉이라고 흔히 부르는 봉이 제1봉이다.
2봉이 가장 높지만 백두대간과의 관계 때문일 것으로 본다
다시 부봉삼거리(14:34)
부봉삼거리로 되돌아와서 다시 베낭을 메고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는데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철계단을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뒤돌아 본 부봉의 모습(맨 좌측)
암릉 사이를 곡예하듯이 걷는다
우측 문경새재로 이어지는 계곡 너머로는 오전에 지나온 신선암봉이 보인다
조망봉(14:40)
904m봉(14:50)
904m봉 이정표(월악04-13:←하늘재4.0km, →부봉삼거리 0.6km, 마패봉 4.6km)
나뭇가지 사이로 주흘산 영봉이 살짝 보인다
아직까지 겨우사리 철이 아닌데...
일몰 시간이 다가오는지 바람이 세차다... 능선에 올라서니 주흘산 갈림길이 나온다
947m봉(15:00)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주흘산 능선으로 이어지고 대간길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이정표(마패봉5.0km 부봉삼거리1.0km → 하늘재3.6km↓)가 있다
아찔할 정도의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철계단을 내려서니 낙엽이 푹신한 길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미끄럽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사면길로 내려서는데 이곳은 음지에다 땅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평천재(平天峙:15:15)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에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잇는 고개로
월항재라고도 부르면 탄항산과 부봉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은 대간 산꾼들보다는 봄에 산나물 채취꾼들에게 알려진 고개이다
평천재의 고개 이름이 달목재(동쪽의 평천리에 월항마을 달메기말=달목말이 있다).
탄항재(炭項재), 숯목재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문경읍 평천리 월항마을쪽에서 평천재-동암문을 걸처 서쪽의 동화원과
조령으로 이어지고, 북쪽의 미륵리와 수안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무명봉으로 올라섰다가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831m봉(15:23)
이정표(월악04-16: ←하늘재 2.7km, →마퍠봉 5.9km, 부봉삼거리 1.9km)
암릉구간을 지나 빠른 속도로 산행을 하는데 자꾸만 기온이 내려가 춥기 시작한다
무명봉을 지나고...
후배산꾼들의 영역표시를 만난 다음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
탄항산(炭項山:856m:15:40)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월항삼봉(月項三峰)이라고도 부르며 월악산국립공원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 마의태자 의 전설이 깃든 미륵사지와 고대 삼국시대부터 호서와 영남을
잇는 하늘재를 감싸고 있는 아기자기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삼봉이라 부르나 예전에 산삼이
많이 난다 하여 삼봉(蔘峰)이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탄항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산 남쪽 월항마을 사람들은 봉화봉이라고 부르기도 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에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었던 탄항산은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 탄항산으로바로잡아 놓아 지금까지 탄항산으로 불리고 있다
남북으로 수려한 부봉과 포함산이 웅장하게 서있어 백두대간 종주자들에 의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산 정도에 불과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름드리 장송들과 암봉들은 나름대로
산행의 재미를 만끽해 주기에 충분한 산이다.
정상은 노송과 절벽,괴석 등으로 어우러지고 정남으로 주흘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백두대간상의 하늘재 직전에서 남쪽으로 들어간 계곡이 아름답고, 정상 서편에서
북쪽으로 뻗은 칼바위등길은 너럭바위, 홈바위, 칼바위 등으로 어우러져 스릴 있는 하산 길이다
탄항산 정상에서 미륵리로 하산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804봉(15:50)
이정표(월악4-18:←마패봉7.1km, 부봉삼거리 3,1km →하늘재 1.5km)가 서 있다
너럭바위(15:51)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넓은 너럭바위가 나오고 문경읍 관음리 너머로 운달지맥 능선이 장쾌하게 보인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문경읍 관음리(觀音里)의 모습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관음리는 포암산 아래 위치한 산간마을로 자연마을로는 꼭두바위, 문막, 비바우,
수세골, 중점, 황정모리 등이 있는데 꼭두바위는 뒷산에 있는 바위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문막은 신라에서 고구려로 통행하는 문이 있어 낮에는 개방하고 밤에는 문을 닫아 왕래를 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비바우는 뒷산의 암벽에 흘러내리는 자연수로 인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베를 펴
내건 것과 같이 보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베바우, 포암이라고도 불렀고 수세골은 옛날에 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마을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은 황토로 덮혀 기름진 옥토로 변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곳은 물이씻어준 고을이라고 하여 수세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중점은 조선시대에
옹기 점방이 많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황정모리는 1800년 경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황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立石:15:52)
입석을 지나 사면길로 대간 능선을 이어간다
通天門?
암릉구간을 우회하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苦行
삼각점봉(16:03)
삼각점 표식이 있는 지적도근점이 2개나 있는데 옆면에 내무부란 표시가 된 걸로 봐서 월악산 경계 표시인듯 하다
하늘재가 가까워지는지 등로가 유순해지기 시작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포암산도 가깝게 보인다
뿌리를 드러낸 갈참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니 모래산이 나온다
모래산(沙山:641m:16:10)
등로 아랫쪽에 모래밭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서 모래산이라 지명을 붙인 모양이다
진혁진님의 백두대간 지도상에는 766m봉으로 표기가 되어있는 곳인데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해발 641m’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고도는 641m가 맞는듯 하다
이정표(마패봉8.0km 부봉삼거리4.0km ← 하늘재0.8km→) 가 서있다
모래산 아래에 있는걸 보고 모래산이라 부르는 모양이다...자세히 보니 마사토이다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대간길에는 오미자밭이 점령(?)하고 있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하늘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포암산(布巖山)
포암산은 조령 5악으로 꼽히는 명산으로 인근의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등과 함께 조령5악으로
손꼽히는 포암산(962m)은 월악산국립공원 내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베바우산이라고 하였다... 문경읍에서 갈평리를 지나 관음리로 접어들어 하늘재를 보고
오르면 하늘을 가득 채우며 우뚝 솟은 포암산이 마치 커다란 베를 이어 붙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또한 희게 우뚝 솟은 바위가 껍질을 벗겨 놓은 삼 줄기, 즉 지릅같이 보여서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보이고, 계립산(鷄立山)이라고도 한다
하늘재(525m:16:20)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문경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 가까이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포장을 해 놓았으나 미륵리 쪽은 비포장도로이다.
2001년에 문경시에서 세운 계립령유허비가 있다
하늘재에 내려오니 2쌍의 부부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긋하게 滿秋의 풍경을 즐기고 있다
한 분은 울산에서 오셨다고 하고 한 분은 대구에서 오셨다고 하는데 나이가 나하고 비슷한
연배이시다...자기들은 산행을 온 것이 아니고 어제 수안보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미륵리에
차를 세워놓고 이곳까지 올라 왔다가 다시 내려가려고 하는 중이란다
나를 보고는 어디서 오셨냐고 묻길래 이화령에서 이곳까지 걸어왔다고 하니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음료수와 초코파이를 주신다...허기가 진 참에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난 하늘재 고개로 내려선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산, 대원령(大院嶺)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 4월에 죽령과 조령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大路)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길을 열었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 바로 충주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로서, 삼국시대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및 백제가 함께 중요시 한 지역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지방을 교두보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이 계립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연개소문과 온달장군의 실지(失地)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과 몽고의
차라대가 남하 할 때,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몽진(蒙塵)할 때도 이용했을 가능성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로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이 전한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고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온 계립령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이 영을 넘는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자 이 곳에 유허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
다음 구간에는 조금은 고민이 되는 구간이다
11월1일부터 내년 5월15일까지 경방기간인데 이곳은 월악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지역이라
아무래도 국공파의 제지를 받을것이 분명하여 하늘재 산장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산행을 해 볼
요량으로 쥔장에게 물었더니만 자기들은 겨울에는 민박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막걸리나
한사발 하고 가란다...고민은 해결하지 못하고 막걸리 한사발 얻어 마시고 나온다
감시초소를 지나서 미륵리로 향한다
다음구간 들머리를 확인하고 편안길을 따라서 부지런히 걷는다.
잘하면 17시 15분에 출발하는 동서울행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산길에 김연아를 닮은 소나무도 만난다
이 길은 난생 처음 걸어보는데 국립공원 지역이라서 그런지 아주 편하게 내려온다
부지런히 내려온다가 보니 미륵리(彌勒里) 도로로 내려선다(16:50)
도로 좌측 대광사 방향으로 올라서니 미륵리 3층 석탑이 보인다
미륵리라는 명칭은 충주 미륵대원지에 있는 보물 제96호인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리는 일명 미륵뎅이, 미륵댕이라고도 불리며, 연풍군 고사리면 미륵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가 되었고, 2005년 4월 1일 수안보면 미륵리가 되었다.
지릅재와 하늘재 사이의 계곡 저지대에 형성된 마을로 월악산, 만수산, 포암산, 부봉, 북바위산, 박쥐봉 등이
감싸고 있으며 송계계곡과 만수계곡 등이 있는 월악산국립공원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하늘재, 부봉, 포암산,
월항삼봉, 지릅재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마을의 골짜기를 돌아 북쪽으로 흘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송계계곡을 형성한 뒤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미륵리 3층 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3층 석탑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2층 기단위에 3층의 몸통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중원미륵리 사지 동쪽 200m 떨어진 한적한 곳에 탐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 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층 석탑에서 되돌아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좌측으로 충주 미륵리 원터가 보인다
충주 미륵리 원터(院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院)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초기에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鷄立嶺路:지금의 하늘재)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寺址)가 있는데 이 또한 원(院)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鳥嶺)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回’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馬房)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개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충주 미륵리 원터(院址)
미륵리 원터를 지나서 좌측으로 미륵대원지 방향으로 향한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石造龜趺: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사찰(미륵대원사)의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cm, 높이 180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으로 귀갑문(龜甲汶)은 생략하였으,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로 양각(陽刻)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좌(碑坐)가 있으나 비를 세울 정도는 아니며 수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비석 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원래 비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높이 6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놨다.
바위 안쪽을 파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의 넓이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 층의 체감률(遞減率)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미륵사지는 사적 317호로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죽향으로 펼쳐져 있다.
미륵리 사지(彌勒里寺址)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하늘재를 넘자마자 지세를 확인하고는 지금의 미륵리에 석불을 세워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충주 미륵사지는 청주대학에서 1977년에서 1978년의 제2차 발굴조사를 통해 절의 명칭이 미륵대원사이었음이
밝혔고, 1980년에 이화여대에서 3차 발굴을 통해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다가 소실되어 현재의
석조물만 남았다는 것을 밝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156) 기록에 의하면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 교류하게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강을 통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미륵사지는 14,000평 정도의 직사각형 절터에 일탑일금당이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고,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이다.
또한 미륵사지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충주 미륵 대원지 사각석등(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315호)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각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 4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미륵불은 지금 유물 복원중이라 참배하지 못하고 다시 미륵사지를 빠져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도로에 나와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서는 미륵리 정류장이 어디냐고 물으니 2km 정도 가야 한다고 한다
지금 시간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17시 15분 버스는 타기가 힘들것 같아 18시 15분 버스를 탈 요량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뒤에 RV 차량 한대가 빵빵거린다
차를 세우고 문을 열더니 ‘선생님 또 만났네요’ 하면서 타라고 하는게 아닌가
조금전 하늘재에서 만난 나와 비슷한 연배인 대구에서 오신 분이 연풍I.C로
가는 중인데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 주겠다고 해놓고 수안보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태워주고는 잘 가라고 하시면서 가신다...오늘은 이래저래 신세만 진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고는 하나...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문경새재에서 파전과 막걸리를 사준 솔이 아부지, 하늘재에서 초코파이를 주신
울산아저씨, 수안보까지 차를 태워주신 대구 선생님...다들 복받을깁니다
수안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17시 27분...이곳에서 동서울가는 버스가 17시 40분에 있단다
배는 고프고... 터미널 옆 분식집에서 가락국수(3000원) 하나 시켜놓고 화장실로 가서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국수를 먹고 나오니 버스가 도착한다
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인가 보다... 마치 양넘 지갑줏은 기분이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고 일어나니 버스는 올림픽대로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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