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山이란 스승에게 過猶不及이란 의미를 배운다
☞ 산행일자: 2020년 01월 17일~18일 무박 산행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강한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11.3km + 날머리 3.7km / 9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알파산악회 쉬대장의 꼬임에 빠져서
☞ 산행코스: 늘재-의자바위?-750m봉-정국기원단-870m봉-조망바위-청화산
도석재갈림길-안부-895m봉-조망바위-858m봉-801m봉-갓바위재
암봉-암봉-암봉-조항산-의상저수지 갈림길-삼송마을 갈림길-고모치
둔덕산 갈림길-안부-854m봉-안부-집채바위-안부-밀재-월영대
용추-무당소-대야산 주차장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북면 / 문경시 농암면, 가은읍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매주 지맥길에 나서지만 나혼자이다...그러다보니 늘 그리운게 사람이다.
그렇다고 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지맥길을 나서기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대간 산꾼들도 그렇지만 지맥 산꾼들은 대간 산꾼들은 게임이 안 될 정도로 무지막지 하다.
그 분들의 목적은 몇km를 몇시간만에 끝냈느냐가 중요하기에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다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한때 범여도 그런 부류에 들었지만 1년반 전에 건강검진을 받다가 흉선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아 좌측의 폐를 절개하는 큰 수술을 받은 이후에 몸뚱아리는 완전히 맛이 가버렸고, 그러다보니
산행 속도가 나질않아 남에게 민폐가 될까봐서 늘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한다.
2019년도에 80여번의 산행을 했지만 95%이상이 나홀로 산행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가입되어 있는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대장인 쉬 영감탱이가 늘재~버리미기재 구간의
공지가 뜨기에 3번의 백두대간길에 이 구간을 해외 골프투어를 가는 바람에 빼먹어서 따라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남에게 민폐가 될까봐서 산행 속도를 물어봤더니 여기는 산행 실력이 완전히
패잔병(?) 수준이라면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면서 꼬시는 바람에 OK하고 회비를 입금 시켰다.
이번주는 현장의 일이 밀리는 바람에 저녁 늦게까지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와서 베낭을 챙기는데
상당히 피곤하여 가지말고 낼 저녁에 맥길을 떠날까 생각을 해본다.
이런 컨디션으로 아무래도 다른 산꾼들에게 민폐일 것 같아 엄청난 갈등끝에 약속은 약속인데
가다가 안되면 중탈을 하지 뭐 생각을 하고...
집에서도 피곤한데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내 꼬라지를 알 길에 이내 체념을 한다.
밤 12시에 사당동에서 산악회 버스에 탑승하여 2번의 휴게소에 들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들머리인 늘재에 도착하니 온 주위가 컴컴하고 하늘에 떠 있는 하현달만 산꾼을 반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2104년 7월 13일 2반째 백두대간 남진길에 이곳을 왔으니 정확하게 5년 7여개월만에 다시 왔다
늘재(371m:03:30)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용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번 국도가 지난다.
늘재란 고개 위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붙어진 지명으로 또 다른 표현은 양쪽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완만하여 ‘늘어진 고개’라 하여 늘티,늘고개,늘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중심으로 민초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역을 나누고, 물줄기가
갈라지는 고개이기에 어느 높은 고개 못지않고크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가올땐 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한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분수령이다
늘재에 내려서면서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동시에 바뀐다.
북쪽인 충북쪽은 보은군에서 괴산군으로 바뀌고 남쪽은 백두대간 중에 67km를 지나는 상주지역이 끝나고
백두대간이 거쳐가는 33개 시.군중에서 대간길이 장장 116km가 걸쳐있는 문경지역으로 접어드는 시작점이
이곳 늘재이다
야심한 새벽에 버스에서 내리니 날씨는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는 편이다
고개 우측에는 상주시에서 설치한 ‘白頭大幹’이 서 있고 뒷면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남 김 시빈 선생의 속리산이란 詩가 있는데 후레쉬가 약한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인지 카메라 앵글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다.
늘재에서 만난 백두대간비 딋면...2014년 7월 13일(2차 대간때의 사진)
백두대간 큰 산맥이 동으로 뻗어와서, 금강산 먼저서고 속리산 뒤에섰네
미륵관음 양봉높아 자비세계 너그럽고, 충청, 경상도의 경계한 산 장엄하도나
늘재 성황당(城隍堂)
블루베리 밭너머에 늘재 성황당이 보인다
성황당에 들려 오늘의 무사산행의 기원의 빌어본다
예전과는 달리 성황당 문은 열려있지만 제단같은 것은 없고 나무 벽면에 아둔한 범여로선
알 길이 없는 그림 한장에 글씨가 쓰여 있을 뿐이다...성황당 앞에는 오석(烏石)의 유래비가 있다
성황당 유래비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은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 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 신앙으로 승화되어 당(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이러한 유서를 지닌 신당이므로 그 위치가 환경유적과 사실(史實)이 찬연하다
이를 개관하면 이 늘재는 낙한(落漢) 양대강의 분수령이다.
강의 원류를 따라 개통된 도로는 동남으로 영호남 서북으로 충청도와 서울로
통하는 장정(長程)의 깃점이며 고대의 라제(羅濟)의 국경으로 각축지대라
견훤산성이 축성되었고 근세에는 정기룡(鄭起龍)장군의 임란전첩지가 용화동에
있으며 세조대왕께서 백관과 함께 노니신 문장대와 용화온천을 비롯하여
고승(高僧)과 명장(名將)이 수련한 유적이 있다.
특히 한말 경술국치후에 의사(義士)들이 창의하고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통로가 되고
쉼터이며 도창의 대장 이강년(李康年) 선생의 묘소가 지척에 있다.
그리고 때맞추어 늘티에 전상석(全相錫) 처사가 우국일념으로 이 성황당을 창건하여
동민과 함께 지성기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백여년이 지난 이제 그의 증손 충환(充渙)이
유지를 받들고 이상배(李相培) 국회의원과 김근수(金瑾洙) 상주시장이 산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堂)을 중창하여 선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수범하고 후진의 교육장이 되게
하여 백두대간의 영기(靈氣)를 실감나게 하였다. 이에 그간의 유래의 유래와 성황당 중창의
경위를 약기하여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산행을 시작하다(03:45)
오랫만에 무박 산행을 해본다
쉬 영감탱이가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면서 화이팅을 외치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독립군(나홀로 산행)의 체질이 習에 베인 범여로서는 모든게 어색하기만 하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쉬 영감의 말과는 달리 산꾼들은 어둠속에 사라져 버린다.
산행 시작 10분만에 산꾼들은 내 시야에 벗어나고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가뿐 숨을
몰아쉬며 발길은 자꾸만 느려지는데 후미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님이 내 뒤를
따라서 오는데 내가 불편하여 먼저 가시라고 하는데도 내 후위무사로 나를 챙기는데
고맙기도 하고 엄청 미안기만 하다...초반부터 민폐를 끼친다
의자바위?(04:05)
늘재에서 어둠속에 올막길에 오르는데 예전과는 달리 길이 많이 변해 버렸다.
우회길을 많이 만들어 논 탓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능선에 올라서니 늘재에서와는 달리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얼마나 추운지 손가락이 빠지는 느낌이다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를 만나는데 계속되는 손은 계속 시리고 오르막길에
자꾸 뒤쳐지는 범여를 조금 앞에가는 후미대장님께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를 기다리는 렌턴 불빛이 보인다
750m봉(04:12)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되는데 오르막 능선 저 윗쪽에는
앞서가는 헤드렌턴 불빛이 보이는데 내가 처져도 너무 처진 느낌이다.
속력을 내보려 했지만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산행을 따라 나선 탓인지
예전과는 달리 발걸음은 무겁고 수술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기에
미칠것만 같다...쉬영감탱이한테 완전히 사기를 당한 느낌이다.
패잔병이 아닌 특전사 동계훈련을 나온 병사처럼 빠르고 날렵하기만 하다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자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태껏 나홀로 잘 다니고 있었잖은가.
찢어지는 듯한 수술부위의 고통도. 내가 감내하고 이겨내야 할 부분이니...
이것도 수행이고 방편이라 생각하며 내 방식대로 천천히 청화산으로 향한다.
우회길을 따라서 올라가니 정국기원단이 좌측으로 보인다
정국기원단(精國祈願壇:04:18)
碑文엔“白頭大幹 中興地” 등의 글구가 새겨져 있고 돌로만든 커다란 향로 2개가 양쪽으로 서 있다.
정국(精國)이란 용어는 조용하고 편안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백두대간 중원지라 한 것은 남한에서 동서남북의 정중간의 뜻이 아닐까
또한 백의민족 성지 부실기조 삼파수(白衣民族 聖地 不失基祖 三巴水)라 적혀있다.
부실기조란 백의민족인 우리 조상들의 얼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며 삼파수란 세갈래의 물줄기 근원지란
뜻으로 민족 뿌리의 성지란 뜻이란다
정국기원단은 나라를 평안하게 해달라는 기원단과 의병장 이강년장군(李康秊:1859~1908)의
공덕비를 겸하고 있는데 문경시 가은읍 출신인 이 강년장군은 조선말기 의병장으로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을
하고 낙향하였다.
1885년 명성왕후 민비가 시해되자 1896년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효수(梟首)하고 제천의 의병장 유인석(柳麟錫)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어 문경새재,
조령 등에서 1907년 한.일 신협약으로 조선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단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주 등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싸릿재 유치(柚峙), 죽령 등에서 전과를 올리며 북진을 하여 1908년 가평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국기원단을 향해 마음의 예를 올리고 다시 청화산을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암릉 사이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기는 하나 예전에 없던 로프가 있어 조금은 낫다
870m봉(04:37)
오르막으로 오를수록 바람의 세기는 거세어지는데 안면과 코는 마비되는 느낌이고 손가락은
빠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안면 마스크를 써니 안경에 성애가 끼어 앞이 보이질 않는다.
너무 추워 괜히 대간길을 따라 나섰다는 후회가 막심하다...남쪽 지방의 지맥길에는 벌써 복수초와
바람꽃, 노루귀가 피기 시작하다던데...그리로 갈껄.
로프에 몸뚱아리에 의지한 채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후미대장님께서 나를 기다린다
조망바위(17:03)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북면쪽의 새벽풍경
아직끼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하다...바람이 드세나 공기는 아주 상쾌하다
하나를 잃어면 하나를 얻는법...추위에 엄청 힘이들긴 하나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상쾌한 대간길의 맑은 공기...이 맛에 산에 미치는 건 아닌지
다시 능선을 한번 치고 오르니 어둠속에 청화산 직전에 있는 헬기장이 나온다.
청화산 아래에 도착하니 좌측의 괴산 청천면에 위치한 청화산 농원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먼저 도착한 후미대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증샷을 남겨준다.
이렇게 바람이 거셀때는 잠깐만 서 있어도 엄청나게 추우실텐데...
어둠속에 청화산 정상에 올라선다
청화산(靑華山:984m:05:28)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농암면,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죽군락과
소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앞,뒤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곳이다
청화산은 원래 북쪽 골짜기 산아래 청운동 마을과 남쪽 방향의 신화동 마을 동쪽으로 화실이란
마을이 있어 자연스럽게 화산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 중환이 스스로의 호를 ‘靑華山人’으로
불리면서 청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으로 불리우는 이중환은 중기 인문지리서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택리지의 저자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데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은 약 1,000년전 고려의 건국이념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지리적 개념으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이가 이 중환이라고 한다
이 중환이 탄복을 했다는 청화산 정상
그러나 凡夫인 범여가 보기에는 그저 밋밋한 산에 불과하고 그나마 정상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봉우리에 불과할 뿐일것 같은데... 仙人과 凡夫의 차이인가?
청화산을 지나면서 눈이 내린게 얼었다 녹았다가 하면서 등로는 빙판길이 되어 버렸다.
어쩔수 없이 베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착용을 하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굉장히 미끄럽다
저 건너편 산 능선에는 앞서가는 산꾼들의 렌턴빛이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뭘 그리 급할까.
산을 누가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산꾼들만 마음급한 조급증 환자인가
대간길이라도 죽기 살기가 아닌 좀 느긋하게 가면 안 될까...조금만 내려놓으면 되고 왔던 길을
한번만 뒤돌아 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터인데...무거운 짐 내려놓고 여유를 가집시다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은 암릉구간을 오르 내리면서 걷다보니 도석재 갈림길이 나온다
도석재 갈림길(976m:05:47)
늘재부터 이곳까지는 백두대간과 십승지 우복동구간이 겹쳐지는 등로이다.
우복동(牛腹洞)은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병풍바위에 막혀있고 북쪽은 백두대간 고개인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 역시 백두대간 상에 있는 고개인 갈령을 넘어야 상주로 갈 수 있다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통로인 동쪽인 문경가는 길은 가파란 벼랑이 있는 쌍룡계곡이 있다
예전부터 접근조차 하기 힘든 아주 깊은 골짜기의 마을이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떨어지는데 엄청난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빙판이라 조심스럽다
이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게 살 수 있다하여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소의 배 안처럼 생겼다는 우복동(牛腹洞)은 흉년, 전쟁, 전염병의 삼재(三災)가 들지 않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없이 좋다하여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의 명칭은 호리병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지형을 닮아 붙혀진 지명으로
조선 숙종(19대) 때 청담 이중환 선생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 하여 ‘우복동’이라 불리며 이 중환 선생의 호가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淸華山人)이라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우복동천(牛腹洞川)’이란 명칭은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우복동 중심 용유동 길가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洞天’이라 새긴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동천이라는 뜻은 하늘의 동네라는 의미일진데 민초들의 이상향인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 없어
양 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洞天’이라고만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제들도
우복동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그의 저서
다산산문집에 수록된 ‘우복동가(牛腹洞家)’라는 싯구에 은유적으로 꼬집어 놓았다고 한다
우복동천 환종주 개념도...사진 펌
우복동천(牛腹東川) 십승지는 조선시대 예언서인 격암유록(格菴遺錄)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菴十勝地論)를
저술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 때(1509∼1571)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통한 사람이었다)와
鄭鑑錄(조선 중기 이후 백성들 속에 유포된,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에 관하여 풍수지리에 입각한 예언서로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의 문답을 기록한 책이라 하나 이본이 많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등에서 유래하여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에 의해 정리된 십승지 중 한 곳으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일대 병천(川)의 물줄기를
감싸고 있는 원형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병천(쌍룡계곡)의 수문이라 할 수 있는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쌍룡마을(내서3교)을 기점으로
시루봉. 청화산. 늘재, 문장대. 천왕봉. 형제봉. 갈령. 도장산. 사우정을 지나 내서3교로 원점회귀하는
환종주 거리가 37km에 이른다.
안부(06:24)
895m봉(06:33)
조망바위(09:48)
날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조망바위에서 안부로 떨어진 다음에 곧추선 858m봉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지금의 대간길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보이질 않고 좌측의 사면길로 만들어
놨다는데 조금을 더 가니 또 다른 조망바위가 나온다
사면길로 올라가니 예전에 858m봉으로 오르는 능선이 보인다
858m봉(07:15)
이곳이 실질적인 858m봉으로 봐야겠다
이제는 사물이 인지될 정도로 날은 밝아지고 앞서가던 후미대장님도 안심이 됐는지
빠르게 가버리고 나홀로 호젓하게 걸어가는데 맘이 홀가분하다...고마웠습니다
날이 밝으니 눈에 쌓인 청화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올해 처음으로 눈다운 눈을 본다.
3주전에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도 눈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반갑기만 하다
청화산에서 이어지는 의상골 아래에는 커다란 의상저수지가 보인다
858m봉에서 바라본 청화산과 우복동천 십승지의 능선
4년정도면 162지맥길이 끝날 것 같고, 그 이후로 제1십승지였던 영주 풍기로 이어지는
금계곡 십승지를 마친 이후로 중단한 십승지를 다시 걸어볼 생각이고, 다시 저 능선을
걸어야 하는데 걸어갈 날이 있겠지...
유토피아(Utopia), 상그릴라(Shangri-La)라고도 불리는 이상향(理想鄕)의 땅이 십승지(十勝地)이다.
십승지(十勝之)는 예언의 땅으로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이다.
조선시대 평범한 민초들이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흉년과 홍수로 굶어 죽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이 개죽음을 당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비결(秘訣)을 탄생시켰다.
비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법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비결서가 <정감록>이다.
십승지는 이러한 비결에서 유래되었다.
<정감록>은 가장 널리 십승지를 알린 비결서다. 역사적 격동기에는 수많은 백성이 십승지에
나타난 예언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의 심층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우복동(牛腹洞)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로 상주 속리산 동편에 숨어 있다고 전해진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백성들은 물론 몰락한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약용의 <다신시문집> 제18권 ‘증언(贈言)- 다산이 제생(諸生)에게 주는 말’에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단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빛이 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중략----
- 정약용 ‘우복동가(牛腹洞歌)’ 중에서...
남쪽으로는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가 보인다
궁기리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이 활을쏘고 무술을 연마하며 야망을 키웠던 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 궁기(宮基)는 우리말로 궁터라는 뜻으로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서 궁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킨데서 유래된 지명이며 이터골, 옛터골, 궁터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초 문경현의 자료에는 궁기리라는 지명은 없고 고모리가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모리와 마암리(馬巖里) 일부를 병합해 농암면으로 편입시켰다고 한다
문경 가은읍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태어난 고향답게 견훤의 전설이 많은 고향이다
농암면 궁기리는 견훤이 군사를 모아놓고 훈련을 하던 곳이라 했고 궁기리 아랫마을에 있는
말바위는 견훤이 야생마를 길들여 천하의 명마를 만들어 타던 중 활과 말이 누가 빠른가를
내기 하였는데 아차산으로 활을 쏘고 말을 달려 말이 졌다는 성급한 생각으로 말의 목을치니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가야할 조항산과 둔덕산도 시원스레 보이나 미세먼지로 인해 깨끗하지는 않다
조항산 너머로 보이는 둔덕산(屯德山 :970m)이 보인다
둔덕산(屯德山 :970m)은 문경시 가은읍과 농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과 조금전 정국기원단에서 만난 의병대장 이강년의 고향이 둔덕산 아래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대야산(931m)과 조항산(951m) 사이에서 동쪽으로 솟아 있으며 암벽 능선이
아름다운 곳으로, 수림이 울창하나 부근의 대야산과 희양산의 명성에 가려 있어 찾는 사람이 드물다.
산 아래에는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은 선유구곡(仙遊九曲)으로 유명한 선유동계곡이 있는데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선유동이라 불렀다.
둔덕산 아래 가은읍 갈전리는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의 고향으로 가은읍과 농암면 일대에는
견훤과 연관된 금하굴·마암궁터·견훤산성이 전한다.
특히 둔덕산은 운강 이강년과 관련이 있다.
이강년은 한말에 전국도창의대장으로서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였으며13년간 경상도·충청도·강원도에
걸쳐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순국하였다. 1858년 12월 30일 가은읍 완장리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기
3일 전부터 둔덕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는데 이강년이 태어나자 울음이 그쳤다고 전한다.
801m봉(07:21)
다시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서 갓바위재로 내려간다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의 모습
갓바위재(769m:07:38)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갓바위란 지명은 조항산의
한 봉우리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하며 지나온 청화산과 가야 할 조항산 사이에 있으며 고모치가
삼송리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삼송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 농암면 소재지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갓바위재보다는 고모치를 주로 많이 이용했는데 고모치는 지금 대간 산꾼이나 이용하는 고개이고
이곳 갓바위재는 의상저수지에서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의 발걸음으로 등로는 뚜렸하다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드세다
오르막길로 우회길을 만들어 놨는지 예전에 있었던 헬기장을 만나지 못했다.
암봉(07:52)
암봉에서 바라본 궁기리와 우복동천(牛腹洞川) 십승지 능선에 있는 시루봉의 모습
지난해 11월에 걸었던 이안(작약) 지맥 능선이 미세먼지속에 묻혀 버렸다
가야할 조항산과 갓바위봉이 보인다
어차피 앞서간 동료산꾼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기는 어렵겠다
등로에는 바람이 불지않아 이곳에서 혼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휴식중에 불알친구한테서 카톡이 온다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열심히 살아셔서 후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신 선배님께서 영면하셨단다
마음이 착잡하다...이제 막 70이 넘어셨는데...올라가서 조문이라도 해야겠다
구름속에 해는 저만치 올라와 버렸다
암봉(08:10)
지나온 청화산과 속리산 능선이 몽환적 분위기로 다가온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 략.....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반자들 속에 끼면 쉬거나 머무르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된다.
그러니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 략.....
불교경전 '숫타니파타' 중에서
암봉에서 바라본 군자산을 비롯한 괴산의 山群들
조항산이 점점 가까워진다
암봉(08:50)
암봉에서 로프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다시 조항산으로 오르는 힘든 여정
힘든 여정끝에 조항산 정상에 올라서니 강한 바람이 소걸음(牛步)의 범여를 격하게 환영한다
조항산(鳥項山:953.6m:08:50)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와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안내판과 문경시에서 설치한 앙증맞은 정상석이 있으며 궁기리쪽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괴산 35산중의 하나이기도 한 멋진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맞은편의 둔덕산 갈림길에 있는 마귀할멈 통시바위에서 바라보면 갓바위봉이 새의 부리로,
조항산이 새의 목덜미로 보이는 지세라 조항산(鳥項山)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하면 옛날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홍수 때 이곳 정상이 물에 떠있는 새의 목덜미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주민들은 옛부터 이곳 조항산을 갓바위봉이라고 부른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로 잠겼을 때 정상 꼭대기만 ‘갓(冠帽)’만큼
물 위에 나와 있었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란다
또한 궁기리에서 이 산을 바라볼 때 정상이 M자형으로 봉우리가 두개로 보인다고 한다
실제 봉우리중 좌측 봉우리가 갓바위봉보다 낮게 보인다고 한다
우측으로 정상보다 높게 보이는 암봉을 갓바위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구한말 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조선지형도」에는 현재와
같은 지명이 표기가 되어있다
조항산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의 모습
대야산이 시야에 들어오건만 현재의 내 컨디션과 암릉구간의 결빙 상태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밀재에서 중탈을 해야만 동료산꾼들에게 민폐를 덜 끼칠것 같은 생각이다
그래! 조금 더 가면 어떻고 덜 가면 어떠랴...산은 늘 거기에 있는데...
미세먼지는 약간 있으나 차가운 날씨에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숨쉬기가 훨씬 수월하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으로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은 많으니까
빨리 집에 가야겠다
황지우님의 詩 ‘겨울산’
조항산에서의 급경사 내리막길은 얼어있어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의상 저수지 갈림길(09:15)
아이젠을 착용해서 그런지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양지에는 다행히 눈은 보이지 않고....
패잔병 수준이라 해놓고 도망간 쉬영감탱이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밥은 먹었냐고 전화가 온다.
눈물나게 고맙구먼...밥은 진작에 먹었고...걸음이 느려서 그렇지 할 짓은 다하고 가는 중입네다
삼송마을 갈림길(10:35)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삼송리(三松里)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소나무 세그루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삼송이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자연마을로 의상, 큰말, 늑골 등이 있다.
의상골(송상골)은 송상리에 있는 마을로 옛날 신라때 의상대사가 인도하여 붙은 이름이다.
큰말은 의상골 밑에 있는 마을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늑골은 송상리 북쪽에 있으며 지형이 소의 굴레를 씌운 모양과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천연기념물로 왕소나무가 있는데 높이 약 12.5m, 수간둘레 4.7m에 이르는 노거수로
일명 ´왕소나무´라고 불리며, 또는 밑에서 끝까지 꼬면서 올라간 줄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듯 보인다 하여 ´용송(龍松)이라고도 불린다. 1980년대까지 성황제를 지내던 신목이 있다.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가니 동료산꾼들이 아침만찬을 끝내고 정리중이다
고모치(古毛峙:11:15)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바로 아래에는 고모샘이라는
샘이 있고 고개 가운데에 민초들의 애환이 담긴듯한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다.
고모치의 어원은 고치, 고치령, 고모령, 곰치, 고모치, 고미재 등이 있는데 이 중에 고치나 고치령은
‘높고 험하다’는 뜻으로 고치(高峙)의 개념으로 쓰이고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은 곰고개 또는
곰의 고개라는 개념으로 분류되어 웅치(熊峙)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로 아래에 있는 샘터에는 결빙되어 버려 석간수 한모금을 마시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고모치의 전설
옛날 농암면 궁기리에 사는 고모가 고개너머 청천면 삼송리의 조카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되돌아 가는데 때는 겨울철이라 마침 폭설이 엄청나게 내리고 추운 날씨였다
고모가 떠나고 폭설이 내리자 조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늦은 밤길과 추운 날씨속에 재를 넘어간
고모가 걱정이 되어 고개길로 뒤따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모는 고개마루 성황당 근처에서 탈진한 상태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조카는 고모를 부축하여 함께 고개를 내려가려고 시도했으나 심한 폭설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둘 다 얼어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항산에서 둔덕산 갈림봉 구간은 V자형 능선이라 급경사의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구간이다
범여는 이런 곳이 완전 쥐약 구간이다
뒤돌아 본 조항산의 모습
빡세게 능선으로 오르는데 식사를 마친 산꾼들은 다 도망(?)을 가고 나혼자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몇번을 선 채로 쉬다 가다를 반복한다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힘들어하는 범여를 격려하는 듯...
능선 우측으로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마귀할멈 통시바위와 손녀마귀 통시바위가 보인다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둔덕산 갈림봉이 나온다
둔덕산 갈림길(10:28)
우측으로 그리 멀지않은 곳에 마귀할멈 통시바위까지 같다올까 생각을 하다가 포기한다
이곳은 예전과 달리 사면길을 많이 만들어 놨다
등로에서 바라본 마귀할멈 통시바위와 손녀마귀 통시바위
'통시'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변소" 즉 화장실을 뜻하는 단어로 우리나라
전래 설화에 의하면 거인이 용변을 보면 그 물은 홍수를 일으키고 또한 강을 만든다.
마귀할미 통시바위를 조금 더 지나면 손녀마귀 통시바위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북으로 흘러 용추골과 만나는 가마소의 깊고 푸른물이 대골 계곡을 만들어 월영대로
들어가는 물이 마귀할멈의 쉬~~~이(오줌)란 말인가? .
안부(10:35)
안부에서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 무명봉으로 가던 길은 우측 사면길로 대간길이 바뀌어 버렸다
범여가 힘드는 줄 알고 바뀌었나?
산행후에 안 것이지만 예전엔 속리산 국립공원이 밤티재까지 였는데
지금은 대야산 너머 버리미기재까지 확대를 해 놓았어서 그런지
길을 자기 맘대로 돌려 놔버린 모양이다...이것도 국공파들의 행정편의주의인가.
겨우사리... 저 넘들은 왜 저리 높이 매달려 있는거야...입맛만 다신다
854m봉(10:47)
854m봉에서 내려서니...
너럭바위위에 외롭게 대간길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왜그리도 안쓰러운지?
좌측으로는 속리산에서 뻗어나온 충북알프스 능선이 보이는데 맨 좌측은
관음봉인듯 하고 그 너머로 아련히 보이는게 묘봉과 상학봉쯤일 듯 싶다
둥그스럼한 큰 바위가 나오는데 마치 왕릉처럼 보인다
안부(10:55)
암릉길 사이의 좁은 등로로 걷는데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이곳에서 사면길이 아닌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가면 지도상의 849봉 정상인데
이곳 역시 산 옆구리의 사면길로 등로를 만들어 놨다...지맥꾼들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간꾼들은 참으로 착한 모양이다
집채바위(11:05)
빙판이 된 등로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고도를 낮춘다
무명봉 능선을 넘어서고...
올해 처음으로 눈을 밟아보는 初雪 산행을 하는 셈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대야산을 땅겨본다.
아무래도 오늘의 내 체력으로는 저 산을 넘기는 무리일 듯 싶다
미끄러운 낙엽길을 내려가는데 쉬 영감한테서 전화가 온다.
지금 어디냐고?...자기가 손가락이 아파서 밀재에서 탈출하려고 한다면서
밀재에 있는데 나보고 우짤끼냐고 묻는다...같이 탈출하자는거야 뭐여...
책바위?
안부(11:30)
다시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가서...
암릉구간으로 내려서니...밀재가 보인다.
밀재(蜜峙:662m:11:38)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계곡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화양계곡 농바위골을 잇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나무가 우거져 밀림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려면 밀림을 헤치고 가야한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원래는 밀목령(密木嶺)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측의 문경쪽은 유명한 용추계곡에 월영대, 용추, 무당소로 이어지는 멋진 선유동 계곡이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에 이정표가 잘되어 있으나 괴산쪽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놨다.
예전에 없었던 국공파들의 안내판이 많이 보인다.
국공파들은 뭣이던지 하지마라, 가지마라...벌금을 매긴다
민초들의 祿을 먹고 사는 자들이 뭐 저리 갑질을 하는지...
대간꾼들을 어린애로 취급하나...맨날 훈계야!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
언제쯤 저 그늘에서 벗어나 맘 편히 대간길 한번 더 걷는게 소원이다
그래 더러워서 대야산으로 안가고 이곳에서 탈출할란다.
이 영감탱이를 수배합니다.
죄 명: 산꾼을 甘言利說로 기망한 죄.
인상착의: 대개 못 생겼음.
활동지역: 금요일 저녁 자정경에 사당역 10번 출구에 가끔 출몰함
이 영감탱이를 보신분은 말죽거리 관아로 연락바람
인증샷
밀재에서 쉬영감을 만나서 용추계곡으로 내려간다
중탈자의 발걸음...왜 그리도 側隱之心이 드는지
내가 너무 미워했나?
부처님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래골의 물이 보이기 사작한다
웬 철천지 웬수라고 저렇게 힘들게 사는지?
고릴라 바위?(12:10)
등로옆에 멋진 기암이 있는데 생긴건 고릴라처럼 생겼는데 지명을 알 길이 없다
내리막 등로는 참으로 지루하다
월영대(月影臺:12:24)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높이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을 흐르는 맑디 맑은 물 위에
어리는 달빛이 아름답게 드리운다 하여 월영대라고 한다
월영대 안내판
월영대에서 쉬 영감
밀재에서 둘이서 중탈자의 아픔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면서 내려간다.
산에서 만난 산꾼들은 늘 일상으로 돌아가면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내가 쉬영감을 안 지가 10여년정도 되었는데도 서로 아는게 없다.
엄격하게 말하면 서로가 알 필요가 없는 사이인지도 모른다...산꾼은 산에서 만나면 됐지.
그러나 서로가 속내를 털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생각보다 착한 영감이다
포도청에 고발하는 건 잠시 생각해봐야 할 듯 싶다
다시 계곡을 따라서 내려간다
좌측으로는 대야산과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피아골 능선이 보인다
산죽길을 따라서 제도권의 길을 걷는다
밀재에서 대야산 주차장 가는길의 선유동(仙遊洞) 계곡물은 참으로 깨끗하다
영감탱이는 스틱도 없이 참으로 잘 간다...타고난 산꾼 체질이다
예전엔 저런걸 보면 詩想이 떠올랐는데 요즘은 세파에 지쳤는지 머리가 녹슬었는지 아무 생각도 없다
감시초소(12:45)
용추(龍湫:12:52)
하트 모양의 소(沼)로 유명한, 대야산 용추계곡에 있는 문경팔경 중 으뜸인 대야산 용추는 충북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깍아지른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대야산 자락에 있으며,
많은 비경 가운데 2단으로 이루어진 용추폭포의 장관이야 말로 명소 중의 명소로 유명하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비늘 흔적이 신비롭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의 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옛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 곳으로 용추의 형상을 보면 위아래 두 개의 용추가 이어졌으며 수 만년 기나긴 세월을 쉼없이
흘러 내려 마침내 떨어지는 폭포아래에는 천하에 보기드문 신비스런 하트형(♡)으로 깊게 파인 소(沼)가
윗 용추로, 절묘한 형태는 보는 이마다 미소를 머금게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야산 용추계곡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캡쳐
용추 안내판
무당소(巫堂沼:12:58)
용추폭포 아래에 있는 무당소는 수심이 3m 정도로, 100여 년 전 물 긷던
새댁이 빠져 죽은 후 그를 위해 굿을 하던 무당마저 빠져 죽었다고 한다
무당소 안내판
무당소에서 계곡을 건너 식당으로 향한다
대야산으로 향한 동료산꾼들이 빙판이된 등로에서 악천고투를 하는 모양이다
일부는 대야산에서 탈출을 하고 일부는 끝까지 간다는 무전이 쉬영감한테 온다.
둘이서 패잔병(?)의 아픔을 꼽씹어며 막걸리 한병에 파전으로 哀歡을 달래고
있는데 어쩌면 밀재에서의 중탈이 신의 한 수인지도 모르겠다
느긋하게 막걸리 한병을 둘이서 나눠 마시고 대야산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 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둔덕산의 모습
고개를 넘으니 가지못한 아쉬움이 남는 대야산이 보인다
주차장 가는 길에서 바라본 대야산의 모습
대야산 (大耶山:930.7m)은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선(神仙)이 내려와 노닌다는 선유동(구곡)과 용추계곡을 거느린 명산으로
원래의 지명은 선유산(仙遊山)이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에는 대야산 (大耶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 문경조에는
대치산(大治山)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예전에 홍수가 났는데 온 천지가 다
잠겨버리고 정상 봉우리에 세숫대야만큼 남아 있다고 해서 대야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정상이 세숫대야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문경쪽으로는 선유계곡과 용추계곡, 괴산쪽은 화양구곡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대야산 동쪽은 선유골로 옛 시인과 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보고 지고를
논하며 詩想을 읊조린 산으로도 유명한 산이다
대야산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아 문경의 주흘산, 황장산, 희양산과 함께 산림청에서
선정한 한국 100대 명산에 올라서 있는데 예로부터 명산으로 받들어 온 대야산은 여러 기록들에
‘대야산(大耶山)’으로 적고 있으며 특히 철종 조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년 이후 추정)] 에는
「大耶山 曦陽山南支上峯曰毘盧爲仙遊洞主山西距淸州華陽洞三十里(희양산남지상봉왈비로위선유동
주산서거청주화양동삼십리: 대야산은 희양산의 남쪽 갈래로 제일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고,
선유동의 주산이다. 서쪽의 청주 화양동이 30리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대야산 정상을 ‘비로봉(毘盧峯)’
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야산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얼마를 잤는지 모르겠다
대야산에서 중간으로 탈출한 동료들이 오고 한참을 있다가 선두조들이
버리미기재에 내려온다는 기별을 받고 버스로 버리미기재로 향한다
버리미기재(16:05)
충북 괴산군 칠성면 관평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경계로 92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옛날 기근이 심할 때 이곳에서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조그만 밭떼기를 빌어 먹이던 곳이라는 뜻이고
또 ‘보리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의미로 ‘보리먹이’가 다른말로 ‘빌어 먹이다’라는 경상도 방언이
변음되어 지명이 되었다는 고개이며 또 아홉번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빌어먹이던 팔자가 지독하게도
박복한 주막집 과수댁이 고단한 삶을 살며 넘나들던 고개이었다
민초들의 배고픔과 척박하고 고단한 삶은 보는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예전에 비해 철조망이 더 높게 설치되어 대간꾼을 겁박한다
자연과 산꾼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런다고 대간꾼들이 안 가냐...갈 사람은 전부 다 이곳을 지나가는데...
국공파들께서는 무조건 막지만 말고 자연과 산꾼이 공존할 방법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毒이 있으면 분명히 그것을 고치는 藥은 있을 것입니다.
산꾼들 만큼 착한 心性을 가진 사람은 없소이다...산꾼들과 공청회라도 함 열어서
해결책을 찾아 봅시다...애꿎은 산꾼들 전과자 만들지 말고...
씁쓸한 마음을 꼽씹으며 대야산을 통과한 산꾼들과 합류하여 괴산 산막이 옛길에
있는 식당에서 총무님이 사주신 두부전골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른다
실력도 안되는 산꾼이 고약한 영감탱이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오랫만에 무박 산행에
나섰다가 민폐를 끼친 점 정말 죄송합니다...특히 후미대장님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오늘 이 공덕 世世生生 福받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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