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0년 06월 28일
☞ 산행날씨: 약간 흐린 날씨이나 산행하기는 좋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3km / 9시간 35분 소요(거리, 시간 별의미 없음)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이벤트과 함께
☞ 산행코스: 상원사 주차장-북대사-두로령-1,460봉-북대사갈림길-상왕봉-1,520봉
비로봉-공원지킴터-적멸보궁-중대(사자암)-상원사-주차장-식물원 주차장
월정사-일주문
☞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 평창군 도암면 / 홍천군 내면
금천(국사)지맥 1구간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 10분경...샤워를 후 衣冠整齊하고
곧바로 집을 나서니 집에서는 어이가 없는지 잘 다녀오라는 말도 안한다
남원에서 올라오시는 젠틀맨님의 한강기맥 졸업산행...물론 저질 체력으로는 산행을 동행하긴
힘들지만 얼굴을 봐야 되지 않겠는가...사실상 그 분이 나를 지맥길을 들게한 주범(?)이자
선배이기에...10시 45분경 양재역에 도착하니 동료산꾼들이 나와 있다.
아시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계시지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르니 오랫만에 만난
선.후배 산꾼들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시고, 시화 작가님께서는 도시락을 하나 더 싸오셔서
주시는데 얼마나 고맙던지...福받을깁니다
젠틀맨님과 버스에서 조우를 하고 버스가 출발하면서 소등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낮에 산행이 힘들었던지 몸은 엄청 피곤한데
잠은 전혀오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거리다가 기맥팀의 들머리인 운두령에 도착한다
오대산 등산지도
운두령(雲頭嶺:1089m:02:05)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의 경계에 위치한 남한에서 자동차로 넘나드는 고개 중
태백에 있는 만항재(해발 1,330m) 다음으로 높다...고개가 높아 정상 부위에 늘 구름이 걸쳐 있어
항상 운무(雲霧)가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운두령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올 때마다 이름값을 하려는지 짙은 운무가 끼어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이름값(?)을 한다
차에서 내려 한강기맥 마지막 구간을 나서는 젠틀맨님을 배웅하고 운무가 자욱한 운두령을 출발하여
계방산 기슭의 九折羊腸의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좌측으로는 1968년 12월 9일 그 당시 울진.삼척지구에
출몰한 무장공비 5명이 이곳에 사는 이승복(당시 10세)군의 집에 침입하여 잠자는 승복이에게 총부리를
들이됐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가 입이 찢겨지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이 살해된 승복이
생가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50년이 넘어서도 북쪽의 무리들은 아직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총부리를 남쪽으로
겨누고 있는데, 요즘 이 정권은 저들의 저의를 파악도 못하고 모든 걸 퍼주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으니
저승의 승복이는 어케 생각할 수 있을까?...착잡함이 앞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버스는 진부를 지나 월정사를 통과하고 곧이어 상원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다가 새벽에 4시에 버스에서 내린다
관대교(04:10)
상원사 주차장을 지나니 관대교가 나오고 야심한 새벽에 산행을 시작하는 범여는 아직 어색하다
30분만 더 있다가 출발하면 날이 밝으련만,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의 쥔장도 휴식을 취해야
우리를 안전하게 서울까지 픽업해 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조금 일찍 출발한다
관대교를 지나니 상원사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불자들이 내려오고 있다.
나도 예전에 참으로 많이 했는데 이제는 信心이 약해졌는지 철야기도를 언제
해봤는지 기억도 안난다... 그때는 밤새 철야기도를 하면서 3,000배도 해봤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을 하고난 후의 환의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제.
이젠 하고 싶어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다음 生에나 할 수 있을라나...
어둠속에 두로령으로 향하는 넓은 임도를 따라서 산행을 시작한다
하지를 지난지가 2주일이 되었다
날이 밝아지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는 느낌이다...04시 50분정도가 되어서야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노루오즘(꽃말:쑥쓰러움)
두로령으로 가는 넓은 도로 주변에는 유난히 노루오줌꽃 많이 보인다
뿌리에서 노루의 오줌냄새가 난다고 하여 노루오줌이라는 얘기가 있고 노루가 물을
마시러 오는 물가에서 꽃을 피운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자연의
섭리를 꽃에 대한 지명에 이용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오늘은 룰루랄라 이벤트 산행이자 힐링 산행을 하는데 오랫만에 진권아우와 같이 걷는다.
봄에는 참으로 같이 산행을 많이 했는데 느림보 행님과 하는 산행이 답답했는지 요즘은
나를 피하는 느낌이라 조금은 섭섭하지만 이제 오히려 나혼자 다니는게 더 편한 느낌이다
오랫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앞서가는 동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상왕봉 갈림길(06:02)
이곳은 두로령으로 가지않고 상왕봉, 비로봉으로 질러가는 곳이다
오랫만에 만나는 선.후배 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기고 두로령으로 향한 다음에
5분정도 지나니 예전에 비해 너무나 변해버린 북대사(미륵암)에 도착한다
참으로 많이 변해버린 북대사(미륵암)의 모습
2013년 5월 19일 한강기맥 첫 구간을 걸을 때 이곳을 왔으니 7년이 지났구나
예전에 아담하고 초라한 절집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새로운 가람이 거부감이 든다
부처님께서는 정녕 이런 화려한 절집을 좋아하지 않았을텐데...맘에 안든다.
주지스님이 파워가 있으신 분이 오셔서 종단에서 예산을 많이 따오셨나...
마침 아침공양 시간이라 공양주 보살이 보이길래 진권아우와 함께 절집에서 아침밥이나
얻어 먹을까 하고 ‘아침공양 됩니까’ 하니까 공양주 曰 ‘쌀쌀맞게 안됩니다’ 하면서 문을 닫고 가버린다
7년만에 본 북대사
오대산은 봉우리(臺)마다 유서깊은 암자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중대에는 규모가
가장 큰 사자암이 있고 동대에는 관음암, 서대에는 우리나라 유일한 굴피집 암자인
염불암(예전에 수정암), 남대에는 오대산속에 유일한 비구니 사찰인 지장암이
그리고 북대에는 미륵암(북대사)이 있다
7년전의 북대사(미륵암)의 모습...2013년 5월 19일
오대산의 오대중 북대에 자리한다고 북대사라 불리운다..
(처음엔 상두암 이라 했고,미륵암 이라고 하기도 한다)
창건은 신라태자 보천 효명과 연관이 있으며,
나옹 스님이 한때 주석하셨던 곳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도로 주변에는 여느 산에서는 잘 볼수 없는 금타리가 많이 보이는구나
금마타리(꽃말:잴수없는 사랑)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이며 울릉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중부이북의
고산지대 바위틈에서 자생하며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수없지만 마타리는 키가 커서 ‘말’과
‘다리’가 합쳐져서 유래되었다는 견해와 똥과 오줌의 고어(古語)인 ‘말’에 ‘다리’를 합쳐서 똥 냄새가
나는 다리 긴 풀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뿌리에서 장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해서 패장(敗醬→깨트릴 패(敗),
젓갈 장(醬))이라고 한 것을 봤을 때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다.
마타리는 키가 100cm 이상 자라는데, 금마타리는 30cm 정도인데 금마타리는 가을철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사람의 분뇨 냄새와 흡사한 야릇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금마타리 자생지를 지나던 등산객들은
금마타리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인분 냄새로 오인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크기는 30cm 정도자라고, 줄기는 곧게 서며 뿌리잎은 잎자루가 길고 약간 둥글며 손바닥 모양으로 5∼7개로
갈라지는데, 갈라진 조각은 다시 얕게 갈라져 결각(缺刻) 또는 톱니가 있고, 줄기잎은 마주나고 잎자루가
매우 짧은데, 손바닥 모양 또는 깃모양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조각은 결각 모양의 톱니가 있다.
꽃은 6∼7월에 황색 꽃이 줄기 끝에 산방상(揀房狀) 으로 피며, 꽃대와 작은꽃대 안쪽에 돌기 같은 털이 밀생하며
화관(花冠)은 종 모양인데 끝이 5개로 갈라지며 수술은 4개이고 암술은 1개이며 밖으로 길게 나온다.
열매는 4mm가량인 타원형으로 녹색 또는 자주색이고, 날개 같은 포(苞)가 달리며 끝에 꽃받침조각이 남아 있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포행을 하시는 스님들
인증샷
상원사 주차장에서 넓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6.5km의 거리를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오랫만에 만난 진권아우와 산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두로령에 도착한다
두로령(頭老嶺 :1,310m:06:35~07:15))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있는 상원사에서 임도(지도상 446번 지방도)에서 홍천군 내면 명개리
넘어가는 고개로 두로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라 두로령이라고 부르는데 한강기맥의 분기점인
두로봉(頭老峰:1,421m)은 정상이 노인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붙혀진 지명이고 이곳에서 30분이상 더 가야한다
이곳에는 이정표와 함께 “백두대간 두로령” 이라는 표시석과 함께 오대산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각종 규제
안내판이 즐비한 것은 7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거기다가 예전에 없었던 똘똘한 CCTV까지 추가됐다.
이곳에서 힐링팀 동료산꾼들이 아침 밥상을 펼치고 있는데 독립군인 나로서는 입이 쩍 벌어진다
난 입만 가지고 왔는데, 아침 도시락은 시화작가님에게 얻어왔으니... 많은 음식을 가지고 온
음식에다 숟가락만 왔다갔다 했고 막걸리까지 2잔 얻어 먹었으니 세상사 부러울게 없다
아침 만찬을 끝내고 이곳에서 행여 야생화나 찍어볼까 하고 가지고 대포 카메라에 매크로 렌즈를
장착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이 끝나는 데서 등산은 시작된다.
평지의 길은 물론 산길마저 희미해지는 지점
고개 너머로 가는 등짐장수,
두메산골 화전민들이 터놓은 고갯마루길,
다시 그 산속으로 초동(樵童)이
닦아 놓고, 약초꾼이 다지고
산사(山寺)의 대중들이 밟아 놓은 눈에 보이는 산길,
그런 흔적이 전혀 없는, 말하자면 사람의 발자취가 끊기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등산이다.
-김장호,「산길에서」에서
박새꽃(꽃말:진실)
오늘의 산길에는 독초로 알려진 박새꽃이 대세이다
백합과에 속하는 박새는 늑막염풀이라고 불리며 머리가 아프거나 혈압이 높을 때,
뿌리는 약으로 쓰기도 하나, 독초로 벌레나 균을 죽이기 때문에 뿌리를 농약으로도 쓴다
상왕봉으로 가는 길
기름나물(꽃말:행복한 삶)
올해 처음으로 순백색의 기름나물꽃을 만난다
기름나물은 향긋한 향기를 내는 방향성 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서 이 풀을 꺾거나 비비면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하여 기름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산기름나물, 참기름나물 이라고도 한다.
상왕산 가는 길은 급할것도 없다...14시까지 상원사 주차장까지 가면 된다.
그야말로 오늘은 꽃길을 걷는 Healing 산행이다
그럼에도 힐링팀은 왜 그리도 급한지 진작에 가버리고 진권아우만 나와 보조를 맞추면서 걷는다
버들볏집버섯인가?...버섯공부는 참으로 힘이든다
이노무 쉬끼들
1,460봉(07:40)
산함박(꽃말:수줍음)
산함박꽃은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야생화를 찍어려면 메크로 렌즈에 삼각대를 이용해서 찍어야 하는데
동료산꾼들은 야속하게도 가버리니 엄두도 못낸다
이쁜 넘들이 있어서 카메라 앵글을 갖다 대보지만 맘이 급한 탓인지 그림이 흔들린다
아무래도 산행과 야생화 촬영은 병립될 수 없는 모양이다
북대사 갈림길(07:50)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황량한 산중에서 꼬박하루를 보내고 나서
문명의 불빛으로 밝은 인간의 세계를보면,
이를데 없이 멀고 먼 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인류로부터 떼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접사로 찍는 야생화는 삼각대를 이용해야 작품이 나오는데 그냥 찍으니
구도도 안맞고, 흔들려서 모든게 실망스럽다
그리고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꽃의 종류와 개체수가 별로라서 대포를 접는다
노루오줌풀
금마타리
꿩의 다리
쥐오줌풀
털개회나무
이런 곳에서 쉬어도 가고 싶다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
이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 가야 겠다.` 는 것뿐이다
상왕봉(象王峰:1491m:08:35)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홍천군 내면에 걸쳐있는 오대산의 다섯봉우리중 3번째 높은 봉우리중
하나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남쪽이
기린(麒麟), 동쪽이 만월(滿月), 중앙이 지로(智爐), 풍로(風爐)로 불리웠는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있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五臺)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전 기록에는 상왕산으로 불리웠으나, 언제부터 상왕봉으로 바뀐 기록은 없다.
상왕은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지칭하는데 아마 佛法의 산인 이곳 오대산이
열반경에서 따온것이 아닐까하는 하는 생각이 든다 (범여의 생각中에서)
오대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직전 자장율사가 수도한 중국 오대산에서 유래했다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전국 육상공원 중 지리산과 설악산에 이어 세 번째로 넓은 비로봉(1,563.4m)을 주봉으로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두로봉(1,421.9m), 동대산(1,433.5m) 다섯 봉우리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또 서쪽으로는 계방산(1,577m)이 동쪽 진고개 너머 노인봉(1,338m) 아래로 천하 절경 소금강이 자리하고 있다.
상왕봉에서 비로봉으로 향한다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 본다
왠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이영춘 시인의 이 길
비로자나불을 만나러 다시 길을 떠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시화작가님은 이 노거수를 보고 어떤 글을 쓸까?
諸行無常. 諸法無我
누구나 이런 길을 걸으면 시인이 되겠지
오랫만에 진권아우와 걸어보는 꽃길...이런 걸 힐링이라 하는가 보다
아직도 산에서 담배피는 사람이 있나요?
꿩의 다리(꽃말:순간의 행복)
꿩의다리 줄기가 깡마르고 단단하여 꿩의 다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오르막길에 올라서는데 주목군락지가 나온다
주목(朱木)
心材의 색깔이 홍갈색을 띠어 ‘붉은 나무’라는 뜻으로 주목(朱木)이라 불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의 산악지대
중턱 이상의 아고산 지대 또는 경사면에서 자생하며, 소백산 능선의 주목 군락과
설악산에서 자생하는 설악눈주목이 대표적이다
잎을 말린 주목엽은 신장병과 위장병 치료나 구충제로 쓰이지만, 줄기와 잎은
혈압을 낮추고, 심장 박동을 정지시키는 탁신(taxine)이라는 알칼로이드 물질로
인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이 물질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열매는 날 것으로 먹거나 진해제로 사용한다
1km만 가면 오대산 정상이다...牛步걸음으로 비로봉으로 향한다
앞서가는 진권아우는 엄청 답답한 모양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1,520봉(09:25)
아그야! 산에 왔으면 산의 氣運을 느껴야지 뭔 넘의 카톡질이냐...
좌우지간에 저 스마트폰 땜시 心性이 말살되는 느낌이다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맞은편에는 2년전에 진권아우와 같이 걸었던 오대(황병)지맥의 능선이 박무에 가려 희미하게 보인다
저 곳 황병산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수헌아우 친구의 도움으로 정상을 찍고 한 구간을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벌써 저만치 가버렸네...
쥐오줌풀(꽃말:허풍쟁이)
뿌리를 캐어보면 흙냄새와 비슷한 휘발성 냄새가 나는데 쥐의 오줌냄새와 비슷하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꽃은 달콤한 향기를 뿜어 방향제로 사용하기도 하며, 뿌리를 캐어 말려 차로도 먹는데, 불면증 해소와
스트레스 완화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한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당신을 통해서 말을 건네온다
오오 神이여!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山上의 숲에는 정적이 있다
비로봉가는 길목에서 만난 인가목(꽃말:당신을 노래합니다)
인가목은 장미처럼 생겼는데 고산에는 나는 낙엽 관목으로 산해당화라고도 부른다
이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며 금강찔레, 민등인가목, 제주가시나무 등 이름이 많다.
털개회나무(꽃말:청춘의 추억)
산침향(山沈香)이라고도 부르며 물푸레나무과의 낙엽 활엽 관목으로 한국의 깊은 산의
기슭에서 자라는 특산식물로 높이 3m, 꽃은 5월 초 ~ 6월 말에 피고 연한 자주색이며 꽃대가
없고, 원뿔모양꽃차례로 전년지 끝에 달리며 길이 6~20cm로 꽃대축에 털이 있다.
열매는 삭과로 피침형이며 9 ~ 10월에 성숙한다.
버들개회나무는 잎이 버들잎처럼 좁다랗고 역시 수술이 보이지 않는다.
꽃개회나무는 꽃잎이 홍자색이 확실하여 수수꽃다리와 구분이 어렵고 수술이 보이지 않는다.
개회나무는 수술이 꽃의 통부 밖으로 나와 있으며 한자어로 폭마자(暴馬子), 우리말로 개구름나무,
시계나무라고 부르며 새 가지에서 꽃이 피면 꽃개회나무이고, 나머지는 모두 전년도 가지에서 꽃을 피운다.
털개회나무를 원예종으로 육종한 것이 미스김라일락이며, 한방에서는 복부를 따뜻하게 하고 치통,
배더부룩한 증상에 사용했으며 꽃봉오리로 방향제로 사용했다.
산림청 선정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1997)로 지정되어 있다
야생화에 홀려 길을 걷다가 보니 사람의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에 도착한다
비로봉( [毘盧峰:1,563m:09:53)
비로봉은 오대산의 主峰으로서 강원 평창군과 홍천·강릉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산으로
옛부터 삼신산(금강·지리·한라산)과 더불어 국내 명산으로 손꼽힌 오대산은 1975년 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국내에서는 11번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전체 면적이 303.929㎢에 이르고 최고봉인 비로봉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해 적멸보궁, 상원사 동종 등 다양한 불교 유적이 많아 불교성지로도 유명하다.
오대산이란 명칭은 연꽃 모양으로 둘러선 5개의 봉우리가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서 유래됐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564m)을 중심으로 동대산(東臺山 : 1,434m), 호령봉(虎嶺峰 : 1,042m)·상왕봉
(象王峰 : 1,493m)·두로봉(頭老峰 : 1,422m) 등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오대산(五臺山)이라 부른다.
봉우리 사이 사이로는 중대(中臺 : 지공대)· 동대(東臺 : 만월대)· 서대(西臺 : 장령대) ·남대(南臺 : 기린대)
북대(北臺 : 상삼대) 등 5개의 평평한 대지로 둘러있고, 또한 중대·동대·서대·남대·북대는 각각 문수보살·
관음보살·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지장보살·아라한(阿羅漢) 등이 상주하면서 설법하던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오대산 자락에 전망좋은 평평한 大地의 가운데에 중대(中臺)를 놓고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동대.서대.남대.북대를 정해 각각에 암자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다섯 암자가 동대의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 그리고 중대에 사자암이며, 각각의 암자는 모시는 불상도 다르고
소의경전(所依經典)도 다르며, 모시는 불상은 동대는 관세음보살, 서대는 아미타불, 남대는 지장보살,
북대는 석가모니불, 중대는 문수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이 암자들은 월정사(月精寺)의 부속암자이다.
'비로(毘盧)'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이고,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대승불교에서는 〈화엄경〉에서 시방제불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법신불로 등장하며,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으로, 신라시대 지장율사(慈藏律師) 가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곳으로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있는 오대산을 보고 너무
흡사하여 오대산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이곳 오대산을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상주하는 곳이라 지목하여 개산(開山)한 이후
불교계에서는 성산(聖山)으로 받들고 있는 이 산은 신라시대부터 오대산으로 불리웠고 삼국유사에서는
국내의 명산중에 이곳이 지세(地勢)가 가장 승하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라 하면서 각 대(臺)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한다고 씌여있다.
오랫만에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상원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 길을 걸은지가 20년은 더 된듯 싶다...그 당시에 적멸보궁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반들과 비로봉까지 포행을 하면서 왔다가 되돌아 갔던 길이다
데크목 계단 근처에 산수국이 예쁘게 피어 있다
산수국(꽃말: 변하기 쉬운 마음)
산수국(山水菊)은 한자이름처럼 산에서 물을 좋아하는 국화처럼 풍성한 꽃이라는 뜻이다
산수국의 꽃 색깔은 다양하여 처음에는 흰색으로 피었다가 푸른색이나 분홍색으로 변하기도 하며,
꽃 색깔이 다양한 이유는 꽃 색소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며. 토양에 따라서 꽃의 색깔이 변한다
처음 산수국 꽃이 피기 시작할 때는 연녹색이 도는 흰색으로 시작되어 꽃이 피는 동안 안토시아닌이
합성되면서 푸른색으로 변하며, 꽃이 활짝 필 때에는 붉은색이 되며, 또한 꽃의 색깔은 흙의 산성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며 산성 토양에서는 알루미늄이 이온화되어 뿌리에 흡수되면 안토시아닌과 결합하여 푸른색을
나타내지만 알카리성인 흙에서는 알루미늄이 부족해 안토시아닌과 결합이 안돼 꽃 색깔은 붉은색이 된다
적멸보궁 가는길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버섯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밑둥에 붉은덕다리 버섯이 많이 보인다
적멸보궁 공원 지킴터(10:38)
적멸보궁 입구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동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가 가져온 과일을 꺼내 나눠 먹으며 베낭털이를 하고...
적멸보궁 참배에 나선다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五臺山 中臺 寂滅寶宮:보물 제1995호:10:45)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건물로,
불사리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므로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공통적인 형식을 지닌다.
우리나라에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인제의 봉정암(鳳頂庵), 영월의 법흥사(法興寺),
정선의 정암사(淨巖寺), 오대산 월정사 등 5대 적멸보궁이 전해오는데 이 가운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귀국 직후 직접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다른 적멸보궁의 경우는
사리를 안치한 장소가 분명하여 방등계단(方等戒壇)이나 사리탑(舍利塔)이 조성되어 있지만, 오대산의
경우는 어느 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는지 그 정확한 장소가 알려지지 않아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적멸보궁 건물의 네 벽 모두는 널빤지로 꾸며진 판장벽(板張壁)이며, 정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달고
양 옆 칸에는 높은 들창을 달았다. 지붕은 청기와를 덮었으며, 용마루와 합각마루에 용두(龍頭)를 올렸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점은 평면의 구성에서 고대의 내외진 이중형식 금당을 연상시키는 외진부와 감실형
내진부가 확인되었으며, 외부의 기둥 위에 설치된 이익공과 달리 내진부의 기둥에는 2출목의 다포가 짜여져
있어 구조상의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내진부로 변경되어 있는 원 건물의 외부공포는 조선전기에
유행한 다포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적멸보궁의 문살에 도깨비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문양이다
진신사리를 모신 성지에 세운 마애불탑(磨崖佛塔)
이곳의 사리는 어느 곳에 모셔져 있는지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다만 적멸보궁 뒤 쪽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을 모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5층탑을 양각으로 새겨 넣은 84센티미터 높이의 마애불탑이 있을 뿐이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정수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곳을 방문하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곳이기도 하다.
산행을 하면서 벗은 마스크를 깜빡 잊고 안 썼더니만 사시예불중이던 부전스님께서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마이크로 방송을 하시기에 서둘러 선 채로 보궁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되돌아 간다
우한(武漢) 폐렴인가, 코로나19인가 하는 역병이 청정한 절집까지 민폐를 끼치는구나
적별보궁에 핀 초롱꽃(꽃말:침묵)
우리나라의 산지에 분포하며 종꽃이라고도 하며 한방에서는 자반풍년초라고도 한다
바로 옆에는 우리동네 양재천에서 자주 만났던 매발톱꽃도 보인다
매발톱꽃(꽃말:버림받은 애인)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류로 세계적으로 약 70여 종이 분포하는데, 주로 지구 북반구의
숲이나 산악지역에서 볕이 잘 드는 곳에 나며 우리나라에도 매발톱꽃, 꽃색이 하늘색인 하늘매발톱꽃,
노란색인 노랑매발톱꽃(백두산 자생) 등 몇 가지가 자생하고 있는데 꽃잎 뒷쪽의 꽃불이 매의 발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적멸보궁을 약식으로 참배하고 중대(사자암)으로 향한다
중대 사자암의 모습
중대 사자암 비로전(毘盧殿:11:20)
적멸보궁의 수호암자인 중대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으로,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오르는 길로 이십 분쯤 걸으면 그윽한 품으로 오는 이들을 반긴다.
세계최초로 양각으로 조성한 극락보수(極樂寶樹) 삼존불상 후불탱화가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조선 태종 1400년 11월 중창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내원당(內願堂)으로 명종 대(代)에 승영(僧營)사찰로
보호되기 시작하였고 1644년부터 1646년 사이에 중수되었다.
이후에는 왕실보호로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건물을 보수해 나갔으며, 1878(고종15)년 개건되어 요사채로
사용되던 향각(香閣)이 낡아 1999년 퇴우 정념스님이 제불. 보살님께 발원하고 오대(五臺)상징의 5층으로
향각을 신축하여 2006년 8월에 완공되고 건축불사가 마무리되었다.
중대 사자암의 법당인 비로전(毘盧殿)은 화엄경의 주불(主佛)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좌우 협시보살로 조성되어 있으며 비로전 내 벽체 사방 8면에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00문수보살상과 하계(下界)에 500문수동자상 세계가 펼쳐져 있다.
오대산의 유래가 되었다는 오대중에 중심인 중대(사자암) 비로전 내부의 모습
중대사자암(中臺獅子庵)의 모습
비로전 아래로 내려오면 계단으로 된 기와 전각이 특이하다
이것은 오대(五臺) 뜻하는 전각이란다...중대를 향해 예를 올리고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로 향하는 샛길을 걸으면서 진권아우와 뭘그리 할 얘기가 많은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상원사 경내로 들어선다
상원사 경내로 들어서니 동자상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상원사 일원각
일원각은 약수물을 제공하는 곳인데 코로나 때문인지 바가지를 없애 버리고 개인 물컵을 사용하란다
물한모금 마시고 문수각으로 향하는데 만화루 아래에는 험상굳게 생긴 달마상이 산꾼을 반긴다
만화루 아래에 있는 달마상((菩提象)의 모습
달마대사((菩提達磨)는 禪宗의 창시자로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왕자인 27대 반야다라존자에게
법을 전수받은 다음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禪宗을 전수한 인도 스님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선맥을 이어온 초조(初祖)가 달마대사이다
달마대사는 애초에 못생긴 얼굴이 아니고 준수한 풍채에 달덩이같은 얼굴 이었는데 중국에 들어와
양자강을 얼마 앞두고 산길을 걷다보니 커다란 이무기가 한마리 죽어 있었다.
이게 장차 썩어서 냄새를 피운다면,길을 오가는 중생들이 괴로움을 당하리라 생각이들자,
달마대사는 육신을 벗어서(유체이탈:[遺體離脫) 이무기 옆에두고 이무기 몸 속으로 들어가 이무기를
운전하여 양자강 깊숙이 벗어 던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아주 못생긴 흑안(黑顔)이란 도인이 자기 육신을 버리고, 잘생긴 달마의 육신을 업고 도망가 버렸다.
할수없이 달마는 흑안의 못생긴 육신을 입고 숭산(崇山)으로 와서 소림의 동굴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
동정각(動政閣)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이 있는 동정각의 편액은 탄허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鐘, 국보 제36호)
현존하는 한국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 성덕왕
(聖德王)24년(725)에 조성되어 조선 예종(睿宗)원년(1469)에 안동에서 상원사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鐘鈕)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鐘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있는 구조, 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이 있는 상대(上帶). 하대(下帶).
4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文)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
(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文)이 새겨졌고, 종복(鐘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 연화문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 하대. 4유곽
등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郭)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을 바탕으로 2~4명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文)이 새겨져 있고 종복(鐘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의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으며,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는데, 첫 머리에"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種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24년(725)에 조성 되었음을 알수 있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의 정상에는 용뉴와 용통이 있는데, 용뉴는 용의 입부분과 발끝이 종과 연결되어 있고,
용통의 표면에는 앙련과 복련을 장식하고 그 사이에 연화무늬와 당초무늬를 조각했으며 종의 몸체는 배가 약간
불룩하고 밑부분이 좁아지는 형태로, 종어깨(鐘肩)와 유곽 및 종입구(鐘口)에 문양대를 돌렸는데 연주무늬(連珠紋)를
가장자리에 돌리고,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반원의 테두리 안에 주악비천상과 당초무늬를 장식 했으며,
종어깨에 붙여서 배치한 4개의 유곽 안에는 각각 연화좌 가운데에서 돋아난 유(乳)를 9개 배치했으며 유의
표면에도 꽃무늬를 장식 했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은 아름다운 종으로서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다고 하며,
음통이 있는 용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무라 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풍부한 량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한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과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불룩한 두 볼과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 기법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정상에는 약동하는 한 마리의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音筒)이 붙어 있다.
원사동종(上院寺銅鐘)은 현재, 종 입구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모작품을 만들어
사용하며 이 종은 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동정각(動政閣)에는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곁에 동종(銅鐘)의 비천상 모형이 조성되어 있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 국보 표시석
묘석상(猫石像)
문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 있는데 고양이상인 묘석상(猫石像)은 세조(世祖)가 상원사에 도착하여
법당에서 부처님에게 예배를 올리려고 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용포자락을 물고 끌어 당겨
밖으로 나가려고 하므로 이상하게 여겨, 법당을 수색하니 암살자들을 찾아내게되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며,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으로 상원사를 중창 했으며 전국사찰에 고양이를 보호하도록 명을 내리고,
고양이를 사육하는 비용으로 따로 전답을 내려 최근까지 서울강남의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불렀다고 하며,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 생겼다는 설도 있다.
상원사 문수전(文殊殿:11:40)
문수전(文殊殿)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 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하며, 어의(御醫)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근처에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기를,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동자승은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의 병이 씻은듯이 나은것을 알았다.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등창 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기쁘하여 궁에 돌아와 화공을 불러 만났던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으나 제대로 그리는 화공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하여 세조가 그 모습을
설명하자 노스님이 자신이 알아서 그리겠다고 하며 설명도 듣지않고 그려온 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 스님이 오신곳을 묻자, 노스님은 영산회상에서 왔다고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즉 동자와 노스님으로 화현하여 나타난 문수보살을 2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이후 의숙공주와 효녕대군의 발원으로 세조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해 문수보살상이
조성되어 1466년에 상원사에 모셔졌다.
이렇듯 문수보살 감응설화는 조선시대까지 전수된 문수정토 신앙과 문수화현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상원사목조 문수동자 좌상 (좌측 국보 제221호)
비로봉 동남 기슭에 자리 잡은 上院寺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文殊菩薩像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705년 지금의 상원사 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피부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라 바꾸고 원찰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다
조선 세조의 둘쨰달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 (1466년)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상원사도 코로나 땜에 비상이다...절집이 아니고 아비규환같은 느낌이다
앞서간 동료들이 기다릴까봐 주마간산격으로 상원사로 참배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산을 숭배하는 신앙이 불교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대산의 문수신앙과 오만보살신앙이다.
오대산이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년)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정골사리를 모시면서부터이다.
이로서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7.8세기에 이르러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동대 만월산(滿月山):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수정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미륵암에는 일만의 미륵보살이
중대 지로산(地爐山):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오대산은 보천태자 이후 많은 이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었으며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상원사는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한 일화를 통하여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근대에 와서는 한암, 탄허, 만화스님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수행오법(修行五法)의 가풍으로 인재를 양성하셨으며 한국 불교 진흥에 큰 지주가 되었다.
상원사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는 우측에 세조와 관련된 관대걸이가 보인다
도로 좌측에는 삼화상 부도전(三和尙 浮屠田) 부도전이 있는데 상원사(上院寺)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세 분의 큰스님을 모신 부도전(浮屠田)으로 앞에서부터 앞에서 부터 만화당(萬化堂) 희찬(喜讚)스님 부도,
가운데 탄허 스님, 맨 뒤쪽이 방한암 스님의 부도, 가운데 있는 탄허당(呑虛堂) 택성(宅成) 대종사의 부도,
왼쪽에 자리한 방한암 선사(方漢巖 禪師)의 부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
관대(冠帶)걸이
이곳은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목욕을 할 때 의관(衣冠)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관대걸이” 라
하며 주변 나무는 소나무과 낙엽침엽, 교목 일명 잎갈나무라 부르며 백두산 중턱에 주로 서식하고
있는 수목(樹木)으로서 수령(樹齡)을 약 100년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부터 약 2km 서쪽 서대장령(西臺長嶺) 밑에는 우통수(于筒水)라는 샘이 있어 물의 비중과 맛이
특이하여 중국 양자강의 중냉(中冷)과 같다고 하여 한강의 시원(始源)이라 전한다.
우통수는 서대장령 수정암(水精庵,현재 염불암)입구에 있으며 우통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 처음 기록이 있고, 우통수라는 명칭은 조선 태종4년(1404)에
권근(權近)이 쓴 [양촌집村集] 에'오대산서대수정암중창기(五臺山西臺水精庵重創記'에 처음 기록되어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대西臺 밑에서 물이 솟아나서, 빛깔과 맛이 보통 우물물보다 낫고 물의 무게도 또한 무거운데
우통수(于筒水)라고 한다.
우통수가 중랭(中冷)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라고 하여 우통수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였다.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임을 기록한 첫 문헌자료는 [세종지리지 권153] 강릉대도호부 명산(名山)조이다.
"우통수의 물은 나아가 금강연(金剛淵)이 되고 한수(漢水)의 근원이 된다." 고 하여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백두대간 산꾼들에게는 함백산 근처에 있는 금대봉 아래 고목나무샘이 한강의 발원지로 알고 있는데 헷갈린다
상원사 주차장 가는 길
상원사(上院寺:11:55)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 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진권아우가 선재길을 걷고싶다해서 주차장을 안들리고 선재길로 향한다
월정사 선재길 안내판
오대산은 신라시대에 중국 오대산을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스님에 의해 개창된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입니다
이러한 문수의 지혜가 시작되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간 분이 「화엄경」의 ‘선재(동자)’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참된 나”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선재길은 월정사 천왕문 앞 금강교에서 상원사 주차장까지 9.2km를 말한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구도자로 그는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천하를 역방(歷訪)하다가, 마지막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서 그의 십대원(十大願)을 듣는다.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여 입법계(入法界)의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구도의 이상을 불교 도입 시초부터 존중해 온 흔적이 농후하다.
신라시대에 자장율사(慈藏)는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본받기 위하여 선재가 만났다는 53명을
상징하는 오십삼선지수(五十三善知樹)를 뜰에 심었고 김유신(金庾信)은 열여덟 살 때 단석산(斷石山)에서
이인(異人)을 만나 신검(神劍)을 얻었다는 기사도 이 선재구법에서 암시를 얻은 듯하다.
그가 만난 난승(難勝)이라는 도인의 이름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 나오는 대지(大地)의 이름이다.
선재라는 청년이 법을 배우기 위하여 52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서는데
그 선지식인 중에는 보살도 있고 장자, 거사, 뱃사공, 청신녀, 여인등 등장 인물이 매우 다양하다.
선지식은 요샛말로 하면 스승이라 하겠다.
그런 선지식을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그
러면 선지식은 물어본 것 이상의 대답을 하고 가르쳐 준다.
마치 방망이를 치면 열개 또는 스무개의 물건이 튀어 나오듯이 선지식의 가르침의 내용은 한량없이 나오는 듯 하다.
그리고서 떠날 때는 선지식의 몸주변을 오른쪽으로 일곱바퀴를 돌거나 또는 무수히 돌아서 예의를 표한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사람의 몸주위를 도는 것은 최상의 예의가 아니었나 생각 된다.
이와 같이 선지식을 만나서 법을 듣고 헤어진 후에는 반드시 다음 차례의 선지식을 소개 받는다.
즉 남쪽 어디에 가면 누가 있는데 그 분을 만나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52명의 선지식을 만나서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 입법계품이다
우리도 선지식을 만나러 떠나 봅시다
어제 산행을 힘들게 한 탓이었는지 자꾸만 다리는 무거워지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든다
묵묵히 求道者의(?)을 걷고있는 진권아우
저 개울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느낌이다
쉼터가 나오건만 진권아우가 빠르게 앞으로 가기에 쉬겠다는 소리를 못하겠다
오대산 화전민 쉼터가 나온다
오대산 화전민 터
오대산 월정지구의 화전민은 한 때 150여 가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약 40가구의 흔적만 있다.
화전민이 경작했던 밭을 비롯해 담장이나 집의 벽체였던 석축유구, 난방 흔적인 온돌유구,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도기편, 자기편이 화전민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기차레일같은 철편이 일부 남아 있는데 벌목장 아래까지 목재 운반을 위해 설치한 목차레일로 추정된다
그 외도 계곡에 보를 막아 벌채한 목재를 차곡차곡 쌓아둔 뒤 비가오면 터트려 나무를 한꺼번에 이송했던
보매기. 목재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이 있었던 자리도 회사거리라는 지명으로 아직 남아있다.
오대산 화전민 터 안내판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굳이 묻지 마시게
사람 사는 일에 무슨 법칙이 있고
삶에 무슨 공식이라도 있다던가?
그냥 세상이 좋으니
순응하며 사는 것이지
보이시는가 저기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한 조각 흰 구름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지만
그 얼마나 여유롭고 아름다운가
진정 여유 있는 삶이란 나 가진 만큼으로
만족하고 남의 것 탐내지도 보지도 아니하고
누구하나 마음 아프게 아니하고
누구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하며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슴에 담고
물 흐르듯 구름 가듯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네.
"남들은 저리 사는데"
하고 부러워하지 마시게
깊이 알고 보면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삶의 고통이 있고 근심 걱정 있는 법이라네.
옥에도 티가 있듯 이 세상엔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저 비우고 고요히 살으시게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헤며 반딧불 벗삼아 마시는
막걸리 한잔
소쩍새 울음소리 자장가 삼아 잠이 들어도
마음 편하면 그만이지
휘황찬란한 불 빛 아래 값비싼 술과 멋진 풍류에
취해 흥청거리며 기회만 있으면 더 가지려 눈 부릅뜨고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살면무얼 하겠나
가진 것 없는 사람이나 가진 것 많은 사람이나
옷 입고 잠자고 깨고 술 마시고
하루 세끼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늙고 병들어
북망산 갈 때 빈손 쥐고 가는 것도 똑 같지 않던가
우리가 100년을 살겠나
1000년을 살겠나?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 발버둥쳐 가져 본들
한 치라도 더 높이 오르려 안간힘을 써서
올라 본들 인생은 일장춘몽
들여 마신 숨마저도 다 내 뱉지도 못하고
눈감고 가는 길
마지막 입고 갈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는데
그렇게 모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데
이름은 남지 않더라도 가는 길 뒤편에서
손가락 질 하는 사람이나 없도록
허망한 욕심 모두 버리고
베풀고 비우고 양보하고 덕을 쌓으며
그저 고요하게 살다가 조용히 떠나 세나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사랑을 베풀고 살아가세 그려,!!!
이보시게 우리네 인생... 법정스님
월정사 5.4km를 남겨놓고 선재길을 포기한다
너무 다리가 무겁고 체력이 떨어져 진권아우에게 짐이되기 싫다
아그를 보내고...
식물원앞 버스시간표
식물원앞 버스 정류장(12:55)
이곳에서 버스 시간표를 보니 13시 50분에 상원사에서 버스가 출발한단다
그러면 이곳을 지나갈 때는 14시가 넘는다는 얘기인데...지나가는 승용차를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시작하는데 한번만에 승용차를 얻어타고 월정사 입구에 도착한다
만월교(13:20)
나를 태워주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만월교를 건네 월정사 경내로 향한다
월정사 안내판
월정사 용금루(湧金樓)
용금루는 본래 팔각구층석탑 가까이 있던 것을 199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누각의 기초를 화강석 기둥으로 하였고 밑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한 누마루형식의
건축으로 용금루의 계단을 한단한단 오르면 월정사경내가 마치 불계佛界와도 같이 조금씩
가까워오는 구조로 월정사의 장엄함을 경험하게 하는 구조라고 하겠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이며, 1977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석경원(종고루:좌측)과 불유각(우측)의 모습
월정사의 주전의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국보제48호)의 모습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보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으며,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으며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뒷면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 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월정사 적광전(寂光殿)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적광전의 외부 기둥은 모두 18개인데 이 가운데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 등도 모두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자리는 과거 7불을 모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된 것을 1964년
주지 만화스님이 다시 중건한 것이라고 하며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근래에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 1975년에 조성한 신중탱ㆍ
감로탱, 반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寂光殿)의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적광전 주불(主佛)
적광전(寂光殿)은 전내(殿內)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으며 또한, 본존불만 모시고 협시불을 모시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석가모니불께서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계신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수인이 뜻하는 바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귀를 물리치고자 땅을 향하여 손을 가르키는 모습'쯤으로 보면 된다
주련의 글씨는 탄허(呑虛) 스님의 글씨
南無大方廣佛華嚴經(나무대방광불화엄경):대방광불화엄경에 귀의합니다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만대의 법왕이요, 삼계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싸라쌍수에서 열반을 보이신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나니
普使羣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수많은 중생들 끊임없이 예배하네
南無實相妙法蓮華經(나무실상묘법연화경):실상묘법연화경에 귀의합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제48호)
월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의 장식을 제외한 전체를 화강암으로 건조한
이 석탑은 월정사 대웅전 앞뜰 원위치에 유존하며, 몇 번의 화재로 인하여 각 부재에 손상이 심하나
그 형태는 원형을 갖추고 있으며 1962년에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6·25 전쟁 때 사찰건물이 전소되어 석탑에도 많은 피해를 입어 1970년 10월 석탑의 전면 해체보수가 진행되었다.
탑신부를 해체하는 도중에 제5층 옥개석 상면 중앙의 네모난 구멍 안에서 은제도금의 여래입상(如來立像) 1구(높이
9.7㎝)가 발견되었고, 제1층 탑신석 상면 중앙의 둥근 사리공(舍利孔) 안에서는 동경(銅鏡)·경문(經文)·향목(香木)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청동합 속에 든 은제 합에는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1축과 수정사리병이
출토되었다
2001년, 2002년과 2005년 문화유산발굴조사단에서 석탑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토층을 조사한 결과
석탑 지표면 아래에서 편년이 확실한 중국 송대의 동전인 숭녕중보(崇寧重寶)와 성송원보(聖宋元寶)를 발굴하여
석탑 조성 연대가 12세기경임이 밝혀졌다. 또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 암막새를 통하여 세종28년(1446)과
광해군2년(1610)에 월정사가 중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석탑의 높이 15.2m이며, 석탑의 구성은 일반형 석탑과 같이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세운 형식인데,
평면은 8각형을 이루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면 평면이 방형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되고 층수도 다층으로
변하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 석탑도 그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기단부는 4매로 결구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였는데, 지대 위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겼다. 하층기단
면석은 4매석으로 짜여져 있으며,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이 오목새김되었고, 그 위의 하층기단 갑석도
4매석으로 되었는데 갑석 상면에는 연화문(蓮華文)을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覆瓣)·복엽(複葉)인데 모마다 1판씩과 각 면에 3판씩으로 도합 32판이 돌려졌다.
그리고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낮은 받침을 조각하여 그 위에 굄대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 굄돌은 1단으로 4매의
판석으로 짜여졌으며, 굄돌의 형태는 하면은 원호(圓弧)를 그리고 측면은 굽을 돌렸으며, 상면은 경사로 인하여
각 모퉁이에 합각이 뚜렷하다. 그리고 그 정면(頂面)에는 1단의 낮은 각형 받침을 새겨서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4매석으로 짜여졌는데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隅柱: 모서리기둥)가 모각(模刻)되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국보 제48-2)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 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
(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
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보살상과 세트로 조성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조보살상은 보물
제139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별개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묶어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공양보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모은 모습이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사리탑을
공양하는 모습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특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월정사에서는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고 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고 하는데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는데 그것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석탑 앞에 공양상을 세우는 유형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124호 한송사터
석조보살이나 보물 제84호 신복사터 석조보살 등 강원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형태다.
이곳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은 너무 마멸이 심해서 원본은 성보박물관 안
실내에 보관 전시 중인데 탑 앞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딘지 좀 생뚱맞아 보인다.
부처님을 의미하는 팔각구층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공양을 드리는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상체가 하체보다 크고 정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한 것은 보는 사람들의 착시를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고, 관 아래로 나온 머리카락이 좌우 어깨 위로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입고 있는 천의(天衣)는 영락등 장신구가 화려하다.
오늘은 성지순례가 아닌 산행으로 왔기에 走馬看山격으로 월정사를 둘러보고 금강문으로 향한다
월정사 금강루(金剛樓)
천왕문을 지나면서 금강루를 만나는데 전각의 형태가 조금 특이하게 형성되어 있다한국의 가람 배치에 있어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게 정설인데 월정사에는 불이문(不二門) 자리에 금강루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조금은 이채로운데 2층 누각에는 윤장대가 있는게 좀 특이하다
윤장대(輪藏臺)란 예불을 보는 불교의 의식품으로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는 용구로 내부에 불경을 보관해둔 이것의 역할은 부처님 말씀을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과,
경전이 꽂혀있는 윤장대를 돌리기만 해도, 경전 만권을 읽는 것과 같아,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하며, 글을 몰라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하며즉, 이것을 돌리며 불경을
읽는 효과를 얻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로 티벳트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윤장대는 티벳트 불교에서는 마니차라고 하며, 티벳트 불교에서는
내부에 불교 경전을 넣거나 불경을 새긴 마니차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글을
못 읽는 문명자들을 배려한 듯 하다
월정사 천왕문 뒷쪽의 모습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좌측)과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우측)의 모습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좌측)과 동방지국천왕(東方指國天王)(우측)의 모습
월정사 천왕문
천왕문에 들어서면서 좌.우에 있는 사천왕상에게 예베를 올리는데 근엄한 위엄과 기품이 있는
사천왕상인데 너무 높게 목책이 둘러있어 사천왕을 감상하거나 사진에 담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사천왕상은 사방과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신으로 불전이나 탑의 사방을 수호하는 신장으로,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모습이 일반적이고 손에는 각종 무기와 여의주, 보탑, 비파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지역이나 사찰에 따라 사천왕 손에 들린 지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월정사 천왕문을 빠져 나오니 우측으로 선재길의 출발점이 보인다
이곳에서 상원사 주차장까지 9.2km를 선재길이라 하는데 힐링 코스이기도 하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금강교를 지나 전나무숲으로 향한다
월정사 전나무숲 안내판
월정사 전나무숲은 오대산국립공원 월정사 일주문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전나무숲은 약 2km정도로
경기도 광릉 국립수목원전나무숲, 부안의 내소사 전나무숲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나무숲길에서 바라본 금강교의 모습
너무 힘이들고 다리는 무겁고 졸음은 쏟아진다...졸다시피 걷다보니 성황각에 도착한다
월정사 성황각(城隍閣)
성황각은 이 지방의 토속신을 모신 전각으로 맞배지붕의 전각은 약 2평정도이며 토속신앙이 불교에
잘 습합된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든 사상과 믿음을 수용하려는불교의 넓은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황신 내부의 모습
가람으로 가는 일주문 에서 사천왕문 사이에 또는 옆에 모시고 있으며, 국사당, 국사단, 가람당이라고도 한다
전나무숲 끄트머리에 일주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틀 연산(連山)을 한다는 것은 내 체력으로는 무리인 듯 하다
월정사 일주문(一柱門:13:45)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현재까지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사찰로 평균 80여년의 수령을 가진 전나무 1,800여그루가 모여있는 숲길이다.
“月精大伽藍”이란 일주문 현판 편액은 탄허(呑歔)스님께서 쓰셨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는데도 아직까지 진권아우는 언제올 지 모르겠고 잠은 쏟아지고 하여
도로옆 숲에 신문지를 펴놓고 드러누었는데 이내 잠이들고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지난 후 진권아우가 오고 매표소 입구로 가서 매점에서 감자떡과 캔맥주 하나로
허기를 면한 다음에 한참을 기다린 후에 산악회 버스가 오고 진부로 나와 기맥팀 쫑파티에
참석한다...기맥팀 졸업 축하산행에 와서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9기맥을 졸업하신 젠틀맨님 축하드리고 나머지 동료산꾼들 한강기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언제 어디 산을 가시더라도 항상 무탈하고 安山과 健幸을 기원합니다
글고 시화작가님!...도시락 잘 먹었습니다
이 공덕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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