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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亡國의 恨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청계산

by 범여(梵如) 2019. 3. 5.

☞ 산행일자:  2019년 03월 05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미세먼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2.5km / 5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김해등산클럽 회원들과 함께

☞ 산행코스: 원터골-경부고속도로 굴다리-아웃도어 단지-원터골 원터-원터골 쉼터 길림길-진달래 능선-쉼터

                   옥녀봉 가는길-쉼터 갈림길-천계사 갈림길-쉼터-494m봉-돌문바위-충혼비 안내판-충혼탑-매바위

                   매봉-655m봉-혈읍재-만경대-금정수-석기봉-헬기장-상적천 발원지-절골 갈림길-헬기장-이수봉

                  국사봉갈림길-544m봉-485m봉-갈림길-쉼터-무명봉-목배동 삼거리-무명봉-금토동갈림길-307m봉

                  306.2m봉-봉오재-305m봉-달래내 고개-옛골토성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과천시/ 의왕시

 

삼일절 때문에 팔자에 없는 연휴를 즐기는데 3.1절날 변산지맥 3구간을 걷고 변산바람꽃을

촬영하기 위해 청림마을과 내변산 탐방소에 들러, 변산바람꽃, 노루귀, 복수초를 찍고왔다.

요즘 하도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 외출하기가 꽤나 겁이 나는데 김해에 사는 후배한테

전화가 온다... 자기가 김해에 있는 산악회 산행대장을 맡고 있는데 서울에 있는 청계산에

오는데 가이드를 좀 해달라고 하는데 조금은 난감하다.

3일날은 연로하신 큰 누님의 생신(85세)이라 거기도 가봐야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되는

고려불화전의 전시 마지막날이라 거기도 가야하는데, 그렇다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후배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뭐하여 약속을 했다.

 

나에게는 뒷동산같은 청계산에 뭐하러 오느냐고 물으니 이곳이 100대 명산이란다

웬 100대 명산...하도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100대 명산이란게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이 있고, 블랙야크라는 아웃도어 업체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이 있다.

그런데 이 청계산은 산림청에는 빠져있으나 블랙야크에는 100대 명산에 들어 있다.

사실 난 청계산이 100대 명산이란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이곳이야 우리집에서 가까워

서울에 살면서 적어도 300번 정도는 오른 듯 했으니 산의 개구멍까지 다 꿰뚫고 있는 편이다

이곳은 휴일에야 대간, 정맥, 기.지맥을 다니느라 갈 일이 없지만 평일 오후에 사무실에

업무를 보고 난 후에 생수 한병 달랑 들고 가서 땀한번 쫘악 빼고오는 곳이 청계산이다

100대 명산 지도

블랙야크 100대명산 지도

 

청계산 지도

김해에서 산악회 회원 42명이 온다고 하니 괜스레 신경도 쓰이고 산을 혼자서

다니는 편이라 사람이 많은 산행은 왠지 불편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청계산도 안 가본지가 어언 1년정도 세월이 지난 듯 싶다

이곳은 서울 인근이라 워낙 사람들이 많아 난 맞은편의 한적한 인능산 구간을 자주 가는 편이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겠으나 10시 조금 늦은 시간에 조우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원터골

서울 서초구 원지동에 위치한 원터골은 옛골과 함께 서울쪽에서 시작되는 청계산 산행들머리이다.

이곳에는 큰아름드리 보호수와 함께 원터골의 유래를 표시한 비석이 세워져 있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대형 아웃도어점과 음식점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통의 요충지에 마패를 소지한 공무

여행자에게 마패에 새겨진 숫자만큼의 말을 제공해주는 역(驛)과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인

원(院)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에도 큰 원(院)이 있었다고 한다

미륵당(彌勒堂) 

청계산 원터골 입구에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미륵불이 있는데 전각으로 보호하고 있어 

평상시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나 동제를 지낼 때는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어 투박한 고려시대의 

특색을 지닌 불상을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얼굴에 호분을 발라 하얀데 다소 불거져 나온 입술이 붉어 화장을 한 남정네처럼 호기 넘치는 

모습인데 이 미륵불과 앞에 있는 3층 석탑으로 인해 이곳이 절터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 불상은

불자들의 예배대상이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으로 제작된 형태다.

미륵당 내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彌勒佛: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3호)

조선시대에 조성된 이 석불은 225c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석불로 원래 사찰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은 조그만 전각처럼 꾸며진 미륵당 안에 모셔져 있으며, 불상은 전체적으로 큰

기둥같은 모습이고, 표면에는 호분이 뚜껍게 칠해져 있다.

이 불상은 머리가 커다랗고 머리 윗부분이 뾰족하며, 얼굴이 길고 어깨가 좁아 토속적이고

위축된 모습이다...미륵당 옆 바닥에는 이 불상의 머리위에 올려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천개(天蓋:삿갓머리)가 있으나 석불(石佛)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안내판 인용)

미륵당 석불

미륵당 울타리 안에는 작은 3층 석탑이 있는데 지붕돌(屋蓋石)의 귀퉁이가 홰손되고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며, 석탑의 지붕돌 받침은 3단이며,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이 석탑고 석불을 통해 볼 때 이 일대가 원래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석불과 석탑만이 남아있다.

이 불상의 영험함이 알려져 이곳 주민들이 1년에 한번씩 동제(洞祭)를 지낸다

미륵당 안내판과 원터표시석

원터골의 미륵불을 전체적인 조형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3층 석탑이 있다하여 사찰로 보기 어려운 것은 원터골은 이름 그대로 국영 여관이었던 

원(院)이 있던 곳인데 역이나 원은 고려시대부터 공무집행 차 출장을 떠나는 관리의 나들이에

편의를 제공하는 국영 역마소와 여관이었던 점을 비추어 본다면 양재역의 역에 이어 원터골에는 국영 여관이 있었다. 

원지동이 곧 원터골이기에 이곳에 서 있는 미륵당은 마을의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수호자로서의 역할과 함께 

공무를 띈 관리의 출장길에 복을 빌어주는 심리적 안정기재로서의 역할을 한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것이다. 

전국 곳곳에 있는 미륵당의 미륵불들이 예술성보다는 해학적인 모습으로 보다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그런 이유다.

미륵당을 지나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며 산행을 진행한다

오랫만에 왔는데도 안면이 있는 할머니들이 보이는데 인사를 건내고 정상으로 향한다

굴다리를 지나면서 아웃도어점들이 보이는데, 불경기 탓인지 아니면 오랫만에 와서 그런지

예전에 있었던 K2, 노스페이스, 코오롱 등 대형점포들이 많이 없어졌구나

이곳은 우리나라 아웃도어의 테스트마켓으로 이곳에서 성공한 디자인은 대박이 났다고 한다.

서울 강남에 위치하고 등로가 잘 관리되어 있는 탓에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고

하는데 난 그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웃도어점을 지나 커다란 노거수가 있는 공터에도 원터 표시석이 보인다.

김해등산클럽 회원님들

오늘은 내가 가이드로 나섰다

청계산에 대한 범여의 설명을 듣고있는 김해등산클럽 회원님들

내가 김해의 산악회와 인연이 되었던 것은 15여년쯤 되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1년에 90%정도는 나홀로 산행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때 소요산에 갔다가

먹을것이 없어 배가 고파 힘들어 할 때 김해 가락산악회에서 온 여인이 준 초콜렛을 얻어먹고

산악회 카페에 가입하면서 인연이 되었고, 언젠가 금남정맥을 홀로 걷다가 계룡산 근처에서

김해에서 왔다는 독립군(나홀로 산꾼) 홍길동이란 닉을 가지신 산꾼을 만난 인연도 있다

올겨울 가뭄 탓인지 개울에 물이 별로 없다...매봉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대간 산꾼이나 일반 등산객이나 등로만 보면 도망(?)가는 등산객이 있는데

이 산악회는 예외가 아닌듯 하다... 등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선두는 도망을 간다

원터골 쉼터 갈림길

직진으로 가면 소망탑이 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우측 진달래 능선으로 향한다

후배가 범여를 카메라에 담았네...내가 저렇게 늙어 버렸나

가는 세월은 잡을수가 없고...세월앞에 장사가 없구나.

진달래 능선

우측으로는 개나리골로 이어지는데 좌측의 진달래 능선을 따라서 매봉으로 향한다.

지아비의 무덤을 지키던 여인의 피맺힌 슬픔이 꽃잎에 닿아 붉은색이 되었다는

진달래는 ‘이별의 恨’을 상징한다고 해서 두견화(杜鵑花) 또는 귀촉화라고도 한다.

이른 봄 잎이 나기전에 꽃이 먼저피는 진달래는 햇빛을 유난히 좋아한다

그래서 큰 나무가 없거나 헐벗은 산에서도 진달래 군락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진달래는

먹을 수 있어서 ‘참꽃’이라 부르는 반면, 철쭉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개꽃’이라 부른다

아직 진달래가 필 생각도 하지 않고있는 진달래 능선을 걷는다

쉼터

쉼터에서 바라본 우면산(牛眠山:313m)의 모습

우면산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경기도 과천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풍수학적으로 소가 졸고있는 형세라하여 우면산이라 불리워졌다한다

 

우면산(牛眠山)은 낮은 산이지만 찾는사람들이 많아 전해오는 애기로 관암산(冠岩山). 도마산.

사정산(射亭山).수정봉(水晶峰)으로 불리고 있는데 갓바위가 있는 산이라하여 관암산(冠岩山)이

도마와같이 생겨서 붙여진 도마산, 옛날에 활을쏘던 사정이 있던 곳으로 사정산(射亭山), 수정이

채굴되었다하여 수정봉(水晶峰)등으로 불린다.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를 묻은곳이라하여 태봉(胎峰)이라고도 불렸는데 남쪽기슭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있어 이지역이 오래전부터 조상들의 생활터전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느낄수있다.

매주 험하디 험한 지맥길만 걷다가 오랫만에 꽃길을 걸으니 왠지 이상하다

더군더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으니 말이다... 몇년만에 이런 길을 걷는다 말인가?

옥녀봉 가는 길

옥녀봉으로 가기 위해선 358m봉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358m봉에 올라서니

옥녀봉 700m의 거리에 있다고 하니 이 분들은 멀다고 그냥 내려가 버린다.

오늘은 내가 청계산의 숨은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다들 그런것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청계산에 있는 옥녀봉(玉女峰:375m)은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옥녀봉에 올라서면 과천 경마장이 훤히 보이고 청계산은 곧은 은자들이 많이 숨어

살았다고 하며 목은 이색, 일두 정여창, 추사 김정희선생이 대표적이라 한다
추사는 말년에 옥녀봉 기슭에 과지초당을 지여 살면서 관악산을 바라보며
추사체를 완성 했다하고 강남 봉은사에 마지막 작품이 남아 있다한다 

원터골 쉼터 갈림길

여기서부터 매바위 아래까지 1500여개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깔려있다.

예전엔 이 나무계단에는 서초구 관내에서 기부받은자의 명패가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구나

난 이 나무계단이 싫어서 우측의 과천 서울대공원 철조망 쪽에 있는 개구멍으로 매봉정상을 올라 다녔다.

초반에 나무 계단을 올라서니 쉼터가 나오는데 미세먼지 탓인지 숨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청계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고 한다.

그전에는 청룡산이라고 불렀으며, 청룡산의 유래는 과천 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볼 때 과천 관아의 왼편에 산이 있어 마치 풍수지리의 '좌청룡'형국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수리산을 관악산의 오른편에 있다 하여 백호산이라고도 불렀다. 

고려삼은(高麗三隱중에 한 사람이었던 목은(牧隱) 이색의 시에 청룡산에 대한 詩가 있다

 
청룡산 아래 옛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고려삼은(高麗三隱)은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하며, 흔히 삼은이라 부른다.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이다

계속되는 나무계단의 오르막길

천계사 갈림길

이곳은 원터골에서 시작하여 조금 오르다가 좌측으로 오르는 길인데 급경사의 오르막이긴

해도 원터골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구간이지만 등산객이 그리 만치않은 구간이다.

천계사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이 등로는 몇년전에 작고하신 인기작가 故 최인호 선생이

다니던 구간이라 ‘최인호 루트’라고 부른다.

쉼터

이곳에 있었던 산불감시초소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등로 아랫쪽에 쳐박혀 있

494m봉

헬기장과 4등 삼각점에 예전엔 없었던 대크목 광장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으로는 상적동, 정토사에서 올라오는 등로가 있는데 예전에 내가 잘 다니던 코스이다

494m봉 정상 삼각점(△수원 404)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랑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 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 이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점이 설치되어 지도제작, 지적측량, 건설공사, 각종 시설물의 설치 및 유

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중요시설물로써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재산이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되며 만약

무단으로 훼손하는 경우에는 이 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곳에 설치된 삼각점(수원404)의 위치는 표주의 심자선 중심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동경: 127.2.58(도분초)
북위:37.25.41(도분초)

이 분들은 이른 새벽에 출발한 탓인지 이른 시간에 점심밥상을 펼친다.

난 조금전에 집에서 아침을 먹고 왔는데 후배가 내 점심을 싸왔다고 하는데

아직도 배가 고프지 않아 이 분들이 식사를 할 동안에 주변에서 기다린다

먹으러 왔는지 산행을 왔는지 독립군으로 산행을 하는 범여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다시 매봉으로 향하는데...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이 보이고...

계속되는 계단길

드디어 나무 계단이 끝나고...곧이어 돌문바위가 나온다

돌문바위(石門巖)

입자(入字) 모양으로 된 바위 옆에는 ‘청계산의 정기(精氣) 듬뿍 받아가셔요’ 팻말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탁발을 하던 스님이 계셨는데 요즘은 보이질 않으신다 

돌문바위를 지나면서 좌측 능선 아래 평평한 바위가 보이는 저 곳이 예전에 범여의 이지트였다.

저 곳은 등산객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옷을 벗고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때리던 곳이다

돌문바위를 지나면서 매바위 능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충혼비 안내판

안내판을 지나 우측 능선으로 50m정도 가면 충혼비가 있다

충혼비(忠魂碑)

세계최강의 특전부대 용사로 거듭나기 위한 공수기본 250기 대원들은 3주간의 지상 훈련을

마치고 1982년 6월 1일 자격강화를 실시하기 위해 공군 수송기(C-123)에 탑승하였다.

서울시 거여동 소재 강하장으로 이동하던 중 짙은 안개로 방향을 잃은 공군 수송기는 청계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추락하였고, 당시 수송기에 탑승하였다가 사망한 특전교육단 장병 및 교육훈련

간 중 순직한 영령 53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햐여

이 충혼비를 청계산에 건립하였다.
이들 53인(특전교육단 교관5명, 교육생44명, 공군부대원4명)의 유해는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의 31, 32번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매바위(578m:鷹岩)

예전에 매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몰라도 국민은행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고,

주위 전망이 뛰어난 곳으로 구룡산과 대모산이 보이며 그 너머로 우리 아파트도 보이는

곳인데 미세먼지 탓에 오늘은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구룡산과 대모산.

서울 강남구와 서포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대모산과 구룡산

대모산(大母山:293m)의 지명유래는 산의 모양새가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의 헌릉이 산 아래에 모셔진 이후 어명(御命)으로

대모산(大母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구룡산(九龍山:306m)은 서초구 염곡동과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 산을 자세히 보면

9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염곡동을 감싸안은 구룡산(九龍山)은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10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1마리가 떨어져 죽고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가

구룡산이라 불리게 되었고, 하늘에 오르지 못한 1마리는 좋은 재목, 좋은 재산인 물이 되어 양재천(良才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보다 낮은 이 산의 주봉(主峰)은 국수봉(國守峰)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전부터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고 한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인능산(仁陵山:326.5m)

서울 서초구 내곡동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인릉산이라는 명칭은

『대동여지도』나 『광주부읍지』에는 천림산(天臨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나 산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朝山)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무단으로 왜곡한 것이라고도 한다.

매바위 정상에서 김해등산클럽 회원님들

매봉(鷹峰:582.5m)

서울 서초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3시(市) 경계봉이다.

청계산의 최고봉은 만경봉이나, 그곳은 국가의 중요시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등산객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청계산의 주봉(主峰) 노릇을 하고 있으며 사시사철 등산객이 많은 곳이다.

왜 매봉이라 불렀는지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예전에 이곳에 꿩과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단다.

우리 속담에 ‘꿩 잡는게 매’라고 했는데 꿩을 잡아먹는 매들 때문에 생긴 지명은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이곳 전망대에서 날씨가 좋으면 북쪽으로 코 앞에 있는 우면산은 물론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인데 미세먼지로 인해 모든게 五里霧中이라 김해에서 오신 분들이 실망이 많겠다. 

왠 누비길?

오랫만에 온 탓인지 예전에 없던 시설물들이 많이 보인다

웬 넘의 인공 시설물들이 많은지...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거

매봉 정상에 있는 막걸리 장수가 호황이다.

나는 이곳래에 창수씨네 가게에서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한잔 할 생각이다 

매봉 아래로 내려서니 창수씨네 막걸리 가게가 철거되어 버렸다.

왜?... 다른 막걸리집은 다들 멀쩡하게 있는데 창수씨네만...

이 친구가 청계산의 막걸리집 원조인데...내려와서 보니 알 것만 같다.

과천 서울대공원 철조망에 있었던 창수씨네 막걸리집

대공원과 알력이 있었는지 철거된 자리에는 대공원의 경고문구가 붙어있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살아있는 권력과는 맞서지 말라고...

 

이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어리지만 청계산에 오래 장사를 한터라 안면이 많다.

그리고 고향(합천군 초계면)도 나와 비슷하여 친하게 지냈고, 평일날 장사를 안하는 날에

지나갈 때는 막걸리 숨겨논 곳에서 막걸리 한잔을 훔쳐먹고(?) 다음 산행에 외상값도 갚았는데...

쥔장은 없어지고 막걸리를 먹는 등산객에게 먹이를 얻어 먹는 새들만 주위를 맴돌고 있다

655m봉

협읍재(血泣峙)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에 있는 서울대공원에서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을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였던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 실현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을 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이 고개를 혈읍재라 명명하였다.

정여창 선생은 청계산 금정수(金井水:망경대 아래 석기봉 옆)에서 은거하다가 결국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 벗 김굉필과 함께

유배 후에 사사(賜死) 되었으며, 그 후 갑자사화 때 함경북도 종성땅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연산군의 왕사(王師)이었던 정여창은 연산군에게 2번이나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예전에는 이 등로는 아주 고약하고 험했는데 지금 데크목 계단이 있어서 꽃길이 되어 버렸다

이정표로 보면은 만경대쪽으로는 접근을 못하게 등산로를 폐쇄해놨는데 생전 처음 오시는 분들에게

청계산의 최고봉인 만경대(望京臺)를 구경 시키주지 않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정표를 따라 가버리면

만경대 뿐만 아니라 석기봉까지 놓치는 憂를 범하는데 그럴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곳은 청계산의 등로중에 가장 험한 곳이라 조금은 걱정이 된다.

힘들게 만경대를 오르시는 김해등산클럽 회원님들

망경대(望京臺:618m)

경기도 상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과천시 막계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청계산의 최고봉이지만

국가의 중요 시설과 kt 송신소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민간인의 접급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우측 아랫쪽에 과천정부종합청사와 서울대공원, 경마장이 보이고 좌측 아래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망경대(望京臺)는 청계산 정상으로(618m) 바위 절벽위에 있는 곳인데 옛날 성터와 망루가 있었다 하며

목은 이색(牧隱 李穡)등이 송도를 바라봤다 하며 만경대(萬景臺)라 불리다가 정여창에 의해 망경대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자 통곡했던 조견. 이성계가 조견의 절개를 찬양하면서 호조전서에 명했지만 조견은

이를 거부하고 이 곳 청계산으로 들어온다. 조견은 망경대에 자주 올라왔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해서

만경(萬景)이라 이름 지었지만, 후에 사람들이 "수도 개경을 바라봤다"는 뜻으로 망경(望京)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성계와 조견은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망경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629m)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풍이 바위와 어우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으며,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5악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예전에 이곳에 망경대란 정상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흔적만 보인다

청계산은 서쪽에 위치한 관악산(冠岳山, 629m)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루는 산이다

고려말 이색의 시에 ‘청룡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청룡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과천 관아의 왼편에 해당되어 좌청룡에서 청룡산의 산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는 청룡이 승천했던 곳이라 청룡산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망경대(望京臺)ㆍ국사봉(國思峰)ㆍ옥녀봉(玉女峰)ㆍ청계봉ㆍ이수봉 등 여러 산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기반암을 이루는 것은 화강편마암으로 호상(縞狀)을 이루는데, 정상에 있는 망경대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우며 주능선의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으며 산의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서쪽 사면에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서울경마장이 들어섰으며, 산의 서쪽 기슭으로 서울대공원 및 서울랜드 등
시민을 위한 휴양시설이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입지하여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북한산이나 관악산이 화강암 기반으로 바위가 많이 솟아 있으니, 청계산은 편마암 산지로 흙이 덮여있어 주말이면

찾는 등산객이 많으네 산의 중턱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자료 6호인 청계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울대공원이

98년 6월부터 삼림욕장을 개설하여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등산로는 성남시 상적동 옛골에서 시작하거나,
의왕시 청계동에서 오르는 길이 있으며, 특히 서초구 원지동에 위치한 등산로 입구는 교통이 좋아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

청계산은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등 우국절사들이 청계사와 망경대,

금정수에 숨어들어 고려의 국권회복을 꾀했던게 그 하나이고 남쪽 국사봉은 이색들이 기우는 나라를 걱정했다하여

붙인 亡國의 恨이 서려있는 산이기도 하다

주암동쪽에서 망경대 쪽으로 오르다 보면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의 묘터가 있던 옥녀봉이 나타난다

망경대에서 뒤돌아 본 청계산의 모습

망경대에는 여말선초의 고려충신 조견의 이야기가 전하는데청계산은 유달리 고려충신들에 얽힌 지명이 많다.

김해등산클럽 회장님의 포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 능선으로 내려간다

멋진 낙락장송도 예전 그대로인데 나만 변해 가는가 보다

등로에 내려서서 석기봉으로 향한다

접근할 수 없는 망경대 정상의 모습

군부대 옹벽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가서...

석기봉 아래에 있는 금정샘과 마왕굴쪽으로 향한다

금정수(金井水)

석기봉 아래에 있는 석간수(石間水)가 흐르는 샘이 있는데 금정수 또는 하늘샘이라고 한다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였던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이 이곳에 은거하며 애용했던 샘으로

무오사화와 관련하여 벗인 김굉필과 함경도 종성땅에서 사사되자 이 샘이 핏빛으로 변했으나

사후(死後)인 1517년(중종12)에 복권이 되자 샘물이 금빛으로 변하여 충절의 금정수라 부르게

되었는데, 금정수의 유래는 과천현 신수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능선3거리에서 조금 내려가 능선3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마왕굴,마왕샘이있다계속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이다고려가 망하기 직전 맥이라고 하는 이상하게 생긴 큰 짐승이 여러 산짐승을 몰고 이 굴로 들어갔다 하여 "오막난이굴"이라고도 불리며 마왕굴 암벽사이에서 솟는 샘물이 있는데 마왕샘(단비샘)이라고 한다 고려말 충신 송산松山 조견(조윤趙胤1351-1425)선생이 청계산에 은거하면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산행후 식사시간도 있고 선두와의 산행거리 차이도 있어서 마왕굴 안내는 포기하고 

 금정수를 본 다음에 가느다란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하여 석기봉으로 올라간다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는데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

(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람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

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마왕굴(魔王窟)윗쪽의 모습

고려가 망하기전에 청계산 정상의 지명은 ‘만가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만경대(萬景臺)라

하였는데 조선초기에 고려의 유신(遺臣)들이 망국(亡國:고려)을 흠모하여 망경대(望京臺)로 불렀다는

청계산은 산자락이 깊고 넓어 나라가 평안할 때 왕의 사냥터로 주로 이용했고, 나라가 혼란스럽고,

탐관오리가 들끓을 땐 산적과 범죄자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단종과, 세조, 성종, 연산군 등이 주로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겼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청계산에서 각종 새들과 노루, 뫳돼지, 토끼 등을 많이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기봉 아래에 있는 마왕굴은 무오사화 때에 청계산으로 숨어든 정여창이 숨었던 굴이란다.

무오사화 때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정여창은 인적이 드문 청계산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지리산이나 덕유산으로 가기위해 영남대로로 들어섰다가 관원들이 하루 묵던 원터에서

뒤쫒아 오던 군사들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기봉(石基峰:592m)

청계산에서 망경대와 함께 조망이 가장 좋은 봉우리로 원래의 지명은 신선대(神仙臺)였는데

미군들에 의해 영문낙서(yankee rock:미국사람 바위)가 심해지자 석기봉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석기봉에서 뒤돌아 본 망경대의 모습

가야할 이수봉(貳壽峰)의 모습과 등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국사봉의 모습

석기봉에서 다시 등로로 내려간다

혈읍재에서 망경대로 가기위에 헤어진 등로와 다시 만난다

이곳은 예전에 헬기장이며 넓은 공터라 산객들의 쉼터였는데

2년동안 오지 않았더니 없었던 군부대 시설이 들어서 산객들을 괴롭힌다

뒤돌아 본 망경대와 석기봉의 모습

이수봉 방향으로 길을 떠난다

예전의 길이 좋았는데 돈을너무 쳐발라 놓아 자연스런 맛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민초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인데 그대로 둘 것이지 뭔 지랄인지...

헬기장

오랫만입니다

헬기장 아래에 있는 상적천(上笛川) 발원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을 흘러 탄천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성남시의 서쪽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청계산과 인릉산 산지에서 발원하여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과 고등동을 지난 후 둔전동에서 성남시 중앙부를

관통하는 탄천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봄이 오는 소리

다시 이수봉으로 향하는 등로로 복귀한다

예전에 저곳에 막걸리 파티를 많이 벌렸던 곳인데...

뒤돌아 본 석기봉의 모습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들이 많이 보인다

통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지난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아서 그런지 등로는 질척거리지는 않구나. 

절골 갈림길로 올라선다

이 코스는 철쭉능선 또는 목배등 능선이라고 하는데 진달래 능선과

함께 청계산의 주 등로로서 등산객이 가장 많은 곳인 편인다

절골 갈림길

우측으로 내려가면 경기도 지정문화재 자료 6호인 청계사가 있어서 절골이라고 한다

이곳은 백운산에서 시작하여 염창교 아래에 한강과 안양천의 합수점인 관악지맥 능선이기도 하다

청계사 와불상(臥佛象:경기문화재 자료 제6호)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사 극락보전 우측에 봉안되어 있어며 길이 15m,

높이 2m, 돌로 모자이크식으로 되어 있으며 1997년 주지 지명스님이 발원하여

1999년에 봉안된 와불이다

松山조견(趙絹)선생과 망경대(望京臺)

송산 조견선생(1351~1425)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초휘는 윤(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송산(松山), 시호(詩號)는 평간공(平簡公)이다.고려충렬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말 영남 안렴사(嶺南按廉使)로 있을 때 나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두류산(頭流山.현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鵑)으로 고치고, 자도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조선 개국초에 이태조가 공(公)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능을 아껴서 호조전서(戶曺典書)에 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 하여 건너편 망경대(望京臺)에 자주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슬퍼 하다가 마왕굴 샘물로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본래 상봉에 오르면 눈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그곳에 자주올라 개경을 바라보았다하여 "망경대" 부르게 되고 세간에는 망경대의 노래도 유행 되었다고 한다.이태조가 한양에 정도 한후 다시 조준을 대동하고 청계사로 찾아가 옛친구 사이로 마주앉아 도와 줄 것을 간청했지만 한번 굳은 맹세를 돌이키지는 못하고 청계산일대를 붕지로 내려으나 공은 곧 양주 송산마을로 옮겨 은거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헬기장

비박용 텐트치기는 끝내주는 곳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국사봉(國思峰:540m)의 모습

고려말의 충신 조견이 이 봉우리에 올라 나라(고려)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 국사봉(國思峰)

또는 국은봉(國恩峰)의 이름으로 불리워오다가 이 봉우리 밑에 있는 운중동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개원되자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국은봉(國恩峰)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2016년 7월 6일 관악지맥길에서 찍은 사진

멋진 소나무들도 오랫만에 온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웬 의왕대간... 하는 짓거리하고는 백두대간도 아니고 의왕대간이라니

모르면 하지를 말든가, 전문가에게 물어나 보던가...하옇던 무식하기는...

이수봉에 도착하니 완전히 넓은 공터로 변해 버렸다

이수봉(貳壽峰:545m)

조선조 연산군 때 연산군의 스승이자 유학자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선생이 스승 김종직과친구인

김굉필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자, 변고를 예견하며 한때 이 산에 은거하여 ‘생명의 위기를 2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선생이 이수봉(貳壽峰)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이수봉의 정상은 원래 동쪽의 통신탑 안의 봉우리이나

출입금지구역이라 이곳에 정상석을 세웠다고 한다

국사봉 갈림길

왕복 3km의 거리라 포기하고 옛골로 향한다

길은 무쟈게 좋고...

544m봉

정상에는 이수봉 통신탑과 성남시 도시환경연구소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측 어디를 가던지 다시 등로는 만난다

우측으로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국사봉이 보인다

철조망을 따라서 가니...

다시 길은 만나고...

이수봉 통신탑을 내려서니 쉼터의 넓은 평상이 있는데...

이곳의 구조 이정목에 ‘구름다리’라고 해놨다...청계산에 구름다리라...

이수봉에서 국사봉을 지나 공동묘지 아래 발화산으로 이어지는 성남과

안양으로 통하는 서울외곽고속도로 위에 구름다리가 있긴 하지만 여기와는

전혀 관련도 없고 거리도 3여km 가까이 떨어졌는데 거길 말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좌측 능선으로 가면 어둔골로 해서 정토사로 이어지는 호젓한 등로가 있다.

오랫만에 오다가 보니 등로가 많이 바뀌어 버렸다.

청계산이 흙산(陸山)이다 보니 많이 질척거려서 그런지 거적때기 같은걸 많이 깔아놨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청계산 매봉의 모습

번지없는 주막이라...청계산 원조격인 창수네 막걸리집은 박살이났건만 성남시 관할인

철쭉 능선길은 막걸리집 여러개가 보인다...예전엔 이집 쥔장은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봉침 한방씩 놔주고 막걸리를 팔곤 했는데, 나도 무릎에 서너방을 맞은적도 있었지. 

새로 생긴 구조 이정표가 많이 보인다

485m봉

갈림길

좌측으로 내려가면 이슬샘과 거북바위, 어둔골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등산객들이

거의 찾지않은 히든 계곡이다...범여가 자주 이용하는 능선이며, 능선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이슬샘이 있는데 무심코 지나가면 그냥 스치기 좋을 정도로 희미하다

 

이슬샘은 뱀들이 이용하는 샘으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청계산 부근 주민들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이슬샘 찾기를 갈망했다. 하루는 병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하는

처녀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슬샘의 위치를 알려 주어 아버지의 병을 고칠수 있었다.

효녀의 정성이 지극하여 뱀이 자기들만이 먹는 이슬샘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지금은 없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쉼터

무명봉

등로 가운데 있는 고엽(枯葉)

목배등 삼거리

목배등은 금토동에서 상적동 옛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에서 ‘등’이란 말은 가파른 절벽을 일컫는 말인데 목배등이라...유래는 알 길이 없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어둔골 위 정토사의 산신제를 지내는 치성터 제단이 있다.

무명봉

금토동(金土洞) 갈림길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금토동은 수정구 최남단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이 지역은 금현동,

바깥말(바깥골, 외둔토리, 바깥두리이골), 안골(안골, 안둔토리, 안두래이골)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정동인 시흥동에서 관할한다.
금현동(金峴洞)에서 '금'자를 취하고 ‘둔토리(遁土里)’의 '토'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원래 이곳의 옛 지명은 월천리(月川里) 또는 월오천리(月午川里), 월아천리(月兒川里)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인근 ‘달래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며, 금현동은 옛날 이곳이

금이 나오던 고개 밑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둔토리는 군대가 머물렀던 곳이라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호젓한 등로로 내려간다

쉼터봉

예전에 없었던 구조물이 많이 보이는데 지맥꾼이라 그런지 인공 구조물이 거북하게 보인다

영남길의 표지판도 보이는구나

307m봉

옛골 가는 길

저 여인도 나처럼 독립군 스타일인 모양이다

산은 이것 저것 간섭받지 않고 다니는 나홀로 산행이 최고지

306.2m봉

계속되는 내리막길

봉오재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서 상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곳

아래는 자꾸만 개발로 인해 옛 모습이 없으지니 안타깝기만 하다.

금토동에서 천림산봉수지로 가는 고개라 하여 봉오재라고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상적동(上笛洞)의 모습

흔히들 옛골이라 부르는 상적동은 과거 호걸들이 피리를 불며 유람하던 곳이라 하여 적촌, 저푸리,

적취리라 하였으며, 저푸리를 중심으로 노상동과 노하동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상동의

 ‘상’자와 적취리에서 ‘적’자를 합하여 상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인근에 살던

덕수 이씨네의 잦은 과거급제(등과)로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305m봉

경부고속도로 방음벽에 막혀버린 달래내 고개(月川峴)

오늘날의 서울 양재역에서 성남 판교 낙생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최초의 큰 고개. 조선 초기에는

천천현(穿川峴) 또는 월천현(月川峴)이라 하였다.

달래내고개의 어원적 유래는 월천현의 우리말인 달래내에서 비롯되었으며 한편 대동지지에 의하면

 ‘달이내현(達而乃峴)’이라고 하며 원래의 고개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사라져 버렸으며

서울의 교통방송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 헌. 인릉(獻 . 仁陵)과 한양의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의 주장에 의해

고개의 통행을 막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이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자리잡고

있었고, 달아와 달오 남매의 설화가 전승되어 오지만 달래내 고개의 명칭과 관련된 근원 설화로 보기는 어렵다.

또 이 고개 위에는 조선시대 국방통신 유적인 천림산 봉수터가 남아있다

  

달래내 고개의 설화에는

옛날 청계산 아랫마을에 ‘달아’와 ‘달오’ 라는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달오가 누나를 보러 시냇가까지 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동생을 보고 반가워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는 달아의 모습은 비에 흠뻑 젖어 속적삼 안으로 몸매가

다 드러난 여인의모습이었다. 비에 젖은 누나의 몸매에 음욕을 느낀 동생이 이를 죄스럽게 생각하여

돌로 자신의 검열삭제를 찧어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를 안 달아는 자신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하며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하여 ‘달래내고개’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옛골로 내려서는 길

청계산 등산 안내도

천림산 봉수지(天臨山烽燧址)

천림산 봉수는 조선시대 5거의 봉수제에서 부산 응봉(鷹峰)에서 처음 보내는 제2거 직봉노선(直烽路線)의

내지(內地) 봉수로,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최종 서울의 목멱산(현 남산) 제2봉에

신호를 보냈던 경기도 관내의 마지막 봉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림산 봉수는 시대에 따라 명칭이 천천산(穿川山) → 천천현(穿川峴) → 천림산(天臨山)[또는 월천현(月川峴)]

등으로 3차례의 명칭 변경이 있었다. 봉수 명칭이 다양하게 변천한 것과 달리 노선은 남쪽으로 용인 석성산 봉수,

북쪽으로 서울 목멱산 봉수에 응하는 등 변화 없이 일관성을 유지했다.

청계산 산행을 종료하고 옛골로 내려선다

봄이 오는 소리

범여의 제적사찰이자 은사스님이 회주로 계시는 정토사의 모습

오랫만에 청계산에 오니 많은 것이 새롭게 생겼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있었는데, 이 중 경기도를 지나는 주요 6개의

도로망은 제1로인 의주로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경흥로·평해로·영남로·삼남로·강화로가 있다.

이러한 원형길을 바탕으로 새롭게 조성한 길이 바로 ‘경기옛길’이다. 

경기 옛길 중  영남길은  10개구간으로  총 116km

1구간  달래내고개길  10.2km

2구간 낙생역길 11.7km

3구간  구성현길 14.7km

4구간 석성산 길  6.5km

5구간 수여선옛길  11.6km

6구간 은이성지 마애불길 15.4km

7구간 구봉산길  13km

8구간 죽주산성길 13km

9구간 죽주성지 순례길  9.9km

10구간 이천 옛길 9.9km이다

뒷풀이 장소인 옛골토성

이 집 쥔장인 권태균 회장님과 범여는 30년 넘게 개포동에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는 사이이다

이곳에서 김해에서 온 후배님의 산악회와 식사를 마치고 헤어진 다음에 봉은사의 홍매화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