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100대名山 山行記

꺽어진 날개를 추스려 飛翔을 꿈꾸며 수락산을 오르다

by 범여(梵如) 2018. 9. 2.

☞ 산행일시: 2018년 07월 22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산행하기 좋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8.7km / 4시간 25분정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장암역-박세당 고택-노강서원-석림사 일주문-수락산 초소- 석림사 -선유곡

                  제1쉼터-갈림길-안부-기차바위 입구- 독수리 바위-기차바위-쉼터

                  거북이 바위-내원암 갈림길-수락산 정상-청학리 갈림길-철모바위-조망바위

                  하강바위(장군봉)-조망바위-코끼리 바위-치마바위-수락골 갈림길-도솔봉 아래

                  도솔봉-도솔봉 아래-쉼터-372.6봉-너럭바위-NO19송전탑-수암사갈림길

                  순화궁고개 갈림길-동막골-유아체험장-수락정-당고개역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 남양주시 별내읍

 

수술 후 퇴원한 지가 어언 2달이 지나가건만 아직도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거기다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6주간 받아야 하는 방사선 치료는 참으로 힘이든다

아직도 방사선 치료가 2주일이나 남았는데 요즘 날씨는 왜 이리 청명하고 좋은지?

토요일 저녁만 되면 베낭을 지고 집을 나선 습관 때문에 일요일 새벽까지 잠을 못자고 날을 지샌다

그래! 죽어도 내가 좋아하는 산에서 죽는다면 그건도 행복이려니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 물 한통과 옥수수

2개만 챙기고 가족들의 눈치를 보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재빨리 집을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장암역(09:20)

버스를 타고 강남구청역까지 와서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장암역 종점까지 왔다.

장암역에서 내려 맞은편 도봉산을 바라보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듯 싶다.

이렇게 좋은날에 왜 집에 갖혀 있어야 하는지... 좋은 생각을 하니 통증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산행을 시작하다(09:25)

수락산 정상을 바라보며 산행을 시작하는데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는 산을 안 온지가 10년이 넘었으니?

장암골로 오르는 길... 걸을 수 있다는 벅찬 감격에 모든게 즐겁기만 하다

의정부시 장암동은 원래 둔야면(芚 夜 面부)의 장자리(長者里)와 조암리(鳥巖里) 일부, 그리고 동막리(東幕里)를

합쳐 장자리와 한자씩 따서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때 시둔면 장암리(長巖里)로 개칭되었다.
1964년 5월 8일「의정부시의명칭과구역에관한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장암동이 되었다.

 

며칠전 비가 많이 왔는지 개울이 비의 피해가 뚜렸하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닭백숙을 파는 식당들이 많이 보이고 개울 건너에 서계 박세당 선생 사랑채와

묘역이 보이건만 이곳에서 접근을 할 수 없겠끔 되어있어 포기하고 그냥 길을 나선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사랑채(09:53)  서계 박세당은 인조 7년(1629)에 남원부사 정( )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숙종때의 실학파 학자로서 예조좌랑, 병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내다가 4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장암동 석천동(石泉洞)으로 돌아와 궤산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색경(穡經)』이라는 농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으며 고전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사변록(思辨綠)』을 저술하였다.

 

궤산정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서계의 생가가 있고 주위에는 그가 심었다고 전해오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지금도 무성함을 자랑하고 있다. 서계 박세당 학당터는 궤산정 북쪽에 위치한다. 이 곳에는 서계 영당이 있고 영당 앞에 『색경』에 나오는 기록처럼 서계 박세당이 심었다는 대나무가 있다. 이 곳 계곡을 석천동계곡이라고 하는데 서계 선생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붙인 이름이다.

오랫만에 안내 산악회 팜플렛을 보니 더없이 반갑구나

청풍정(淸風亭) 터(10:00)청풍정은 노강서원(鷺江書院) 앞에 있는 정자로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후에 처음에는 청풍정에 숨었다가 폭천정사(瀑泉精舍)로 옮겨 은둔하였다고 한다.


청풍정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影堂)을 짓고

그 앞에 세운 정자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주추의 크기는 높이 90㎝, 아래 폭 60㎝,

위 폭 38㎝ 정도이며 모두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주추간의 거리는 가로 2.2m, 세로 2.4m인 것으로

보아 정자의 평면적은 1.6평 정도로 추측된다.

 

정자 아래쪽 계곡 암면에는 수락동천(水落洞川)이라는 매월당의 친필이 남아 있다.

이 글씨는 매월당이 전국을 유랑 할 즈음 이 곳 수락산에 머물고 있을 때 남겨 놓은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노강서원(鷺江書院:경기도 기념물 제41호:10:02)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15년)에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하다 죽음을 당한

정재 박태보(朴泰輔:1654~1689)의 뜻을 기리고  지방 교율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1695년(숙종21년)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하였다.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1697년(숙종23년) 숙종이“鷺江”이라고 이름을 지은어 새긴 현판을 내렸다.

이후 1754년(영조30년)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 이후에 남은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반남박씨(潘南朴氏) 16세손인 박태보는 1677년(숙종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689년(숙종15년)에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를 가던중에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94년(숙종20년)에 모든 죄를 사면받고 그의 충절과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이조판서의 벼슬과 문열(文烈)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노량진 노강서원은 6.25 전란으로 소실되어 1969년에 의정부시 장암동 현 위치에 아버지인 서계 박세당 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했던 청절사의 옛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

노강서원 홍살문

홍살문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으로 예를 갖추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문이다

노강서원 외삼문

현판에는 정조신해(正祖辛亥) 사액(賜額) 표기로 보아서는 이 현판의 편액은 정조15년(1791년)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 문이 낮은 대문을 ‘솟을 삼문’ 이라고 하는데 보통때는 양쪽 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모실때는 세문을 다 열어 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동.서 협문만

동협문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나올때는 서협문으로 나오는데 오늘은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석림사 일주문(10:05)

석림사(石林寺)은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48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서울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쉼터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석림사가 자리한

수락산은 도봉산ㆍ북한산과 함께 서울 시민의 쉼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계절에 상관없이 이 산의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아 든다.

 

수락 8경이라 불리는 금류폭포ㆍ은류폭포ㆍ옥류폭포를 비롯한 기암 괴석과 샘들, 그리고 석림사, 박세당 고택,

노강서원 등 인근의 문화재들은 수락산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많은 이들의 심신을 부드럽게 해주며, 고요한 자아의

쉼터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

현재 옛 유구는 찾을 수 없고 조선후기 매월당 김시습이 읊조린 석림암기만이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옛 유구는 없지만 석림암은 반남박씨 박세당의 원찰로서 뿐만 아니라, 수락산의 정기를 이은

고찰로서 현대인들의 심신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경기도의 지장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다음 백과 인용)

일주문 천정 공포의 모습

수락산 초소(10:06)

일주문을 지나 올라오니 우측으로는 수락산으로 가는 등로가 있으나 석림사로 향한다

적묵당을 지나 큰법당으로 올라가는 샛길을 따른다

석림사 큰법당(10:58)

석림사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조선 중기에 박태보(朴泰輔)가 김시습(金時習)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96년(정조 20)에는 유담(裕淡)이 화주가 되어 삼소각(三笑閣)을 중수하였다.

1950년 6·25로 인하여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그 뒤 1956년에 비구니 상인(相仁)이 와서 대방(大房)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방을 중심으로 하여 요사채 2동과  칠성각·독성각 등이 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대방이 법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신중탱화 등을
봉안하고 있으며 대방 앞에는 1969년에 상인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여 건립한 탑이 있으며, 그밖에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전하고 있지 않다

[Daum백과] 석림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요사를 지나 큰법당으로 향한다

석림사는 편액과 주련이 모두 한글로 되어있어 정겹기만 하다

큰법당 외벽의 벽화

석림사 지장보살 입상

큰법당에 들려서 예를 올리려 했으나 비구니 스님 한분이 하도 열심히 염불을 하시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예를 올린다

큰법당 꽃문살의 모습

석림사 범종각

큰법당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본격적인 수락산 산행을 시작한다

조그만한 등로를 올라서니 선유곡 계곡이 나오는데 시원한 물줄기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얼마만에 걸어보는 이 곳이 아닌가? 

유곡(仙遊谷:10:23)

선유곡은 석림사 위에 계곡으로 옛날에 선녀가 와서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험막골, 중소난골(中小難谷), 열두바퀴 계곡이 있는데 험막골은 올라가기 힘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소난골은 선녀탕 밑 오른쪽 골짜기인데 이곳 역시 험하다고 한다. 열두바퀴 계곡은 수락산에 골짜기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큰골 또는 긴골 등으로도 불린다

선유곡에서 바라본 사패산의 모습

사패산()은산의 전체적인 모양, 혹은 큰 봉우리의 바위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갓바위산 또는 삿갓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조개껍질처럼 생겼다 해서 일부에서 사패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지도가 이것을 따라 쓰는

바람에 사패산이 되었다고 하며 혹은 조선 시대 선조()가 딸 정휘옹주()에게 하사한 산이어서 사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가야할 수락산 정상을 올려다 보는데 파란 하늘이 힘들게 산을 오르는 범여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제1쉼터(10:30)

제1쉼터 이정표

조그만 다리를 지난다

갈림길(10:33)

우측으로 가면 깔딱고개로 해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로가 있지만 오늘따라 기차바위가 가고 싶어 좌측으로 향한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부(11:18)

석림사에서 한번도 쉬질않고 이곳까지 올라왔건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도정봉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우측은 기차바위 길이다

담주에 지맥길을 함 나서봐?... 우측으로 기차바위를 향해서 간다

기차바위를 가면서 뒤돌아 본 도정봉의 모습

철난간을 지나니...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도 보인다

기차바위 오르기 직전에 만난 암릉

참으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구나

도봉산(좌)과 사패산의 모습

수락산은 서울 강북에 있는 산(도봉산, 북한산, 불암산)과 마찬가지로 암산이라 멋진 암릉들이 많이 보인다

계속해서 고도를 올린다

가야할 기차바위도 보인다

북한산(좌)과 도봉산의 모습

기차바위 입구(11:32)

이곳에서 직진으로 향하면 기차바위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다.

아무리 날개가 꺽어진 산꾼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컨티션 점검차에 나온 산꾼이 우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뒤도 안 돌아보고 직진길을 택한다

기차바위 입구 이정표

갈림길을 지나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기차바위 오르는 길에 뒤돌아 본 도정봉

2012년 7월 1일 수락지맥 길에 들렸던 산이라 정겨워 보이나?

능선에서 바라본 사패산과 그너로 양주 불곡산과 은봉산까지 시원스레 보인다

도봉산과 사패산 아래로 의정부 시내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다

 

의정부의 지명유래
조선 제3대 태종이 방번(芳善)과 방석(芳碩)을 살해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태조는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成興)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차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차사’ 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그후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부왕을 맞으려고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태조는 활의 명수이었기 때문에

중신 하륜(河崙)은 부왕 태조가 반드시 태종을 해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막에 큰 기둥을 많이 세웠다.

그 결과 태종은 부왕이 쏜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잔치가 시작되자 태종은 ‘헌수(獻壽)’의

뜻으로 친히 부왕 태조에게 잔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륜의 지략으로 하륜 자신이

잔을 올림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 지방에 장기간 머물렀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각 대신(大臣)들은 한양보다도 지금의 의정부로 와서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기 때문에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본격적인 기차바위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숨이 차기 시작한다

그래도 올라가봐야지...여기까지 왔는데...

독수리 바위(11:42)

기차바위(東峰:11:44)

기차바위는 기차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동봉이라고 하였다. 남양주시 청학리에서는

이 바위가 향로같이 생겼다고 하여 향로바위(향로봉)이라 부른다.

이 곳에 관한 서계 박세당의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東峰己無舊精舍 :동쪽 봉우리에는 이미 옛정사가 없어졌지만

道人風流誰繼者 :동쪽 봉우리에는 이미 옛정사가 없어졌지만

西溪老翁住溪畔 :도인의 풍류를 누가 아니 이어 받을꼬 서계 노옹은 시냇가에 머물며

獨愛東峰行坐看 :홀로 사랑하는 동쪽 봉우리로 나가 앉아 보노라니 동쪽 봉우리 높이 걸린 은하수 곁에는

道人道超隨夷前 凡僧俗士不好事: 도인의 뛰어난 도가 평평한 곳을 따라 앞서는 구나 무릇 승려나 세속의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道人遺蹟今莫記 : 도인의 남은 자취 이제 기록이 없고寂寞空岩今久倚: 적막하고 쓸쓸한 바위에 기대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을 읊는데

東峰月照西溪水: 동쪽 봉우리에 뜬 달 서쪽 시냇물을 비추는구나

 

기차바위로 올라서니 숨이 멈춰버릴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이곳에서 등로를 살짝 벗어나 드러누워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주봉으로 향한다

쉼터(11:57)

기차바위 우회로

거북이 바위(12:00)

내원암 갈림길(12:01)

2012년 7월 1일 수락지맥 길을 걸었을 때 이곳을 지나갔으니 참으로 오랫만에 왔구나

이 능선 아래에 유서깊은 내원암이 있었는데...

수락지맥길에 찍었던 내원암의 모습(2012.07,01)

수도권 시민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고 있는 수락산에는 ‘경기도의’의 갓바위라는

별칭을 얻고 있을만큼 수많은 기도 영험담을 갖고있는 기도도량 내원암이 있다.

미륵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곳. 도솔천 내원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내원암은 수락산

중턱에서 조금 더 올라간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불교 경전속의 내원궁의 묘사가 그러하듯 내원암도 사방이 시원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내원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자

내원암은 비구니 도량으로 역사가 꽤나 깊은 사찰이다

내원(內院)이란 도솔천에서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56억 7천년만년 뒤에

사바세계로 내려와 중생을 구원할 미륵불이 계시는 곳이 도솔천 내원궁이다

 

이곳 내원암에는 실물로는 볼 수 없으나 경기도 유형문화재 197호로 지정된 괘불이 있다.

괘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그 아래에는 관세음보살, 그리고 좌.우에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그려져 있으며 법회나 큰 행사때만 내건다고 한다

멋진 소나무도 예전 그대로이다

주봉으로 올라선다

수락산 정상길에서 바라본 의정부 l.C와 도봉산의 모습

수락산(水落山:637m:12:09)

경기도 의정부시와 남양주시 별내면, 서울 노원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도봉산, 사패산

북한산과 마주 보고 있으며, 남쪽으로 덕릉고개를 중심으로 불암산과 이어진다

산세는 비교적 험하지 않으며, 중량천의 이 산 중턱에서 중랑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암벽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수림은 울창하지 않다

 

동쪽 사면의 금류계곡에는 금류동(金流洞),은선동(隱仙洞), 옥류동(玉流洞) 폭포가 있으며

조선조 정조 때 300일 기도를 올려 순조의 탄생을 보게 했다는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계곡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등산로가 다양하고 교통이 편리해서 등산객의 많은 곳이다

 

수락산(水落山)의 지명에 대해서 몇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첫째는 의정부 내원암 일대

계곡의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수락(水落)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 과 같다해서 붙혀졌다는

설이 있으며 또다른 설은 어느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간 아들을 찾아 ‘수락’이라는

이름을 외쳐 부르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은 뒤 비오는 날만 되면 ‘수락아 수락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지명이 수락산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수락산 능선상의 암봉들은 모두 서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이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 건국 후 수락산을 서울의 수호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수락산 정상의 모습

수락산은 서울의 서쪽의 인왕산으로부터 북한산 도봉산을거쳐 서울의 동북쪽을 지키는 산이다.

아래로 불암산 아차산 용마산등이 연이어지고 멀리 남쪽으로 관악산부터 우면산 구룡산 대모산등이 어림된다.

트레킹코스로 잘 알려져있는 수락산은 불암산과 이어진 능선에 봄철 철쭉이 아름답다.

산길이 험하지 않고 서울시내에 위치해있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산이다.

일설에 조선조 이태조가 수락산이 서울을 등지고 앉은 산세를 하고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지로 삼은 왕의 뜻에 어긋 난다하여 반역산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증

태극기가 있는 주봉 정상석 저 윗쪽 암릉위에 삼각점이 있는데 오늘은 저 위에 올라갈 자신이 있다.

수락산 정상의 군 삼각점(2012 07.01 수락지맥 때의 사진)

수락산 정상의 아이스케키 장수

아이스케키 2개를 3000원에 사서 먹으면서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다

주봉 맞은편에 있는 멋진암릉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편하게 내려선다

청학리(靑鶴里) 갈림길(12:25)

남양주 별내면에 있는 청학리는 용암천이 마을 곳곳을 흐르며, 마을 뒤쪽에는 산지가 있어서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자연마을로는 동락, 월촌, 사기막, 정촌, 응달 등이 있다. 동편 은행나무에 청학이 살았다 하여 청학리라 하였다.

동락의 지명유래는 청학리의 지명유래와 같다. 월촌은 동학 건너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기막은 고려 시대에 사기를 제조하던 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촌은 정씨촌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응달은 동쪽에 높은 산이 있으며, 마을이 서편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응달졌다 하여 응달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학리 [Cheonghak-ri] (두산백과)

새로이 이정표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수락골 갈림길 이정표에서 윗쪽으로 올라서니 수락산의 명물인 철모바위가 나온다

철모바위(12:30)

철모바위를 내려오니 신발까지 벗어놓고 열심히 신문을 보고있는 산객을 만나는데 얼마후의 나를보는 느낌이다

철모바위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용마산 그너머로 롯데타워의 모습

철모바위에서 바라본 도솔봉과 당고개역의 모습

조망바위(12:35)

좌측 등산로로 내려가 편안한 등로를 택하고 싶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험한 암릉길을 택한다

가야할 길을 다시 한번 댕겨보고...

트랭글 앱에서는 저곳을 장군봉이라고 한다

조금전 암릉 사이로 내려온 길

하강바위(장군봉?:12:44)

이곳은 자일 타는 산꾼들이 하강연습을 한다고 해서 하강바위라고 하기도 하고 감자바위라고도 한다

조망바위(12:49)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안내도가 있고 바로 앞에는 장군봉이라 부르는

하강바위가 있고 건너편에는 멋진 코끼리 바위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코끼리 바위

접근할 수 없고 조망바위에서 바라만 볼 뿐이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노원구의 모습

한국 사람들의 아파트 사랑 참으로 대단하시다

온 천지가 아파트 밖에 안보이니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내리막길 걷는데는 불편한 점이 없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길을 걷는다 

치마바위(12:50)

오리봉 서쪽 밑에 있는 바위로 생김새가 주름을 잡은 치마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솔봉과 그 너머로 불암산도 보인다

이름모를 암릉에 올랐다가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당겨본 도솔봉의 모습

 수락골 갈림길(12:58)

수락골의 옛 이름은 벽운동계곡으로 서울 근교에서 알아주는 명소였다.

벽운동계곡이 있는 수락골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영의정

홍봉한이 별장을 짓고 사는 동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홍봉한의 맏딸인 정주의 생모 혜경궁 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서정성을 키워 훗날 '한중록' 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고 하는데 현재 덕성여대 생활관 안에 퇴락한 벽운동 별장의 안채 우우당이

남아 있는데,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은 간데없고 추사의 글씨로 쓴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온다.

수락골 갈림길에서 집에서 가져온 옥수수 2개로 점심을 대신하고 한참 동안 휴식을 취한다

수락골 갈림길에서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후 인적이 뜸한 도솔봉 아래로 향한다

도솔봉 아래(13:10)

이곳에서 덕릉고개로 이어지는 등로를 버리고 도솔봉으로 향한다

도솔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모습

도솔봉 가는 길

도솔봉 오르는 길에 불암산 좌측 아래로 새로 신도시로 조성되고 있는 별내면이 보이고

불암산과 그 아래로 57사단 연병장이 보인다... 젊었는 때 예비군 동원교육을 받았던 곳이다

도솔산(兜率山:540m:13:15)

예전의 수락지맥 길에서는 보지 못했던 봉우리가 도솔봉이라고 한다

어느 모 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다

 

도솔봉은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내원은 내원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원에서는 수많은 천인들이 오욕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욕계의 제4천에 불과한 도솔천이 이렇듯 이상적인 정토로 등장하게 된 것은 미륵보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7보와 광명 등으로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십선과 사홍서원을 설하는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천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연히 보리심이 우러난다고 한다[Daum백과] 도솔천 – 다음백과,

인증샷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도솔봉을 내려오면서 만난 암릉

도솔봉에서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데크목 계단을 조금 지나니...

쉼터(13:25)

쉼터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용마산의 모습

흥국사 방향으로 향한다

 

동불회 모임을 같이 하셨던 흥국사 주지이신 성일스님께서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들려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지만 성치 않은 몸이라 오늘은 그냥 집으로 향한다

흥국사(興國寺) 편액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글씨

흥국사는 덕절(德寺)이라고도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진평왕 21)원광(圓光)이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왕이 이 절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편액(扁額)을 하사하여

흥덕사(興德寺)로 개칭하였는데, 민간에서 덕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원당 때문이다.

1626년(인조 4) 다시 흥국사로 개명하였고 1793년(정조 17) 왕실의 시주를 받아 기허(騎虛)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818년(순조 18) 만월전(滿月殿)과 양로실(養老室)을 제외하고 모든 요사(寮舍)가 불타버린 뒤, 4년 만에

왕명에 의하여 기허가 대웅전 등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였고, 1856년(철종 7)은봉(隱峰)이 육면각(六面閣)을

중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870년(고종 7)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였다.

 

1878년에 다시 불타버린 것을 용암(庸庵)이 중건하였으며, 1888년제암(濟庵)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이 절은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모신 이래 왕가(王家)에서 편액을 내리고 중수·중건을 몇 차례 실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특별한 사찰로 특히,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용주사(龍珠寺)·

백련사(白蓮寺)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들이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한 사찰로 채택되었다

372.6m봉(13:35)

372.6m봉 삼각점(△성동409 / 1994복구)

너럭바위(13:37)

너럭바위 아래로 향한다

8여년전에 홀로 걸었던 한북정맥 능선도 시원스레 보인다

NO19 송전탑(13:39)

수암사 갈림길(13:40)

등산객이 한명도 없는 호젓한 등로를 홀로 걷는 이 맛!... 이 맛에 산에 미치는 건 아닌지?

순화궁 고개 갈림길(13:45)

남양주시 별내면  국사봉과  수락산 사이에 별내와 청학리를  넘어가는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남양주시 별내면 지역에서는 순화궁 고개라 부르는데 순화궁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명확하게 남겨진

사료나 연관 지을만한 흔적은  없는데  이 지역에 조선왕조 제14대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와

그의 소생인 순화군  이보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별내  신도시에서  북쪽지역  노원구 상계동 당고개 쪽으로 가는 길에서 덕릉터널을 가기전에 우측으로 

청학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2차선의 도로로 길게 뻗어 올라가는  순화궁 고개가 나오며

순화군의 묘는 그 고개를 넘어가기전에 왼쪽으로 수락산이 오른쪽 산인 국사봉 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순화군은 선조와 후궁 순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6남으로 본명은  이보이다

참으로 곱다...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이곳에서 덕릉고개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동막골 골짜기로 내려서 당고개로 향한다

수락산 아래에는 동막골이란 고개가 2곳이나 있는데 흔히 불.수.사.도.북 오산종주를 할 때 지나는

의정부시 장암동 동막골과 지금 내가 하산길에 길에 걷고 있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 동막골이 있다.
수락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의정부시 장암동 동막골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서울 노원구
상계동 동막골이 자리잡고 있다 

 

동막골이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아 저수하던 동막이가 있던 골짜기','마을 입구나

요지(要地)에 동막(洞幕)을 두었던 골짜기', '동쪽 막' 등이라는 유래 설이 전한다.

아마도 '동막골'은 동쪽이 막힌 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동네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동막골이라 하였다

노원구 유아체험장(14:05)

수락정(水落亭:14:08)

국궁장인 수락정이 나오면서 편안한 도로로 내려선다

수락정 안내판

당고개 가는 길에서 만난 서울둘레길 - 노원지역

노원구는 서울 최동북부에 위치하며 북쪽과 동쪽으로 수락산, 불암산 등을 통해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맞닿아 있다. 구의 서쪽 경계를 따라 월계동을 관통하며 중랑천, 당현천이 흐른다.

노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갈대(蘆)만 무성해서 행인들이 불편을 겪어 여관인 원(院)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단순히 갈대(蘆)가 많은 들판(原)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서울시 둘레길에  서있는 등산 안내도

도로를 따라서 약 1.5km 걸어서 가니 지하철 당고개역이 나온다

지하철 당고개역 주변의 모습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옥수수 2개를 먹은 탓인지 배는 그리 고프지 않다

그래도 끼니는 제때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최근에

개업한 중국집이 보인다... 이곳에서 쟁반짜장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당고개역으로 향한다

당고개(堂峴)역(14:35)

옛날 성황당이 있었고 또 미륵당이 있는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한자명으로 당현(堂峴)이라고 하며,

미륵당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영조 때 40여 년을 궁에서 지내며 사도세자를 섬겨온 궁녀

이씨가 사도세자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워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내의원 소속
봉사 한 사람이 죽었다고 진단한 후 노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보살펴 몸이 회복되었다.

이씨는 봉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봉사의 조카 남매를 수양아이로 삼았으며, 어린 남매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이씨의 신분을 안 이 동네 한 사람이 어느 날 일하고 돌아오는 이씨를 고개 밑에서 겁탈하려 하자 갑자기

사도세자가 나타나 이씨를 구했으며, 이씨는 곧 기절하였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남매가 고개에서 기절한 이씨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미륵불이 이씨를 안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이 고개에 미륵당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그 뒤 고종 때 경복궁 중건공사를 하면서 이 당을 헐어가고 터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