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년 04월 04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공기질은 아주 좋음
☞ 산행거리: 16.2km+들머리 0.8km / 7시간 5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팔각정-지풍마을 안부-무명봉-275.6m봉-안부-밀양박공 종중묘-가풍고개
299.3m봉-안부-325m봉-330m봉-벙커봉-솔치고개-경부고속전철 위-안부
삼각점봉-안부-도덕봉-갈림길-김해김공 묘-안부-오가골 갈림길-152.6m봉
4번국도-원각마을 갈림길-무명봉-무명봉-선산곽씨 가족묘-안부-옥천육씨묘
180.3m봉-질매기기재-무명봉-함박산-안부-퇴미산-동복오공 묘-귀죽고개
귀화리 고개-돌남산-안부-182m봉-안부-자고치-귀화리 버스 정류장-167m봉
164.4m봉-무명봉-154m봉-옥천육공 묘-목사리재-무명봉-무명봉-무명봉-안부
태솔이재-문화류공 가족묘-개미재 갈림길-무명봉-구덕재-180m봉-쇠소리재
190m봉-안부-195m봉-나분티재
☞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옥천읍, 동이면
뭔일인지 주말마다 비가 내린다...이번주말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하여 사무실에서
밀린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내일까지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나오기에 산행을
포기하기로 하는데 친구가 사무실로 찾아온다...코로나로 인해 한참을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하는 말 ‘김회장!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오다고 하니
산에 안 갈것이고 오랫만에 인도어 골프장가서 연습 좀 하고 저녁이나 먹자’고 한다
야들이 이제 비오면 산에 안 간다는걸 알구먼...그래 오랫만에 온 벗이라도 찾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사무실에서 20분거리인 인도어 골프 연습장에 가서
90분정도 연습을 하고는 또다른 친구를 불러 저녁에다 막걸리 각 1병씩 하고 집에오니
저녁 9시...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니 새벽 2시...아들은 운동갔고, 마눌은 답답하다면서
친구들과 2박3일간 바람쐬러 제주도로 가버렸다
역쉬 사람은 누구에게도 간섭 안받고 사는게 최고여!...영혼이 자유로워야지
일어나자마자 컴을 켜고 날씨를 검색하는데 전국적으로 12시까지 비가 온다고 되어있다.
하기사 구라청(기상청)이 하는 일기예보 제대로 맞춘적이 몇번이나 돼...
새벽 5시까지 컴퓨터에 앉았다가 잎이 돋아나는 봄철이 지나면 산행하기 힘든 서화(장령)지맥
4구간은 악명높은 잡목지대와 농토, 과수원을 지나는 곳이라 힘들 것 같아 그곳을 가기로 하고
베낭을 대충 챙겨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그래 비가오면 다시 돌아오지 뭐...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영등포발 →옥천행 열차표
집을 나와서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탄 다음에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05시 40분이다
표를 예매한 다음에 자판기에서 커피한잔 뽑아서 마신 다음에 플렛홈으로 가서
부산행 무궁화 열차에 오른 다음에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열차는 신탄진역을 지나고 있다
차창밖을 바라보니 다행히 구라청의 예보와는 달리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옥천역(08:20)
영등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정된 시간인 08:17분에 옥천역에 도착한다
역을 빠져 나오니 다행히 비는 오질 않고 서울가는 열차 시간을 확인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가풍리 지풍마을로 향한다
옥천역 열차 시간표
옥천역 무궁화호 열차 요금표
옥천역은 KTX같은 열차는 서지않고 서울로 직행하는 버스도 없다
인근에 대전이라는 대도시가 있어 교통은 상당히 불편한 편이다
지풍마을 팔각정(08:45)
옥천읍 가풍리 지풍마을 팔각정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한.두방울씩
떨어지는 빗줄기는 그친다...오늘은 구라청의 예보가 틀린게 천만다행이다
지풍(地豊)마을은 논이 기름지고 물이 좋아 풍년이 드는 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8:45)
마을 도로 주위에는 포도나무와 복숭아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데 지풍마을 포도는 유명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포도농사를 짓고있는 하귀섭씨는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이 마을에서 비가림, 무공해 포도,
박피 기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로 하씨의 포도는 일반적으로 출하되는 포도보다 항상 좋은 값을 받는다.
대전의 상인들이 '하귀섭 포도'라고 하씨의 포도 품질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씨의 포도는 일류 호텔 등
고급용으로 주로 출하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웬만한 장사꾼들은 엄두도 못낸다고 한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지풍마을길 가운데로 통과하는데 개쉬키들이 난리부르스다.
비가 온 후라도 날씨는 잔뜩 흐리나 공기는 풋사과처럼 상큼하다
얼마만에 마셔보는 맑은 공기인가...기분이 쿨하다
마을을 빠져나와 능선으로 올라간다
비에젖은 복숭아 나무에서 핀 桃花가 마치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처럼 느껴진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길옆에 노랑다발버섯이 보인다
노랑다발버섯은 표면과 살은 노란색이고 조직을 씹으면 매우 쓰다는 것이 특징이며
봄에서 가을에 걸쳐 썩은 나무 또는 땅, 나무 그루터기에서 군생한다
주름살은 빽빽하며 처음에는 노란색이지만 포자가 익음에 따라 연한 검은색을 띤다.
갓은 2~8cm, 자루는 길이 2∼12cm, 굵기 2∼7mm로 갓과 같은 색이며 거미집 모양의
턱받이가 있으나 곧 없어지며, 식용버섯인 개암버섯,뽕나무버섯부치,팽이버섯 노란난버섯 등이
비슷하니 주의해야하며 노릿노릿하게 구워진 맛있는 계란과자처럼 생겼지만 맹독성이 아주
강한 버섯으로 식용이 불가능하다
안부(08:55)
산행을 시작한 지 10분만에 마루금에 복귀한다.
정확히 12일만 다시와서 본격적인 서화(장령)지맥 2구간을 시작한다
안부 우측 아래에는 청주한씨와 배부인 달성서씨 묘지가 보인다
가풍리는 청주한씨의 집성촌이라 그런지 청주한씨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묘지에서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약간의 오르막이 나오고 좌측으로 지풍마을로 내려가는 사면길이 보인다
무명봉(09:00)
우측오로 꺽어진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275.6m봉(09:05)
묘지를 이장한 듯한 파묘의 흔적이 보이는 곳을 지나간다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능선에서 사면길로 내려간다
안부(09:10)
안부에서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 우측에는 밀양박씨 종중묘역이 보인다
밀양박씨 종중묘(09:12)
밀양박씨 종중묘역 능선에 올라서서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갑자기 안부로 뚝 떨어진다
가풍고개(加豊峴:09:15)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 마을에서 이원면 장찬리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우측 장찬리쪽에는
묘지가 보이고 장찬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며, 좌측 가풍리 지풍마을쪽은 쪽은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키가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는 원래 가재골에서 시작되었다 전하며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마을을
형성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진주하씨가 가장 먼저 가풍리에 정착했고
그후에 들어온 청주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뿌리를 내렸으며 지금도 가풍리에는 전 가구의 30%가량이 한씨이다.
처음 정착했던 하씨는 지금 거의 떠나고 단 3가구밖에 남지 않았다.원래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던 가재골은 장령산 줄기
아래에 형성된 골짜기로 차차로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확산되었다 하며 가재골에서는 지금도 가재가 잡힐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임을 자랑한다. 본래 가재골이란 지명은 옛부터 신령스런 산이라고 믿어왔던 장령산에서
뻗어나온 작은 솔티의 산줄기 형상이 가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며 가재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후에
가척으로 변천되었다
본격적인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는데...
등로는 본격적으로 지맥스러움(?)을 나타낸다
쓰러진 나무들이 갈길 바쁜 범여의 발목을 잡는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레전드의 흔적
299.3m봉(09:28)
299.3m봉에서 만난 권작가님의 흔적
299.3m봉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등로가 잘보이지 않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잘 보이지 않아 약간은 혼란스러운 곳이다
안부(09:28)
오르막길의 등로...아예 길이 보이지 않고 잡목이 상당히 성가시다
잡목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직진으로 돌파가 힘들어 약간 우측으로 돌아간다
325m봉(09:37)
예전에 묘지가 있었던 모양이다...묘터의 흔적이 보인다
325m정상에서 만난 선답자들의 시그널
325m봉에서 바라본 장찬저수지의 모습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連理枝를 닮아가는 중
살짝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차돌이라 부르는 규암들이 보인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철쭉들이 꽃을 틔울 준비를 하는지 새순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벙커가 있는 330m봉으로 올라간다
330m봉(09:45)
330m봉에서 바라본 장찬 저수지 너머로는 산벚꽃이 만개하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벙커가 있는 330m봉에서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는 상당히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옥천군 이원면의 모습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끼여 상당히 불편하다
장찬저수지의 모습
벙커봉(09:48)
안개에 휩싸인 장령산 능선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능선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능선에서 바라본 옥천읍내의 모습
옥천(沃川)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옥천지역은 고시산군(古尸山郡)으로 불렸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산성(山城)과 고분(古墳)을 대표적 자료로 들 수 있다. 비록 정상적으로 발굴
조사된 자료가 없어서 단정짓기에는 무리지만 옥천향토전시관에 수집된 자료에서 보면 5세기말
정도부터는 신라(新羅)의 중심지였던 경주지역의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유물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신라적 성격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화기법(印花技法)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들어와서도 대체적으로
그대로 이어지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옥천지역이 상주(尙州) 관성군(管城郡)으로 재편되어
이산현(利山縣 : 지금의 이원)과 현진현(縣眞縣 : 지금의 안내)을 영현으로 두었다.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이 옥주(沃州)로 불리게 되는데, 이 시기는 통일신라의 작은 항아리(小壺),
큰 항아리(長胴甕), 편병(扁甁) 등의 토기문화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청자(靑瓷)라는 새로운
자기문화를 꽃피운 시기로 용암사(龍岩寺) 삼층석탑(三層石塔)이나 마애불(磨崖佛), 두암리 삼층석탑
등에서 불교문화의 단편을 엿볼 수 있으나 남아 있는 전적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옥천향교(沃川鄕校), 청산향교(靑山鄕校)와 같은 관아건물(官衙建物)과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유허(遺墟),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유허(遺墟)를 비롯하여
창주서원묘정비(創洲書院廟庭碑), 이지당(二止堂), 양신정(養神亭), 사마소(司馬所)등과 같은 유학
관련 건조물들이 지금도 옥천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또다른 벙커를 만나고...
잠시후에 가야할 도덕봉이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비에젖은 급경사의 내리막길...상당히 미끄럽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직진하니 절개지가 맥길을 가로막는다
좌측으로 우회하면서 내려가니 두릅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보리밭으로 내려선다
보리밭에서 바라본 장령산의 모습
바로앞에는 경부고속전철 철로가 보인다
솔치고개(松峙:299.3m:10:03)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와 이원면 장찬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개 아래로는 경부선 철로가
통과하는 터널이 상하행으로 두개가 있고 폐터널이 하나 있는데 그 굴을 이용해 마을의
어른들은 장을 보러 이원을 다녀오기도 한 곳으로 최근에는 버섯을 재배하다 그만두어
그냥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솔치고개는 대낮에도 솔숲이 우거져 어둠 침침했고 은신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마을 노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이 고개 부근에서는 사람이 은실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나오고
먹고 있기도 한데 도둑샘이라 불리는 이곳은 그 옛날 도둑들이 은바가지로 물을 떠먹다가 빠뜨려
지금도 쇳소리가 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고개를 가로질러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솔치고개로 오르자마자 벌목을 하고 마구 버려진 간벌목으로 인해 걷기가 아주 불편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옥천군 이원면쪽의 모습
솔치고개에서 이원으로 가는 도로옆에는 경부선 철로가 보이고 멀리 이원역도 아련히 보인다
이원역은 1919년 3월 27일 이원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이때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며 지금 이원역 앞에는
‘기미삼일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파른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비에젖은 능선의 솔갈비가 상당히 미끄럽다
경부고속철도 위(10:08)
이 능선 아래로 경부고속전철 철로가 지나간다
참호가 보이고...
잠깐동안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우측으로 가는 사면길이 보이나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오랫만에 마셔보는 상쾌한 공기...머리가 개운하다
안부(10:20)
등로 좌측으로 잠시후에 가야할 도덕봉의 통신탑이 보인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빡세게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의 이원면 장찬리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향한다
삼각점봉?(10:32)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대부분이 삼각점이라 기록을 했는데 자세히보니
측량을 하고 박아둔 지적도근점인듯 하다
삼각점?
도덕봉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안부(10:33)
오르막 능선으로 오르니...
도덕봉 정상에 있는 방송 송신탑이 보인다
통신탑을 지나니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사 설치되어 있는 휀스를 우회하면서 걷는데
우측은 큰물산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산줄기가 보이고 등로가 잘 나있다.
독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딱 알바하기 좋을 곳이니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무인감시 카메라 휀스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도덕봉(道德峰:407.3m:10:37)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 이원면 건진리, 동이면 세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도덕봉이나
도덕산이란 지명은 전국적으로 다수 분포하는 산 지명으로 조선 시대 다수 생성된 유교적인 지명이다.
이곳 도덕봉은 조선 시대 고문헌이나 고지도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에 "도덕봉 ·
도덕곡(道德谷)은 이남이 소면 남상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도덕봉과 함께 산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도덕곡도 함께 실려 있다. 최근 자료인 『한국지명총람』에도 도덕봉이 소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모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보은 323)
도덕봉 정상석 뒷면의 모습...예전에 이곳에 산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도덕봉산성지는 옥천읍과 이원면을 가르는 산줄기 중 경부선철로가 터널을 지나는 지점의 동북쪽 방향에 있는
산봉우리에 있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부는 석축을 하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석축산성이나
지금은 모두 허물어져 산성인지의 구분도 어려우나 잡목으로 둘러싸인 성의 서쪽 경사면 2-3M 아래쪽에 일부나마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한 성에서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도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그 옛날
성터임을 알게 한다.
성의 북쪽 사면은 전형 성을 쌓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남동쪽 사면도 윤곽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옥천읍 전체와 관산성과 용봉산성지가 잘 보이며 저 멀리는 환산이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현리산성지가 가깝게 보이며 조금 멀리 월이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마니산성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금강 너머 멀리 지탄리산성지가 보인다. 도덕봉산성지는 옥천읍과 이원면을 연결하는 솔티고개
(경부선철로가 지나는 지점)를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된 망루형태의 보루이며 축성국가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성의 주요 출입로는 북쪽 능선과 가까이 있는 세산리 용암말 부락으로 짐작된다. 도덕봉산성지는 옥천군지 등 이전의
산성자료에는 물론 없으며 인근의 주민도 전혀 알지 못하는 성터이며 금번 조사 기간 중 성터(망루)로서는 이상적인
위치라 조사하였으며 지탄리산성지와 함께 이원면 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산성지이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인증샷
도덕봉 정상에서 바라본 옥천읍 가풍리쪽의 모습
지맥길은 정상석 뒷쪽으로 내려간다
정상석 뒷쪽으로 내려가니 안테나가 보인다
등로는 뚜렸하나 땅이 비에젖어 상당히 미끄럽다
갈림길(10:42)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아주 뚜렸하다...도덕봉 정상에서 3분정도 내려오다가 직진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가야 하는데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등로가 없는 사면길로 들어서니 뿌러진 나뭇가지에 선답자의 흔적이 보인다
급경사의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발을 삐끗하면서 호주머니에 있는 카메라가 빠져나와 떨어지면서 내리막으로 굴러간다
바로 밑에 있겠거니 하고 낙엽을 뒤지면서 커메라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50분 이상 낙엽속을 뒤졌는데도 카메라는 보이지 않으니 난감하다
200여m 아래에서 찾은 똑닥이
10여분을 더 낙엽속에 뒤지다가 하는 수 없이 200여m 아래에 있는 안부에서부터 차근차근
찾아볼 요량으로 안부에 내려가니 거기에 카메라가 있는게 아닌가...다행히도 카메라는 멀쩡하다
카메라를 찾느라 1시간여를 이곳에서 허비한 셈이다...그래도 카메라가 망가지지 않은게 어딘가
다시 벗어논 베낭을 메고 벌목지 아래로 내려간다
벌목지 너머로의 장령산 능선은 안개가 걷히고 있다
경부고속철로 뒤쪽의 장령산 아래에는 일출.일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는 용암사도 보인다
벌목지 아래로 내려간다
고사리들도 꽤많이 보인다
능선에서 뚜렸한 직진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이 반갑기만 하다
잡목지대로 내려간다
장령산에서 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옥천읍내 뒷쪽으로 보인다
무연고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 주위에는 흰색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내리막으로 내려가니 묘지가 보인다
김해김공 묘지(11:55)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11:57)
안부에서 우측의 좋은 길을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묘지를 지나니...
맥산꾼의 레전드중에 한 분이신 맨발님의 빛바랜 흔적을 만난다.
등로는 보이지 않고 ...
잡목을 헤치면서 내려간 다음에...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다
오가골 삼거리(11:58)
옥천군 동이면 세신리 오가골 삼거리인데
수로가 보이는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좌측의 수로를 끼고 가다가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비닐하우스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뒤돌아 본 도덕봉의 모습
능선으로 올라가니...
청풍김공 묘지가 나오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152.6m봉(12:02)
국토지리원에 등록된 족보있는 봉우리이다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지저분하고 길이없는 등로로 내려오자 모텔같은 건물이 맥길을 가로 막는다
능선을 내려서니 민가가 나오고 犬公들이 이방인을 향해서 난리부르스를 친다
비닐하우스로 빠져 나간다
우측에 전원모텔이 보이고 비닐하우스 밭두둑을 내려선다
밭두둑을 빠져나오니 옥돌가든 마당이 나오고...
옥돌가든 마당에서 전원모텔 정문앞으로 내려간다
4번 국도(12:08)
옥천읍에서 충북 영동으로 이어지는 4번국도가 지나가는데 생각보다 차량이 많이 달린다
맥길은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나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지 배가 고프다
오늘은 이곳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매식을 할 요량으로 점심준비를 하지 않았다.
맥길을 벗어나 동이면쪽으로 향하여 식당을 찾아서 간다
도로 우측으로는 도덕봉에서 큰물산~금강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원각주유소 바로 옆에는 편의점이 있고 그 근처에는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점심식사(12:15~35)
이곳에서 컵라면 하나와 김밥한줄을 점심으로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앞에 보이는 저 능선이 지맥길이라 시간을 단축하려고 무단횡단을 시도해 보려는데
쉴새없이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기에 틈이 보이지 않는다...목숨을 걸면서
도로를 넘어가기에는 그럴 이유가 보이지 않아 옥천쪽의 신호등까지 가기로 한다
조금전에 지났던 전원모텔쪽으로 되돌아오니...
묘목시장으로 유명한 옥천산림조합이 보인다
옥천은 국내에서 가장 큰 묘목시장으로 전국의 묘목 70%가 이곳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국토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고 기후적으로 중부및 남부 수종을 생산하기
적합하며 지형적으로 옥천의 땅은 사질양토(砂質壤土:진흙이 적게 섞혀 공기와 물의 유통이
좋고 비료의 분해가 빠른 흙을 말함)로 이루어져 있어 식물이 생육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곳이 옥천땅이라고 한다...옥천군 묘목 재배 면적이 237㏊로 축구장 면적의 237개와
규모에 한 해 1,700여만 그루의 유실수와 조경수가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저 아래 횡단보도가 빨간불이 켜지고 차량들이 보이지 않아 재빨리 무단횡단하여 도로를 건넌다
도로에서 동이면쪽으로 올라가니 → 가풍리 ←원각마을 표지판이 보이고 뒷쪽으로 올라간다
밭길 옆으로 올라가니...
초지처럼 보이는 묵밭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묘지를 지나고...좌측으로는 원각마을이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 원각(院覺)마을의 모습
'원각'이란 마을 지명은 오래된 지리서 등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원각(院覺)은 본래 현재의 가풍리를 포함해 일컫던 신원리(新院里)와 각리동리(覺里洞里)의 지명 중
'원'자와 '각'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이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각리동리는 현재의 오로변 큰말을 일컫던 마을로 1890년의 기록을 보면 10호가 거주하고 있다가
1910년 가척동리, 신원리와 함께 가풍리로 통합되었다.기록에는 원각이란 지명이 일제 강점기에
와서야 나타나지만 주민들이 말하는 마을의 역사는 훨씬 깊다.
마을은 본래 '두영(斗靈)'이라 불렸고 이것이 '뒝이'로 변해 지금도 어른들은 원각보다는 뒝이라고 불러야 잘 알아듣는다.
주민들이 전하는 말로는 두영이란 지명은 현재의 작은 말이 곡식을 한 말, 두 말 되는 말(斗)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며 특히 원각리가 옥천육씨 문중이 오래전부터 살아왔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알 뿐 일반 주민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다.
옥천육씨 문중에는 지난 92년 작은말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에 합동제단을 세워놓고 옥천육씨의
유래를 밝혀놓았다.
유래비에 의하면 원각리에 거주한 옥천육씨는 17대 선조인 육금언 공이 원각리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니
정작 그 뒤에 집성촌을 이룬 성주이씨는 한참 후에야 이룬 문중이었다.성주이시 문중에서는 11대조
할머니가 성주이씨인 이인희 공과 결혼해 이곳에서 살게된 것이 최초인데 이인희 공은 처가가 있는
마을에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셈이 되었다.
많았을 때 30호까지 되던 성주이씨 문중은 현재 전체 47호 가운데 20호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성주이씨가 번창하면서 본래 원각리의 세거 문중이었던 옥천육씨는 차차로 떠나 일제 강점기때
육도천씨가 떠남으로써 단 한 가구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세상 일이란 묘한 일이 있기 마련인 듯 싶다.
마을 지형 및 유래와 관련된 얘기는 또 있다. 현재 국도변 마을인 큰말 앞 4호 국도 건너편에 있는
큰 느티나무와 관련된 얘기. 전하는 바로는 이 느티나무는 본래 마을 한가운데 있었던 나무였다는 것.
그러던 것이 용암사가 생기고 나서부터 동네가 없어졌다고 전하는데 이는 마을 지형이 '갈가마귀'혈인지라
용암사가 창건된 후 징소리에 놀라서 마을이 옮겨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징을 치니 갈가마귀는 날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이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묘지를 지나니 등로는 보이지 않고...
느타리 버섯을 키웠던 곳을 지난다
두릅밭을 지나니...원각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원각마을 삼거리(12:42)
비포장 농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농로는 좌측으로 꺽어지고...
무명봉(12:44)
농막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내려가는 넓은 농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능선 우측 아래에는 성주이공과 배부인 청주고씨 묘지가 보인다.
다시 등로가 보이지 않는 능선으로 들어선다
좌측으로 사면길이 보이나 직진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48)
무명봉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준.희선생의 빛바랜 시그널이 산꾼을 반긴다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다시 만난다
무명묘지 2기를 만나고 잠시후에 가야할 180.3m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묘지옆으로 내려간다
선산곽씨 가족묘(12:50)
이곳부터는 편안한 넓은 임도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좌측 나무가지 사이로는 옥천의료기기 논공단지가 보인다
낙엽이 수북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안부(12:52)
안부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 주위에는 조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등로는 아주 지저분한다
옥천육씨 가족묘(12:54)
묘지에서 바라본 가야할 180.3m봉의 모습
묘지를 빠져나오니...
벚꽃묘목 농장이 나온다
벚꽃 묘목 농장에 들어선 다음에 좌측으로 올라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2주전에 걸었던 장령산의 모습
토사가 흘러내린 180.3m봉으로 올라간다
2주전에 걸었던 대성산~매봉~장령산 능선이 시원스레 보인다
180.3m봉(13:00)
180.3m봉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에 묘지가 보이고 묘지 뒷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질매기재(13:05)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천수골에서 옥천읍 구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찾을길이 없으나 아마도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질매재와 같은 뜻인
고개의 형상이 소의 짐싣는 질매와 비슷하다고 질매기고개라 부른건 아닐런지...
(범여의 생각 中에서)
안부 좌측의 축사에서 나오는 畜糞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다시 오르막길
무명봉(13:10)
잠시후에 오를 함박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명봉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바로앞에 돌남산이 보이고 저 멀리 마성산도 보인다
예전에 불이난 모양이다...나무에 화재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간간이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들
묘지 뒷쪽으로 올라간다
갈길 바쁜 산꾼에게 태클을 거는 것들이 왜이리 많은지...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다시 등로는 좋아진다
넓은 공터가 있는 함박산 정상에 도착한다
함박산 좌측 아래쪽은 옥천읍 서대리와 서대저수지가 보인다
옥천읍에 소재한 서대리(書垈里)는 나지막한 구릉지에 있으며 앞으로는 서화천이 흐르고 근처에 구일저수지가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서당골(서당곡), 송대, 신대 등이 있으며 서당골은 송대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송대는 서당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노송이 많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며, 신대는 송대 북쪽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민진강 효자문이 있다.
함박산(含朴山:250.2m:13:20)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와 동이면 세산리, 평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옥천군의 옛 문헌을 찾아보면 이곳 함박산을 퇴미산이라 기록한 자료가 보여 조금은 헷갈린다
함박산 주변에는 지금 한창 벌목중이라 어수선하기만 하다
능선 우측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운동시설이 보이고...
조금만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완만한 내리막 능선으로 내려간다
우측에 차양막이 처져있는 묘목 조림지가 보인다
안부(13:28)
안부에서 올라서니 좌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바닥엔 비에젖은 솔잎의 상큼한 냄새가 머리를 맑게한다
퇴미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퇴미산(249m:13:35)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와 서대리, 동이면 평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오룩스 맵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정상 아래에는 묘지 1기가 있고 선답자들의 산패가 걸려있는 나무는 베어져 버려 찾을길이 없다
퇴미산 혹은 테미산이라고도 부른다
퇴미산은 문헌상의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나 옥천읍 분지의 한복판에 산성이 있었다는 자료가 보이며
옥천읍 쪽에서는 예부터 함박산이라고 불렸던 테미산(해발 250m) 정상이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퇴미산이란 지명은 특히 정상에 테두리를 두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대전시 테미고개나
여수시의 테미산성 등 ‘테미’란 지명이 쓰인 곳은 대부분 성이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테미산은 옥천읍 쪽에서는 함박산이라고 불렸으나 동이면 평산리 쪽에서는 함박산 대신 테미산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테미산이 통행이 많았던 옛길을 지키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점도 길목을 지킬 필요가 있는 산성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곧 이원-동이면을 거쳐 옥천읍을 가기 위한 중요한 길이 테미산 기슭으로 나 있는 동이-옥천읍 가는 옛길 옆 중요한 길목에 위치여기에 테미산 바로 아래인 서원골에 우리 고장 최초의 서원인 쌍봉서원 터는 임진왜란 당시 이충범 선생과 유생, 의병들이 조헌 선생 이후에 제2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모임을 가졌던 장소로 알려져
임진왜란 의병 도모와 테미산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란 추정도 나오고 있다.
“테미산이라고 하는 지명에는 대부분 토루(작은산, 흙무덤)의 형태로 성이 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산패가 걸려있는 나무는 잘려나가 버렸다
퇴미산 아래에 있는 묘지 좌측 아래로 맥길을 이어간다
내리막 등로 가운데 묘지가 있다
조금을 더 내려서니 좌측으로 사면길이 보이나 직진으로 내려간다
동복오공 묘(13:38)
동복(同福)은 전남 화순에 위치한 지명으로 동복면 모후산 재궁동에는 동복오씨의 시조 영부터 5세 선까지 단비가
마련돼 있고 3세 대승의 묘소가 위치해 있고 매년 음력 10일 초정일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있다.
오씨(吳氏)는 중국 제나라 출신인 오첨이 신라 지증왕때 함양지역에서 신라 김씨인 김종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귀화해
살면서 시작됐고 이후 고려 병부상서를 지낸 수권(첨의 23세손)이 현보, 현좌, 현필 세명의 아들을 두게 된다.
수권의 아들 3형제는 고려 고종3년 1216년 북방에 침입한 거란족을 몰아낸 공적으로 현보는 해주군, 현좌는 동복군,
현필은 보성군에 각각 임명됐다. 현좌의 큰아들 영은 또다시 동복군에 임명되면서 본관을 동복으로하는 동복오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숙귀는 군위오씨의 시조가 된다.
동복오공 묘를 내려오니 또 다른 동복오씨 묘지가 나오고 직진으로 내려갈 수 없어 좌측으로 내려간다
암릉구간이 보이고...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로 내려선다
등로는 뚜렸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철조망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옥천읍 구일리 귀죽마을이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 귀죽마을의 모습
남양주 금곡님의 흔적을 만난다
갈림길이 나오고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인삼밭이 맥길을 가로막고 그 뒷쪽으로는 가야할 돌남산이 보인다
인삼밭 좌측의 귀죽마을로 내려간다
인삼밭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가야하나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좌측으로 내려간다
귀죽마을로 내려선 다음에 우측의 시멘트 도로로 올라간다
셀카놀이
인삼밭 차양막이 보이는 저곳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한참을 돌아서 왔다
귀죽고개(13:50)
고개를 가로질러 묵밭처럼 보이는 공터로 들어선다
공터에서 바라본 가야할 돌남산의 모습
공터 끄트머리에서 밭으로 내려간다
밭을 지나서...
시멘트 도로로 올라선다
조금을 더 걸으니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귀화마을 고개가 나온다
귀화리 고개(14:00)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 귀화마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도로명 주소는 서대구일로이다
고개 좌측 아랫쪽에는 귀화리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장령산이 보인다
귀화마을이 있는 옥천읍 구일리(九逸里)는 아홉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구일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지난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면서 붙혀진 지명으로 자구티, 화정골, 진말랑, 새보루, 증골, 터골, 고사리골, 회총골,
방고개 등 아홉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아홉구(九)에 놓을 일(逸)자를 써서 구일리라 불리게 되었다.
귀화마을은 구일리의 중심되는 마을이며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포도와 한우가 유명하다고 한다
맥길은 비닐하우스 사이로 이어진다
비닐하우스를 빠져 나오니 귀화마을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돌남산 가는 길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의 목장입구로 올라간다
목장입구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뒤돌아 보니 도덕봉에서 큰물산 ~금강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사람들이 찾지않은 듯한 쉼터를 지나고...
노거수를 지나서 마을길로 향한다
마을길을 지난 다음에...
돌남산으로 올라가는 편안한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 포도밭쪽으로 향한다
포도밭을 지나서...
급경사의 능선으로 올라가니...
목장이 나오고...
빡센 오르막길
빡센 오르막을 올라서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는데 선답자들은 우측의 편안한 길로 온 모양이다
비로인해 갑자기 등로를 변경한 게 화근이다...공부를 안하고 오니 트랙에한 게 개고생이다
우측으로 도로가 보이고 탱자나무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좌측의 귀화마을에서 올라오는 뚜렸한 등로를 만나서 돌남산으로 향한다
등로가 아주 좋다...제도권 등로인 모양이다
등로 우측에는 돌남산 아래에 있는 방송송신탑이 보인다
돌남산 체육시설과 쉼터가 보인다
돌남산으로 올라서니 운동시설에서 운동을 하는 내 또래의 여인 3명을 만난다.
뭘 그리 큰 베낭을 다닌다고 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나에게 엄청 관심을 보인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사과 하나를 주며 먹으라고 한다
복받을깁니다
돌남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돌남산(石南山:258.6m:14:20)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와 장야리, 매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우측 아래에는 옥천기지국
통신시설 2곳이 있고, 정상 아랫쪽에는 옥천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운동기구가 보인다
정상에는 국립지리원에서 세운 삼각점 안내판과 삼각점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에 어느 원님이 옥천고을을 다스리던 시절 관아(官衙)가 구읍(舊邑)에 있을 때
‘관아 남쪽에 있는 돌이 박힌 산’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돌남산 정상에 있는 삼각점 안내판
돌남산 정상 삼각점(△보은 322/2003복구)
정상에는 선답자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좌측의 장야리쪽 내리막길은 등로가 아주 좋으나 맥길은 정상의 벤취 뒷쪽으로 가야한다
벤취 뒷쪽은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벤취 뒷쪽으로 내려서니 빛바랜 권작가님의 시그널이 선배를 반겨준다
등로 우측 아래로는 옥천 통신기지국이 보인다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급경사를 내려오니 편안한 능선이 나온다
다시 내리막길
안부(14:27)
묵밭같은 곳을 지난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182m봉(14:28)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ㅜ자 길림길이 나오고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묘지를 지난다
이곳에서도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우측의 뚜렸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 좌측으로 내려간다
안부(14:34)
밭을 지나 민가쪽으로 향한다
민가를 빠져 나오니...
성화기업택배회사가 맥길을 막아선다
물류회사 마당 가운데로 맥길을 이어간다
택배회사 마당을 빠져 나오니...
도로로 나온다
자고치 육교(自古峙:14:40)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에 있는 자고치는 옥천과 영동을 잇는 501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구일농공공단이 있고
자고치 육교 아래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좌측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옥천 휴게소가 보인다
옥천과 동이를 연결하는 통로로써 6.25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가던 피난민들이 잠시 쉬어가던
고개로 각시바위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각시바위의 전설
이곳 자고티는 동이지역 사람들이 옥천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길목이었다.
때문에 동이지역에서 소를 키우던 주민들은 소를 팔기 위해 자고티를 넘어 옥천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옥천에서 소를 팔고 집으로 향하던 소장사들이 지금은 구일농공단지가 들어서 있던
자고티 마을 뒷산을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길가에 놓여있던 두 개의 바위에서 색시가 뛰어나와
소장사들을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이었다.
소장사들은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갔고 다음날 다시 찾아와 그 자리를 살펴보니
전날 소장사들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빗자루 였다는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은 길가에 놓여있던
두 개의 바위에서 색시가 나왔다 하여 각시바위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설을 지니고 있는
각시바위는 구일농공단지가 준공되면서 전설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고치 육교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옥천 휴게소 방향의 모습
자고치를 지나 501번 지방도를 만나는데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
카페마루와 불고기집인 한성회관도 보인다
맞은편에는 시골막국수집도 있다
한성회관을 끼고 우측의 영동쪽으로 향한다
귀화리 버스 정류장(14:45)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에 있는 귀화리(貴花里)의 지명은 돌남산에서 유래됐다
나무보다도 돌이 많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돌남산.
지금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돌남산에는 진달래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을 뒷산에 진달래꽃이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귀할귀(貴), 꽃화(花귀)를 사용하게 되었다는데
귀화리란 마을의 이름도 이 돌남산의 진달래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버스 정류산 좌측의 시멘트 도로로 올라간다
시멘트 도로로 올라가다가...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옹벽으로 올라가니 밭이 나온다
밭에서 바라본 자고치와 그 너머로 장령산 능선이 뚜렸하게 보인다
167m봉(14:50)
밭으로 올라서니 그물망이 나오고 그물망을 넘어간다
좌측으로는 조금전에 지나온 돌남산이 보인다
그물망을 넘어서 좌측의 절개지 능선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좌측의 공장 철조망이 보이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164.4m봉(14:55)
정상에는 권작가님의 시그널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가야 하나 공장이 맥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조금 더 진행한다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묘지를 이장한 듯한 흔적도 보인다
능선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갑자기 희미한 등로마저 끊어져 버린다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베낭을 내려놓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절개지로 내려선 다음에 공장 마당으로 올라간다
공장 마당에서 우측에 있는 풍림이라는 퇴비공장으로 들어서니
직원인듯한 남자 한명이 길을 막는다...하는 수 없이 공장 마당으로 나간다
이 공장은 교동식품이라는 육가공 업체인데 사람이 전혀 안 보인다
정문을 빠져 나오니 도로가 나오고...
풍림이라는 저 퇴비공장 마당으로 가야 하는데...
주유소가 보이는 맞은편의 공장으로 들어간다
콘크리트 제조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콘크리트 시설물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이 공장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공장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가서 우측으로 향한다
맥길 가운데 공장들이 들어서 있어 한참을 돌아서 간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향한다
5분이면 올 수 있는 길을 15분을 삥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
무명봉(15:27)
태양광 시설 휀스가 나온다
무명봉에서 바라본 164.4m봉(파란 공장 지붕 뒤)
태양광 울타리와 헤어지고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길이 없는 곳에서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은 그저 고맙고 반갑기만 하다
154m봉(15:29)
154m봉을 지난 다음에 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진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가니...
개나리로 울타리를 만든 묘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또 한번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간다
할미꽃 / 이해인
손자 손녀
너무 많이 사랑하다
허리가 많이 굽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 무덤 가에
봄마다 한 송이
할미꽃 피어
온 종일 연도를
바치고 있네
하늘 한 번 보지 않고
자주빛 옷고름으로
눈물 닦으며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땅 깊이 묻으며
생전의 우리 할머니 처럼
오래 오래
혼자서 기도 하고 싶어
혼자서 피었다
혼자서 사라지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외로운
한숨 같은 할미꽃
할미꽃이 피어있는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옥천육공 묘(15:32)
옥천 육씨(沃川 陸氏)는 충청북도 옥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육씨(陸氏)는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평원반군(平原般郡) 육향(陸鄕 : 육종)의 지명(地名)에서 시작되었다.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옥천 육씨(沃川陸氏)의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당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천하·정한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 계대(繼代)를 실전(失傳)하여 고려 충렬왕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육인단(陸仁端)을
1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으며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故 육영수 여사가 옥천육씨이다
사각정자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간다
옥천읍내 아파트 너머로 식장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야할 소망침례교회가 보인다
오랫만에 토종 민들레를 만난다
토종민들레와 서양민들레의 구분법
토종민들레의 꽃받침은 윗쪽으로 솟아있고, 서양민들레의
꽃받침은 아랫쪽은 동그랗게 말려 있는게 특징이다
목사리재(牧仕峙:15:40)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에서 동이면 남곡리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에 소망침례교회가
있으며 고개 우측 아래에 있는 남곡리 목사리 마을에서 지명을 따온 듯 하다
남곡리(南谷里)는 수남리의 남(南)자와 행곡리의 곡(谷)자를 따서 남곡리가 되었다.
개미재는 야산 속에 깊숙이 잠겨있는 마을이라 해서 감이골 즉 장동으로 감이재, 갬이재,
개미재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마을 생김새가 개미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수남리는 수북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두 마을 사이를 흐르는 물을 경계로 하여 수남, 수북리라 불렀던 것 같다.
행곡리는 살골을 한자화한 것으로 살을 살구행(杏)자 골을 골곡(谷)자를 써서 행곡이 되었다.
목사리를 한자화 해 목금리라는 마을이름을 한때 사용하기도 했으며 목사리의 어원을 목쇠리로 보고
나무 목(木)자와 쇠금(金)자를 쓴 것이다. 현재 마을 이름은 한자로 칠 목(牧)자와 벼슬 사(仕)자를
쓰고 있지만 마을주변의 오래된 비석을 보면 나무 목(木)자와 모래 사(沙)자를 썼던 흔적이 있다.
목사리 주변에는 막골, 함박골, 약물내기, 진밭골, 큰터골, 작은터골, 가자골, 뒷골, 푼더골,
목사리골이 있고 산정말 주변에는 수몰 이주민이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새말이라 부르고
고개 아래로 기다랗게 형성된 개미재는 머리, 가슴, 배의 구별이 확실한 개미의 형상인데
이 고개를 서너고개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는 거멩이들이 있고 저수지 옆으로 도장골, 화악골,
가래티, 사냥골이 있고 산정말 옆으로 산막골, 살골, 안골, 절골, 기티가 있다.
새마을 옆에 고령신씨(高靈申氏) 재실이 있다.
목사리재 정상에 있는 소망침례교회
소망침례교회 앞으로는 501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와
옥천읍 매화리에서 목사리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앞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뒷쪽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밭에서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걸 포기한다
목사리쪽으로 내려가다가 좌측의 농로로 올라간다
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43)
등로는 상당히 지저분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밭이 보이고...
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46)
좌측으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
우측에 있는 묘지를 바라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49)
우측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좌측의 옥천읍 매화리에는 전원주택들이 많이 보인다
산딸기 나무들이 벌써부터 극성을 부리고 있다
안부(15:51)
등로 우측 아래에는 화려한 납골묘가 보인다
등로는 아주 편안하다
무명봉(15:54)
등로 좌측으로는 전원주택과 매화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 너머로는 다음구간에 가야할 마성산이 뚜렸하게 보인다
태솔이재(15:57)
좌측으로는 매화저수지와 구덕마을이 보인다
등로는 상당히 까칠하고 걷기가 불편하여 사면길로 내려간다
사면길로 내려서니 라이온스 회장을 역임한 문화류공 묘지가 나온다
문화류공 가족묘(15:58)
묘지를 지나니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다
힘들게 내려서니 안부같은 곳에 밭이 나온다
밭으로 내려서니 꽤나큰 개쉬키 2마리가 금방이라도 나를 물듯이 덤벼든다.
밭에서 돌멩이를 줏어서 던졌지만 계속 덤비는데 식은땀이 흐른다
개쉬키들의 난동을 피해서 조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묘지 윗쪽으로 올라간다
개미재 갈림길(16:05)
직진으로 뚜렸하게 나있는 개미재 가는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보이지 않는 좌측으로 꺽어진다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에 있는 개미재는 갬이재→개미재로 음운이 변화되었다고 나오는데
주민들 중에는 개미재의 마을 뒷산의 모양이 개미허리같이 잘록하게 생겼다 하여 개미재라는
지명이 붙었다 한다.
등로가 전혀없는 곳을 내려서니 전원주택이 나오고 주택 뒷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6:07)
이곳에서 90도 좌측으로 꺽어져 구덕재로 내려간다
무명봉에서 내려가며 바라본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 구덕마을의 모습
잠시후에 오를 능선의 모습
구덕재(16:09)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에서 동이면 남곡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좌측에 있는
구덕마을에서 고개 이름을 따온듯 하며 매화리는 풍수설에서 매화당이라 하여
아주 좋은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매화가 땅에 떨어진 형국이라고 전한다.
이곳의 형세가 좋아서 지은 이름이다
고개를 가로질러 올라가니 개사육장이 나온다
개사육장 직전에 좌측으로 올라가니 밭이 나온다
밭을 가로질러...
등로가 보이지 않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올라가니 비실이부부님의 시그널이 보인다
능선에서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180m봉(16:17)
송전탑 너머로 마성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의 모습...지맥길은 좌측으로 삥돌아서 간다
벌목지 아래로 내려간다
쇠소리재(16:20)
옥천군 매화리 구덕마을 뒷쪽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쇠소리재 구덕마을쪽의 모습
등로에는 꽃비가 뿌려져 있다
190m봉(16:23)
좌측 능선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6:26)
등로에서 바라본 할애비산쪽의 능선
좌측의 자작나무 군락지를 바라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2주전에 걸었던 대성산도 뚜렸하게 보인다
산바래기산 갈림길(16:31)
등로 정상에서 우측으로 나분티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산바래기산이 있는데
오룩스맵상에는 195.8m봉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산바래기산을 가고 싶지만 체력도 바닥이 났고, 귀경 차량 때문에 그냥 지나친다
산바래기산 아래에는 옥천 태생의 시인으로 박인수와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서 유명했던
가곡 ‘향수’와 ‘고향’이란 시를 썼던 정지용과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셨던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우측으로 송전탑이 보이는곳 직전에 좌측으로 내려간다
내리막길은 무쟈게 좋다
시멘트 도로로 내려간다
시멘트 도로로 내려가니 노란색의 애플 무인텔이란 건물이 보이는 나분티재에 도착한다
나분티재(16:40)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와 수북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 우측에는 애플 모텔과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좌측에는 교동식품이라는 꽤나 큰 규모의 공장이 있고 교통량도 많은편이며 지명의 유래는
옛날 교동사람들이 나무를 많이해다 땠다하여 나무가 많은 재, 즉 나무티(나무티재라 불리우다
전해오는 과정에서 나분티로 변음(變音)이 되었다고 하며, 부근에 나분 . 티물이라는 찬샘이 있다.
이 샘은 물이 하도 차가워 예전에 옥천 사람들이 여름철에 이곳에 와서 등목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나분티가 있는 옥천읍 교동리는 자연마을로 마을에는 섶바탱이(이곳이 원래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으므로 나무지게(섶)를 지고 가다 한 번 쉬어간다(바탱이)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수골(구읍지역에서 저수지 쪽으로 올려다보면 높게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고수골이라 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이
있었으나 교동저수지가 축조되면서 고수골은 없어졌다. 또 수북리를 넘는 고개는 나부티재와 나부티샘이 예부터
유명했다.
교동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다.
여사의 생가는 2008년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으며, 여사의 생가는 조선시대 3 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양반가옥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으며,
이에 따라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교동리 뒤로는 옥천의 진산이라 불리는 마성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옥천고을
전체의 안녕을 비는 마조제가 마성산을 바라보며 올려지는 것은 마성산이 옥천의 진산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교동저수지가 있어 문정뜰에 농업용수를 대고 있으며, 저수지 입구 옥천어린이집 앞에는 조선시대
옥천군수를 비롯해 옥천을 거쳐 간 많은관리들의 공적을 알리는 공적비와 송덕비 등이 세워져 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나분티재에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상대로 앵벌이(히치)를 하려 했으나 오늘 비가 온 뒤의 날씨로 인해
옷에 흙이 너무 많이 묻어있고 바지도 찢이져서 히치를 포기하고 아침에 탔던 택시를 호출하니
10분도 채 안되어 도착하기에 택시를 타고 옥천역에 도착한다(택시비 6.500원)
옥천역(17:00)
옥천역에서 서울로 가는 인연은 내 맘대로 안되는 모양이다
옥천은 서울로 직행하는 버스는 다니지 않고, 열차는 무궁화호 밖에 서질 않는다
지금 시간이 오후 5시인데 표가 다 매진되고 저녁 9시 05분 표밖에 없다고 한다
헐~ 4시간이면 집에가서 잠을 잘 시간이다...온 김에 화장실 신세나 좀 져야겠다
화장실에 가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옥천 우체국앞 버스 정류장(17:20)
이곳에서 20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 대전으로 가는 607번 버스를 탄다
지난번에 이 버스를 탔을 때 대전 시내를 너무 도는 바람에 시간이 1시간 이상
걸리기에 기사분에게 대전복합터미널로 빨리가는 방법이 없겠냐고 하니까
신인동 주민센터 앞에서 501번 버스를 갈아 타라고 한다
신인동주민센터 버스 정류장(18:10)
이곳에 내리니 곧바로 마전에서 오는 501번 버스가 도착한다.
대전복합터미널(18:25)
대전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예매하고 나니 20분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산행을 하면서 중간에 매식을 하는 바람에 간식거리가 남아있어 이곳에서 빵 하나와
쥬스, 딸기를 먹으면서 베낭털이를 하고 버스 승강장으로 향한다
일요일에 비가 온다는 예보에 산행을 할까말까 엄청나게 고민을 했는데 구라청의
오보로 인해 깔끔하게 지맥 한 구간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쿨~~~하다
18시 50분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 정신없이 깊은잠에 빠졌다가 눈을 뜨니 버스는 궁내동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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