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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17 -2 구간 - 밀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by 범여(梵如) 2021. 7. 12.

가슴속에 응어리진 穴을 뚫다

 

☞ 산행일자: 2021년 7월 11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비온 뒤의 높은습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6.2km +들머리 4.8km / 5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벌바위 정류장-용소바위-용추폭포-월영대 지킴터-쉼터-대야산 갈림길-월영대

                 밀재-전망대-거북바위-코끼리 바위-대문바위-중대봉 갈림길-대야산-안부-안부

                 쉼터-촛대재-조망바위-촛대봉-불란티재-폐헬기장-안부-조망바위-미륵바위-안부

                 731m봉-곰넘이봉-안부-675m봉-헬기장-버리미기재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백두대간 3번째 종주를 마무리 못해 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대간길...

지난해 1월 17일~18일에 환자라는 내 처지를 잊고 알파3050산악회 쉬크석 대장을 따라 나섰다가

개고생을 하면서 중탈(중간 탈출)이라는 산꾼에겐 치욕적인(?) 불명예를 않은 채, 늘 가슴에 

산행 체기(滯氣)가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오늘 그 응어리를 풀려고 나선다,

 

이곳은 땜방구간이라 거리는 짧지만 교통수단이 상당히 열악하고, 산행 구간은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중에 하나인 대야산 구간은 제도권 등로라 잘 관리되어 있지만,

대야산에서 버리미기재까지는 비탐구간인데다 위험한 암벽구간이 상당히 많고 거기다가

언제부터인가부터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편입되면서 국공파들이 산꾼들이 설치한 로프를

다 철거해버려 굉장히 위험하여 나홀로 산행을 하기에는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다

 

요즘 계속되는 장마로 인해 곳곳에 중간중간 내리는 소나기와, 비오는 날이 계속되기에

일기예보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내가 벌려놓은(?) 여러곳의 맥길에는 이번주 일요일에

전부 비가 내리는데 유일하게 이곳만 아침6시까지 비가 오다가 그치고...오후 3시이후로

비가 온다고 하니 조금 일찍 산행을 시작하면 비가 오기전에 산행을 끝낼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구라청은 신뢰가 가질 않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어

그냥 참고만 하기로 한다.  

 

그래 대간길을 마감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도둑고양이처럼 집을 빠져나와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점촌행 버스표

이른 시간에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였는데 이 넓은 터미널에 손에 꼽을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적다...최근에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 코로나 변이종인 델타바이러스인가 지랄인가 하는

역병 때문인가...그 바람에 버스 승객은 몇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버스 기사가 나를 알아본다.

어찌 알았나 궁금했는데 지난주에 보청(팔음)지맥을 하러갈 때 상주가는 첫 차를 탔었는데

오늘 버스가 지난주에 탔던 그 버스가 아닌가...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 오른다

 

이 버스는 동서울에서 출발하여 점촌을 경유한 다음에 상주로 가는 버스이다.

점촌 버스정류장(07:50)

서울을 출발한 지 1시간 50분만에 첨촌터미널에 도착하여 승객을 내려준 다음에 버스는 상주로 향한다

점촌터미널 정류장을 빠져나와 가은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점촌 홈플러스 맞은편으로 향한다

홈플러스 버스정류장 시간표

가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30~34번인데 앞자리가 “3”자가 붙은 버스는 가은방향으로 가는 버스이다.

용추계곡으로 가려면 벌바위로 가는 가은버스정류장을 경유하여 완장리 벌바위로 가는 33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곳 점촌에서 벌바위로 가는 차는 08:20, 12:30, 17:10...하루 3대가 있다. 

 

 

홈플러스 버스정류장(07:56)

이곳에서 25번정도 기다린 다음에 가은을 경유하여 완장리 벌바위로 가는 33번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정확하게 08시 20분 정시에 도착하여 마성, 가은으로 가면서 동네란 동네는 다 거친

다음...점촌을 출발한 지 55분만에 용추계곡을 약간 못 미친 벌바위 정류장에 도착한다

벌바위 버스 정류장(09:15)

벌바위 버스 정류장 가기 직전에 1년에 초파일 한번밖에 산문을 개방한다 봉암사 입구도 보인다.

희양산 자락에 있는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때 지증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점촌을 출발한 지 50분만에 벌바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정점인 사찰로,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선 스님이 창건했다. 그때부터 봉암사는 희양산에 터를 닦고 1100년의 풍상을 이어왔다.

조계종 특별 선원인 봉암사는 참선과 정진의 대명사다. 우리 불교의 도도한 전통을 이어온 이 터에는

절 입구의 일주문부터 절 너머의 사찰림까지 행락객이 들어올 수 없다. 봉암사는 성철 스님을 비롯한

선승들의 요람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불교의 중흥을 모색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선방 스님들에게는 때가 되면 거쳐 가는 정진의 언덕인 곳이다.

벌바우(위)는 주위의 산들이 암석으로 되어 있고, 그 형세가 벌통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암(蜂巖)이라고도 부른다.

 

벌바위 마을 주차장에 나홀로 내려서 산행준비를 하는데 비 온뒤의 높은

습도가 초반부터 산꾼을 질리게 하는 느낌이다...산행을 시작하다(09:25)

벌바위 마을 회관을 지나니 둔덕산과 용추계곡 갈림길이 나오고 잠시후에 용추계곡 식당가들이 보인다.  

식당가 아래의 도로를 따르는데 오늘 대야산으로 산행을 오신분들이 많은지 등산객들로 북적거린다

계속해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마지막 식당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이곳이 선유동천 나들길이란다

선유동천 나들길 개념도

선유동천 나들길은 대략적으로 1코스와 2코스로 나눠지는데 1코스는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서

문경 선유동 계곡까지 4.0km의 거리이고, 2구간은 대야산 주차장과 식당가가 있는 용추계곡

입구에서 월영대까지 2.2km구간을 말한다

식당가 끄트머리에 오르자마자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등로 우측에

용소바위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겠다

용소바위(龍搔巖:09:48)

‘암.수 두마리의 용이 용추계곡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발톱이 바위에 찍혀

그 자국이 신비롭게도 남아있어 용소함이라고 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눈이 나빠서 그런지 아님 바위가 비에 젖어서 그런지 육안(肉眼)으로 확인이 안 된다

완만한 선유동천 나들길을 따라서 밀재로 올라간다

용추폭포(龍湫瀑布:09:55)

하트 모양의 소(沼)로 유명한, 대야산 용추계곡에 있는 문경팔경 중 으뜸인 대야산 용추는 충북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깍아지른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대야산 자락에 있으며,

많은 비경 가운데 2단으로 이루어진 용추폭포의 장관이야 말로 명소 중의 명소로 유명하다.

 

용추계곡의 비경중 으뜸으로 꼽히는 용추폭포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폭포 양쪽의 바위에는

신라시대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쓴 세심대, 활청담, 옥하대, 영차대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비늘 흔적이 신비롭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의 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옛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 곳으로 용추의 형상을 보면 위아래 두 개의 용추가 이어졌으며 수 만년 기나긴 세월을 쉼없이

흘러 내려 마침내 떨어지는 폭포아래에는 천하에 보기드문 신비스런 하트형(♡)으로 깊게 파인 소()가

윗 용추로, 절묘한 형태는 보는 이마다 미소를 머금게 한다

용추계곡 안내판

월영대 지킴터(10:00)

지킴터의 차단기는 닫혀있고 호우주의보가 내려졌으니 입산금지란다.

보시다시피 지금 날씨는 멀쩡한데 뭔 호우주의보람...행정편의주의 발상하고는...

 

뭐 이런거 한두번 겪어본 것이 아니라 이제 모든게 무덤덤하다.

민초들의 피땀으로 번 돈으로 녹봉을 받아 생활하면서 늘 군림하려는 저 꼬라지 

언제쯤 고쳐지려나...요즘 시중에서는 정부 정책과 반대로 해야만이 살아 남을수 있다고 한다.

 

이 정부들어 25번인가 뭔가하는 부동산 정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부정책을 충실히 따른자는 벼락거지가 됐고, 반대로 한 자들은 다들 잘살지 않은가.

일반 사람들은 2~30년 청약부금 들어도 당첨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데 저거들은

세종시 특공인가 뭔가하는 듣도보도 못한 정책으로 배 채우고, 자기편들만 배불리는 정책,

그뿐이랴...몇일사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코로나 방역 대책도 매 한가지인듯 하다.

제발 민초들 끼니 걱정 안하고, 두 다리 쭉뻗고 살수 있는 정책 펴주소...

습도에 바람한 점 없는 날씨이지만 공기하나만은 정말 상쾌하다.

쉼터(10:04)

용추계곡은 선유동 계곡과 비경이 뛰어난 곳이다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오늘 초반 산행은 털도 안뽑고 날로 먹는 느낌이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이정표도 간간히 보인다

숲향이 너무 좋다.

비에젖은 하늘나리

대야산 갈림길(10:20)

대야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의 대부분이 우측으로 향하고 밀재로 향하는 사람들은 별로없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오르는 대야산쪽은 피아골 계곡이고, 밀재쪽 방향은 다래골이다.

나야 당연히 밀재로 연결되는 다래골로 향한다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월영대가 나온다

월영대(月影臺:10:21)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높이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을 흐르는 맑디

맑은 물 위에 어리는 달빛이 아름답게 드리운다 하여 월영대라고 한다

탐방로 안내판

월영대를 잠시 구경하고 다시 밀재로 향한다

고도는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한다

올라갈수록 水量도 적어지고 물소리도 약하게 들린다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입맞춤

월영대를 지나면서 내려오는 산객들은 간간히 보이나 오르는

산객들은 보이지 않으니 이 등로는 내가 전세를 낸 것같은 기분이다

드이어 밀재에 도착한다...정상에는 각종 안내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고, 고개 너머의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우가 있는 농바우골로 이어지는 등로는 출입금지란다 

농바위는 넓적한 농처럼 생긴 바위가 커다란 암반 위에 얹혀있으며 장정 한 사람이 흔들던

여러 사람이 흔들던 똑같이 움직이고 아이를 갖지 못하던 아낙이 이 바위를 만진 후 태기가 있어

나중에 7남매의 어미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벌바위 주차장에서 4.8km를 걸어서 밀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대간길 땜빵구간을 시작한다.

2014년 7월 13일에 백두대간 2차 남진구간 때 이곳을 통과했으니 정확하게 7년만에 다시 걷는 셈이다.

밀재(蜜峙:689m:11:10)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계곡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화양계곡  농바위골을 잇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나무가  우거져 밀림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려면 밀림을 헤치고 가야한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원래는 밀목령(密木嶺)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측의 문경쪽은 유명한 용추계곡에 월영대, 용추, 무당소로 이어지는 멋진 선유동 계곡이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에 이정표가 잘되어 있으나 괴산 농바우골 쪽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놨다.

대야산을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예전에 꽤나 힘들게 걸었던 등로는 데크목 계단으로 등로를 만들어 편하게 걷기는 하다마는

지맥꾼의 입장에서 보면 산이란 곳이 자꾸만 野性을 잊어가는 것 같아 그리 좋지는 않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本性을 잊어버리면 안되는돼...

 

산이란 곳은 쉬운곳이 있으면 힘든곳도 있어야 낭만도 즐기고 고통도 감내해야 산의 묘미를

알 수 있고, 은근과 끈기, 인내심도 기를 수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수련장이 되는데

자꾸만 편리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형태는 맘에 안든다.

 

그렇게 되면 굳이 산에 올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요즘 세대들은 편안함만 추구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곳에 단련이 익숙하다가 보면

세상사 살면서 위기상황이 닥치면 헤쳐나갈 끈기가 부족하여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많다.

힘듬과 편안함이 공존해야 조화로운 세상이 아닌가...개인적으로는 인위적인 이런곳은 질색이다  

그래  이 맛이야...

이건 또 뭐야...갑자기 또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예전에 저 암릉사이로 빠져 나오면서 개고생을 했는데 우측으로 편하게 데크목을 설치해놨다

데크목 계단을 해놔서 예전처럼 인간들에게 시달리는 않겠구나

암릉 사이에 핀 돌양지꽃

전망대(11:38)

7년만에 오르는 대야산 구간...등로의 지형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예전에 없었던 인위적인 시설물들이 많이 보이고, 이곳부터는 등산객을 자주 만난다.

등로 남쪽으로 바라보니 통시바위에서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 멋지다.

약간의 개스에 휩싸이긴 해도 장마철에 저 정도의 그림이면 준수하다고 볼 수 있겠지.

 

맨 우측에 있는 마고할미 통시바위

‘통시’란 재래식 뒷간의 경상도와 전라도·강원도 방언으로 여기서 바위는 똥통처럼 생긴 바위다.

그런 통시바위가 지리산 통시봉에도 있지만 문경시 농암면에는 두 개의 통시바위(농암면 궁기리

산 1-1번지)가 둔덕산 능선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이름마저 특이하여, ‘마고’의 신을 의미하는

‘마귀’라는 말과 ‘할미’와 ‘손녀’라는 호칭이 들어간 ‘마귀할미 통시바위’와 ‘손녀마귀 통시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통시바위는 마고할미 사용했던 커다란 뒷간이고, 그 옆에는

손녀마고의 뒷간이다. 이렇게 커다랗고 폭이 넓은 바위 두 개에 양발을 딛고 볼일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마고할미는 백척(百尺) 장신쯤 되어야 하니 대모의 할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시’는 변소를 의미하는 것이고, ‘둔덕’은 언덕으로 엉덩이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통시바위는

엉덩이처럼 생긴 둔덕산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더욱이 만능여신인 마고할미의 엉덩이나

그 손녀마고의 엉덩이라면 신비감을 갖게 하는 눈부신 여성성을 과시하지 않겠는가.

통시바위는 ‘마고할미, 통시, 둔덕, 엉덩이, 똥’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되고, 여기서 ‘똥‘은 더러운

기피 대상이 아니라 농사를 짓던 우리 민족에게는 생산이자 황금이며 우리의 삶으로 점철된다

맞은편 우뚝 솟아있는 854m봉 너머로 조항산이 안개에 갖혀 버렸다.

2020년 1월 18일 추운 겨울에 저 능선을 넘다가 개고생한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북바위(11:45)

계속되는 인위적인 시설물

이곳이 언제부터인가 속리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되면서 완전히 野性을 잃어 버렸다.

이런 시설물이 많으면 산행시간을 많이 줄일수도 있어나 국립공원이 되면 쓸데없는

국공파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동전의 양면이랄까...

코끼리 바위(?)

당겨본 둔덕산의 모습

문경시 가은읍과 농암면의 경계에 있는 둔덕산(屯德山:976m)은 이름 그대로 둔덕(언덕)처럼

땅냄새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곡선의 산형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부근은 시야가 넓게

트이고 후덕한 능선엔 억새가 피어 장관을 이루는 평원이 있어, 여기서 사방을 보는 조망은

등산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북쪽 산록을 흘러내려온 물은 대야산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하여 용추폭포를 형성케 한

다음 내쳐 흘러 벌바위 마을 아래에서 이른바 신신이 머문다는 선유동을 만든다.

 

백두대간 버리미기재 북쪽의 선유동을 괴산 선유동이라고 하고, 이곳 둔덕산 북쪽 선유동을

문경 선유동이라 하며 문경 선유동에는 학천정, 칠우정 정자가 있어 오늘도 말없이 선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옛날 선비들의 자연 완상의 지혜와 운치를 즐기던 넉넉한 정신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58년 둔덕산이 바로 보이는 가은읍 완장 아래서 태어났는데

출생 3일전부터 둔덕산이 웅웅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며 신기해하였으나 선생이 태어나자 울음이 그쳤고, 후일 둔덕산 기운을 타고난 운강은

국운이 위태롭던 한 말에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여 13년 동안을 오로지 의병대장으로서 싸우다

순국하였으니, 이는 곧 통시바위와 관련된 마고여신(할미)이 나라를 위해 특별히 점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강년(李康秊:1859~1908)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호는 운강(雲崗)이며, 둔덕산 아래 가은읍 완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880년(고종 1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종 6품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류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맺어지고1907년(융희 1)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으며, 이해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龍沼洞)·갈기동(葛其洞)·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단양 금수산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아 걷지 못해 체포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향년 49세).

좌측으로 백두대간 장성봉에서 애기암봉, 구왕봉, 희양산 능선이 가은읍 완장리를 감싸고 있다

대야산과 둔덕산의 외호(外護)를 받고있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完章里)의 모습

대야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완장리... 자연마을로는 감남비리, 관평, 벌바우, 선유동, 용추 등이 있다.

감남비리는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며, 마을 어귀 산비탈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고 하여

감나무비리라고 하다가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는 동안에 감남비리로 변음되었다.

관평은 옛날에 이 마을에서 벼슬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벌바우는 주위의

산들이 암석으로 되어 있고, 그 형세가 벌통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암이라고도 부른다.

선유동은 주변의 산들과 수석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며, 용추는 옛날에 용이 놀다가 승천한 못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용초라고도 한다.

데크목 계단으로 인해서 편안하게 올라서니 집채보다도 더 큰 바위덩어리가 나오는데 대문바위란다

대문바위(11:50)

커다란 바위 아래에 누군가가 꼬챙이로 받쳐 놓았는데 저것을 받쳐놓지 않으면 문이 닫힌단다

대문바위 주위에는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인지 40여명이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왜 그리 시끄러운지...정신이 하나도 없다...독립군이라 번잡함을 겪어보지 않은지 오래되어

왠지 어색하여 서둘러 대야산으로 향한다

가야할 대야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만난 분홍색 꿩의 다리

암릉구간이긴 하지만 제도권 등로로 위험하진 않다.

등로에서 내려다 보이는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는 雲霧에 갇혀 버렸고 그 너머에 있는 청화산!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擇里志”에서 ‘앞,뒤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곳이건만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암릉구간이라 우회길을 만들어 놨다...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줌렌즈로 당겨본 통시바위.

통시바위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문경읍 마원리에 소재한 마고산성(고모산성에서 4km 정도)은 우무실 뒷산인 봉명산(鳳鳴山)에 있는

산성으로, 아득한 옛날 지모신(地母神)인 마고할미가 치마자락으로 돌을 날라 하룻밤에 쌓았다는

마고산성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천신(天神)의 딸인 마고할미가 아버지의 특명으로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봉명산(鳳鳴山)에다

하룻밤 안에 성을 쌓아야만 했다. 돌을 치마로 날라 성을 열심히 쌓아나갔으나 생각보다 늦어지자

생리현상인 오줌까지 참아가며 쉬지 않고 계속했지만,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아무래도 성을 제 시간에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 손녀마고를 불러 도와달라고 청했다.

 

손녀마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제 시간에 성을 완성하자 마고할미는 안도의 숨을 내쉰 후 참았던 소변을

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멀리 연꽃 세 송이가 서북쪽에 피어 있는게

눈에 들어 왔으니 그곳이 바로 청화산 봉우리였다. 연꽃과 연잎으로 가려진 꽃밭에서 우아하게 혼자서

볼일을 보기가 꺼려져 아까 수고를 아끼지 않은 손녀마고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임하여 막 볼일을 보려 했다.

 

그러나 천신이 이를 알아채고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신령한 곳은 안된다며 그곳을 비껴 볼일을

보라고 명하여 하는 수 없이 마고할미와 손녀마고는 청화산에서 조항산을 지나 대야산에서 살짝 비낀

둔덕산을 통시로 택하게 된다.

 

조항산과 대야산과 둔덕산의 삼각점이 되는 곳에 기묘한 바위를 여러 개 세운 것이 바로 이들의 통시다.

통시 방향은 풍수에서도 동북쪽은 앞귀문에 해당되어 최악이고, 남서쪽 방향은 뒷귀문에 해당되어

좋지않아 최적의 방향인 남동향과 정동향으로 앉을 수 있도록 바위를 세워 대간에 가까운 큰 바위는

마고할미, 그 옆에 작은 바위는 손녀마고의 통시로 만들어 세웠다.

 

할미와 손녀가 양발을 벌리고 통시바위에 앉아 남동과 정동쪽을 바라보며 오줌과 변까지 보게 되자

앞쪽으로는 오줌이 떨어지고 뒤로는 똥이 떨어진다. 할미의 오줌발과 똥은 세고 굵으며, 손녀는 아직

약하고 가늘 터이다. 두 사람이 볼일을 보고 난 뒷자리에는 오줌발이 관통한 가은읍 완장리 쪽으로는

용추 폭포가 생기고 월영대와 무당소와 학천이 생겼으며 구멍이 숭숭 뚫린 벌바우도 생겼는데,

할미오줌은 벌집처럼 구멍숭숭한 벌바위를 만들고, 손녀오줌은 아름다운 하트모양의 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똥이 떨어진 농암면 궁기리 쪽으로는 큰 꽃밭골과 작은 꽃밭골, 큰 돌삽쟁이골과 작은

돌삽쟁이골, 큰 석산골과 작은 석산골, 큰 뱀밭골과 작은 뱀밭골, 바람맞이골과 뱀장이골과 문바위골,

궁기(구멍<궁디<궁기), 말바우 등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큰 것은 할미똥이고 작은 것은 손녀 똥이라 하였다.

 

마고할미와 손녀마고가 이용한 통시는 지금도 바위로 남아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가은읍 쪽은

물이 빚은 신선이 노닐 절경이 되었다면, 농암쪽은 똥이 빚은 큰 바위와 깊은 골짝을 만든 것이다.

그 뒤 여자가 보면 언덕으로 보이고, 남자가 보면 엉덩이로 보이는 둔덕산은 오늘도 앞으로는 물이

쏟아지고 뒤로는 땅이 떨어지는 통시바위를 품어 안고 마고의 신비한 전설을 조용히 지켜오고 있다.

대야산가는 길에서 바라본 중대봉(中臺峰:846m)의 모습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위치한 산으로 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다.

중대봉은 바로 동쪽으로 인접한 상대봉(대야산)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1:50,000 지형도」에서는 정상부의 고도만 표기되어 있을 뿐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7년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었고 등로로 우측으로 돌려놨다.

계단으로 올라서니 전망대를 만들어 놨다

대야산 장상 가는 길은 조망뿐만이 아니라 능선 그 자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서 온갖 형상을 만들어내며 눈을 즐겁게 한다.

소나무들도 여기에 합세한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암릉과 이들

암릉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 시대 윤선도가 해남 보길도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조 五友歌(오우가), 이 오우가에 나오는 돌(石)과 소나무(松)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왕 오우가(五友歌), 그리고 오우가의 소재인 돌과 소나무를 언급했으니

나머지 소재인 물(水)과 대나무(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대야산은 동쪽으로 용추계곡을 낳고 있는데 이 계곡은

국내 어느 계곡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가경을 보여주고 있다.

 

용추계곡 상단부와 마루금의 밀재 사이에는 산죽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용추계곡은 윤선도의 五友 가운데 하나인 물과 견줄만하며,

산죽 군락은 비록 키가 작긴 하지만 대나무에 대체할 수 있을 게다.


이 정도면 윤선도가 노래한 五友 가운데 四友는 오늘 대야산 구간에서 다 만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대야산은 산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느꼈던 낭만을 전달해주는 대간 최고의 경치를 간직한 곳이라 할 만하다.

대야산 정상 가는 길에서 바라본 선유동 계곡

전국에 선유동(仙遊洞)이란 지명이 한, 두곳이 아니지만 산 하나에 선유동계곡을

안팎으로 품은곳은 이곳 대야산뿐이다...대동여지도에는 대야산을 동서로 양쪽의 산자락 밑에

내, 외선유동으로 구분해놨으며, 백두대간의 동쪽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선유동을

내선유동, 서쪽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쪽을 외선유동이라고 한다

 

문경쪽의 선유동은 용추폭포의 유명세 때문에 선유동보다는 흔히 용추계곡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야산 안팎의 물줄기는 똑같은 선유동이란 계곡을 따라 仙界에서 俗界로 흘러간다

 

대야산이란 하나의 산에서 생성된 물줄기가 동쪽과 서쪽의 비탈을 따라 나아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백두대간을 안팎의 물줄기는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만날 재간이 없다.

문경쪽의 내선유동 물은 희양산에서 발원한 가은천과 합쳐져 영강으로 해서 낙동강에 입수되고,

괴산쪽의 물은 한강으로 흘러든다...그래서 문경사람들은 “대야산에서 서쪽으로 오줌을 누면 서울사람,

동쪽으로 오줌을 누면 부산사람 입으로 들어간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백두대간 능선이 한강과 낙동강의 水界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은 속리산부터인데

대야산의 물줄기가 입수되는 영강(穎江)이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밀재에서 대야산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게 걷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용추계곡(龍湫溪谷)의 모습

대야산 제1의 명소이자 문경8경의 하나인 용추는 거대한 화강암반을 뚫고 쏟아지는 폭포 아래에

하트형으로 패인 소[沼]가 윗용추이며,이곳에 잠시 머물던 물이 매끈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아랫용추를 빚는다...용추에서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월영대가 반기는데 달 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에 달빛이 비친다 해서 월영대[月影臺]라고 한다.

 

대야산 용추의 물은 '문경 선유동'으로 흘러가며, 선유동 계곡에는 학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숙종 때의 학자인 이재를 기리기 위해 1906년에 세운 것으로, 학천정 앞의 큰 바위에는 선유동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부터 선유구곡이 시작되며, 옥석대,난생뢰,영귀암,탁청대 등의 음각글씨는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857~?]이 남긴 것이라고도 전한다.

 

특히 문경 선유동의 용추는 하트모양으로 팬 소인데 절경이다.

늘 초록빛 투명한 물이 넘쳐흐르고 있어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주변 바위에는 옛날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용비늘 자국이 있다.

거북바위?

좌측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중대봉 갈림길(12:05)

어느 등산객이 드론을 띄워놓고 놀고 있다

중대봉 갈림길에서 바라본 대야산의 모습

대야산이란 이름은 그 유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다.

지명에 들어가는 ‘야(耶)’자 또한 옛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던 것을 1789년 발행한

문경현지(聞慶縣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야(耶)자로 쓰고 있으며 ‘어조사 야(耶) ’는 아버지를

호칭하는 글자이기도 하다...기독교의 예수를 야소(耶蘇)라고 표기할 때 쓰는 글자와도 같다

 

야소 역시 단순히 비슷한 발음을 찾아 쓴 것이라기보다 ‘소생(蘇生)하는 아버지’란

뜻을 담고 있는데...대야산 역시 큰 아버지란 뜻이 아닐까.

‘세속적인 상식에 구애(拘礙)되지 않고 고통이나 질병도 없으며 죽지 않는다’는

신선의 도를 아는 넉넉한 아버지의 산이란 뜻일게다

 

흔히 용추폭포의 모습이 여성의 성기를 닮아 음기가 센 산이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의 말일뿐...대야산은 근엄하고 넉넉한 아버지의 산이 맞은듯 하다

대야산 오르기전에 아랫쪽으로 떨어졌다가 올라가는데 월영대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대야산 (大耶山:931.0m:12:11)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괴산군 청천읍 이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선이 내려와 노닌다는

선유동(구곡)과 용추계곡을 거느린 명산으로 원래의 지명은 선유산(仙遊山)이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에는 대야산 (大耶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 문경조에는

대치산(大治山)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지명의 유래는 예전에 홍수가 났는데 온 천지가 다 잠겨버리고

정상 봉우리에 세숫대야만큼 남아 있다고 해서 대야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고

또다른 설은 정상이 세숫대야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문경쪽으로는 선유계곡과 용추계곡, 괴산쪽은 화양구곡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대야산 동쪽은 선유골로 옛 시인과 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보고 지고를

논하며 詩想을 읊조린 곳으로 유명한 곳이면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이다

대야산 정상에 있는 속리산 안내판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백두대간의 백화산과 희양산을 지나 속리산을 가기 전에 있다.

계곡이 아름다운 산으로 경북쪽에는 선유동계곡과 용추계곡,충북쪽으로 화양구곡이 있다.

대하산·대화산·대산·상대산 등으로도 불리지만 1789년 발행된 문경현지에 대야산으로 적혀 있다.

 

내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동서 양편의 선유계곡 은 물살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암초에

부딪치며 흰 물결을 뽐내며 대간 마루금으로 거꾸로 솟아 흐른다.

문경 가은 용추골 선유구곡을 노래하는 고운 최치원의 영혼이 괴산 선유동

구름속에서 훨훨 넘나든듯... 대홍수때도 대야만큼 남았다면 우리말 세숫대야가

어울릴텐데 억지 한자글이 그런데로 중후하게 적혀있으니, 역시 한자는 뜻이고

소리고 간에 우리네 머리에 이미지로 한 품위 자릴 잡고 있는 모양이다.

인증샷

대야산 정상 삼각점(속리 305 / 2003 재설)

대야산 정상에서 만난 기린초

대야산 정상을 굳게 수호하고 있는 감시카메라

대야산 정상에서 주위의 동태를 살피다가 살짝 쇠난간을 넘는다.

다행히 감시카메라는 작동을 안 하는지 경고방송은 들리지 않는다.

카메라를 피해서 아랫쪽으로 내려 갔다가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출입금지 경고판이 산꾼을 겁박한다

더군더나 안전 시설과 로프를 철거했으니 되돌아 가란다.

모든건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범여는 일단 가는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내리막 능선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의 모습

백두대간을 척추동물에 비유하면 이곳이 등뼈에 해당되는데 등뼈는 늘 하중(荷重)을 많이

받는 곳으로 대야산 구간이 등뼈에 해당되는 구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암릉구간을 많이 만나고 등로도 상당히 험하고 위험한 곳으로 악명이 높다

잠시후에 오를 촛대봉과 곰넘이봉...버리미기재 너머의 장성봉은 구름에 갇혀 버렸다.

절개지 등로에서 만난 왜솜다리(꽃말 : 숭고한 사랑.잊을 수 없는 추억)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며, 근경에서 모여 나는 원줄기는

높이 20~50cm 정도로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라지고, 전체가 백색 면모로 덮여있고

수과는 길이 1mm정도의 타원형으로 유두상의 돌기가 있다.

 

한라솜다리와 달리 포엽이 드문드문 달리며, 중앙에 달린 잎은 피침형 또는 장타원형이고

두화털이 없는 부분이며 열매는 수과, 갓털은 연한 황백색이다. 솜다리에 비해 키가 작고

외총포편의 가장자리에 긴 털이 거의 없다. 식용하기도 한다.

 

2013년 국립산림과학원이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고성 향로봉 일대에서 멸종위기종인

왜솜다리를 다수 발견했다. 왜솜다리는 1970~1980년대 설악산 등지에서 무차별 채쥐로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한 종이다.

급경사의 절개지에 도착하니 짤린듯한 로프가 보인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조금을 더 내려가 본다

내려서자마자 국공파의 겁박과는 달리 최근에 설치한 듯한 로프와 철근 발판이 보인다.

철근 발디딤판...최근에 설치한듯한데 드릴과 앙카....저 무거운걸 어떻게 여기까지...

산꾼들의 안위를 위한 국공파들의 수고로움을 아닐테고...암튼 편하게 내려간다

고맙습니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이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다

경사 90도의 직벽에 가까운 암릉구간...누군가가 설치한 로프 덕분에 편안하게 내려간다

다 내려왔다

예전에는 좌측의 저 계곡능선으로 올라갔었지

등로에서 내려와서 만난 산수국

90도의 암릉구간 절벽을 내려선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쉰다

통제만이 능사가 아닐진데...산꾼과 국공파간의 이해관계는 언제쯤 풀리려나?

아무리 막는다고 대간꾼들이 안 지나가는 것 봤어...

정말 힘들게 내려왔소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안부(12:40)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고...

에공~~~무서운 사람들

암봉을 지나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안부(12:50)

암봉을 지나서...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내리막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이전 2번의 대간길은 밤에만 지나갔기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로프가 처져있고 조금을 더 내려가니 공터가 나온다

간단한 점심식사(13:00~10)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쉼터(13:12)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전망이 좋은 조망바위가 나온다

잠시후에 오를 촛대봉의 모습

촛대재(13:15)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피아골에서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 상관평

넘어가는 고개로 촛대봉 아래에 있는 고개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예전에 용추계곡 끄트머리에 사기막골이 있어 도자기 보부상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며

대야산을 경계로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많았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고개가 많이 있다  

서남쪽으로는 밀재와 고모치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불란치재와 버리미기재가 있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촛대봉을 오르기 위한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온 대야산이 보인다

암릉구간을 오르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아주 조심스럽게 암릉위로 올라간다

조망바위(13:2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대야산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 상관평의 모습

관평리는 상관평, 중관평, 하관평의 마을이 있으며 관평(官坪)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서 벼슬한 사람이 많이 배출하였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산꾼들이 설치한 손가락보다 가는 굵기의 로프로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암릉구간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묘터의 흔적같은 곳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촛대봉(661m:13:26)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청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불란치재에서 대야산 오름길에 있는 봉우리로 암릉 능선길에

앙증맞은 정상석만 있을 뿐 별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비에젖은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예전엔 없었던 경고판이 있는 불란치재로 내려선다

불란치재(510m:13:40)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괴산군 청천읍 관평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버리미기재로

지나가는 922번 지방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문경과 괴산을 중요한 고개였다고 한다.

 

택리지(擇里地)로 유명한 조선 지리학자 이중환 선생은 불한령(弗寒嶺)이라 기록했고 대동여지도에는

불한령(不寒嶺)이라 기록되었다...불(弗)과 불(不)은 같은 의미로서 풀어쓰면 춥지 않은 고개라는 의미이고,

이 불한령이 불한치 그리고 불란치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다.

불한령(佛寒嶺), 불원치(佛院峙), 불한현(佛寒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춥지않은 고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길로 두 봉우리

양쪽으로는 다시 장성봉과 대야산이 가로막고 있어 한겨울에도 바람이

따스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인듯 하다

 

또한 ‘불이 났던 고개’라고 하여 불란치재라 불린다고 한다

'불이 났던 고개'라는 붙임보다는 '不寒嶺'에서 유래됐음이 그럴싸하다.

아무튼 문경 완장리와 관평리를 통하는 이길이 버리미기재에 포장도로를 빼앗기고

점점 풀섶으로 뒤덮혀지는 통에,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그냥 마루금 능선으로만

산꾼에게 기억될 뿐이다.

불란치재에서 올라서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며지면서 소나기가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느낌이다

폐헬기장(679m:13:54)

폐헬기장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안부(13:56)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쉬 영감님!...비탐구간에 흔적을 남기시다니 겁도 없으시네...

암릉구간을 오르는데 국공파들이 로프를 짤라 버렸는지 암릉을 통과하는데 상당히 힘이든다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선다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지나온 대야산과 촛대봉이 시원스레 보인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능선의 모습

멋진 대야산의 포스

촛대봉도 멀리서 보니 참으로 이쁘다.

여인과 산은 멀리서 봐야 훨씬 예쁘게 보이는 모양이다

조망바위(14:06)

조망바위에서 관평리를 바라보는데 우측으로 장성봉, 막장봉,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참으로 멋지다...괴산에는 멋진 산들이 너무 많다

미륵바위(688m:14:08))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인의 몸매처럼 멋지게 생긴 암릉으로 대간길의 뭇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바위로 일명 촛대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집채 만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우회를 허락치 않으며, 비록 짧지만 지친 가랭이가 힘주어 벌리기엔 너무높아 보인다

 

미륵바위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미륵부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조금은 억지스런 모습이 보인다.

이곳 대야산과 조항산 구간에는 산 기슭에 사찰을 보기가 힘들정도이다

안부(14:11)

흰가시광대 버섯

갓 표면에 흰색 바탕에 작은 가루가 덮고 있으며 사마귀 점이 높이 3mm의

원뿔 모양으로 많이 나 있고 살은 흰색이고 건조해지면 불쾌한 냄새가 많이난다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미끄러운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외롭게 등로를 지키고 있는 일월비비추

암릉구간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731m봉(14:25)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731m봉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오를 곰넘이봉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상관평 마을의 모습

곰넘이봉이라 불리는 암봉에 도착한다

곰넘이봉(734,4m:14:38)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경계에 있는 암릉의 봉우리로

커다란 암릉위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앙증맞은 정상석이 서있는데 암릉으로

오르기 싫어하는 산꾼이나 암릉 아래의 우회길이 있어 방심하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곰이 넘어 다녔다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정상석이 있는 암릉 오기 직전의 암릉이 곰의 등처럼 생겼다해서 부른 이름이다

곰넘이봉 정상인 암봉에 올라서니 7년전에 있었었던 정상석은 온데간데가 없다.

행여!...잘못 올랐나 싶어서 몇번을 확인했지만 찾을길이 없다.

국공파의 벤뎅이 소갈머리하고는...

2014년 7월 13일...백두대간 2차 남진때의 사진

곰넘이봉에서 바라본 둔덕산 능선의 모습

둔덕산하면 독립운동가이자 의병대장이었던 이강년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58년 둔덕산이 바로 보이는 가은읍 완장 아래서

태어났는데 출생 3일전부터 둔덕산이 웅웅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며 신기해하였으나 선생이 태어나자 울음이 그쳤고, 후일 둔덕산 기운을 타고난

운강은 국운이 위태롭던 한 말에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여 13년 동안을 오로지 의병대장으로서 싸우다

순국하였으니, 이는 곧 통시바위와 관련된 마고여신(할미)이 나라를 위해 특별히 점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힘겨루기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대간길을 지킨다

등로에서 바라본 가은읍 완장리의 모습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完章里)는 1480년경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과

중국의 지리학자 "두사충(杜師忠)" 이 충청도 땅을 거쳐 경상도로 가는데 높고 험한 불산리(現:불란치재)

고개를 넘어 너른 들판에 이르니 숨이 찬 가슴이 뻥 뚫려 완장(浣場)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완장(完章)이라 부르게 된 동기라고 한다.

계속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들꽃에게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홑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서정윤·시인, 1957-)

나뭇가지 사이로 봉암사를 품고있는 희양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좌측으로 내려간다

로프가 있지만 물기를 머금은 암릉은 상당히 미끄럽다

암릉을 통과한 다음에  우측으로 향한다

다시 암릉구간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상당히 위험하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위험한 곳이다.

손가락보다 가는 로프가 있지만 짧아 숏다리인 나로선 상당히 힘들다.

까딱하면 천길 낭떨어지라 황천길행이다...정말 어렵게 이 구간을 통과한다

힘든구간을 통과하여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오를 능선의 모습

안부(14:55)

안부에서 올라서서 좌측으로 향한다

다시 암릉구간...높은 습도에 너무 힘이들어 베낭을 벗어놓고 잠깐 휴식을 취한다

힘들게 정상으로 올라선다

675m봉(15:12)

버리미기재로 향하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등로 주위에는 흰깔대기 버섯들이 많이 보인다 

용도 폐기된듯한 군교통호도 보인다

헬기장으로 향한다

헬기장(555m:15:20)

헬기장으로 내려선 다음에...

직진으로 가면 버리미기재로 가는 등로인데 철조망이 막혀있어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간다

대간꾼들이 이곳을 지났는지 등로가 보인다. 

완만하게 내려서니 차량소리가 들리고...

개울을 넘어서니...

대간 산꾼들의 흔적이 보인다

국공파가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922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922번 도로를 따라서 버리미기재로 향한다

버리미기재(15:30)

괴산군 칠성면과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로 92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옛날 기근이 심할 때 이곳에서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조그만 밭떼기를

빌어 먹이던 곳이라는 뜻이고 또 ‘보리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의미로

‘보리먹이’가 다른말로 ‘빌어 먹이다’라는 경상도 방언이 변음되어

지명이 되었다는 고개이며 또 아홉번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빌어먹이던

팔자가 지독하게도 박복한 주막집 과수댁이 고단한 삶을 살며 넘나들던 고개이었다

민초들의 배고픔과 척박하고 고단한 삶은 보는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버리미기재 초소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닌듯 한데...

지나가는 차량들은 그리 많지않아 앵벌이를 시도할 요량으로 주차장쪽으로 향한다

도로에서 만난 하늘나리

오랫만에 RV자동차가 내려오기에 손을드니 한참을 지나가다가

차량이 서는게 아닌가...숨을 헐떡거리면서 쫓아가니 타라고 한다.

서울을 가야하는데 가은버스정류장까지 좀 태워 달라고 했더니만

나를 버스정류소에 내려주고는 인사도 하기전에 가버린다

가은아자개 버스 정류장(16:04)

가은의 버스정류장 이름이고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시장의 지명도 가은 아자개 장터이다

 

아자개(阿慈介, 생몰년 미상)는 신라의 장수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아버지이다.

신라의 상주 고령군 가선현(嘉善縣,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아자개의 이름이 사서(史書)에

따라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자개(阿慈介) 아자개(阿慈个) 아자개(阿字蓋) 등 여러가지

한자로 표기되었다.

 

또 다른 이름이 전해지는데,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름이 원선(元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비가기》에 따르면, 아자개는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흥왕의 3남 김구륜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김원선을 낳았는데, 그 김원선이 아자개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아자개는 원래 농민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면서 세력을 키워 신라의 장군이 되었고 천수(天授:고려 태조의 연호) 원년(918년)에

고려로 망명했으며 현재 충남 논산시에 현재 아자개(阿慈介)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묘가 있다

貴人의 도움으로 아자개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데 점촌으로 가는 버스가 천천히

정류장을 빠져 나가는게 아닌가...부리나케 쫓아가서 버스문을 두드리니 차를 세워준다.

가은에서 점촌으로 가는 버스는 1시간에 1대밖에 없기에 이 버스를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은 셈이다...가은에서 출발한 버스는 마성을

지나 40여분만에 점촌 버스터미널 옆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16:42)

정류장을 지나 아침에 내렸던 점촌터미널로 향한다

점촌 터미널(16:45)

점촌발 → 서울 경부행 버스표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곧바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 표를 사고 서둘러 승차장으로 가서

버스에 오르자마자 버스는 출발하고 중부내륙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았고 차량시간도 기가

막히게 딱딱 들어맞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늘 미뤄놨던 3차 대간을 마무리하니 꽉막힌 穴이 뚤리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