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21년 06월 05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선선한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7.3km(들머리1.3km, 날머리4.8km)포함 / 10시간 05분소요
☞ 참석인원: 수헌아우와 둘이서
☞ 산행코스: 갈령-헬기장-조망바위-조망바위-갈령삼거리-안부-형제봉-안부-800.6m봉-안부-피앗재
641.5m봉-657m봉-안부-667.5m봉-725.8m봉-폐헬기장-703.2m봉-조망바위-769m봉
암봉-묘지-암봉-대목재-쉼터-한남.금북정맥 분기점-천왕봉-조망바위-장각동 갈림길
상고암(법주사)갈림길-돌탑-천왕석문-배석대(상고암)갈림길-도룡농 바위-두껍등 바위
비로봉-고릴라바위-1,012.4m봉-암봉-입석대 갈림길-입석대-경업대(법주사)갈림길
신선대-청법대-문수봉-암봉-문장대 광장-조망바위-쉴바위-성불사(오송폭포)입구
반야교-오송교-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남면, 화북면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백두대간 3차 북진을 하면서 2017년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산악회를 따라가지 못해서
빼먹었던 갈령삼거리에서 늘재구간이 늘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이곳은 백두대간 구간중에서도 가장 난코스중에 하나인 속리산 문장대에서 밤티재까지
구간은 아주 험한 암릉구간이기도 하지만 문장대에서 늘재까지는 비탐구간이라 국공파들에게
적발되면 거금 3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는 곳이라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않아서 늘 망설이다가
얼마전에 같이 맥산행을 같이한 수헌아우에게 하소연을 했더니만 혼쾌히 동행을 해 주겠단다
이 구간은 워낙 단속이 심해서 거의 대다수 산꾼들이 새벽에 늘재에서 출발하여 국공파들이
출근하기 이전에 문장대의 비탐구간을 통과하는 곳이다...나 역시 앞서 2번을 그렇게 통과했다.
그러다보니 늘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곳을 어둠속에 통과하여 이 구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
수헌아우나 나나 워낙 어둠속 산행을 하는게 싫어서 낮에 걸어보기로 하고 1박2일 코스로
산행을 하기로 했는데 지난주에 삐끗한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 몇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수헌아우에게 담에 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 이유는 지난 3월에 석문동지맥을 할때, 수헌, 현오후배 산꾼들이 사정이 있어서
빠지려는 것을 내가 선배랍시고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고 못 지킬 약속을 하지마라’ 고
한 말 때문에 포기를 할 수 없어서 일주일 내내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지만 통증이 멈출줄은 모른다.
그래도 후배와의 약속을 파기할 수 없어서 이른 새벽에 동서울터미널에서 수헌아우를 만나
06시에 출발하는 상주로 가는 첫 차에 몸을 싣는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상주행 버스표
조금 이른 시간에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잠시후에 도착한 수헌아우와 조우하여
06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 잠을 청하려는데 자꾸만 허리 통증이 오니 미치겠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왔기에 예전같으면 깊은 잠에 빠졌을 시간에 눈만 말뚱말뚱하다
차창밖을 바라보니 흐릿한 날씨에 개스가 자욱하니...날씨한번 덥게 생겼다.
08시 30분에 상주터미널에 도착하여 09시 05분에 출발하는 화령행 버스표를 예매하고
근처 식당에서 선지 해장국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한 다음에 다시 터미널로 향한다
상주발 → 화령행 버스표
상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화령(상주시 화서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서 예전에 자주 이용했던
화령택시를 예약한다...화령으로 가는 직행버스는 화령, 보은을 거쳐 청주로 가는 버스인데
상주시내를 빠져나와 25번 국도로 들어서더니만 좁은길에 어찌나 세게 달리는지 불안하다
상주를 출발한 지 30분만에 화령터미널에 도착한다
화령버스 터미널(09:37)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화령(火嶺)은 고려시대에 이곳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火嶺縣)의 지명이고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화령 주변에는 화동,화서,화남,화북이라는 지명을 가진 상주시 4개 면이 있는데
화령은 상주시 화서면에 위치한 중심마을이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위기에서 구한 화령장 전투가 전개됐던 곳이다.
내일은 66회를 맞는 현충일인데 현재의 집권 세력들은 호령영령들에게 너무 홀대하는 느낌이다
북쪽의 귀때기 새파란 놈에겐 뭐가 구린지 온갖 눈치를 다보면서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면서...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자료 인용 - 민병준님의 향토기행 상주 4 에서)
화령터미널에 도착하니 예약한 화령택시 이진석 기사님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이 분은 이곳을 올 때마다 이용한 택시라 그런지 금방 나를 알아본다.
오랫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보니 갈령에 도착하고 택시에서 내리니
포도즙 하나씩을 주면서 안산을 하라고 하시고는 화령으로 되돌아 가신다
이기사님과 유쾌한 이별을 하고는 산행을 준비한다
갈령 정상에는 ‘우복고을 관광화북’이라는 글씨가 나무속에 가려져 있다
고개 넘어 화북면 용유리에 우복동마을이 있는데 백두대간 청화산 남쪽 골짜기 마을로 최근들어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꾸며져 있으며. 우복동(牛腹洞)은 조선시대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라는데 근거를 두고 소의 뱃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설을 한다.
소 뱃속이 아늑한지 어떤지 들어가보질 않아서 알 수는 없고, 혹은 풍수에서는 ‘牛伏’이라 하여 소가
엎드린 형국으로도 풀이를 한다.
갈령(葛嶺:09:58)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나인 상주 우복동이 있으며 6.25동란 때 한국군 제7연대가 인민군을 맞아 첫 승리한
화령장 전투중에 격전지로 유명한 곳으로 상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도로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의 넓은 도로가 지나가는 갈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지금은 나처럼 대간 산꾼이나 찾는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데 갈령(葛嶺)은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 있지만
칡을 뜻 하는 ‘칡 갈(葛)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순 우리말 ‘가르다’, ‘갈라지다’에서 어원을 찾는다.
물길을 가르거나 행정구역을 가르는 곳을 말한다. 금북정맥의 가루고개, 영산기맥의 갈재나 노령(蘆嶺) 역시
마찬가진데 가르다는 ‘갈’의 우리말을 한자화 하면서 칡 갈(葛)이나 갈대 노(蘆)자를 들이댄 것이라(音借表記).
한자를 보고 그 뜻을 풀게 아니라 한자 이전의 우리말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칡이나 갈대와는 무관하게
가르는 고개라는 뜻의 갈령이다.
빛바랜 도로개통비
고개 아래로 뚫린 갈령터널로 인해 개통비도 세월속에 잊혀져 가는구나
산행을 시작하다(10:05)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수헌아우는 숲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헬기장(10:10)
헬기장옆에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백두대간 종주기념비가 보인다
산행을 시작하고 오르막을 만나면서부터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진다
베낭의 무게 때문인지 허리에 통증이 시작되는데 미치겠다
초반부터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니 산행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시작되는데 수헌아우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위해 걷는데까지 걸어볼 생각이다
조망바위(10:22)
조망바위에서 2019년 10월6일 나홀로 걸었던 이안(작약)지맥 능선에 있는 청계산 두루봉은
짙은 미세먼지에 가려져 흐릿하게만 보인다
청계산 두루봉(874m)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와 화서면 하송리, 화남면 동관리의삼면 경계봉을 이루는
산으로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랫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
두루+봉=두루 봉. ‘두루’는 ‘들’의 옛말인 ‘드르’와 같이 ‘땅’ 또는 ‘산’ 에서 왔다. ‘달’은 ‘높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산마루가 두루 뭉실하거나 어느 고장을 울타리 치듯 휘어 돈 산을 ‘두루산’이라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는데 대궐터산은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더 내려가 극락정사 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이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는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코끼리 바위 뒷쪽으로 올라가는데 갈령에서 올라오는 대간꾼들을 만난다.
암릉구간이라 등로를 좌측으로 돌려놨다
우회길이 아닌 예전의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우회길에서 올라오는 등로를 다시 만난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팻말들이 보인다
빡센 능선으로 올라간다
전망바위(10:44)
허리 통증때문에 산행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졌다
이곳에 올라서면 주위가 일망무제인데 모든게 흐릿하기만 하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십승지의 하나인 상주 우복동의 모습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말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용유동(龍遊洞)은 민초들이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우복동(牛腹洞)이라고 부른다.
우복동의 지세(地勢)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병풍에 첩첩이 막혀있다.
또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 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나 이처럼 예전엔 접근조차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 길가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
표면에 새겨진 멋들어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가야할 형제봉의 모습
천왕봉을 줌렌즈로 당겨보지만 흐릿하기만 하다
갈령삼거리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암릉구간 아래로 내려간다
갈령삼거리 봉우리와 형제봉을 바라보면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정말 힘들게 갈령삼거리에 도착한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1.3km구간을 50여분 가까이 걸렸다.
2년전 이안(작약)지맥 할때는 30분이 채 안걸려 갈령에서 이곳까지 왔었는데...
21개월만에 다시 찾은 갈령 삼거리
그때는 백두대간이 아닌 이안(작약)지맥 첫 구간을 하기위해 왔었지
힘들게 갈령삼거리에 도착하니 20분이상 먼저 도착한 수헌아우님이 너무 늦게 도착한
나를 걱정스런 얼굴로 출발한다...수헌 아우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후배이다
백두대간 봉황산쪽의 모습
갈령삼거리(680m:10:57)
먼저 도착하여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한 수헌아우를 먼저 보내고...
물 한모금 마신 다음에 형제봉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백두대간 능선길을 걷기 시작한다
갈령삼거리에서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바람이 선선하게 능선을 불어서 산행하기가 더없이 좋은 날씨이건만
오늘따라 허리 통증은 둘째치더라도 숨이차고 다리는 천근만근이라 산행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안부를 지나서 형제봉으로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직진의 오르막으로 올라야하는데 좌측으로 편안한 우회길이 보이기에 편안길을 택한다
힘들게 형제봉 아래 능선에 도착한다
능선에 베낭을 벗어놓고 정상으로 올라가니 먼저 도착한 수헌님 나를 기다린다
형제봉(兄弟峰:831.1m:11:30)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사이에 있는 삼면 경계봉으로
커다란 암릉 2개가 함께 솟아 있다고 해서 형제봉이라고 부른단다
인증샷
가야할 능선의 모습
가야할 천왕봉-비로봉 등을 연결하는 능선이 마치 하나의 봉우리처럼 보인다.
속리산은 여타 산처럼 봉긋한 하나의 봉우리가 정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연결 능선이
집단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이다.
상오리쪽으로도 장쾌하기는 마찬가지이나 짙은 개스로 인해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형제봉에서 나를 너무 많이 기다린 아우에게 천왕봉에서 만나기로 하고
난 형제봉에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한다
다시 길을 떠난다...급경사의 내림막길을 로프에 의지한 채 내려간다
역시 대간길이다...지맥길에서는 상상도 못할 꽃길이다
민백미꽃(꽃말:그대곁에 머물고 싶어요)
속리산 능선에는 요즘 민백미꽃이 대세인 듯 하다
백미꽃은 뿌리가 희다는 의미에서 백미(白微)꽃이라 부르며, 민백미꽃은 백미꽃에
비해 털이 없다고하여 붙혀진 이름이이다...박주가릿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높이 30~60cm로,
줄기를 자르면 흰 젖 같은 유액이 나온다. 잎은 마주나고, 5~7월에 흰 꽃이 산형 꽃차례로 달린다.
뿌리는 한방에서 해열제나 거담제(祛痰劑)로 쓰이며, 우리나라, 일본, 만주 등지에 분포한다.
안부(11:44)
대간길은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천왕봉으로 향한다
암릉구간 정상이 800.6m봉인데 오를수가 없어 좌측으로 우회해서 간다
800.6m봉(11:58)
암릉구간은 우회하면서 걸어간다
피앗재 가는길에 고도를 조금씩 낮추어 가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할 641.5m봉이 보인다
참으로 힘든 삶을 사는구나
남진하는 대간꾼을 만난다
안부(12:08)
암릉구간을 통과한 다음에...
피앗재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가야할 천왕봉이 멀게만 느껴진다
피앗재(614m:12:15)
보은군 속리산면 대목리 만수동에서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옛날에 첩첩산중이라 피난지로 적합한 곳이어서 ‘피화재(避禍峙)’로 불렀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피앗재로 불리웠다고 하는데 피화치(避禍峙) 로 한자식으로
표기하다 보니 난(亂)을 피했던 장소 였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잘못 이해되고 여기에서의
"피"는 벼와 비슷하게 생긴 구황작물인 피이고 "앗"은 밭(田)을 의미하여 피가 많다고하여
이름 붙여진 '피밭골'이 소리바꿈 한것 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보은의 만수동 사람들이 상주 화북장을 보러 다녔던 중요한
고갯길이었으며 만수동 계곡은 풍광이 뛰어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란다
전쟁이 일어나 팔도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아온 탓에
아직도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피앗재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641.5m봉(12:25)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댄다.
657m봉(12:29)
657m봉에 있는 구조이정목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대간길에서 바라본 만수동 계곡의 모습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속리 16-08 구조이정목을 지난다
안부(12:45)
다시 오르막에 오르는데 오늘따라 숨이 너무 차서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좌측으로 725.8m봉이 보이고 그너머로 보이는 천왕봉은 흐릿하다
완만한 능선이지만 힘이드는구나
667.5m봉(12:58)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유명한 장각폭포와 금란정이 있는데 폭포 아래 널찍한
소(沼)와 절벽위의 정자와 소나무가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장각마을에는 상오리의 7층 석탑(보물 제683호)이 있고 이곳은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낭만자객, 이 순신 등 드라마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워 서둘러 길을 떠난다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을 또 만난다
잠시후에 가야할 725.8m봉이 흐릿하게 보인다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725.8m봉(13:38)
완만한 능선을 걷는데 약간의 추위를 느낄정도로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천왕봉이 조금 뚜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남쪽으로는 구병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구병산(九屛山:876m)은 충북 보은군 장안면,속리면, 마로면과 경북 상주시 화남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인기 순위중에 96위에 해당되는 산이다
구병산은 구병리 우복동과 삼가리 협곡을 사이에 두고 정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 속리산 천황봉이다.
이 상황은 아내가 자신을 버린 남편을 찾아와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보은지방에서는 속리산 천황봉과 구병산 그리고 금적산(金積山) 등 세 산을
‘보은삼산(報恩三山)’이라고 일컬어 왔으며이 삼산을 두고 ‘속리산은 부산(夫山)이요,
구병산은 부산(婦山)이요, 금적산은 자산(子山)’이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속리산 국립공원 남단 경계를 이루는 구병산의 산세는 동에서 서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능선 상에 아홉 개에 달하는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다.
아홉 봉우리로 인하여 옛날에는 구봉산(九峯山)으로도 불리었다 한다.
암봉을 이룬 아홉 봉우리들마다 각각 신선대, 백운대, 봉학대, 노적봉, 쌀개봉 등
저마다 이름들이 있었다 전해지며 이중 최고봉인 정상이 백운대, 정상 서릉 상의
쌀개봉과 노적봉, 동릉 상의 신선대 정도만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이 산은 물가에 드리운 기암절벽들이 한 폭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서원계곡과
삼재팔란(三災八亂)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로 알려진 구병리 우복동, 속리산 정이품송의
아내라는 얘기를 듣는 정부인 소나무, 삼가저수지, 최근에 발견된 정상 바로 옆 풍혈과
구병리 동굴풍혈, 숨은골의 쌀난바위, 그리고 주능선 남과 북을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 등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풍광에 뛰어난 볼거리들이 온 산을 수놓고 있다.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폐헬기장(13:52)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3:54)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703.2m봉(14:05)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암릉구간이 나오고 대간길은 암릉 뒷쪽으로 이어지나...
좌측으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안내한다
좌측의 우회길로 한참을 내려섰다가 다시 암릉구간 사이로 올라간다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천왕봉까지 아직도 1.6km나 남았는데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속리 16-03 이정목을 지난다
편안한 능선길로 걸어간다
암릉구간을 올라간다
조망바위(14:25)
살다가 힘든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탓하지 마라
이미 생긴 일이거늘 어찌하겠느냐
살다가 울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원망말고 실컷 울어보렴
울고나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겠니
살다가 이별할 일이 생기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인연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거를
살다가 사랑할 일이 생기거든
밀고 당기는 시간을 줄여라
사랑의 실타래가 항상 질기지 않으니
적당히 밀고 당기려무나
살다가 행복한 일이 생기거든
너무 잡으려 애쓰지 마라
무엇이든 잡으려 하면 달아나고
꽉 지고 있는다고 다 내것이 아닌것을
-최유진의 행복이 따로 있나요 중에서 -
암릉구간을 지난다
連理枝인가?
769m봉(14:35)
천왕봉이 1km남았다는 얘기인데 이정목에 769m라고 적혀있다
암봉(14:45)
등로에서 바라본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계곡의 모습
예전에는 마을 이름이 내속리산면 대목리였으나, 내.외속리산면이 속리산면으로 통합되면서
도화리(桃花里:복숭화꽃 동네)로 개명되어 대목리 계곡이 아닌 도화리 계곡으로 바뀌었다
천왕봉까지 0.5km이다...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너럭바위를 지나 오르막으로 향한다
묘지(15:08)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암봉(15:12)
반가운 선답자의 흔적이 보인다
등로 사이로 인자바위가 보이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댄다
나무계단을 따라서 대목재로 내려간다
대목재(15:15)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마을과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대목마을로 잇는 고개로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대목마을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내속리산면 대목리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내.외속리산면이 속리산면으로
통합되면서 도화리로 개명되었는데 이정표도 예전의 대목리가 아닌 도화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산꾼들은 이곳을 대목재라 부르는데 도화재로 바꿔야 하나....
상오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56대)은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월악산 덕주사에
누이 덕주공주를 두고 망국의 한을 품고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 소백산
국망봉에서 나라잃은 설움의 한을 달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행적이 묘연했던
경순왕 행적비는 상오리 장각동에 있다고 한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쉼터(15:25)
다시 천왕봉을 빡센 오르막을 올라간다
아! 힘들다
천왕봉 정상이 거의 다 온 모양이다...사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남.금북정맥 분기점(15:40)
이곳 천왕봉에서 안성 칠장산까지 158.1km까지 한남. 금북정맥 길...2011년 3월 11일에
걸었으니 벌써 10년도 넘어 버렸구나...이 구간은 아직까지 비탐구간이다
내가 오늘 힘들게 왔던 길을 뒤돌아 보는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멋진 선경은
짙은 개스로 인해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정말 힘들게 정상에 올라서니 山客들이 보이고 이곳에서 1시간 반이나 기다렸다는
수헌아우님...최악의 컨디션으로 인해 범여는 후배에게 밉상이 되어 버렸다.
천왕봉(天王峰:1,058m:15:42)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속리산
능선 9개의 봉우리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의 主峰이긴 하지만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주봉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대자재천왕이 10월 인일 축시에 이곳 천왕봉으로 내려와 45일동안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천왕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9봉9대(九峰九臺)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정상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대목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십이지종산(十二之宗山)의
하나이자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이곳부터 한남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 칠장산까지 와서 북쪽으로 김포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하는
한남정맥과 남쪽으론 칠장산에서 태안 앞바다인 안흥만에서 맥을 다하는 420km의 금북정맥의
시발점이 이곳이다.
천왕봉 안내판
예전에는 천황봉(天皇峰)이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에서부터는
천황봉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결과라고 하여, 2007년 중앙지명위원회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등을 근거로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다다고 한다
천왕봉 정상의 지적도근점
천왕봉 정상 삼각점(△속리 11 / 2003 재설)
맑은 날 천왕봉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천왕봉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듯 장엄하다.
속리산을 12대 宗山의 하나로 삼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의 24절경을 꼽는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
천황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
으로 이어지고,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은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비로봉~문장대로 이어지는 장쾌하고 멋있는 속리산 능선은 짙은 개스로 엉망이다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하였고,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1,032m)·문장대(文藏臺:1,054m)·
관음봉(觀音峰:982m)·길상봉(吉祥峰)·문수봉(文殊峰) 등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속리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으로 불리워오다가 김제 금산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진표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에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를 탄 사람이 달구지에서 내려와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묻는데 나는 금산사에서 오는 진표라는 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곳을 찾아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것을 알고
佛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고 하니까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 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俗離)'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청계산~도장산~청화산으로 이어지는 우복동천 십승지 능선의 모습
천왕봉을 뒤로하고 문장대로 향하여 길을 떠난다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의 모습
조망바위(15:58)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장각동의 모습
갈령과 늘재를 관문으로 동쪽의 상주 화북면 일대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하나인 우복동천 이다.
고려 중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오리 7층 석탑(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아름다운 자태로 뭇 사람들을 유혹하는 장각폭포와 금란정의 모습(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조망바위에서 뒤돌아 본 천왕봉의 모습
장각동 갈림길(16:02)
우측으로 올라서면 갈림길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이곳에서 내려서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상오리 칠층석탑과장각폭포가 나오는 곳으로 장각동(長角洞)은 소의 뱃속모양의 명당터를
일컫는 곳으로 우복동(牛腹洞)의 쇠뿔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장각동 갈림길에 있는 헬기장
오늘 따라서 후배 산꾼의 발걸음은 가볍게만 보이는데...부럽기만 하다
산함박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우측 윗쪽 능선이 대간길이나 막아놨다
상고암(上庫庵) 갈림길(16:09)
속리산은 주봉이 천왕봉이지만 문장대의 명성에 가려 푸대접을 받는곳이다
흔히들 속리산하면 문장대란 공식이 정답인양 알지만 천왕봉이 엄연한 주봉이다
법주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을 능선 위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능선이 펼쳐져 있다.
우측이 문장대이고 좌측이 천왕봉이며 그 가운데 우뚝솟은 봉우리가 비로봉이다
이곳이 속리산 전체를 가장 잘볼 수 있는 곳이다.
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왕봉도 보인다
마치 기암괴석을 모아논 암릉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곳...
속리산 전체 계곡 구석구석을 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상고암이란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539~575) 14년(553년)에 천축에서 불법을 구하고 귀국한 의신조사에
창건된 가람으로서 불법을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가람이란 뜻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한 이곳이 속세를 떠니 불법의 진리를 펼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헤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에
증통국사가 중건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 가는길
법주사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고, 오른쪽 노사나불의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 양식으로, 5층은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 펌)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로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율사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상고암(법주사)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향한다
천왕봉으로 올라오는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하산길을 문장대가 아닌 법주사 방향으로 향한다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돌탑(16:12)
암릉구간을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암릉구간의 조릿대 사이를 지나니 천왕석문이 나온다
천왕석문(天王石門:16:18)
지리산 통천문을 지나는 느낌이지만 내가 보기엔 통천문보다 훨씬 나은 느낌이다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갈 수 없는게 마치 요즘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태를 꾸짖는 것 같다... 오만과 탐욕을 다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가라고...
천왕봉 0.9km→ ←입석대 0.7km 이정표를 지난다
상고암. 배석대(拜石臺) 갈림길(16:19)
집채만한 바위가 너덜을 이루고 있는 이곳 좌측으로 내려가면 상고암과 배석대가 나온다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608년에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암릉구간을 올라가는데 오늘 산행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온다...천왕봉에서부터 뒤따라 오는 수헌아우에게 제의하여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16:20~38)
나무 계단 사이에 핀 산괘불주머니
나무 계단을 넘어서니...
도룡농 바위(16:42)
바위 절벽에 한마리의 도룡농이 붙어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산죽길을 오르면서 바라본 암릉구간의 모습
신라 말기의 문신이자,유학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이곳 속리산의 비경에 반해 다음과 같은 멋진 시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은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 구나~!
두껍등 바위(16:44)
비로봉 오르는 좌측에 마치 등산화를 올려놓은 듯한 멋진 바위가 보이는데
이 바위는 반대편에서 보면 뚜꺼비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뚜껍등 바위라고 한다
문장대 가는길엔 각종 기암괴석들이 마치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멋지게 펼쳐지는 속리산의 암릉을 옛 선인들은 속리산을 말하기를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여 소금강산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이라 하여 그 승경을 조선8경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산죽길을 지나서 암릉구간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비로봉(毘盧峰;1,031.1m:16:50)
보은군 속리산면과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 안에서 좌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췄고 이에 율사께서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햋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율사께서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에 그곳을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께서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진표율사께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모든것을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로봉 정상엔 오르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비로봉에서 내려오는 길...일부 대간꾼들은 정상을 갔다오는 모양이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 간 다음에...
고릴라 바위가 있는 다시 빡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고릴라 바위(16:52)
고릴라 바위 사이를 통과하여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나무 계단에서 내려다 본 우복동천의 능선
암릉사이의 미끄러운 등로를 통과한다
암릉구간을 우회하기 급하게 내려간다
다시 오르막길
등로 좌측에 보이는 암릉
산죽길을 지나...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1,012.4m봉으로 향한다
1,012.4m봉(17:05)
다시 등로로 되돌아 온다
다시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봉(17:07)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지나갈 입석대의 모습...저기 정상은 오를수가 없다
입석대 갈림길(17:12)
입석대가는 길은 좁은 개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입석대 정상 아래에 도착했다
입석대(立石臺:1,010.4m:17:15)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임경업 장군이 7년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조선조 인조(16대임금)때 임경업 장군이 6년동안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정도 단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수가 없다.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의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장군은 정신을 차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주 보이는 석벽위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의 비석처럼 세워 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들린다
장군은 경업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세우려 했으나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장군은 그의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수련하여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해서 입석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입석대에서 다시 등로로 되돌아 온다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등로 좌측에 있는 암릉의 모습
등로 정상에 올라선 다음에...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암릉사이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암릉의 모습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좌측으로 멋진 봉우리가 보이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경업대(慶業臺) 갈림길(1.014m:17:35)
산죽길로 조금을 더 내려오니 좌측으로 경업대와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경업대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400m정도 내려가야 하는 속리산 8臺중의 하나인 경업대의
지명의 유래는 임 경업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했는 곳이라 한다
경업대 가는길
경업대 갈림길에 있는 구조이정목
신선대로 향하는 오르막길
산죽길을 지나니 신선대 매점이 나온다
늦은시간이라 쥔장이 퇴근했는지 인기척이 없다
신선대(神仙臺:1,028.8m:08:50)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구지명: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막이 있다.
옛날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서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며 춤을추고 있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을 달려갈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고있는 봉우리를 신선대(神仙臺)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대 주막에서 바라본 청법대의 모습
주막에 걸려있는 신선대 표지판
신선대 주막으로 등로가 보이는데 이 길로가면 성불사쪽 오송폭포로 가는 길이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청법대의 모습
등로 우측이 청법대인데 접근조차 어려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눈팅이질만 한다
청법대(聽法臺:1,020.9m)는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座臺)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을 외우는 소리에 제 정신을 차렸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오를수가 없으며 샛길로 돌아 우뚝 선 바위로 오를수가 있다고 한다
뒤돌아본 청법대의 모습
내가 오늘 힘들게 걸었던 뒤돌아 본다
천왕봉~비로봉~입석대~신선대~청법대가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왜 속리산이 우리나라 12대 명산이며 조선 8景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뾰족한 암봉이 있는 안부에서 문수봉으로 향한다
문수봉 가는길
문수봉으로 올라간다
문수봉(文殊峰:1,037m:18:12)
문수봉은 그저 밋밋한 봉우리로 트랭글앱과 오룩스앱에서는 표시조차 안되어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 8봉중의 하나인 문수봉은 예전엔 사자봉으로 불렸으며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녔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우리나라 명산대찰의 지명중에 불교를 상징하는 지명이
많은데 이곳 속리산은 예외가 아니다... 비로봉, 천왕봉, 문수봉, 관음봉 등...
문수봉 아래로 내려간다
직진으로 가면 문장대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향한다
자연복원지역을 지나 암봉으로 올라간다
암봉(18:20)
암봉에서 내일 가야할 문장대를 바라본다
당겨본 문장대의 모습
암봉에서 문장대 광장으로 내려간다
문장대 광장(1,000m:18:21)
문장대는 낼 아침에 오르기로 하고 화북주차장으로 내려간다
화북주차장까지 3.1km라니...어둡기 전에 내려갈 지 걱정이다
예전과는 달리 초반의 내리막 등로는 편안하다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고...
엄청 내려온 듯 한데 이제 겨우 0.7km라니...다리는 천근만근이다
조망바위(18:4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칠형제바위
칠형제바위가 보이는 저 능선은 속리산국립공원 화북 공원 관리소에서 청법대로 연결된 능선으로
1995년 청주 청심산악회에서 개척하였는데 개척당시 9피치를 개척하던 김 선주씨가 추락하여
사망한 곳으로 故 김선주씨를 기리는 뜻에서 9피치 40m 벽을 선주벽이라 명명했다하며 그 때가
산수유가 필 무렵이어서 산수유릿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예전에 없었던 다리들이 많이 보인다
우측으로 내려가면서 고도를 급격하게 낮춘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몇개의 다리를 건넜는지 모르겠다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로 봐서는 많이 내려온 듯 하다
암릉구간을 지나고...
구급상비약함도 보인다
쉴바위(19:02)
쉬어가는 뜻이란 모양이다
가도가도 속리산 화북분소는 보이지 않는다
산 속이라 조금씩 어둠이 시작되는데 불안하다.
수헌아우님은 진작에 가버렸고 헤드렌턴이 있으니 큰 걱정은 안한다
거의 다 내려온 모양이다...개울넘어 나뭇가지 사이로 성불사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니...
화북초소 등로 초입이 니온다
성불사 입구(19:35)
우측 100m지점에 오송폭포가 있고 신선대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윗쪽의 200m 지점에 성불사가 있으나 너무 힘이들어 오르지 않고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반야교(19:36)
오송교(19:38)
민가를 지나간다
속리산탐방지원센터 화북분소(19:41)
너무 늦은 시간인지 주차장은 텅비어 있다.
민박집을 찾아서 내려간다
도로를 버리고 숲속의 샛길로 내려간다
다시 도로를 만나고...
예전에 없었던 화북분소가 멋지다.
民草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한데 저 사람들만 떵떵거리며 잘사는구나
가도가도 민박집은 보이지도 않는구나
튼튼한 국가안보 절실히 필요한데 요즘에 저걸 실천하는 사람이 있나요?
군인들은 북한에서 초소까지 내려와서 문을 두드려도 모르고, 북한 김정은이는
툭하면 겁박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데 항의도 한번 제대로 못하는데...
소나무집(20:10)
먼저 내려간 수헌아우가 민막집에 도착하여 숙소와 식사를 예약해놨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인해 후배산꾼에게 밉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자부심에 기분은 쿨하다...숙소에서 샤워를 한 다음에...
후배가 미리 예약한 삼겹살에 막걸리 한잔을 한 다음에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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