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년 10월 04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오후에 흐림)...태풍을 연상케 하는 강한 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2.3km +들머리 1.7km + 날머리 2.2km / 7시간 02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헐티재-암봉-676.9m봉-730m봉-조망바위-용천봉-무명봉-866.7m봉-880m봉
용천사 갈림길-천왕봉 갈림길-암봉-비슬산 천왕봉-헬기장-다시 천왕봉 갈림길
대견사 이정표-쉼터-삼봉재-조망바위-월선봉 갈림길-월선봉-안부-전망대 갈림길
대견봉 갈림길-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입구-조화봉-조망터-968.7m봉
대견사 임도 표지판-석검봉(상여덤)-기차바위(덤)-쉼터-안부-오페라바위-무명봉
갈림길-보림사 갈림길-상수월 마을 정상(?)-갈림길-804.9m봉-안부-성주이공 묘
임도 삼거리-원명고개
☞ 소 재 지: 경북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옥포읍, 유가읍
경남 창녕군 성산면
어젯밤에 친구집에서 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수면시간은 짧았지만 친구넘이 배려해준 덕분에 잠을 푹자고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친구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나니 과일과 간식, 식수까지 꼼꼼히 챙겨준 것을
베낭에 넣고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친구집을 나와 정대리로 가는 버스를 타러 칠성시장
고가 밑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우록리와 정대리로 가는 가창2 버스 노선표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친구집에서 택시를 타고(요금 4,800원) 칠성고가 아래의 정대리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06시 20분...너무 일찍 도착을 했는지 버스의 문은 굳겨 잠겨있다.
이곳에서 가창면 우록리와 정대리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인데 우록리로 가는 버스는
05시 30분에 첫 차를 시작으로 하루에 29번이나 다니는데, 바로 옆 동네인 정대리는
첫 차가 06시 40분이고 우록리로 가는 버스의 절반도 안 되는 14번을 운행한단다.
버스 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의자에 앉아 10분 넘게 멍때리기를 하는데 그제서야 기사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어제 아침에 만났던 기사이다...베낭을 메고있는 나를 보고는 ‘어르신! 오늘은
어디로 가시려고 일찍 나오셨나요’ 하고 인사를 건넨다.
06시 40분에 버스는 출발하고 일찍 일어난 탓인지 아니면 버스를 타면 조는 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버스가 칠성시장을 지나면서부터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니 버스는 벌써
가창댐을 지나 정대리의 골짜기에 접어들고 있다
버스 종점(07:30)
이곳은 헐티재 아래에 있는 정대리 바깥매내미 버스 종점인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예상 시간보다 15분정도 빨리 도착한 느낌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날씨가 생각보다 춥다...서둘러 산행을 준비하는데
기사 양반이 잘 다녀가시라고 인사를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7:35)
버스종점에서 902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1.7km를 18분정도 걸어 올라가니...
헐티재가 나온다
헐티재(535m:07:53)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금천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각종 조형물과 이정표, 표시석과 수준점, 간이 매점이 있어 조금은 지저분한 느낌이다
청도군 각북면에서 대구 가창면으로 넘어가는 여섯 개의 고개, 즉 헐티재, 원계재, 통점령,
무등재, 상심이 고개, 율치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로 1980년대 가창면 정대리와 각북면 오산리를
연결하는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기 전, 1970년대까지 각북과 대구의 월배 또는 화원 지역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사용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헐티재 주변에는 안개가 잔뜩끼어 시계(視界)가 불량하다.
청도쪽으로 가니 우측 풀섶에 비슬문화촌 표시석이 보인다
청도군 각북면 경계 표지판이 나온다.
청도군에 있는 각북면(角北面)은 청도군에서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은 청도군
서북쪽에서 가장 높은 비슬산을 중심으로 홍두깨산과 헐티재를 경계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풍각면 수월리와 경계를 하고 있고 동으로는 이서면과 경계를 두고 길쭉하게 남북으로
형성된 면으로 비교적 높은 산 때문에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도천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풍각면에서
부곡천과 합류하여 각남면으로 흘러 들어간다.
각북면은 골 깊은 한통속의 산골로 형성된 면으로 골의 좌우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좁은 면적이지만 경지 정리가 비교적 잘된 곳으로 곳곳에 저수지가 마련되어 있어 수리 면에서도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삼평리와 현리리가 마주한 곳에 있는 재일동포가 만든
사과 재배 단지는 일찍이 선진 농법을 도입하여 청도군의 사과 농사 선진화에 앞장선 곳이다.
1413년 밀양군 풍각현으로 개편되었다가 1709년 대구부에 편입되어 각북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상북면의 일부와 통합하여 청도군 각북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방행정구역요람』에 의하면 이 지역은 마치 소뿔[牛角] 모양 같다하여 지명에 '각(角)' 자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군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각북면으로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면 경계 표지판을 지나서 옹벽옆 망가진 휀스를 비집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절개지의 잡풀사이로 올라가니...
급경사이긴 하나 밧줄이 처져있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초반부터 빡센 오르막길이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헐티재가 숲에 가려져 보일락 말락하다
청도군 각북면으로 내려가는 길은 구절양장의 도로이다
능선으로 올라선다
좌측의 우회도로를 만나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서...
올라가니...
금천리에서 올라오는 등로를 만난다
암릉(08:25)
가야할 비슬산 능선이 보이지만 모든게 흐릿하기만 하다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676.9m봉(08:30)
헐티재에서 힘들게 올라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봉우리이다
가야할 비슬산의 주능선이 보이지만 주변에 있는 가창댐과 오산지(五山池)의 영향인지
흐릿한 안개로 인해 모든게 흐릿하게 보여 아쉽기만 하다
우측 아렛쪽은 아침에 내렸던 버스 종점이 있는 미내미골이고 그 아랫쪽은 미나리가
유명한 정대리... 더 아랫쪽으로 내려가면 달성군의 식수원인 가창댐이 있다
좌측으로는 오산리에서 올라오는 길인데 청도군 각북면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감비골산이라
부르지만 지형도상에는 그냥 676.9m봉이라 기록되어 있다
좌측으로 내려간다
가까이에 있는 잠시후에 오를 775.2봉도 흐릿하기만 하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가 걸어야 능선의 모습
암릉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안부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버섯이 나오는지 노끈이 처져있다
730m봉(08:38)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바람이 상당히 세차게 분다
약초 재배지인지 버섯이 나는 곳인지 출입금지 비닐이 처져 있다
안부를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잠시후에 오를 778.1m봉을 바라보면서 비슬산 정상을 향해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사면길로 올사 선 다음에...
공터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조망바위(08:55)
내리막으로 내려간 다음에 다시...
빡센 오르막길...세찬 바람에 상당히 춥다
용천봉(湧泉峰:775.2m09:05)
경북 청도군 각북면과 대구광역시 달선군 가창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4등 삼각점이 있고, 반바지님께서 용천봉이라고 코팅지를 붙혀 놨으나 지형도상에는
없는 지명이고, 준.희님의 산패 높이도 지형도상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반바지님께서 용천봉이라는 지명은 아마도 이곳 아래에 있는 용천사에서 지명을 따온 듯 하다.
대구읍지에는 신라 때 의상대가사 지어 현재까지 이어오는 용천사(湧泉寺)는 고려 때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으며 아무리 가뭄이나 홍수에도 넘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용천(湧泉)이라고 하였다
이곳 사면에서 발원한 청도천의 원류는 오산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는데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이다.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말한다
용천봉 정상 삼각점(△청도404 / 1982재설)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진달래 군락지를 지난다.
무명봉(09:15)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오르막길의 사면 등로를 버리고...
직진으로 올라간다
866.7봉(09:30)
866.7봉 정상에 있는 빛바랜 선답자의 시그널
좌측으로 내려간다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지나서 비슬산으로 향한다
강한 바람은 그칠줄 모른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880m봉(09:38)
좌측으로 내려간다
진달래 군락지를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지도상의 삼봉재이다
지도상에는 이곳을 삼봉재(三峰峙)라고 해놨는데 오기(誤記)로 보인다
일제시대 지형도에는 헐티재를 삼봉재라 기록되어 있다.
각북면 오산리 사람들이 비슬산으로 오르는 샛길인 셈이다
정대리쪽의 안부
안부를 지나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용천사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용천사(湧泉寺) 갈림길(10:00)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0년(670)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옥천사라고 하였는데 당시 옥천사는 해동화엄전교의
10대 사찰중 한곳이였다. 고려 원종 8년(1267)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선사가 중창하여 불일사라 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후 조선 인조 9년(1631) 조영대사가 3중창 하였으며, 조선 순조 5년(1805)
의열화주가 크게 중수하였다.
용천사는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 내리고 있어 용천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2012년 지거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9년 동안 봉직하며 목암, 공양간 건축, 경내 토목 공사정비, 각 전각의
단청 등을 완수하여 도량을 일신하였다. 전성기에는 일 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고, 부속 암자로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도성암 등 47개소에 이르렀으나 무구한 세월 속에
사라지고 사찰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2m 높이의 부도 6기가 사찰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사찰 내 전각들 중 대웅전은 1631년 3중창 때의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대웅전 내 후불탱화 영산회상도는 보물 제195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동안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더 나올 것이라는 전설과 함께 용천샘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용천사 갈림길을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힘들게 올라와서 뒤돌아 보니 어제 걸었던 능선들과 각북면의 들녘은 모든게 흐릿하여 아쉽기만 하다
천왕봉 갈림길(1,038m:10:30)
비슬산의 주봉인 천왕봉은 우측으로 0.4km 떨어져 있으나 이곳은 무조건 같다와야겠제
이곳이 신산경표상의 청룡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여 언젠가는 한번쯤 더 와야할 듯 싶다
금호 남(청룡)지맥 개념도
비슬지맥의 비슬산(琵瑟山) 동남쪽 400m 지점의 분기점(x1038m) 에서 북쪽으로 분기해서
비슬산(△1082.8m), 청룡산(靑龍山 △792.9m), 산성산(△653.4m)을 지나
대구 시내를 가로 지르며 두류산(x125.4m), 와룡산(x299.7m), 궁산(x250.9m)을 지나
대구 달서구 파호동 강창교앞 금호강 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4.7 km 되는 산줄기 인데,
금호강의 우측 분수령이 되고 강창교에서 1.7km 정도 제방둑을 따라 내려가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수점을 만나면서 맥을 다하는데 합수점 부근의 낙동강에 강정고령보가 위치해 있다.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금호강 남쪽의 산줄기라 하여 금호남지맥이라 한다
뒤돌아 보니 잠시후에 가야 할 월광봉(앞)과 조화봉(뒷쪽) 능선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돌탑의 우측...
풀섶에다가 베낭을 숨겨놓고 스틱만 가지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돌길 사이에 피어있는 쑥부쟁이
고도차가 그리 크지않는 암릉길을 걷는다
천왕봉가는 길에는 억새가 많이 보인다
암봉(10:38)
암봉에 올라서니 억새 사이로 등로가 보이고 팔각정 뒷쪽 너머로 천왕봉 정상석이 보인다
비슬산 주능선은 저 와와(臥蛙:개구리가 엎드려 있는 듯한 지세))능선을 북서외곽으로 펼쳐 놓은 뒤
1,083.4m 최고봉(비슬산 천왕봉)이 나온다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넓고 훤히 산상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주변 마을들에서는 ‘번치’라 불렀다.
북쪽 능선 아래의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서는 그냥 ‘번치’, 동쪽 아래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서는
‘이곡번치’라 부른다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인데 ‘이곡’은 ‘이고개’의 준말이다.
비슬산 번치는 옛 사람들에게는 보배 같은 곳이라 했다. 오산리 할머니들은 거기서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뜯으러 올라 다녔다 했고, 바깥 어른들은 거기서 거름으로 쓸 모풀을 베었으며, 아이들은 도라지를 캐
제사상에 쓸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좌측에 올라오는 유가사 갈림길을 만나 천왕봉으로 향한다
비슬산 천왕봉(琵瑟山 天王峰:1,083.4m:10:40)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옥포읍, 유가읍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최고봉은
천왕봉이다...이전에는 대견봉(1,035.4m)이었으나 2014년 10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최고봉을 천왕봉을
변경하였으며 비슬산괴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이며 비슬산 천왕봉은 이 산괴(山塊:단층으로 인하여
산줄기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산의 덩어리)의 주봉이다
여기서 북북서쪽으로 청룡산(794m), 산성산(653m), 앞산(660m)에 이르러 분지상에 다다르며,
남쪽으로는 조화봉(1,059.4m)과 관기봉에 이른다
비슬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낙동강이 구비쳐 흐르고, 봄철에는 철쭉, 진달래가 가을철에는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루며, 스님바위, 코끼리 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이름 붙혀진 기암(奇巖)이
많이 있고, 용연사와 용문사, 유가사 등 명찰(名刹)을 품고있는 산이기도 하다.
비슬산(琵瑟山)의 지명유래는 3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 『신증동국여지승람』과『달성군지』에는 비슬산을 일명 포산(苞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산은 ‘수목에 덮여있는 산’이란 뜻으로, 신라시대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인도의
범어식(梵語式) 발음으로 “비슬”이라 발음을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하는데
지금도 비슬산 정상을 보면 산봉우리를 덮고있는 수목을 볼 수 있다.
둘째,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물에 잠기지 않은 비슬산의 몇개 봉우리에 배를 매었다는
‘배바위 전설’ 을 토대로 그 바위의 모습이 비둘기 같다하여 ‘비둘산’으로 부르다가
점차 ‘비슬산’으로 바뀌었다는 설로 그만큼 산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셋째, 『유가사사적』에는 산의 모양이 거문고와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이라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슬산은 「정상부의 바위 생김새가 신선이 앉아 비파를 타는 형상이어서 비슬(琵瑟)」로 불리고 있으며
대구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 경남 창녕군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北팔공 南비슬로 지칭되고 있고 팔공산은
남자의 산, 비슬산은 여성의 산으로 비유되며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비슬산에 관한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문헌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여상우포산(予嘗寓包山 :
내가 일찍이 포산에 살 때)이란 기록이 있다.
2014년 3월 1일 대견사 개산일에 비슬산 최고봉 지명이 대견봉에서 천왕봉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최고봉 지명에 대한 착오를 바로 잡은 것으로 일부 유림들이 1997년 명확한 역사적 근거와 행정
절차를 결여하고 비슬산 최고봉에 대견봉으로 표지석을 설치하였으나 역사적 자료, 지명전문가 및
교수들로 구성된 지명심의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비슬산 최고봉 지명을 천왕봉으로 변경하고
대견봉 표지석은 당초의 대견봉으로 이설하고 현재의 천왕봉 표지석을 새로히 설치하였다
또한 주민들도 오랫동안 천왕봉 등으로 불러 왔었고 비슬산의 산신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으며 정상부 능선 북쪽 200m부근에는 천왕샘도 있다
비슬산 정상 1등삼각점(△청도11)
천왕봉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달성군 유가읍과 구지면쪽의 모습
날씨가 좋으면 아파트 단지 너머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낙동강이 보이고,
구지를 지나 창녕군 이방면을 거쳐 내 고향 의령으로 가는 길도 보일텐데...
봄도 아니건만 개스로 인해 모든게 흐려서 아쉽기만 한다
주위에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이틀동안 처음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잠깐 사이에 바람이 세게 불어오니 땀에 젖은 옷이 마르면서 추위를 느낀다.
서둘러 왔던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풀섶에 숨어버린 당간지주석?
억새밭 등로로 걸어오는데 당간지주석처럼 생긴 돌기둥 하나가 보이는데 무심코 지나면 놓치기 쉽다
예전에 이곳에 절집이 있었나?...하기사 전문적인 불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것에 대한 관심조차 없을테니...
팔각정을 지나니...
헬기장(10:45)
헬기장 너머로 보이는 청도의 산들은 짙은 안개에 갇혀 버렸다
갈림길에 되돌아와서 베낭을 찾는다
다시 천왕봉 갈림길(10:52)
제도권 등로라 등로는 아주 좋다...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최근에 산불이 났던 모양이다
대견사 갈림 이정표(11:05)
이곳부터는 간간히 등산객이 보이고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대견사 이정표쪽으로 향하나
맥길은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오른 다음에 곧바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조금전에 헤어진 대견사 길림 사면길로 내려서 헤어진 등로를 다시 만난다
쉼터(11:05~15)
오늘 산행 후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휴식을 취한다
이른 새벽에 친구가 준비해 준 과일과 곶감으로 허기를 면한다
역시 불교의 도시답게 이정표에는 절집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좌측으로는 용천사, 우측 아래로는 유가사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대견사쪽으로 이어진다
유가사(瑜伽寺)는 동화사의 말사신라 흥덕왕2년에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모습이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옥 유(瑜), 절 가(伽)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경내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 뒤로 진성여왕 3년에 원잠선사가 개축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을 거느렸다. 범종각 부근에서 대웅전 지붕 위를 올려다보면
비슬산 바위군이 기와처럼 대웅전 위에 얹혀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용화전(龍華殿)·나한전·산령각·범종루(梵鐘樓)·천왕문(天王門)·백화당
(白華堂)·동산실(東山室)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범종루는 취적루(翠滴樓)로 불리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석조여래좌상과 괘불(掛佛), 삼층석탑, 15기의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괘불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 하며, 가뭄이 심할 때에는 괘불에 소원을 빌고 대견사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높이 364㎝이며, 아래쪽에 있었던 원각사터에서 1920년에 옮겨온 고려시대 양식을 띤 작품이다.
또, 이곳에 있는 15기의 석종형 부도는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낙암당(洛巖堂)·
월호(月湖)·휴영당(休影堂)·설청(雪淸)·해백(海白)·경수(景修)·진흘(眞汔)·명학(明學)·처명(處明)·사옥(思玉)·
영규(靈圭)·도경·풍렬(豊烈)·하초(夏初)·세민(世敏) 등의 부도이고 부속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수도암(修道庵)과 경상북도의 3대 수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아기자기한 바위 능선을 따라서 걸어간다
데크목 계단이 설치된 곳으로 내려가니 삼봉재가 나온다
삼봉재(三峰峴:895m:11:20)
대구 광역시 유가읍 양리와 경북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쌩뚱맞게 마령재로 표기가 되어 있고 오룩스맵상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조금전에 지나온 용천사 갈림길을 삼봉재라 했고 이곳을 마령재라 하는데 오기인 듯
하며, 처음걷는 산꾼으로서는 상당히 헷갈린다.
마령재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9km가량 더 내려 간 다음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와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말이다...국립지리원 관계자는 참고하시기 바란다
삼봉재의 지명유래는 고개 우측 옆으로 솟아있는 980m봉 - 974m봉 - 911m봉의 세 바위봉우리를
‘삼봉’이라 했는데 오산리 마을 여느 집 마루에서도 쉬 올려다 보일 정도로 뚜렷한 곳을 일제시대
지형도가 헐티재에다 잘못 갖다 붙였고, 현재의 국가기본도가 헐티재 ~ 천왕봉 사이 어느 봉우리에다
엉터리로 붙여놓은 ‘삼봉현’(三峰峴)의 진짜 주인이 바로 이 고개인 것이다.
이 삼봉재는, 옛날 어렵던 시절 각북 오산리 주민들이 손수 만든 소나무 서까래를 무겁게 짊어지고
이 재를 넘어 30리 길이라는 현풍장에 져다 팔아야 곡식을 사 죽이나마 끓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 가야 콩·깨 같은 농산물이나 돼지새끼를 구해 올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주능선 너머 달성 땅에서는 ‘삼봉재’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로는 소장수나 넘어 다녔을 뿐 일반인은 그럴 일이 없어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쉼터를 지나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멋쟁이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조망바위(11:25)
조망바위에서 뒤돌아 본 비슬산 천왕봉의 모습
능선으로 올라간다
월선봉 갈림길(11:32)
편안한 제도권 등로인 우측 사면길을 버리고...
빡세게 능선으로 올라서니 지형도상에는 월광봉(1,003m)이란 곳에 도착한다
월선봉(月先峰:1,003m:11:38)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이정표와 멋진 조망대, 대구 길손님이 걸어둔 월광봉이란 산패가 보인다.
등산객들 사이에서 ‘월광봉(月光峰)’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곳은 옛 기록에는 전혀 없는 지명으로 오산리서는
‘극락이’ 혹은 ‘극락봉’이라 불렀는데 봉우리 동쪽에 ‘극락골’에 있는 ‘극락사’ 절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달성군 현풍 쪽 기록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건 ‘월광봉’이 아니라 ‘월선봉’(月先峰)일 뿐이다.
‘월광봉’이란 이름이 나타나는 유일한 책은 최근에 씌어진 ‘달성군지’ 뿐으로, 그건 옛 기록의 ‘先’을 ‘光’으로
담당자가 한문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게다가 1,003m봉은 ‘월선봉’일 개연성조차
극히 낮다. 옛 기록은 “대견봉의 남쪽에 월선봉이 있다”고 써 둔 반면, 1,003m봉은 대견봉의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월선’은 ‘달이 먼저 떠오르는 곳’을 가리키는 듯하며, 산동네들에서 그런 봉우리는 대개 ‘달등’이라 불린다.
정확하게 하자면 월광봉이 아니라 월선봉으로 고쳐야 하는게 맞을듯 싶다
멋진 조망처 ... 맞은편의 대견봉은 손에 잡힐듯 가깝지만 희뿌연 안개가 작품을 버리는구나
조망대에서 바라본 대견봉의 모습
지나온 천왕봉을 뒤돌아 본다
월광봉(?) 정상에 있는 비슬산 둘레길 안내판
월광봉(?) 아래로 내려간다
조금전 사면길에서 헤어진 등로로 내려서니...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등로 주위에는 용담꽃이 많이 보인다
안부(11:42)
맞은편으로는 예전에 비슬산의 천왕봉 정상에서 쥔장(주봉) 행세를 했던 대견봉
정상석이 저 봉우리로 이사(?)를 가서 대견봉으로 자리를 잡은 봉우리가 보인다
가야할 조화봉과 비슬산 강우레이더 기상관측소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전망대 갈림길(11:50)
우측 아랫쪽에 전망대가 있다고 했지만 갈 길이 멀어서 포기를 한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철없는 넘
이 넘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
완전히 꽃길을 걷는 느낌이다...주위로는 온 천지가 진달래 군락지이다
快適須臾意已閑(쾌적수유의이한) / 일연선사
快適須臾意已閑(쾌적수유의이한) : 즐겁던 한 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暗從愁裏老蒼顔(암종수리로창안) :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不須更待黃糧熟(불수갱대황량숙) : 한끼 밥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方悟勞生一夢間(방오로생일몽간) :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이제 알았노라
이곳 비슬산 대견사에서 한동안 주석하셨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 一然禪師, 1206~1289) 의 禪詩이다
대견봉 삼거리(1,018m:12:00)
갈등이 많다...대견봉과 대견사를 참배하고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관광버스나 자가용을 가져 왔다면 귀경 차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당연히 가겠지...아쉬움을 뒤로하고 조화봉으로 향한다
이곳을 칠분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후 겨우 7m가량 하강했다가는 곧바로 칠분지(조화봉)를 향해
높아져 가기 때문에 칩분지라 부른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대견봉 삼거리라 부른다
송해선생이 여기에 왠일이람...
조화봉을 바라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의 모습
월광봉(극락봉)과 이 칠분지 사이의 동편 골짜기는 각북면 오산리 ‘극락골’이다.
칠분지서 동쪽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 그 북쪽의 극락골과 남쪽의 ‘애골’을 가르면서,
동시에 오산리와 남산리를 구획짓는 능선이다
극락봉과 이 칠분지 사이의 동편 골짜기는 각북면 오산리 ‘극락골’이다.
칠분지(조화봉)에서 동쪽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 그 북쪽의 극락골과 남쪽의 ‘애골’을 가르면서,
동시에 오산리와 남산리를 구획짓는 것이다. 강우관측소 건물도 저 봉우리가 아니라 이 경계능선 초입에 있다.
극락골은 하류에서 북편의 ‘물통골’과 합류해 ‘대동골’을 이루는데 일대서 가장 깊고 웅장한 골이다.
옛날부터 이름났고 특히 거기 흐르던 ‘약물’이 유명했었다고 하며, 각북은 물론 이서·각남·풍각 등에서까지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았었다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펜션·찻집 등이 여럿 들어서 있으며, 등산기점으로 인기다.
거기서 출발한 뒤 앞서 본 극락봉 동릉을 타고 오르다가 그 남쪽의 극락골을 거쳐 ‘딴봉’ 쪽으로 옮겨 걷거나
북쪽의 물통골 위 ‘중댕이바램이’ 길로 연결해 가도록 등산로가 나 있다.
공영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지나...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선다.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입구(12:08)
맥길은 도로를 버리고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서야 하지만...
차단기를 돌아서서...
그냥 도로를 따라서 간다
조금전에 지나온 비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월광봉으로 잘못 알려진 월선봉 능선이 보인다
도로 우측으로 칼바위가 보이는데 저곳이 맥길이다
도로에서 바라본 톱(칼)바위의 모습
톱(칼)바위 안내판
도로 아랫쪽에는 마가목 열매가 무쟈게 많다
강우 레이더 관측소로 올라간다
강우레이더 관측소 도로를 따라 가면서 바라본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쪽의 모습
너덜길 아래로는 벌써 가을이 시작되려나 보다...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맥길은 우측 능선이나 그냥 편하게 강우레이더 관측소를 향해서 간다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정문에서 우측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간다
환경부 낙동강 홍수통제소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의 모습
기상이변으로 인해 국지성 집중호우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임진강 유역에
강우레이더를 최초로 설치한 이후에 2009년 6월에 비슬산에 강우레이더 관측소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영남의 낙동강 유역을 관측하며 경북전역의 강우 상황을 125×125m의 면적 단위,
2.5분 간격으로 상세하게 보여주고, 이로써 금호강의 홍수 예.경보 시스템 개발로 대구광역시 및
주변 도시의 돌발 홍수에 의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비슬산 해맞이 제단이 있다
1,059.4m봉은 ‘강우관측소’로 상징되는 비슬산 제2봉으로 제단 뒷쪽으로 가면 청도산악회에서
1994년에 설치한 “照華峰”이란 정상석이 있다.
그 남쪽 면은 대단한 절벽바위로 깎여내려 더 남쪽의 풍각 상수월마을서 ‘병풍덤’이라 부를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병풍덤서 그 마을 쪽으로는 ‘치이(키)덜겅’ ‘정지(부엌)덜겅’ 등 ‘덜겅’이라 불리는 굉장한 너덜이 둘이나 펼쳐져
있기도 하다...그러나 1,059m봉은 실제 높이와 보는 높이 사이에 편차가 극심한 봉우리다.
청도 쪽에서는 이게 비슬산 최고봉인 듯 생각될 정도로 솟아 있으며 특히 7층짜리 하얀 관측소 빌딩이
세워진 뒤 비슬산 남사면 풍각 쪽에서는 오직 이것만이 두드러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비슬산 서쪽 유가면 땅에서는 이 봉우리가 있는 줄조차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그 전면(서쪽)으로 1km나 튀어나간 지점에 다소 낮지만 훨씬 두드러지는 대견봉이 솟아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1994년 11월에 청도산악회에서 세운 조화봉 정상석이 있다.
조화봉(照華峰:1,059.4m12:20)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와 남산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비슬산 해맞이 제단과 정상석, 좌측 아래에는 비슬산 강우 레이더 관측소에 있는
비슬산조화봉 전망대도 있다.
조화봉(照華峰)은 "비슬산(琵瑟山) 아래 흘러가는 낙동강 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 봉우리에 절을
지을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인근의 봉우리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니 중국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 봉우리에 '비칠 조(照)'에, '아름다울 화(華)'[중국을 의미], 즉 조화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비슬산의 주요 봉우리 가운데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082.8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며, 위치로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어있는 능선 중에서 대견봉(大見峰:1,035m]~월광봉(月光峰:1,003m)~
석검봉(石劍峰:톱바위 또는 칼바위, 988.5m] 다음의 봉우리이다.
조화봉 일대의 기반암은 쪼개짐의 발달이 양호한 안산암질 각력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능선을 따라 사면에는
각력질 거력들이 산재하며 사면의 거력들 일부는 배후 산지에서 공급된 후 제자리에서 안식각을 유지하는
애추 사면을 이루고, 일부는 주빙하 작용에 의해 골짜기를 따라 흐르다가 암괴류를 이루며 완만한 경사지에는
암괴원이 펼쳐져 있다.
조화봉에서 북서쪽의 대견봉이나 남서쪽의 관기봉 능선의 서사면에는 폭 1㎞, 길이 500m의 암괴류가 발달해 있다.
암괴들의 크기는 최대 지름 1m 내외이다. 이들 암괴의 일부는 지난 빙기에 솔리플럭션 작용에 따라 계곡으로
흘러내려온 것이다.
암괴류는 중생대 화산암 유천층군의 안산암질암을 관입한 불국사 화강암 기반암을 거력 공급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암괴류 상부는 애추성 거력 퇴적물로 판단되며 또한 암괴류의 여러 곳에서 좌·우측으로부터 애추
사면이 합류되고 있다. 이러한 곳은 암괴류와 애추의 거력 퇴적물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어 특이한 경관을 보여준다.
조화봉 정상 아래에는 멋진 조망바위가 있고 잠시후에 가야할 맥길이 한 눈에 보인다.
조화봉’이라는 정상표석이 서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게 조화봉이라는 확증은 어디도 없다.
‘조화봉’은 서쪽 유가면 지역을 중심으로 봍여진 이름일진대, 거기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이 봉우리에 그런 특별한 이름이 주어졌을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서 그 일대 명칭으로 통하는 건 오직 ‘칠분지’(칠푼지)였다.
뜻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그게 과연 봉우리만을 가려 기리키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했다.
하지만 ‘칠분지’는 주변 여러 마을에 큰 편차 없이 공통되게 통하는 이름이었다.
동쪽 아래의 청도군 각북면 남산마을 및 낙성마을, 서쪽의 달성군 유가읍 가재마을, 남쪽의 청도군
풍각면 상수월마을 등에서 공히 그랬다.
이렇게 분명한 이름을 가진 것은 1,059m봉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밀접한 생활 터전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 동편 각북면 남산리서는 할머니들까지 그곳 지형을 소상히 알 정도로 누구 없이 끊임없이 올라 다녔던
곳이라 했으며, 오산리에선 가물 때 올라 무지(기우제)를 지내던 터라 했다. 근년 가뭄이 들었을 때는
용머리를 누른 탓이라며 강우관측소 건립을 원망도 했다는 것이다
맥길은 정상석에 되돌아 나와 해맞이 제단 좌측의 숲속으로 향한다
숲속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대견봉(大見峰:1,035.4m)과 그 아래의 넓은 공터에 있는
대견사가 보이는데 아쉽다...저기를 같다와야 했는데 오랫만에 이틀간 산행을 했더니만 3주전에
다친 발목의 통증이 심하고 올라가야 하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가 애매하여 가지 못했다.
대한불교조계종 9교구 동화사의 말사인 대견사는 예전에 비슬산의 주봉 노릇을 했던 대견봉 가기 직전에
있는 사찰로 대견사(大見寺)는 "크게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으로 신라 현덕왕(810년) 때
보당암으로 창건, 세종 때 대견사로 개칭되었으며, 하늘에 맞닿은 절로 "北봉정, 南대견"이라 할 만큼 전국
최고 도량으로 일연스님(1206년~1289년)이 22세(1227년)에 승과 장원급제 후 초임지 주지로 22년간(1249년)
주석(駐錫)하셨던 곳이다.
이후 고려말 몽고 침입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1371년 중창하였으며 한일합방 후 비슬산의 산세와 대견사가
대마도를 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속설에 의거 1917년 6월 23일 강제폐사 후 약 100여년 동안 폐사지로
방치되어 왔다.
대견사 복원을 위해 2012년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주지 성문)와 달성군(군수 김문오)이
협약을 체결, 달성군정 핵심 사업인 비슬산 관광명소화 사업과 병행 추진하여 2014년 3월 1일 삼일절날
개산식(開山式)을 가지고 정식사찰로 재등록하였다.
건물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최기영 대목장이 총괄감독하였으며, 三道(경상, 전라, 충청)와 三山(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을 조망할 수 있는 천하명당의 전통적인 비보사찰(裨補寺刹)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8대 적멸보궁이다.
일연스님이 젊은 시절 참선에 몰두하면서 삼국유사 집필을 구상한 사찰로 유명하다.
또 당나라 황제와 관련된 일화부터 다양한 풍수 이야기까지 '스토리의 보고'라고 할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대견사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지금의 암반아래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세운 것이라 한다
로프가 처져있는 암릉구간을 통과하는데 자꾸만 무릎 부위에서 통증이 오니 조금은 불안하다
조화봉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달성군 유가읍(瑜伽邑)의 모습
유가읍(瑜伽邑)은 이 지역 비슬산(毖瑟山)에 있는 유가사(瑜伽寺)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유가읍은 현재의 현풍읍, 논공읍 등과 함께 신라 시대 때 본래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에 속하였는데 추량화현은 고려 시대에 와서 현풍으로 불리었으며, 1895년(고종 32)
현풍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1914년 4월 1일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구부의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통합하여 형성된 달성군 관할의 16개 면 중 하나가 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유가면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이 되었다가
2018년 3월 1일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비슬산의 최고봉(最高峯)[1,084m]과 비슬산 중심부 산체의 대부분이
유가읍에 속해 있으며, 산줄기는 유가읍의 북부·동부·남부를 에워싸고 있다. 북부 산지에서 현풍천이 흘러
내려오며, 남쪽은 달창 저수지(達昌貯水池)를 통과하여 차천(車川)이 흐르고 있다.
비슬산 서사면(西斜面)에 형성된 달성 비슬산 암괴류는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가읍 서부는 쌍계천(雙溪川) 변의 쌍계들과 차천 변의 금리들 등과 같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이곳은 대부분 대구 테크노폴리스 사업 지구로 조성되고 있다.
이제 맥길은 제도권 등로를 벗어나는지 서서히 지맥의 본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뒤돌아 본 조화봉(칠푼지)의 모습
조망터(12:30)
조망터에서 바라본 청도쪽의 모습
암릉구간의 내리막길에는 로프가 처져있다
아무래도 아픈 왼쪽 발목이 신경쓰여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이고 그 아랫쪽으로는 비슬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있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약간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순환도로 아래로는 유가읍내가 보이고 그 너머로 낙동강과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우측으로 조망이 트인다
우측으로는 지나온 조화봉과 아쉽게 가지못한 대견사, 맨 좌측은 대견봉(1,035.4m)이다
대견봉은 신라 때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는데 대야 물속에서 험한 지형에 웅장한 절(寺刹)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본 데서 유래됐다. 당나라 황제가 중국 곳곳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자 이웃인 신라에
사람을 보내 찾은 것이 바로 비슬산 대견사지였다. 황제가 신라에 돈을 보내 절을 짓게 하고 중국에서
보았던 절이라고 해 대견사라고 명명했고 제일 높은 봉우리를 대견봉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2014년까지
비슬산의 주봉 노릇을 했으나 그 이후에 천왕봉에게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대견사 아랫쪽으로는 천연기념물 제 435호 비슬산 암괴류(岩塊流)가 형성되어 있는데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
거석들로 이뤄진 암괴류는 국내 최대 규모(길이 2km, 폭 80m, 두께 5m)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968.7m봉(13:42)
뒤돌아보니 조화봉은 자꾸만 멀어진다
암릉구간은 계속 걸어간다...자꾸만 아픈 발목에 신경이 쓰인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했던가...강한 바람이 불고하여 베낭을 내려놓고
친구가 준비해 준 과일과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대견사 임도 갈림길(13:05)
임도파들은 대견사에서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서 와도 되겠다...ㅋㅋㅋ
대견사 임도 갈림길에 있는 비슬산 둘레길 안내도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왠 산에 도로명 주소?
알아 먹지도 못할 군불로...참으로 못 마땅하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 능선으로 관기봉이 보인다
데크목 능선에 올라서니 석검봉(石劍峰:988.5m)이 보인다
석검봉 아래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석검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청도군 풍각면쪽의 모습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등로 우측으로는 관기봉도 보인다
관기봉(觀機峰:992.1m)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경북 청도군 각북면, 경남 창녕군 성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삼도의 경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비슬산(琵瑟山)의 주요 봉우리 가운데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083.1m)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 중 대견봉(大見峰:1,035.4m)~
월광봉(月光峰:1,003m)~석검봉(石劍峰)[톱바위 또는 칼바위, 988.5m0~조화봉(照華峰)[1,059.4m]
다음으로 달성군 경계의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부 전체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크기는 높이가 30m쯤이고 둘레가 100여m가 넘는 13~16㎡정도의 평활 석면(平闊石面)이다.
관기봉(觀機峰)은 "신라 시대 고승 관기성사(觀機聖師)가 수도한 곳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라고, 관기봉의
정상석 뒷면에 새겨져 있으며, 한편, 일연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포산이성(包山二聖)’이란 내용으로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신라에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어른이
살고 있었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포산이라고도 하고 비슬산이라고도 부르는 산맥의 남쪽 모롱이에 관기는 암자를 지어놓고 살고, 북쪽의
굴속에서 도성은 살고 있었는데, 서로 떨어지기 10리쯤 되는 거리였다. … 만약 도성이 관기를 만나려면
산중의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파닥거리며 휘어지는 때를 택했으니, 그 나무들의 모양을 보고
관기는 도성을 마중 나갔으며, 그 반대로 관기가 도성을 만나려면 산중의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보다
북쪽으로 굽으며 파닥거릴 때를 택했으니, 그 나무들의 모양을 보고 도성은 또 관기를 마중 나갔다."이다.
석검봉(石劍峰:988.5m:13:15)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와 경북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와 남산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국립지리원에서 세운 빛바랜 표지판이 있으나 낡아 빠져서 알아 볼 수가 없다.
옛 자료를 찾아보면 이곳은 분명히 석검봉이라는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988.5m봉이라고
표기가 되어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의 어디에도 석검봉의 표시는 안보인다
자료를 보면 비슬산(琵瑟山) 조화봉(照華峰:1,059.4m]의 북서쪽에 위치한 석검봉(石劍峰)은 모양이 매우
날카로운 톱이나 칼처럼 생겼다 하여 톱바위 또는 칼바위라고도 불리며 비슬산 자연 휴양림 안내판에는
톱바위[칼바위]를 석검봉이라고 설명해 놓고 있다.
그러나 옛 기록에는 '석검봉(石劍峰)은 비슬산의 북쪽에 있으며, 인접한 봉우리는 천왕봉(天王峰), 수도봉이다.'라고
적혀 있으므로, 지금 현재의 석검봉 위치에서 약 3㎞ 북쪽으로 이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또한 현재의 톱바위[칼바위]는 봉우리라고 생각할 만큼 솟아 있지 않으므로 봉우리라고 부르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상에 있는 표지판
어제, 오늘 이틀동안 산행을 하면서 준희 선생의 산패 대신 반바지님이란 분이 곳곳에
코팅지로 지명을 붙혀놔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는데 이 분께서는 ‘상여덤’이라고 하고
빛바랜 삼각점 표지판 위에는 누군가가 ‘석검봉’과 ‘구구봉’이라고 메직으로 써놨다.
아래에서 보면 정상이 상여처럼 보이나?...‘덤’이란 바위의 경상도 방언이다.
이 주능선의 동편에는 '애골', 서편에는 '큰골'이 펼쳐져 있다.
애골은 청도 각북면 남산리 공간이고, 큰골은 '소재사'라는 고찰에서
출발해 비슬산 휴양림을 거쳐 퍼져 오르는 달성 유가면 용리 계곡이다
석검봉 정상 삼각점(△청도301 / 1983재설)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의 모습
우측의 계곡 아래로는 달성군 유가읍의 아파트 단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석검봉 일대의 기반암은 쪼개짐의 발달이 양호한 안산암질 각력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빙기에 형성되었으며, 암설의 생성 과정과 사면 아래로 암석 낙하하여 암설들이 퇴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애추의 형성 과정을 모식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형 자원이다.
트랙상 맥길은 직진으로 가야하나 절개지라 내려 갈 수가 없어서 왔던길로 되돌아 간다
갈림길로 와서 베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선다
나무 계단을 내려 선 다음에...
이정표 좌측의 청도 군불로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난 개인적으로 도로명 주소를 아주 싫어한다.
멀쩡한 고유지명을 놔두고 정체불명의 지명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과연 이 산을 타는 산꾼들중에 군불로라는 지명의 뜻을 아는 자가 몇명이나 될까.
도시나 마을에서는 도로명 주소가 세계적 추세라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산에서도 저 도로명 주소가 필요할까...아둔한 범여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된다
석검봉 아래를 사면으로 통과한다
좌측 능선이 오리지널 맥길이다
등로는 아주 좋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가서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
기차바위(13:28)
청도군에서는 등로 관리하나는 참으로 제대로 한다...산꾼으로서는 고맙기만 하다
비슬산 릿지구간으로 유명한 이 암릉구간을 이 지역 사람들은 기차 덤(바위)라고 한다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의 모습
우측으로는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 마을이 흐릿하게 보인다
가야할 953.6m봉이 보인다
청도군수 나으리! ...감사합니다
쉼터(13:32)
953.6m봉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암릉이라 오를수가 없어서 사면길로 향한다
953.6m봉은 눈팅이질만 하고....
출입이 금지된 953.6m봉쪽의 모습
사면길로 맥길을 이어간다
다시 오르막길
안부(13:38)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오페라 바위(13:39)
세계 3대 미항(美港)중에 하나인 호주 시드니 항구에 있는 오페라하우스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모양이다
가야할 능선의 모습
무명봉(13:42)
나무 계단을 따라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갈림길(13:45)
직진의 뚜렸한 등로로 가면 청도군 각북면 비슬관광농원 쪽으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등로가 잘 보이지 않는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무쟈게 많다
많은 시그널으로 인해서 길을 잊어버릴 염려는 없다.
내리막길로 내려선 다음에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안부를 지나서...
철쭉군락지를 통과한다
상수월 정상 표지판이 있는 보림사 갈림길에 도착한다
보림사 갈림길(13:50)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상수월 마을 정상(13:53)
산꼭대기에 원 마을 이정 안내판이...?
이곳에서 상수월 마을까지는 3km정도 되는 거리인데...
상수월마을 소개판인데, 성곡댐 부근 '전유성 코미디 철가방극장'과
상수월미나리재배단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청도군 풍각면에서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수월리는 상수월리와 하수월리로 이루어져 있다.
밀주지에 의하면 소월리(所月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조 44년(1768년)에 기록된 대구읍지에 의하면
수철리(水鐵里)와 외월리(外月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수철리와 외월리를
합하여 수월리가 된 동네이다
옛 기록에는 소월리(所月里)에서 수철리와 외월리였으며 옛날 자연부락 이름은 바들비이다.
달빛을 받는다는 뜻에서 바들비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비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바들비는
소월로 표현되었다가. 다시 수철리라고 했는데 밀양과 대구에서 다시 청도로 이관된 지역이라
기록이 없어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비슬산에서 내려온 산들이 골을 이룬 수월리는 양손을 뻗으면 팔이 닿을 정도의 좁을 골이다.
다락 논과 계단식 밭으로 형성된 경작지는 골짜기의 내려온 모양에 따라 다락으로 만들어져 있다.
골이 깊어 물이 흔하여 가믐을 모르고 살았던 곳으로 비슬산 높은 줄기에 마사로 된 흙을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은 자연산 송이가 많이 생산된다. 상수월 마을 뒷산에는 암괴류(岩塊流)가 있어 다른 지역과
달리 화강암이 발달한 곳이다. 경제작물로는 사과를 많이 생산하였다.
이곳부터는 등로가 서서히 지맥길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상수월 마을 표지판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철쭉 군락지 터널을 빠져 나간다
현장에 답이 있는거 맞죠?
산에서 자주 만나는 반가운 선답자들의 흔적들
갈림길(13:57)
철쭉 군락지에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사면길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독도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
우측의 사면길로 향하는 곳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워낙 많이 달려있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는 보이지 않고...
조금을 더 내려선 다음에...
다시 사면길로 내려간다
804.9m봉(14:08)
좌측으로 내려간다
안부(14:12)
등로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무명봉을 지나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는 잘 안보이고...
계속되는 내리막길... 참으로 지루하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서...
좌측의 사면길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묘지가 보인다
성주이공& 배부인 진주하씨 묘(14:47)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니 좌측으로는 원명마을 가는 길이고 도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임도 삼거리(14:50)
전봇대 우측 아래로 내려가면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좌측인 경북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면 415.5m봉이 나오나 무릎의 통증은 계속되고 이틀동안
산행을 했더니만 몸뚱아리가 너무 무거워 그냥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원명고개(元明峴:427m:14:55)
경북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와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원명마을에
있는 고개라 원명고개라는 지명을 붙혀졌다...원명(元明) 마을은 우멍이, 움미이라 부르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비슬산에서부터 포진을 해오다 이곳에 당도하자 동이 밝아지므로
여명(黎明)이라 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명(元明)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고 우밍이도 역시 음의
변화로 볼 수 있다.
화산리는 마을 앞산의 이름이 꽃밭등이라서 화산(花山)이라고 한다.
또는 주위 산봉우리와 등성이들이 마을을 향하여 꿈틀꿈틀하면서 기어오는 형상이 마치
꽃잎처럼 아름다운 산이라고 하여 화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밀주지(密州誌)』에는 동원과 서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원시(元時)만 보인다.
원시는 원명 또는 운밍이라고 하며 경상남도 창녕군과 접해 있으며 이 부근에도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고인돌과 고분군들이 산포되어 있어 주변에 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동원은 화산의 동쪽에 있고 서원은 동원의 서쪽에 있다.
아무래도 현재의 내 체력으로는 처음 계획했던 비티재까지는 무리일 듯 싶어서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스틱을 접는데 초반에는 컨디션이 좋아 비티재까지 가려고, 꼭 가고
싶었던 대견사와 대견봉을 패스하고 부지런히 걸었건만 오후부터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과 무릎 통증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 過猶不及은 하지말자...스틱을 접고 풍각에서 동대구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화산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도로옆에 핀 분홍색 물봉선(꽃말:나를 건드리지 마셔요)
도로 좌측으로는 폔션이 보인다
혼자놀기
화금지(花金池:15:12)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청도군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풍각면 화산리(花山里)는 주위 산봉우리와 등성이들이 마을을
향하여 꿈틀꿈틀하면서 기어오는 형상이 마치 꽃잎처럼 아름다운 산이라고 화산리로 정했다고 한다.
본래 풍각현의 지역으로 고려 때에는 밀양 도호부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대구부에 속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청도군 이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원동, 서원동, 원명동을
병합하여 화산동이라 하고 풍각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화산동에서 화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화산은 동원(東院), 서원(西院), 원명(元明)의 세 자연부락으로 형성되고 있으나 1914년 지방행정구역
변경 이전은 각기 독립된 마을로 동원(東院)에는 1593년에 진주인 강통질(姜通質) 공, 경주인 김찬 공,
경주 이씨, 창원 황씨 등 4가구가 임란 피난 차 전전하다가 이곳에 정착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그리하여 동네의 기틀은 다지면서 마을을 열어 나갔다.
서원(西院)은 청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동원은 서원의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붙여진 동명이며, 원명(元明)마을은 우멍이, 움미이라 부르며 임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비슬산에서부터
포진을 해오다 이곳에 당도하자 동이 밝아지므로 여명(黎明)이라 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명(元明)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고 우밍이도 역시 음의 변화로 볼 수 있다
화산1리는 서원마을을 말함이다
서원(西院)인 1리에는 1500연대 임진왜란 전에 정선인 전저원 공이 자리를
잡아 마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임란 후에 동래 정씨도 입주해 왔다
저수지 입구에 도착하여 베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저수지 끄트머리에 세워져 있는
검정색 RV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얼른 베낭을 정리하고 마스크까지 끼고는
앵벌이(히치) 모션을 취하는데 차량이 나쪽으로 오기에 서울을 가야하는데 풍각
버스정류장까지 좀 태워 달라고 하니 타라고 한다
풍각버스 정류장(15:27)
내 생애 처음으로 청도군 풍각면(豊角面)이라는 곳을 와본다
풍각면은 신라 때에 상화촌현(上火村縣)에서 풍산현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시대에는 유산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는 풍각현[각북면, 이동면, 초동면]으로 개칭되었다.
청도군으로 이관되면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풍각면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면 중앙을 국도 20호선이 가로 지르며 주변의 비슬산과 천왕산 등 높은 산이 있으며, 청도천이 만든
들에 대부분의 마을이 집중되어 있다. 풍각면사무소가 소재하는 송서리가 행정·경제의 중심지이다
풍각면은 청도군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청도천의 발원지인 비슬산과 천왕산 등 비교적
산이 많아 밭이 발달하였다. 비슬산을 중심으로 화산리와 금곡리, 안산리의 골짜기를 이루고 역시
비슬산 동쪽에서 수월리, 성곡리, 현리리로 이르는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천왕산 아래 월봉리, 차산리, 덕양리에서 발달된 차산 덕양들을 품고 있는 풍각면의 들은
차산 덕양들과 흑석들 그리고 송서들이 대부분이다.
풍각발 → 동대구행 버스표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어 얼른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갑아입은 다음에
베낭을 정리하는데 버스기사가 지금 차가 출발해야 한다면서 빨리 타라고 재촉한다
대충 베낭을 꾸리고 버스에 오른다...15시 40분에 풍각을 출발한 버스는 각북면과
이서면을 거친 다음에 팔조령 터널을 통과하여 어제와 오늘 아침에 갔던 우록리와
정대리를 지나 가창면소재지를 지나 대구시내 구석구석을 거친 다음에 1시간
15분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동대구발 → 서울행 버스표
동대구역 환승센터에 도착하여 가장 빠른 버스표를 예매하여 서울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3시간 40분만에 서울에 도착하고, 저녁을 먹지못해 배가 너무 고파서 터미널
식당에서 뜨끈한 국물이 있는 떡만두국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집에와서 베낭을 정리
하는데 이게 뭐여! 이틀동안 기록한 똑닥이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구나
베낭을 몇번이나 뒤졌는데도 카메라는 보이지 않아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다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다
이튿날 아침에 출근하여 풍각버스정류장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했더니만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만 어제 대합실 의자에서 떨어진 것을 줏어놨다고 한다
아~~~ 이 기분...갑자기 천하를 다 얻은 느낌이다
사정을 하여 우체국 택배로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만 그 다음날 카메라가 도착했다.
그래도 아직 세상사 살만하구나...부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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