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년 10월 10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생각보다 상당히 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9.8km + 날머리 3.8km / 7시간 3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멤버들과 함께
☞ 산행코스: 육십령-산성터-폐헬기장-할미봉-대포바위 갈림길-암릉구간-공터-경남덕유교육원 갈림길
공터-삼자봉-영각사갈림길-헬기장-소나무쉼터-영각사갈림길-전망암-조망바위-서봉-철계단
안부-황새목이 능선-공터-남덕유산-1,250m봉 -월성재-아치다리-남덕유산 입구-황점마을
☞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거창군 북상면 / 전북 장수군 계북면, 장계면,
어제 용수(관암)지맥 2구간 22km를 하고 조금 늦게 집에와서 샤워를 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늘 일어나는 시간대인 새벽 4쯤이다...어제 산행을 갔다온 자료를 정리하고 난 다음에
내가 가입한 카페 이곳저곳을 들어가 보니 내가 예전에 백두대간을 했던 산악회에서 코로난가
지랄인가 하는 역병 때문에 중단했던 백두대간 산행을 재개한다는 공지가 보인다
이 공지를 보고 갑자기 남덕유산이 보고 싶어진다...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도 대체 공휴일인가
뭔가를 만들어 놔서 3일간의 연휴가 아닌가...이 제도야 공무원이나 봉급쟁이들이야 놀아도
페이가 나오니까, 멋진 제도이지만 나같은 자영업자는 그냥 마이너스 인생으로 바뀌는 제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휴일날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다음주에 필드에 나갈 일이 2번이나
있어 휴식을 취했다가 골프연습장이나 갔다올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필이 꽂혀 예정에도 없던
대간길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육십령(六十嶺:698m:10:08)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통과하는 26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백두대간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육십령이라는 지명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신라 적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육십령이라는 지명에 담긴 이야기는 또 있는데 첫 번째는 안의감영에서
이 고개까지가 60리고, 장수감영에서도 60리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고
두 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닫을 수 있다는 설이다.
정확하게 1년만에 후배들의 대간길에 꼽사리를 끼어서 이곳 육십령까지 왔지만 밉상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매주 한번은 지맥길에 나서야 하기에 어제 대전에 있는
용수(관암)지맥 2구간(약 22km)을 타고 왔기에 내 체력으로서 무리일 것 같은 생각을
들지만 가다가 안되면 중탈을 할 결심을 하고 일단 부딪혀 보기로 한다.
내가 이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2번에 거쳐 북, 남진을 했지만늘 어둠속에 무박 산행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당일 산행이라 딱 내 스타일이지만 완주 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시간이 맞고 명산이 있으면 올 생각이다...왜냐하면 내가 기저환자라 단체로 뭉쳐서
다니기엔 아직도 좀 찜찜하고, 10년을 넘게 기,지맥을 거의 혼자하다가 보니 단체로
산행을 한다는게 나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탓도 있다.
이 구간을 4번째 걷는 셈인데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많이 변한 느낌이다
하기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안변하면 비정상이겠지.
버스에에서 내리니 가장 먼저 반겨주는게 정상석과 1950년 6.25 사변 직후 국군 8사단, 11사단,
수도사단에서 덕유산 지구 공비토벌을 위하여 작전을 수행하다 산화한 국군 영령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육십령 충령탑과 수준점. 넓은 광장이고 맞은편의 매점에서 영업하는
돈가스맛이 일품인 식당과 매점은 코로나 19의 영향 탓인지 점빵문이 굳게 닫혀있다.
이곳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길을 나선다(10:25)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는데 20명이 넘는 산꾼들이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마라톤의
출발선상에 선 Runner들 처럼 산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졸지에 나혼자만 호젓하게 걷는다.
어차피 아무런 생각없이 앞 사람의 등산화만 보고 걷는 산행은 내 스타일도 아니고...
가다가 힘들면 쉬고, 목 마르면 물마시고, 꽃이 있으면 눈길을 주고 멋진 仙景을 보고 걷는게
내 스타일이니 크게 개의치 않고 맨 꼴찌에서 걷는다
함양쪽의 육십령 구간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갈 땐 鷄舍가 있어서 닭똥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지금은 닭을
키우지 않는지 시설을 잘해 놨는지는 냄새가 전혀 없는데 예전의 닭똥냄새가 그립구나.
흔히들 경남 함양지방을 물레방아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안의(安義) 현감(縣監)으로 재직하면서 열하일기를
토대로 하여 안심마을에 우리나라 최초로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물레방아 고장이라고 부른다
* 열하일기(熱河日記)
조선 시대인 1780(정조 4)년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중국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따라
열하(熱河)에 다녀온 감상을 적은 기록. 26권 10책으로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어 그런대로 걸을만 하다.
같이온 산꾼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빨리가던 늦게가던 그건 각자의 몫이고 능력이니까.
할미봉을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어제 대전 시내를 통과하면서 점심때 먹은
한잔 술의 영향인지 몸뚱아리가 조금 부대끼는 느낌이다
할미봉으로 향하는 능선의 오름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암봉(11:00)
암봉을 지나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부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라서 산성터의 흔적이 보이는걸로 봐서는
할미산성의 성터인듯 하다.
헬기장(11:10)
헬기장에 올라서니 할미봉이 보인다...참으로 오랫만에 시원하게 보는 산이 아니던가
어제 계룡산 줄기인 갑하산~신선봉~우산봉 능선을 걸을때는 개스로 인해 모든게 흐릿하기만
했는데 역시 높은 산에 오니 멋진 선경을 감상할 수가 있어서 너무 좋구나.
할미봉의 멋진 선경에 매료되어 한참을 주위를 감상하다가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다시 할미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예전에 비해서 등로는 많이 좋아졌다
빡세게 올라서니 암봉이 나오는데 암봉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一望無際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 시킬수가 없구나...마치 첫사랑의 그 머시기처럼...참 좋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능선 너머로 육십령...또 그 너머로 착하게 사는 사람이나
천하에 호로 잡넘이나 아무런 내색없이 보듬어주는 어머니의 품안같은 지리산이 보인다
저 능선이 오늘 따라서 유난히도 범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구나.
지난 6월에 하룻밤을 묵었던 반야봉 아래의 묘향암의 호림스님과 愛犬 월광이도 잘 있겠지...
스님 늘 건강하소...내년 여름에도 또 한번 재워주소...
할미봉으로 오르면서 동쪽으로 바라본 모습
암릉 아랫쪽에는 영각사와 경남덕유교육원이 보이고 그 뒷쪽 능선이 남덕유산에서 분기되는
진양기맥 능선의 남덕유산 하봉, 남령, 월봉산, 거망산 라인...그 좌로 기백산, 금원산 우 뒤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멋진 모습으로 내 눈을 호강시켜준다.
저 멋진 산을 바라보면서 예전 같으면 멋진 시 하나를 쓸 수 있을것 같은데 이제는
머리가 굳었는지 詩想이 떠오르지가 않는구나.
이런 곳에는 시화님이 와야 멋진 산에 대한 시 한수를 건질텐데...김 작가님! 잘 계시죠
벌써 저 길을 걸은지가 10년이 넘었으니 많이 변했겠지...또 한번 도전하고 싶은 코스이다
오동저수지 너머로 지리산 자락이 보이고 그 앞에는 장수 경주마 목장이 보인다
할미봉 정상에서 트랙이 보이는 곳이 목장이다. 말이 목장이지 종마장이라 한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저 종마장이 이곳에 들어올 때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말 똥물을 마시게 될 지도 모를 마을 주민들이 저 목장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찬성할 리는
만무였던 바, 위정자와 한국마사회는 저 시설이 들어옴으로서 지역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교묘하게 주민들을 속여 허가를 받아냈는데
결국 저 시설의 직원들은 관사에서 생활을 하고 쇼핑이나 외식 등은 전주나 서울로 올라가고
관광 수입이라 해 보았자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고 한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육십령(좌측 옴팍한 곳)에서 구시봉(깃대봉)에서
민령~영취산~ 무령계곡으로 이어지는 저 능선...맥 산행으로 치면 범여에겐 첫사랑과 같은 곳이다
정확하게 2009년 1월 4일 백두대간 ‘백’자도 모른체 같은 동네에 사는 지인에게 이끌려 백두대간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12년째인데 아직도 산 속을 헤메고 있다...그 동안 백두대간 3회, 9정맥에다가
110여개 기.지맥을 마쳤으니 많은 업적(?)도 이루었으나, 가족과 친구, 지인에겐 왕따 수준의
밉상의 되어 버렸지만 후회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의 이치가 아니던가.
다만 쥔장 잘못 만나 개고생을 하는 범여의 두 다리(足)에게만 늘 미안할 뿐이다.
3년만 참아다오...내 나이 70세 안에 끝내고 꽃길만 걷자구나...
언제가는 첫사랑을 찾아 저 길을 다시 한번 또 걷고 싶다.
민령이도 보고 싶고 능선 우측 아래에 있는 기생 논개(論介)의 생가도 가보고 싶구나
임란때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애첩(愛妾)이었던 논개(論介)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義憤)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酒宴)에 기녀(妓女)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던 의기(義妓) 논개...나라가 위태로울 때 기생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렸는데
작금의 이 나라의 정치판에 뛰어던 자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민초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 잇속만 챙기기에 바쁘고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인간들은 법을 더 어기고 있으니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구나
최근에 터진 대장동인가 소장동인가 하는 사태를 보면 민초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민초들은 단돈 10만원에도 가슴이 떨리는데 거기에 엮인 인간들은 몇백억, 몇천억이란
돈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얘기하는데 시궁창의 썩은 냄새보다도 더 역겹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뻐긴다 해도
결국 하늘아래 놓인 건 마찬가지 인 것을...
그냥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며 좋겠다.
하늘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 이니까...
할미봉(1,026m:11:38)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멋진 암릉으로 된
멋진 곳으로 주위 전망이 일품인 정상에는 삼각점(△함양 304/2002 복구)이 있다.
할미봉 유래를 보면 할미봉 아래에는 성터가 있는데, 할미봉의 이름은 이 성터에서 유래한다.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할미봉이라 했다는
설과 할미봉 서쪽 산자락에 있는 반송 마을 사람들은 할미봉이 원래 ‘쌀미봉’인데 할미봉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조선 시대 때 이곳에 합미성(合米城)이 있어 합미봉(合米峰)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1961년 국토지리정보원 지명일람표에는 합미봉으로 고시)
옛날 한 도승이 할미봉 정수리의 암장을 보고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형상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合米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한다.
할미봉
속세의 온갖 희노애락을 품고 있는 백두대간이라 하더라도 산을 신성시 하는 인간(인근주민)들이
까탈스러운 할미까지 대간의 마루금에 지명을 붙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合米란 쌀을 쌓아 둔다는 의미이며 亂을 피해 혹시 전쟁을 피해 식량을 비축하자면 까탈스런 지형이
유리할 것이다. 이 봉우리가 그런 장소로는 안성마춤이다. 또한 식량을 비축해 두었으면 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합미봉 바로 아래 마을 이름이 군장동(軍藏洞)이다. 즉 군인을 숨겨 둔다는 의미이다.
아무래도 할미봉보단 합미봉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아 혼란스럽다
장수군의 자료를 보면 합미산성이 이곳이 아닌듯 하는 생각이 드니 혼란스럽다
10년전에 금.호남 정맥길을 걸을 때, 수분재를 지나 금강의 발원지가 있는 뜬봉샘
너머 팔공산 가기전에 합미산성이 있다...이곳과 그곳은 거리 차이가 많이 난다
할미봉 정상 삼각점(△함양 304/2002 복구)
대포바위 갈림길(11:38)
예전에는 이곳에 대포바위의 유래 안내판이 있었는데 보이지가 않는구나
대포바위 갈림길에서 내려서니 가야할 능선 너머로 서봉(좌)가 남덕유산(우)가 보이고 남덕유산
아랫쪽으로는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해인사의 말사인 영각사(靈覺寺)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오늘은 아무래도 운이 좋은 듯 싶다...1년에 6~70번을 산행을 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선경을
볼 수 있는 날이 1년에 몇번 되지 않는데...부처님의 가피인가...영각사를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새로 설치된 듯한 데크목 계단을 내려간다...1차 대간길에서는 계단이 없어 개고생을 했는데...
당겨서 본 대포바위(일명:남근바위)
임진왜란 때 장수지역을 치기 위해 육십령을 넘던 왜군들이 대포바위를
조선군의 대포로 착각하여 함양으로 우회해 남원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장수군 일원이 피해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가까이 보면 남자의 성기와도 비슷하여 남근석으로 불리는데,
남자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이 바위에 다가와 절을 하고 치마를
걷어 올리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늦둥이 투구꽃과 교감을 나누고...
까실쑥부쟁이와 달콤한 속삭임을나누면서 길을 걷는다.
아침에 같이온 대간꾼들은 출발을 하면서부터 헤어지곤 만나지 못했다.
다들 왜 그리 맘들이 급한지...느림의 美學을 알지를 못하지는 않으실텐데...
대간길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고 자꾸만 野性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예전에 능선으로 올라야 했던 길은 사면길로 만들어 놓아 마치 둘레길을 걷는 느낌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들리는 삼자봉 정상에 도착한다.
삼자봉(913m:12:15~12:43)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로 이어지는 능선위에 있는 봉우리로 지도상에도 없는 삼자봉이다.
그저 밋밋하고 하잘것 없는 봉우리처럼 보이는 이곳의 고도가 913m라니 언뜻 수긍이 안 간다.
다른 맥길에 가면 대장 노릇을 하고도 충분히 남을 봉우리인데 워낙 주위에 있는 남덕유산,
서봉, 할미봉 등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많으니 존재 가치가 사라진 봉우리이다
꼴찌로 내가 도착을 하니 앞서간 산꾼들이 산상 파티를 열고 있는데 분위기는 파장이다.
나도 이곳에서 점심밥상을 펼친다...독립군의 점심이라봐야 삶은 고구마 2개에 두유 하나,
후식으로 먹을 포도가 전부인데 내가 밥상을 펼치는데 조급한 산꾼들은 갈 준비를 한다.
선두팀들이 가고 나 혼자 여유롭게 호기(?)를 부리며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등로 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멋쟁이 소나무는 10년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대간길을
지키면서 변함이 없는데 나만 변하는 것인가?...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으니 어쩌겠나...
순리대로 살아야지.
세상사가 諸行無常이요, 諸法無我라 하지 않았던가...
경남덕유교육원 갈림길(13:25)
육십령← 5.2km 남덕유산 →3.6km 이정표가 서있고, 예전에 없던 태양광으로
만든듯한 가로등같은 시설물이 보이고, 경남덕유교육원 쪽은 등로가 폐쇄되어 있다
이곳에 오니 갑자기 뱃속에서 밀어내기 신호가 와서 베낭을 내려놓고 출입금지 목책을
넘어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니 세상사를 다 얻은듯한 쾌감을 느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버리는 즐거움만큼 좋은 일이 있을까...
20여년쯤인가 통도사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는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선배였던 주지 스님에게 법문을 부탁하니...스님께서 하신 법문이 “잘먹고 잘자고
잘싸는게 최고”라고 하는 법문을 해주셨는데 그때는 그 뜻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꼭 맞는것 같다
막힌 목책 넘어에서 볼 일을 보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헬기장을 지나...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예전에 토사가 유출되어 골이 파진 등로에는 새로 단장되었고
서봉으로 가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산악회를 따라오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 건 어색하고, 예전처럼 체력도 따라주지 않아서 쉬엄쉬엄 서봉으로 향한다
바위 틈새에서 삶의 무게를 느끼는 나무...前生에 뭔 業報로 인해 힘든 삶을 사는지...
암봉(14:05)
힘들게 암릉을 올라서니 잠시후에 오를 서봉(좌)에서 황새목이 안부를 지나서
남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쾌 보이는데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초반에는 힘든 산행이었지만 오늘 대간길에 나서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멋진 仙景... 산이나 여인은 멀리서 봐야 훨씬 이쁜 법이다.
예전에 서울의 어느 지하철에서 본 詩가 생각이 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산도 마찬가지이다.
무작정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은 멋을 모르는 사람이다.
산을 가다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가진 그대는 정말 진정한 산꾼이다
저 멀리 앞서가는 동료들의 뒷테가 조금씩 보이고 왁짜지껄한 소리도 들린다
조금전에 내가 걸었던 할미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뒤돌아 본다.
걸어온 능선이 생각보다 까칠하다...얼마 걷지 않은 듯한데 생각보다 많이 왔다.
내가 이렇게 걷는 것은 쥔장을 잘못 만났는데도 까탈부리지 않고 따라준
범여의 두 다리에게 고마울뿐이다...그래도 오늘은 대간길이라 길이라도 좋제.
서봉 오르는 우측으로 남덕유산이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눈을 호강 시킨다
진양기맥 능선이 펼쳐지고 남령가기 전에 남강의 발원지가 있는 참샘도 있겠지...
'德이 많고 너그러운 어머니의 산'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덕유산 그 연봉중에
'작은 히말라야'라고 불릴만큼 설경 산행의 백미를 자랑하는 남덕유산(1507m)..
속리산을 지난 백두대간의 굵은 마루금은 한반도 남쪽을 동서로 나누며 남하하고,
산줄기는 지리산을 만나기 전 천미터가 넘는 멧부리를 뿜어내는데 바로 덕유산의 연봉들..
조선중기의 풍수가인 격암 남사고(南師古)는 '덕유산 일대에 사람을 살리는 기운이 가득차 있다'며
병란을 피하는 십승지로도 예언한 곳이기도 한 이곳
조선시대에는 남덕유산을 봉황산(鳳凰山) 혹은 황봉(黃峯)이라 불리웠다는데.. "여지도서"에는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이 산봉우리를 이루고, 관아의 서북쬭 65리에 있다' 라고
하였으며 "대동지지"에는 '봉황산 즉 덕유산 동쪽 지맥은 서북쪽 70리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서봉으로 오르는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지만 우회길과 철계단을 만들어놔서
예전에 비해서는 그리 어렵지는 않다... 같이온 동료 산꾼들인지 서너명이 보인다.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남진을 하는듯한 산꾼들 일행을 만난다.
이 코스는 여름에 와야 제격인 곳으로 여름철의 이곳은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곳이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종류는 기본이고, 솔채, 동자꽃, 원추리, 말나리, 하늘나리, 땅나리꽃 종류도 많고,
가련한 꿩의 다리에다가 해발 800m 이상에서만 자라며 산에서 그리 보기 쉽지않은 솔나리꽃도
지천을 이루는 곳이 이곳이다...야생화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산꾼들이야 언제 지나간들 문제가
없겠지만 야생화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으신 분들은 여름철에 이곳을 통과하는게 제격일 것이다.
서봉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남덕유산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먹구름속으로 숨어 버린다.
수줍음을 타는 것일까... 자기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 것일까, 感이 안 온다.
하기사 크고 높은 산일수록 정상을 쉽게 허락을 않는 법이지.
바람이 약간 불기는 하지만 오랜 산행의 경험상 비를 몰고온 바람은 아닌듯 하다.
오늘 구라청의 예보로는 저녁 9시 이후로 비가 온다고 했으니... 신뢰는 안 가지만
일단 믿어 봐야지
서봉 정상에 올라서니 예전에(2009년 1차 산행) 있었던 함양군에서 세운 서봉
정상석이 사라지고 한동안 없었던(2차, 3차 대간길) 정상석을 새로 세워 놨구나.
서봉(西峰:1,492m:15:10)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계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덕유산(동봉 1,507.4m)
서봉(1,492m)은 주봉인 향적봉(1,614m.북덕유산)을 먼 발치에 두고, 남도 산의 조종산(祖宗山)인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남덕유산 하면 1,507.4m의 동봉을 두고 일렀다.
그러나 장수 사람들은 절대 서봉이라 부르지 않고 장수 덕유산이라 부른다
산꾼들이 백두대간 종주가 성행하면서 서봉을 거치는 등산인들이 많아졌고,
서봉이 동봉보다 높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봉을 남덕유산의 주봉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지도상에는 서봉의 높이를 1,492m로 표기해 놓고 있다
옛날에는 남덕유산 또는 서봉을 봉황산이라 하여 매우 신성시 했다고 한다.
문헌비교와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은 대덕산을 경유 덕유삼봉-백암봉-봉황산을 거처 육십령으로 간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와 월성재를 지나고 삿갓재 무룡산으로 이어지는 남덕유 능선은 먹구름을 이고 있다.
장쾌한 골산으로 이루어진 남덕유와 부드러운 육산인 북덕유(향적봉)로 나뉘는 덕유산
한반도 남쪽에선 지리산 다음으로 크고, 넉넉하며 덕이 있는 덕유산.. 그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덕유산에 남(南)자를 앞머리에 붙여 불리우는 이름..남덕유산.
덕유산 일대는 대표적인 다설다우(多雪多雨) 지역으로 강원도 못지않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덕유산은 한반도의 남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기에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이 확장하며 서해를 건너면서 수증기를 가득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하며 이 때 백두대간 덕유산의 높은 산을 만나 냉각되어 많은 눈이
내리게 되는데...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연유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서봉 헬기장(15:12)
서봉 정상을 지나서 헬기장에 도착하는데 예전에 없었던 감시카메라가 보인다.
이제는 산에서 조차 사생활을 노출해야 하니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사는 느낌이다.
조금전에 서봉 정상석이 있던 곳은 장수군 계북면이고 이곳은 함양군 서상면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서봉 정상석이 있었는데 사라졌고 이제는 장수쪽에 정상석을 세워놨다.
* 조지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는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가상의 나라)에서 당이
허구적 인물인 빅브라더를 내세워 체제를 유지하고 통제하려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전체주의적인 체제하에서 자행되는 역사와 기억의 집단적 왜곡, 개인의 존엄성과 자의식의 파괴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소설로 1949년 발표된 이 작품은 당시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풍자하고 있는데, 현대인에게는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정신 풍토에 대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서봉에서 700여개의 철계단을 밟으며 고도를 500m나 낮춘 다음에 황새목이로 내려선다
짙은 안개에 갇혀버린 황새목이 안부
서봉과 남덕유산 사이에 있는 잘룩한 고개로 황새목이란 황새의 목처럼 목을
길게 늘여 빼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애타게 기다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그래서 붙혀진 지명 같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황새목이 안부에 내려서니 등로 아랫쪽에 빨간 열매가 달린 참빗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참빗살나무는 산기슭에 자라는 낙엽 떨기나무로 줄기는 높이 8m쯤이며 잎은 마주나며 잎자루가 있다.
잎몸은 타원형 또는 난상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잔 톱니가 있고 꽃은 5-6월에 피며, 4수성이고
연한 녹색으로 지난해가지의 잎겨드랑이에 취산꽃차례로 3-12개씩 달리며, 꽃잎은 꽃받침조각보다 3배쯤 길다.
수술은 4개, 암술은 1개이며 열매는 삭과로 붉게 익는데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한다.
러시아, 인도, 일본, 중국에 분포하며 관상수로 이용하며 목재는 기구재로도 쓴다.
가는 세월을 어찌 막으리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오늘 처음으로 같이 버스를 타고왔던 산꾼을 만난다.
산악회 회장님과 2분이 내 앞을 걸어 간다...홀로 산행을 하는 독립군의 체질이라
좀 불편할 것 같아서 등로에다 베낭을 내려놓고 앞 사람과 거리를 두기 위해 휴식을 취한다
남덕유산 갈림길(15:45)
좌측으로는 남덕유산을 오르지 않고 삿갓재로 향하는 사면길이 있는데 같이온
산악회의 시그널이 그쪽으로 걸려있다... 아마도 늦게 오는 산꾼들에게 남덕유산을
오르지 말고 그쪽으로 오라는 얘기인 모양인데, 나야 어차피 대간길의 정식 멤버가
아닌 게스트이기에 시그널을 무시하고 남덕유산 정상으로 향한다.
처음부터 나의 목표는 남덕유산 오르는 것을 목포로 삼았기에...
빡센 오르막이긴 하지만 지맥길에 비하면 식은 죽먹기이다
삿갓재 대피소 갈림길(15:58)
이곳의 공터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남덕유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이정표를 지나고 남덕유산 정상에 오르니 아래와는 달리 바람이 차갑고 세차다
남덕유산(南德裕山:1507m:16:02)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거창군 북상면, 전북 장수군 계북면의 경계 능선에 솟아있는 산으로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서 15km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덕유산의 제2의 고봉(高峰)으로
지도상 적힌 이름은 제1 덕유산이며 옛날엔 황봉 (黃峰), 봉황산 (鳳凰山) 으로 불렸다.
2008 년 11 월 1 일부터 옛 이름인 봉황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루금에 놓인 봉우리는 하봉, 중봉, 상봉으로 이루며 상봉이 되는 봉우리는
동봉(東峰)은 남덕유산, 서봉(西峰)은 장수 덕유산으로 불린다.
향적봉이 있는 북덕유는 마치 부드러운 육산으로 여성의 산으로 불리는 반면,
삿갓봉 위에 있는 무령산을 경계로 하여 남덕유는 멋진 암릉과 거친 남성상을 연상케
할만큼 험한 능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적봉은 백두대간에 2km 넘게 떨어져 있는
반면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므로 전문 산꾼(?)들에게는 향적봉보다는
남덕유산이 더 의미있는 산으로 회자된다.
남덕유산은 북덕유산(향적봉)과는 달리 장쾌한 기상으로 솟은 바위 뼈대는 개골산이라 불린다.
산 경치가 묘향(妙香)과 금강(金剛)을 닮아서 황홀할만큼 아름답다.
남덕유와 장수덕유로 불리는 동봉과 서봉사이 황새늦은목이라는 능선을 갖고 남쪽으로
육십령의 대령을 안고 자수정 산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장수쪽의 토옥동(土沃洞) 계곡을 거느리며 그 아래는 장수온천이 분출되고 있으며
동봉은 삿갓봉을 거느리고 구한말 거창의 의병사의 빛난 한쪽을 기록하고 있다.
남덕유산 정상 남쪽 기슭에 있는 참샘은 진주 남강(南江)의 첫 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黃江)의 첫 물길이다.
함양쪽에 있는 영각사는 신라 헌강왕 2년(876)에 심광대사(審光大師)가 창건 했으며
조선 세조 31년(1449) 원경(圓鏡)대사가 중건 하였으며 중종 18년(1523)에 성묵(性默)
대사가 중창한 절로 6.25때 설파(雪坡)대사가 감수하여 만든 화엄경판까지 불타버려
1959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오늘의 날머리인 월성재를 지나 삿갓대대피소~무령산~백암봉~향적봉이 아른하게 보이고
향적봉 좌측으로는절벽 주변에 유난히도 빨간 단풍나무가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적상산(赤裳山:1030.6 m)이 아련하게 보인다.
이 멋진 명산을 나홀로 전세내어 호젓하게 즐기고 있으니 마치 내가 신선이 된듯한
느낌으로 꼴값을 떨고 있다.
신선으로 살아갈 수 없어 세속적인 가치를 떨쳐버릴 수가 없기에 그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서 고통스러울 수 있는 세속의 삶을 살아가면서 못다핀 꽃을 피워야 한다.
아직은 그리움과 집착으로 그것을 터트려 겉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내 삶이
마음 속에서 곪아 썩는 못난 아픔으로 그칠 것 같아 세속적인 삶일지언정
꽃을 피우는 일이 꼭 고통스럽고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프지 않으니 흔들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나 아프도록 그리워는 해야 하는데,
감정이 마모되거나 무미건조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런 고통과 절실함이 메말라가면
그리움의 향기도 탈색된, 그저 그리워하던 것이니까?
라는 정도의 집착으로 남아갈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향기를 잃은 그리움은 본질적인 것을 상실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의 진실성이야말로 그리움을 향기롭게 하는 것일 텐데...
아픔이 사라지면서 그 진실성도 가벼워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아픔은 그리움을 존재의 안으로 새긴 흔적이 되어야 한다.
아픈만큼 처절한 그리움도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프도록 그리워하라.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진양기맥 능선 너머로 흐릿한 산그리메가 펼쳐지는데
그 너머의 어디쯤이 내 고향 의령땅이겠지...고향을 떠난 지 50여년이 다 되어 가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희미해 가는구나...바람에 세차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내려가서 갈림길에 내려둔 베낭을 메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계단으로 내려서니...남덕유산 오르기 전에 헤어졌던 사면길을 다시 만난다.
서봉가는 사면길(16:13)
암릉구간을 올라간다.
점심때 먹은 고구마 2개와 과일밖에 없었던 탓인가...서서히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그나마도 다행인게 예전의 대간길과는 달리 높은 봉우리가 있는 곳은 어김없이 산 허리에
길을 내어 사면길을 만들어놔서 이럴때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오늘 대간을 진행하는 산방의 대장과 총무는 그리 안면이 많지 않은 산꾼이라
오늘 찍히면 다음부터는 강퇴당할것 같아서 부지런히 월성재로 향한다
1,250m봉(16:30)
여기서부터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앞서간 산꾼들에게 행여 민폐가 아닐까 하여 부지런히 속력을 내어 보지만
생각보다 체력이 따라주지를 않는구나.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월성재에 도착한다
월성재(月城峙:1,214m:16:42)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우측 아래에 있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가져온 듯 하며
달이 마을 앞 성삼봉(城三峰)에 비친다 하여 월성(月城)이었던 것을 달월, 별성자
"월성"으로 바뀌면서 양지편에 자리하므로 "양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정표(↑ 삿갓대피소 2.9km ↓ 남덕유산 1.4km→ 황점마을 3.8km)와 덕유산 국립공원
안내도가 서 있고 우측으로는 황점마을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와 띠지가 보이나
좌측의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로 이어지는 등로는 뚜렸하기는 하나 국공파가 출입금지란다
황점마을로 내려가면 월성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거창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성계곡은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서려있는 곳으로 전설에 따르면 백제 왕자 서동(薯童)이 신라 공주 선화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간 곳이라고 하며 또 신라의 사신이 후백제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가는 도중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였기에 신표 인장을 버리고 달아났던 곳이라고도 한다.
월성계곡의 첫머리는 강선대(降仙臺)와 모암정(帽岩亭)이다.
강선대는 조선 인조 때 척화신 동계 정온(鄭蘊)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던
덕유산 모리재 초입에 있는 명소로 경치가 좋아서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를 들러리하고 있는 맞은편 고숲(古林)에는 모암 임지예(林芝藝)를 기려 세운 모암정이 물과 어울린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을 돌 때마다 마을이 있고 넓은 반석이 개울을 따라 펼쳐진다.
이곳에서 내가 타고온 버스가 서 있는 황점마을까지는 이정표상 3.8km란다.
아무리 내리막길이라고는 하나 부지런히 걸어도 족히 1시간은 걸릴 듯 하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상으로 일몰시간 이전까지는 내려갈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등로가 나쁜곳은 데크목 계단으로 되어있어 좀 편하기는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보니 발바닥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헐~~~ 아직도 2.2km나 남았다고...
아치 다리(17:20)
월성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경험상으로 거의 다 내려왔다는 느낌이다.
다리를 지나면서 황새목이에서 잠깐 조우했던 금물회장님과 2명의 산꾼을 만난다
덕유산 초입(17:45)
거창군 북상면에서 함양군 서상으로 향하는 황점길 도로 좌측으로 내려간다
날머리인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황점마을이 0.2km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황점(黃店)마을은 봉황산(鳳凰山)밑에서 쇠를 만드는 점이 있으므로 황점이라 부른다고 한다
황점마을 도로가에 있는 수준점
황점마을로 내려오는 초입에는 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와 안내판이 보인다
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
1905년 일제의 을사조약에 항거해 거창에서 목숨을 바쳐 의병으로 활동한 고(故) 박화기·수기·민기 박공
3형제에 대한 항일사적비로 박공 3형제는 을사조약에 항거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고향인
월성리에서 의병 40명을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던 인근지역 의병들을 도우고
연합작전으로 일제를 기습 및 교란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의병활동 중 화기·수기 형제는 1909년 전북 장수군 계북전투에 참가. 일제와 전투중 총상을 입고 귀가해
치료하다 정탐꾼에 밀고돼 폭도혐의로 그해 11월16일 장수군 계북면 양악에서 다른 의병들과 함께 38세.
36세 나이로 총살당했다.
일제는 월성의병들을 체포키 위해 1912년 4월 월성리에 정탐꾼을 잠입시켜 내사하자 분개한 주민들이
정탐꾼을 공개처형했으며. 이 사실을 안 일제가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심문하자 박공 3형제 중
막내 민기씨는 자신의 단독범행이라며 죄를 뒤집어 써 10년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0년 1월16일 숨졌다고 한다
산행을 종료하다(18:00)
선두에 도착한 동료 산꾼들은 덕남제라공석순효행사적지려(德南齊羅公錫純孝行史蹟之閭)
비각 앞에서 컵라면과 김밥, 안주로 술을 마시면서 저녁을 대신하고 있다.
* 덕남제라공석순효행사적지려(德南齊羅公錫純孝行史蹟之閭)
조선조 후기(19세기 초)에 효자 나석순이 부모가 모두 병이 들자 자기 허벅지 살로
약을 다려 죽음에서 회생시켰다는 효자비각이다.
이곳 저곳을 들리다가 맨 꼴찌로 도착하니 그래도 싫은 내색을 하지않고 반가이
맞아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동료산꾼이 주는 션한 맥주 한잔을 얻어 마시고
근처 계곡으로 가서 깔끔하게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서울로 향하는데 예전과는 달리 이틀동안 산행을 한 탓인지 피곤하여 잠을 이룰수가 없다.
그래도 남덕유의 멋진 선경을 본 것에 대만족을 하면서 늦게까지 기다려 주신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白頭大幹 4차 북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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