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20년 10월 11일
☞산행날씨: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7.2km+날머리2.1km / 14시간 25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성삼재-당동고개-작은 고리봉-묘봉치-만복대-조망바위-정령치-개령암지 갈림길
큰고리봉-암봉-고기(高基)교차로-노치마을-노치샘-노치마을 당산-구룡폭포 갈림길
덕운봉-연산골 갈림길-노치산성 터-수정봉-입망치-710m봉-양지산성-주지사 갈림길
여원치 주막-여원재-장치-방아산성 갈림길-방아치-785m봉-김해김공 묘-고남산
고남산 헬기장-통안재-권포리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광의면, 산동면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주천면, 이백면, 운봉읍
prologue
대한민국의 등산객이 아닌 산꾼이라면 늘 가슴속에 품고있는 꿈이 백두대간을 걸어보는 것일 것이다.
나 역시 그 범주에는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고...정확히 말하면 2009년 1월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 이전에도 산에 다니긴 했지만 주 단골코스가 북한산 아니면 집 큰처에 있는 청계산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북한산 마니아였다는 말이 정확했을 것이다...그 당시 5년동안 200번 이상을 북한산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 갈수록 북한산에 대한 묘한 매력을 느끼던 차에
같은 동네(개포동)에 사는 골프 멤머인 친구가 자기가 백두대간을 매주 다니는데 너무 좋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난 백두대간의 ‘백’자도 몰랐었고 서울 근교에 좋은산을 두고 먼 곳을 왜 다니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백두대간에 대한 정보는 無知...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호기심에 친구를 따라나섰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때에 안내산악회인 털보산악회라는 곳을 따라서 무령계곡에서 육십령 구간이었는데
난 아직도 그 구간을 첫사랑의 설레임처럼 잊지 못하는 구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3번이나 종주했는데도 늘 아쉬운 부분이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져 있다.
1, 무박으로 다니다보니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걸었던게 후회스럽고,
2, 산악회를 따라나서다가 보니 몇km를 몇 시간에 걸었냐가 중요했고, 늘 시간에 쫒기다가 보니
주위의 사물을 놓치는 憂를 많이 범한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3, 빠르게 걷다가보니 사진을 기록용으로 남기다보니 아쉬움이 많았다.
이제 9정맥에다가 지맥도 90개를 넘게 했으니 5년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어
廻向하는 의미에서 대간의 자료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시 대간길에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 터미널 → 노고단(성삼재)가는 버스표
성삼재 정상까지 가는 버스는지난 7월부터 매일 밤 11시 50분에 한차례만 운행하기에
미리 예약하지만 않으면 탈 수 없는 버스이다...나 역시 2주전에 예매를 했다
밤 11시 50분에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비룡J.C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갈아탄 다음에 어느 휴게소에서 잠깐 들려 휴식을 취한듯 하는데 깊은 잠에
빠져서 어딘지 모르겠고 다시 함양J.C에서 광주~대구간 고속도로(옛88고속도로)로
들어선 다음에 함양I.C를 빠져나와 함양과 인월에 정차한 후에 남원시 산내면을 지나고
뱀사골로 이어지는 반선을 지나 달궁계곡을 헉헉거리면서 올라서 성삼재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성삼재로 오려면 자가용으로 오던지 아니면 구례구역이나 구례터미널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4명이 택시로 합승해서 성삼재로 왔었는데 직통으로
오는 버스로 인해 한결 편해졌으나 전남도와 구례군의 환경파괴라는 명분으로 인해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주말에만 차가 다니는 바람에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이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이다
성삼재(姓三峙:1.090m:04:00)
버스에서 내리니 산 아래에서 생각한 날씨와는 다르게 상당히 차갑고 바람이 드세다.
원 계획은 이곳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산행을 시작하려 했는데 마땅히 바람을
피할곳도 없고 우리가 타고온 버스와 관광버스 몇대에서 내린 등산객들은 지리산 주능선이이라
불리는 노고단쪽으로 가버리고 나혼자 우두커니 성삼재 주차장에 멋적게 서있는데
차가운 바람에 맞설 자신이 없어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고 해드렌턴을 켜고 산행준비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뭔가 허전하다...아이쿠 이걸 어째야 하나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책상위의 충전기에 꽂아둔 핸드폰을 두고왔네그려...
참으로 난감하지만 방법이 없잖은가...별탈이야 있겠냐 싶어 산행 들머리로 향한다
어둠에 갇혀버린 성삼재 주차장을 빠져나와 달궁계곡(남원)에서 천은사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로로 들어섰다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만복대 탐방로로 들어선다,
예전에는 이곳이 비탐구간(비법정 탐방로)이라 단속이 엄청나게 심했는데 요즘에는
탐방로로 바뀐 모양이다.
861번 지방도는 예전에 군사도로였다가 관광도로로 바뀐 곳으로 이 도로를 경계로 삼아
우측은 반야봉이고, 좌측은 만복대로 도로 옆으로 흐르는 물은 만수천(萬壽川)으로 지명은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지류가 모여든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며 달궁계곡과 뱀사골 등
여러 계곡의 물을 합친 다음에 남원시 산내면에서 임천(林川)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로
이 물줄기는 다시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스며든다
이곳부터가 지리산 서북능선의 시작점이라고 보면된다
서북능선이란 성삼재를 깃점으로 작은 고리봉, 만복대, 정령치, 큰고리봉, 세걸산, 바래봉,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말한다.
지리산을 장엄한 산이라고 말할 때는 주능선인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말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능선이지만 지리산의 장엄미는 주 능선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게 지리산이다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 영신봉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으로 이어지는 북부능선, 그리고 내가 오늘 걸을려고 하는 서북(부) 능선으로
합쳐져야 비로소 지리산의 장엄미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북능선은 주능선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지도 않고 빼어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지능선이라고
해도 해발 1,000m~1,400m급의 봉우리와 고개들이 이어지는 고산이라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될 코스이다
들머리에 들어서는데 이곳을 오늘 걷는 사람이라고는 난 혼자밖에 없다
당동고개(堂洞峙:1,061m04:15)
성삼재를 출발하여 오르막을 올랐다가 헬기장을 지나 어둠속에 도착한 곳이 당동고개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당동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 윗측에 있어 당동고개라고 부른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있는 당동마을은 원래 탑동이라 불렸는데 지리산 남악신사당이
있었다하여 당몰로 변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동(堂洞)으로 고쳐졌다고 한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어둠속에 아무런 감각도 없이 그냥 무작정 걷는다
어둠속에 걷는걸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지만 현재로는 딱히 방법이 없다
스마트폰도 없는데다가 서 있으면 너무 추워서 추위을 떨쳐내기 위해서 걷는다마는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오늘 따라서 시계도 차고 오지 않았고 유일한 동반자라곤
음악 6,000여곡이 저장되어 있는 라디오 뿐이다
걷고 또 걷다가보니 앙증맞은 고리봉 정상석이 나온다
작은 고리봉(小環峰:1,248m:04:45)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령치”뒤에 있는 “고리봉”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고리봉”이라고 한다.
고리봉의 유래는 산세가 흡사 배의 닻을거는 쇠고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은 지명으로
“고리봉”은 한자로“環峰”이라고 한 것이라 “고리 환(環)”이라 부른 모양이다.
아득한 옛날 남해안 하동 앞 바다에서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남원의
오수정까지 배를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그때 오르 내리던 배들을 묶어
놓았던 고리가 이 산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작은고리봉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뚝 떨어져 내려간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등로를 잘 정비해놨고 능선길은 일반 등산객들이 다니기 쉽게
사면길로 만들어놔서 걷기는 편하다마는 대간을 타는 산꾼들의 입장에서 보면 산은
산다워야 제 맛이 나는데 자꾸만 野性美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우측의 심마니능선과 좌측의 산수유로 이름난 산동면 지역이건만 어둠속이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안되는 길...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하여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내리막길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어둠속에 홀로걷는 산꾼을 반긴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폐헬기장을 만나고 다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無心으로 걷는다
일단 산에 들어오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않고 無我之境으로 산행을 하는데 오늘은
문명의 利器라는 스마트폰마저 없으니 더욱 산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묘봉치(卯峰峙:1,108m:05:26)
구례 산수유 축제로 유명해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에서
하늘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좌사리 심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심원쪽에 있었다는 묘봉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성지(龍城誌)를 비롯한 몇몇 기록에는 지리산의 제1봉(반야봉) 아래 더없이 좋은 절터에 묘봉사(妙峰寺)가
있고, 그 아래에는 현재 심원계곡의 용소(龍沼)로 여겨지는 용연기우처(龍淵祈雨妻)가 있다고 나온다
묘봉사의 창건 시기와 창건주는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종 때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권응인(權應仁)이
젊었을 때 친구 5명과 함께 이 절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7월 2일에
남원판관 노종령(盧從齡)이 장령(將領)과 관아 권속을 이 절로 피신시켰으며, 이듬해인 7월에
왜군들이 삼기사(三岐寺)와 이 절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의 지세는 동쪽인 심원계곡쪽은 완만한 경사인 반면에 서쪽인 산동쪽은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구례, 곡성, 남원, 운봉 등 큰 도읍에서 차단된 듯한 서북능선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그 안쪽은
천혜의 요새처럼 기능을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원과 운봉지역 사람들이
정령치 일대로 숨어들었던 것과,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달궁계곡 일대에서 한 동안
유리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런한 지형의 영향을 입은 바 컸다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 불리는 심원(深遠)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칠선계곡·문수계곡과 함께 지리산 3대 계곡 가운데 하나인 심원계곡 부근,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마한의 별궁터가 있는 달궁계곡에서 계곡을 따라 도로가 뚫리면서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묘봉치를 지나 만복대로 오르는 능선은 유순하기 그지없고, 평평한 만복대처럼 편안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으로 갈래친 심마니능선, 삼정능선, 오공능선이 중첩으로 나란히 걷는 길이다.
만복대 오름길에서 만난 몽돌
어두운 밤의 포장을 벗기는 여명이 시나브로 밀려오며 장중한 지리산의 능선들이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묘봉치에서 만복대로 향하는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길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그럴만하다
이곳은 지리산중에서 억새로 아주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어둠속에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서서히 黎明은 시작되고 잠시후에 오를 만복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날이 밝아지면서 뒤돌아보니 멋진 雲海가 夢幻的인 분위기를 자아내며서 구름쪽으로 넘어간다
지리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모습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조망바위로 올라서니 삼각대에 대포(망원렌즈)를 장착한 사진사들이 일출을 기다린다
그런데 짙은 구름으로 인해 아무래도 작품을 건지기는 힘들 듯 보인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난 만복대로 올라선다
약간의 박무로 인해 지리능선은 흐리게 보이지만 산행으로
성취한 기쁨의 쾌감은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룬 나만의 만족스런 감정은 가득 채워져 포만감의 절정을 맛보듯 하다.
이 순간을 위해 홀로 기도하듯 걸어왔고 사람 마다 갈 길의 목적지가 있기에 걷는 것이다.
걷는것도 수행이다...일요법회에 참석하여 천수경을 독송하고 108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포행(布行: 걸으면서 하는 수행)도 수행이다
힘은 드나 地, 水, 火, 風, (땅과 물, 태양과 바람) 有情 無情, 모든 자연과 내가
의사소통하는 시간이며 망념된 생각을 버리고 내 자신을 되돌아본다.
無念과 無心이라 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답지 않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그치는 것이라 했던가. 一心이 되면 찰나적 이나마
무념과 무아의 경지에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지나가면 없고 미래는 당도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현재는 그 속에 끼여 간격이 없다.
자연의 이치는 물은 흐르고, 인연 따라 바람 불면 구름은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썩은 고목엔 꽃이 피질 않는다.
만복대에서 바라본 반야봉
아직까지 날이 완전히 밝아지지 않고 반야봉은 구름에 갇혀 버렸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리웠던 영남 사림(士林:조선시대 유교를 닦는
선비를 가리키는 유교용어)의 太頭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하늘이 열번을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곳 서북능선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이제사 겨우 그 뜻을 알듯싶다.
첫날밤을 치르고 떠나 버린 반야도사를 기다리는 마고할미의 근심인지 반야봉은 박무에 가려있다.
지리산 8경의 하나인 반야낙조로 유명한 반야봉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기궁뎅이처럼 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반야봉은 보는 곳에서 따라 모습이 바뀐다고 하는데 이곳의 반야봉은 마치 여인의 둔부같이 보인다
정령치, 큰고리봉, 새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좌측으로는 운봉들녘이 보인다
만복대(萬福臺 1438.4m)
만복대는 전남구례군 산동면과 전북의 남원시 산내면 경계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로 성삼재(1,090m)와 정령치(1,172m) 사이 백두대간 구간 서북능선 가운데 가장
높은 꼭지점을 형성한 곳이며 풍수지리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며, 북풍한설에 피어난 설화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리산 최고의 억새능선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가을이면 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의 군무가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친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장쾌한 풍경을 연출한다.
인증샷
만복대에서 바라본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의 모습
산동면은 우리나라 산수유(山茱萸) 60%이상이 생산되는 곳으로 산수유 시목공원이 있는
개척마을을 비롯하여 산수유의 대표적 마을인 상위마을, 하위마을 등 군락지만 무려 30만평에 달한다
산수유는 1,000년 전에 중국 산수유의 주산지인 산동성(山東省)에 살고 있던 한 처녀가
산동면으로 시집을 오면서 고향의 풍경을 잊지않기 위해서 산수유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이 곳에 심은 것이 구례 산동면 일원이 국내 최대의 산수유마을로 변모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산동면 원달리 달전마을에는 '원조'격인 수백년 수령의 산수유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상위마을 사람들은 산수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산수유가 밥 먹고 자식 공부시키는 밑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계로 산수유씨를 빼내지만 예전에는 아낙들이 밤마다 입으로 일일이 산수유 씨앗을 발라냈다.
그래서 산수유마을 처녀의 입술은 꽃처럼 붉고 얼굴도 곱다고 하는데 상위마을 외에도 하위 평촌 대음
신평마을이 봄이면 산수유꽃으로 노랗게 물드는 곳인데 지금은 풍년을 상징하는 노란 들녘이 정겹다
만복대 능선은 대체적으로 심원 계곡이 있는 동쪽 사면은 완만하고,
산동마을이 있는 서쪽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며 서쪽의 남원, 구례, 운봉 같은
큰 고을로부터 접근하려면 가파른 능선은 자연스레 천연의 요새가 된다.
이 때문에 마한의 피난 왕조는 물론이요,
빨치산들도 한동안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만복대 정상에 오르니 정상에는 30여명의 산악회 회원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정상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어르신 사진 좀 찍어주셔요’ 하는데 갑자기 서글퍼진다
내가 머리만 하얗지 저거들하고 몇 차이가 없는듯 한데...
플랑카드에 ‘병아리들의 모임’이라 써놨는데 뭔 뜻인지 물어보니 ‘69년 닭띠들의 모임’이란다
부럽다...나도 저 나이때는 정말 겁없이 살았는데, 이젠 자꾸만 나 자신이 왜소해지는 느낌이다
젊은 친구들과 작별을 하고 정령치로 향한다
정령치에 서 0.5km정도 내려오니 ‘곰 출현주의, 출입금지’ 플랑카드가 붙어있다
이곳이 서시(견두)지맥이 시작되는 분기점(1,351m)봉이다
이곳에서 분기하여 전,남북의 경계 능선인 남원과 곡성, 구례를 지나 구례읍 끄트머리에서
서시천(西施川)이 섬진강에 입수되면서 맥을 다하는 지맥으로 박성태 선생이 저술한
신산경표에서는 견두지맥이라고 부른다.
박 선생님의 신산경표는 산경(山經) 위주의 지맥을 나누다보니 산자분수령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이 부분을 개선 하려고 만든 산경표가 대한산경표이다.
대한산경표는 산경이 아니라 수계(水界)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파악하기에 오류가 거의
없는 편으로 ‘산줄기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충실하자’는 슬로건을 내건 분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과 ‘현오와 걷는 지리산’의 저자인 현오(권태화)님과 대한산경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대한산경표’의 저자 산으로(박흥섭)님, 수헌(금헌수)님이 주축이다
나 역시 대한산경표에 적극 가담자중에 한 산꾼이다
조망바위(06:54)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만복대 능선은 滿山紅葉이고 가야할 큰고리봉, 새걸산,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뚜렸하게 보이고 좌측의 남원의 운봉들녘은 황금빛 물결이다
아쉽다면 마주 보이는 반야봉은 마고할미의 심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운해에 가려 보일락
말락하며 산꾼의 애간장을 다 태우고 있다.
갈 길이 멀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정령치로 내려간다
나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지 않는다.
나를 정복하고 다스리고자 산에 오르는 것이다.
내 마음안에 우뚝 솟아있는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른다.
보이는 산이야 언제든지 누구에게 정복되어지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산, 즉 내 마음안에 자리한 산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늘상 때묻지 않은채 성성하게 서있는 마음의 산을 기대하면서.
(황 청원의『마음으로 부르는 이름 하나』中에서
정령치로 향하는 길도 많이 바뀐듯 하다
예전에 까칠했던 등로는 탐방로라는 美名아래 우회로와 데크목 계단을 만들어놔서
산행하기는 편할지 모르겠으나 맥산꾼들의 입장에서 보면 산이 산다워야 걷는 맛이 있는데
자꾸만 야성미를 잃어버리는 것아 아쉽기만 하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정령치로 내려서는데 이곳도 예전에 없었던 동물이동통로라는게 만들어져 있다
정령치(鄭嶺峙:1,172m:07:20~40))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737번 지방도가 지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眞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위해 鄭氏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이곳을 지키게끔 하였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치는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 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 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 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정령치 동물이동통로 앞에는 예전에 없었던 시인 이원규님의 詩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라는 詩碑가 보인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정령치 대피소 마당에는 예전과 달리 코로나 19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서너대밖에 보이질 않고, 사람들도 별로없다.
맞은편의 반야봉은 아직은 짙은 운해에 갇혀버려 볼품도 없다.
이곳에서 아침을 겸한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하고 휴게소 매점으로 들어가서
컵라면 하나를 사고 가져온 김밥한줄로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한잔을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정령치에서 육모정으로 내려가는 737번 지방도로 얼마나 꼬불꼬불한 지
강원도에서도 볼 수 없는 길을 만나는데 저 도로를 개설할 때 환경단체와
지역민간의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이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면 1927년 남원의 원동향약계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설립한 용호서원(龍湖書院)이 있고, 춘향이 묘와 육모정이 있는데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龍湖九曲)은 지리산 서북쪽 능선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대표적 명승으로,
특히 구룡폭포는 ‘남원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히며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내려오다가 만나는
구룡계곡(九龍溪谷)에 있는데 이 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km에 이르는 심산유곡으로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우리는 이곳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 부른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송력동폭포), 제2곡은 용소(龍沼) 일명 불영추(佛影湫, 또는 玉龍湫),
제3곡은 학서암(鶴棲岩), 제4곡은 서암(瑞岩) 일명 구시소, 제5곡은 유선대(遊仙臺), 제6곡은 지주대(砥柱臺),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 제8곡은 석문추(石門湫) 일명 경천벽(擎天壁), 제9곡은 교룡담(蛟龍潭)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개령암지 갈림길(07:45)
정령치에서 5분정도 걸으니 우측으로 잣나무 조림지가 보이고 개령암지 이정표가 나온다.
대간을 걷는 산꾼들이야 별 관심을 두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불교를 공부한 나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다...더군더나 나홀로 걷기에 아무런 제약없이 마애불상군쪽으로 향한다
이정표에서 400여m정도 가니 마애불상군은 나오나 개령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표시석(磨崖佛像群:보물 1123호)
큰고리봉 아래 절벽을 이루는 바위에 부처님의 모습을 돌에 새김한 이 불상들은 모두 12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4m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 으뜸으로 모셔진거라 여겨지며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에서 고려시대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 하며 1~2m 크기의 작은 불상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주위에 감싼 산자락의 적막함이 헐어진 불상의
무상함을 더해 주는데 이 불상은 1960년대초부터 학계에서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으며
한때는 마한의 장군상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후에 마애불로 판명나 1992년 1월 보물로 지정됐다
개령암지와 마애불상군을 친견하고 다시 대간길로 되돌아와서 큰고리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예전에 마한(馬韓) 시절의 성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돌담길이 나온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정령치와 지리산 서북능선 자락의 여러 지명에는 마한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있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지리산 북쪽 기슭에는 반야봉이 있고 그 봉우리 좌우에는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는 고개가 있다...옛날 중국 한나라 소제(昭帝:BC87~74)가 즉위한 지
3년만에 마한의 왕이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
황. 정 두 장수에게 축성과 감독을 맡겨 그것이 완성된 뒤,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서
황령치, 정령치라는 이름을 짓고 72년동안 도성을 보호하였다.
이 사기(寺記)의 기록을 통해서 서북능선으로 병풍쳐진 천연의 요새 달궁계곡에 들판문화에
패배한 한 세력이 쫒겨들어온 희미한 사연을 읽을수는 있다.
그러나 황씨와 정씨 이야기는 아직 성씨(姓氏)가 등장하기 이전의 얘기인데다 전해오는 얘기를
기록한 것이라서 의문점도 많고 신빙성도 떨어진다
「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마한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8) 에 백제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까지 정복당해 멸망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나와 있으나 그래도 몇몇
잔존세력은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18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 웅거하며 백제에 반역하다가 토벌된 기록,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을 바치고 신라에 투항한 기록, 그리고 3세기 후반에 중국과 교류했으며
4세기경 마한의 일부 세력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어 마한의 잔여세력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항거하거나 유랑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큰고리봉 오름길에 뒤돌아 본 서북능선
지나온 만복대 정상은 짙은 운무에 가려졌고 산 허리를 휘감아 돌며 성삼재로 향하는
737번 지방도가 뚜렸하구나.
큰고리봉(大環峰:1,305m:08:15)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북고리봉 또는 큰고리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잠시후에 만나야 할 남원과 구례의 경계에 있는 작은 고리봉과의 구별을 짓기위해 큰고리봉이라 하는데
이곳이 해발이 조금 높아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 또 달리 부르는 이름은 환봉(環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만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큰고리봉 정상 암릉으로 이루어진 고리봉 정상에는 이정표(←정령치 0.8km →바래봉8.6km↑고기리 삼거리3.0km)와
2등 삼각점(△운봉 23/1991재설)이 있고 가야할 정령치와 만복대 그리고 맞은편의 반야봉이 한 눈에 들어오며
우측 능선은 지리산 서북능선으로 세걸산과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세걸산,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급경사로 내려간다
큰고리봉에서 직진으로 이어지는 세걸산과 바래봉의 뚜렸한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급경사로 내려서니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완전히 庶子 취급을 받는 길이다
고기삼거리까지 3.2km를 계속해서 내려가야 하는데 1여km정도 내려서니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암봉(08:30)
암봉에 올라서니 바로 아래에 고기댐이 보이고 그 너머로 남원시내가 아련히 보인다
저 어디쯤에 이몽룡과 성춘향의 로맨스가 싹튼 광한루가 있겠지
정령치에서 육모정으로 내려가는 구룡계곡 근처에 있는 성춘향 묘는 이곳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
아쉬운 맘을 뒤로하고 다시 내리막길로 계속 내려간다
큰고리봉 정상이 해발 1,305m이고 지금 이곳이 해발 700m정도이니 고도를 600m정도 낮춘 셈이다
고도차가 많다보니 주변의 식생대도 전혀 다른 느낌이다
윗쪽의 울창하던 갈참나무 숲이 서서히 줄어들고 소나무와 산죽으로 우거진 호젓한 길이
나오는데 좌.우 양쪽으로 소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잣나무가 뚜렸하게 구분되어 있다
산길이 거의 바닥까지 내려온 모양이다
소나무숲 사이로 간간히 건물같은게 보이고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데크목 계단을 지나고 농장을 우회하면서 내려서니 좌측으로는 경주이씨
효지비각이 여러기가 보이고 육모정과 뱀사골,정령치로 갈라지는 도로가
있는 고기 교차로가 나온다
고기(高基)교차로(09:25)
이곳부터 노치마을까지는 대간길이 마을 도로로 이어지는데 대간길이 높은 산으로만 있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하기사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중에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던 남난희님은
자신의 저서‘낮은 산이 낫다’에서 낮은 산에 대한 예찬을 이 길을 걸으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촌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이곳도 예전과는 많은 개발로 인해 펜션같은 주택이 많이
들어섰고 도로도 확장되었으며, 예전엔 산꾼들의 등대같은 역할을 했던 정령치 모텔은 지금
운봉자연치유센터라는 곳으로 탈바꿈을 했다
남원시 주천면에 속하는 고기리는 고촌리와 내기리를 병합하여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고촌리는 마을이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며,
내기리는 깊은 산중의 안쪽에 있는 안터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내기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정씨와 이씨가 피난와서 정착하여 형성되었고,
고촌마을은 경주이씨, 밀양박씨 등이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해발 500~6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로 정령치에서 발원하는 원천천의
상류지역으로 물이 매우 맑고 마을 앞으로는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이 펼쳐져 있어 산수경관이 수려하다
도로에서 바라본 수정봉의 모습
노치마을로 가는길
아스팔트 도로 우측 즉 운봉쪽으로 가는길 도로 옆에는 백두대간 3번을 걸을때까지는
없었던 백두대간 전시장이라는 건물이 조성되어 있는데 시간상 들릴 형편은 안된다
이 길은 그냥 평범하게 걷기는 하지만 해발 550여m 정도 된다고 하니 상당히 높은 편이다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이 293m밖에 안되는데 거의 두배 가까운 셈이다
노치마을 가는 길 우측에는 예전에 없었던 백두대간 전시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단 한곳의 단절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산줄기는 백두산 장군봉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천왕봉까지 1,400km 거리의 거대한 산줄기로
백두대간, 4대강을 포함한 하천과 그 지류들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세기초에 풍수지리설의 大家로 알려진 도선국사
道詵國師(827-898)가 저술한「옥룡기(玉龍記)」로 옥룡기에는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며’ 라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미 1,000여년전부터 오늘날의
백두대간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자본 수탈을 위해 작성한
산맥(山脈)체계가 일반에 호도되면서 백두대간은 잊혀지고,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으로 불리워지고
해방이 된지 80년이 다 되어가건만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를 비롯한 지리문서에는 백두대간이라는
단어보다는 버젓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백두대간이란 개념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도초 고지도 연구가이자 산악인인 이우형 선생이
헌 책방에서 조선후기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저서 「산경표(山經表)」발견하면서 부터다.
그 후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백두대간의 실체가 법률로 인정받게 되고
백두대간은 우리 국토의 신줄기를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노치마을(09:55)
들판 가운데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노치마을로 들어선다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은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가 터 잡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노치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서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갈대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 갈대 노(蘆)고개 고개(峙)’ 표현하여 노치마을이라 불리운다.
한국전쟁때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전국에서 백두대간 능선이 유일하게 통과한다고 하는 마을이다
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는데 이 마을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갈대 노(蘆) 고개 치(峙)를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평지가 아닌 고개임을 암시한다.
노치마을은 섬진강과 진주 남강의 분수령으로 물의 흐름이 나뉘게 된다.
운봉고원인 이곳은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가재마을은 바닷가재에서 딴 이름이고, 주촌(舟村)은 ‘배마을’이란 뜻이며,
고리봉은 배를 맨 고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마을로 들어서니 커다란 노거수 아래에 우리나리 지도에 백두대간이 그려져 있고
백두대간과 14정맥에 대한 기록과 노치마을 유래 표시석, 마을회관, 목돌 전시장이 있다.
표시석에는 국내 유일 마을,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라고 적혀 있다
비보풍수(裨補風水·풍수의 원리에 따라 재앙을 막는 것)의 한 모습인 조산탑을 돌아들어 자리잡은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 백두대간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목돌전시장
일제가 조선땅의 백두대간 맥을 끊으려고 묻었다는 목돌도 전시되어 있고...
“일본 사람들이 땅을 잘 알잖우. 저그 지리산의 기운이 시작하는 곳에 뜸을 떴다니께.”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물을 댄 논에 지리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일본인들이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구덩이를 파 숯을 묻고 돌침을 놓은 뒤 아예 저수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를 없애고 돌침을 꺼내놓았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내린 물도 덕유산에서 내린 물도 물길은 정확하게 좌우로 갈라져 흐른다.
마을의 조산은 마을 좌우로 헛헛한 기운을 보하고 흐르는 물을 따라 마을의 정기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미신으로 치부하면 보이지 않지만 이치를 따져보면 비보풍수는 자연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것을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옛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흐름은 발원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니 산의 발원지도 백두산 한 곳이어야 하고, 지리산의 시작은 덕유산의
산줄기가 내리막을 타다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는 노치마을로 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노거수 옆에는 예전에 없었던 호랑이 조각상이 새로 설치되어 있다
회관옆 화장실에서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수정봉으로 가는 길에 마을 가운데 있는 노치샘을 만나 시원한 생수 한모금을 마신다
노치샘(10:05)
현재 노치샘은 원래 고려시대의 절터로 고승이 도술로 판 샘이라고 한다
바위에서 나오는 생수는 물맛이 뛰어나 염병(장티푸스)같은 돌림병이 심하게
돌던때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신기하게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고 한다
혹시 물을 쓰다가 부족할 때는 우물속의 달팽이 모양에서 물을떠야 하는데 반드시
마을처녀가 물을 퍼올려야 할만큼 정하게 여겼다
당산제때는 정월 초하룻날 우물을 품고 새끼줄로 금줄을 쳐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해놓고 당산제 당일 이른 새벽에 제사에 올릴 정안수를 뜨러가면 산신인 호랑이가
샘 주위를 지키다가 제사가 시작되고 첫물을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노치샘을 지나 노치마을 당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예전 보이지 않았던 민박집도 보이고
좁은 골목으로 올라서니 멋진 소나무 5그루가 서있는 노치마을 당산으로 올라선다
노치마을 당산(堂山:10:08)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였다.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몇 년 전 자손이 없던 마을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자정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 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된다.
또 상주를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노치마을 당산에서 바라본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의 모습
노치마을 당산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소나무숲을 지나 급경사의 오르막을 음악소리에 맞춰 소걸음(牛步)으로 걷는다
빡센 오르막길으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무덤이 보이고 구룡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구룡폭포 갈림길(10:25)
이곳에서 좌측으로 3.3km를 가면 구룡폭포가 나온다는데 언젠가 가봐야 할듯 싶다
구룡폭포는 판소리 동편제를 집대성한 운봉 출신 판소리의 歌王 송 흥록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였다고 하여 유명해 진 곳이란다... 그쪽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크게 한번 심호흡하고 부지런히 수정봉으로 향하는데 등로는 양넘 지갑줏듯 편안하다
구룡폭포의 유래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갈래 폭포를 이루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털거리듯 하므로 교룡담( 交龍潭)이라고 하고 이곳이 바로 용호구곡의 마지막 구곡이다
교룡담 이곳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살다가 등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구룡폭포라 불린다
구룡폭포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완만한 육산길에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노치마을에서 힘들게 올라온 것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가...그리고 도심에서 찌든
육신의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선 소나무숲만큼 좋은게 없을 듯하다
덕운봉(德雲峰:745m10:38)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조금 걷다보니 지도상에는 없는 745m봉이 나오는데
봉우리에는 산꾼들의 흔적들이 보이고 송이막을 지키는 자의 것인지 아님 비박꾼의
숙소인지는 모르겠으나 텐트 한동이 보이고 ‘덕운봉 745m’라는 코팅지가 보인다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덕운치라는 고개가 나오고 ‘수정봉 1km’라는 이정표가 있다
덕운치 이정표
덕운치에서 수정봉으로 가는길은 고도차가 별로없는 등로이다
이곳부터는 지리산 구간을 완전히 벗어나고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능선을 걷는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다...오늘은 산행하기 좋은 날씨다
文明의 利器라는 스마트폰이 없으니 산행은 한결여유로운 느낌이다
현대인들은 자꾸만 전자기기에 의해 예속되는 느낌이라 씁쓸한 느낌이다
요즘에 지하철이나 버스 등을 타고 가다보면 신문이나 책을 보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봐도 보이지 않고 열명이면 열명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꾸만 기계에 예속되는 느낌이라 人性이 메말라가는 것 같아 왠지 슬퍼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산행이 더 여유로운지도 모르겠다
연산골 갈림길(10:52)
좌측으로 내려서면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연산골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이정표를 지나면서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다시 무너진
석성(石城)터를 지나 수정봉에 도착한다
수정봉을 휘감고 있는 이 석성은 노치산성이다
노치산성 터(11:05)
노치산성은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 뒷산인 수정봉에 있었던 산성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운봉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해발 500m 이상되는 산봉우리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다.
즉, 수정봉의 노치산성, 준향리의 음지산성·양지산성, 장교리·고남리·가산리·황산의 석성, 신기리의
토성 등이 있고 산성의 주변지역에는 준향리·매요리·임리·권포리·연재마을·비전마을
등지에서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이 확인되며 또 준향리에는 가야토기의 도요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지역과 이웃한 아영면과 동면에서는 월산리·건지리·두락리 등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사된 바 있다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노치산성이다.
지나온 750m봉과 노치마을, 회덕마을, 정령치, 만복대 등은 삼한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중요한 국경 방어지역이었고 노치마을의 경우 한국전쟁 때 공비 토벌
명목으로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 비운의 고장이기도 하다.
수정봉(水晶峰:804.7m:11:07)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려한 봉우리로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봉우리로
산 중턱에 수정(水晶)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수정봉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두 개의 산봉우리를 표주박 형태로 감싸는 양지산성이 있다.
산경표상에 아주 중요한 수정봉 정상 삼각점(△운봉303 / 1981 복구)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이 수정봉은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서 이곳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주천면 덕치리 벌판 너머에 지리산 서북능선 자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 선생이 저술한『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수정봉은 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수정봉에서 입망치까지 내리막길은 힘든 산행을 하는 범여에게는 속된말로 ‘양넘 지갑줏는 느낌’이다
편안 등로로 내려서는데 수정봉에서 서북쪽의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렸하다
나무계단을 지나고 계속되는 내리막길...멋쟁이 소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 향기는
범여의 머리를 상당히 상쾌하게 해준다
폐헬기장을 지나 뚝떨어져 내려서니 이백면과 운봉읍을 잇는 입망치로 내려선다
입망치(笠望峙:545m:11:35)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입촌마을과 운봉읍 행정리 갓바래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갓바래재라고도 한다.
고개의 유래는 입촌(笠村)은 중이 삿갓을 쓰고 배낭을 지고 가는 모습의 산혈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얻은 지명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홍거리와 두무실 가운데 아홉 가지
혈 중에서 바래혈이 있다하여 갓바래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우마차가 많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수정봉에서 출발한 지 28분만에 입망치에 도착한 후 다시 고개를 지나 올라서니 양지바른 곳에
유인전주이씨 묘지가 있어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여원재를 향해서 길을 나선 다음 다시 710m봉을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좌측으로 남원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보이지 않는 이정표도 많이 보이고 힘들게 올라야하는 봉우리는 우회길을
만들어놔서 편하게 걷는다...자꾸말 갈수록 대간길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710m봉(12:18)
평평한 능선의 710m봉에 도착하여 대간길은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양지산성의 흔적들이 보이는데 성곽인듯한 축대는 그냥 방치되어 있다
양지산성의 흔적(?)
입망치 북쪽에 위치한 양지산성은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터를 지나니 편안한 소나무숲이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한결 여유롭다
매주 험한 지맥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대간길을 걸으니 한결 맘이 편하다
이 길은 4번째의 대간길이라 그런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무명봉을 지난 다음에 다시 다시 산성터의 흔적같은 석축을 뚜렸한 길을가니
이정표는 우측 사면길을 가리키고 예전에 없던 편안한 사면길이 보인다
예전에 이곳에서 직진 능선으로 올라갔는데 이정표는 우측을 가리키고 있다
저 능선에 올라가면 좌측에 주지사라는 사찰로 가는 도로로 내려서는데 3번이나
걸었던 길이기에 그냥 편안한 우측의 사면길을 따라서 간다
사면길을 따라서 3분정도 가니 주지사로 향하는 뚜렸한 포장도로를 만나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내려간다
주지사 갈림길(12:30)
좌측으로 조그만 가면 주지사라는 절집이 나온다...주지암이라고도 하는 절집이제.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스마트폰이 없으니
지금의 시간도 모르겠다...길이야 대간길을 3번이나 걸었으니 모를리 없겠지만
여원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젠틀맨님과 연락을 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독립군으로 다니기에 귀경할 차량이 어쩔지 몰라 입만만 다시고 여원재로 내려간다.
주지암(住智庵)은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지리산 여원치 주지봉(住智峯)에 있는 절집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원래 유래가 깊은 남원군민의
기도단으로, 가뭄이 들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려 효험을 보는 일이 많았다.
1695년(숙종 21) 남원부사 김세평(金世平)과 군민들이 영험을 본 기도단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과
뜻을 모아 암자를 세우고 주지암이라 하였으며, 1912년 주지 이혜능(李惠能)스님이 크게 중수하여
충청남도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불상을 모셔왔으나, 실화로 당우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1978년 주지 김양선(金良璇)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절의 동쪽에는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암굴이 있으며, 이 굴은 기도소로 유명하다. 또, 정상의 바위 위에는 가로 세로 1m의 바둑판 모양의
네모진 돌이 있고, 네모판 중앙에는 가로 세로 20㎝ 가량의 구멍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산신들이 내려와 놀았던 곳이라 하며, 그 뒤 봉화대의 깃발을 꽂아 남원과 운봉을
잇는 신호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절 남쪽 50m 지점에서는 최근 ‘住智庵(주지암)’이라 새긴
창건 당시의 표지판이 발견되었다.
우측의 능선으로 올랐다가 금새 여원재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로 내려선다
여원재 민박집 간판이 보인다...삼천포 아지매가 장사하는 저 집은 대간길을 걷는
산꾼들에게는 목로주점을 하는 주막으로 몇번 호주머니가 털렸던 집이기도 했으나
은티재 아래에 있는 은티주막의 여시같이 음흉한 주모와는 달리 수더분하고 양심은 있는 곳이다
편안한 안부길로 내려서니...
쑥부쟁이가 가을을 재촉한다...잠시후에 주막집이 보이고 주막으로 내려간다
여원치 주막(13:00~14:15)
주막에 들어서니 오늘 대간꾼들이 없는지 주막집은 텅텅 비어있다.
예전에 2번이나 들려서 지갑을 털렸던(?) 경험이 있어서 주막에 들어서면서 ‘아지매! 나왔소’ 하니까.
아지매가 나오면서 집나간 서방 돌아온 것 만큼이나 반가워 한다.
왜 이리 오랫만에 왔어...하면서 살갑게 대한다.
1년에 이곳을 지나가는 대간 산꾼이 셀수도 없이 많을텐데 어찌 나를 기억할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는 척 하면서 반가워하니 역시 주모답다.
지금이야 70이 넘은 쪼그랑 밤탱이 할매지만...역시 프로 장사꾼이다.
‘아지매 탁배기 한병면 주소’ 하니까 안 그래도 조금전에 담근 갓김치가 기가 막히다고 하면서
막걸리 한병에 두부에다 갓김치로 여유롭게 한잔을 하면서 아지매 내가 집에서 핸드폰을
안 가지고 왔는데 지금 몇시요 하니까...허 참 장가가면서 거시기 빼놓고 갔구먼 하면서 웃는다.
전화기 좀 빌려주소...친구한테 전화를 좀 해야하니 하고 전화를 빌렸는데 갑자기 젠틀맨님의
전번을 알 수 있어야제...그냥 포기하고 술만 축을 낸다.
이곳에서야 서울로 가는 버스가 많이 다니는 인월이 그리 멀지 않으니 큰 걱정없이 술을 마신다
주모 할매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주막 뒷쪽에서 산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보니 내가 다니는 산악회의 후배 산꾼들이 아닌가...아그들이 당일 산행으로 노치마을에서
통안재까지 가는 길이란다...선배가 할 일이 뭐있겠는가 아그들 불러서 두부김치에다 막걸리 한잔씩
대접을 하고 여원재에서 끝내려던 산행을 후배들 따라서 통안재까지 가기로 한다.
주막집에서 아그들 술사주느라 주모에게 거금 13만원이란 돈을 주모에게 털렸지만 아그들에게
목마름을 해결해 준 공덕을 지었고 거기에 빌붙어서 서울까지 가는 교통편을 해결했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 듯 싶다...누군가가 그랬지 나이 먹어서 대접을 받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제’...주모와 작별을 고하고 아그들 따라서 길을 나선다
여원재(女院峙:480m:14:17)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하며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24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서편에 구릉을 이룬 곳이 운봉읍이며
섬진강의 상류가 되고 이 지류가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지는 고개이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엔 함양. 운봉. 남원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 이기도 하였다.
고개 정상에는 벅수가 서 있는데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이 벅수가 세워져 있는
마을은 천석꾼과 만석꾼 등 부자들을 배출한 마을로 꽤나 부자 동네가 많다고 한다.
이곳 남원시 운봉읍은 넓은 고원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부자들이 많은 곳이라 한다
고려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이 성계가 이 재에 도착했을 때
백발의 할머니가 나타나 그대들의 용모와 지혜가 뛰어나 지리산 신령님의
도움으로 크게 무찌르리라는 할머니의 예언대로 이곳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성계가 그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여원치(女院峙)
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학란 때도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치열했다는 곳이란다.
원래 연재(鳶峠)라 불렀으나 여원재로 이름이 바뀐 것이며, 고개 마루턱에 여신을 수호하는
산신각이 있어 그곳을 여원(女院)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여원재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말 이성계장군이 운봉현까지 내려와서 그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던 왜구를 무찌를 때, 꿈에 여신이 나타나서 이성계에게 길을 인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신은 함양(咸陽)에 살던 청상과부로 왜구의 우두머리 아치발도(阿只拔都)가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칼로 더럽혀진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 후 원수를 갚고자 이장군의 꿈에 현몽하여 여신으로 나타나 전략을 알려주어서 적장 아치발도를 죽게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훗날 이성계는 이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여원이라 불렀다 한다.
여원재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이곳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장치(獐峙:14:25)
여원재에서 조그만 능선에 올라섰다가 우측에 장동마을을 바라보면서 내려서니 장치가 나온다.
우측으로 첫 번째 바라보이는 곳이 연재마을이며 그 마을 안쪽으로 장치부락(장동)이 있다.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장동(獐노루장 洞마을동)이 되었다. 장치는 장동마을의 이름을 딴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느림보인 나는 후배들에게 걸음이 느려서 행여 민폐나 끼치는 밉상이 되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후배들이 앞뒤를 외호해주면서 내 걸음을 맞춰주는 바람에 편하게 길을 걷는다.
장치(獐峙)에서 바라본 장동마을의 모습
장치(獐峙)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방아산성 갈림길(15:18)
방아산 산성 갈림길이며 우측 방향으로 200m 진행시 방아치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데
지도상에서는 합민성(合民城)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이 성은 일반적으로 합민성으로 부르지만
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 등 다른 여러 이름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새로 생긴
이정표를 보아선 방아산 산성으로 정해진 듯 하다.
좌측으로 진행하면 방아산 산성(합미성)을 볼 수 있겠지만 진행방향과 달라 방아치로 진행한다.
합미성은 동학 때 농민군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농민군이 패전한 곳이기도 하다.
동학군이 이곳에 쌀을 저장해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한다.
방아치(15:20)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공원을 가로 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다
1894년(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당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통과하였다
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하였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785m봉(15:27)
잎이 벌레가 먹은 용담꽃도 만난다
김해김공 묘(16:09)
후배 산꾼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보니 김해김공 묘지를 지난다.
고남산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고남산으로 올는 데크목 계단으로 오른다
예전의 대간길에는 데크목 계단옆에 있는 틈이 갈라져 있어 뛰어넘어야 하는 바위가
있는데 흔히 산꾼들은 뜀바위라 했는데 지금은 계단을 설치해놔서 바위로 갈 일 없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북쪽으로 시원하게 조망이 열리면서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고속도로와
전북 장수군의 장안산과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남원분지를 적신 다음에 섬진강으로 입수하는
요천(蓼川)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하는 남원시 산동면 들녘은 황금벌판이다.
요천(蓼川)은 섬진강의 지류들 중 하나로 하천연장은 60.03km이며, 유역면적은 485.70㎢이다.
하천 주위에 여뀌꽃이 많이 핀다하여 여뀌 요(蓼), 내 천(川)이라 한다.
마을 우측 끄트머리쪽으로는 예전에 동학군의 집결지였던 부동마을(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소재)은
이곳에서는 보이지가 않는구나.
지리산의 주릉(主陵)인 묘봉과 새걸산이 겹쳐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반야봉이 고남산을 내려보고 있다.
우측의 직진 방향으로는 아침에 지나온 큰고리봉과 움푹패인 정령치, 그 뒷쪽으로 만복대가 보인다
동북쪽으로는 우리나라 8대종산중의 하나인 장안산...그 우측으로는 영취산
아득히 저 멀리로는 거창의 명산들인 거망산과 황석산, 감악산이 아련히 보인다
데크목이 깔린 안부를 지나서 고남산으로 향한다
고남산(古南山:846.4m:16:35)
남원시 산동면(山東面) 부절리(釜節里)와 운봉읍 권포리(權布里)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태조봉(太祖峯)·고조봉(高祖峯)·제왕봉(帝王峯)·적산(赤山)·일광산(日光山)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앞의 것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들이다.
아침에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빛나 일광산이라 하고, 저녁이면 노을에 붉은 빛을 띤다 해서
적산(赤山)이라 불렀다.
남쪽으로 반야봉을 비롯 수정봉이 보일 듯 말 듯하고 동쪽으로는 운봉 평야가 있다.
이 산의 고도는 846.5m에 지나지 않지만, 송신탑이 말해주 듯 중요한 통신시설의 한 곳이다.
이 산은 또 "운봉평야"에 우뚝 솟아올라서, 예부터 전쟁터와 격전지의 방어선이 되곤했다는데,
지역 주민들이 "고남산"을 "태조봉"이라고 불렀다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왜구 2천명을 이끌고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에 맞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변안렬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출발하여 전주 한벽당에 잠시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한 뒤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면서,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읍(雲峰邑)의 모습
고원(高原)으로 이루어진 운봉...사방이 덕두산(1,150m)·바래봉(1,165m)·고리봉(1,305m)·수정봉(805m)
등으로 둘러싸인 고원(평야에 비하여 높은 지대에 펼쳐진 넓은 벌판)의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삼국항쟁기 때 백제와 신라는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하게 쟁패를 거듭한 바 있는데, 602년 운봉지역에
있었던 아막성을 두고 벌인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면 대야성(합천)을 거쳐 왕도인
경주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요 간선교통로 상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간선교통로인 5통 가운데 해남통(海南通)이 지나는 곳으로 여겨지는데, 경주를 출발하여
양산-창녕-합천-거창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에 이르고 나주 및 광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섬진강 수맥이 관류하는 운봉평야 등 곡창지대는 물론 무주와 나주 등 영산강 유역의 교역거점을
관리하는데 있어 지리적으로 뛰어난 이점을 지닌 곳이라 할 수 있다.
김선신(1775~?)이 저술한 조선의 3대 산지(山誌)이자 지리산에 관한 조선 시대의 유일한 산지인
『두류전지(頭流全志)』...지리산의 자연지리와 명승지, 문화유산, 문학작품, 일화 등을 총망라한
종합 인문지리지인 두류전지에서 나오는 운봉고원이다.
백두대간이 흘러내린 두류산(지리산)을 인격체에 비유하여 설명한 『두류전지』
이 책의 편찬자인 김선신(1775~?)은 1823년 무렵 2년간 영남의 소촌역(현재 경남 진주시 문산읍)
찰방(察訪: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두류전지』를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선신은 “중국 곤륜산에서 나온 천하의 세 산줄기 중 하나가 동북쪽으로 흘러 백두산이 되고,
백두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조선의 여러 산이 되고, 마침내 두류산에 이르러 그 흐름이 다한 것”으로 봤다.
‘두류(頭流)’라는 이름은 ‘백두대간이 흘러내린 산맥(백두대간白頭流脈)’을 뜻한다고 했다.
백두산의 근원을 중국 곤륜산으로 본 점은 아쉽지만 백두산에서 두류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
산맥들의 흐름을 국토 전체와 유기적으로 파악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고남산 정상에는 국방부대삼각점, 무인산불 감시카메라, 고남산과 제단지 안내판이 있다.
고남산제단지(古南山祭壇地) 안내판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가 인월역에 진을 치고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고려군을 지휘하고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 장군은
이곳 고남산에 석축을 쌓고 필승의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남산 주변으로 남아있는 석축제단은 그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고남산을 중심으로 남원지역 곳곳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듯 하다.
지난 구간에 걸었던 지리산의 성삼재, 정령치.팔랑치가 기원전 삼한의 전장(戰場)이었던 데 비해, 여원재를
중심으로 한 고남산 주변은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요, 노략질에 눈 멀었던 왜구들의 무덤이 아니었던가.
무장(武將 , 려말 이성계))은 고남산의 기를 빌어 왜구를 섬멸했고,
고산자 선생은 이곳에 서서 대동여지도에 넣을 곡중분수령을 찾아 지리산을 찾아들지 않았을까?
고남산 정상석은 고남산에서 한참 아랫쪽에 자리를 잡고있다
고남산 헬기장(16:42)
지저분한 등로를 따라서 통안재로 향한다
샛길로 내려선 다음에...
KT 송신소와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권포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통안재(655m:16:55)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서 운봉읍 권포리와 임리를 잇는 고개로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란다. 고개 위에는 고남산 통신탑이
내려다 보고있고 서어나무들이 있는 넓은 공터가 보이며 이 지역사람들은
독골재라고 부르며 고남산 정상에 있는 KT송신소로 가는 포장도로이다.
언제올 지 모르는 이곳을 다음으로 기약하며 대간 산행을 종료하고 권포리로 내려간다
권포리 내려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고남산 정상의 모습
권포리(權捕里:17:25)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권포리(權捕里)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고남산 아래서
산신제를 올릴때 주둔하던 마을로 군사와 말을 샘터 주변에 터를 權氏 일가의 권세가 커다하여
권포리(權捕里) 하였다 한다
고남산은 이성계 장군이 왕업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하여, 일명 태조봉·제왕봉이라 하였다.
제왕봉은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인근 지형 역시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붙인 마을 이름이다.
삼봉 정도전이 권포리(權佈里)라 지었다 한다.
원래 산행 계획은 여원재까지로 했으나 중간에 후배 산꾼들을 만나서 이곳까지 왔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남원시내로 가서 목욕탕에서 깔끔하고 목욕을 하고
의관정제를 한 다음에 근처에 있는 추어탕집에서 저녁을 해결한 다음에 서울로
귀경하는 산악회 버스에 오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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