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2년 08월 07일 / 사랑하는 불알친구와 둘이서
어제 무박으로 여수지맥을 갔다왔더니만 조금은 피곤하다.
오랫만에 일요일 아침에 집에 있으니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단하게 씻고 서둘러 9시에 김포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섰는데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8시에 출발한다는게 7시에 출발을 한 모양이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헐~~~ 8시가 채 안되었네.
약소장소 근처의 편의점에 들려서 평소에 잘 안 마시는 아메리카노 냉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시간을 떼우는데 친구가 전화가 와서 친구를 태우고
강화 석모도로 향한다.
오랫만에 강화도로 향하는데 2011년에 강화지맥이라는 맥길을 걸을때 갔으니
10년도 훨씬 넘었구나...오늘 강화도로 가는 목적은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知人 스님께서 석모도의 낙가산 기슭에 사찰을 새로 조성하여 點眼式을
한다기에 오랫만에 뵙는 스님에게 인사도 올릴겸 점안식에 참석하러 간다.
강화도는 참으로 많이 변해있다...강화읍내를 빠져나와
석모도를 향하는데 예전에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갔었는데 지금은
멋진 다리가 생겨서 편하게 석모도의 석포리에 있는 지인스님의 절집에
도착하여 점안식에 참석하고 식이 끝난후에 스님께서 점심공양을 하고 가라는
스님에게 사양하고 인사를 건낸 후 친구와 함께 오랫만에 전등사로 향한다.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길 우측에 굳게 잠긴 양헌수 비(碑)가 우리를 맞이한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했고 양헌수(梁憲洙:1816~1888)는 1866년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대원군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오자 서울 방비를
위해 주교도청훈련도감좌별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순무영천총으로 선봉이 되어 강화도로 출정했다.
10월 1일 적군 몰래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에 입성하여 진을 쳤다.
10월 3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 160명이 정족산성을 공격해오자
매복작전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혀 적을 격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약탈, 방화한 뒤 철수했고 이 공으로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868년 어영중군,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 1873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1874년에는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형조판서·금위대장 등을 지냈다.
경내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아직 피지않은 산수국과 상사화로 불리는 꽃무릇이 滿開했다
간간히 보이는 외래종인 서양톱풀과 탐스러운 佛頭花도 많이 보인다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약 1640년 전인 서기 38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傳燈寺)라 불렀다고 한다.
1605년과, 1614년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해 1621년 2월 완성되었으며, 1707년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인
취향당(翠香堂)을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1341년(고려 충혜왕 2년)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년(조선 선조 38년), 1614년(조선 광해군 6년)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스님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고,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으며, 그 뒤에도 1749년,
1839년, 1855년, 1871년,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 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으며,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法華經板:1544년)이 전해지고 있는데,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 부대에서 경판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으며, 그 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한 작은 옥등(玉燈) 등이 있다.
전등사에는 일반 절집과는 달리 일주문(一柱門),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不二門)이
없으며, 머리를 숙이며, 계단을 올라서니 “傳燈寺”라는 현판이 보이고 기둥에는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 삼아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이 다른 전각과는 달리 무려 14개가 걸려있다.
일반적으로 전각에는 주련이 대개 4개가 걸려있다.
終日無忙事 (종일무망사): 온종일 한가로워 바쁜 일 없어
焚香過一生 (분향과일생): 향 피우며 여생 보내리
山河天眼裏 (산하천안리): 산하는 천안(天眼) 속에 다 들어 있고
世界法身中 (세계법신중): 세계는 법신 안에 여여하다네
聽鳥明聞性 (청조명문성): 새소리를 들으며 자성 밝히고
看花悟色空 (간화오색공): 꽃을 보고 색공(色空)을 깨치네
明月定中心 (명월정중심): 밝은 달은 선정에 든 마음이라네
靑山塵外相 (청산진외상): 푸른 산은 티끌세상을 벗어나 있고
嶺上多白雲 (영상다백운): 고갯마루 위에는 흰 구름 많네
袖中有東海 (수중유동해): 옷소매 자락에 동해가 있고
孤月浪中翻 (고월랑중번): 외로운 달 물결 속에 일렁인다네
薄雲岩際宿 (박운암제숙): 엷은 구름 바위 끝에 잠자고 있고
縣泉百丈餘 (현천백장여): 장여 폭포는 백 길 넘게 드리워 있고
竹逕從初地 (죽경종초지): 초지를 따라 대숲 길을 가네
傳燈寺 현판이 걸려있는 전각 아래로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서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서 뒤돌아보니 대조루(對潮樓) 현판이 걸려있다.
대조루(對潮樓)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불렸던 고려말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다룬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영조의 시주로 대웅전과 함께 중수(영조 25)했으나, 1841년(헌종 7)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루는 1932년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을 한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강당 아래를 통해 사찰을 출입한다.
대조루는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잠시 쉬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이다.
누각의 문을 활짝 열어 먼 곳에 강화해협(염하)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데 건물의 외부에는
‘전등사’의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에는 ‘대조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조루 마당 앞에는 높은 기단 위에 두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한 모습의 대웅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조루와 대웅보전이 함께 마당을 사용하여, 대조루는 낮은 곳에, 대웅보전은 높은 곳에 있어
내려다보는 듯하고 있는데 대조루는 ‘서해의 조수가 보인다’는 뜻으로 2층은 대웅보전을
바라보며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대조루 아래를 통과해야만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다.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樣間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사승寺僧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1855년(조선 철종 6년)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
(고종 13년) 효월화주(孝月化主)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 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에는 3짝의 분합문으로 된 빗살문을 달았으나 측면에는 한쪽에만 출입문
1짝이 있고 다른 면은 벽으로 막혀 있으며,기둥은 배흘림으로 처리했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차례로 올려놓았는데, 귓기둥이 약간 위로 향하고 있어
귀솟음을 강조했다.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 사이마다 짜 올렸으며
앙서(仰舌)와 수서(垂舌)로 장식된 살미첨차는 끝부분이 밖으로 뻗으면서 강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조선 중기 사원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 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즉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했다는 내용이다.
내부에는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대들보가 걸쳐 있으며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량(宗樑:마룻보)이 설치되어 있으며, 불단은 조각과 색채가 뛰어나며
그 위에 안치된 석가삼존불은 1761년(조선 영조 37년) 대연(大演)에 의해 개금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불탱화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1880년(고종 17년)에 유담(柔談) 대사의
화주가 조성했다고 한다.
그 양 옆으로는 목조 사자 등에 동판 업경대(業鏡臺)가 놓여 있는데 이는 황천 가는
길목에 두는 것으로 죽은 사람이 그 앞에 서면 이승에서 행한 선악 행적이 모두 비친다는 것이다.
불단 위에는 목조건축의 포작(包作)을 여러 겹으로 포개서 장식한 닫집을 마련했으며
그 아래로 용·극락조·연꽃 등이 여러 장식판과 함께 달려 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색채가 선명한 단청과 비천문, 연꽃무늬 등이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며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개의 강에 달그림자 비치는 것과 같도다
四智圓明諸聖土 (사지원명제성토): 사지四智에 능통하게 밝으신 모든 성서러운 분들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법회에 크게 임하셔 모든 백성들 이롭게 하시네
* 사지(四智)는 부처님이 갖춘 4가지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를 말하는데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전등(傳燈)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
즉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로서 전등사는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란 뜻이며
전등사 대웅보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셔져 있으며, 대웅(大雄)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전등사 대웅보전은 화려한 내부 장식과 능숙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전각으로
보물로 지정된 전등사 목조 석가여래 삼불 좌상은 조선 인조 원년(1623년)에 수연을 비롯한
6명의 승려 조각가가 제작한 불상으로 이 삼불좌상은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중심으로 우측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좌측에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모셔져 있다.
삼불좌상 좌우로 거울이 있는데, 업경대(業鏡臺)로, 염라대왕이 망자의 죄를 비추어 보는 거울로
전등사 업경대는 인조 5년(1627년)에 제작되었는데 황색 사자와 청색 사자 1쌍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사자의 등 위에 커다란 불꽃 문양으로 둘러싸인 거울이 꽂혀 있는 형태이며,
대웅전에 모신 삼존불상의 오른쪽에 황색 사자가, 왼쪽에 청색 사자가 자리하고 있다
전등사의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인데 나쁜 짓을 꾸짖어 하루 세 번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죄를 씻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추녀 밑에 새겨 추녀를 받치게 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며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불사를 하던 중 마을의 주모와 사랑에 빠졌고,
불사를 마치면 혼인할 생각으로 모은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겼는데, 공사 막바지에 주막으로
찾아가니 여인은 돈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도편수는 몇 날을 힘겨워 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했고,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지붕을 떠받치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욕심에 눈멀어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징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이
대웅전에서 들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도편수의
불교적 사랑과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계단식의 기단 위에 배흘림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로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에는 2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벽은 벽으로 막았다.
공포는 외일출목·내이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모두 앙서로 되어 있으나 평방을 사용하지 않고
창방 바로 위에 공포를 얹어놓은 점은 일반적인 다포식과는 달리 주심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앞쪽에는 기둥 사이에 공간포를 배치했으나 양 옆면과 뒷면에는 공간포 없이 화반만
설치한 점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는 평주 양 옆으로 대들보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보가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 한가운데 있는 불단에는 석조약사불좌상이 놓여 있다.
천장은 역시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는 연꽃과 비천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약사전 내부에는 석불좌상, 후불도, 현왕도가 있으며, 후불탱(後佛幀)은 불상 뒤에 봉안하는
불화를 말하며,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죠. 약사전 후불화는 고종 21년(1884년)에 제작된 것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화폭 중앙에 약사삼존불을 배치하고, 화면의 네 모서리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네명의 수호신장인 사천왕을 그려져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상인데, 배꼽 부근에서 두 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이 가장 큰 특징인데, 사람들은 약사여래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해 주며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음식과 옷을 제공해 준다고 믿고 있다.
전등사 명부전(冥府殿:보물 제1786호)
명부전은 약사전의 서남쪽에 있는데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번의 불사로 위치와
규모가 확대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되며,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형식을 지닌
팔작지붕 전각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심판을 받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명부전에는 이를 재판하는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어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내부에는 가운데 지장보살상과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冥府殿)에 딸린 조각상 31구가 있으며,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으로 1636년(인조 14)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조성한 조각승 수연이 중심이 돼 제작한 상들이다.
경전을 보면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교를 비방하는 어머니를 위해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이때 본 지옥의 끔찍함 때문에
육도(六道, 하늘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죽은 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한 후에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을 서원했다.
전등사의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수연의 석가여래
삼불좌상 보다 10여 년 늦게 제작된 불상으로, 수연 작품의 완숙된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전등사에서 바라본 강화 삼랑성(三郞城:사적 제130호)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하며,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에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며, 동문 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 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며,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 점심도 안먹고 전등사에 들려더니만 배도 고프고하여
대웅보전, 약사전, 명부전만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전등사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佛頭花
강화도라는 섬은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왜 강화도를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나중에 시간되면 한달정도 시간을 내어 구석구석 찾아볼 예정이다.
전등사를 빠져나와 강화읍내를 들리니 마침 오늘이 강화장날이라
5일장에 들려서 간단하게 우뭇가사리로 허기를 면하고 친구가
사준 이것 저것을 받아서 김포로 와서 해병대사령부 앞에 있는
유명한 갈비집에 들려 친구가 사준 갈비에다 늦은 점심을 먹고는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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