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게 별거있나...神仙처럼 사는게 神仙이지
☞ 산행일자: 2022년 10월 01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의 박무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9.6km + 날머리 2.6km / 6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이화령-진주강씨 묘-폐헬기장-757.5m봉-안부-무명봉-안부-이화령 합류길
폐헬기장-쉼터-제1관문 갈림길-조령샘-갈림길-절골삼거리(1,005m봉)
조령산 남봉(H)-조령산-조망처-무명봉-마당바위 갈림길-947m봉-조망바위
절골갈림길(1)-무명봉-안부-889m봉-안부-신선암봉-안부-쭈구리바위 갈림길
안부-암봉-안부-치마바위봉-928m봉-쉼터-안부-799m봉-무명봉-안부-무명봉
선바위 갈림길-무명봉-제2관문 갈림길-마당바위1-안부-798.3m봉-안부
마당바위2-안부-812.7m봉-깃대봉 갈림길(왕복)-깃대봉-조령성-안부-무명봉
산신각-조령약수-조령(문경새재)-연풍새재 공원-임산물 판매장 휴게소
쉼터2-쉼터1-만수사 입구-조령산 자연휴양림-고사리 마을
☞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연풍면 / 충주시 수안보면
년말이 가까이 오니 자꾸만 왠지 맘이 급해지는구나.
년초에 계획했던 것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니 말이다.
물론 산행도 마찬가지다...올해 마무리하기로한 20개의 지맥을 겨우 절반에
머물렀다...이유는 나홀로 산행을 하다보니 자꾸만 여름철이면 잡목의 저항에
슬슬 겁이나는 바람에 잠시 지맥길을 접고, 대간길에 집중하다보니 계획에 어긋났다.
이제 맥길의 잡풀이 조금씩 숨을 죽일것 같으니 지맥길에 나서야 해야겠다.
그러나 하다만 대간길도 마무리해야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 지...
10월부터 맥길을 다시 하려는데 모 안내 산악회에서 아주 가성비가 높은 가격으로
이화령으로 간다는 공지가 뜬다...물론 대간이 아닌 100대 명산팀인데 조령산과
주흘산을 찍는 팀이라는데, 이런 곳을 따라가서 이화령에서 문경새재까지
짧은 구간에 가성비 높은 교통요금으로 대간을 한 구간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청을 하고 탑승지인 신사역 5번 출구로 향한다.
07시에 신사역을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 죽전휴게소를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이화령으로 향하는데 고속도로 주변으로
짙은 박무가 잔뜩 끼여있어 오늘도 대간길의 멋진 선경을 보는걸 쉽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든다...잠시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한 후에 곧바로 연풍I.C를 빠져나와
이화령으로 향하는데, 운전기사가 초보인지 이화령 고개를 찾지못해 이화령
터널을 2번이나 왔다리 갔다리하면서 산꾼이 아닌 버스가 알바를 하는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20여분 늦게 들머리인 이화령 고개에 도착한다
이화령(梨花嶺:548m:10:05)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는데,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고개의 북동쪽에는 문경새재도립공원, 북쪽에는 월악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남서쪽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이 있는 곳으로 옛 문헌을 보면 이화령은
이화현(伊火峴),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1400년대에 작성된 고려지리사지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전하는 옛 기록물에는 계속해서
이화현(梨花峴)이나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서
굳어져가고 있다
문경지방에서는 예전에 “새재로 갈까, 이루리로 갈까” 하는 노랫말이 있었는데 길이 험해
혹 산짐승의 피해라도 입을까봐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고 해서 이우리재라고 붙혀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에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이곳 노인들은 이곳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며 현재 이화령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이화현은 언제 이 길이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문경새재보다
더 오래 되었지도 모른다...관음리쪽은 계립령(하늘재)이 주 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던 있었을 것이고 또 각서리(문경)에는 요광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6.25동란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새로 길을 닦았다고 하며,
이후에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이 고개 아랫쪽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 터널이 개통되면서 옛 명성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최근에는 드라이버 코스를 즐기는 차들과 라이더, 자전거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지명을 폐기하고 '이 우릿재'라는 전래 명칭을 되살렸다고 한다.
이화령은 고갯길 연변의 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당시 총독부에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며
한때는 조령과 구분하는 말로 '큰 새재'라고도 불렀다고 했는데, 문경 시청이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 우릿재'라는 전래 명칭을 되살렸다고 한다.
코로나라는 역병이 지난 3년간 민초들을 엄청나게 괴롭혔는데, 이제 조금씩 면역이
되었는지 아니면, 무감각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전과는 달리 이화령 고개 휴게소에는
등산객, 행락객, 잔차 마니아 등이 북적거리면서 이화령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남기려고
난리들이다...나야 저런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경지는 벗어나야 봤다고나 할까?
솟아오르는 백두대간이여 하나 되는 국토의 혈맥이여 / 이근배 시인
눈부시구나.
사시사철 꽃 피고 새 우는 금수강산
드높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산과 물 보듬고 어흥! 등뼈를 세우며
굽이굽이 치닫는 우리의 백두대간
저 철쭉, 산 벚꽃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뻐꾸기, 꾀꼬리, 멧비둘기 짝지어 나는구나.
그렇다
저 겨레의 성산 백두 천지로부터
금강, 설악, 태백, 소백, 죽령, 속리, 덕유
지리로 뻗어 내린
이 장엄한 국토의 혈맥을 타고
반만년 자랑스러운 역사를 들어 올리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어
오순도순 복되고 기름진 삶을 꾸려왔거니
흙 한줌 풀 한 포기인들 사랑으로 다독이며
만 대를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 여기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이화령 고갯길은
저 일제의 삽날로 끊어진지 오래
상처로 남았더니
이제 아픈 세월을 씻어내고
세계로 나아가는 더 큰 나라
인류의 멘토로 나서는 더 큰 겨레의
우렁찬 출정을 하는 백두대간의 첫걸음이다.
한반도의 젖줄 한강과 낙동이
여기서 두 갈래 길을 내고
동과 서, 남과 북을 경계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요새였던 이화령,
이 길을 넘어 문화와 물류가 오가고
역사의 고비마다 말발굽 소리와
포성은 지축을 흔들었으리라.
그러나 끊긴 이화령이 하나 되는 오늘
반가워라, 단군께서 오시고
주몽, 온조, 혁거세 잔을 드시니
백두, 묘향, 금강, 지리, 한라 덩실
춤을 추는구나
나라의 평화, 겨레의 자유와 복락
이화령에서 꽃으로 피어나리니
솟아오르는 백두대간이여
하나 되는 국토의 혈맥이여
통일의 새 아침을 향하여
우리 함께 날아오르자
새 역사의 탑을 쌓아올리자.
백두대간 이화령 구간 복원에 붙여 기공식 때 축시
이화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이화령 터널 북쪽의 연풍쪽의 모습
나와같이 버스를 타고온 명산팀의 40여명에다가, 다른 산악회에서 오신 2대의 버스에서
내려온 등산객들로 인해, 늘 홀로 다니는 나로서는 참으로 어색하다...이 분들이 산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휴게소에서의 등산객들이
많이 줄어든 다음에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0:20)
이화령 고개를 지나는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문경쪽으로 간 다음에 좌측에 있는
이화정이라는 팔각정을 바라보면서 대간길의 들머리로 들어선다
동물이동통로 옆에 있는 이화정이라는 팔각정과 조령산 등산 안내판
이화정에서 바라본 문경쪽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백두대간 마루금은 이화령 산불감시초소 뒷쪽으로 이어지는데 등로가
안 보이고, 직진으로 이어지는 조령산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일반 등산객들이 다니는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잠깐 가는데 대간의 마루금과는
너무나 많이 벗어난다.
조령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숲길로 치고 올라간다
잡풀을 헤치고 무작정 올라서니 군 방공호가 보이고...
군 시설물같은데 마치 스마트폰 충전짹같은 시설물도 보인다
드디어 대간 마루금으로 복귀하니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배진주강씨호금지묘(10:34)
진주강씨 묘지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혀서 가는데...
대간꾼들도 이곳을 잘 안 다니는지 서서히 등로가 희미해지기 시작하고,
대간꾼들의 시그널도 잘 안보인다
돌담을 올라서니 사용을 하지않는 폐헬기장이 나온다
폐헬기장(10:42)
폐헬기장을 지나면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등로에서 만난 누리장나무
짐승의 고기에서 나는 기름기 냄새를 누린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냄새를
싫어하여 고기를 요리할 때는 누린내를 줄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누리장나무는 이런 누린내가 나는데, 물론 동물의 누린내처럼 메스껍고 역겨운 것이 아니라
누린내 비슷한 냄새가 나기는 해도 사람들이 싫어할 정도는 아니다.
누리장나무가 한창 자라는 봄에서 여름까지는 이 나무 근처에만 가도 금방 누린내를 맡을 수 있으며,
잎을 찢어보면 냄새가 더 강하며, 북한 이름은 아예 누린내나무이고, 중국 이름은 냄새오동,
일본 이름은 냄새나무다. 하지만 꽃이 필 때는 향긋한 백합 향을 풍긴다.
오름길 좌.우로는 군 교통호가 보이고 잠시후에...
757.5m봉 정상에 있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757.5m봉(10:50)
757.5m봉 정상 헬기장에서 바라본 가야할 조령산의 모습
조령산이라는 산보다 조령고개로 이름이 더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령산...너의 의연함에 경의를 보낸다.
757.5m봉을 내려서면서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헬기장 주변에는 이런 문구들이 많이 보인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안부(11:00)
오늘 산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나는데 아마도 대간꾼은 아닌듯 싶다.
무명봉(11:08)
안부(11:09)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서니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향하는 일반 등산로와 합류하는 지점으로 내려선다
이화령 합류길(11:11)
이정표 (←이화령 1,090m, ↗이화령 1.200m, ↑조령산 1,680m)가 있는데
내가 걸어온 길은 백두대간 능선이라 일반 등산객들은 잘 다니지 않는 곳이고 우측으로
나 있는 편안한 등로는 조령산을 찾는 일반 등산객이나 100대 명산을 찾는 분들의 등로이다
이화령 합류길에서 조령산 방향으로 올라서니 폐타이어로 담장을 만든 폐헬기장이 나오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조령산 방향으로 향한다
잡풀지대로 변해버린 폐헬기장
이곳부터 조령산으로 가는 등로는 말그대로 완전히 고속도로이다
쉼터(11:22)
국가지점번호:라바48066297 조령산1지점, 충북괴산소방서 119 표지판이 서 있다
오늘이 벌써 10월 초하룻날이다...하는 것 없이 세월만 흘러가니 답답하구나.
그러나 어쩌랴 내 맘대로 안되는게 인생사인데...며칠 사이에 날씨는 완전히
가을 모드로 접어들었는지 꽤나 오름길을 걸었는데 땀은 흐르지 않는구나.
너덜길에서 만난 배초향
오름길은 직진 등로가 아닌 우측의 사면길로 산꾼을 인도하는구나.
문경시에서 설치한 편안한 길을 걷다보니...조령1관문에서 올라오는 흐릿한 등로와의 합류지점이 나온다
제1관문 갈림길(11:40)
이정표( ↑조령산 800m, ←이화령 2,080m)가 있고 좌측으로 오르니 조령샘이 나온다
국가지점번호:라바48356327 조령산2지점, 충북괴산소방서 119 표지판이 서 있다
조령샘(11:42)
물 한 바가지만 마시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조령샘.
조령 샘물에서 목을 추기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
.
.
.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조령산 조령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멋진 문구를 보면서 물한바가지 안 마신다는 건 샘에 대한 예의가 아니제...
그리 덥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지만 기꺼이 물 한바가지 마시고
조령산으로 향한다
갈림길(11:43)
이정표(←제1관문 3.530m, 이화령 2,110m, ↗조령산 770m)
조령산 오름길에서 만난 배초향(꽃말:향수)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에 분포한다.
풀 전체에서 강한 향기가 나는 방향성 식물로 한국 토종 허브로 알려져 있으며,
여름에 자주색 꽃을 피우고 가을에 씨앗이 익는데, 내한성이 좋고 볕이 잘 드는 자갈밭에서 잘 자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추어탕이나 생선매운탕 등의 비린내를 없애는 향신채로 많이 이용하는데,
이 향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음식 속의 배초향을 화장품 냄새로 느끼면서 꺼리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구토와 설사 증상에 약재로 사용한다.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서 오르막을 올라서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계속되는 데크목 계단의 오르막을 올라서니...
절골 삼거리가 나온다.
절골 삼거리에 있는 국가지점번호:라바48296354 조령산3지점, 충북괴산소방서 119 표지판
절골 삼거리(1,005m:11:58)
(이정표 ←절골 2,700m, →조령산 460m, ↓이화령 2,420m)와 119솔라 표시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대간길이 이어지는 조령산 방향이고, 좌측으로 2.700m 방향에 절골이라
표기가 되어 있는데 괴산군 연풍리에 있는 절골은 신풍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암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풍리(院豊里)는 작은 산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신혜원, 신풍, 절골 등이 있는데 신혜원은
조선조 시대의 원인 신혜원이 있든 곳이라 일찍부터 민가도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신풍은 조선조 중엽 이곳에 신풍역(新豊驛)이 설치 되면서 붙은 이름이며, 절골은 신풍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암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원풍이라는 명칭은 신혜원과
신풍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
보물로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있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의 암벽에 나란히
새겨진 2구의 고려시대 불상으로 이는 약 3.1m이며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있다.
절골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조령산 남봉이라 불리우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조령산 남봉(1,017m:12:00)
조령산을 갔다오시는 분들을 간간히 만나는데 나홀로 산행을 하던 습관탓인지 어색하다
잠시후에 오늘 산행중에 가장높은 조령산 정상에 도착한다
조령산(鳥嶺山:1,026.0m:12:10)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정상석과 조령산 안내판과, 이정표, 남쪽에는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故 지현옥님의 추모비목이 서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넘기 힘들다 하여 조령산이라고 하지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문경현(聞慶縣) 산천조에 조령은 속칭 초재(草岾)라 기록되어 있는데, 초(草)는 억새 등을
말하는 '새'이고 재(岾)는 우리가 만든 한자로서 음은 '재' 또는 '점'으로 초재는 '새재'이고,
우리말인 억새가 ‘새가 날아다니는 새'로 변해 조령이 되었다고 하는데, 약간의 억지스러운
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인증샷
故 지 현옥님의 추모비목(追慕碑木)
조령산 정상에는 청주 서원대학 산악부가 세운 여성 산악인
고 지현옥(1959~1999)을 기리는 추모 팻말이 있다.
1993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여성 산악인으로 1999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 길에
영원히 산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언젠가 모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차라리 견딜 만 했다……”
지금도 지현옥 하면 ‘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정작 그녀는 이런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을 듯하다.
그녀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운 인물로 각인되기를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침은 이 땅에서 기득권세력과 맞서 싸우려는 민중의 바램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령산 정상은 사방으로 두루 두루 공평한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지현옥이 쉬기에는 안성마춤인 것으로 보인다.
부디 편안하게 쉬시길...(자료인용)
故지 현옥님(1959~1999)
충남 논산 출신 여성 산악인으로 1998년 7월에 여성 최초로 파키스탄령 희말라야
가셔브롬 제2봉을 무산소 단독등정을 하였고 1999년 4월 세계에서10번째로 높은
희말라야 안나푸르나봉을 정복하고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산악을 배우고 훈련하였던 곳이 이곳 조령산이어서
지인들이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령산 정상에는 100대 명산의 인증샷을 남기고 점심상을 펼치는
등산객들이 많아서 홀로 다니는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가 영 어색하다
서둘러 조령산을 벗어나고픈 마음뿐이라 신선암봉으로 향한다
조령산을 내려서니 멋진 조망처가 나오고 이정표(↑신선암봉 1530m,
←조령산 150m,이화령 3060m.)가 있는 곳에서 범여의 발길이 멈춘다
조망처(12:13)
조망처에 올라서니 아침에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짙은 박무가 낀
모습은 전혀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오랫만에 만끽하는 一望無際이다.
조령산에서 신선암봉 가는 길이 설악산 공룡능선을 축소한 느낌이라 하여 미니 공룡능선이라 한다
오늘 구간은 어느 조망처 한 곳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루금의 연속이다.
보아도 보아도 지겹지 않은데, 비단 조망뿐만 아니고, 마루금 길 자체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으로 지나온 속리산, 청화산, 대야산, 악휘봉, 희양산을 거쳐
오늘 구간에 이르기까지 눈의 성찬(大飽眼福)은 지속적이고도 푸짐하다.
가야할 신선암봉과 그 너머로 신선봉, 마패봉 월악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게
장관을 이루고 있고 우측으로 주월산의 주봉과 영봉,부봉에서 6봉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은 설악산 못지 않는 멋진 조망을 연출하고 있다
내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고...
내가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준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 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조망봉에서 바라본 주흘산(主屹山:1,106m) 능선의 모습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위치한 문경의 진산으로서 고려 때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산이며, 북동쪽사면은 급사면이나 서쪽사면은 이보다 완만하며,
산록에는 846년(문성왕 8)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한 혜국사(惠國寺)가 있다.
또 서쪽 상초리에는 주흘산사(主屹山祠)가 있어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영남과 기호ㆍ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애사(哀史)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등로에서 내려다 본 오픈 세트장
한국방송공사(KBS)에서 고려시대 배경을 가진 사극을 촬영하기 위하여 만든 곳으로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이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세트장이라고 한다.
조망처에서 신산암봉으로 가가는 내리막길에는 계단을
만들어놔서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편하게 내려간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한없이 내려온 다음에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25)
가을인가보다...여름내내 기세 등등하던 녹음(綠陰)은 어느새 한풀 꺽이고
그 사이에 단풍옷으로 갈아입기 시작을 하는구나...그러는 사이에 또 한해가
지나갈 모양인가보다...장수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세월은 빠르게 흐르건만
가야할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범여의 발걸음은 자꾸만 더뎌지니 우짜면 좋겠노...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아찔한 급경사의 데크목 계단을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고...
암릉사이 우측 아래로 등로는 보이지 않지만 등산객들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마당바위 갈림길(12:28)
이정표(↑신선암봉 1300m, ↓조령산 380m, →마당바위 2400m)가 있는데 좌측 괴산쪽으로
상암사터가 있는 절골로 내려가는 곳으로는 등로가 잘 안보이고, 우측은 마당바위로
내려서는 곳도 시그널들이 걸려있긴 하나 등로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국가지점번호:라바48566419 조령산10지점, 충북괴산소방서 119 표지판과
조령산 등산 안내
여기서부터 제3관문 약 3.3km 까지는 암릉 구간이 많고 힘든 산행 구간이므로 체력이
약한 분은 마당바위로 하산하라는 팻말과 함께, 갈림길~마당바위~제1관문 하산 거리: 3.7km
소요시간: 1시간 40분라고 친절하게 표기가 되어 있는데 대간꾼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편안했던 내리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힘든 오르막이 있는게 산의 기본 철칙이 아니던가.
다시 신선암봉으로 향하는 힘든 오르막 여정이 시작된다
낙엽이 말한다 /노정혜
엊그제 청춘인데
낙엽이라
꿈도 사랑도 다 벗어라
무거운 짐도 싫고 경쟁도 싫다
마지막 소망은
가을바람에 아름답게 물들이고 싶다
가을이 막을 내리면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고 싶다
푹 쉬고 싶다
깊은 잠에 들고 싶다
깨우지 마라
눈뜬 세상보다
눈 감은 세상이 더 좋구나
예전에 이정표로 사용됐던 팻말이 떨어져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예전에 올랐던 947m봉은 오르지 않고...
문경도립공원(?)측에서 그랬는지 편하게 산행하라고 친절(?)하게 사면길을 만들어 놨다.
947m봉에서 계단에서 잠시후에 오를 신선암봉을 바라보면서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산다는게 별거있나 별거있나...神仙처럼 사는게 神仙이지
연풍면소재지 너머로 칠보산과 군자산, 주월산 등 괴산의 명산들이 시원스레 보인다
깍아지른듯한 능선의 사면으로 이어지는 데크목 계단
잠시후에 오를 신선암봉의 모습
과연 神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다갈만한 멋진 봉우리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무명봉을 휘감으면서 내려가는 가는 계단은 산꾼들에게는 땀을 흘려야만 하는
수고러움을 덜어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꾸만 대간꾼들에게 野性을 잃어 버리고
산꾼이 아닌 나약한 등산객으로 전락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조망바위(12:35)
천하의 地勢는 山川에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문경의 산천은
백두대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문경을 통과하는116km의 대간 줄기를 따라
수없이 뻗어내리는 천하 제일의 지세를 갖추고 있는 곳으로 1,000m 급 이상의 산만도
9개나 있고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중에 4개나 보유하고 있는 백두대간중에
가장 중요한 구간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 남한의 최북단인
진부령까지 이어지면서 통과하는 33개 시.군 지자체중 가장 거리가 긴 곳이 문경이다
대간 능선에서 마당바위 계곡으로 내려가는 골짜기의 모습
소위 100대 명산이라는 걸 하시는 분들은 조금전에 지나온 조령산을 찍고.
대간 능선을 따라가다가 안부에서 마당바위 계곡을 내려가서 앞에 보이는
주흘산을 찍으면 하루에 100대 명산 2곳을 인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흔히 말해 ‘누이좋고, 매부좋고, 임도보고 뽕도 따는 곳’이랄까...
데크목 계단이 끝나고...
로프가 처진 등로를 지나는데 마치 토끼벼리 등로를 지나는 느낌으로 아랫쪽은 천길 낭떠러지다
아기자기한 암릉길...나홀로 걷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무명봉을 휘감으면 급경사로 내려서니 절골 갈림길이 나온다.
절골갈림길(12:43)
절골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상암사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조령산 아래서 부터 이곳까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대부분 절골로 이어진다
이정표(→마당바위 2,200m, ↑신선암봉 920m, ←절골 2,300m, ↓조령산 760m)가
있는데 100대 명산 주흘산을 찍으려면 이곳에서 우측의 마당바위로 내려가야 한다
절골갈림길을 통과하여 통나무 계단을 따라서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예전의 이정표 안내판들은 아직까지 자기 밥값을 하는 중이다
무명봉(12:45~53)
산꾼들이 없는 호젓한 무명봉에서 점심 대용으로 가져온 꿀호떡 2개에다
두유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2017년 3차 대간길에서 없었던 데크목 계단들이 5년 사이에 많이 생겼구나.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2:55)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길
계단을 빡세게 오른 다음에 능선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889m봉으로 향한다.
예전엔 없었던 돌탑을 만나고...
나도 너를 닮아가는 중인가보다...불쟁이 딸(쑥부쟁이)과 범여는 同病相憐인가보다...
누가 뭐라던간에 대간길을 꿋꿋이 지키는 소나무
신선암봉이 많이 근접한 모양이다...암릉구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들을 뒤돌아 본다...설악산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름 멋진 암릉구간이 계속되는 멋진 대간 코스중의 하나가 이곳이 아닐까...
889m봉(13:05)
암릉구간을 통과하고...
신선암봉 능선에서 절골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오늘 널 만나서 반갑긴 해도 맘이 편치는 않구나.
갑자기 날씨가 많이 추워지니 너의 生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부(13:08)
예전에 올랐던 무명봉은 위험하니 패스하고 좌측의 사면길로 가라고 한다
암릉길도 좌측으로 내려간다...오늘 걸어야 할 대간길의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는 魔의 3.2km 구간으로 들어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신선암봉
잠깐 동안의 편안한 길
신선암봉 우측으로 보이는 멋진 암봉들
주흘산 영봉에서 가지를 쳐 부1봉에서 부6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환상적이다
암릉구간을 좌측으로 우회하니...
최근에 설치한듯한 계단을 따라서 신선암봉으로 향한다
浮石
神仙을 만나러 가는 길
칠보산과 군자산은 약간의 박무인지 아니면 똑닥이의 한계인지 그림이 흐릿하기만 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괴산군 연풍면 延豊面)의 모습
서쪽은 장안면(長延面), 북쪽은 충주시 수안보면(水安堡面)에 접하고, 동쪽과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 마성면(麻城面) . 가은읍(加恩邑)과 도계를 이루며 면 전체가
백두대간의 산릉에 속한 험준한 산지이고 문경시와의 접경지대에 조령산(鳥嶺山:1,017m)·
백화산(白華山:1,064m)·구왕봉(九王峰:898m)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는 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고도가 낮아지며, 연풍천(延豊川) 주변에 좁은 평지가
분포되어 있을 뿐이고 평야가 협소하여 쌀 생산량이 적은 데 반하여 농가의 부업으로 양잠이
활발하며 잎담배와 약용작물을 재배하고, 특산물로 연풍사과·청결고추가 생산되고 있다.
이화령(梨花嶺)을 넘는 국도가 면의 중앙을 관통하여 문경·괴산·충주 방면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문화재로는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槐山院豊里磨崖佛坐像:보물 97),
연풍 입석의 소나무(천연기념물 383),연풍향교(충북유형문화재 103), 연풍동헌(충북유형문화재 162),
연풍향청(延豊鄕廳:충북문화재자료 13), 연풍성지, 경저 효자각, 행촌리(杏村里) 열녀각, 행정(杏亭),
조령 삼관문(鳥嶺三關門), 원풍리 사지(寺址), 모선정(慕先亭) 등이 있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삶의 지혜에 혜안을 가진 소나무.
어찌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보다 훨씬 현명한 듯 싶다
집채만한 바위를 돌아서 올라간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아찔한 구간
로프를 부여잡고 올라서니...
암릉 정상에 올라서니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신선암봉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잠시후에 오를 신선암봉의 모습
숨바꼭질하듯...
암릉 구간을 빙빙 돌아서...
신선을 만나러 가는 중...
신선암봉 가는길에서 내려다 본 절골(상암사) 계곡
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여인의 乳頭처럼 토톰한 조령산과 지나온 능선이 장쾌하다
좌측으로는 문경새재 계곡 윗쪽으로는 주흘산 주봉, 그 뒷쪽으로는
2019년도에 걸었던 영강(신산경표상:운달)지맥길의 운달산도 시원스레 보인다
일곱가지 보물로 장엄되었다는 칠보산도 멋지기는 마찬가지
오늘은 생각보다 주변의 등로가 뚜렸하여 지금까지 본 것으로도
밥값은 한 느낌이다
신선을 만나기 위해서 통과하는 마지막 관문
신선암봉(神仙岩峰:937.4m:13:35)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암릉으로 형성된 봉우리로 예전에는
고사리봉, 할미봉, 온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속해있고,신선암봉
(神仙岩峰)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신선이 놀았다고 붙혀진 지명으로 괴산의 명산 35곳중에 하나이다
인증샷
신선암봉 정상에 도착하니 대간꾼인지 일반 등산객인지는 몰라도
20여명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기에 얼른 사진 한장만 찍고
서둘러 정상을 빠져 나간다.
정상을 지나니 좌측으로 한섬지기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은 신선암봉 정상
국가지점번호:라바48586529,조령산 6지점, 괴산 소방서 119 팻말과
이정표(↑깃대봉 3.6km, ↓조령산 1.6km, ↖한섬 지기 3.6km. 신풍리(절골) 4.5km)가 있다.
대간길은 등로가 보이지 않는 직진으로 이어져야 하며, 한섬지기로 내려가는 등로가
뚜렸하여 독도에 조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의 지명유래는 수옥폭포 서남쪽에 있는 곳으로 앞 들의
면적이 한섬지기(20두락)라 해서 붙혀진 마을 이름이란다
신선암봉에서 직진으로 향한다
저 멀리 월악산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고
대간은 이토록 아름답다.
대간은 이처럼 신비롭다.
대간이 가져다주는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우리는 일생동안 과연 몇 번이나 감상할 수 있을까.
임제선사의 한 구절
卽時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지 다른 날을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다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을 오늘 이 구간에 대입해도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절하다고 우기고 싶다. 이래서 대간을 하게 되면 ‘이 땅에 반하고
이 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가 보다.
*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중국 禪宗의 한 갈래인 임제종(臨濟宗)의 창시자로, 법명은 의현(義玄),시호(諡號,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혜조선사(慧照禪師)로 당나라 때의 승려로 속세의 성은 형(邢)이다.
황벽선사(黃檗希運)의 법을 전해 받아 854년부터 임제원(臨濟院)의 주지를 지냈다
그러므로 의현이 일으킨 종파를 임제종(臨濟宗)이라고 하며, 또 임제종의 창시자인 만큼
임제의현(臨濟義玄), 임제 스님, 임제 선사로도 불린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 몽둥이를 쓴 덕산(德山)과 쌍벽을 이루어, “덕산의 방망이,
임제의 고함(德山棒 臨濟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고함이 너무 유명해져서 제자들까지 너나없이 고함을 흉내내자 그 중 하나를 불러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마자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면 어느 쪽이 부처냐고 묻고는 제자가 대답을 못해
우물쭈물하자 바로 오리지널(...) 고함을 질러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隨處作主(수처작주):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立處皆眞(입처개진): 그러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蓬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며(蓬祖殺祖),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蓬羅漢殺羅漢),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
(蓬父母殺父母) 비로소 해탈할 것이다”라는 법문이 유명하다
신선암봉에서 쭈구리바위 갈림길의 급경사 내리막길도 5년전에
공사를 하더니만 이제는 편하게 내려가는데 엄청 급경사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山河에도 슬픈 역사는 늘 따라 다니기 마련인가 보다.
앞에 보이는 주흘산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잠시 피해, 행재(行在)하여
국은(國恩)을 입었다고 하여 범흥사에서 혜국사로 바꾼 절집이 있고, 문경이란 지명도
공민왕이 피난 중에 난이 빨리 평정되지 않자 인근을 순행하던 중 문경에서 홍건적의 난을
물리쳤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하여 경사 경(慶)자에 들을 문(聞)자를 써
문경(聞慶)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뭐라해도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장군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오늘 구간 북서사면으로 물줄기가 만들어지고 이 물줄기는 달천을 이루어 충주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곳으로 달천은 역사적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임금 선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달천에서 배수의 진을 쳤지만 결과는 대참패.
많은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적절히 방어할 수 있는 조령을 버리고 달천의 탄금대에서
방어진을 친 신립의 결정은 단시일내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왜군이 한반도 전역을 강탈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신립은 무능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신립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신립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한 전설이 난무한다.
왜군과 싸우기 전날 꿈에 한 처녀가 나타나 탄금대의 배수진을
주장했고 신립은 이를 따라 시행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전장에서의 대장이 한낱 꿈 속의 여인을 말을 믿고 따랐다고 하니 어리석어도
이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말인즉 죽은 신립을 죽이고 또 죽인 셈이다.
오늘은 신립을 한번 정도는 살려보고 싶다.
이미 여러 번 죽은 신립이니 한번 정도는 살린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게다.
임란 당시 신립도 조령과 연결되는 마루금에 서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 땅을 보고
감탄했을 터인즉...우리 땅이야 시간을 초월하여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을 터이니 말이다.
어쩌면 신립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과 싸우면 아름다운 대간이 손상될 위험이 있으니 그럴 바에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신립은 산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신립을 한 번 정도는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대간은 이처럼 역사도 익살스럽게 재해석해 볼 수 있는 여유도 주니 정겹기 그지없다.
예전에 2차 남진을 할 당시에는 참으로 개고생을 많이 했던 구간이었지만
그때는 무지막지하게 산행을 했고, 자신만만했었는데 이제는 모든게
겁이나고 자신이 없으니 이젠 범여도 베낭을 내려놓을때가 되었나보다.
잠시후에 오를 928m봉도 그리만만하지는 않는 곳이다
데크목 계단에서 오늘 걸어야 할 遠景을 바라본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암릉(깃대봉) 뒷쪽으로는 마패봉~신선봉~연어봉으로
이어지는 달천(신산경표상:신선)지맥 능선이 뚜렸하고, 그 뒷쪽으론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도 뚜렸하게 보인다
안부(13:45)
안부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예전의 대간길 흔적이 보인다
지금 내가 내려온 계단길은 대간 능선에서 살짝 벗어난 셈이다
원 대간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능선에는 국가지점번호:라바48796538:신선암봉 7지점:충북괴산소방서 119팻말이 있다
쭈구리바위 갈림길(13:50)
쭈구리 바위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2km정도 가면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만큼 큰 쭈구리가 살고 있었는데
바위에 앉으면 물 속의 쭈구리가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젊은 아가씨나 새댁이 지나가면 이 놈이 희롱까지 하였다고 한다.
문경시에서 설치한 이정표(→문경새재(꾸구리 바위) 2km, ↑제3관문 3.4km(암릉 구간 1.2km)
→이화령 4.9km, 조령산 2km, 신선암봉 0.3km)가 있고, 쭈구리 바위 방면 등산로는
금줄이 쳐져 있다.
이곳에는 문경시에서 설치한 이정표와 괴산군에서 설치한 산뜻한 새 이정표,
그리고 완전히 망가진 이정표 등 新.舊의 이정표가 아주 혼선을 주는 곳이다
괴산군에 설치한 이정표(→깃대봉 3.2km, ←신선암봉 0.3km, ↑한섬지기 4.0km)가 있다
쭈구리바위 갈림길에서 올라서니 또다시 데크목 계단이 시작된다
뒤돌아본 신선암봉의 모습
먹은것이 별로라서 그런지 초반부터 슬슬 체력 저하가 시작된다
계단을 지나고 능선에 올라선다.
암봉(14:02)
등로에서 바라본 문경시내의 모습
초장은, 바위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을 뜻하고, 중장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지내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종장에서는 인간이 결코 최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의 영구적모습에서 초연(超然)하고 달관한 군자의 모습을 보여 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인간중심 사고에서의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수백년 전에 예견하고 있다 하겠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 바위가 유난히도 두드러지는 오늘 대간의 훈계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주흘산 능선의 모습
주흘산의 모습이 고깔, 즉 옛 사람들이 머리에 쓰던 모자를 닮았다는데서
연유한다고 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할 당시 매일
주흘산 아래에서 청운의 꿈을 꾸기도 했던 산이다.
주흘산의 유래를 보면 ‘조선이 개국하면서, 나랏님(이성계)이 전국의 산들에게 영을
내리면서 나라의 주산(主山)이 될 산을 뽑는다며 전국의 산들을 한양으로 불렀다.
늦게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흘산은 가는 도중에 이미 삼각산(북한산)이 주산으로
정해졌다는 소리를 듣고는 발길을 되돌렸는데, 이곳 문경새재 주변의 모습이 너무 좋아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는 설이 있다.
암릉 구간이지만 잠깐 사이에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대간길을 걷는데
2급 보호종으로 불리는 꼬리털진달래들이 간간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 때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다.’고 산의 유래에 대해서 적고 있기도 하다.
또 하나는 주흘산이 한양을 돌아서 앉은 이유에 대해서이다.
어떤 이는 한양을 등진 이유가 삼각산이 주산으로 뽑힌데 대해 삐쳐서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주흘산은 이미 삼각산이 조선의 주산(主山)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웠지만,
비록 나라의 주산은 되지 못하더라도 남쪽의 적을 막아 나라를 지키는 산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새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한양을 등지고 돌아앉아 천혜의
군사적 요새가 되기로 한 것이다...영남대로인 문경과 한양 사이에 이와 같이 적을 방어할
만한 산이 없음은 공지(公知)의 사실이다.
암릉구간의 곳곳에도 이렇게 편안한 길을 만들어 놨다.
잠시후에 오를 928m봉의 모습
대간길에서 또다른 신선봉을 바라본다.
심산유곡(深山幽谷: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인 문경과 괴산의 경계 능선인
이 길은 신선들이 遊戱를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라 그런지 신선암, 신선암봉,
신선봉 등의 지명들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
앞에 우뚝솟은 저 봉우리도 신선봉으로 신산경표상에 표기된 신선지맥의
주봉이다(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석문 동 지맥이라 부른다)
백두대간 마패봉에서 분기하여, 신선봉~연어봉~소조령~탁사등봉으로 이어지는데
지난해 겨울에 수헌아우와 같이 걸어면서 참으로 힘이 들었던 지맥길이라서
더욱 더 가슴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안부(09:20)
좌측으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예전에는 안부 아래로 뚝 떨어졌었는데 지금은 편하게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 우측 아랫쪽은 천길 낭떠리지인데 이곳을 통과하여 올라서니 치마바위봉이 나온다
치마바위봉(923m:14:12)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대상이자 교감의 대상이었다.
심미적 대상을 넘어 자연과 교감했던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포함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道가 구현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단지 마주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가지는 유기체로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 가운데에는 ‘바위’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옛날의 많은 현인들은 바위를 찬미하곤 했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 五友歌에 나오는 바위 구절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바위를 인간과 평등한 관계로 보는 데에는
蘆溪 박인로의 立巖別曲(입암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無情(무정)히 서있는 바위 有情(유정)하여 보이는구나
最靈吾人(최령오인)도 直立不倚(직립불의) 어렵거늘
萬古(만고)에 곧게 선 얼굴이 고칠 적이 없구나
928m봉(14:15)
928m봉에서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조령산이
뾰족하게 위엄을 보이고 있고, 좌측으로는 이화령 고개에서 남진하는 조봉과
황학산, 백화산...그리고 대간길에서 벗어난 뇌정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대야산과 그너머로 이어지는 청화산과 속리산군 능선들이 아련하다
등로에서 만난 쉬크석 영감탱이 흔적
928m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는데 오늘 산행중에
가장 위험한 곳으로 긴장의 끈을 절대 놓으면 안되는 곳이기도 한다
암릉구간으로 내려가니 부산에서 오셨다는 대간팀들이 지나가고 있다.
여성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상당히 지체가 많이되는 느낌이다
힘든 구간을 먼저 지나신 분들이 주위의 멋진 선경을 스마트폰에 담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계속되는 암릉구간이라 이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지나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문경새재 제1관문쪽의 모습과 주흘산 주봉
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던 곳으로 문경읍을 감싸고 있는 문경의 진산으로
주흘산 최고봉은 1106m의 영봉 이다.
하지만 주봉은 영봉보다 낮은 1,076m인데 이곳이 주봉(主峰)이 된것은 산세가 막 비상하려는
학의 모양인데 이곳 주봉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 이라고 하며, 또한 주흘산에서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은데 그래서 높이에 상관없이 이곳을 주봉으로 삼았다고 한다
쉼터(14:25)
쉼터에 있는 신선암봉 13지점 표지판
암릉구간을 지나면서...
잠시후에 오를 799m봉을 바라본다.
등산로 위험 안내문이 보이는데, 안전사고가 많이 나는 곳인 모양이다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암릉구간을 올라간다
우측 계곡으로 조령1관문에서 문경새재에 있는 조령3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이고 예전에 방영됐던 KBS 드라마 왕건의 세트장이 보인다
암릉구간을 통과한 다음에...
미끄러운 등로를 로프에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안부(14:44)
잠시후에 오를 799m봉이 까칠하게 보인다
안부 좌측 아래로는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로 내려가는
길이나 지금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등로가 거의 보이지가 않는구나
위험한 지역이라 그런지 이런 표지판이 많이 보인다
799m봉(14:46)
799m봉을 넘지 못하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로프를 부여잡고 오르막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우회...
지나온 799m봉을 뒤돌아 본다...아직까지 위험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여 긴장을 풀지 못한다
좌측으로 내려서면서...
가야할 무명봉을 바라본다.
무명봉(14:52)
위험존이라 그런지 등로를 많이 돌려놨다.
암릉구간을 내려선 다음에...
아랫쪽으로 내려선 다음에...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안부(14;55)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우측에서 내려오는 길이 예전에 걸었던 대간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암릉구간
무명봉(14:58)
다시 암릉구간의 급경사 내리막길
멋진 갈참나무 아래로 내려서니 선바위 갈림길이 나온다
선바위 갈림길(15:00)
선바위(立石)의 모습
선바위에 매달려 있는 로프를 부여잡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02)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5년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앞쪽에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깃대봉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마패봉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계속해서 범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패봉 뒷쪽으로는 월악산의 영봉이 범여의 눈을 호강시켜 주는구나.
우측으로는 주흘산 부1봉에서 6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그 뒷쪽으로는 포암산,
문수봉, 월악산 줄기,좌측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와 인연이 있는 마패봉이다.
늦둥이 미역취
이젠 오늘 산행의 위험지역인 암릉구간을 완전히 벗어났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1,108.4m)을 보면 문경의 지명은 이 주흘산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주흘산은 영남에서 서울 가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영남의 제일비경지인 진남교반의 고모산성을 돌아서면 우뚝하게 솟아나있다.
맵시 있는 여자 같기도 하고,절세미인이 단장을 하고 앉은 듯 단정한 산으로
좌우대칭이 어우러져 있고, 내리 뻗은 품세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산 모양이 정자관(程子冠)처럼 생긴 것도 문경의 지명 생성(生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자관은 모자인데, 모자를 옛 우리말로는 ‘고깔’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 했다.
우리 말 ‘고깔’의 이두 식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했는데, 이 역시 주흘산의 생긴 모습이 정자관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제2관문 갈림길(15:05)
현 위치: 문경새재 제2관문 갈림길의 표시 이정표( ←제3관문 2.2km, ↖제2관문 1.8km,
→이화령 6.1km, 조령산 3.2km, 신선암봉 1.5km(암릉 구간 1.2km)가 있는데 대간길은 좌측의
내리막길로 뚝 떨어져야 한다
제2관문이라 불리는 조곡관(鳥谷關)의 모습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곡관(鳥谷關)’ 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
이라고 하며, 문경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중 1594년(선조 27) 신충원에 의해 가장 먼저 축성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관방을 설치할 때 주흘관(草谷城)과 조령관(鳥嶺城)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옛 성을 개축하여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계속 내려간 다음에 우측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마당바위1(15:10)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
월악산 영봉을 똑딱이로 당겨본다...홀라당 벗은 여인의 요염함을 보는 듯 하다
마당바위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예전엔 없었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잠시후에 오를 798.3m봉을 바라보면서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15:19)
안부에서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서니
국가지점번호:라바49546672:신선암봉 10지점 팻말이 있는
족보가 있는 798.3m봉 정상에 도착한다
798.3m봉(15:23)
신선암봉의 암릉 구간을 지나면서 긴장됐던게 풀리는 지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안부(15:24)
집채보다도 더 큰 바위를 지나니 조망이 뛰어난 2번째 마당바위를 만난다
마당바위2(15:28)
오늘 산행을 시작하면서 조령산 정상부터 문경새재가 거의 도착할 즈음까지
같이하는 주흘산 정상의 모습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내리막으로 향한다
안부를 지나서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내리막길
안부(15:38)
812.7m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갑자기 나타난 데크목 계단
주흘산과 부1봉에서 부6봉의 능선은 오늘 따라서 빼어난 관능미를 자랑한다
데크목 계단을 오르면서 당겨본 포암산의 모습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4등 삼각점이 있는 812.7m봉 정상에 도착한다
812.7m봉(15:50)
812.7m봉 정상 삼각점(△402재설 / 1978.9 건설부)
812.7m봉 정상을 내려서 1분만에 깃대봉 갈림길이 나온다.
깃대봉 갈림길(15:51)
깃대봉 갈림길에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지고 깃대봉으로 향한다
깃대봉 오름길에 내가 오늘 걸었던 능선들을 뒤돌아 본다
깃대봉(835m:15:56)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위치한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구조이정 표지판과, 이정표(←한섬지기 3.6km, →조령 3관문 0.9km,
신선암봉 3.5km), 정상석이 있는 괴산 35명산중에 하나로 봉우리 아래에는 치마바위가 있고
능선으로 넘어가면 조령산 휴양림이 나오며 치마바위골로 내려가면 원풍리 한섬지기가
나오는 봉우리다.
지명의 유래는 깃대처럼 뾰족하다 하여 깃대봉이라 불리는데,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듯한 모양이라 치마 바위봉으로도 불린다.
인증샷
괴산 35산이란
1, 가령산, 2, 갈모봉, 3, 구왕봉, 4, 군자산, 5, 금단산, 6, 깃대봉, 7, 낙영산, 8, 남군자산
9, 대야산, 10, 덕가산, 11, 도명산, 12, 마분봉, 13, 마역봉, 14, 막장봉,15, 박달산
16, 백악산, 17, 백화산, 18, 보광산, 19, 보배산, 20, 성불산, 21, 시루봉, 22, 신선봉
23, 신선암봉, 24, 아가봉, 25, 악휘봉, 26, 옥녀봉, 27, 이만봉, 28, 조령산, 29, 조봉산
30, 조항산, 31, 주월산, 32, 중대봉, 33, 청화산, 34, 칠보산, 35, 희양산
다시 깃대봉 갈림길(16:00)
현위치:깃대봉 입구 갈림길:이정표(←제3관문 1.0km, →깃대봉 0.3km, ↗조령산)와
국가지점번호:라바49386761 문경시 팻말이 있다
편안한 길을 따라서 문경새재 방향으로 향한다
이런곳은 위험지역이 아니라 계단이 전혀 불필요한 곳인데도
뭘 지랄인지...세금을 막 쓰고...나라꼴이 걱정이다
내년 여름에 걸어볼 생각인 포암산과 대미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계단을 내려서니 조령성이 눈 앞에 나타난다
조령성(鳥嶺城:16:05)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새재 정상 마안부에 위치한다.
선조 초에 쌓고 1708년(숙종 34)에 중창하였으며 ‘영성’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리며,1907년 훼손되어 홍예문 일부와 석축만 남은 것을 1975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곳은 북쪽의 마패봉과 남쪽의 깃대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마주보며 소멸하는 고개마루로
앞쪽(충북 괴산군 연풍면)은 비교적 좁은 계곡부이고 뒤쪽(경북 문경시 문경읍)은 넓고 편평한 편이다
임진왜란중에 영의정이었던 유 성룡의 제안에 의해 선조27년(1596)~30년(1600)에
축조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 많이 붕괴되었으며 숙종 10년(1684년)에 이르러
조령의 설관 문제가 논의되어 숙종 35년(1709년)에 조령산성이 축조되면서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혹은 조동문), 제3관문(조령관)을 설치하였다.
제1관문 양쪽에 뻗은 성이 초곡성이고 제2관문 성은 중성 제3관문인 이곳이 조령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안부(16:06)
조령산성 끄트머리의 안부에 있는 낡은 이정표
이정표( ←조령 3관문 0.8km, →깃대봉 0.42km)를
지나서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무명봉으로 올라간다
이런 계단이면 충분한 곳에 데크목을 왜 설치했는지 도데체 이해가 안된다
무명봉(16:10)
문경새재 가는 길
음악소리와 사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걸로 봐서는 문경새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
조령 산신각(山神閣:16:15)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산신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 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었다.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들이라"라고 호통을 쳤다.
군사 100인이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으며, 이후 새재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조령 약수(鳥嶺藥水)
산신각 아래에는 조령약수(鳥嶺藥水)가 있는데 조선 숙종34년(1708년) 조령성 축성시
새재정상(650m)에서 발견된 약수는 과거급제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해소 시켜주는 유명한 약수터로 사시사철 물이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약수를 즐겨 마시면
장수하는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한다
문경새재(650m:16:17)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고개로 조령(鳥嶺)이라
부르며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 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울창한 고개로서
새들도 쉬었다가 넘었다는 고개 정상에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館)이 산꾼을 반긴다
경상도 문경에서 새재로 오르는 길에는 조선시대에 나그네의 숙소였던
‘원터’와 조선조 산불을 막기위해 세워진‘산불됴심’ 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넘나드는 유서깊은 길이였다.
추풍령을 넘어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 하여
금기가 있지만 새재를 넘으면 장원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아주 중요한 고개로
사회 전반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중앙집권제를 실시한 조선왕조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X자형으로 9개
대로를 국도로 설치하였으며 그 중에 제4로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천혜의 요새였던 문경새재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상주를 치고 거침없이
문경새재로 넘어온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넘은 다음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카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 같은 연유로 약 6.5km 거리에 이르는 협곡 중간에 1594년 제2관문이
조곡관을 세우고 훗날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이곳을 세웠다.
여지도의 모습
조령산성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북쪽의 마패봉(925m), 동쪽의 부봉(917m), 주흘산(1075m), 서쪽의 깃대봉(812.5m),
조령산(1,026m)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곽은 3곳에 위치한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고, 각각의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평지성, 평지성과
연결되어 좌·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 아래에는 모두 홍예문을 두었고, 평지성은 매끈하게 다듬은 입방체형 석재나 면과 모서리를
다듬은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산성은 20~60㎝ 내외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으며,
문루의 명칭은 1·2·3관문에 걸려있는 현판에 따라 각각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라 하고, 산성의
명칭은 초곡성, 중성, 조령성이라 하겠다. 산성의 규모는 초곡성(草谷城) 2,270m, 중성(中城) 40m,
조령성 899m 정도 이다. 이 외에 북암문과 동암문에도 각각 333m, 750m 정도의 성벽이 있다.
부대시설로는 동암문, 북암문, 포루, 우물터 등이 있다.
그런데 문경새재와 관련된 각종 고지도에는 이외에 동창, 산창 등이 표기되어 있고,
최영준은 1관문 뒤에 조령관, 별장영, 산창, 병영, 무기고, 마당 등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놓았다.
이것은 곧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위치했던 곳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로 인해 옛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조령산성모습.
주흘관이 하문, 조곡관이 중문, 조령관이 상문으로 표시되어 있고,북암문, 동암문도 표시되어있다.
문경 쪽 현판에는'嶺南第三關'이라 표기를 해놨고...
괴산 쪽에는'鳥嶺關'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의 경계에 소재한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5백여 년간 문경새재를 넘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중에는 입신양면을 꿈꾸는 청춘도 있고, 거상을 꿈꾸며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들도 있었을 것이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을 넘으면 보름, 죽령을 넘으면 열엿새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열나흘 정도면 너끈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지름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 미끄러지듯 낙방한다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문경새재는 거리가 짧은 만큼 길이 험하고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鳥嶺)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다른 뜻으로 백두대간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란
의미도 포함된 고개로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는 설도 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이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에 선정된 길이란다
조령 3관문 들어서는 입구에 문경 관문(聞慶關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경새재는 전 구간이 흙길로서 우리나라의 부흥시킨 故 박정희 대통령하면 수식어로
따라 붙는데 박 대통령께서 이곳만은 시멘트 포장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 옆으로는 계곡과 수로가 있어 언제든지 손발을 닦을 수 있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거진 숲도 걷는 재미에 한몫을 한다.
이처럼 수려한 자연경관 덕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그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選'과 명승32호로도 지정됐다.
낮은 물론이고 늦은 밤에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운치 있는 풍경이다. 문경새재는 제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으로 이어지며, 전체 길이는 6.5km. 일정이 빠듯하다면
1관문이나 2관문까지만 걸어도 좋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생태전시관, 사계절썰매장, 새재스머프마을,
옛길박물관 등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옛길박물관은 과거길,
여행길 등 조선시대 길과 얽힌 문화를 재조명해놓았다.
1708년에 축성된 제1관문 주흘관을 지나면 왼편에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이 나온다.
'태조왕건', '대조영', '대왕세종' 등 내로라하는 사극은 죄다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운이 좋으면 실제 촬영 장면을 볼 수도 있다.
문경에서 괴산쪽으로 넘어오니 우리가 알고있는 문경새재가 아니라
연풍새재라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延豐鳥嶺亭이란 쉼터도 보이고 동그란 지구
모양에 한반도 지도가 파여있는 조형물, 백두대간 조령의 비 하단에는 검은색
烏石에다가 조령의 유래를 새겨놨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新) 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 대로
(嶺南大路)라 불렸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연풍새재 공원(16:25)
연풍새재 공원 입구의 표시 안내석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秋風嶺)과 북쪽의 죽령(竹嶺), 그리고
가운데 새재(鳥嶺)가 있었는데 영남선비들은 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禁忌)가 있어 영남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대간길을 끝내고 고사리 주차장으로 가는 길
임산물 판매장 휴게소(16:35)
좌측으로 내려가면 조령산 휴양림 아래에 있는 백두대간 생태 교육장으로 가는 길이다
제2쉼터(16:38)
이 길은 연풍새재길이다...같은 길이건만 흔히들 알고있는 문경새재길이 아니다.
아마도 이곳이 행정구역상 괴산군 연풍면이라 문경새재로 불리웠던게 껄끄러운 모양이다.
정영방(鄭榮邦:1577년 ~ 165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으로 고조부는 홍문관 응교 정환(鄭渙), 증조부는 생원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 생부는 정식(鄭湜), 생모는 안동 권씨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양부는 정조(鄭澡)이며 양모(養母)는 진성 이씨이며, 부인은 전주 유씨로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된
유복기(柳復起)의 딸이다。
제1쉼터(16:41)
만수사 입구(16:43)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 직전에 만난 좋은 글귀들...
조령산 휴양림 입구(16:43)
우측으로 신선봉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인다
고사리 마을(16:50)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고사리 마을의 유래는 조선시대 충청도로 접어드는 영남대로의
첫 숙박지 신혜원(新惠院)이 있었던 마을로 17~18세기에는 주막만 100여 가구가 될 정도로 많았으나
광복 후에 자취를 감추었으며 조령 3관문을 지나 2km쯤 밑에 있는 고사리는 새재 7~8부 능선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날에 제1관 문과 대안보에 역촌이 있었는데 상놈이 많다며 양반들이
두 곳을 피해 '고 사이에서 잠을 자고 가자.'라고 하면서 '고사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라고 전한다.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식당앞 평상에 앉아 베낭을 정리하면서 쥔장 어르신에게
서울을 가려고 하려는데 수안보나 연풍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 보는데 지금은 버스가
다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베낭에 남은 간식으로 허기를 면하고, 쥔장이 파는 더덕
10,000원어치는 사니까...금방 태도가 달라진다
바로앞에 있는 수도에서 씻으라고 하면서 친절을 베푼다.
이곳에서 연풍이나, 수안보까지는 각 20리정도로 거리는 비슷하다고 한다.
택시를 불러 주겠다고 하면서 연풍 택시를 불러주는데 바쁘다고 하면서
40분정도 걸린다고 하여 포기를 하고, 수안보 택시를 호출하려는데
50대 연배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어디 가시냐고 한다.
서울을 가려고 하는데, 수안보나 연풍쪽으로 가려는데 택시가 없다고 하니까
‘어르신! 수안보쪽으로 가는데 태워 드릴께요’ 하는게 아닌가...서둘러 베낭을
정리하고 차에 올라 수안보로 향한다...버스정류소에 내려주고 가시는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전에 저만치 충주가는 버스가 들어오고 있다.
수안보 정류장(17:40)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충주행 버스...이곳에는 매표원이 없어서 자판기로
표를 예매하는데 기사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후에 표를 예매하여
충주행 버스에 오른다.
수안보발 → 동서울행 버스표
충주터미널(18:10)
충주터미널에 도착하니 오늘은 서울가는 버스표가 많다.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할 겸 좀 늦은 시간대의 표를 예매하고 터미널 내에 있는
식당에 들려서 따끈한 육계장칼국수로 저녁을 해결하고 18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9시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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